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임도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어제 임 회장과 있었던 일로 인해 한우주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기라도 한 걸까? 하긴, 그렇게 돌아가서 임 회장과 아무 일 없이 사이좋게 넘어갔을 리도 없을 테니….
‘하지만 인제 와서 나랑 무슨 상관이지?’
한우주의 상황을 안다고 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또, 해 줄 이유도 없고. 그러니 ‘알려 줄 필요 없다.’라고 이야기하며 넘기면 될 것이다.
…분명 그럴 터인데.
-미안해.
내게 사과를 건네던 한우주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속이 복잡했다. 내가 뭘 어쩌고 싶은 건지 나조차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난 아직 한우주가 신경 쓰인다는 것이다. 결국, 무거운 입술을 떼어 말한다.
“한우주가… 지금 어떤데?”
임도윤은 내가 정말로 물을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쩌면 속으로 답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도 내가 답 없이 느껴지니까…. 임도윤은 한숨을 쉬면서도 차근차근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뭐… 어제 아버지한테 된통 깨진 건 굳이 말 안 해도 되겠고.”
“……혹시 다쳤어?”
지난번에 임 회장과 난리가 났을 땐 임 회장이 꽃병을 던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아니.”
‘다행이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나조차 갈팡질팡하는 자신을 이해하기 힘든데, 임도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뻔한 일이었다.
“한우주 이제 학교 안 나올 거야. 전학 수속 밟기로 했어.”
“어?”
“윤태현 일도 있었으니까. 이런 학교를 계속 다니게 할 수는 없다…라고는 하는데. 뭐, 너랑 떼어 놓으려는 거겠지.”
그러면 이 게임이 끝날 때까지 학교에서 한우주를 볼 일은 없겠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사는 곳… 그 오피스텔도 처분할 거고.”
“뭐? 한우주도 동의한 거야?”
“글쎄, 나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런 눈치던데.”
그 말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우주가 지난 몇 년을 홀로 지켜 온 곳이 아니던가. 아직도 그리운 사람, 한우주의 어머니와 함께한 흔적이 곳곳에 담긴 장소인데. 그 일에 순순히 동의했다고? 솔직히, 믿기 힘들었다.
“한우주는 그러면….”
“당분간은 본가에서 머물겠지. 이 이상은 몰라. 나도 얼추 들은 소식을 전할 뿐이라서.”
“응…. 말해 줘서 고마워.”
임도윤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모르고 떠날 수도 있었겠지. 그래도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영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도와준 것도, 전부 고마워.”
“됐다, 뭘. 앞으론 절대 안 도와준대도.”
그래도 고맙다고 나는 거듭해서 인사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그 가운데엔 임도윤도 있었다. 처음 임도윤을 봤을 땐, 이런 식으로 날 도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곧, 수업 종이 쳤다. 얼른 교실로 돌아가야 할 임도윤은 어쩐 일인지 자리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왜 그래? 아직 할 말이라도 남아 있어?”
“…….”
어쩐 일인지 임도윤은 자리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제 핸드폰을 꺼내 내게 들이밀었다. 액정 속에는 웬 열 한 자리 숫자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하… 내가 진짜 자존심 상해서 이건 안 알려 주려고 했는데. 이거, 번호 받아 적어 놔.”
“이게 뭔데?”
“전화번호. 한우주가 전해 달라고 사정을 해서 내가 알려 주는 거다.”
“…….”
한우주가?
분명, 한우주는 내게 ‘기다릴게.’라고 말했다. 학교에도 나오질 않고, 오피스텔도 곧 처분할 거라면 내가 먼저 한우주에게 연락할 방도는 없었다. …하지만, 연락할 생각도 없었는데.
“싫으면 말아. 아직 한우주가 신경 쓰이는 눈치길래 말해 준 거니깐.”
“아, 아니야.”
나는 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임도윤이 보여 준 번호를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해 가며 받아 적어, ‘한우주’라고 저장해 두었다. 임도윤은 정말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그럼 난 간다. 혹시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마라?”
말은 저렇게 해도 오다가다 인사를 건네면 받아 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비록, 앞으로 임도윤과 마주칠 ‘조현우’는 내가 아닐 것이지만….
“잘 가. 좋은 하루 보내.”
임도윤은 나를 한 번 돌아보곤, 인사에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서둘러 가 버렸다. 복도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나는, 한우주가 전해 달라 부탁했다던 번호를 꽤 오래 들여다보았다.
***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래, 원래 이게 정상이지. 지루함을 적당히 버텨 내며 할 일을 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게 일상이라는 거였지. 지난날들의 비현실성을 새삼스레 깨닫고 만다.
사실, 수업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우주에게 연락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느라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까 전 임도윤과 대화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러나저러나 나는 아직 한우주가 신경 쓰인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본 한우주의 모습이, 그때 내뱉은 말에 담긴 간절함이 자꾸만 마음속을 깊게 파고들었다. 우리의 관계에 언제나 진지했던 한우주다. 비록, 그 관계를 망친 것도 한우주 본인이지만….
‘인사 정도는….’
그래, 인사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그편이 분명 내게도 후회 없을 것이다. 임도윤을 통해 들은 전학이나 오피스텔 따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인지 한우주의 입으로 듣고 싶기도 했다.
‘…….’
핸드폰 액정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메시지를 보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좀처럼 손가락은 움직일 생각을 안 하였다. …뭐라고 보내야 하지. 잠깐 좀 보자? 할 이야기가 있다? 만난다면, 언제?
피곤함만 잔뜩 껴안은 채 핸드폰을 꺼 버렸다. 뭐가 어렵다고 이걸 이렇게 고민하는 건지.
늘 생각하는 거지만 시간은 눈치가 없다. 꼭 이럴 때만 빠르게 흘러가지 않는가. 어느새 저녁은 코앞까지 다가왔고, 나는 낯선 선생님의 종례를 듣고 있었다. 교실에는 여전히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하나는 한우주의 것이니 그렇다 쳐도….
‘허지훈은 결국 안 왔네.’
허지훈이라면 분명 조현우를 걱정할 텐데. 오재영과 강준희에게 안부를 묻기도 했지만, ‘잘 몰라. 우리 연락도 안 받던데?’ 하는 대답만 돌아왔다. 아예 핸드폰이 꺼져 있다고 하더라.
오재영과 강준희까지 모른다고 하니 더는 물을 사람이 없었다. 우리 반엔 지금 담임조차 제대로 없으니 허지훈의 빈자리를 챙길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슬슬 걱정이 깊어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허지훈의 안부를 오래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학교 정문을 막 나설 때였다. 누군가 강한 힘으로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제 괜찮은 줄 알았는데, 한껏 예민해진 신경은 아직 가라앉질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만,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어깨를 잡은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야, 조현우. 나야!”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숨을 크게 들이켜며 상대방을 확인한다.
“……허지훈?”
온종일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허지훈이 눈앞에 서 있었다. 학교에도 안 나오더니, 웬일인지 평일인데도 사복 차림이었다.
“너… 뭐야? 어디 있었어?”
멍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묻자, 허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오랜만에 마주한 허지훈은 평소보다 차분했다. 아니, 조금 지쳐 보이기도 했다.
“조현우 너 학교 왔다고 문자 보냈던데. 오재영이.”
“그거 보고 온 거야?”
허지훈은 대답 없이 시선만 슬그머니 피했다.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너… 핸드폰 꺼져 있다고… 그러더라고. 안 그래도 오재영이랑 강준희한테 물어봤었어.”
“어. 일이 좀 있어서.”
드문드문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하교 시간대에 정문 가운데를 차지하고 서 있으니 눈에 띄지 않기도 어려울 것이다. 허지훈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내게 말했다.
“여기 서서 얘기하지 말고 좀 걷지?”
***
집으로 향하는 길, 허지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만나면 한껏 난리를 피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점잖은 반응에 오히려 마음이 불안했다. 왜, 사람이 정말로 화나면 되레 침착해진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저기, 허지훈.”
“걱정 많이 했다는 얘기는 굳이 안 해도 되겠지?”
정말로 화내려나….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간 연락한 사람이라고 해 봤자, 임도윤… 그것도 도움을 구하는 과정에 어쩌다 연결이 되었을 뿐인데. 난 정말, 누군가에게 연락할 처지가 못 되었다는 말이다.
“다친 곳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네.”
얘가 이렇게 단조로운 어조로 말 한 적이 있던가. 내 기억에는 없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허지훈. 혹시 화났어?”
“뭐?”
허지훈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인상을 잔뜩 구기고서는.
“야. 내가 왜 화를 내냐?”
“…그동안 연락 안 해서?”
“연락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안 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당연히 그건 아니지. 맹세코 아니야.”
“그러면 내가 왜… 아, 야. 뒤에 차 온다.”
허지훈은 나를 벽 쪽으로 약하게 밀며 한숨을 내쉬었다. 허지훈의 등 뒤로 커다란 차가 쌩하니 지나갔다. 골목에서 뭐 저렇게 빠르게 다니냐며 걸걸한 욕설을 내뱉는 허지훈을 보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라.
“화는 그 죽일 놈의 선생한테 났지. 욕할 게 산더미인데 괜히 너 안 좋은 기억 떠오르게 할까 봐 참고 있는 거 모르겠냐, 이 자식아.”
“…그런 거였구나. 미안.”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지훈은 여전했다. 여전히 조현우에게 참 상냥했고, 얼핏 거친 것 같으면서도 누구보다 배려심이 넘쳤다.
“오늘 학교는 왜 안 왔어?”
그런데 어쩐 일인지 허지훈의 표정이, 나의 질문에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