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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42화 (142/150)

142화

분노 섞인 말투와 표정을 통해 이 사람은 날 찾아온 게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임 회장은 한우주를 찾아왔다. 그런데 어째서 내게 온 거지? 의문과 함께 퍼뜩 떠오른 답이 있었다.

워낙에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난 정말 바보인가 보다. 주머니 안에 손을 꽂아 넣었다. 핸드폰, 정확히는 한우주 핸드폰의 존재감이 손안에 묵직하게 잡혀 왔다. 이 사람, 평소에도 한우주의 위치를 감시하고 있었겠구나.

“…우주는 여기 없어요.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모르고요.”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아, 이 사람에겐 아무리 사실을 말한들 믿지 않을 것이다, 믿더라도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내 탓을 하겠지. 내게 가득 찬 악의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진 않았다.

시스템의 도움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니 나는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다. 무력감이 극에 달하자 변명할 의지조차 들지 않았다. 지친 눈길로 주변을 훑는다. 도움을 구할 행인조차 보이지 않으니, 내게 더 이상의 행운은 없을 것이라 선고받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은, 임 회장이 평소 줄줄이 달고 다니던 사용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임 회장을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을지도.

“대답하지 않는 게냐?”

돈도, 가족도, 힘도,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는 남학생. 임 회장의 눈에 이보다 좋은 화풀이 거리는 없었을 것이다. 임 회장은 나의 팔을 잡아당겨 더욱 구석진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배려 없는 힘이 우악스럽고 잡힌 팔에 자국이 남을 만큼 아팠다.

“그래. 생각해 보면 다 너 때문이었다.”

“…….”

“한우주가 네 녀석을 들인 뒤부터 모든 게 이상해졌어. 네가 내 아들을 망친 거다.”

평소 같으면 의미 없는 개소리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말일 터이다. 그러나 어쩐지 지금은 그 어떤 말보다도 아프게 다가왔다. 한우주가 나로 인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아니었다면 한우주가 이토록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지는 않았겠지.

“네 녀석을 참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니, 이미 예전부터 한계였어.”

한우주를 향한 임 회장의 뒤틀린 애정이 느껴졌다. 분명, 임 회장은 한우주를 걱정하고 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 임 회장이 한우주와 나를 떼어 놓으려 벌인 수작질에 한우주가 멋대로 끼어들어 다친 것도 있고. 다친 뒤로 병원조차 제대로 가지 않는 것도 있고. 이후로 임 회장의 연락은 철저히 무시한 데다가….

“네가 내 아들을 망친 게 아니냐!”

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기분이었다. 내게 검지를 들이대는 저 모습이 유독 보기 싫었다. 속에서 치미는 짜증과 원인 모를 죄책감, 슬픔 따위를 더는 제어할 수 없었다.

“제가 망쳤다면요?”

“……뭐?”

“맞아요. 제가 한우주 꼬셔서 그래요. 뭣 모르는 애 꾀어서 저 좋을 대로 부렸어요. 그러면 안 됐나요?”

내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들 임 회장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 뻔했다. 억울하게 당하는 것보다는 뻔뻔해지는 것이 나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갑작스레 이 망할 게임 속에 떨어져, 갈 곳을 잃고 외로움과 서러움에 떨었던 때에 나는 한우주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뒤로 한참을 한우주에게 도움만 받으며 생활을 이어 갔다. 다른 이, 임 회장 같은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난 한우주에게 기생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그래, 아마도 그럴지도 몰라. 그런데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였냐는 말이야.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 냈다.

“어쨌든 넘어온 건 한우주잖아요. 오롯이 제 탓을 할 수는 없죠. 그건 양심이 없는 거죠.”

“너…, 이…!”

“……그러게 애초에 잘하셨으면.”

처음 한우주의 오피스텔에 들어섰을 때가 떠올랐다. 기이할 정도로 깨끗한 공간. 누군가 지내고 있다곤 생각 못할 정도로 생활감 없는 한우주의 방. 유일하게 누군가의 자취가 느껴지는 방의 주인은 이미 그곳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런 곳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홀로 보내야만 했던 한우주를 떠올려 본다.

“한우주가 외로울 일 없도록 잘하시지, 그랬어요.”

잇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방금까지 울고 싶었는데, 오히려 웃음이 나오다니. 아무래도 내가 좀 이상해졌나 보다.

“입 다물지 못해!”

성난 사람을 굳이 건드리다니, 참으로 나답지 못한 일이었다. 임 회장이 한 손을 높이 치켜드는 모습이 두 눈에 담겼다. 저 커다란 손바닥이 곧 내 뺨 위로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급박한 상황에도 시스템은 계속해서 경고 문구를 띄우고 있었다. 어느덧 페널티가 쌓여 엔딩까지 5일이 남았다는 문구를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다시 한번,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System. 이벤트 진행 영역에 들어섰으므로, ‘한우주’와의 이벤트를 재개합니다.」

짜악-!

뺨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음에도 고통은 없었다. 맞은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나와 임 회장 사이를 가로막은 누군가가, 날 대신해 맞은 것이다. 그게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한우주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제 아버지와 마주 본 채로 낮게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한우주.”

한우주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뒤돌아 나를 먼저 살폈다. 나는 놀란 나머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한우주를 바라보았다. 한우주가 내게로 손을 뻗었을 땐, 나도 모르게 그만 그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미안. 그냥, 다친 데는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안 다쳤어.”

반나절 새 수척해진 낯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괴로워,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한우주. 너야말로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냐.”

그런 한우주의 행동이 임 회장의 화를 돋웠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우주는 지친 듯,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 제발.”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임 회장에게 말했다.

“이제 더는 제 소중한 사람한테 상처 주지 마세요.”

임 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우주는 이내 속에 담고 담아 둔 깊은 진심을 토해 냈다.

“어머니만으로… 충분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지만 그 일은 한우주와 마찬가지로 임 회장의 깊은 곳에 박혀 있었을 터이다. 임 회장은 제게 박힌 가시를 뽑아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저 박힌 채로 살아가길 택한 임 회장을 한우주가 건드리고 만 것이다.

“지금 네 어머니가 널 떠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거야?”

그러니 임 회장이 불같이 화를 낼 수밖에.

“아니! 전부 한우주 네 탓이지. 네가 저지른 일을, 내가 수습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어디서 은혜도 모르고 막말을 해!”

“언제나, 늘 힘들어하셨어요. 어머니께서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숨죽여 우신 날이 얼마나 많은지 아버지는 모르시죠.”

“…….”

“그래서 늘,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나만은 어머니와 함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며, 한우주는 힘없이 말했다.

“…둘 다 실패한 제 꼴이 가장 우습긴 하네요.”

“헛소리할 기운은 있나 보군.”

임 회장은 한우주의 말 중 그 무엇에도 반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되레 그는 팔짱을 낀 채 한우주를 한심하게 여기는 듯, 무심한 눈길을 흘렸다.

“내가 너를 지나치게 봐준 모양이다. 한우주, 계속 오냐오냐해 줬더니 내가 한가로운 인간으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제 발로 찾아온 것만은 칭찬해 주겠다만….”

그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액정을 두드렸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곧 사람이 올 거다.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하며 경고했다. 따라오라는 명령조의 말과 함께, 임 회장은 혀를 차며 구석진 골목을 벗어났다.

한우주는 그 뒤를 바로 따르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선 나에게 조심스러운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태원….”

한우주는 가까스로 이름을 부르는가 싶더니, 골목 바깥 아버지의 존재를 의식한 듯 말을 바꿨다.

“…현우야.”

“…….”

“미안해.”

헛웃음이 나왔다. 인제 와서 사과라니. 한우주의 신뢰가 한차례 무너진 시점에서 듣는 사과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차라리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있으면 속 편할 텐데.

“상처 줘서 미안해.”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한우주도 그걸 알고 있는 듯, 다급히 말을 이어 갔다.

“현우 네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게. 네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골목 안에서, 나는 한우주의 표정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여전히 의심이 들었다. 한우주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턱이 없다. 내가 마음 놓은 틈을 타 다시 엉뚱한 짓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다릴게.”

바로 대답하지 않자, 한우주는 초조한 양 덧붙였다. 끝까지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어째서일까. 입술이 제멋대로 열렸다.

“5일 남았어.”

“…….”

“네가 무슨 짓을 벌이든, 용서를 구하든 상관없어. 5일 뒤에 나는 여기에 없을 테니까.”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담은 내용은, 거절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닷새밖에 안 남은 거, 전부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일갈하는 것처럼 들려도 할 말이 없었다.

한우주는 대답을 망설이는 듯하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엔 돌아갈 수 있겠어? 꽤 멀리까지 왔는데.”

“…….”

“내 핸드폰 가지고 있지? 택시 타고 가.”

다정한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원망스러웠다.

“…더 지체하면 안 될 거 같아서. 나 가 볼게, 현우야.”

말하며 한우주는 느릿하게 걸음을 떼었다. 골목을 벗어나기 직전, 한우주는 다시 뒤돌아 내게 말을 건넸다.

“내가 너무 못났지.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한우주는 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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