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13. 게임 종료
6월 13일, 금요일. 엔딩까지 하루가 남은 시점에 나는 한우주를 만나기로 했다. 혹여 그사이 마음이 바뀐다면, 한우주를 만나기로 한 것이 순간의 충동에 불과한 것이라면…. 솔직히 말하고 만나지 않을 경우도 상정해 두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금요일이 찾아온 뒤에도 나의 마음은 여전했다. 한우주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온전히 정리될 것이었다.
「한우주 : 정문 앞에서 기다릴게.」
짧은 진동과 함께 도착한 메시지를 보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오늘 진짜 한우주를 보는구나. 얼굴 못 본 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꼭 오랜만에 보는 사이처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가방을 챙겨 든 채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답장을 보낼 즈음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가 허지훈인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요 며칠 사이 자연스레 등하교를 같이했으니까.
“오늘은 먼저 들어가. 나 잠깐… 약속이 있어서.”
허지훈은 눈만 몇 번 끔뻑이더니 심드렁히 말했다.
“한우주?”
“어?”
어떻게 알았지? 말한 적도 없는데. 허지훈은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며칠 안 보였으니… 뭐. 그래, 그럼 나 먼저 간다. 필요하면 연락해라?”
“응? 어… 잠깐만!”
허지훈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곤 그대로 뒤돌아 나가려 들었다. 그런 허지훈을 나도 모르게 붙잡고 말았다. 왜 부르냐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이는 허지훈의 얼굴을 보며, 나는 느릿느릿 말을 건넸다.
“아니…, 그냥. 조심히 들어가라고.”
“뭐야, 싱겁긴.”
힘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허지훈은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허지훈과는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될 터였다. 결국, 고마웠다는 인사는 전하지 못했지만…. 허지훈과 조현우 사이에 그런 인사는 새삼스러울 뿐이니까.
나는 바로 한우주에게 가지 않고 옆 반으로 향했다. 다행히 서연준이 아직 자리에 있었다. 서연준은 나를 금방 발견하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나타난 게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요 며칠간 서연준은 굳이 날 찾지 않았고, 나도 서연준을 찾아가지 않았으니….
서연준은 금방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띠곤 부드럽게 말했다.
“아, 현우야. 안녕.”
“안녕, 연준아.”
이럴 때 보면 서연준은 참 대단했다. 표정이나 말투만 봐선 누구도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사이좋은 친구로만 보이겠지. 서연준은 항상 그랬다. 언제든 상대방을 편하게 하고자 배려하는 티가 났다.
“다른 건 아니고… 얼마 전에 고맙다는 인사를 내가 못 한 거 같아서.”
“응?”
“…고맙다고 하려고 왔어. 여러모로 내가 너한테 신세를 많이 졌어.”
“어? 아니야. 신세 진 적 없어. 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고….”
“응. 그래도 고마워서.”
나의 갑작스러운 인사가 영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서연준은 내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말했다.
“그…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어?”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얘기해 줘.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엔딩이 난 뒤에 조현우와 서연준은 어떻게 되려나. 조현우 입장에서 서연준은 전혀 친분이 없는 옆 반 학생일 뿐일 텐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서연준은 이곳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나와만 친분을 맺은, 드문 인물이었으니까.
“무슨 일은 없고, 정말 인사하러 왔을 뿐이라서. …그, 나는 그럼 가 볼게. 주말 잘 보내.”
서연준은 잠시 얼빠진 얼굴을 했다간 잘 가라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역시 갑작스레 고맙다며 인사하면 누구라도 당황하는구나. 덕분에 바로 뒤이어 찾아간 오재영과 강준희에게는 달리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실없는 대화만 조금 나누다가 주말에 같이 놀러 가자는 오재영의 제안을 에둘러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남은 건… 임도윤인데 나더러 이제 아는 체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괜히 찾아갔다가 속만 썩일 것 같아 넘어가기로 했다. 지난번에 봤을 때 인사를 전하기도 했으니까…. 임도윤 입장에선 임도윤의 눈에 띄지 않고 얌전히 잘 지내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
‘한우주가 기다리겠네.’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그냥 떠나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두 달을 함께한 사이이니 인사는 해 두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이곳 사람들은 내 존재를 알 턱이 없고,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 빈자리는 조현우가 대신할 테니 크게 바뀐 바 없이 일상을 지내겠지만.
마지막으로 그동안 참 일이 많았던 학교를 눈으로 죽 훑으며,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어쩐 일인지 심장이 뛰었다. 긴장이라도 했나.
한우주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디에 있으나 눈에 띄는 외모인데, 낯선 교복까지 입고 있어 더더욱 눈에 들어왔다. 오른손의 붕대는 여전했으나 상처가 꽤 아물었는지 감긴 정도가 이전보다 훨씬 간소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야 나는 한우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한우주.”
가라앉은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뒤에도 한우주는 말이 없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가 말을 건넸다.
“손은 좀 어때? 병원은 다니고 있어?”
“…응. 낫고 있어. 이전보단 훨씬 괜찮아.”
“다행이네. 병원 좀 잘 다녀. 빠지지 말고.”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잔잔히 미소 띤 얼굴이 무척 익숙하게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뭉근했다. …이상하네, 곧 헤어지리라 생각하니 날이 선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흐르는 침묵을 먼저 깨어 낸 것은 나였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서 얘기할까?”
***
부러 한적한 카페에 들어와 구석진 자리를 찾았다. 카페에는 팝송을 피아노로 커버한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주문한 복숭아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시며 여상하게 말했다.
“왜 너까지 복숭아 티야?”
“그냥. 마시고 싶어서.”
“…네 취향껏 마시지.”
“이제 단것도 좀 마셔 보려고.”
말과는 다르게 아이스티는 한우주의 입맛이 맞지 않아 보였다. 미세하게 찌푸린 표정을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여간에 평소에도 쓴 커피만 골라 마시는 주제에 왜 굳이 같은 걸 마시려 드는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가, 한우주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교복 잘 어울리네.”
이전 학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교복이었지만. …그래도 잘 어울린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임도윤이 말해 주더라. 너 전학을 갔다고. 멀리 간 거야?”
“여기서 한 시간쯤 걸리던데.”
“꽤 머네…. 본가에서 지내는 거 맞지? 통학하기 힘들 거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꼭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이대로 별일 없던 것처럼 평범한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헤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버린다. 인제 와서 겁이라도 난 것인지, 뭔지.
“태원아.”
내가 일부러 말을 돌리고 있던 게 티가 났나 보다. 나를 부르는 진지한 목소리에, 시선을 바로 맞추기 힘들었다.
“……고마워, 연락해 줘서.”
“…….”
“그리고 미안해.”
그래, 나는 이 말을 들으러 온 거였지.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굴었는지 알아. 나 때문에 네가 상처받았을 것도.”
“…왜 그랬어?”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고.”
한우주는 나와 눈을 마주한 채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형태가 어떻든 네가 내 곁에 있으면 되는 거라고. 그땐 그렇게 생각했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거, 이제는 알아.”
저번부터,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지금까지 내 안에 자리 잡은 의문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답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짙은 망설임을 겨우 물리고 입을 연다.
“…오롯이 네 의지였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 의지냐는 게 무슨 뜻이야?”
나는 시스템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우주를 떠나려 한 순간부터, 온갖 페널티를 들이대며 작위적으로 굴던 그 존재가 한우주에게도 손을 뻗은 것은 아닌지 말이다. 물론, 한우주는 이미 한 번 시스템의 존재를 부정한 적 있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이나 존재가 널 부추긴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거야. …예를 들면, 눈앞에 어떤 글씨가 보인다든가.”
한우주는 이 게임의 주인공이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아, 아니라면 그냥 넘어가.”
금방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민망했다. …나는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이런 걸 묻는 걸까. 인제 와서 그건 한우주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건가? 한심하게.
아이스티를 죽 빨아 마신다. 찬 음료를 갑작스레 들이켜자 머리가 띵하고 아팠다.
“분명….”
한우주는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무언가 글씨가 보이긴 했어. 이대로 가면 네가 영영 떠날 거라고, 어떻게든 붙잡으라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고.”
“뭐?”
정말로 시스템이 개입했다고? 그렇지만 한우주는….
“여기가 게임 속이라는 거, 믿지 않았잖아.”
“솔직히 안 믿었어. 그 글씨도… 처음 보였을 땐 그냥 내가 미쳤나 보다, 생각했지.”
한우주가 빨대로 아이스티를 휘휘 저었다. 얼음이 달각이며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런데 오피스텔에서 갑자기 잠들었다가 깨어난 뒤부턴 네 위치라든가, …엔딩까지 남은 일수라든가, 망상으로 치부하기엔 묘하게 현실이나 태원이 네 말과 맞아떨어지는 정보까지 알려 주기 시작했어.”
아, 시스템 이 자식이 한우주를 깨우다 못해 내 위치까지 전부 불었구나. 그날의 일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런데, 태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