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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39화 (139/150)

139화

“…….”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나라면 한우주처럼 하지 않을 것이다.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붙들어서 좋을 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한편으론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사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한우주와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까. 삶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던 사람이 떠나가고, 같은 자리에서 몇 년을 기다리는 경험 따위, 나는 해 본 적 없으니까.

“한우주. 너도 참 이기적이다.”

이내 짙은 슬픔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한우주가 살면서 겪은 불행이 지금 내게 저지른 짓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널 미워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그러므로 나는 한우주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이 사무치게 슬프고 안타까웠다.

“…미안해.”

순순히 사과하면서도 날 풀어 줄 생각은 없는 한우주에게 더 해 줄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나는 정말 알 수가 없다.

힘이 빠지고 지쳐 더는 화내고 반항할 의지조차 들지 않았다. 지친 뒤에야 떠오르는 몇몇 개의 감정들. 그 중에는 한우주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역시 있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한우주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저가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와 일부 닮아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할까. 한우주의 어머니를 어떻게든 제 곁에 묶어 두고자 했던 임 회장은 어떻게 되었더라?

‘…네 어머니는 아버지의 통제를 피해서 도망가신 거 아니야?’

차마 한우주 앞에선 하지 못할 모진 말을 속으로만 읊조렸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결국, 아버지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한우주를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팠다.

나로선 가슴 아플 일이 아닐 텐데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는 피해자이고 한우주는 가해자이지 않은가. 한껏 부풀어 올라 엉망으로 터져 버린 분노를 거두어 내고 보니, 찌꺼기 같은 연민 따위가 남아 있었다.

‘진짜… 지랄 났구나, 안태원.’

한우주는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마음이 느슨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스템 창을 켜 보았다. 6월 9일 월요일. 한 주가 지났으니, 시스템의 ‘help’ 기능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 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한우주는….’

괜찮을까? 같은 물음은 필요 없겠지. 당연히 안 괜찮을 테니까.

‘……갇혀 있는 내가 더 안 괜찮아.’

기회가 손에 쥐어져 있으니 떠나는 게 맞는 일이다. 어쩐지 쓰린 속을 달래며 여태 조용한 한우주를 흘끔 쳐다봤다. 제가 말을 건네는 게 내 화를 돋운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우주는 웬만해선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문득 한우주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손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우주 너, 병원은?”

한우주가 병원에 가는 모습을 본 적 없다. 내 말에 한우주는 덤덤히 대꾸했다.

“안 가도 돼.”

“뭐? 의사가 안 와도 된다고 했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가야지.”

“제대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지쳐서 가라앉은 분노가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려 했다. 이깟 일 때문에 자기 몸조차 돌보지 않는 한우주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은 자고 있어?”

아까는 혹시나 하는 의심에서 그쳤던 일을 물었다. 한우주는 말없이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잠도 안 자는구나. 아니, 못 자는 건가? 원래도 불면증을 앓았으니까…. 어느 쪽이든 이대로라면 한우주의 건강만 크게 해칠 것이 뻔했다.

‘나한테 욕먹고, 병원은 안 가고, 잠도 못 자고. 이게 다 도대체 누굴 위한 일이냐.’

이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는 점점 더 굳어졌다.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해서 이득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망설임 없이 시스템, help 창을 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우주. 강아지도 산책 안 시키면 학대인데. 알고 있지?”

“…안 키워 봐서 몰라.”

“너희 아버지 집에 강아지 있던데.”

“거긴 우리 아버지 집이고, 걔네는 아버지가 키우는 강아지지. 난 걔들 이름도 몰라.”

“……어쨌든, 강아지 산책 안 시키는 거 학대야.”

넌 사람을 가둬 놨으니 오죽하겠냐. 중얼거리자, 한우주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강아지는 줄이라도 맬 수 있잖아.”

“아하. 그럼 나 목줄 매면 산책시켜 줄 거야?”

의미 없이 건넨 말이었다. 그 와중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대답을 고민하는 한우주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뭘 또 고민해. 한우주 진짜 미쳤나 봐.”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자 한우주는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난 뭘 망설이는 거지.’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며 상황을 질질 끄는 나 자신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내 나는 바라는 것을 속으로 읊조리며 ‘help’ 기능을 사용했다.

「System. 요청이 승인되었습니다. 금주의 ‘help’를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잠깐, 태원….”

한우주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대로 천천히, 앉은 자리에서 몸이 기울어져 갔다. 나는 쓰러져 가는 한우주의 몸을 받쳐 세웠다.

…이렇게 전조 없이 바로 잠들 줄은 몰랐는데.

나는 시스템에 ‘한우주가 깊은 잠에 빠지게 할 것.’을 요구했다. 적어도 10시간 동안은 깨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그냥 ‘이곳을 벗어나게 해 줘.’라고 빌어도 됐겠지만….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오래 잠들지 못해 어두운 낯이 신경에 거슬리기라도 했나 보지.

‘무거워.’

깊게 잠들어 축 늘어진 한우주를 어떻게든 끌어 옮겼다. 조현우의 몸으로는 기껏해야 침대에 던지듯 내팽개치는 게 전부였다. 한우주가 얄미워서 던진 게 아니다. 아마도.

됐어. 어서 여길 나가기나 해야지. 열쇠는 한우주가 바지 주머니 안에 넣는 것을 보았다. 문제는 새로이 생긴 번호 키다. 10시간 안에 번호를 알아낼 수 있을까? 하면… 솔직히 자신 없다.

그때, 바닥 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럴 리 없는데도, 잠든 한우주가 깨어날까 싶어 나는 급히 진동의 출처를 확인했다. 한우주의 핸드폰에 전화가 오고 있었다.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아 발신자를 알 수 없었다.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한우주가 몸을 뒤척였다.

“아, 헉.”

아,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야. 이 자식아!]

다소 익숙한 목소리가 액정 너머로 소리를 질러 댔다. 상대는 다름 아닌 임도윤이었다.

사람 말을 씹어? 듣고 있냐? 이 미친놈이! 대충 이런 내용의 욕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방문을 닫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듣고 있으니까 진정 좀 해 봐!”

[뭐? 지금 나더러 진정하라고… 잠깐만. 한우주가 아니잖아.]

“그래. 한우주 아니야. 안…, 조현우야.”

[…미친. 네가 한우주 전화를 왜 받아? 한우주는 뭐 하고?]

“한우주는… 자고 있어. 전화 못 받아.”

[장난해? 당장 깨워!]

“못 깨워.”

[왜!]

내가 어떤 피 같은 기회를 사용해서 겨우 재운 건데 걔를 다시 깨우겠냐. 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임도윤의 욕설을 배경음악 삼고 현관을 향해 나아갔다. 듣자 하니 한우주는 지난 사흘간 아버지의 연락에 무시로 일관한 데다가, 멋대로 찾아오지 못하도록 수를 쓴 것 같았다.

가만 보면 임도윤은 항상 한우주와 임 회장의 사이에서 등 터지고 있단 말이야.

한편, 임도윤의 목소리를 들으니 한우주 이외의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 아니다. 저기, 임도윤.”

깊은숨을 내쉬며 한우주가 가지고 있던 열쇠를 문을 향해 내밀었다. 열쇠는 구멍에 딱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역시 번호 키였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내가 너를 왜. 아니, 잠깐.]

임도윤은 반사적으로 거절했다가 다시 말했다.

[도와 달라니? 또 무슨 일 생겼냐?]

얼마 전 윤태현과 있었던 일 때문일까. 다행히도 임도윤은 도와 달라는 나의 요청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내가… 지금 어디 갇혀 있거든.”

[…어?]

“그래서 도움이 좀 필요한 상황인데….”

[……허?]

나는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한우주가 깨어날까 마음이 초조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도움을 청한다고 해서 임도윤이 순순히 날 받아 줄까?’

이곳을 나가는 일이나, 나간 뒤를 생각해서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적합한 일이다. 임도윤은 한우주의 오피스텔 위치를 알뿐더러 출입할 수도 있으니 그 상대로 딱 맞아떨어졌다. 그렇지만… 임도윤이 내게 호의적인 인물인가 판단하기가 몹시 모호해서, 섣불리 뒷말이 나오질 않았다.

[야. 일단 지금 상황이 어떤지 설명할 수 있겠어? 뭐, 혹시 너희 둘 다 위험한 상황인가? 소리 내기 곤란하면 문자라도 해 봐.]

그러나 어지럽던 생각은 임도윤의 침착한 어투에 서서히 정리되어 갔다. 그래,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된 정보만으로 임도윤을 판단하지 말자. 내게 호의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곤란에 처한 사람을 무시할 만큼 임도윤이 비정하진 않을 터이다. 그러니 괜찮을 거야. 자신을 다독이며 말했다.

“한우주가 날 자기 집에 가뒀어.”

***

임도윤과의 통화 이후 두 시간 즈음이 지났을 때였다.

덜컹, 큰 소리가 들리며 평생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현관문이 서서히 열렸다.

“괜찮냐?!”

임도윤이 외치는 와중에도 나는 뒤돌아 있었다. 혹 한우주가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한우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임도윤은 제 곁에 있던 사람을 물리며 조용히 말했다.

“한우주는?”

“…자고 있어. 못해도 오늘 안엔 깨어날 거야.”

“이런 상황에 여전히 자고 있다고?”

대답할 기운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제 바깥으로 향하면 된다. 한우주가 없는 곳으로 몸을 피하면 될 것이다.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경고! 현재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이벤트 진행 영역에서 벗어날 시,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이벤트 진행 영역인 ‘한우주의 곁’에 머무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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