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12. 교차로
가슴께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에 안도감이 몰려와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는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가 침대 옆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하루가 되게 길다, 우주야.”
한우주의 오른손에는 붕대가 단단히 감겨 있었다. 왼쪽 손등에는 언제 난 건지 모를 잔 상처들 가운데 링거 바늘이 꽂혀 있어 양손이 아주 엉망이었다.
살아 있어서,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저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왜 한우주가 상처를 입고 병상에 있어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한우주랑 조용히,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그렇게 큰 바람이었나? 시스템에서 제시한 기간도 이제 겨우 19일이 남았다. 이 귀중하고도 짧은 기간에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거 안 맞는다고. 몇 번을 말해? 이게 다 한우주랑 그 애비 때문이 아니겠어.
-한우주 아버지가 시켰어요?
‘설마, 그럴 리가 없어.’ 하고 던진 물음에 윤태현이 대답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했잖니, 내가. 한우주랑 그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겠어.
정말로 이게 전부 한우주 아버지가 꾸민 일이라면.
내가 한우주 곁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사람 눈에 내가 그리도 자격이 없어 보여서.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거라면.
‘한우주와 잘 지내려고 했던 게, ……큰 바람이긴 했나 봐.’
게다가 한우주의 아버지는 방금까지 이곳에 있지 않았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간 걸까. 이런저런 것들이 신경 쓰여 머리가 아파졌다.
“웬 한숨이야?”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던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한우주가 졸음에 잠긴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분명 잠들어 있었는데. 내가 한숨을 그렇게 크게 쉬었나?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한우주에게 무슨 말이든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한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뭐가?”
“깨어났을 때 네가 곁에 없을까 봐 걱정했어.”
왜 그런 걱정을 해. 그렇게 말하며 웃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한우주가 조금만 더 늦게 눈을 떴더라면 나는 이 자리를 떠나고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마음이 갑갑했다.
“태원아, 이제 괜찮아.”
“…….”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내가 약속할게.”
한우주는 잔뜩 당황한 표정을 하곤 상체를 일으켰다. 눈가를 조금 찡그리더니,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왼손의 링거 바늘을 떼어 냈다. 그러곤 내 뺨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나는 언제부턴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우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미안해. 좀 더 빨리 알아채야 했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우주의 사과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니다. 한우주가 나를 구해 주기를 바란 적조차 없다. 가까스로 내뱉은 말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무리했어.”
“무리라니?”
“한우주. 너 죽을 뻔했어.”
“안 죽었잖아.”
가슴이 미어졌다. 손등으로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토해 내듯 말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다시는 그러지 마.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병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차마 한우주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여러 뜻이 뒤섞인 진심이었다. 어차피 난 널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 네 아버지에게 맞서면서까지, 나를 위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잔인한 문장에 말문이 막혔다.
“너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니.”
“…….”
“그 반대야. 네가 아니면 내가 뭐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겠어.”
알아. 그걸 알아서 더욱 괴로운 거다.
한우주가 나지막이 물었다.
“윤태현은?”
“…경찰에.”
“살아 있다는 거구나.”
“살아 있지, 그럼.”
“…왜 살아 있지?”
“뭐?”
“그대로 두면 징역살이 좀 하다가 나오고 말 텐데.”
한우주가 작게 중얼거리며 왼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또 한 번 불안감이 스멀스멀 끼쳐 왔다.
“한우주. 이번 일은… 이쯤 하자. 너도, 나도 일단은 무사하잖아. 윤태현은 처벌받을 거고. 그거면 됐으니까. 응?”
“태원아.”
단호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들 수밖에 없었다. 한우주의 눈동자는 더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겠어.”
“…한우주.”
“윤태현 그 자식은 널 한 번 죽였으니까.”
“어?”
“……그러니까, 가만 못 있겠다고.”
“자,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황스러웠다.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마음에 멋대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살아 있는데? 그렇잖아. 지금 네 앞에, 이렇게.”
“…태원.”
분명 한 번 죽기는 했지만. 그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 한우주가 그걸 눈치를 챘다고? 난 그저 내가 윤태현에게 습격당해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라고. 그렇게 여겼으리라 생각했다.
한우주는 입을 다문 채 잔잔한 눈길을 보내 왔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눈앞에 글씨가 죽 나타났다.
「System. ‘한우주’가 당신의 존재성에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인공, ‘한우주’에게 진실을 털어놓겠습니까?
<예> <아니오>」
…이건 또 뭐야? 한우주에게 뭘 털어놔?
진실이라고 하면, 내가 사실은 정말로 죽었고, ‘시스템’이라고 하는 존재에 의해 다시 살아난 걸 말하는 건가?
이걸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의 뒤로, 의외의 문장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우주는 애초에 내가 ‘조현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우주는 그걸 알면서도 내게 많은 걸 묻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 그러나 지금, 나를 죽인 이에게 분노하며 동시에 나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한우주 너 지금 말도 안 되는 말 하는 거 알지?”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까. 나는 네가….”
한우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죽은 걸, 피부로 느꼈어. 태원아. 네가 다시 살아난 것도… 느꼈어. 차게 식은 몸이 품속에서 순식간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까지, 전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잡아떼도 한우주는 나를 나무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거짓을 고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스템 창이 노이즈를 일으키며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시스템 창이 사라질세라 다급히 말했다.
“말할게.”
「System. 다음의 선택지를 고르셨습니다. : <네>」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19일 뒤의 나는 한우주에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홀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맞아. 우주, 네 말대로 나는 한 번 죽었어.”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좋을까. 벌써 머리가 아파진다.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건, 여기가 내가 사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한우주의 좁아진 미간에 모든 걸 털어놓으려던 나의 결심이 흔들렸다. 하… 아니야.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고.
“……한우주 너 게임 해 본 적 있어?”
“아니.”
“게임이 뭔지는 알지?”
“응.”
“그래. 다행이다. 나는 음, 그러니까. 게임을… 좋아하거든?”
“알아. 게임이랑 결혼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뭐? 내가 언제? 아니, 어쨌든 그건 헛소리고.”
손을 휘휘 저어 보이자 한우주가 옅게 웃었다. 그제야 먹먹했던 마음이 좀 풀리는 듯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말했다. 한우주가 곧 밝혀질 진실에 충격받지 않길 바랐다.
“……사실, 여긴 내가 플레이하던 게임 속이야.”
“어떤 게임인데?”
“…….”
한우주는 조금도 충격받지 않고 되물었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미소년끼리의 연애 시뮬레이션,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피폐한 게임이라고 어떻게 말하지?
“연애….”
“연애?”
“연애… 시뮬레이션….”
“그게 뭔데?”
“우주야. 네가 날 힘들게 만들고 있다.”
“내가? 왜?”
진짜 미치겠네.
“그러니까, 시뮬레이션. 연애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한우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표정을 잔뜩 굳히며 말했다.
“내가 있는데 네가 그런 걸 왜 해.”
“아니…. 게임인데 그냥 좀 할 수도 있지. 이게 아니라, 그땐 내 옆에 네가 없었다니까?”
나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한 한우주를 이해시키기 위해 한참 동안 애를 써야 했다. 살면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에 관심을 둔 적 없는 사람에게 ‘연애 시뮬레이션’의 개념을 이해시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나는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의 대략적인 내용과 조현우의 몸 안에 들어와 ‘엔딩’을 봐야 하는 나의 처지를 한우주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대략….”
내가 조현우 몸에 언제 들어왔더라. 고민하던 중 한우주가 말을 가로챘다.
“4월부터였어.”
“아, 응. 맞아. 그때부터야. 내가 조현우 몸에서 생활한 게.”
이쯤에서 나는 확인해야 했다.
“내가 이야기한 것들, 믿기기는 해?”
“믿지. 네가 하는 말은 다 믿어. 그러니까….”
한우주가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넌 현실에서 수험생인데, 방학 동안 내가 등장하는 연애 시뮬레이션을 하다가 조현우 몸속에 들어왔고,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엔딩을 봐야 한다는 거잖아.”
정확하다. 나는 쓰게 웃었다. 원래의 몸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그리고 19일 뒤의 일에 대해 이해시키기 위해선 ‘엔딩’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불가피했다.
“네가 죽었던 건… 정말 있었던 일이지만, 여기서 네 생활을 도와주는 ‘시스템’이라는 존재가 살아나게 한 거고.”
“맞아. 그런데 한우주 너 괜찮아? 네 세계가….”
“뭐가? 게임 속이라는 거? 음, 솔직히 현실성 없게 느껴지긴 하지만. 괜찮아. 어쨌든 윤태현이 널 죽였다는 사실엔 변함없는 거네.”
결국 다시 그 얘기를 꺼내는구나. 생각한 순간, 한우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태원아.”
한우주는 전보다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네 말대로 엔딩이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