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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37화 (137/150)

137화

“그건….”

한우주 입장에선 궁금해 마땅한 일이다. 나 역시 이러한 질문이 나올 것을 알고, 모든 걸 털어놓았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면서도 몹시 어려웠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최대한 솔직해져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 이곳 시스템은 생각보다 불친절해서, 나도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아.”

“그러면 질문을 바꿀게.”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았다. 한우주의 기분이 점차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얼추 느낄 수 있었다.

“…태원이 네가 바라는 건 뭐야?”

나는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내가 뭘… 바라느냐고?”

“엔딩이 나고, 네 원래 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든가.”

“…….”

“원래 네가 살던 세계로 돌아갔으면, 한다든가.”

“그건….”

“네 얘길 들어 보면 그렇잖아. 결국 네가 바라는 건….”

한우주는 아랫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가 감정이 억눌린 어조로 말했다.

“나와 헤어지는 거, 아니야?”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런 거 아니야. 달라. 그런 일은 바란 적 없어.”

그래, 결과적으로 한우주와 떨어지게 되겠지. 그렇지만 그건 내가 바라는 것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피하고 싶은 결말에 가까웠다.

“맞아. 나는 내 몸이, 내 세계가 그리워. 돌아가길 바라고 있어. 그걸 부정하진 않을게.”

한우주가 얼마나 나와의 관계를 깊이 여기고 있었는지 알고 있다. 때문에, 나는 항상 슬펐다. 좋아하는 관계에 마음 터놓고 뿌리 내리지 못하는 서러움을 나는 어찌할 바 없이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너랑 헤어지고 싶다는 뜻은 아니야. 나는….”

메어 오는 목을 가다듬으며 가까스로 말했다.

“나는 너를… 정말로 좋아해. 우주야.”

이기적인 고백의 뒤로 침묵이 찾아왔다. 한우주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한우주를 바라보았지만,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을 쉬이 읽어 낼 수 없었다.

마침내 한우주가 침묵을 깨어냈다.

“그러면, 떠나지 마.”

한우주의 몸이 서서히 기울었다. 따뜻한 손길이 나의 뺨에 조심스레 와 닿았다. 천천히 눈을 감자, 바짝 다가온 한우주의 모습이 시선 속에서 가물어져 갔다.

조심스레, 입술이 맞닿았다. 얇디얇은 피부 너머로 서로의 맥박이 뛰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더 깊이. 입술이 맞물릴 때마다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생각이 하나둘 가라앉았다.

나는 끝내 한우주의 마지막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때문일까, 엉망으로 뭉개져 구체성을 잃은 불안감은 가실 생각을 않고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말았다.

디링-.

「System. 특수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안태원’이 ‘한우주’에게 진실을 털어놓는다.」

「다음 루트에 진입합니다. : 히든 캐릭터, 안태원」

***

이틀이 눈 깜빡할 새 지나갔다 병원에 있는 동안은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윤태현이 벌인 사건에 직접 연루된 만큼 수사에 협조하는 게 불가피했다. 피해자인 입장에 증거가 워낙에 확실해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그건 그렇고…, 특수 조건이라는 게 이런 거였냐.’

이틀 전 새벽, 드디어 루트 진입에 성공했다. 이놈의 게임, 떠날 때까지 공략 캐릭터 루트에 진입하는 꼴은 못 볼 줄 알았는데. 시스템 창 상단에 ‘루트’라는 글씨 옆에 적힌 내 이름, ‘안태원’ 석 자를 보기가 괜히 쑥스러웠다.

‘…이후로 특별히 바뀐 건 없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루트 진입 이후로 별다른 일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우주와는 전부터 사귀고 있지 않았는가.

‘17일 뒤면 엔딩.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적어도 일반 베드 엔딩이 아닐 거라는 것 정도려나.’

원작 게임에서 일정 기간 누구의 루트에도 진입하지 못할 시 일반 베드 엔딩에 돌입한다. 이제 적어도 루트 진입을 했으니, ‘안태원 엔딩’을 보게 되는 건가? 그러고 나면 나는 정말로….

-떠나지 마.

‘…….’

그 절절한 요구에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했던 걸까. 아니, 대답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그럴 수는 없어. 미안해. 나는 돌아갈 수밖에 없어.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이 떠올랐다. 영영 대답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우주가 어떻게 반응할지 겁이 나 대답을 유보한 것에 불과하다.

‘말해야 해. 그게 맞는 일이잖아.’

그렇지만… 어떻게 다시 화두를 꺼내지?

병원 로비에 가만히 선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 끝났어?”

“응. 이제 집에 가면 돼.”

한우주는 퇴원 절차를 밟았다. 좀 더 입원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권했지만, 한우주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갈무리되지 않은 고민을 껴안은 채 나는 한우주가 부른 택시 위에 올랐다. 이대로 조현우의 자취방에라도 가려니, 싶었다. 그러나 한우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어? 뭐야. 웬 오피스텔?”

게임 속에 들어오고 한우주와 꽤 오랜 기간을 함께 지냈던 오피스텔. 임 회장과 마주쳐 안 좋은 꼴을 보았던 바로 그곳. 택시는 정확히 그 앞에서 멈추었다.

한우주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왜?”

“왜냐니. 여기는….”

임 회장과 불시에 마주친 뒤로 다신 못 올 장소가 되지 않았던가?

한우주가 내 생각을 읽은 양 말했다.

“이제 괜찮아.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너 혼자 지내기도 좀 그렇잖아.”

“그건… 그렇지만. 한우주 너 본가는?”

“안 가. 안 가도 괜찮아, 이젠.”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의아함을 내비치기도 전에 한우주의 발걸음이 떨어졌다. 나는 그 뒤를 따르며 집요하게 물었다.

“아버지랑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야 항상 있지.”

“나랑 같이 있는 거 네 아버지가 알면….”

“알고 계셔.”

“어?”

“그러겠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한우주가 수술을 끝내고 깨어났을 때, 병실에서 임 회장이 무어라 소리쳤던 것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 임 회장은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다. 뭐 때문에 아픈 애 앞에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 대는 건가 했더니….

‘결국 내 얘기 때문이었구나.’

입 안이 썼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랑 계속 갈등해서 한우주에게 좋을 게 없을 텐데.

걱정하지 말라는 한우주의 말에 더욱 걱정이 솟구쳤다. 심란함 속에서 한우주의 집, 1701호 앞에 도달했다.

‘저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한우주와 아버지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 그 원인이 대부분 나에게 있다는 것 역시 신경 쓰였다. 임 회장이 덜된 인간이라곤 하지만 앞으로 적어도 몇 년간은 한우주의 보호자로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한 이야기를 포함해서, 한우주와 진지하게 말을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한우주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저기, 한우주….”

한우주가 천천히 뒤돌았다. 올곧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저번에 이야기했던 거 말인데.”

“이야기… 어떤 거?”

“……엔딩에 관한 거 말이야.”

나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어. 아주 고통스럽겠지만, 우주 너와도 떨어질 수밖에 없을 거야. 곧 입 밖으로 꺼내야 할 말을 속으로 한 번 되뇌었다.

그때, 한우주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한우주는 천천히, 왼손을 현관문 쪽으로 뻗었다.

철컥-.

‘…철컥?’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굳건하게 서 있는 철문은 익숙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못 보던 잠금장치가 있다.

“이게… 뭐야?”

한우주는 대답 대신 처음 보는 열쇠를 제 주머니에 넣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았다. 나는 망연하게 현관문을 살폈다. 밖에서 번호를 눌러 풀어내는, 익숙한 잠금장치가 하나. 그리고 처음 보는 잠금장치가 두 개. 하나는 안쪽에서 푸는 번호키였고, 다른 하나는 안쪽에서 열쇠로 풀어내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사실을 깨닫고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이런 게 왜 한우주의 오피스텔에 설치되어 있다는 말인가?

“들어가자.”

한우주가 태연히 말하며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한우주. 이게 다 뭐냐니까?”

“……바로 얼마 전에 안 좋은 일도 있었으니까.”

“바보 취급하지 마.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지금 같은 상황에 어딜 들어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해.”

공기 중에 긴장감이 팽배했다. 나는 현관문에 바짝 붙어 있었고, 한우주는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평소와 한 치도 다름없는 투였다.

“나를 떠날 수밖에 없다든가,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든가….”

“그거 때문에 이래?”

“…….”

그렇다고 해도 지금 같은 상황은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엔딩이 다가오면, 난 널 떠나게 될 거야. 이렇게 문 걸어 잠근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막을 수 없다면.”

한우주가 차갑게 말했다.

“지금, 이 문을 열고 나가 봐. 시스템에게 도와 달라고 하면 되잖아.”

“…뭐?”

그럴 수는 없다. 금주의 ‘help’는 이미 소진되었다. 시스템이 아무 때나 막 도와주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걸 무어라 설명한단 말인가?

“봐. 못 나가는걸.”

한우주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태원이 너는 무슨 핑계를 대서든 날 떠나고 싶을 뿐인 거, 아니야?”

…핑계?

예상치 못한 단어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핑계라니. 나는 나름대로 용기 내 모든 걸 털어놓았는데, 한우주에겐 그게 핑계처럼 들렸던 거야?

“믿는다며.”

다짜고짜 시스템의 존재를 증명하려 드는 것도 그렇고. 이건….

-믿지. 네가 하는 말은 다 믿어.

‘…거짓말이었구나.’

한우주는 나를 믿지 않았다. 내가 한 모든 말을 거짓 또는 망상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렇게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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