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한우주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거짓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적어도… 이런 식으로 굴진 말았어야지.
“그냥 믿기 힘들다고 솔직히 말하지 그랬어.”
한우주가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의미 없이 현관문에 달린 도어 록 버튼을 누르고, 문고리를 두어 번 돌렸다. 당연하게도 문은 꼼짝도 하질 않았다. 한우주는 가만히 날 지켜볼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한우주.”
“…응.”
“왜 이러는 거야?”
“…….”
“너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
아니, 한우주의 ‘믿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 내가 더 멍청한가? 황당함에 웃음이 다 나왔다.
“이렇게 해서 네가 얻을 게 뭔데? 난… 그냥….”
지금은 한우주의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나는 고개를 돌린 채로 말했다.
“너무 실망스러워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이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한우주가 저지른 짓을 믿을 수 없었다. 한우주가 어떤 게임의 주인공인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 녀석인지 그동안 내가 너무 간과했나 보다.
자조하며 고집스럽게 현관에 서 있자, 한우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가서 대화하자, 태원아.”
“지금 너랑 내가 무슨 대화를 해. 내보내 줘. 나는 그것 말고는 할 말 없어.”
후회는 점점 더 짙어지기만 했다.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다. 조용히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떠날걸. 그러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기분 따위 몰라도 괜찮았을 텐데.
“…태원이 네가 한 말을 전부 믿지는 못하지만.”
한우주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귀라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가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쯤은 알겠어.”
보호? 한우주 얘가 지금 날 보호하는 거라고 말하려는 건가?
“윤태현 일도 있고, 아버지 일도 있고. 당분간은 여기서 나랑 있는 게 안전할 거야.”
“변명하지 마.”
점점 더 화가 솟구쳤다.
“너는 날 보호하는 게 아니야. 가둔 거지. 내가 널 떠날까 봐 불안해서. 아니야?”
“…….”
“제발, 그만 좀 해. 네가 미워질 것 같으니까.”
말하며 나는 한우주와 시선을 맞추었다. 자기가 잘못한 주제에, 괴롭다는 듯 구겨진 표정을 보자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한우주가 안타까워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내보내 줄 눈치는 아니고.’
최대한 머리를 차게 했다. 계속 여기 서 있어 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내 다리만 좀 아프고 말겠지.
“비켜 봐.”
넓은 현관 복도를 두고 나는 굳이 한우주를 밀치고 지나갔다.
한우주의 집은 여전했다. 임 회장이 날 내쫓았을 때, 이 집에 무슨 더러운 벌레가 나온 것처럼 굴었더랬지. 그때 청소 업체를 불러라 뭐라 소리쳐 댔던 것이 떠올랐다. 아무렴, 오래 지낸 만큼 내겐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였다.
‘그런 곳에 갇히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나는 거실 소파에 신경질적으로 걸터앉았다. 그러다 문득 몰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짚고 꾹꾹 눌러 댔다. 한우주는 말짱한 얼굴로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니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한숨을 애써 삼키며 생각했다. 한우주가 날 상대로 이런 짓 해 봤자 하루 이틀이 고작 아닐까, 이런 희망적인 생각이나마 하지 않으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와중에 자꾸만 한우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안 되겠다.
“방에 들어갈 거야. 따라오지 마.”
차가운 투로 내뱉으며 나는 2층의 손님 방으로 향했다. 한 사람분의 발걸음 소리. 그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님 방에 들어간 나는 문까지 걸어 잠갔다. 감금당한 상황에 방문까지 걸어 잠그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전부 엉망진창이야.’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누웠다. 이토록 엉망인 현실에 꿈으로 도피라도 하고 싶어진 걸까. 잠이 쏟아졌다.
한우주가 보기 싫어 방으로 들어왔더니만. 그날 꾼 꿈의 등장인물은 나와 한우주 둘뿐이었다. 온통 하얀 공백의 공간 속에서, 한우주는 자꾸만 나를 피해 도망 다녔다. 꿈속의 나는 현실에서 처한 상황은 까맣게 잊은 채 한우주를 쫓아다니더라.
한참을 뛰어다닌 끝에 나는 한우주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웬, 한우주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꿈속인데도 숨이 차서, 바로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야, 한우주. 울고 싶은 건 나거든?
겨우 숨을 가다듬고 외치려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안태원 :: 두근두근 감금 생활?!」
‘이건 뭐야, 미친.’
잠에서 깨어나니, 이딴 문구가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뭐? 두근두근 감금 생활? 감금이 장난이냐? 천 년의 두근거림이 식겠다. 이 미친 게임아.
눈치를 제대로 잡숴 먹은 게임을 속으로 마구 욕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나는 그대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침대맡에 의자를 가져와 자리 잡은 한우주가 나를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닌가.
“너… 뭐야? 나 문 잠갔는데?”
“……걱정돼서.”
걱정? 걱정돼서 뭐, 문 따고 들어왔다. 그 말인가?
“이 방에 나 혼자인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배고프진 않아?”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이런 상황에 배가 고플지.”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배에서 소리가 울렸다. 와, 진짜. 이놈의 위장이 눈치가 없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됐어.”
나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네가 주는 건 안 먹을 거야.”
“밥은 먹어야지.”
“그냥 내버려 둬. 굶어 죽든, 말든. 죽으면 시스템이 알아서 살리겠지.”
“…….”
한우주의 눈동자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에 질세라 한우주를 노려봤다. 이게 무슨 의미 없는 기 싸움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한우주에게 고분고분하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한우주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뭐라도 먹자. 잠깐 기다려 봐.”
방을 나서는 한우주의 뒤통수에 대고 ‘안 먹는다고 했어.’라고 말했지만, 한우주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난 됐으니까 한우주나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 혹시 모르잖아. 밥 먹고 갑자기 정신 차려서 잘못했다고 사과하곤 나를 풀어줄지도 모르지.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
6월 9일 월요일, 엔딩까지는 15일이 남았다. 한우주와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니, 나는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가. 내가 뭐,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하루 이틀이면 한우주가 날 풀어 주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오피스텔에 갇힌 지도 벌써 사흘째. 한우주는 날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어디 있냐고.”
조용히 저항하던 나도 이제는 한계였다. 벌써 몇십 분 째 큰 소리를 내는 나를 보던 한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물을 갖다주었다. 그에 더 열이 솟구쳤다. 한우주는 계속 이런 식으로 굴었다. 우리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평소처럼 상냥하게 나를 대했다.
“하….”
둘 중 누가 먼저 지칠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우주는 냉수를 단번에 들이켜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차라리 헤어지자는 말이 듣기엔 더 나았을 거야.”
“…뭐?”
“그러면 내가 무언가 잘못했나 보다, 생각했겠지. 어떻게든 태원이 네 마음을 돌려 보려고 했을 거고.”
이제 더는 소리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그런데, 태원이 네가 한 말은 마치….”
한우주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눈가를 찌푸렸다. 한우주의 얼굴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지난 사흘간 잠은 제대로 잤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니, 잠을 자기는 한 걸까? 적어도 내가 깨어있는 동안 자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못 봤다.
“시간이 지나면 너는 날 떠날 수밖에 없다고. 모든 것이 불가항력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
그건… 맞는 말이다. 한우주가 제대로 이해했다. 게임 속 인물인 이상, 시스템을 넘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세계가 게임인 이상, 끝이 분명히 존재한다. 한우주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돌이켜 보니 더없이 씁쓸하고 무력한 사실이었지만 그게 한우주의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진 않았다.
한우주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도 내가 이러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알아. 네게 상처 주고 싶지도 않았어.”
“그걸 알면… 이제 그만해.”
“그만하면? 그냥 다 포기하라고? 그냥… 네가 사라지는 걸 두고 보라는 말이야?”
이젠 한우주가 내 말을 믿는지, 믿지 않는 건지 헷갈렸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설득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내가 한우주의 곁을 떠날 물리적인 계기를 막아 내는 것에 불과하다면…. 한우주는 내가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에 포함된,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가능성을, 시스템에 대한 것을 믿고 있는 게 아닌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우주도 나만큼이나 속이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또 나를 떠나려고 들면.”
한우주는 피곤한 듯 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들어야 한다고, 그래야 후회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한우주가 내게 말한 적 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가족의 존재, 저의 어머니에 대해서 말이다.
“이젠 잘 모르겠어.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그 말엔 대답할 수 있었다.
“바보야. 당연히 못하고 있지. 나한테 미움받아도 괜찮다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한우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어 말했다.
“뭐든 간에, 네가 내 곁에 없는 것보다는 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