133화
정말로 죽은 듯이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시야는 캄캄했다. 굳게 닫힌 눈꺼풀은 한껏 무겁게만 느껴져 뜰 수가 없었다. 게다가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괴롭지 않았다. 되레 목을 졸리던 때보다 편안하기만 했다. 이게… 죽은 건가? 정말로?
디링-.
어둠 속에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가사 상태에 진입합니다.」
……가사 상태?
「System: ‘가사 상태’는 안전이 확보되면 자동으로 해제됩니다.」
아니, 진짜 가사 상태라고?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그거? 이 미친 시스템아. 그러니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죽는 것뿐이다. 이 말이야? 그런 건 미리 말해 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씹… 미친… 미친… 이걸 어떻게 해야….”
가까운 곳에서 망연자실한 윤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태현은 잠시 곁에서 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로 한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스럭거리는데, 당최 뭘 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리고 얼마 뒤, 몇 명의 발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이내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뭐야?”
듣자 하니 윤태현이 이야기한 ‘약속’과 관련한 사람 같았다. 두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혀를 찼다. 이어 저들끼리 떠들어 대던 두 남자는 곧 윤태현에게 말했다.
“뭐, 당신이 알아서 해. 이젠 우리랑 관련 없는 일이 됐으니.”
“못 본 척해 준 것만으로 고마워하는 게 좋을 거다.”
윤태현은 그들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제 성을 못 이기고 사람을 죽였으니 제정신이 아닐 것은 분명했다. 하여간에 사람이 죽은 걸 보고도 침착한 저들이 뭐 하는 인간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낯선 이들이 떠나자, 창고엔 또다시 윤태현과 나 둘만이 남았다.
“젠장, 젠장… 어쩔 수 없었어.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윤태현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곧, 몸이 둥실 떠올랐다. 윤태현이 나를 들쳐 멘 모양이었다. …잠깐만, 이 자식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미친 자식이 할 만한 짓이 뭐가 있지?
자수하거나 구급차를 부른다는 선택지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다. 윤태현은 이런 상황에서도 제 생각뿐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 일을 조용히 넘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역시….
‘은폐하려 들겠지.’
가사 상태는 안전이 확보되면 해제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에, 이 자식이 조현우의 몸을 매장하려 든다거나 하면…? 도저히 안전한 상황이 찾아오질 않는다면? 그때가 되어선 나는 정신은 깨어 있는 채로, 조현우의 몸에 갇히게 되는 건가?
“망할. 어디에… 어떻게….”
윤태현은 아까부터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곧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불길한 상상이 끊이질 않았다. 속으로 몇 번인가 시스템을 불러 보았지만, 익숙한 시스템 창만이 어둠 속에서 떠오를 뿐 다른 변화는 없었다.
막막함에 울고 싶어질 무렵, 윤태현이 불안정한 걸음을 멈췄다. 어쩐 일인지 공기가 묵직했다. 다른 이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윤태현은 손을 떨고 있었다. 이내 헛숨을 삼키며 말했다.
“……한우주.”
뭐?
한우주?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내려놔.”
무겁게 잠긴 목소리가 떨어졌다. 정말로 한우주의 목소리였다. 윤태현이 뻔뻔하게 웃었다.
“…기절한 걸 도와주고 있을 뿐이란다. 그보다, 이 밤에 이런 곳엔 어쩐 일로 온 거니?”
“내려놓으라고 했어.”
매서운 말투에서 위협의 뜻이 확연히 드러났다. 나는 걱정이 앞서 머릿속이 진창이 되었다. 정말로,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날 찾아다닌 건가? 설마 바보같이 혼자 온 건 아니겠지. 윤태현이 미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겁도 없이.
아니야. 한우주가 누군데. 똑똑한 녀석이 홀몸으로 계획도 없이 찾아왔을 리 없다. 분명 그럴 터인데 이상하게 나는 점점 더 초조해지기만 했다.
“하하… 하하하….”
윤태현이 실성하여 웃었다.
“이게 다 너희 때문이잖니. 응? 나는 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려 했을 뿐이야. 거기에 웬, 부자가 쌍으로 협박을 해 대는 통에….”
턱-.
몸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한우주가 내게 다급히 다가왔다. 마음 같아선 오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으니까.
“태원아?”
한우주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몇 번이고 대답하려 노력해 봤지만, 되지 않았다.
“안태원. 태원아.”
한우주가 서서히 식어 가는 나의 손을 잡고 몇 번이고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그럴수록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결국 시스템에게 요구했다.
‘지금 깨워 줘. 제발.’
「System: 아직 당신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안전이고 뭐고 이제 됐으니까!’
한우주가 정신이 팔린 사이 윤태현이 또 무슨 일이라도 벌이면 어쩔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윤태현이 말했다.
“내가 뭘 어째야 했니. 망할, 현우도. 현우도 말이야. 참 문제라니까. 얌전하게 굴었으면 이딴 일, 없었을 텐데.”
“…태원아. 정신 좀 차려봐.”
한우주의 말에 담긴 간절함에 가슴이 미어졌다. 힘껏 안고 도닥이며 나는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아니, 아니다. 괜찮지 않다. 아직 위험은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 하나 죽였는데 둘 죽였다고 다를까.”
윤태현이 이상하다. 한우주가 위험해.
‘그만. 이제 정말 됐어. 가사 상태고 뭐고 집어치우게 해 달라고.’
「System: 현재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정말로 가사 상태를 해제하시겠습니까?」
‘해제해. 당장!’
「System: 요청이 승인되었습니다. 가사 상태를 해제합니다.」
“허억-.”
숨이 폐부에 차올랐다. 번뜩, 눈을 뜨자 흐린 시야로 한우주의 얼굴이 보였다.
한우주는 눈을 감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죽어… 죽어!”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윤태현이 나이프를 빼 들고 한우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안 돼.
나는 몸을 돌려 한우주를 감싸 안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나이프가 몸에 박히는 고통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정말로 죽는 한이 있어도 한우주를 잃을 수는 없다고, 얼핏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던가.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싸한 기분에 뒤를 흘끗 살피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우주가 맨손으로 나이프의 날을 붙들고 있었다. 분명 고통스러울 텐데도 얕은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그 이후의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한우주는 남은 한 손으로 윤태현의 손목을 움켜쥐어 꺾었다. 윤태현이 짧은 비명을 질렀고, 나이프가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떨어진 나이프를 주웠다. 한우주의 손에서 나온 피가 날을 타고 방울져 흘렀다. 그에 온몸이 서늘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흐, 으아아악!”
비명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한우주는 윤태현에게 자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쓰러진 윤태현을 위에서 압박하면서.
“…한우주!”
놀라서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살을 짓뭉개는 파열음만이 공기 중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나는 슬슬 겁이 났다. 저러다가 윤태현이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한우주는 살인자가 되는 건가?
그건 싫다.
“한우주. 제발 그만해!”
간절히 외치며 한우주를 뒤에서 껴안았다. 한우주의 손은 자신의 피와 윤태현의 피로 온통 엉망이었다. 한우주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통에 찬 윤태현의 기침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우주?”
계속 말이 없자 슬슬 불안했다. 나는 안은 손을 풀어 한우주를 놓아주었다. 그러곤 표정을 확인하려 들었으나 볼 수 없었다. 미처 그러기도 전에 윤태현 그 망할 자식이, 한우주를 밀치고 일어나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우주 역시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잠깐만. 한우주, 기다려!”
나는 그 둘을 놓칠세라 힘껏 내달렸다. 창고 하나를 제외하면 주변은 온통 나무뿐이었다. 길은 고르지 않았다. 산처럼 보이는데, 어떤 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 밤에 산이라니. 위험하지 않은가. 한우주에 대한 걱정만 깊어질 뿐이었다.
다행히 오래 쫓을 필요는 없었다.
“아악!”
가까운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윤태현의 것이었다.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한우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우주.”
한우주는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우주야.”
대답이 없었다.
“우주야. 제발 나 좀 봐 봐. 괜찮은지 걱정돼.”
한우주는 그제야 천천히 뒤돌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우주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한우주가 우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다. 게임을 할 때조차 본 적 없는 모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 괜찮아?”
그 곁에 다가서는 동안에도 한우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윤태현은?”
그 물음에 한우주는 다시 아래를 봤다. 한우주는 가파른 비탈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한우주의 시선에 따르자,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인영이 보였다.
“사, 살려….”
나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게 윤태현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당황해 한우주를 쳐다봤다.
“…내가 한 거 아니야. 도망치다가 저 밑으로 떨어졌어.”
한우주는 울음에 잠겨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안도와 불안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바로 한우주의 손을 살폈다. 상태가 아주 엉망이었다. 나이프에 베인 상처가 깊었다.
다행스럽게도, 신호가 잡히지 않을 정도로 외진 곳은 아니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한우주의 핸드폰으로 구조를 요청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한우주의 치료가 먼저였다.
지쳐 숨을 고르는 동안, 아래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혀, 현우야. 우주야.”
가늘게 흔들리는 비겁한 목소리였다.
“선생님 좀 도와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