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한우주는 분명 집에서 자고 있을 터였다. 아직 깨어날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이벤트 재개는 곧 한우주가 근처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 망할 시스템.’
루트에 진입한 이후로 시스템은 꾸준히 한우주와의 이벤트 진행을 종용했다. 한우주와 조금 떨어진 정도로 페널티를 주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한우주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보이지 않자, 페널티의 일종으로 한우주를 깨워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데 한우주는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임도윤과 서연준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임도윤, 혹시 여기… 뒷문 같은 거 있어?”
“뭐? 갑자기 그건 왜?”
“…나 얼른 가 봐야 해.”
“현우야, 괜찮아?”
도와준 두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설명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임도윤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것인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임도윤을 따라간 곳에는 마당으로 향하는 문 하나가 달려 있었다. 내 눈치를 살피며 뒤따라오던 서연준이 말했다.
“같이 가자, 현우야. 너 안색이 안 좋아.”
그 말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문을 열자, 널찍한 마당이 보였다. 임도윤은 마당에도 뒷문이 있다며, 기꺼이 안내해 주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인 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완전히 벙한 채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
한우주는 내가 이쪽으로 나올 걸 알고 있던 것처럼, 뒷문 앞에 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던 한우주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며 나와 마주 섰다.
“…현우야.”
한우주는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아는 눈치였다.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진 한우주는 곧, 인상을 확 구겼다. 어느새 다가온 임도윤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야. 남의 집 앞에서 뭐 하냐. 안 꺼져?”
“임도윤, 넌 빠져.”
“뭘 빠져, 인마. 여기가 내 집인데.”
임도윤은 말하며 내게 슬그머니 눈짓했다. 그대로 뒷걸음질 치자, 한우주가 다급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것도 금방 임도윤에게 저지당하고 말았지만.
“현우랑 둘이 할 말이 있어.”
“쟨 너랑 말하기 싫은 거 같은데?”
둘끼리 두었다가 주먹다짐이라도 날까 싶었지만 다른 이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연준이 내게 손짓하는 게 보였다. 당장의 나로서는 두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나와 서연준은 다시금 건물 안으로 들어가 정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임도윤이 한우주를 얼마나 붙들어 둘 수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신속해야만 했다.
「System. 경고! 현재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이벤트 진행 영역에서 벗어날 시,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이벤트 진행 영역인 ‘한우주의 곁’에 머무르십시오.」
이미 한 번 본 적 있는 경고창이 떠올랐다. 시스템이 더는 나의 편이 아니라 생각하니 모든 게 야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엔딩 일수 페널티’, ‘베드 엔딩 확률’에 대한 문구가 차례로 한 번씩 눈앞에 나타났다. 기분은 점점 더 막연해지기만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목적지 없이 그저 걷기만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중간엔가 서연준이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넸지만, 와닿지 못한 채 귓가에서 흩어질 뿐이었다.
“현우야.”
“…….”
“현우야!”
“어?”
“…꽤 걸었는데. 슬슬 힘들 거 같아서. 배고프진 않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처음 보는 거리에 와 있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 퇴근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확실히 저녁을 먹을 때가 되긴 했지만… 무얼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서 그래.”
그 말엔 쓴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아, 서연준 이 시간에 바쁠 녀석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 봐 줘야 하고, 학원도 가야 하고.
“연준아,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만 들어가 봐도 돼. 미안해, 신경 쓰이게 해서.”
“…현우야, 네가 잊고 있는 거 같은데.”
서연준은 미소 띤 얼굴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 너한테 고백했었어.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은… 여전하고. 그런데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그냥 가.”
차마 응할 수 없는 마음을 서연준은 조심스레, 다시 한번 꺼내 보였다.
“……미안해. 그때나 지금이나 내 대답은 같아.”
“알아. 그냥… 내가 널 걱정한다고. 그걸 말하고 싶었어.”
서연준에겐 몹시 미안한 말이지만, 방금 그 말을 들으니 서연준을 얼른 보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만 깊어졌다. 이러한 마음은 내게 있어 이제 더없이 과분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서연준이 나 때문에 본인의 소중한 것을, 가족을 뒤로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때마침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서연준의 것이었다. 곤란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도 동생이라든가… 가족이지 않을까. 서연준은 내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역시나,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연준의 동생, 연서였다. 울며 어리광을 피우는 목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렸다. 나는 연준이 통화를 마무리하자마자 말했다.
“연서한테 가, 연준아. 너 기다리잖아. 난 정말 괜찮아. 네 말마따나 한우주가 원래 그럴 녀석도 아니고…. 괜찮을 거야.”
나의 말에 서연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연준을 내 옆에 붙들어 둘 이유는 없었다. 서연준이 날 좋아한다 해도 결국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반면 서연준은 이곳에 가족이 있고, 제 삶이 있다. 서연준은 그래도 좀 더 내 곁에 있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서연준이 일상에서 벗어나자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곧장 서연준을 찾으며 연락해 왔다.
그 모습에 나는 점점 더 가슴이 무거워졌다. 서연준에 대한 미안함뿐만이 아닌, 더욱 깊은 감정이 아픈 구석을 쿡쿡 찔러 댔다.
“…미안해, 현우야. 이 전화는 받아야 할 거 같아서.”
다시 한번 울리는 핸드폰을 들여다본 서연준이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신경 쓰지 말래도. 편안하게 전화해. 자리 비켜 줄게.”
“응. 고마워…. 금방 끝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서연준이 뒤돌자, 나는 조금 떨어지는 척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서연준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곁에 서연준이 있으니 그간 잊고 있던 빈자리가 생경해져 버틸 수 없었다.
서연준이 부러웠다. 그를 찾는 가족이 있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추한 질투심이 들며 그리움이 함께 깊어졌다.
‘우리 엄마랑 누나도… 내가 사라진 걸 알면 찾아다닐 텐데.’
이곳에 온 지 두 달이 지나간다. 태어나서 평생을 함께한 가족을 못 본 지 벌써 두 달이라는 뜻이었다. 엄마랑 누나는 잘 지낼까. 정신이 극한에 내몰리자 떠오르는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 꾹꾹 억눌러 온 마음이 이젠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System.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엔딩까지 남은 일수는 ‘9’일 입니다.」
「System.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베드 엔딩을 맞이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System. 페널티가 강력하게 적용됩니다. ‘Help’, ’지도’, ’추적’ 등의 모든 기능을 정지합니다.」
어느새 차오른 눈물에 앞이 흐리게 보였다. 시스템 문구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베드 엔딩이고 뭐고, 이젠 다 되었으니 얼른 현실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현실의 나라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었을까. 모의고사 채점이나 하면서 다가올 수능을 걱정하고 있었겠지. 수시로 넣을 대학과 학과에 대한 고민이 전부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내버려진 기분 따위 몰라도 되었을 텐데.
한우주에 대한 것도… 알 턱이 없을 것이고. 한우주와 사귀는 일 따위 벌어지지 않았겠지. 고등학교 3학년 된 입장에서 연애는 먼 나라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다. 현실에서 함께 있을 땐 서로 욕이나 하기 바빴던 못난 친구들마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있을 법한 가능성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 와중에 황당한 생각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원래의 일상에 돌아가고 난 뒤에도, 어쩌면 난 한우주를 그리워하겠구나, 하는 생각. 한우주와 함께하며 겪은 일들과 감정 중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이 훨씬 많았다는, 안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 말이다.
안태원. 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하늘이 새카맣게 물든 가운데 거리는 화려하게 빛났다. 이제야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다리도 조금 아프고…. 낯선 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보니, 괴로움만 깊어졌다. 이곳의 완벽한 이방인은 나뿐일 것이라는 생각에 외로움이 사무쳤다.
몰려드는 인파를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주변은 어둠에 잠겼다. 어느새 도착한 주택가 골목의 담에 기대어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페널티는 점점 쌓여가, 이제 엔딩까지는 7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엔딩 일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한우주에게서 계속 도망쳐서, 결국 베드 엔딩을 맞이하면…. 내가 사는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이 끔찍한 고적함에서 곧, 벗어날 수 있을까? 멍하니 서 있자,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진 누군가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이내,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천천히 고개를 들자 성난 표정의 중년 남성이 내게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이런 곳에 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임 회장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우주는 어디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