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물질은 메인수의 집착을 받는다
1.
수환이 급히 회사로 갔던 아침, 일찍 일어난 승현은 밖에 나가 아침밥으로 먹을 간단한 음식을 사고 있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한 승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갑자기 죄송합니다. 네, 네.”
카페에 전화를 걸어 오늘 알바를 쉬겠다고 했다. 주말엔 항상 하루 종일 알바를 했었는데, 오늘은 수환을 집에 혼자 두고 알바를 하러 가고 싶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샌드위치를 받아 든 승현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본의 아니게 매일 CCTV를 확인하고 알아낸 건, 수환이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는 거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수환이 일어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승현은 괜히 발걸음을 빨리했다.
“후우.”
문 앞에 선 승현은 괜히 긴장하며 손바닥을 바짓자락에 문질렀다. 매일 시큰둥하게 누르던 도어락의 비밀번호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띠띠띠띠, 띠.
삐리릭.
현관에서부터 은은하게 깔려 있는 수환의 페로몬 향에 이끌려 승현이 걸음을 옮겼다. 침실로 다가갈수록 달달하고 포근한 향이 짙어졌다.
“선…….”
달칵, 하고 침실 문을 연 승현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넓은 침대는 시트가 잔뜩 구겨져 있을 뿐, 아무도 누워 있지 않았다.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침대를 응시하던 승현이 다소 조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욕실도, 수환의 방도 찾아봤지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승현은 코끝을 맴도는 베이비파우더 향을 맡으며 수환의 방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대체 어디를 간 거지. 눈살을 찌푸린 승현은 이 이른 아침에 수환이 갈 만한 곳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은 수환에 대해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모른다기보다, 그동안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뭘 하든 싫고 귀찮기만 했다. 그를 유심히 지켜봤던 건 동거를 다시 시작하고 난 뒤 함께 한 일주일이 다였다.
그 시간은 수환에 대해 알기엔 턱없이 적었다. CCTV를 볼 때도 수환은 누구를 만나거나 연락하는 일 없이 집 안에만 있곤 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수환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불쾌한 전화를 떠올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오메가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었다.
친밀한 듯 들리던 오메가의 목소리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수환의 모습. 자신들의 속사정까지 내밀히 알고 있는 것 같은 어떤 오메가가 수환의 옆에서 교태를 부리는 상상까지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시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핸드폰을 꺼낸 승현이 곧바로 수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러나 무정한 신호음만이 승현의 귀에 들렸다. 곧이어 딱딱한 안내 음성이 흘러나오자 승현이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연달아 세 번을 더 걸고 나서 승현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수환이 자신과의 통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알파로서 오메가에게 깔린 걸 용납할 수 없는 거겠지. 어쩌면 이제 승현의 얼굴도 안 보려고 할 수도 있었다.
“하…….”
애석하게도 승현은 이대로 수환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도망간다면 쫓아가서 기어코 데려올 것이다. 얼굴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승현은 침착하게 다시 핸드폰 화면을 켰다. 앱 목록에 들어가 거의 쓰지 않던 앱을 실행했다. 등록한 GPS로 타인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불법 앱이었다.
본래 이걸 깔았던 건 승현이 아닌 수환이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깨닫고 보니 위치 추적 앱이 승현의 핸드폰에 깔려 있었다. 범인이 수환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가 여럿 있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수환은 이 앱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승현 자신이 한창 시달렸던 위치 추적 앱으로, 과거 그를 스토킹했던 이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다.
정말로 본의는 아니지만 말이다.
“화명 본사?”
수환의 위치를 알아낸 승현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수환이 너무나 의외의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렇게 의외의 장소는 아니다. 화명은 수환의 회사니까, 잠시 볼일이 있어 간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참을 수 없어진 승현이 곧바로 방을 나가 수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네가 여긴 어떻게…….”
자신을 보며 놀라는 수환의 얼굴을 승현이 지그시 응시했다. 정장을 입은 수환의 모습은 질릴 정도로 많이 봤지만, 지금은 좀 새로워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던 승현이 옆에 서 있는 도운을 흘끗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승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날 선 기운을 갈무리하며 수환에게 다가갔다.
“선배, 걱정했잖아요.”
“어? 그랬어?”
“네, 왜 전화 안 받았어요?”
전화했었다고? 놀란 수환이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진길영을 만나느라 무음으로 설정을 해 놔서 전화가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확인해 보니 승현에게서 전화가 네 통이나 와 있었다. 수환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전화 온 줄 몰랐어. 미안.”
“괜찮아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조금 풀며 승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수환에게 아무 일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 다행이었다. 그의 시선이 힐끗, 옆에 있는 도운을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수환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김도운 실장님이야. 우리 할아버지 비서실장님.”
“아….”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도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승현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이승현 씨.”
손을 맞잡은 도운이 팔을 살짝 흔들었다. 수환이 그렇게 떼를 써서 약혼한 오메가. 도운의 눈에 흥미로운 기색이 감돌았다. 소문의 그를 실제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HS는 승현의 증조할아버지가 세운 제약회사였다. 잘 나가던 HS가 무너진 건, 경영권이 승현의 아버지인 이태현에게 승계되었을 무렵부터였다.
그가 진두지휘해 개발한 신약을 복용한 환자들에게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났다. 임상 실험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부작용이, 시중에 풀리니 폭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미한 부작용에 그쳤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위험군 환자들에게 쓰인 약이라 피해가 극심했다. 유가족들의 항의와 소송이 빗발쳤다.
게다가 당시 오너였던 승현의 아버지, 이태현의 능력 부족도 HS를 위태롭게 만드는데 한몫했다. 본래 사업가가 아닌 연구자가 더 체질에 맞았던 승현의 아버지는 회사를 이끌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뒤늦게 전문 기업인을 CEO로 고용했으나, 이미 사세가 기운 HS를 일으켜 세우는 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제약회사는 문을 닫고, HS는 이름만 남았다. 승현이 대학에 입학하고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 진길영이 결혼 상대로서 승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보니 아름다운 외모에 호감 가는 인상이지만, 도운 역시 승현을 빛 좋은 개살구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뭔가 눈빛이 좀 안 좋았다. 베타인 도운은 많은 걸 느낄 수가 없지만, 보통 오메가들이 이런 분위기던가? 어딘가 위축되는 걸 느끼며 도운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볼일 다 끝났어요?”
“응. 할아버지 만나고 왔어.”
“그럼 이제 돌아가요.”
“너는? 볼일 있어서 온 거 아냐?”
“저도 다 끝났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운이 미간을 좁혔다. 승현의 몸이 수환과 도운의 사이를 가로막듯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퍽 수상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런 곳에 볼일이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아직 학생인 데다가, 다 망한 HS의 차남이 화명 본사에는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불법 위치 추적을 해서 연락이 안 되는 수환을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말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도운의 어깨가 빳빳해졌다.
“돌아가도 되는 거죠?”
“응? 응.”
승현의 물음에 수환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승현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수환은 저도 모르게 그런 승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묘하게 승현의 태도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같이 가요.”
“그래, 그러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수환이 도운을 쳐다봤다. 승현의 몸에 교묘하게 가려진 도운이 고개를 움직여 수환을 마주 쳐다봤다.
“저 갈게요. 실장님.”
“도련님….”
“다음에 봬요.”
손을 흔든 수환이 승현과 함께 로비를 빠져나갔다. 도운은 그 모습을 뒤에서 눈을 깜박이며 응시했다.
그러다가 수환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도운도 이내 몸을 돌렸다. 아마 괜한 생각일 것이다. 설마 어린 학생이 그런 짓을 할 리가. 도운은 찝찝한 기분을 애써 뿌리치며 걸음을 옮겼다.
***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맨션에 다가갈수록 수환은 점점 더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승현이 의식되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아무리 페로몬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고 해도, 하필이면 메인수와…… 파혼해야 할 상대와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심지어 자신의 포지션이 아래였다는 것도 적잖이 수환을 당황하게 했다. 차라리 술에 취해서 기억이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망할 진수환의 몸은 그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기, 난…….”
“선배.”
“응?”
일단 방 안에 들어가 피신하려 했던 수환이 멈칫하며 승현을 쳐다봤다. 승현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침에 뭐라도 먹었어요?”
“아침?”
아침? 아침밥 말하는 건가?
설마 그걸 승현이 물을 줄은 몰라서 수환은 당황했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말았다.
“아니.”
“그럼 샌드위치 드실래요? 아침에 사 왔는데.”
“샌드위치?”
승현이 이끄는 대로 식탁으로 가니 정말로 샌드위치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비록 시간이 지나 커피는 다 식어 있었지만, 샌드위치는 지금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침에 이거 사려고 나갔었던 건가?
수환은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너 오늘 알바는?”
“오늘은 안 가요.”
알바까지 쉬고 이걸 사 왔다니. 수환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식탁에 앉았다.
“잘… 먹을게.”
“네.”
승현이 자상하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는 수환이 식탁에 앉자 식은 커피를 다시 데우고 냉장고에서 생수도 꺼내 건네주었다. 샌드위치 재료를 하나씩 말하며 수환이 못 먹는 게 있는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겨우 받은 샌드위치를 한입 물며 수환은 연신 승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나 쌀쌀맞았던 승현이 왜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 건지, 수환은 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근데 정말 예쁘다.’
수환은 새삼 앞에 앉은 승현을 흘끗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길을 끄는 외모였는데, 지금은 왜인지 더 예뻐 보였다. 알파인 자신만큼이나 키도 크고 덩치가 있는 편인데도 얼굴 때문인지 자꾸만 눈길이 가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술 마시고 사고 친 전날 밤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았다.
‘나 설마 얼빠인가?’
샌드위치를 먹으며 속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얼떨결에 승현과 밤을 보낸 게 아직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메인수와 일을 저지른 건 꽤 큰일이었다. 하지만 승현의 얼굴만 보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자신이 말로만 듣던 얼빠인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선배.”
“으응?”
샌드위치를 먹다가 불쑥 승현이 수환을 불렀다. 딴생각을 잔뜩 하던 수환이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승현이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님은 왜 만났어요?”
“할아버지? 아….”
수환의 손안에서 샌드위치 포장지가 부스럭거렸다. 할아버지인 진길영을 생각하니, 그가 쳤던 호통 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파혼. 어서 파혼하라던 그 말. 그러나 파혼을 하려면 상대방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물론 화명이라면 상대방의 의사 따윈 상관하지 않고 멋대로 파혼을 진행할 수 있겠지만, 수환은 승현을 상대로 그렇게 하기 싫었다. 진길영도 주변 체면치레 때문에 억지로 파혼하는 걸 꺼리고 있었다.
그러니 빨리 파혼하려면 승현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 그게…….”
망설이던 수환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우리 파혼하는 거, 물어보셨어.”
“…….”
“언제 파혼할 거냐고.”
흘끗 본 승현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환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할아버지한텐 미리 허락을 받았었거든. 근데, 한 달이나 걸린다고 하니까 좀… 싫어하시더라고.”
왜인지 어두워 보이는 승현의 얼굴을 흘끗거리다가, 수환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저기, 우리 파혼하는 거 있잖아…….”
“선배.”
“응?”
수환의 말을 중간에 끊은 승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는 그렇게 나랑 파혼하고 싶어요?”
“뭐?”
승현의 물음에 수환은 당황했다.
그렇게 파혼하고 싶냐고?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원작에서 하차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수환은 승현과 멀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환의 사정일 뿐이다. 무엇보다 파혼하고 싶은 건 수환이 아닌, 진수환에게 시달린 승현일 것이다. 수환이 고민하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하지만 우리, 파혼하지 않으면…….”
“…….”
“결혼… 해야 하는데?”
그 말로 인해 거실 안에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새삼스럽게 생각하니 너무 무거운 주제였던 것 같다. 결혼이라니. 수환이 뻘쭘하게 볼을 긁적였다.
당연히 싫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승현의 얼굴을 흘끗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승현의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수환의 생각과 달리, 승현의 얼굴은 전혀 다른 이유로 굳어져 있는 것이었다.
결혼. 만약 한 달 뒤에 수환이 바라는 대로 파혼을 해 준다면, 그는 집안에 의해서든, 아니면 본인의 의사로 인해서든 곧바로 다른 오메가와 약혼할 것이다. 그리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그 오메가와 결혼도 하겠지.
수환의 곁을 누군가가 차지한다고 생각하자, 또다시 머릿속이 분노로 새하얗게 변했다.
빠득, 하고 이를 가는 승현을 수환이 두려운 눈으로 쳐다봤다.
역시 엄청 싫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수환은 새삼 상처받았다.
아니, 자신은 상처받을 자격도 없었다. 이물질 따위가 무슨.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승현에게 물었다.
“미안, 괜한 걸 말해서……. 기분 나빴지?”
“…….”
“승현아?”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승현이 고개를 들었다. 다소 어두운 색채의 두 눈이 수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
“네.”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져 눈 밑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수환은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만약에 제가, 파혼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요?”
“응?”
승현의 말이 조금 느리게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파혼하고 싶지 않다고? 지금 그렇게 말한 거 맞나?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수환이 곧 놀라며 승현을 응시했다.
“왜?”
그러자 승현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사르르, 미소 지은 승현이 테이블 위에 있는 수환의 손을 잡았다. 승현의 손가락이 단단하게 수환의 손을 옭아맸다.
그리고 붉은 입술에서 폭탄 같은 말이 떨어졌다.
“저…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
좋아한다고? 나를?
수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 메인수가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게 맞는 건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지 수환은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참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수환이 겨우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 …나를?”
“네.”
“아니, 왜… 그치만… 너 나 싫어했잖아.”
분명 그랬다. ‘이승현’은 ‘진수환’을 싫어했다. 아니, 단순히 싫어한 게 아니고 혐오하기까지 했다. 그건 결코 변하지 않을 사실이고 과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승현은 어젯밤을 기점으로 수환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대로 순순히 파혼해 줘서 수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순진하게도 수환은 여전히 승현이 자신을 싫어하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것 같은데, 이젠 아니다. 승현은 달라지기 시작한 자신의 감정을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다. 곧 승현의 페로몬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이젠 아니에요.”
“아….”
“선배… 선배도 나를 좋아하잖아요. 그렇죠?”
달콤한 향기가 수환의 주변을 휘감았다. 승현의 페로몬을 맡으니 싫어도 알게 되었다.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페로몬이 상냥하고 향긋하게 다가왔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수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혼미한 정신으로 멍하니 아름다운 메인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읏.”
“선배…….”
승현의 보드라운 입술이 수환에게 닿았다. 상냥한 키스였다. 승현은 조심스럽게 키스를 이어갔고, 수환 역시 두 눈을 감은 채 승현의 혀와 입술을 느꼈다.
맞잡은 손이 뜨거웠다. 수환 역시 이대로 휩쓸려 버리고 싶었다. 그냥, 그냥 이대로…….
“……!”
그러다 어떤 장면이 수환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주변은 어두웠고, 수환의 몸은 무언가로 묶여 있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수환을 누군가가 내려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게 넘볼 걸 넘봐야지.]
낮은 목소리가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수환은 직감했다. 곧 자신이 죽게 되리라고.
“헉……!”
“읏!”
놀란 수환이 키스하고 있던 승현을 확 밀쳤다. 그 잠깐의 환상을 본 것만으로도 온몸이 땀에 젖어버렸다. 그리고 자꾸만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흔들리는 눈으로 승현을 바라보던 수환이 비명처럼 외치며 몸을 돌렸다.
“미, 미안!”
그리고 승현을 놔두고 방 안으로 뛰어갔다.
***
주말 내내 수환은 끙끙 앓았다.
그가 본 환상은 소설에서 진수환이 맞이하는 엔딩 장면이었다.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떠올라 수환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마치 메인수를 넘보면 너도 똑같이 죽게 될 거라는 경고처럼.
“싫어, 싫어…. 죽기 싫어…….”
잠을 자면서도 수환은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수환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승현이 걱정하며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수환이 완강히 거부했다. 그리고 승현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경기를 일으키니, 승현도 차마 수환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하나밖에 없는 침실을 수환 혼자서 쓰게 됐다. 주말 내내 승현이 어디에 있었는지 수환은 알지 못했다. 신경 쓸 정신도 없이 아팠기 때문이다.
삐비비빅. 삐비빅.
“아.”
겨우 정신을 차린 건,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이었다. 학교 가는 시간에 맞추어 자동으로 설정해 놓았던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난 수환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연하게도 침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렴풋하게 승현이 주변을 맴돌다 나간 기억이 났다. 승현의 시트러스 향 페로몬이 침실 안에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수환이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그렇게 잤는데도 아직 미열이 남아 있었다. 충격의 여파가 아직도 몸을 내리눌렀다.
승현에게 미안한 짓을 했단 자각은 있었다. 그의 고백을 그렇게 무참히 거부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승현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은 너무 보잘것없고 나약했다. 원작을 거스르며 승현을 가질 용기 따윈 없었다.
우울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던 수환은 미처 끄지 못한 알람을 해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몸 상태면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나을 텐데, 성실하기 짝이 없는 성격은 학교를 빠진다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땀으로 젖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실을 지나치는데 식탁 위에 무언가가 보였다.
“……?”
가까이 다가가니 그릇 안에 죽이 담겨 있었고, 랩으로 둘둘 싸여 있었다. 아직 좀 따끈한 걸 보니 승현이 아침에 준비해 놓고 나간 모양이었다.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승현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차마 외면할 수가 없어서 죽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어느덧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서 수환은 황급히 집을 나섰다.
“허억, 헉.”
학교가 집에서 가까우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늦을까 봐 뛰기까지 했는데, 다행히 강의 시간 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의실로 향하던 수환은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형.”
“…….”
“수환 형.”
“……?”
여전히 자신을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신경 쓰지 않으며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수환을 불렀다. 처음에는 자신을 부르는지도 모르고 걸어갔지만 목소리의 주인이 수환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수환은 결국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봤다.
“오랜만이네.”
누구지? 수환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그게 기분 나빠서 찡그리는 얼굴처럼 보였는지, 남자는 피식 웃으며 수환을 응시했다.
단정하게 잘라 가지런한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짙은 눈썹과 선이 굵직한 이목구비가 제법 매력적인 미남이었다. 그에게서 물씬 풍겨 나오는 머스크 향으로 알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꽤 강한 페로몬 향이었다. 절제를 잘하는 편인지 불쾌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열성 알파인 진수환의 몸이 절로 딱딱하게 굳어 긴장하고 있었다. 최소한 일반 알파, 아니면… 우성 알파일 수도 있었다.
수환이 알고 있는 우성 알파는 딱 한 명이었다. 긴장한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수환이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주건율?”
“응, 형.”
“……!”
진짜 주건율이라니.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난 수환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원작의 메인공, 주건율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요즘 얼굴 보기 힘드네. 형.”
“아…….”
“모임도 잘 안 나오고.”
주건율이 말하는 모임이란, 알파들만 모이는 사적 모임이었다. 참석하는 인원의 대부분이 대기업의 자제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집안의 젊은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수환과 주건율은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진수환은 화명의 자제였고, 주건율은 화명 못지않은 대기업인 한성의 귀한 외동아들이었다.
비슷한 나이의 둘은 항상 비교를 당하기 일쑤였다. 우성과 열성이라는 형질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둘 다 어쨌든 알파였고, 쟁쟁한 집안의 자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열성 알파인 진수환은 주건율을 이길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지,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주건율을 직접 마주한 수환 역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우월한 사람을 수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흠, 좀 바빴어.”
괜히 목이 마른 느낌에 수환이 헛기침을 하며 겨우 대답했다. 긴장한 티를 내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맹수를 앞에 둔 초식 동물처럼 몸이 굳었다.
그런 수환을 눈치채지 못하고 주건율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수환에게서 물씬 풍기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끼며 입꼬리 끝을 올렸다.
“그래. 요즘도 즐기느라 바쁜 것 같네.”
아무래도 수환의 몸에서 풍기는 승현의 페로몬 때문에 오해한 모양이었다. 진 회장도 수환을 보자마자 또 오메가랑 뒹굴었냐고 호통을 쳤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며칠 지나서 향이 좀 약해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승현의 페로몬이 강한 건지, 아니면 주건율의 감이 좋은 건지.
그렇지 않으면 둘 다인가. 두 사람 다 우성이니까.
낯빛이 어두워진 수환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냐.”
“아니라고?”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주건율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자신보다 조금 낮은 눈높이에 있는 수환을 삐딱하게 내려다봤다.
오메가 냄새를 이렇게 풀풀 풍기면서 다니는 주제에. 어떤 오메가인지 마킹 한번 제대로 해 놨다. 알파도 이렇게 집요하게 마킹해 놓지 않을 것 같은데. 너무 강렬한 향이라서 코끝까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진수환은 상대 오메가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마킹한 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전혀 느끼지 못한 건가. 하긴, 열성이니까. 오메가가 페로몬을 미친 듯이 주입할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허리만 놀렸을 수도 있겠지.
다소 무시하는 눈으로 수환의 얼굴을 쓱 훑은 주건율이 생각과는 다르게 다정다감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특기였다. 속으로는 상대를 무너뜨릴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티 내지 않는 것. 오히려 자신을 아군이라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미소와 말투. 진수환은 번번이 그에게 속기만 했었다.
“흐응, 뭐, 그래. 잘 지냈어? 요새 왜 이렇게 만나기 힘들어?”
“학교에 잘 안 오니까 그렇지.”
곧 졸업인 수환은 이번 학기에 수강 신청을 많이 하지 않았다. 특히 전공과목은 점수를 다 채웠기 때문에 더더욱 1학년인 주건율과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이렇게 교양 강의를 들으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근데 형,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다?”
날카로운 눈으로 수환을 살피던 주건율이 물었다. 오랜만에 본 수환은 묘하게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깔끔하게 넘기던 앞머리를 내리고, 평소엔 입지 않던 캐주얼한 옷을 걸친 수환은 전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아니, 지금의 모습이 더 제 나이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내가?”
괜히 찔린 수환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는데, 왠지 감이 좋은 주건율은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환의 손가락 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말 내내 수환을 아프게 한 원인이 떠올랐다.
[그러게 넘볼 걸 넘봐야지.]
차가운 목소리가 눈앞에 있는 주건율과 겹쳐졌다. 기억 속의 목소리와 다르게 수환에게 말을 거는 주건율의 음성은 다정했으나, 계속해서 몸이 떨려왔다.
안 돼. 정신 차려. 주건율 앞에서 수상한 티를 내면 안 돼.
속으로 읊조린 수환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수환을 주건율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형?”
“응.”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수환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맹수 앞에 선 초식 동물마냥 몸이 움찔 떨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주건율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있었다.
“어디 아픈 거 아냐?”
“아, 사실 좀 안 좋아.”
“저런.”
짐짓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찬 주건율이 눈을 가늘게 떴다. 행색이 좀 달라지긴 했으나, 어차피 진수환은 진수환이다. 곧 쓰다 버릴 말 같은 게, 조금 이상해 보인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생각을 정리한 주건율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 그래서 언제 돌려줄 거야?”
“돌려주다니?”
주건율의 말에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뜬금없이 돌려 달라니. 고개를 갸웃하는데, 주건율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질리지 않았어?”
“뭐?”
뭐지. 진수환이 주건율한테 게임기라도 빌렸나?
공교롭게도 이런 자잘한 일상 대화는 소설에 나와 있지 않은지, 수환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다고 하면 또 수상해 보일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수환은 더듬거리며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어, 어…. 돌려줄게. 조만간.”
“언제?”
“곧?”
듣는 이로 하여금 신용이 가지 않는 어눌하고 형편없는 대답이지만, 주건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래. 기다릴게.”
“어, 그래.”
어쩌지. 지금이라도 뭘 빌려 갔는지 물어봐야 하나. 재벌가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주건율이 저렇게 손꼽아 기다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중요한 물건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수환은 더 이상 제정신으로 주건율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이대로면 긴장해서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수환이 저도 모르게 발을 뒤로 질질 끌었다.
“나 강의가 있어서… 이만 갈게.”
“그래. 잘 가, 형.”
“어….”
선선하게 손을 흔드는 주건율에게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수환이 몸을 돌렸다.
서둘러 사라지는 수환의 뒷모습을, 주건율은 느긋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
수환은 어떻게 강의실까지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망치듯이 주건율을 피해 달아났다. 뒤를 돌면 자신을 죽이려는 주건율이 싸늘한 얼굴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 하아.”
숨을 몰아쉬며 얼른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환이 강의 시작하기 아슬아슬한 시간에 왔기 때문에 강의실 안은 이미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뒤에는 거의 자리가 없었고, 수환은 앞으로 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그러다 승현과 동기들이 있는 걸 발견했다. 수환은 낭패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다. 월요일 첫 강의는 승현과 같은 강의였지.
혹시라도 승현이 자기를 봤을까 싶어서 수환은 얼른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바로 빈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은 수환이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머뭇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저…….”
“네?”
수환이 놀라며 옆을 쳐다봤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흠칫, 놀라더니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자리… 있어요.”
“아.”
책상 위를 다시 보니, 수환이 보지 못했던 작은 파우치가 올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자리를 맡기 위해 올려놓은 것 같았다. 수환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창피해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여학생이 손으로 수환의 옷자락 끝을 살짝 붙잡았다. 그리 강한 손길은 아니었지만, 수환은 움직이는 걸 멈추고 여학생을 돌아보았다.
“왜요?”
“아니, 저기, 그…….”
그러나 수환을 붙잡은 여학생도 왜인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도 왜 이런 행동을 한 건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 사람, 오메가인가?
여학생에게서 희미하게 풍기는 페로몬 향을 맡으며 수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순해 보이는 여학생의 얼굴을 수환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수환이 기다려 주자, 여학생은 곧 용기를 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하지만 끝내 여학생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선배.”
“응?”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수환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승현이 다가와 그의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승현이 빙긋 웃었다.
“여기서 뭐 해요?”
“어? 나?”
“네.”
달콤한 미소를 짓던 승현이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흠칫, 승현과 눈이 마주친 여학생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너무나도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금방 고개를 들어 수환을 바라보는 승현의 얼굴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저쪽에 자리 잡아 놨어요.”
“자리?”
“네.”
“내 자리?”
“그렇다니까요.”
“어어.”
수환은 결국 승현에게 질질 끌려갔다.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여학생이 신경 쓰여서 살짝 뒤를 돌아보았는데, 왜인지 여학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곧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승현이 자리를 맡아 놨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승현의 옆자리에 가방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거기에 앉으라는 듯 승현이 자기 가방을 치웠다.
“…….”
“…….”
“…….”
“…….”
근데, 이 어색한 침묵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자리에 앉아야 하는 건가? 수환은 승현의 동기들이 보내는 날 선 시선에 몸을 긴장시켰다. 마치 오물을 보는 듯이 노려보는 세 쌍의 시선에 수환이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려고 했을 때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희… 영이?”
“네, 어서 앉으세요.”
희영까지 자리를 권하자, 수환은 차마 거절하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때마침 강사까지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수환이 뻘쭘해하면서 승현의 옆에 앉았다.
다행히 강의를 시작하면서 수환에게 향했던 시선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바로 옆에 승현이 있고, 동기들은 수환과 떨어져 있는 자리라서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 되자 또다시 가시방석이 시작되었다. 연강으로 진행되어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는 탓이었다. 화장실이라도 가서 이곳을 벗어날까 했지만, 차마 승현의 동기들이 막고 있는 곳을 지나갈 용기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제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는데, 승현과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승현아, 그래서 오늘 어떡할 거야?”
“아, 오늘은…….”
“너 생일 당일은 안 된다며, 오늘 마시자.”
“……?”
생일? 누구 생일?
수환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옆을 조심스럽게 힐끔거리자, 승현과 친구들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다들 오늘 모이는 거지? 치사하게 빠지기 없기야.”
“그럼, 그럼. 누구 생일인데.”
“아, 승현이 생일 내일이라고.”
“술 마시다 보면 12시 넘겠지, 뭐.”
내일이 승현이 생일이라고?
수환이 놀란 눈으로 승현을 흘끗 쳐다봤다. 그러자 승현도 수환을 의식한 듯 힐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
얼른 눈을 돌린 수환이 정면을 응시했다. 대화를 엿듣고 있던 걸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런 수환을 잠시 쳐다보던 승현이 고개를 돌렸다.
“얘들아, 나 오늘 못 갈 것 같아.”
“뭐? 왜?”
“약속 있어?”
동기들이 서운해하며 한마디씩 했다. 수환도 의아했다. 학기 초라 과제도 없고, 중요한 일이 아니면 생일 전날 동기들과 만나도 괜찮을 텐데. 특히 승현은 동기들을 잘 챙기는 성격이니 말이다.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집중하던 수환은 곧 들리는 승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집에 일찍 돌아가려고.”
“에엥, 왜? 너 혼자 산다며.”
“음, 그게…….”
“스, 승현아!”
왜인지 승현이 폭탄 발언을 할 것 같은 낌새에 수환이 놀라 황급히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수환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수환은 알아채지 못하며 승현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혹시 나 때문이면 괜찮아. 이제 다 나았어.”
“하지만…….”
“그러니까 친구들이랑 놀고 와. 응?”
수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동기들은 대화 내용을 듣지 못했다. 동기들이 놀란 눈으로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는 수환과 승현을 쳐다봤다.
잠시 후,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 승현이 동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오늘 갈게.”
“어? 어…….”
기뻐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동기들은 떨떠름했다. 자꾸만 옆에서 흘끔거리는 수환에게 저절로 눈길이 갔다. 승현이 몸을 틀어 은근슬쩍 동기들의 시야를 차단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었다.
“몇 시쯤 만날까?”
“어… 글쎄?”
“그냥 강의 끝나고… 가면 되지 않아?”
“아, 그럼 난 집에 좀 들렀다 갈게.”
떨떠름한 얼굴을 하면서도 동기들은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 갔다. 그리고 곧 쉬는 시간이 끝나고 강사가 다시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휴우, 수환이 안도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하마터면 자신 때문에 승현이 소중한 생일 전날을 허투루 보낼 뻔했다. 친구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건 못 할 짓이었지만, 결과가 좋으니 만족스러웠다.
그나저나 생일이라. 승현이 생일. 수환은 지루한 강의의 내용이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승현의 생일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가 머릿속에 콕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원작의 내용을 떠올려 봐도, 승현의 생일이 언급된 부분은 없었다. 시기상으로 지금은 원래 승현이 진수환에게 감금당해 고통받고 있을 때인데…….
이 새끼 설마 미역국도 안 끓여 주고 그 짓만 해댔던 건가……?
수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진수환 그놈은 승현이 생일인 걸 알고 있었을까? 알았다면 그러지는 못했을 테지?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수환은 괜히 양심이 따끔거려 승현의 반듯한 옆얼굴을 흘끗거렸다.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얼굴이 왜인지 처연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승현은 집안이 망한 뒤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살아서 생일에 변변찮은 생일상 한번 받아 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생일에는 당연히 따끈한 미역국과 갈비찜, 잡채가 있는 생일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승현의 얼굴을 흘끔거리던 수환이 속으로 결심했다. 자신이 직접 승현의 생일상을 차려 주겠다고 말이다. 그는 괜한 의무감에 불타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나 요리할 수 있나?’
의욕은 좋았으나 기억이 없는 수환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꼭 승현에게 미역국을 먹여 주고 싶었다.
“선배, 저 오늘…….”
“미안! 나 급한 일이 있어서!”
“급한 일이요?”
강의가 끝나고 말을 거는 승현에게 수환이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승현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지금의 수환은 오직 단 하나의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빨리 장 봐 오자! 늦기 전에!’
강의가 끝나자마자 마트에서 장을 봐 오고, 음식 준비를 하면 아슬아슬하게 오늘 안에는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승현이 오늘은 친구들 만나서 늦게 오니까,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화려한 생일상을 차려 주는 것이다. 완벽한 계획에 수환이 벌써부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 그럼 나중에 봐!”
“선배…….”
당황하는 승현을 내버려 두고, 수환이 잽싸게 강의실을 나갔다. 승현이 그 모습을 얼떨떨한 눈으로 쳐다봤다.
***
“후우.”
짐을 한가득 가지고 온 수환이 현관 앞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양손에 들고 있던 빵빵한 비닐봉지를 잠시 내려놓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수환이 움찔했다.
“어라?”
수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동안 무심코 누르던 현관 비밀번호, 지금 보니 이 숫자는 승현의 생일이 아닌가?
[0912]
바로 내일 날짜였다. 승현의 생일 말이다.
“뭐지?”
우연히 겹친 건가? 아니면 진수환이 승현의 생일을 알고 비밀번호로 설정한 건가?
만약 모르고 설정한 거면 대단한 우연이고, 알고 설정한 거면 소름이 다 끼쳤다. 스토킹하던 사람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자기 생일로 설정해 놓다니. 한 달 넘게 비밀번호를 누르던 승현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지.
“비밀번호… 바꿔야 하나.”
고민하던 수환은 우선 지금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승현의 생일과 똑같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들고 온 짐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하아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주말에 앓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몸 상태가 좋진 않았다.
그나마 튼튼한 알파의 몸이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걸 다 들고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수환이 흘낏 시계를 쳐다봤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12시 전에는 다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승현은 어차피 친구들과 시간 보내느라 늦게 들어올 테니, 내일 아침에는 번듯한 생일상을 차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우선은 재료 손질부터 하자.
수환은 호기롭게 팔을 걷어붙였다.
***
“후.”
잠시 술집 밖으로 나온 승현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 없이 쏟아진 질문에 머리가 아파진 탓이다.
승현은 방금 술집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승현이 강의실 안에서 수환을 데려온 것 때문에 친구들은 난리가 났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승현은 그저 미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동기들에게 다 말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모든 게 불안하기만 했다.
수환은 여전히 자신과 파혼하길 바라고 있었고, 충동적으로 한 고백은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그때 말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까. 하얗게 질려 자신을 밀어내던 수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런데도 승현은 어떻게든 수환을 붙잡아 둘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자신의 생일이라는 걸 안 수환이 그렇게 밀어내기만 했는데.
떠올리니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오늘은 꼭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렇게 정색을 하며 떠밀 건 뭔가.
핸드폰을 꽉 쥔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급한 일이 있다며 강의실을 뛰쳐나간 수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그렇게 급히 나간 건지.
혹시 누구를 만나러 간 건 아닐까. 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의실 안에서 수환에게 말을 걸었던 오메가 여학생이 떠올랐다. 달라진 수환을 신기하게 보거나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여럿 생기고 있다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동기들만 해도 진수환이 어딘가 달라진 것 같다고, 승현의 눈치를 보며 말하곤 했었다.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달라진 수환이 얼마나 귀여운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자신의 눈에만 그렇게 귀여워 보일 리가 없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던 승현이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조용한 느낌의 통화 연결음이 귀를 울렸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제길.”
무뚝뚝한 안내 음성에 승현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연달아 다섯 번을 더 걸어도 똑같았다.
이 시간에 연락 두절인 진수환.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오메가.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수환은 사실 전부터 오메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물론 서로 진심은 아니었고, 이해관계가 확실한 단발성 만남일 뿐이었다. 알파에 재벌. 돈을 물 쓰듯이 하는 진수환에게 들러붙는 오메가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게 전에는 수환을 경멸하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게다가 그가 열성 알파인 것도 의외로 오메가들이 선호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일반 알파나 우성의 센 형질을 부담스러워하는 오메가가 없는 것도 아니기에, 베타만큼이나 형질이 약한 열성 알파에게 안정감을 느끼는 오메가도 더러 있었다.
빠득, 저도 모르게 이를 간 승현이 이번엔 위치 추적 앱을 켰다. 다른 오메가를 만나게 둘 줄 알고? GPS를 추적해 떠오르는 수환의 위치를 집착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집에 있잖아?”
그러나 곧 드러난 결과에 승현이 눈을 크게 떴다. 놀랍게도 수환은 지금 집에 있었다.
설마 집에서 오메가를 만나고 있는 건가? 자신을 쫓아내고?
머리 한구석에서는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불안해졌다. 망설이던 승현은 집 안에 설치한 CCTV를 보기 위해 앱까지 켰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핸드폰 화면에 집 구석구석에 설치한 CCTV가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실이었다. 불이 켜진 거실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원래 이 시간쯤에는 항상 수환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곤 했었다.
얼굴이 굳어진 승현이 다른 곳을 더 켜 보았다. 수환의 방, 자신의 방, 마지막으로 침실. 화장실과 욕실만 빼고 다 체크해 보았다. 그러나 수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초조해진 승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위치는 분명 집으로 나왔는데. 설마 핸드폰을 두고 나간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하던 승현은 아직 보지 않은 화면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실과 연결된 부엌이었다. 평소엔 둘 다 잘 들어가지 않는 곳이라 무의식적으로 체크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승현이 부엌 쪽의 화면을 켰다.
“……!”
화면 속에 그토록 찾던 수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보자, 곧 수환이 하고 있는 게 뭔지 깨달았다.
온갖 재료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지저분한 부엌 안에서 수환이 열심히 무언가를 휘젓고 있었다. 커다란 냄비 앞에 선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진 않지만 울상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주변에 놓인 재료들을 보니 수환이 하고 있는 게 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수환은 지금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아마도, 생일인 자신에게 먹이기 위해서.
그 모습을 보는 승현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