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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45화 (145/150)

145화

허지훈은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느린 발걸음을 떼며 얼핏 봐도 복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물음을 던지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허지훈의 입술이 열렸다.

“…아까 말했잖아. 일이 있었다고.”

“아….”

그러니까 그 ‘일’이 무엇인지 물은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허지훈은 내게 말하기 싫은 모양이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아니면, 오늘따라 유독 허지훈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까. 어렵게 생각할 거 없이, 정말 말하기 곤란한 일이 있던 걸지도.

‘아, 어색해.’

감정적인 거리감이 순식간에 벌어진 기분이었다. 이어지는 침묵이 괴로웠다. 어서 집에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살다 살다 조현우의 원룸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줄은.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걷기만 하는 시간이 몇십 분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원룸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야 조현우. 미안. 오늘 내가 좀 지쳤나 보다.”

“어? 아니야. 뭘 사과까지 해. 지친 게 뭐가 잘못이라고.”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허지훈은 영 개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럴까. 얼른 집에나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여태 죽상인 허지훈이 신경 쓰였다. 바로 건물 안에 들어서질 못하고 어정쩡히 서 있자 허지훈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너한테 말하는 게 맞는지 판단이 잘 안 서는데….”

허지훈은 거기까지 말하곤 또 입을 다물었다. 나는 허지훈과 마주 선 채 가만히 허지훈의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난 좀, 말하고 싶거든.”

짧은 이야기가 아닐 것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애써 미소를 띠며 눈앞의 낡은 빌라를 가리켰다.

“서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얘기할까?”

허지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앞장서 자취방으로 향하는 나의 뒤편에 무거운 발걸음이 뒤따랐다.

***

따끈한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한 치즈가 죽 늘어졌다. 페퍼로니, 피자, 빵, 토마토소스. 재료는 간단했지만 그래서 더욱 훌륭하게 어우러지는 맛이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한 채 없어 영상물을 틀어 둘 수도 없으니, 방 안엔 피자를 먹는 두 사람의 소리만이 허전하게 울려 퍼졌다.

‘말하고 싶다.’ 분명 그렇게 말했으면서. 허지훈은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배고파서 기분이 안 좋은가, 뭐라도 먹이면 입을 열까…. 그래, 저녁때가 다 되어 가긴 하지. 그런 생각에 피자나 시켜 먹고 있는 게 현재 상황이다.

어두운 낯과는 대비될 정도로 허지훈은 피자를 아주 잘 먹었다. 내가 한 조각 먹을 동안 허지훈은 세 조각을 먹었으니…. 입맛이 없는 건 아닌가 보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야 좀 평소 같네.”

피자를 네 조각째를 집어 든 허지훈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을 너 없이 보낸 건 처음이더라고.”

허지훈이 원래 이렇게 영문 모를 말만 골라서 했던가. 허지훈은 남의 속도 모르고 한입에 피자 반 조각을 베어 물곤,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취미로 먹방 해야 되겠네. 그리 생각하며 콜라를 한 모금 입에 물었을 때였다.

“너는 아직 기억 못 하는 눈치지만. 오늘 우리 할머니 기일이거든.”

그대로 콜라를 뿜어낼 뻔했다. 일 초만 더 빠르게 말했으면 대형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아니… 하여간에.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나는 놀라서 휘둥그레 뜬 눈으로 허지훈을 쳐다봤다. 허지훈이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왜, 뭐.”

“아니, 네가 방금….”

“내가 방금 뭐.”

“네가 말해 놓고선….”

“내 말이 왜? 그냥, 기일이라고.”

“…….”

그래서 오늘 학교에 나오지 않은 거구나. ‘오늘을 너 없이 보낸 건 처음이다.’라는 말은… 지금까지 할머니 기일은 조현우와 함께 챙겼다는 뜻일 테고. 아, 세상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조현우 너 얼마 전에 큰일 겪었잖아. 꼭 기억 상실 뭐… 그런 거 아니어도 올해는 혼자 챙기려고 했어. 그런데 너 피자 더 안 먹냐?”

태연한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어쩌면 어디든 말할 곳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허지훈의 표정이 이전보단 훨씬 편해 보였으니까.

“…지, 지금 먹으려고.”

아마 지금은 내 표정이 엉망일 것이다. 허지훈의 말마따나 오늘 내가 허지훈과 함께할 여력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죄책감은 별개의 문제였다. 피자 두 조각째를 느릿느릿 삼켰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맛있는지는 모르겠더라.

“미안하다. 말 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가슴이 영 답답해서.”

“아니야. 말을 해야지. 왜 말을 안 하려고 해.”

“지금처럼 굴까 봐 그랬다, 왜.”

“내, 내가 뭘….”

이러나저러나 허지훈에겐 일종의 부채감이 있었다. 내가 원해서 조현우의 몸에서 지내게 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허지훈의 소중한 사람이 나로 인해 사라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서.

“뭐… 할머니 가족은 나니까. 원래는 너 없이 나 혼자 챙겨야 하는 게 맞기도 하고.”

허지훈은 말하더니 갑자기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이어 말했다.

“이런 말 하면 나중에 네가 화내겠지만. 그러니까… 기억 돌아온 뒤에.”

조현우가 허지훈, 허지훈의 할머니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새삼 깨닫고 만다. 그럴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고 느꼈던 기분이다. 조현우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건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조현우이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조현우를 필요로 한다. 허지훈은 물론이고 오재영과 강준희도 조현우의 친구들이지 않은가. 역시나,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닌 조현우다. 그 사실이 어느 때보다 또렷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허지훈이 조현우의 빈자리를 느끼며 무기력해지길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에 성심껏, 허지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 안에 담긴 그리움을 함께 더듬어 갔다. 허지훈은 그런 내 마음에 응하기라고 하듯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땐, 피자 부스러기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밤은 깊어져 창밖이 캄캄했다. 실컷 먹은 흔적까지 정리한 뒤, 허지훈은 배부르니 졸리다며 벽에 기대어 늘어지게 하품을 해 댔다. 나는 그런 허지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피곤하면 좀 자.”

“그래도 되냐? 오늘 새벽부터 움직이느라….”

“괜찮으니까 얼른 자.”

허지훈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눕자 좁은 방바닥이 가득 들어찼다. 나는 잠이 오질 않아 눈을 뜬 채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허지훈.”

벌써 잠들었나? 아무렴 어때. 나는 혼잣말을 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곧 기억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언제 걱정을 했다고?”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솔직히, 허지훈이라면 조현우가 언제쯤 기억을 찾을까, 24시간 내내 걱정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은데. 저렇게 또 아닌 척을 한다.

“누가 할 말을… 네 기억은 네가 걱정해야지…. 누가 들으면 내가 기억 잃은 줄 알겠다….”

허지훈은 졸음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끝을 죽 늘이며 말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온전히 잠에 빠진 듯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맞는 말이네.”

그래서 더 속이 터졌을까. 친구라는 녀석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그런데 기억을 찾을 의지는 없어 보이지. 이곳에 있는 동안 내가 허지훈 맘고생 꽤 시켰겠구나. 그간 나 힘든 거 생각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지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 정도는 남기고 싶지만….’

곧 떠날 것처럼 감사 인사를 전하는 조현우라니. 허지훈 입장에서 그만큼 무서운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쉽게 마음을 접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2개월, 긴 듯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도움을 받은 덕에 어찌어찌 버텨 나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그들과의 기억을 상기해 본다.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는, 익숙한 한 사람이 있었다.

‘…….’

나는 결국, 잠들지 못한 채 다가온 자정을 맞이했다. 엔딩까지는 사흘이 남았다.

…이제 곧,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나아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하고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나는 이미 그 원인을 알고 있었다.

‘한우주….’

임도윤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뒤로…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한우주가 신경 쓰였다. 사실은 한우주를 신경 쓰지 않은 적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우주가 나를 다시 만나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정말로 내가 기회를 준다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마지막에 본 날 아버지와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어머니와 함께한 오피스텔을 떠나도 괜찮은지. 직접 만나 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확인하고 싶었다.

이대로 한우주를 보지 않고 엔딩을 맞이한다면, 현실로 돌아가 버리면… 평생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겠지. 이야기를 전하지도 못하겠고.

…아무렴 어때? 현실로 돌아가면 그만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기엔 한우주는 이미 내 안에서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내 안에 분명히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나는 핸드폰을 켜고, 오늘 임도윤이 준 번호를 들여다보았다. 정말 연락해도 괜찮을까, 하는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겐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간결한 문장을 적어, 메시지를 보낸다.

「한우주. 금요일에 잠깐 시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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