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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50화 (완결) (150/150)

150화

“…….”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조현우가 아니다. 나는 분명 안태원인데? 누나도, 엄마도 지금 내 옆에 있는데, 왜…. 화장실을 빠져나와 내 방으로 향한다.

“안태원 벌써 다 먹었어?”

“아, 응…. 오늘따라 금방 배부르네….”

최대한 멀쩡하게 대꾸하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그러곤 성운 그룹을 검색했다.

정말, 있다.

내가 아는 그 임 회장이다. 게임 속에서 본 적 있던…. 나는 당황해 다른 것도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한우주와 다녔던 학교의 이름. 한우주와 지냈던 오피스텔. 게임 속의 배경이 되었던 가상의 지역 이름까지.

한우주와 다녔던 학교, 강우 고등학교의 정보가 줄줄이 떠올랐다. 건물 외관과 내부의 사진까지. 지난 두 달간 내가 지냈던 그곳과 완벽히 같았다. 한우주와 지냈던 오피스텔도 마찬가지이다. 호화로운 시설이 내가 지낸 곳과 닮아 있었다. 함께 지낸 지역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그와 유사한, 아마 게임을 만들었을 때 참고하였을 법한 강남의 어딘가에 오피스텔과 학교가 존재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이제 전부 진짜라면….

불안감인지, 기대감인지 모를 것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

빼도 박도 못하고 고3이 되어 버렸다. 곳곳에서 수능까지 디데이를 세고 있고, 정신 못 차리며 현실을 부정하던 친구 중 일부는 정신을 차리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게임에서 돌아온 이후로 며칠을 멍하니 있던 나는 곧 수험생이라는 현실을 실감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엉뚱한 생각, 한우주에 대한 그리움은 안 풀리는 문제를 향한 분노로 물렸다. 그렇게 근 한 달을 보내왔는데…. 학기가 시작되자 다른 것이 신경 쓰여 참을 수 없었다.

한우주네 학교… 강우 고등학교도 이제 개학했겠지. 아니, 어쩌면 벌써 전학을 갔을지도. 게임 속에서 지낸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묘하게 어긋나 있어서 추측하기가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로 전학 갔는지 학교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어.

…아니, 이거 다 전부 내 망상이면 어떻게 해? 한우주가 현실에 있을 리 없잖아.

그렇지만 임 회장이 있는데, 설마 한우주가 없을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혹시….

엄마와 누나는 ‘성운 그룹’이 원래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했다. 성운 그룹은 카드와 관광, 전자 등 여러 분야의 사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딜 가든 성운 그룹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한우주가 얼마나 대단한 집안에서 지내고 있던 건지 새삼스레 실감했다.

성운 그룹이 있는 현실에서 생활하는 것도 슬슬 익숙했다. 심지어 우리 집 티브이도 성운 그룹 거더라…. 어쩐지 원래 있던 거랑 모양이 좀 다른 것 같더라니….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개학한 뒤로 넋을 놓는 일이 잦아졌다. 이대로 가다가 수험 생활 통째로 말아먹는 거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결심했다.

…그냥 확인하고 오자고.

정말로, 딱 하루뿐이다. 확인한 뒤에는 정신 차리고 고3 생활에 집중하는 거다.

나는 개교기념일에 강남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지도에 강우 고등학교를 띄운 채 열심히 길을 찾았다. 게임 속에서 지냈던 거리와는 구조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러나 학교 건물만은 내가 두 달간 지냈던 모습 그대로였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에서 홀로 사복을 입고 다니자니 눈에 띄었다. 마음이 초조하고 두근거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2학년 3반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 교실 한쪽으로 시선이 꽂혔다. 한우주가 항상 앉았던, 창가 맨 뒷자리.

한우주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 대신, 그 앞자리에 앉은 이에게 시선이 갔다.

……조현우.

조현우가 있다.

멍하니 창가를 보고 있는 조현우에게 누군가 다가가 말을 건넨다. 그 역시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걱정거리 하나 없는 사람처럼 밝게 웃고 있는 허지훈. 둘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본 적 없는 척, 교실 앞을 떠났다.

정말로, 정말로 있잖아. 조현우와 허지훈이….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복도 벽에 기대어 심호흡하고 있자면, 시끌벅적한 복도의 소음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준 있냐?”

바로 옆 반에 찾아온 임도윤이었다. 임도윤이 6반 문 앞에 붙어 서연준을 부르자, 머지않아 익숙한 이가 복도 밖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서연준까지.

나는 홀린 듯 임도윤과 서연준의 앞에 다가가 섰다. 그 둘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낯선 이의 등장에 말을 멈췄다. 물론 나를 처음 보겠지만, 나는 너희를 처음 보는 게 아닌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어… 혹시 무슨 볼일이라도…?”

서연준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나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호, 혹시 한우주….”

한우주의 이름이 나오자, 임도윤은 인상을 확 구겼다. 그러곤 볼일 끝났으니 가 보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애써 멀쩡한 낯을 하곤 말을 이어 갔다.

“…한우주 학교 안 왔어?”

“우주요? 어, 글쎄요….”

서연준은 날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서연준이 한우주의 이름에 반응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한우주 아는 형인데.’로 시작하는 나의 소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한우주의 행방을 묻는 내게, 서연준은 곤란한 듯 웃어 보였다.

“우주가 사정이 있어서요. 학교에 안 올 거예요.”

“혹시 어디 다쳤어? 아파?”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아무래도 초면인 사람에게 친구의 정보를 술술 불긴 좀 그렇겠지.

“정말 미안한데. 혹시 괜찮다면… 내 번호 좀 우주에게 전해 줄 수 있을까?”

더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간절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연준에게, 나는 내 번호를 찍어 주었다.

“안태원이라고 말하면 알 거야. 꼭 부탁할게.”

“네. 전해 드릴게요.”

수업 종이 쳤다. 서연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교실의 제자리로 돌아갔다. 완벽한 외부인이 된 처지에서 더는 이곳에 머무를 수 없어, 나는 그대로 학교를 떠났다. 서연준이 한우주에게 내 번호를 전해 줄까. 한우주가 내게 연락할까. 무엇 하나 알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당장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도, 한우주에게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

한우주에 대한 생각에서 도피하듯 공부만 하는 생활이 몇 달을 이어졌다.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 성실한 수험생이 될 수 있었다. 사실 처음 몇 달은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 덕분에 3월 모의고사를 시원하게 말아먹었지. 그게 수능 성적이었다면 난 갈 대학이 없었을 거다….

‘…난 한우주를 떠났잖아. 한우주 대신 현실을 선택했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수험생에게 할 일은 많았다. 공부는 해도 해도 끝이 없으니까. 그저 할 일에 충실하며 한우주에 대한 생각은 적게 하려 노력했다.

코끝이 시린 계절이 찾아오고, 수능일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한우주의 연락을 기다리는 몇 개월간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매일 밤 혹시 놓친 메시지는 없나 싶어 메시지 함을 확인하는 것. 수능 전날에도, 한우주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하루가 또 지나간다. 걱정이 산더미였던 것치고 수능 날은 수월하게 흘러갔다. 수험표를 놓고 오는 일도, 지각해 경찰차를 타는 일도, 배탈이 나는 일도 없었다. 국어가 생각보다 난이도가 있었지만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수학도, 영어도 늘 보던 것 이상으로 쉽게 풀어 나갔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았다.

탐구 과목을 풀기 시작했을 즈음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수능을 마친 학생들이 눈을 맞으며 저마다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나는 제2외국어까지 신청한 터라, 다른 학생들보다 귀가가 늦어졌다.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네.’

마침내 시험을 마쳤을 때 든 생각이었다. 딱히 후련한 마음도 없었다. 마치 모의고사를 치른 기분. 엄마와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느릿느릿 짐을 챙겨 든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가족에게서 온 답장인가, 싶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고생 많았어, 태원아.」

“…….”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메시지를 꽤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전부 귀가한 뒤에야, 교실을 빠져나왔다.

집에서 꽤 떨어진 낯선 학교. 6시가 훌쩍 넘은 시간. 겨울이 훌쩍 다가와 해는 짧았다. 나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메시지를 보낸 번호를 입력하곤 고민했다. 전화를 걸까? …내가 정말 걸어도 괜찮을까?

…이 메시지를 보내온 사람은, 내가 생각한 사람이 맞을까? 만약 아니라면 어떡하지.

실망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에 겁이 나, 망설이다가 나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진동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고 시선을 옮긴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오래 보지 못했음에도, 매일 마음속에서 그려 여전히 익숙한 이가 눈 안에 가득 담겼다.

정문 앞에 선 한우주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우주야.”

입술이 떨렸다. 과거의 기억이 삽시간에 덮쳐 왔다. 낯설고 기이한 공간에서 맞이한 이별 때에, 한우주에게 미처 돌려주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비로소 나의 현실에 발을 들인 한우주에게 바로 지금 해야 할 말임을 떠올린다.

작별이 아닌, 환영과 기쁨의 말로써.

“사랑해, 우주야.”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다. 하얀 눈송이가 코끝에 내려앉았다가, 온기에 금방 녹아내린다. 내 앞에 선 이는, 한우주는 기쁜 듯 미소 지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울려 퍼졌다.

“…나도 사랑해, 태원아.”

새하얀 눈이 천천히 쌓여 갔다. 우리는 헤어졌을 때처럼, 주변이 온통 하얗게 잠긴 공간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랐다. 우리는 현실에 함께 존재했으므로, 더는 헤어짐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행복감에 젖어 내리는 눈을 함께 맞이한다. 이제 더는 진심을 묻어 두지 않고, 마음껏 서로에게 속삭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진심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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