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한우주는 미간을 슬며시 찌푸리며 말했다.
“이 글씨가 날 부추긴 건 맞아. 그렇지만, 결국 행동한 건 나야.”
얼마 전의 그 일은 시스템의 개입으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라고,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한우주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우주는 진중한 태도로 내게 용서를 구했다.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말아야 했어. 나는 널 좋아하니까.”
“…….”
태원아, 하고 한우주가 나지막이 날 불렀다. 곧, 서로를 향한 시선이 엇갈렸다.
“염치없어 보이겠지만, 이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아니까. 말할게.”
한우주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는 여전히 태원이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결국, 내가 한우주의 진심에 흔들리고 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대답하려 했지만, 의미 없이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한우주는 그런 나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차분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 태원이 너는 어떠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머리가 슬슬 아파졌다.
사실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이토록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뭘까. 심지어 한우주는 내게 한 번 상처 주었는데도….
이별의 때가 다가오자 감정의 형태는 더욱 선명해졌다. 내겐 더는 부정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한우주를 애틋하게 여기고 있다. 한우주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기꺼이 한우주의 곁에서 함께하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역시….’
애초에 엔딩이라는 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시스템적으로 가능할 리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했지만, 한우주에게 시스템을 이유로 갖다 대며 네 곁에 남을 수 없다고 말하긴 싫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더라도 내 대답은 같았을 거니까.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눈을 내리감은 채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원래의 내 삶과 한우주. 그 둘을 굳이 다시 저울질할 필요는 없었다. 몇십, 몇백 번을 반복해도 내 뜻은 같을 터이다. 차마 한우주와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천천히 입을 연다.
“여기선 너 말고는 원래 내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없잖아. 나는….”
한우주에게 내 원래 삶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던가? 말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여 은근히 피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한우주도 굳이 내게 원래 삶에 관해 물은 적 없으니.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할 때가 왔다.
“원래 내 세계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을지, 걱정돼.”
“…….”
“나는 여기에 있는데…. 내 원래 몸은 괜찮을까? 내 세상의 시간은 제대로 흐르고 있을까? 아니면 멈춰 있을까.”
속 깊숙한 곳에 묻어 둔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어 놓는다.
“만약 시간이 흐르고 있다면, 이 게임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의식불명으로 쓰러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지금 내가 조현우의 몸에서 지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가기라도 한 걸까. 어느 쪽이든 상상만으로 끔찍하지 않아?”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거 하나 없다며 넘겨 온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 엄마랑 누나는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괜찮아야 할 텐데. 안 그래도 두 사람 다 나 이제 고3 되는 거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쓰러지기라도 해 봐. 그런 불효는 또 없을걸.”
거기까지 말하고 난 뒤에야, 나는 겨우 시선을 들어 한우주를 볼 수 있었다. 한우주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얼굴로 나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우주야. 나는 내가 쌓아 온 삶이 너무 소중해. 조현우 아닌 안태원의 삶이 소중하고, 내 가족이 소중하고…. 그동안 못 본 친구들도 보고 싶어.”
친구 놈들이 들으면 징그럽다고 질색할 말을 잘도 하는구나. 기운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래 내 일상으로 돌아가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도 가고 싶어. 나 역시 너를 좋아하지만…. 나도 아직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잠시 불가능한 일을 상상해 본다. 현실의 안태원으로서 한우주와 함께하는 일을. 굳이 이별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서로 상처를 줄 일도 없을 이상적인 이야기를.
“……분명 한우주 너 없이 지내면 허전할 거야. 많이 보고 싶겠지. 그렇지만, 미안해. 그래도 나는 원래의 내 삶을 지키고 싶어.”
말하면서 깨닫고 만다. 나는 한우주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한우주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한우주는 내게 비일상의 요소에 가까웠다. 현실이 아닌 꿈의 일부였다. 깨어난 뒤에는 함께할 수 없는, 멀어지는 것이 당연한 존재 말이다. 한우주에게는 잔인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언젠가 다가올 이별 앞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우주가 어떤 말을 해도 현실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우주는 그런 나의 속내를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내내 침착했다. 한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응. 말해 줘서 고마워.”
한우주의 짧은 한마디로, 우리의 대화는 마침표를 찍었다. 한우주는 조용히 내 뜻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런 한우주의 태도가 너무나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남은 시간을 한우주와 다투며 보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한우주와 만나 보길 잘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한우주와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우주와 나 사이에 좋은 기억만 있던 건 아니었지만, 마무리는 잘한 거 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속이 한결 편안했다. 대화를 마치고 카페에서 나와 한우주와 식사를 마친 뒤, 목적지 없이 거리를 걸었다. 사방이 어둠에 잠기고 달이 높이 떠오른 시간이 될 즈음에야 나는 한우주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오피스텔, 정말 이대로 떠나도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한우주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으실 걸 알아. 이 이상 미련을 끌어 봤자 나만 괴로울 뿐이고. 그냥… 앞으로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어디선가 잘 지내고 계시겠지, 하고 생각하는 게 나아.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한우주가, 비로소 과거를 두고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인지, 혹은 체념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나는 이제 한우주를 곁에서 지켜볼 수 없고, 도울 수 없다. 이 이상 깊이 파헤치려 들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한 일이겠지.
“……그래. 어디서든 잘 지냈으면 좋겠다.”
한우주가 잘 지내기를,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한우주의 미래에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1시 반이 넘어갔다. 자정이 지나면 그때부턴 정말 언제 엔딩이 다가올지 몰랐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부랴부랴 떠오르는 말을 마구 건네기 시작했다.
“이상한 사람 만나지 말고. 사랑한다는 말 지껄이면서 누굴 가두거나 때리거나 하는 거 다 헛소리고 범죄야. 알았지? 그런 놈은 그냥 경찰에 넘겨 버려.”
원작의 한우주가 떠올라 한 말이었다. 한우주는 어쩐지 걸음을 멈추곤 눈을 끔뻑이다 작게 말했다.
“미안….”
“어?”
“지금이라도 날 경찰에 넘기고 싶다면….”
내가? 한우주를… 경찰에? 나는 그제야 한우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팔을 저어 보였다.
“아? 한우주 널 얘기한 건 아니었는데. 물론 네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나도 마음 같아선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아니, 이게 아니라. 하여튼 그런 사람이랑 연애하지 말라는 뜻이었어.”
한우주가 누구와도 해로운 연애를 하지 않고 잘 지내길 바란다. 뭐, 그런 뜻이었는데…. 의미 전달이 잘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한우주는 횡설수설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난 연애 안 해.”
“…….”
내 말… 잘 알아들은 게 맞나? 그런 연애를 안 하겠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거 같지? 얘 지금 내 앞에서 앞으로는 절대 연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가, 방금…? 난 뭐라고 해야 하냐. 그러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 보라고, 너라면 할 수 있다고? 아니. 그냥 입 다무는 게 맞는 선택인 거 같다.
한우주는 걷던 방향을 틀어 조현우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아마도 도착하기도 전에 자정이 다가올 것이었지만, 나는 한우주의 호의를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달은 밝았고, 우리는 말이 적었다. 이런저런 생각은 깊었으나 말로 꺼내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디링-.
조용한 거리, 두 사람의 발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D-DAY, 엔딩일을 맞이합니다.」
그토록 간절히 기다린 날이 드디어 다가왔다. 곁에 선 한우주를 흘끔 살핀다.
“한우주….”
“응.”
한우주는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System. ‘안태원’ 루트, Good Endi…….」
「…….」
「…….」
「Good Ending?」
지직, 글씨가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E?ding?」
불길한 기분이 끼쳐와 황급히 주변을 살핀다.
무언가 이상했다. 글씨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이… 모든 것이 망가진 화면처럼 지직거리며 노이즈를 일으키고 있었다. 멀리 보이던 가로등이 사라진다. 도로가 무너지고, 집이, 담벼락이 무너지고,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가 일그러져 사라진다. 달이 사라지고, 어둠마저 사라져 버린다. 주변은 하얀 페인트를 뿌린 듯이 온통 하얗기만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백색 무의 공간. 나와 한우주는 그 안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