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선배.”
“으으응.”
“수환 선배.”
“으음, 5분만…….”
잠투정을 부리던 수환이 정신을 차린 건, 왜인지 이상한 느낌이 났기 때문이었다. 입안을 침범한 무언가를 힘겹게 혀로 밀어내며 수환이 간신히 눈을 떴다.
“으, 으음?”
눈을 뜨자마자 승현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수환은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다시 키스를 이어 나가는 승현으로 인해 깜짝 놀라며 외쳤다.
“흣, 자, 잠깐……!”
“하아, 선배.”
농밀하게 얽힌 혀가 빈틈없이 맞물렸다. 입안에 꽉 들어찬 혀 때문에 숨이 막혔다. 괴로워서 헐떡거리는 숨결마저도 전부 집어삼키겠다는 듯 승현이 말캉한 입술과 혀를 맹렬히 빨아댔다.
수환은 집요한 입술을 겨우 피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한껏 당황한 수환이 얼른 말을 내뱉었다.
“나, 이제 일어났어.”
“알아요.”
“근데 왜… 으응.”
말을 채 다 내뱉지 못하고 입술이 다시 막혔다. 꽉 들어찬 혀가 제 존재감을 과시하듯 수환의 입안 곳곳을 누볐다. 마치 짐승이 자신의 것에 영역 표시를 하듯 깊고 진한 입맞춤이었다.
아침부터 이런 농염한 키스라니.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수환은 도무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승현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아침이라 가뜩이나 기운이 세진 그곳을 자극하는 손길에 수환이 퍼뜩 놀라며 손을 뿌리쳤다.
“하, 하지 마.”
“싫어요?”
싫지 않으니까 문제였다. 하나도 싫지 않으니까!
그러나 차마 수환은 곧이곧대로 말하지 못하고 목덜미 부근까지 새빨갛게 물들였다. 지난밤에도 그렇게나 했는데, 다시 욕정하는 자신이 파렴치하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이러는 건, 좀…….”
“지금 아침 아닌데. 12시 넘었어요.”
그렇구나. 내가 늦잠을 많이 잤구나.
말문이 막힌 수환이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승현이 피식 웃었다.
“알았어요. 밤에 해요, 그럼.”
“어… 어?”
저도 모르게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수환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얘기가 그렇게 되지? 의아해하는 수환의 이마에 승현이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전 아르바이트 다녀올게요.”
“아, 잘 다녀와.”
주말에는 승현이 아르바이트를 간다는 걸 기억해 냈다. 고개를 주억거리자, 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디 안 나갈 거죠?”
“오늘? 음.”
고민하는 듯한 신음을 내뱉자, 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싸늘해지는 온도를 느끼지 못한 수환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응, 어디 안 나갈 거 같은데?”
“그래요.”
어쨌든 승현은 수환의 대답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가락이 수환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알았죠?”
“그래, 알았어.”
수환은 승현의 말에 그다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도 나가지 말고 기다려라. 이 말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승현은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곤란해하는 수환을 붙잡고 키스를 한 번 더 하긴 했지만.
어차피 수환이 어디를 가든 금방 찾을 수 있으니 상관은 없었다. 다만, 다음에는 화가 난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스스로도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제 보았던 수환의 맞선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머릿속을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거듭 다짐하며 승현이 집을 나섰다.
“끄응.”
승현이 나가고 나서야 수환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알파인 자신도 매일 밤 해대는 게 지치고 힘든데, 승현은 멀쩡한 얼굴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다니. 체력이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수환이 핼쑥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꼬르륵.
그리고 배가 고파졌다. 생각해 보니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일단은 뭐라도 좀 먹자 싶어서 침실을 나가려는데, 그 순간 협탁 위에 놔두었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헉.”
드르륵, 드르륵, 미친 듯이 울리는 진동 소리가 침실 안을 꽉 채웠다. 수환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핸드폰을 들어 올려 발신인을 확인했다.
[김실장]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수환은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네에.”
수환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의 일로 진 회장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선을 봤던 오메가가 분명 안 좋은 말도 잔뜩 했겠지. 수환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말에 쉬시는데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무슨… 일인가요?”
대충 짐작은 가지만 수환은 부러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도운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고, 어제 맞선 본 분께서 곧바로 애프터 신청을 하셨습니다.
“…네?”
―어떻게 답변을 드리면 될까요?
“…에?”
너무나 의외의 말을 들은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프터 신청? 그럼 또 만나자는 건가? 어제 만났던 서브수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 난리를 보고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사고가 멈춘 수환은 멍하니 도운의 말을 듣기만 했다.
―회장님께서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어제 두 분이 좋은 시간 보내신 모양입니다.
“좋은 시간…….”
……이 절대 아니었는데요?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을 겨우 삼키고, 수환이 입을 열어 물었다.
“정말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
대체 무슨 생각이지? 또 만나서 무슨 말을 하려고……. 자신이 승현에게 꼴사납게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봤으면서 말이다. 그것도 그게 첫 만남이었다. 정이 떨어질 만도 한데, 애프터 신청을 한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 수상했다.
하지만 수환으로서는 도저히 그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쩐지 알아선 안 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헛기침을 한 수환이 곤란한 어조로 말했다.
“흠, 저기, 저는 그러니까… 그분을 다시 만날 생각이 없는데요.”
―아… 그러십니까?
도운이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곤란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면 곧바로 다른 오메가분과 또 만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네? 왜요?”
―회장님께서…….
“하아.”
대체 왜 그렇게 맞선에 집착하는 건지. 일단 만나기만 하면 없던 마음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짙은 한숨을 쉬는 수환의 목소리를 듣고 난 뒤, 도운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냥 박하민 대표님과 한 번 더 만나시는 게 어떨까요?
“…….”
―그럼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두 번 정도 만나는 건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를 또 만나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거나 저거나 수환에게는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승현이 그렇게나 화를 냈었는데, 또 맞선과 관련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만 해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결국 수환은 소심한 목소리로 사정하듯이 말했다.
“혹시 생각할 시간을 좀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음…….
곤란한 듯 말을 길게 끈 도운이 잠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자신은 없지만, 회장님께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수환 역시 진 회장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일단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십시오.
“실장님도요.”
겨우 전화를 끊고 수환은 다시 침대 위에 누워 뒹굴거렸다.
대체 서브수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맞선 자리가 그렇게 엉망으로 끝났는데 애프터 신청을 한다고? 정상적인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수환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고민하다가 결국 발랑 드러누웠다. 우선은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자. 그리고 이번엔 꼭 승현에게 미리 털어놓자. 그럼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뒹굴거리던 수환은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침실을 빠져나갔다.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고, 더는 배고픈 걸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응?”
그런데 거실로 가니 밥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 위에 있는 밥과 반찬을 본 수환이 눈을 크게 떴다.
승현이 준비한 건가? 언제 준비한 거지? 나가기 전에 차려놓은 건가?
홀린 듯이 다가가 식탁에 앉았다.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니,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장에서 꼬르륵 소리를 냈다. 입맛을 다시던 수환은 일단 먼저 밥부터 먹기로 했다.
밥과 반찬들은 사실 척 봐도 인스턴트 제품들을 접시에 놓아둔 것뿐인 것 같지만, 요즘은 이런 제품들도 맛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이 반찬이었다. 수환은 금방 그릇을 비워냈다.
“하, 잘 먹었다.”
부른 배를 문지른 수환이 만족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배가 부르니 좀 살 것 같았다.
거실로 나온 김에 대충 씻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깜박하고 핸드폰을 그대로 침실에 두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침실로 다가가니 요란한 진동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또 김 실장님인가? 아니면 진 회장?
불안한 마음이 든 수환은 빠르게 걸어 협탁으로 다가갔다.
“어?”
그러나 화면에 뜬 이름은 둘 중 누구도 아니었다. 의외의 이름을 본 수환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 승현아.”
―…선배.
“웬일이야? 지금 일하는 중 아니야?”
―…….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는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승현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전화 안 받았어요?
“전화? 언제?”
―제가 아까 몇 번이나… 전화했었는데요.
어딘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수환은 위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나 밥 먹고 있었어. 핸드폰을 침실에 두고 나가서 그만…….”
―…그래요?
“응.”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몇 번이나 묻는 승현에게 수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거실에 차려져 있는 밥상을 떠올리며 말했다.
“밥 맛있었어. 잘 먹었어.”
―…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이네요.
승현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가 또다시 물었다.
―정말 집에 있는 거 맞죠?
“응? 응.”
왜 자꾸 묻는 거지? 조금 부담스러워지려는 느낌이 들 찰나, 승현이 여상한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
―저 집에 갈 때 뭐 사 갈까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음…….”
그에 수환은 금방 저녁 메뉴로 관심을 돌렸다. 밥을 먹은 직후라 아직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리고 승현이 아르바이트를 가면서 밥까지 차리고 나갔는데, 또 저녁밥까지 얻어먹을 수는 없었다.
“저녁은 내가 준비해 놓을게.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시킨 피자도 못 먹었지, 참…….”
어제의 일을 떠올린 수환이 점점 말소리를 줄였다. 승현에게 먹이려고 시켰던 피자는 차갑게 굳은 채 아직도 거실에 있을 것이다. 우선은 그것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마치 그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승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거부터 먹을까요? 전 상관없어요.
“으, 응. 그러자.”
수환은 새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잘하고 오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수환은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어째 이러는 게 날이 갈수록 더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서로 옆에 있는 게 당연해지고, 같이 밥을 먹는 것도 당연해져서 메뉴를 고민하고, 서로 챙기는 게 당연해졌다. 그리고 키스도, 밤의 그… 런 일들도.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그러나 이번에도 고민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우우웅.
“헉, 깜짝이야.”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또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란 수환이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대체 오늘 몇 번째야? 누가 또 전화를 하는 거야?
“……?”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또 고개를 갸웃했다.
[윤도영]
“누구지?”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수환은 기억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소설에 나오지 않는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핸드폰에 이름이 뜬다는 건 진수환의 연락처에 등록되어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진수환과 아는 인물이라는 건데.
회사 사람인가? 아니면 대학 쪽?
진수환은 연락처 등록할 때 인적 사항도 좀 넣을 것이지, 이름만 달랑 등록해서 항상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설마 또 오메가 섹파는 아니겠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괜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수환이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아! 하하, 선배님!
“……?”
쾌활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꽤 친근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선배라고 하는 걸 봐선 대학 쪽 사람인가? 수환이 잠자코 듣고 있기만 하는 사이, 전화를 건 상대가 빠른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 하세요?
“흠, 나?”
―네!
“그냥… 집에 있는데?”
―아, 잘됐다!
“……?”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시끌시끌한 소음과 여러 명의 목소리가 뒤섞여 수환의 귀를 어지럽혔다. 곧바로 전화를 건 목소리의 주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선배님! 그럼 오늘은 오실 수 있으세요?
“오늘은?”
―네, 오늘 저희 모임 있잖아요!
“모임?”
―하하, 왜 그러세요! 매달 둘째 주 토요일이 모임 날이잖아요!
“아…….”
수환은 문득 막 빙의하고 주말에 받았던 메시지를 기억해 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전화는 받지 못하고, 뒤늦게 메시지를 확인했는데 동아리 모임 어쩌고 하던 문자 메시지였다는 걸 떠올렸다.
동아리, 동아리에서 아는 후배였구나. 승현과 건율도 함께 있는 그 동아리. 수환이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혹시 이번에도 못 오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집에 계신다면서.
“어, 그…….”
곤란하게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곧이곧대로 대답한 바람에 어떤 변명을 해도 궁색하게 되어버렸다.
어쩌지. 수환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동아리 학생들 입장에서 진수환은 놓치기 싫은 먹잇감이었다. 술에 취해 주정 부리는 거나 진상, 갑질만 조금 참으면 그날 술값은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분파인 진수환이 술값을 다 계산해 줬으니까.
그래서 항상 동아리 모임이 있으면 누구나 기피하던 진수환이라도 환영해 주는 눈치였다. 하지만 수환은 그런 불편한 모임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더듬거리며 수환이 애써 변명거리를 찾았다.
“내가, 몸이 좀 아파서…….”
―어, 진짜요? 괜찮으세요?
“으흠, 흠, 그냥 좀.”
아픈 척을 하느라 기침을 조금 하면서 눈치를 보았다. 이 정도면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 내심 깔끔하게 연기한 자신에게 뿌듯해하는데, 조금 곤란한 듯한 음성이 들렸다.
―아, 근데 건율이가…….
“뭐? 주건율?”
―잠시만요!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놀라서 벙쪄 있는 수환의 귀로 뭐라 뭐라 말하는 목소리가 여럿 들리더니, 이윽고 낮은 음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형.
“……!”
실제로는 딱 한 번밖에 듣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수환의 귀에 확실하게 꽂혔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형, 괜찮아?
“어? 아…….”
주건율이었다. 당황한 수환에게 건율이 계속해서 물었다.
―많이 아파? 내가 집에 갈까?
“뭐?”
깜짝 놀란 수환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상황이 소설의 한 장면과 거의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
원작에서 진수환에게 감금당한 승현은 개강하고도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진수환 역시 꼬박꼬박 참석하던 동아리 모임에 가지 않았다. 그에 수상하게 여긴 건율이 진수환에게 전화를 걸어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혹시 어디 아프냐고, 혼자 사니까 힘들 텐데 집에 가서 간호해 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원작의 진수환은 자기 집에 승현을 감금해 놓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무척 난감해했고, 결국 못 이긴 척 동아리 모임에 참가하러 나간다. 건율은 나중에 이런 식으로 기지를 발휘해서 승현을 구해낸다.
그렇게 피하려고 했는데, 어째 미묘하게 원작대로 진행되는 흐름에 수환이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형?
“어어? 아, 그러니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여기서 거절하면 완벽하게 원작의 흐름을 타는 거고, 그렇다고 당당하게 오라고 하자니…… 곧 퇴근하고 돌아오는 승현과 마주칠 수 있으니 난감했다.
아니, 자신은 원작의 진수환과 달리 승현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셋이 마주친다 해도 지금의 수환이 건율에게 해코지당할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순간 수환은 건율과 승현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비록 상상이지만 두 사람은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그야말로 신이 정해 준 환상의 커플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상상하니 수환은 왜인지 기분이 나빠졌다. 울컥, 하고 무언가가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런 스스로에게 당황할 찰나, 다시금 건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에도 아파 보이던데, 많이 안 좋나 보네. 지금 내가 갈게.
“안 돼!”
―안 된다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친 수환이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데 눈을 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형, 그게 무슨 말이야?
“아, 그러니까…….”
더 이상은 변명하는 것도 힘들었다. 결국 수환이 억지로 입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까, 약 먹고 쉬니까 좀 나아진 것 같아서.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건율이 이 집에 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수환이 말하자, 반가운 기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럴래? 여기가 어디냐면…….
“으응, 그래.”
전화를 끊은 수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엔 내키지 않는 술자리에 끌려가게 생겼다. 얼굴을 찌푸린 수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 형!”
수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건율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런데 다가갈수록 표정 관리가 너무 안 됐다. 결국 꽤나 기괴한 얼굴로 건율에게 다가간 모양이었다.
“안색이 진짜 안 좋네. 무리해서 온 거 아냐?”
“…아, 괜찮아. 하하.”
어색해서 표정이 굳은 것뿐인데, 메인공이 상냥한 목소리로 걱정해 줬다. 수환이 굳은 얼굴로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마치 가시방석 위에 앉은 것 같았다.
“요즘 진짜 얼굴 보기 힘들다. 뭐 하고 살아?”
“아파서 집에만 있었다니까.”
“정말로? 근데 왜…….”
“……?”
말을 하다가 만 건율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던 수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마셔.”
“어, 나 약 먹어서 술은 좀…….”
“술고래가 술을 안 마시겠다니.”
재밌다는 듯 큭큭 웃는 건율을 수환이 멍하니 쳐다봤다. 승현과 같은 나이인 건율은 분명 멋있는 우성 알파지만, 아직은 조금 앳된 티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꽤 친근하게 굴어서인가, 점점 어색함이 풀리고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도 원래대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선배님! 오늘은 오셨네요!”
“……?”
옆에서 누군가가 수환을 약하게 툭 쳤다.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남자가 수환에게 알은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했다. 수환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윤도영?”
“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어, 그래.”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베타였다. 싱글싱글 웃고 있어서 그런지 인상이 꽤 좋아 보였다. 지금의 자신은 몰라도, 예전의 진수환은 상대하기 힘든 성질머리였을 텐데 이렇게 치대는 걸 보면 성격도 좋은 편인 것 같았다.
“잘 지내셨어요? 학교에서도 보기 힘드신데.”
“그래, 뭐… 이제 마지막 학기니까.”
“아아, 다음 달에는 그냥 취업계 내고 화명에 들어가시겠네요?”
“그렇지, 뭐.”
“와아, 부럽다. 진짜.”
의외로 좋은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가 이어졌다. 어느샌가 수환의 마음도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급하게 나오느라 승현에게 제대로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저녁 같이 먹는다고 했었는데.
흘끗, 건율을 보니 그는 다른 학생과 무언가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이제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럼 잠깐 나가서 승현에게 연락이라도 하고 올까.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수환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술집 밖으로 나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재킷 안쪽 주머니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응?”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 화면을 켰는데, 이상한 숫자가 떠올라 있었다. 수환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걸 응시했다.
전화 모양의 아이콘 옆에 붉은 숫자가 떠 있었다. 36.
“뭐지?”
놀라운 숫자에 기겁한 수환이 통화 목록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한 사람의 이름이 통화 목록에 주르륵 떠올랐다.
“스, 승현이?”
다 승현의 이름이었다. 그가 수환에게 무려 서른여섯 통이나 전화를 건 것이었다. 기겁하고 있는 수환의 귀에 낮은 음성이 들렸다.
“형.”
“헉……!”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수환의 반응에 깜짝 놀란 건율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어, 왜, 왜?”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그냥… 갑자기 말을 거니까.”
“하하.”
별걸로 다 놀라고 그런다. 헛웃음을 지은 건율이 중얼거리며 다가와 느릿하게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수환에게 건넸다.
“하나 피울래?”
“아니, 난… 약 먹었다니까.”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투덜거린 건율이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우성 알파라 그런가,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썩 잘 어울렸다.
건율의 입에서 피어오른 하얀 담배 연기가 허공에서 아지랑이처럼 춤을 췄다. 수환은 그걸 보며 제 손에 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아직 승현에게 연락할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형 어딘가 변한 거 같아.”
“내가?”
“응.”
허를 찌르는 건율의 말에 수환은 애써 침착한 척을 했다. 진수환, 진수환이 지을 법한 표정을 짓자. 속으로 되뇌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 하는 거야, 재미없게.”
“하하, 그런가.”
헛웃음을 터트린 건율이 마지막 연기를 입에서 내뿜었다. 동시에 필터만 남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문질렀다. 수환은 그걸 보며 양심이 콕콕 찔렸다. 저거 저렇게 막 버리면 안 되는데.
건율이 들어가면 주워서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건율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아직 안 질렸어?”
“뭐가?”
갑작스러운 말에 수환의 눈이 동그래졌다. 건율이 답답하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승현 말이야.”
“승현이?”
승현이가 갑자기 왜…….
의아해하는 수환에게 건율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이 먼저 먹고 나한테 주기로 했었잖아.”
“…….”
“기억 안 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수환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수환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물었다.
“먹다니, 그게… 무슨 뜻…….”
“하, 진짜.”
건율이 짜증 난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조금 얕잡아 보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제 와서 뭘 순진하게 모르는 척이야. 형이 집에 이승현 감금해 놓고 즐기는 거 내가 다 도와줬잖아.”
“……!”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건율이 내뱉은 말이 떠다녔다. 이승현, 감금, 도와줬다…….
도와줘? 메인공인 주건율이 억지로 승현을 감금한 걸 도와줬다고?
믿을 수 없는 진실에 수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원작 내용에서 수상한 점이 여럿 있었다.
진수환이 갑자기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약혼을 진행하고, 가족이나 친구들을 빌미로 협박하고, 그런 건 멍청한 진수환이 할 만한 행동들이 아니었다. 차라리 막무가내로 찾아가 패악을 부리면 부렸지.
주건율. 원작의 다정한 메인공이라고 생각했던 눈앞의 인물이 모든 원흉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형이 원하는 대로 다 된 거잖아? 이제 슬슬 질렸으면 나한테 줘.”
“…….”
“형?”
고개를 숙인 수환은 머릿속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얘기는 원작에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수환은 꿈에도 몰랐다. 진수환이 승현을 감금해 괴롭혔던 일에, 사실 건율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수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닥쳐.”
“뭐?”
“닥치라고, 이 쓰레기 새끼야.”
“……!”
손을 뻗은 수환이 건율의 멱살을 붙잡았다.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건율은 그대로 주륵, 수환의 손에 멱살이 잡혀 끌려갔다.
“너 같은 새끼한테 절대 승현이 안 줘.”
수환의 목에서 마치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큭……!”
별안간 멱살을 붙잡힌 건율은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모르게 억눌린 소리를 내며 멱살을 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수환은 멱살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건율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형, 미쳤어?”
이 소설의 메인공인 주건율. 그가 승현과 맺어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둘의 사이를 이어 주는 이물질일 뿐이니까, 언젠가 때가 되면 승현을 그에게 보내 주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절대 이런 놈에게 승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아니, 나 안 미쳤어.”
“하…….”
“그리고 이제 승현이한테 관심 꺼.”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더 꽉 줬다. 뒤늦게 자신이 너무 흥분해서 일을 쳤다는 자각이 들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알파 둘의 팽팽한 기 싸움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골목 안에서 벌어졌다. 사나운 페로몬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그러나 곧, 얼마 가지 못하고 균형이 무너졌다. 열성과 우성의 싸움.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는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윽……!”
“정신 나갔나, 진짜.”
멱살을 잡혔던 건율은 곧 어렵지 않게 팔을 뿌리치고, 반대로 수환의 목을 틀어쥐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공격받고 목까지 세게 붙잡힌 수환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동안 형, 형 하면서 대우해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아주?”
“크윽.”
“열성 주제에 어딜 덤벼?”
가소롭다는 듯이 수환을 보며 건율이 입꼬리를 올렸다. 꼼짝도 못 하고 숨을 헐떡이는 수환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잔혹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 순간, 달콤한 페로몬 향이 그의 코끝을 맴돌았다. 집중하지 않으면 잘 맡아지지도 않을 옅은 향이었다.
이런 향기를 뭐라고 부르더라. 아기들이 쓰는 분에서나 날 것 같은 향이었다. 베이비파우더? 그런 게 눈앞의 알파에게서 맡아졌다.
“하.”
알파 주제에 이런 달짝지근한 향이라니. 자신이라면 창피해서 어디 풀어 놓지도 못할 것이다. 건율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윽, 이거… 놔……!”
“하, 병신 새끼가.”
바르작거리는 수환을 한 손으로 누르며 건율이 입꼬리를 더욱 올렸다. 어차피 지금 수환은 건율의 페로몬에 꼼짝도 못 하는 상태였다.
귀찮은데 이대로 처리해 버릴까. 으슥한 골목은 사람도 잘 지나다니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흉흉한 생각을 떠올린 건율은, 그러나 계속해서 코를 자극하는 향에 이상한 쪽으로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알파의 페로몬 따위 맡아도 불쾌하기만 할 뿐인데, 이 하찮은 열성 알파의 페로몬 향은 같은 알파의 욕망을 묘하게 부추기고 있었다. 건율의 눈이 헐떡이는 수환의 입술에 닿았다. 붉은 입술이 벙긋거리며 나오지 않는 말을 뱉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건율이 다른 손을 뻗었을 때였다. 별안간 그의 손이 허공에 붙들렸다.
“그 손 놔.”
“……!”
“손 놔. 주건율.”
싸늘한 음성과 함께 찌르는 듯한 페로몬이 건율을 덮쳐왔다. 순간 우성 알파인 그가 주춤거릴 정도의 기백이었다. 건율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승현?”
“…….”
건율을 보던 승현의 싸늘한 얼굴이 수환에게 옮겨갔다. 건율의 손에 목이 잡힌 수환은 곧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했다. 바득, 이를 간 승현의 눈에 난폭한 기운이 도사렸다. 동시에 그에게서 공격적인 페로몬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왔다.
“큭……!”
“손, 놓으라고 했다.”
결국 건율은 수환의 목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 당혹한 빛이 스쳤다. 대체 이게 뭐지? 오메가의 페로몬에 밀린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허억, 헉, 윽.”
“선배, 괜찮아요?”
비틀거리는 수환의 몸을 감싸 안으며 승현이 물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수환이 괴로워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승현아.”
“…….”
“승현아, 오해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건율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하필 타이밍 더러울 때 걸리고 말았다. 당황한 마음을 숨기며 건율이 차가운 얼굴의 승현을 바라보았다.
“오해?”
“그래.”
“선배가 이런 꼴이 되었는데 오해라고?”
“……!”
승현은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페로몬이 다시금 사납게 피어올랐다. 마치 눈앞에 있는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흉포한 페로몬이었다.
“윽…….”
“……!”
그러나 그 사나운 페로몬은 바로 옆에 있는 수환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승현이 황급히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건율을 노려보았다.
“꺼져.”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선배에게 물어볼 거니까.”
명백히 선을 긋는 말이었다. 하지만 분하게도,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건율이 곤란한 얼굴로 승현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참고로 내가 먼저 손댄 건 아니야.”
“…….”
“수환 형이 먼저였지.”
대체 왜 저런 하찮은 열성 알파를 감싸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먼저 흥분해서 달려든 건 자신이 아니었다. 건율이 승현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승현아.”
“꺼져.”
“…….”
“꺼지라고 했다.”
건율을 거부하는 페로몬에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문 건율이 뒤로 물러났다. 대체 오메가의 페로몬이 뭐 이렇게……. 아무리 우성이라고 해도 이상할 정도였다.
“…그래.”
“…….”
“하지만 다음엔 내 말도 들어 줬으면 좋겠다.”
진득한 시선이 승현과 수환을 훑고 떨어졌다. 곧 몸을 돌려 사라지는 건율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승현이 고개를 돌렸다.
“선배.”
“흐윽.”
“수환 선배.”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짓눌렸던 수환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혀를 찬 승현이 다시금 페로몬을 풀어냈다. 방금 건율을 상대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냥한 페로몬이었다.
승현은 껴안고 있는 수환에게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그의 손이 수환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수환의 떨림이 점차 멎어갔다.
잠시 후, 수환이 흐릿한 눈을 깜박였다. 깨닫고 보니 그는 승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수환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승현, 승현아.”
“네, 저예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승현을 보자, 수환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으며 승현의 어깨에 코끝을 부볐다.
“흐으, 승현아.”
“응, 이제 괜찮아. 괜찮아요.”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승현은 손으로 계속 수환의 등을 토닥였다. 숨을 들이켜자 언제나 수환을 감싸던 향긋한 시트러스 향이 콧속 가득 들어왔다.
“걸을 수 있겠어요? 택시 부를까요?”
“잠깐, 잠깐만.”
“네?”
수환이 손을 뻗어 다급하게 승현을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려 승현을 마주 보았다.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할 말이요?”
여전히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우성의 페로몬이 할퀸 몸은 아직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승현을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꾹꾹 참고,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마음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너 좋아해. 계속 좋아했어. 좋아, 좋아해. 승현아.”
“……!”
“우리, 파혼하지 말… 응.”
파혼하지 말자는 말은 성급하게 다가온 입술에 막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참지 못하고 짙은 입맞춤을 한 승현이 입술을 떼며 물었다.
“정말… 정말이에요?”
“응, 정말… 좋아해, 아…….”
다시 입안에 들어온 혀가 수환의 혀를 꽉 옭아매었다. 잠시 멈칫했던 수환도 곧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흐읏.”
“하.”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은 그렇게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
수환은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 위에 누워 승현의 키스를 받고 있었다.
승현의 입술이 수환의 입을 부드럽게 빨다가 턱 끝을 지나 길게 뻗은 목을 지분거렸다. 선명하게 찍혀 있는 벌건 손자국을 핥으며 상냥하게 입을 맞췄다.
“하… 아, 승현아.”
“선배.”
빨갛게 부어 있는 자국을 보니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는 페로몬에 벌벌 떠는 수환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라 건율을 우선 멀리 떨어트려 놓은 거지만, 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흉포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정성스럽게 애무하던 승현이 고개를 들었다.
“주건율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주건율……?”
달콤한 신음을 내뱉던 수환의 눈이 조금 커졌다. 흐릿했던 눈에 점차 초점이 돌아왔다. 물기를 머금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선배?”
“읏.”
생리적인 두려움으로 수환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아직 페로몬에 짓눌린 여파가 남아 있는 탓이다. 승현이 당황하며 수환의 몸을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오늘 밤에는 묻지 않을게요.”
“흐으.”
마주 끌어안은 수환이 승현의 어깨에 코끝을 비비다가, 그의 목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달콤한 페로몬이 수환을 감쌌다. 긴장했던 몸이 노곤하게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이만 자요.”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춘 승현이 빙긋 웃으며 수환의 뺨을 쓰다듬었다. 놀라고 많이 아팠을 수환을 배려한 말이었다.
하지만 수환은 이제 자기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계속 아니라고, 싫다고, 마지못해 끌려다니는 척을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승현이 만지는 모든 곳이 기분 좋았고, 그에게 닿는 게 기뻤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싫어, 더 해 줘.”
“……!”
“계속해 줘, 승현아… 응?”
수환은 새가 쪼는 듯이 승현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며 칭얼댔다. 그에 충격을 받은 듯 승현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러다 곧 짙은 욕망이 그의 눈에 내려앉았다.
“그만두지…… 으응.”
다시 시작된 입맞춤에 수환의 고개가 비틀렸다. 맞물린 입술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한참 후에야 입술을 뗀 승현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렇게 부추기면, 더는 못 참아요.”
“으응, 아……!”
승현이 얼굴을 숙여 수환의 가슴을 꽉 깨물었다. 흰 피부에 난 잇자국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 자국이 관능적으로 보였다. 혀를 내밀어 자신이 만든 잇자국을 핥은 다음, 붉게 달아오른 과실을 잘근 깨물었다.
“아, 거기, 좋아.”
유두를 깨무는 승현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수환이 연신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전에는 부끄러워하며 신음을 참으며 밀어내려 하더니. 지금은 오히려 승현이 당황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변한 모습에 승현은 혼란스러웠다.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지금의 수환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건율의 페로몬에 짓눌렸던 수환이 그 반동으로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승현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매달리는 수환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성적이고 나발이고, 당장 눈앞에 있는 수환이 지나치게 야하고 자극적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발정 난 페로몬이 계속해서 승현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아, 선배.”
“아앙.”
“수환 선배.”
가슴을 계속 애무하자 수환이 연신 간드러진 신음을 흘렸다. 평소와 다른 달달하기 짝이 없는 신음 소리에 승현의 성기는 터질 것처럼 흥분하며 부풀어 올랐다. 그가 마치 분풀이를 하듯 한쪽 유두를 꽉 깨물고, 다른 쪽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비틀자 수환의 허리가 크게 튀어 올랐다.
“흐아앙!”
극심한 쾌감이 수환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느끼는 쾌감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가슴을 애무한 것만으로 수환의 성기가 뻣뻣하게 섰다. 곧 바지 위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부풀어 있던 수환의 성기가 절정을 맞았는지 정액을 내뿜었고, 주변이 축축하게 젖었다. 검은 바지보다 더 검게 변한 자국을 내려다본 승현의 눈이 뒤집혔다.
“방금 가슴으로만 간 거 알아요?”
“으으응, 흐으.”
“하, 제기랄.”
이를 빠득 간 승현이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이대로 가다간 지나치게 흥분해서 수환의 안을 제멋대로 거칠게 파고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사정의 여운으로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수환이 눈물 젖은 눈으로 승현을 좇았다. 따뜻한 온기가 멀어지자 불쌍할 정도로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승현아, 왜…….”
“잠깐만요, 선배.”
“싫어… 더 해 줘……. 응?”
칭얼거리듯 말한 수환이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리고 바지를 벗고 제 손으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조금 부어올라 있는 붉은 구멍이 승현을 유혹하듯이 벌어져 속살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승현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빨리, 넣어 줘…….”
“…….”
“넣어 줘, 제발…, 아앙……!”
결국 참지 못한 승현이 거친 손길로 수환의 팔을 치우고, 한 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붙잡았다. 그리고 불끈거리는 제 성기를 구멍 안으로 조급하게 밀어 넣었다. 퍽, 하고 허리를 쳐올리자 단번에 안을 가득 채웠다. 좁은 내벽이 승현의 성기를 아플 정도로 꽉 조였다.
“읏, 선배.”
“아응, 아.”
이젠 익숙해졌을 대로 익숙해진 행위지만, 여전히 수환의 안은 좁고 뜨거웠다. 무리하게 벌어진 구멍이 조금의 틈도 없이 승현의 성기를 빠듯하게 머금었다. 뜨거운 내벽이 페니스를 압박하는 느낌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서로의 페로몬으로 꽉 찬 침실 안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수환은 승현의 성기를 받아들인 채 입술을 작게 벌리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먼저 유혹한 것은 그였지만, 머리끝까지 꿰뚫은 것 같은 성기가 버거워서 잠시 힘겹게 숨을 돌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으응, 승혀나.”
“윽.”
승현의 목에 팔을 두른 수환이 붉어진 얼굴로 이름을 속삭였다. 그리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안쪽의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움직였다. 허리를 살짝 튕긴 것뿐이지만, 그 미약한 움직임에 승현은 더 큰 자극을 받았다. 씨발, 속으로 욕을 짓씹은 그가 허리를 뒤로 뺀 다음 다시 거세게 성기를 박아 넣었다.
“아아앙!”
“큭.”
너무 흥분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승현은 이를 악물며 수환의 허리를 꽉 잡고 퍽, 퍽 페니스를 박았다. 흐아앙, 아앙, 쾌감에 잔뜩 젖은 신음이 뒤따랐다.
자극이 너무 강해서 금방이라도 싸 버릴 것 같았다. 수환과 할 때마다 쾌감과 만족감을 수도 없이 느꼈지만,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참는 기색도 없이 내보이는 적나라한 교성에 승현의 허릿짓이 점점 더 빨라졌다.
“아앙, 아, 좋아, 좋아아……!”
“윽……!”
“승혀나, 앙, 아앙!”
이윽고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성기가 정액을 쏟아냈다. 수환은 안쪽을 적시는 뜨거운 액체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카로운 교성이 헐떡이는 소리로 바뀌었다.
“하아, 선배.”
“흐…, 좋아, 좋아해, 승혀나.”
“나도, 좋아해요.”
고개를 숙인 승현이 수환에게 입을 맞췄다. 헐떡이는 붉은 입술을 빨아올리며 수환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조…, 응, 좋아…, 해애…….”
“선배, 진짜, 하…….”
도대체 얼마나 더 흥분시킬 셈인지. 고삐가 풀린 것처럼 마구 쏟아지는 페로몬과 마음을 울리는 고백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침실 안에서 두 사람은 밤새도록 뒤엉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