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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43화 (143/150)

143화

「System: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안태원 :: 함께할 수 있다면.」

한우주가 스스로 찾아와 만남을 마무리 짓자, 이벤트가 끝났다. 페널티에 관한 이야기도 더는 없었다. 시스템은 주인공인 한우주의 편에 서서 작동하는 걸까.

‘…피곤해.’

당장은 여러 위기 상황에서 벗어난 것에 감사해야겠지. 머리가 어질해 방금 내가 한우주를 만난 게 맞는지조차 확실시하기 힘들었다. 한우주가 했던 말들도, 구체화하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떠다닐 뿐이었다.

차가운 벽에 달라붙은 등을 천천히 떼어 낸다. 불쾌할 정도로 습한 공기를 들이켜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집에 가면 되는 걸까? 나의 집이 아닌, 조현우의 집으로. 그곳에서 닷새만 버티면….

‘그러면, 다 끌낼 수 있어.’

그 뒤로 내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택시를 불러서 더듬더듬 기억나는 주소를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걷기에는 먼, 그러나 차로는 가까운 거리. 차창에 기대어 밖을 구경하는 사이 금방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이 눈 안에 담겼다. 2개월을 지냈지만, 결코 나의 것이 아닌 거리.

“감사합니다.”

택시 기사님께 인사한 뒤, 차에서 내리면, 낡은 빌라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로 향한다. 시간은 벌써 밤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집 안은 끔찍할 정도로 고요했다. 이곳 생활에서 내가 감정적으로 얼마나 한우주에게 의지했는지 새삼스레 깨닫고 만다.

‘됐어. 한우주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안정을 취하는 것. 그리고 곧 다가올 엔딩일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뿐이다.

배가 고팠지만 음식을 섭취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바쁘게 돌아다녀 잔뜩 지친 몸을 씻고 얌전히 방바닥에 몸을 뉘었다. 나는 무언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그대로 금방,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쿵쿵.

시끄러운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정신이 몽롱해 눈이 가물가물했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생각도 안 하고 베개로 머리를 싸매 귀를 막아 버린다.

쿵!

그러나 소리는 자꾸만 들려왔다. 쇠문을 두드리는 불규칙한 소음이 빈약한 베개 솜을 뚫고 고막에 닿았다. 제발, 잠이라도 푹 자게 해 줬으면.

쿵쿵-!

그런 나의 간절한 바람 따위 산산조각 내 버리겠다는 듯 맹렬한 두드림이었다. 그제야 나는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누군가 조현우의 자취방 현관문을 부술 듯 때리는 모양이었다.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확인해 본다. 따로 온 연락은 없었다. 뭐, 한우주의 핸드폰이니…. 연락이 와도 나를 향한 것은 아니겠지만.

6월 10일 화요일, 시간은 오전 8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꽤 이른 아침인데. 도대체 누구지? 설마 마음을 바꾼 한우주가 찾아온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불안감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야, 조현우. 안에 없냐!”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는 한우주의 것이 아니었다. 까랑까랑 외치는 말엔 짜증이 듬뿍 담겨 있었다. …아는 목소리다.

“학생, 아침부터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야?!”

이웃과의 분쟁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소란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성난 이웃에게 다급히 사과하며 다른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재영이 비명처럼 말했다.

“이 미친 조현우!!”

일어난 지 불과 5분도 안 되어서 오재영에게 등짝을 맞는 신세가 되었다. 평소라면 말렸을 강준희도 팔짱을 낀 채 나를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잠깐. 잠깐 좀… 때리지 좀 마….”

강하게 반발할 힘도 없어 힘없이 대꾸하자, 오재영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화요일, 평일이다. 며칠 새 내게 벌어진 다이내믹한 일들 덕에 내가 학생이며 평일에 등교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 그렇지만… 그만큼 정신이 없었단 말이다. 오재영과 강준희는 번듯하게 교복 차림을 하고선 찾아왔다. 학교에 가려다가 이곳으로 찾아온 모양이다.

“너, 연락도 안 받고!”

“그건…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저기 있는 건 핸드폰이 아니고 뭐냐?”

눈썰미 좋은 오재영은 베개 옆에 가지런히 자리한 한우주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잠깐 빌린 거야.”

“연락할 수 있었다는 뜻이잖아. 미친놈아.”

그렇지만 요즘 누가 친구 핸드폰 번호까지 외우고 다니느냐고 대꾸하려다가, 오재영의 화만 더욱 돋울 것 같아 관두었다. 나는 결국, 작은 목소리로 ‘미안.’ 하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무슨 소문이 도는지 알아?”

가만히 서 있던 강준희가 조용히 한마디 던졌다. 알고 있지. 어제 서연준을 통해 들었으니. 오재영과 강준희 입장에서 내가…, 조현우가 걱정스러울 만도 했다.

“…알아. 나 크게 다친 곳 없어. 보다시피 무사해. 내가 그간 너무 정신이 없어서 연락을 먼저 못했어. 걱정 끼쳐서 미안해.”

오재영은 여전히 잔뜩 흥분한 표정이었지만 진지하게 사과를 건네자 할 말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강준희는 나를 천천히 훑더니 말했다.

“학교는 안 가는 거야?”

“그건….”

그래, 이게 일상이었지. 평일에는 학교에 가야 하는 게. 5일… 아니, 이제 4일 뒤면 엔딩을 보는 상황에서 굳이 학교까지 챙길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큰일을 겪은 것은 사실이니 집에서 쉬고 싶다고 말하면 오재영과 강준희도 순순히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학교에 안 가면? 나는 여기서 무얼 하지? 좁아터진 원룸에서 4일을 혼자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따라서 오래 고민할 필요 없이 금방 결론이 났다.

방구석에 우울하게 혼자 처박혀 있지 말고 학교에 가자. 가서 사람 구경이라도 해야 시간도 빨리 갈 테고. 다만 학교에 갔다가 혹시라도 한우주와 마주칠 것이 걱정되긴 하였다.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

마주쳐도 아는 체 안 하면 그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굳은 입꼬리를 가까스로 끌어 올렸다.

“학교는 가야지. 안 그래도 오늘은 가려고 했어. 얼른 씻고 교복 입어야겠다.”

오재영은 그제야 어두운 표정을 밝혔다. 내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강준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던졌다.

“그럼 오늘 우리 셋 다 지각이네….”

그 말에 오재영이 다시 성을 냈다.

“아, 진짜. 조현우!”

***

-학교는 난리가 났어.

분명 서연준이 그렇게 말했던가. 어쩌면 과장되었을 것으로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나 보다. 아무렴 윤태현은 짧은 기간이나마 담임까지 맡았으니. 반에 들어선 순간 다른 모든 학생의 시선이 집중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반인 오재영과 강준희와 인사를 나눈 뒤, 다소 긴장한 발걸음으로 자리에 향한다.

내 뒷자리는 비어 있었다. 한우주는 학교에 오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평소처럼 느지막이, 아무렇지 않게 등교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빈자리가 신경 쓰여 시선을 옮겼다. 다름 아닌 허지훈의 자리였다. 허지훈 역시 등교하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이지.’

오재영과 강준희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조현우를 걱정할 이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연락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연락처를 몰랐다. 나중에 오재영에게 물어봐야겠는데….

“그래서 윤태현은 이제 아예 안 오냐?”

“몰라. 오겠냐.”

“궁금하면 네가 쟤한테 가서 물어봐.”

“이게 미쳤나….”

“…….”

반 아이들은 나를 보고 저마다 수군댔으나 쉬이 말을 붙이는 이는 없었다. 윤태현이 구속된 이후로 3반의 조례와 종례는 옆 반 선생님이 도맡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군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일상은 평화로이 흘러갔다.

1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엔 서연준이 찾아왔다. 내가 학교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서연준은 나의 안부만을 묻곤 제 반으로 돌아갔다. 어제 내가 말없이 사라진 일이나, 한우주에 대한 건 일부러 묻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피곤함은 좀처럼 가실 생각을 안 했다. 점심시간까지 이대로 엎어져 잘까, 생각했으나 좀처럼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또 누군가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오재영이나 강준희인가, 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복도로 비척비척 나갔다.

“야.”

“어…?”

먼저 날 찾아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놀란 마음에 눈을 휘둥그레 뜨자, 임도윤이 혀를 찼다. 임도윤은 할 말이 있다는 듯 조용한 구석으로 앞장서 자리를 옮겼다. 눈치껏 그 뒤를 따르니 임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결국 한우주랑 마주친 모양이더라.”

“음… 한우주뿐만 아니라…. 너희 아버지도 마주쳤지.”

“그래, 듣자 하니 그런 거 같았어.”

임도윤은 팔짱을 낀 채 복도 벽에 몸을 기대었다. 임도윤도 어제 있던 일 탓인지 제법 피곤한 낯이었다.

“한우주는 널 쫓지 않는 것 같고.”

“응. 아마도….”

“됐어. 난 그냥, 하나 확실히 말해 두러 온 거야.”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성가시다는 투로 이어 말했다.

“난 더는 너희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 알았어? 애초에 한우주 일 따위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고.”

아버지와 한우주 사이에서 한껏 스트레스받던 임도윤이 이젠 나와 한우주 사이에서 그 난리에 휘말렸으니 피곤할 만도 할 것이다. 한우주라면 질색을 하는 임도윤 입장에서 이 정도 해 준 것만으로 큰일이었다.

“…응. 알았어. 고마워, 임도윤.”

진심이었다. 임도윤이 내게 이렇게까지 해 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 말 하려고 부른 거야?”

“……그렇긴 한데.”

임도윤이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리고 어쩐지 말이 없었다. 바쁠 텐데 이만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말하려던 때였다. 임도윤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너…, 혹시나 해서 말인데. 한우주 일에 아직 관심 있냐? 그러니까 내 말은, 걔 상황이 궁금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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