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물질은 메인수의 집착을 받는다 3화 (6/29)

3.

상당히 문란한 나날이 이어졌다. 눈을 뜬 수환이 멍한 눈으로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봤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정도는 실수라고 우길 수 있지만, 세 번째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세 번째부터는 수환도 정신이 멀쩡했었다.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제 두려운 마음이 든다기보다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초연해지고 있었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마음이 이러할까. 수환이 조용히 자신의 최후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을 때였다.

“…선배.”

“……!”

나른한 목소리가 들리고, 옆에서 뻗어온 팔이 수환의 몸을 끌어안았다. 쪽, 하고 뺨에 짧은 입맞춤을 한 승현이 눈을 휘며 웃었다.

“왜 벌써 일어났어요. 좀 더 자요.”

“아.”

자신을 매일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있다는 자각도 없는 메인수가 예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원망하고 싶어도 저 얼굴만 보면 억하심정이 사르르 녹아버리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냥, 눈이 좀 일찍 떠졌어.”

이제 슬슬 승현과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이 눈을 뜨는 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그러나 여전히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하며, 지금도 승현의 품에 안겨 있었다.

“더 자면 안 돼요? 아직 시간 남았는데.”

“어…….”

정말로 졸린 듯, 승현이 잠투정을 부리며 코끝을 수환의 어깨에 부볐다. 이럴 땐 평소 어른스럽게 굴던 승현이 제 나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자자.”

“먼저 나가면 안 돼요.”

“알았어.”

거듭 대답하자, 승현이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그는 유독 혼자 눈을 뜨는 걸 싫어했다. 계속 혼자 살아서 외로웠던 건가.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수환은 승현이 다시 잠들 때까지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러나 새근새근 잠든 승현을 내려다보는 수환의 얼굴은 또다시 어두워졌다.

‘아직 이 정도는 괜찮겠지?’

소설과 많이 어긋나 버리긴 했지만, 한 달 뒤에 어떻게든 파혼만 한다면 문제없겠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수환은 낙천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수환이 맹렬하게 현실 도피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잠시 후,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승현이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그는 나가기 전에 수환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도 어디 안 나갈 거죠?”

“음…….”

수환은 러트를 핑계로 학교를 쉬고 있었다. 사실 강의가 몇 개 없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 빠져도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달만 설렁설렁 다니고 취업계를 낼 테니까. 그래서 오메가에 비하면 발정기가 빨리 지나가는 알파의 러트 때문에 쉰다는 어이없는 이유도 강사들에게 제법 먹히고 있었다.

“응.”

“일찍 올게요. 오늘은 뭐 사 올까요?”

요즘은 승현과 매일 저녁밥을 같이 먹고 있었다. 어제도 승현이 포장해 온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러나 오늘은 자신이 사고 싶었다. 가뜩이나 학교 다니면서 주말에 알바하느라 힘든 승현에게 더 얻어먹고 싶지 않았다.

“아냐, 오늘은 내가 밥 시켜 놓을게.”

“그럴래요?”

“응, 피자 어때?”

“좋아요.”

웃으면서 대답한 승현이 현관 앞에서 손을 뻗었다. 수환의 양 볼을 두 손으로 잡고 도장을 찍듯이 입술을 꾹 눌렀다.

“다녀올게요.”

“으응.”

얼떨결에 신혼부부가 하는 것처럼 승현을 배웅하고, 수환은 진이 다 빠져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요 며칠 승현은 제 욕망을 숨기지도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환은 그에게 휩쓸리기만 했다.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이젠 깔리는 것도 제법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만 아직도 다소의 문제는 남아 있었다.

러트가 왔을 때 수환의 몸을 구속한 BDSM 도구들. 그것들에 승현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문제였다. 어젯밤에는 핑크색의 그것……. 남성의 성기 모양을 본뜬 작은 그 물건을 수환의 아래에 집어넣으려고 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수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매번 넣을 때마다 아파하니 길을 들여야 하지 않냐면서 넣으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울고불고 말려서 넣진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언젠가 진짜 실행할 것만 같아서.

솔직히 승현과 하는 것 자체는 좋지만, 매니악한 물건들까지 받아들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망할 진수환.”

하여간 사사건건 진수환이 문제였다. 왜 저런 물건들을 좋다고 받아 와서는.

오늘이야말로 저 물건들을 죄다 처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오늘이 쓰레기 버리는 날이었던가? 슬슬 집안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수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끙차.”

간단한 집안일 정도는 수환이 하고 있었다. 전처럼 가사 도우미를 부른다면 편하겠지만, 승현과 사는 집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다행히 웬만한 집안일은 수환이 할 줄 알았기에 아직까진 큰 문제가 없었다.

기억은 없지만 몸에 밴 습관 같은 걸까. 확실히 자신은 빙의하기 전에 소시민으로 살았었나 보다. 빨래를 걷으며 수환이 멍하니 생각했다.

“에구, 허리야.”

그렇게 수환이 등을 두드리며 거실에 돌아왔을 때였다.

드르륵. 드르르륵.

“……?”

소파 위에 놔뒀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 수환이 다가가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김실장]

오랜만에 온 도운의 전화였다. 수환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실장님?”

―아, 도련님.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무슨 일이세요?”

수환이 묻자 도운이 난감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혹시 제가 보내드린 메시지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메시지요?”

놀란 수환이 통화를 유지한 채 문자함을 살폈다. 그러자 읽지 않은 문자 중에 도운의 이름이 보였다. 수환이 멋쩍어하며 수화기 쪽에 입술을 댔다.

“아, 죄송해요. 제가 못 봤네요.”

―후, 어쩐지 답장이 없으시더니…….

“그러니까, 문자 내용이… 어?”

눈으로 얼른 문자를 훑던 수환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선이요? 금요일이면… 오늘?”

―네, 그렇습니다.

“하…….”

―아직 준비하지 않으셨겠죠. 제가 모시러 갈 테니 그때까지만 준비해 주십시오.

“지금 오신다고요?”

―네, 30분쯤 걸릴 것 같습니다.

“아.”

도운이 직접 온다고 하니 미적거릴 수도 없었다. 머리를 벅벅 긁고 수환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금방 가겠습니다.

뚝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던 수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코 오늘 진 회장이 말한 오메가랑 선을 보겠구나.

‘승현이한텐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지금의 승현이 선보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화낼지. 그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형식적인 맞선 자리니까. 승현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갔다 와도 괜찮을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선을 보는 오메가도 망나니로 유명한 진수환과 또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

생각을 정리한 수환이 승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승현아, 난데.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좀 늦게 돌아올 것 같아.

피자 시켜 놓을 테니까 먹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메시지가 좀 삭막한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끝에 이모티콘을 하나 붙였다. 앙증맞은 강아지가 손을 흔드는 이모티콘이었다.

“음…….”

아직 수업 중인지 승현은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끝나고 보겠지, 뭐. 수환은 가볍게 생각하고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

“여깁니다.”

“아, 네.”

도운의 차는 멋들어진 호텔 앞에 멈춰 섰다. 화명의 계열사가 운영하는 호텔 중 하나였다. 수환이 긴장하며 차에서 내렸다.

“끝나고 모시러 올까요?”

“아뇨. 제가 알아서 돌아갈게요.”

“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하, 네.”

좋은 시간이라.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색하게 웃은 수환이 도운을 보내고 호텔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호텔에 진수환의 얼굴이 알려져 있는지, 수환을 알아본 직원들이 알아서 자리를 안내했다. 다행히 이런 건 참 편했다. 수환은 괜히 이미지를 깨지 않으려 입술을 꾹 다물고 바닥만 노려봤다.

“안녕하세요. 진수환 씨.”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자 새하얀 얼굴을 가진 예쁘장한 남자가 수환의 앞에 앉아 있었다. 수환도 그에게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초리가 조금 묘해졌다. 수환이 멀뚱하게 쳐다보자, 맞선 상대가 능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삼영의 박하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박하민 씨. 저는 화명의…….”

회장이 아닌 도운이 선보는 상대의 프로필을 보내 줬었지만, 수환은 그걸 읽지 못했다. 선보는 것도 오늘 알아서 허겁지겁 달려온 참이었다.

그런 수환이 상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 또다시 그의 머릿속으로 소설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박하민. 이 소설의 서브수였다.

맙소사, 억지로 선보는 자리에서 서브수를 만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진수환 씨?”

“아, 죄송합니다.”

당황하던 수환이 급하게 표정을 감추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잔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제가 좀 긴장했나 봅니다.”

“겉보기와 다르게 귀여우시네요.”

“네?”

테이블 위에 다시 물잔을 올려놓던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하민이 대놓고 쿡쿡 웃었다.

하민의 눈이 수환을 훑었다. 열성 알파라기에 베타와 다름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법 괜찮아 보였다. 게다가 외모도 퍽 하민의 취향이었다. 사나워 보이는 눈매 안에 보이는 촉촉한 눈이 왠지 시선을 잡아끄는 알파였다.

그리고 지저분한 소문과 다르게 예의도 바른 것 같았다. 긴장한 것 같다며 얼굴을 붉히며 물을 마시는 것도 취향이고. 역시 소문이란 건 그다지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띤 하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수환 씨는 저에게 딱 맞는 결혼 상대거든요.”

“네? 뭐라고요?”

갑자기?

하민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수환이 더욱 당황했다. 첫 만남에 결혼을 언급하다니. 물론 당장 결혼하자는 의도까진 아닌 것 같지만.

당황하는 수환을 즐거운 눈으로 보며 하민이 말을 이었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삼영 계열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어요. 오메가라서 처음엔 좀 무시당하긴 했어도, 지금은 꽤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구요.”

그건 수환도 알고 있다. 이제 하민이 서브수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는 삼영의 삼남으로, 뛰어난 사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에서는 우성 알파인 주건율에게 한눈에 반해 쫓아다니고, 승현을 제멋대로 라이벌로 인식해 신경전을 벌이는 인물이었다.

악역이자 이물질이었던 진수환이 죽고 등장한 인물이기도 했다. 다정공인 주건율에 의해 피폐물에서 힐링물로 전환된 소설에서 사건과 질투 유발용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피폐물 소설의 궤도가 조금 달라졌었지. 소설의 내용을 떠올린 수환이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알파와 결혼하지 않으면 계속 회사 운영을 할 수 없다기에, 급하게 배우자를 알아보고 있었어요. 저는 저와 회사에 간섭하지 않는 알파 배우자를 원하거든요.”

“아.”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하긴, 주건율이라면 마음씨가 좋아서 배우자가 뭘 해도 지지하고 응원해 줬을 것 같다. 메인수인 승현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서브수의 숨겨진 사정을 알게 된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수환을 보며 하민이 물었다.

“수환 씨는 어떤가요? 사업하는 오메가는 별로인가요?”

“네?”

질문을 받은 수환은 곧 난감해졌다. 아무래도 별로라고 해야 정이 떨어질 것 같긴 한데, 괜히 거짓말을 해서 기분 상하게 만드는 것도 싫기 때문이었다.

갈등하는 수환을 보며 하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일부러 좀 짓궂게 물었던 거예요. 죄송해요.”

“그, 그렇군요.”

정말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서브수였다. 그가 당찬 성격이라는 건 소설에 나와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어 보니 느낌이 아주 달랐다. 수환은 난감해하며 자꾸만 바짝 마르는 입술을 물로 축였다.

“그나저나 수환 씨에게 약혼자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게…….”

수환과 승현의 약혼은 기업 사이에서 꽤 유명한 얘기였다. 그러니 하민이 알고 있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진 회장이 하민 쪽에 파혼 얘기도 했으려나. 역시 그렇게 알고 맞선 자리에 나온 거겠지?

속으로 생각한 수환이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네, 진수환 씨 약혼자 있어요.”

“……!”

대답은 생뚱맞게 뒤에서 들려왔다. 수환이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니까 이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말이 안 되죠. 안 그래요?”

승현의 손이 수환의 어깨를 잡고 꾹 눌렀다. 수환은 대답도 못 하고 승현의 싸늘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2권에 이어서.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