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System. 페널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엔딩 일수 감소. 현재 엔딩까지 남은 일수는 ‘15’일입니다.」
「2. 베드 엔딩을 맞이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마치 나를 붙잡는 듯한 문구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이딴 게 이벤트라면, 이벤트 설계가 아주 잘못된 거라고 따지고 싶었다. 베드 엔딩 타령은 웃기지도 않는다. 한우주의 곁에 머무는 쪽이 내겐 훨씬 베드 엔딩에 가깝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니 당연하게도 시스템의 뜻에 순순히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오피스텔 로비에 다다를 때까지 임도윤은 내게 무슨 말을 건넬지 고민하는 눈치였으나, 섣불리 내뱉지는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내 쪽이었다.
“…임도윤. 나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어?”
“뭐?”
임도윤은 퍽 당황한 눈치였다. 곤란할 기색을 숨길 여유도 없어 보였다. 우물쭈물했다간 눈앞의 동아줄을 놓칠 것 같아, 나는 재차 말을 건넸다.
“그냥… 한우주가 날 못 찾도록, 잠깐 숨겨 줬으면 해. 안 될까?”
말하며 오피스텔 건물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밖에는 임도윤이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검은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임도윤이 막 입을 열려던 때였다. 누군가 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한우주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현우야?”
다행히도, 상대는 한우주가 아니었다. 무척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서연준?”
서연준의 눈이 점차 휘둥그레졌다.
“무사했구나. 정말 다행이야…!”
그러곤 다짜고짜 나를 강하게 껴안았다. 숨이 조금 막혔지만, 차마 바로 밀어 내지 못했다. 나를 반기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운데 선 임도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아, 좀. 일단 자리 좀 옮기지?”
***
「System.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엔딩까지 남은 일수는 ‘14’일입니다.」
「System.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베드 엔딩을 맞이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지독하게 안내 문구를 띄우는 시스템을 애써 무시했다. 임도윤과 나, 그리고 얼결에 합류한 서연준까지. 우리 셋은 차를 타고 꽤 오랜 시간을 이동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제법 눈에 익은 장소였다. 게임 속, 임도윤 루트에서 본 적이 있는 장소. 아마… 한우주가 오피스텔을 가진 것을 질투하여 임도윤이 받아 낸 주택이었다. 그러니까, 임도윤의 아지트인 셈이다.
큰 방의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가운데,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서연준이었다.
“학교는 난리가 났어.”
서연준은 침착한 투로 말을 이어 갔다. 당연히도 윤태현의 일은 학교에 금방 알려졌다고 한다. 소문이 으레 그렇듯 과장이 포함된 채로. 그 타이밍에 한우주와 내가 학교에 나오질 않으니 심지어는 우리가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단다.
“현우 너도, 한우주도 연락을 받질 않아서….”
우리를 걱정한 서연준은 결국, 별 대책 없이 한우주의 집까지 찾아왔다. 그러다 타이밍 좋게 오피스텔을 나오던 나와 임도윤과 마주친 것이고.
“그런데… 한우주는? 우주는 무사한 거야?”
서연준의 말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나와서, 나는 서연준에게 사실을 말해도 괜찮을지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서연준이 어색했다. 나는 서연준의 고백을 거절했으니.
“집에서 잘 퍼질러 자고 있다던데? 무사하다 못해 사고까지 치고.”
그런 내가 답답하다는 듯 임도윤이 선수를 쳤다.
“사고라니요?”
“자세한 건 몰라. 나머진 네가 말해.”
임도윤이 내 쪽을 턱짓했다.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선. 태연하게 딴청을 피운다.
‘도움을 구하려면…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겠지.’
이유 모를 거리낌을 억누르며 나는 무거운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곤 윤태현과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엔딩과 같이 게임과 관련한 모든 일을 제외하고.
“말도 안 돼.”
서연준이 말했다.
“한우주가… 그럴 애가 아닌데. 도대체 왜?”
혼란해 보이는 서연준의 등을 임도윤이 한 대 세게 내리쳤다.
“야, 그게 지금 할 말이냐. 얘 앞에서? 내가 봤어. 현관문에 이상한 잠금장치를 줄줄 달아 놨던데.”
“…어떻게. 아니, 미안해. 현우야. 내가 너무 놀라서, 그만….”
“……괜찮아.”
임도윤이 나와 서연준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 새끼가 원래 좀 돌아 있긴 했어. 이런 짓을 벌일 만큼이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하여간에, 당최 이해할 수 없네.”
피로함이 몰려와 눈가를 꾹꾹 눌렀다. 마음 같아선 쓰러져 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나는 임도윤에게 물었다.
“임도윤 너는 한우주에 대해서 왜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뭐야, 너… 이런 상황에 한우주를 감싸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게 아니라.”
임도윤이 몇 번인가 건넨 경고가 떠올라 물은 것뿐이다. ‘한우주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던가.
“그냥… 한우주에 대해 뭘 알고 있길래 그러는지…. 궁금해서 그래.”
나는 여전히 내가 처한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임도윤 마저 그러지 않는가. ‘원래 좀 돌아 있긴 했지만, 이런 짓을 벌일 만큼은 아니었다.’라고. 나 역시 한우주가 이런 일을 벌일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며 접한 한우주도, 내가 직접 접한 한우주도. 감금을 당하면 당했지, 할 녀석은 아니었다.
“답답해서 물은 거야.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나는 계속해서 이유를 찾고 있었다. 한우주가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이유. 그럴듯한 이유를 찾지 못하자, 심지어는 나 자신을 탓하게 되었다. 내가 한우주에게 한 말이나 행동들이 어떠한 트리거가 되어서 한우주가 변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와서는 그저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자꾸만 원인을 내게서 찾게 된다. 그러니 나의 표정이 어떨지는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연준이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야, 내가 실언했다.”
서연준과 나의 시선이 임도윤에게 집중됐다.
“생각해 보니, 한우주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 나더러 왜 한우주 욕만 하고 다니냐고 물어봤지? 걔가 그럴 만한 놈이라 그래.”
임도윤은 표정을 잔뜩 구기고선, 목소리를 낮추며 이어 말했다.
“어릴 때 말인데. 한우주가 날 창고에 가둔 적이 있어.”
“…네?”
서연준이 놀란 듯 대꾸했다.
“워낙 구석진 데다가 작은 창고라, 사용인도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는데…. 위험했지. 죽어라 소리 지른 덕분에 하루 이틀 만에 벗어나긴 했지만.”
“아니, 우주가 형한테 왜 그런 짓을 해요?”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몰라.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추측일 뿐이지만….”
임도윤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갔다. 당시 한우주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임 회장네 가족은 한집에서 함께 살았다. 결혼한 아내와 아들이 있는 상황에서 한우주와 어머니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곤 했다. 특히 임도윤의 어머니는 이 기묘한 동거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임도윤도 그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한우주, 한우주의 어머니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별거 안 했어. 그냥 짜증 나서 말 좀 안 섞을 뿐이었지. 당시 한우주는 조용하고, 얌전해서 트집 잡을 게 없기도 했고. 걔 어머니는 솔직히… 음, 지금 생각해 보면 친절하고 좋은 분이었는데.”
「System.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엔딩까지 남은 일수는 ‘13’일입니다.」
「System.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베드 엔딩을 맞이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임도윤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페널티는 꾸준히 적용되었다. 나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임도윤의 이야기에 집중하려 애썼다.
“아마도 걔는 나랑 우리 어머니가 없으면 저랑 자기 어머니가 우리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물건 찾는 걸 도와 달라는 부탁에 이끌린 임도윤을 창고에 가둔 것은 고작 아홉 살 때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 일을 계기로 폭발한 임도윤의 어머니에 의해 분리된 곳이, 한우주가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고.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됐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우주가 원래 정상은 아니었다고. 뭐… 이렇게 말하지만 애초에 그런 가정 환경이 정상이 아니라는 거, 따지고 보면 우리 아버지가 제일 또라이라는 것쯤은 알아. 듣자 하니 본가에 제 욕심대로 그 둘을 데려온 것도, 우리 어머니 눈치 보면서 도로 쫓아낸 것도 우리 아버지인 것 같거든.”
한우주의 아버지는 한우주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명목 삼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금방 다시 부르겠다는 약속 아래 쫓아내 놓고 감시하길 몇 년, 제 삶에 지친 어머니는 어린 한우주를 내버려 두고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그 와중에 꾸준히 떠오른 페널티 창은 벌써 엔딩까지 남은 일수 ‘10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모르겠다. 이젠 페널티 따위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원래도 좀 이상했는데. 그런 일까지 겪었으니 더 이상해졌겠지. 그냥… 머리가 돈 거 아니야?”
임도윤의 이야기는 ‘한우주 그 자식 역시 이상하다.’로 귀결되었다. 저 나름대로 나를 위로하겠다고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난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한우주의 무언가를 자극해서, 한우주가 제 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만 떠오를 뿐이었다. 애초에 한우주에게 접근하고, 한우주를 좋아하게 된 모든 과정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현우야, 괜찮아?”
디링-.
걱정 어린 질문에 나는 바로 답할 수 없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헛숨을 삼킨다. 또다시 떠오른 시스템 창. 그것이 알리는 것은 페널티에 대한 경고 따위가 아니었다.
「System. 이벤트 진행 영역에 들어섰으므로, ‘한우주’와의 이벤트를 재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