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딱딱한 바닥과 맞닿은 등허리가 뻐근했다. 머리는 지끈거렸고, 눈꺼풀 너머로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셨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까스로 눈을 뜨고, 방바닥에 널브러진 몸을 일으켜 세운다. 낯익은 풍경이 눈에 담겼다. 여긴… 내 방인데.
한낮의 강한 해가 창문을 통해 내리쬐었다. 커튼 치는 걸 깜빡했나 보네. 어쩐 일인지 나는 멀쩡한 침대를 내버려 두고 좁은 방바닥에 뻗어 있었다. …뭐지, 자다가 굴러떨어지기라도 했나. 졸린 눈으로 주변을 살피자, 책상 위 컴퓨터가 멀쩡히 켜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간밤에 게임을 했던 것 같기도….
……잠깐만.
게임?
사이좋게 방바닥을 뒹굴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산 지 이제 이 년이 넘어가 잔흠집이 가득했다. 고2 여름 방학 때 놀러 갔다가 떨어트려 찍힌 자국까지 선명하게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침착하게 카메라를 켜고, 셀카 모드로 돌린다.
약 두 달 만에 보는 나의 얼굴이었다. 바뀐 바 없이 여전했다. 머리카락의 기장조차 마지막에 봤을 때와 같았다. 바로 이어서 날짜를 확인한다. 2월 20일. 아직 방학이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아마 이맘때쯤 내가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를 플레이했을 텐데.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나 진짜 돌아왔구나.
쓰러진 것도, 병원에 입원한 것도 아니야. 내가 게임 속에서 보낸 두 달이, 현실에선 고작 몇 시간에 불과했다.
안도감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대로 방문을 박차고 나가자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누나와 엄마가 보였다. 둘은 함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봤다.
“어으, 문 부서지겠네. 뭔데?”
퉁명스러운 누나의 말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날이 오다니. 더는 참지 못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심드렁히 다시 핸드폰을 보려던 누나와 엄마의 낯이 당황에 물들었다. 나는 그대로 거실 가운데 선 채 한참을 울었다. 순식간에 마음이 놓여 더는 어찌할 수 없었다.
“너 어디 아파?!”
물어 오는 말에 가까스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읊었다. 엄마와 누나는 평화로운 주말 낮에 다 큰 남자애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니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을 것이다. 엄마가 안태원 맹장이라도 터진 게 아니냐며 진지하게 구급차를 부르려 들 즈음에야 나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어, 엄마. 나 괜찮아. 진짜로….”
“괜찮은 애가 왜 갑자기 그렇게 울어?”
“……악몽 꿨어.”
“뭐?”
떠오르는 핑계가 꿈뿐이었다. 안태원 상상력 한번 빈약하구나. 누나는 내게 욕을 했고, 엄마는 황당한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꿈을 꿨는지 들어라도 보자, 하는 누나에게 너무 끔찍해서 떠올리기도 싫다며 한참 동안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아무렴 좋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이 너무나 반갑고 소중했다. 드디어 돌아온 나의 몸도, 몇 년을 살아온 익숙한 집도.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안태원: 얘들아.」
「안태원: 나 게임 다 접음.」
「안태원: 이제 현실에 충실하려고.」
「이지호: 응 그래 겜한다고 한 달 동안 연락 없던 안태원아」
「강수호: ㅇ?」
「강수호: 이새끼 뭐래ㅋㅋ」
「우재희: ㅁㄹ너무 많이 해서 질렷나봄」
「우재희: 저래놓고 일주일만에 다시 한다에 만원」
「강수호: ㄴㄴ일주일도 아님 하루만에 함」
「조은우: 야 피씨방이나 가실?」
「안태원: 아…. 진짜라고 겜 접는다고」
「조은우: 학교 앞 ㅇㅋ?」
내가 뭐라 하든 친구들은 날 개무시하고 피시방에서 만날 약속이나 잡고 있었다. 저 바보들. 저러다가 게임 속에 한번 들어가 봐야 정신 차리지…. 난 피시방 안 간다…. 메신저를 끄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나 살폈다. 게임을 접겠다는 나의 의지는 결연했다. 지금 당장, 컴퓨터에 깔린 게임 모조리 다 지워 버릴 테다.
깔린 게임이 많아, 지우는 데만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도중에 아… 꼭 다 지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지만 약 올리던 친구들이 얄미워서라도 전부 지워 버려야만 했다.
계획대로 모든 게임을 다 지우고 난 뒤에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를 지웠던가…?’
마지막에 플레이한 게임이니까 분명 깔려 있어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운 기억이 없다.
…뭐지?
그 뒤로 한참 동안 컴퓨터를 뒤적거렸지만,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선택지, 루트 등을 정리해 둔 데이터도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게임은 플레이한 적 없던 것처럼.
혹시나, 해서 살펴본 ‘보유 중인 게임 목록’에도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는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자 조금 무서워졌다. 인터넷에 게임 이름을 검색해 본다. …그런데 게임에 관련한 글이 하나도 없다. 비슷한 가사를 가진 노래 따위가 인터넷 창을 뒤덮을 뿐이었다.
이상한데…. 난 분명 누나가 선물한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게임 속에 들어가서…?
결국, 누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점심 즈음 있었던 눈물 소동 탓인지 누나는 평소보다 측은한 눈길로 나를 맞이했다. 눈치를 살필 여유가 없어, 다짜고짜 물었다.
“누나. 누나가 작년 생일 때 나한테 선물한 거 있잖아.”
“작년 생일 때?”
“응…. 나한테 선물한 게임….”
누나는 내 말을 듣곤 미간을 살짝 좁혔다.
“내가 너한테 게임 선물한 적이 있던가?”
“어? 작년에 선물했잖아. 나 놀린다고 그… BL게임….”
“BL? 네가 BL을 다 알아…? 아니, 난 그런 거 선물한 적 없는데?”
그럴 리가. 바로 작년 생일 당일에, 게임 선물했으니 계정 들어가서 확인해 보라고 말하곤…. 내가 당황하자 배가 찢어지게 웃던 모습이 얼마나 얄미웠는데….
“선물한 적 있다니까? 그거 있잖아.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라고.”
“와, 무슨 이름이 그러냐? 구리다.”
“…….”
“용건은 그게 다야? 안태원 오늘따라 이상하네….”
누나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제 방 컴퓨터 앞에 앉았다. 누나 바쁘니까 네 친구랑 놀라며 손까지 내젓더라. 슬슬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내가 꿈을 꾼 건가? 누나는 내게 게임을 선물한 적이 없고, 나는 그 게임을 플레이한 적 없고…. 게임 속에 들어간 기억도 전부 다 거짓이고 내 망상일 뿐인가? 한우주는… 캐릭터로도 아예 존재한 적이 없다는 거야?
그럴 리가. 아직 이렇게나 생생한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한우주와 있었는데.
떠나온 게임 속 세상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세상을 오직 나만 안다는 것이. 그 기억이 망상이고 거짓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 뒤로 나는 몇 번이고 게임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지만, 아주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
“먹고 싶은 거 없어?”
“난… 아무거나 괜찮은데….”
“나는 아무거나 라는 말이 제일 싫더라.”
그렇지만 정말로 입맛이 돌지 않아,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해가 뉘엿할 무렵 나는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나왔다. 어언 두 달 만에 맞이하는 우리 동네였다. …아니, 두 달 만에 보는 게 맞기는 한가? 혹여 전부 내 망상이었다면….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건 없고, 어쨌든 나는 그 세상을 나왔으니까. 사실, 아무렴 상관없다며 가벼이 여기고 넘겨도 괜찮을 텐데, 그게 또 쉽지 않았다.
주말 저녁의 마트는 사람으로 북적했다. 멍하니 정신을 뺀 채로 카트를 밀다가 몇 번인가 엄마와 떨어질 뻔했다. 얘가 오늘따라 정신이 없네, 라는 말을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실제로 나는 오늘 정신이 없어 죽겠으니까….
“정말 먹고 싶은 거 없어?”
“응, 없어….”
“정말로?”
“난 정말 없는데. 누나한테 전화해서 물어봐요.”
“오늘 네가 기운 없어 보여서 이러는 거 아니야.”
“초밥….”
지하의 식품 코너를 한 바퀴 크게 빙 돌아, 어느새 우리는 수북이 쌓인 초밥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카트를 멈추고 잠시 그 앞에 서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한우주랑도 마트 초밥을 먹었는데. 마트에서 웬 초밥을 파냐고, 불량이 아니냐고 했던가…. 그때 진짜 어이없었지. 그래도 초밥은 맛있었어.
“연어 초밥… 어? 안태원! 너 울어?”
초밥을 둘러보던 엄마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 말을 건넸다. 아, 어쩐지 눈시울이 뜨겁더라. 진짜 지랄한다, 안태원….
“아니야. 안 울어…. 초밥 말고 다른 거 먹자….”
“얘가 초밥을 마다해?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니?”
“아픈 거 아니야. 날 거 안 땡겨. 아, 족발은 어때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카트를 몰아 빠르게 초밥 코너를 빠져나왔다. 앞으로 한동안 초밥은 못 먹겠다….
지난 두 달의 기억은 내 안에서 생각보다 깊게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지나가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보고, 샌드위치를 보고, 반지하 방을 보고, 서점에 가득한 책을 보고, 나는 계속해서 한우주를 떠올렸다. 거리를 지나는 게 이토록 피곤한 일인 줄, 나는 처음 알았다.
그리고 다가온 저녁, 나는 가족들과 마트에서 사 온 족발을 먹었다. 엄마는 뉴스를 틀어 놓고 무어라 욕을 해 댔고, 누나는 그에 맞장구를 쳐댔다. 아주 일상적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때에 나는 현실에서 지난 두 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우, 이래서 대기업 놈들은…. 성운 그룹 저, 누구야. 저거 회장은 관상부터가 별로라니까?”
“…네?”
성운 그룹. 게임 속에서 존재했던, 임 회장이 거느리고 있던 대기업. 그 이름이 엄마의 입에서 나온 것이 무척 당황스러워 기침이 절로 나왔다. ‘그러게, 진짜 문제다.’ 자연스레 맞장구를 치는 누나까지. 모든 게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제야 시선을 들어 뉴스를 보았다. 놀랍게도 아는 얼굴이… 임 회장이 뉴스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또렷한 발음으로 소식을 전했다.
[성운 그룹의 임성진 회장이 한 범죄 조직과 유착 관계에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