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물질은 메인수를 지키고자 한다
1.
눈을 뜨자 밝은 햇살이 수환에게 쏟아졌다. 멍하니 서 있던 수환이 눈을 깜박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지? 수환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냈다.
어서 가야 해. 오늘은 그 아이를 만나는 날이니까.
잠시 멈추었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곧 공사가 시작될 낡은 구교사는 방치되어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몸을 살짝 떤 수환이 익숙하게 길을 찾았다. 이 모퉁이를 돌면 있는 마지막 교실. 그 아이는 항상 거기에 있었다.
수환은 낡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괜히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아이 앞에서 되도록 깔끔하게 있고 싶었다.
고개를 쭉 내민 수환이 교실 안을 살폈다. 그의 눈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곧 누군가를 발견한 수환이 멈칫하며 몸을 굳혔다.
한 소년이 창문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책을 읽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울이고 있는 뺨 위로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흘려내려 있었다.
창으로 들이치는 햇빛,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하나하나까지도 마치 소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림같이 잘 어울렸다. 같은 교복을 입지 않았다면 사람인지, 요정인지 모를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수환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때,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서 뭐 해?”
“……!”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수환이 화들짝 놀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년이 수환을 부르듯이 작게 손짓했다.
그에 수환은 홀린 듯이 그에게 다가갔다. 책을 읽을 때는 무표정하던 소년의 얼굴이 지금은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서 와.”
“으, 응.”
소년이 내민 손을 수환이 한쪽 손으로 잡았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빈틈없이 수환의 손에 얽혀 들었다. 수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오늘은 좀 늦었네.”
“아, 나… 오늘 당번이었어.”
“그래?”
고개를 옆으로 틀어 올려다보는 소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환은 또다시 그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래서, 가져왔어?”
“어?”
소년의 물음에 깜짝 놀라며 수환이 되물었다. 그러자 소년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나한테 선물 준다며.”
“아, 선물.”
뒤늦게 떠올린 수환이 곤란해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늘이 소년의 생일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수가 지극히 적었던 소년은 스스로에 대해 그리 많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몹시 벽을 세우던 소년이 자신에게만 곁을 허락하고 얼마 후, 수환은 그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만나면 선물을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소년이 뭘 받으면 좋아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거 말인데……. 혹시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줄래? 다음엔 꼭 가져올게.”
“음.”
수환의 물음에 소년이 고민하는 듯한 신음을 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수환은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눈치도 없이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소년에게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잠시 후, 소년이 다시 수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거면 다 돼?”
“어…….”
잠시 눈을 굴리던 수환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나 용돈 많이 못 받아. 참고로…….”
수환의 집은 그리 잘사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가의 물건을 원하면 곤란했다. 물론 눈앞의 소년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몰라 말을 덧붙인 거였다.
눈을 휘며 웃음 지은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 돈 드는 건 아니니까.”
“정말?”
그럼 뭐지?
어리둥절한 수환에게 소년이 턱짓했다.
“일단 여기 앉아. 계속 서 있지 말고.”
“으, 응.”
엉거주춤하며 수환이 소년의 옆에 앉았다. 창가에 앉으니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런데 잡고 있는 손은 그대로였다. 수환은 괜히 그쪽이 더 신경 쓰였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온 소년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했다.
“눈 감아 볼래?”
“어?”
눈을 돌리자 소년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수환은 당황했다. 그래서 소년이 한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눈 감아 보라고.”
“……?”
의문을 느꼈으나, 수환은 곧 순순히 눈을 감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비현실적인 얼굴을 계속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곧 입술에 말캉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무슨 행위인지 알 수 있었다. 뒷머리가 위로 바짝 서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어때?”
곧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에 수환이 눈을 떴다. 몽롱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떤 느낌이냐고? 솔직히 알 수 없었다. 닿았던 입술은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도무지 하나로 정의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감정이 수환을 한꺼번에 휩쓸었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얼버무리자 소년이 또다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럼 한 번 더…….”
“……!”
이번엔 예고도 없이 소년의 입술이 다가왔다.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향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저 입술을 맞대기만 한 건데도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렸다. 숨도 내쉴 수가 없었다. 수환은 그저 당황하며 두 눈을 꽉 감아버렸다.
“…눈 떠.”
“…….”
“수환아.”
소년의 입술이 멀어지고 나서도 수환은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조용히 읊조리는 소년의 말에 수환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묘한 열기를 담은 갈색 눈이 수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며 수환이 떨리는 음성으로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승현아…….”
***
“…아.”
번쩍, 눈을 뜬 수환이 찬찬히 눈을 깜박였다.
방금……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눈을 떠 보니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뭐였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묘한 여운이 남는 꿈에 수환은 몸을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선배.”
“어?”
그때, 뒤에서 뻗어온 흰 손이 수환의 몸을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수환이 뒤를 돌아보았다.
“잘 잤어요?”
“어? 어.”
승현이 눈을 휘며 수환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수환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선배?”
“스, 승현아… 내가 어제… 저기…….”
“……?”
당황한 얼굴로 수환이 말을 더듬거렸다. 어제 건율의 페로몬에 당하고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고백했던 일이 어렴풋하게 생각났다.
왜, 하필 그런 식으로……. 더 멋있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일생일대의 고백이 왜 술주정 부리는 것처럼 된 것일까.
수환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확 붉어졌다. 그리고 그걸 보는 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어제 일 기억 안 나요?”
“어? 아니, 그건 아니고…….”
집에 온 뒤에는 술에 취한 것처럼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 있긴 했지만, 아예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승현은 부끄러워하는 수환을 내려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럼 됐어요.”
쪽, 하고 입을 맞춘 승현의 눈에서는 마치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수환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익었다.
어제의 그 멋없는 고백. 비록 건율에게 페로몬으로 공격당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했던 거긴 하지만, 고백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니 승현에게 고백한 것 자체를 후회하진 않았다.
“내가… 꼭 행복하게 해 줄게.”
이물질에 빙의한 수환은 메인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제 메인공의 자리를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수환은 이제 곧 전개될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원래는 이때쯤 건율이 진수환에게서 승현을 구해내고, 헌신적으로 승현을 보살펴 그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승현이 오래전부터 약을 연구해 온 형을 도와 신약을 개발하는데, 이게 겨울쯤 유럽에서 번질 유행병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약이 된다.
하지만 HS 제약회사는 이름만 남은 상태로, 약을 유통해 팔기는커녕 임상 실험조차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약을 개발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준 게 바로 메인공인 주건율이었다.
그는 한성의 회장인 제 아버지를 설득해 HS를 도왔다. 신뢰가 한번 무너진 HS가 임상 실험을 할 수 있게 돕고, 약을 허가받을 수 있게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리고 그 약을 유럽 쪽에 유통시킨 것도 한성이었다. HS의 가장 큰 투자처가 되어 준 것이었다.
그렇게 HS는 살아나고, 과거 있었던 신약의 부작용 역시 임상 실험과 공정 과정에서 수상한 점이 발견되었기에 재조사에 들어갔다. 결국 HS는 누명을 완전히 벗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게 된다.
곧 승현과 그의 형이 만들어 낼 신약에 투자하고 누명을 벗겨 주는 것. 그건 한성만큼이나 대기업인 화명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수환의 얼굴이 살짝 기울여졌다.
“네, 행복하게 해 주세요.”
“……!”
딴생각에 빠져 있던 수환은 눈앞에 다가온 승현의 얼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진 그의 약혼자는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래, 이 웃는 얼굴을 지킬 수 있다면 수환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승현아.”
“수환 선배.”
서로를 바라보던 둘이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승현과는 몇 번이나 입을 맞췄는데, 지금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마음이 통한 다음이기 때문일까. 수환은 눈을 감으며 기분 좋은 감촉을 즐겼다.
“…근데, 선배.”
“응?”
수환의 볼을 찬찬히 어루만지던 승현이 어딘지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키스의 여운에 빠져 있던 수환이 느릿하게 물었다.
“왜?”
“주건율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
올 것이 왔다. 수환의 몸이 순간 살짝 굳었다.
물론 아직도 페로몬 때문에 무섭거나 한 건 아니고, 건율과의 일을 승현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원작의 다정한 메인공인 줄 알았던 건율이 사실은 아주 나쁜 놈이었다. 그는 진수환을 이용해 승현을 망가트리고 기만하려 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그걸 차마 승현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수환이 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진수환이 과거에 건율에게 홀라당 넘어가 승현을 넘기겠다고 약속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지금의 승현은 과거 따윈 상관하지 않고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과거를 들추는 건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저 승현과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얘기만 하고 싶었다.
“그냥… 별거 아니었어. 내가 좀 취해서 욱해가지고…….”
“…….”
“진짜 별거 아니야. 신경 안 써도 돼.”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이 너무 형편없었다. 승현이 과연 믿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승현이 목에 난 상처를 쓰다듬으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별거 아닌데 이런 상처가 나요?”
“아, 이건…….”
“제가 주건율이랑 얘기해 볼까요?”
승현의 손가락이 아직도 붉게 남은 자국을 살짝 쓸어내렸다. 그의 눈에 순간 날카로운 빛이 스치다가 사라졌다.
“뭐? 아니야, 그러지 마.”
“그래도 그 자식이 또 선배한테 그러면…….”
“아니야. 괜찮, 괜찮으니까.”
건율이 자신에게 해코지하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승현을 건드린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메인공과 메인수라는 관계성 때문에 만나다 보면 둘의 사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수환은 그게 너무 두려웠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승현이 뭔가를 더 말하려 하자, 수환이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나도, 네가 다른 알파랑 만나는 거 싫어.”
“…….”
와, 이게 무슨 개떡 같은 말이지. 수환은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수환의 말에 잠시 침묵했던 승현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렇구나. 선배는 내가 다른 알파랑 만나는 게 싫구나.”
“어…? 응, 맞아.”
승현의 말에 수환이 살짝 눈을 떴다. 그러자 어쩐지 기쁜 기색이 가득한 승현의 얼굴이 보였다. 승현이 웃는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다른 알파랑 말하는 것도 싫고, 눈 마주치는 것도 싫고, 그렇죠?”
“뭐?”
아니, 그렇게까지는…….
승현의 말이 어딘지 이상한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팔을 뻗은 승현이 수환의 손을 꽉 잡고 깍지를 꼈다.
“그럼 선배도 나 말고 다른 오메가랑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말아야겠다. 그렇죠?”
“어어?”
왜…… 얘기가 그렇게 되지?
당황하는 수환을 보며 승현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에요.”
후후, 하고 웃은 승현이 수환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물었다.
속을 뻔했다……. 난감해지려고 했던 수환이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리지 마, 진짜.”
“후후.”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수환을 보던 승현이 또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수환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게다가 자꾸만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시끄러웠다. 이 소리가 승현에게 들릴까 봐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선배, 근데.”
“응?”
“어제 왜 전화 안 받았어요?”
그제야 수환은 어제 무려 서른여섯 통이나 전화했던 승현을 떠올렸다. 그때는 건율과의 일 때문에 뒷전이 되었는데, 서른여섯 통씩이나 전화했을 정도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수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어제 동아리 모임에 갔었거든. 근데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전화 많이 했던데.”
“…저한테 말도 안 하고 동아리 모임 갔었던 거예요?”
“어? 아, 그게… 미안.”
원작의 내용과 건율의 일로 머릿속이 꽉 차서 승현에게 말도 못 하고 동아리 모임에 갔었다. 서운해하는 승현의 얼굴을 보자 수환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
수환은 모든 게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연애를 하는 것도. 그래서 모든 것이 서투르기만 했다. 자신이 조금 더 섬세한 성격이면 좋을 텐데, 그렇지가 않아서 승현에게 너무 미안했다.
“괜찮아요. 대신.”
“……?”
“다음에 또 연락 안 받으면, 이 방 안에 가둬 놓을 거예요.”
“……!”
작게 속삭이는 말에 수환이 눈을 크게 떴다. 가둬 놓는다니. 너무 무서운 말이었다. 수환이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것도 농담… 이지?”
“…….”
그러나 승현은 미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수환을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환은 계속 그의 눈치를 보았다.
농담이겠지? 그렇겠지? 설마 그런 말을 진심으로 할 리가…….
그런데 승현은 결국 농담이냐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배고프지 않아요?”
“응? 어, 배고파. 근데, 저기.”
“우리 뭐 먹을까요?”
결국 대답을 듣지 못하고 침실을 나섰다. 대충 있는 걸로 아침밥을 먹고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수환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면서 승현이 중얼거렸다.
“알바 가기 싫다.”
주말마다 알바를 하는 승현은 이제 곧 나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수환도 이렇게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웠다.
승현에게 돈을 주면 되지 않을까? 용돈 같은 걸로 알바비만큼만……. 약혼자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승현은 원작에서 건율의 도움을 받을 때도 공과 사를 확실히 하는 성격이었다.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이유로 돈을 주다니. 너무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은 건 승현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같이 나갈래요?”
“응?”
“저 알바 끝나고 데이트해요.”
“데이트?”
데이트. 남다른 울림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절로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수환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승현과는 같이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몇 번 밖에서 우연히 만난 적은 있어도, 목적지를 정하고 함께 나간 적은 없었다. 승현과 데이트라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어디 갈 건데?”
“알바 끝나면 오후 늦은 시간이니까 멀리 가지는 못할 것 같아요. 또 내일 월요일이니까요.”
“아… 그렇지.”
“그냥 오늘은 같이 쇼핑하고 밥도 먹어요.”
“그래, 그러자.”
수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현이 활짝 웃으며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이제 가벼운 입맞춤 정도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수환의 얼굴은 또 붉어졌다.
귀엽다. 정말 귀엽다. 이대로 확 잡아먹고 싶다.
그냥 소파에 밀어 넘어뜨리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승현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어서 준비하고 나가요.”
“어…….”
같이 나가자는 게, 아예 출근부터 같이하자는 거였나? 그럼 어딘가에서 승현이 알바가 끝나는 걸 기다려야 하나? 어디에서?
…설마 카페에서?
수환의 안색이 조금 창백하게 변했다.
***
D.Clare는 대학 바로 앞에 있는 카페였다. 그래서 학기 중의 평일에는 학생들로 손님이 바글바글했지만, 주말에는 꽤 한산한 편이었다.
1인석에 앉은 수환이 연신 주위를 살폈다. 혹여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모자까지 쓰고 나왔지만,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았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다란 유리잔을 응시했다. 노란빛을 띤 레모네이드에서 하얀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왔다.
그걸 보는 척하면서 수환은 계속해서 카운터 쪽을 힐끔거렸다. 그곳에는 주문받은 음료를 만들고 있는 승현이 있었다. 카페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승현은 짙은 갈색 셔츠와 검은색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카페 분위기에 맞게 우드 톤으로 맞춘 유니폼이었다.
수환은 카페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책에는 눈길도 주지 못하고 자꾸만 일하는 승현을 훔쳐봤다. 정작 승현은 일하느라 정신없어 보이는데, 자기 혼자 좋아서 이러는 게 스스로도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유리잔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투명한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이 수환의 손가락 끝에 매달렸다.
아침에 잠깐 생각했던 원작 내용을 다시금 떠올렸다. 건율의 메인공 역할을 대신하려면 우선은 진 회장을 설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승현과 형이 개발한 약을 파는 것도,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것도 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과연 그 진 회장을 설득할 수 있을까. 수환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우성 알파인 데다가 한성의 후계자로서 탄탄한 입지를 쌓아온 건율과는 다르게 수환은 진 회장에게 밉보인 게 너무 많았다. 자신이 한 건 아니지만, 진수환이 너무나도 쓰레기처럼 살아온 탓이었다.
게다가 진 회장은 승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파혼하라고 저렇게 벼르고 있는데……. 뭐라고 말하면서 설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니 점점 더 머리만 아파졌다.
“끙.”
“…선배?”
“헉.”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드니, 곁에 다가온 승현이 안쓰러운 눈으로 수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지? 당황한 수환이 승현을 올려다봤다.
“미안해요. 기다리기 지루하죠?”
“아니, 괜찮아.”
“이거 먹어요.”
승현이 접시에 담아온 무언가를 수환의 앞에 내려놓았다. 뭔가 하고 보니, 형형색색의 먹음직스러운 마카롱이 접시 위에 쌓여 있었다. 수환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카롱?”
“여기 거 안 먹어 봤죠? 꽤 맛있어요.”
“아, 근데 나 계산 안 했는데.”
“괜찮으니까 먹어요.”
승현이 웃으며 접시를 수환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에 수환은 더 사양하지 못하고 마카롱에 손을 뻗었다.
“잘 먹을게.”
“네.”
먼저 집은 건 분홍색 마카롱이었다. 색깔만 보면 딸기 맛일 거 같았다. 수환은 곧바로 입안에 마카롱을 집어넣었다.
사실 수환은 빙의하고 마카롱을 처음 먹는 거였다. 그동안 다른 건 이것저것 먹어 봤지만 마카롱은 먹지 않았다. 디저트 종류를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왠지 마카롱은 끌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한입 먹으니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겉은 바삭하게 씹히고, 속은 달달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입안을 꽉 채우는 상큼한 딸기 맛도 너무나 좋았다. 수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맛있어요?”
“응.”
고개를 끄덕인 수환이 마카롱을 한입 더 깨물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작은 마카롱이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눈을 깜박인 수환은 다른 마카롱을 향해 슬금 손을 뻗었다.
“선배는…….”
“응?”
이번엔 새하얀 색의 마카롱을 집어 든 수환이 고개를 돌렸다. 옆에 선 승현이 비스듬히 고개를 내리며 수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배는, 마카롱 먹는 모습도 귀엽네요.”
“……!”
귀, 귀여워? 덩치 큰 알파에게 대체 무슨 말을…….
당황하는 수환을 내려다보며 승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집이었으면 키스했을 텐데.”
“읏.”
“아쉽네요.”
승현의 손가락이 마카롱의 작은 흔적이 묻은 수환의 입술을 쓸었다. 단순히 뭔가가 묻어서 닦아 주는 게 아닌, 다분히 고의적인 손길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마카롱을 먹는 모습에 승현은 밖이라는 걸 잊고 키스를 퍼부을 뻔했다. 마카롱 따위를 또 왜 이렇게 귀엽게 먹어서 가만있는 사람을 부추기는 걸까. 간신히 충동을 억누른 승현이 수환의 입술을 엄지 끝으로 꾹 눌렀다.
“노…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닌데요.”
고개를 갸웃한 승현은 수환의 입술을 만지던 손가락을 치웠다.
이 사람은 왜 자기가 귀여운 걸 모르지. 뭐, 그게 더 귀여운 거지만.
씩 웃은 승현은 키스 대신 수환의 볼에 쪽, 하고 짧게 입을 맞췄다.
“……!”
“나머진 집 가서 해요.”
“너…….”
얼굴이 빨갛게 익은 수환이 승현을 올려다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걸 보는 승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올게요.”
“으응.”
몸을 돌려 카운터로 걸어가는 승현의 뒷모습을 보며 수환이 쓰고 있는 모자를 꾹 눌렀다. 모자를 쓰고 와서 다행이었다. 스스로도 터질 듯이 뜨거운 얼굴이 얼마나 빨개져 있을지 잘 알 수 있었다.
연애란 게 원래 이런 걸까. 처음인 수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끄럽고, 자꾸만 가슴 부근이 간질간질했다. 수환은 모자를 더욱 꾹 누르며 애써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승현은 알바가 끝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다시 돌아왔다. 베이지색 슬랙스에 갈색 니트를 걸친 모습이 너무나도 예쁘고 멋졌다. 지금 보니 승현은 갈색 계열의 옷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순간 주책맞은 생각을 했다고 자각한 수환이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승현이 그런 수환을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많이 기다렸죠?”
“아냐.”
정말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가져온 책은 절반도 읽지 못했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났다. 일하는 승현을 훔쳐보고, 가끔 허무한 망상도 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퇴근한 승현이 수환의 옆에 서 있었다.
“일하느라 힘들었지?”
“매일 하던 일인데요, 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승현이 손을 내밀었다. 그걸 내려다보던 수환이 반사적으로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승현의 손이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우리 이제 어디 갈까요?”
“음…….”
맞닿은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왜인지 자꾸 간지러웠다. 깍지를 낀 수환의 손가락이 작게 움직거렸다.
자꾸만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인 수환의 눈에 승현이 신은 신발이 보였다. 승현 또래의 남자들이 곧잘 신고 다니는 검은색 로퍼였다. 그런데 오래 신어서 그런지 많이 해져 있었다. 그걸 보다가 수환이 작게 중얼거렸다.
“신발….”
“네?”
“아니. 욕이 아니고, 네가 신은 거.”
“아.”
고개를 숙인 승현이 제가 신은 로퍼를 내려다보더니, 조금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신발 살 때가 되었네요.”
같이 살면서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승현은 진수환의 집에 올 때부터 가져온 짐이 무척 적었다. 애초에 가지고 있는 게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아파진 수환이 고민하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신발 정도는 사 줘도 되지 않을까? 저번에 생일이었는데 그… 맛없는 미역국만 끓여 줬던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망설이던 수환이 조심히 입을 열어 물었다.
“내가… 사 줄까? 신발.”
“네?”
“아니, 저번에 생일 선물도 못 사 줬잖아.”
느닷없이 터진 러트와 맞선, 그리고 주건율. 정신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승현에게 줄 생일 선물을 까맣게 잊고 말았었다. 이제야 생각하는 것도 민망해서 목덜미를 벅벅 긁자, 승현이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저 선배가 신고 있는 거랑 똑같은 거로 사고 싶어요.”
“내 거?”
수환이 시선이 제가 신고 있는 신발로 내려갔다. 오늘은 모자를 써서 평소보다 더 수수하게 입느라 신발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걸로 신었다. 유명하긴 하지만 대중적인 브랜드의 스니커즈로, 진수환이 가진 물건 중에선 그나마 가장 값이 싼 편이었다.
“이거 그렇게 비싼 거 아닌데.”
“괜찮아요.”
“하지만.”
“저 선배랑 커플 신발 신고 싶어요.”
“……!”
커플 신발……!
수환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작게 속삭이는 승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달콤하게 울렸다.
“…그래, 알았어.”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승현이 잡은 손을 부드럽게 당겼다.
“그럼 갈까요?”
“으응.”
둘은 카페에서 나가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했다. 1층에 바로 신발을 전문으로 파는 매장이 있었다. 승현의 손을 잡은 수환이 약간 멍한 상태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수환이 검은 티셔츠를 입은 스태프를 찾았다.
“저기.”
“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어…….”
스태프 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뒤를 돌아보며 활발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수환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막상 말하려니 갑자기 무척 부끄러워졌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부끄러운 거지. 새하얀 스니커즈를 내려다보던 수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랑 똑같은 거… 보여 주세요.”
“아.”
스태프의 시선이 수환이 신고 있는 스니커즈로 향했다. 그리고 흘끗 고개를 들어 손을 잡고 있는 커플을 빠르게 훑었다. 눈치 빠른 그녀는 곧 싱긋 웃으며 물었다.
“똑같은 색으로 가져다드릴까요?”
“어, 다른 색도 있어요?”
“네, 흰색 말고도 검은색, 민트색, 베이지색 있어요.”
색상까지 줄줄 꿰며 말하는 스태프를 보며 수환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승현을 돌아보았다.
“흰색으로 가져다주세요.”
“네, 사이즈는요?”
“280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몸을 돌린 스태프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수환은 사실 좀 아쉬웠다. 승현이 지금 입은 옷에 베이지색도 잘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승현이 풍기는 분위기를 봐도 흰색보다는 베이지색 스니커즈가 더 잘 맞을 거 같은데…….
아쉬운 얼굴을 하는 수환을 눈치챈 건지, 승현이 잡고 있는 손을 더 꽉 쥐며 말했다.
“선배랑 똑같은 거로 신고 싶다니까요.”
“으응, 그랬지.”
얼굴이 또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런 수환을 보며 승현은 입맛을 다셨다. 역시 밖에 오래 있는 건 못 할 짓인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속으로 음험한 생각을 하며 수환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다른 것도 신어 볼까요? 선배가 좋으면 그렇게 할게요.”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승현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향이 자꾸만 코를 자극했다. 밀착한 몸에서도 달콤한 내음이 풍겨왔다. 밖에서는 금욕적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페로몬을 꽉 잠그던 승현이었는데, 지금은 은은한 페로몬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승현아….”
“선배….”
입술이 점점 가까워졌다. 수환도 그를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붉은 입술을 홀린 듯이 보고 있을 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헉.”
스니커즈를 들고 온 스태프가 다가오자, 수환이 놀라며 후다닥 멀어졌다. 여기가 밖이라는 것도 잊고 큰일 날 뻔했다. 수환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어 보시겠어요?”
“…네.”
베타인 스태프는 알파와 오메가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하고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승현이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승현이 로퍼를 벗고 스니커즈를 신었다. 한쪽만 신었는데도 새하얀 스니커즈가 승현의 발을 딱 맞게 감쌌다.
베이지색이 못내 아쉬웠었는데,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갈 정도로 승현과 잘 어울렸다. 지켜보던 수환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사이즈 잘 맞으세요?”
“네, 괜찮네요.”
양쪽을 다 신은 승현이 수환을 돌아보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때요?”
“좋아….”
“네?”
“아니… 잘 어울린다고.”
승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똑같은 스니커즈가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나저나 승현이도 발이 큰 편이구나. 진수환의 신발 사이즈도 공교롭게 똑같은 280이었다.
색깔도 똑같고, 사이즈도 똑같은 신발이 나란히 있으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수환은 눈 속에 박히는 새하얀 스니커즈 두 쌍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이걸로 살까?”
“네.”
두 번 고민할 필요도 없이 대답한 승현이 고개를 돌렸다.
“저 이대로 신고 갈게요.”
“네!”
사이좋은 커플의 모습을 옆에서 싱글거리며 보고 있던 스태프가 잽싸게 다가와 스니커즈에 달린 상표를 떼 주었다. 그리고 계산대로 가서 능숙하게 승현이 신고 왔던 로퍼를 상자 안에 넣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계산을 끝마친 수환이 여전히 화끈거리는 뺨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직원 눈에는 우리가 어떻게 보였을까. 평범한 알파, 오메가 커플처럼 보였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몸을 돌리니, 그새 승현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선배.”
“으응.”
승현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향긋한 페로몬을 뿌렸다. 수환은 그게 좋으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시선을 조금 비끼며 대답하자, 곧바로 뺨에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쪽.
“……!”
깜짝 놀라 승현을 바라보자, 그는 눈을 휘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놔두면 또 입술이 닿을 기세라 수환이 질색하며 밀어냈다.
“너, 밖에서 또…….”
“그럼 집에서는 마음껏 해도 돼요?”
“읏.”
수환은 참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집에서는 절제 없이 마구 하고 있으면서. 그러나 부끄러움에 차마 그렇게 말은 하지 못하고 꽃처럼 예쁜 얼굴을 살짝 노려보았다.
찰칵.
“……?”
그때, 알파의 예민한 청각에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지만, 마치 카메라 셔터 소리 같았다. 놀란 수환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워낙 사람이 많고 넓어서 그런지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 건지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수환을 보며 승현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요?”
“어? 아니.”
기분 탓인가? 수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돌려 승현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요?”
“응,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봐.”
“흠.”
수환의 말에 묘한 신음을 내뱉은 승현이 이내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배고프죠? 밥 먹으러 갈래요?”
“밥?”
그러고 보니 벌써 밥 먹을 시간이다. 마침 배도 고파진 수환은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 뭐 먹지?”
“선배가 먹고 싶은 걸로 먹어요.”
“그럼…….”
먹는 거에 진심인 수환이 먹고 싶은 걸 하나하나 떠올리는 동안, 승현은 싸늘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힉, 하고 놀란 몇몇 사람이 서둘러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게 보였다. 그들을 보는 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 마라탕 어때? 너 마라탕 먹을 수 있어?”
“네, 저도 좋아해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승현이 들떠 있는 얼굴의 수환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수환이 핸드폰을 꺼내 부산스럽게 마라탕 맛집을 검색했다.
***
“하, 맛있었다.”
만족스럽게 마라탕을 먹은 수환이 아이처럼 좋아하며 중얼거렸다. 대체 그 많은 음식이 어디로 다 들어가는 거지. 승현이 조금 떨떠름한 눈으로 수환을 보다가 옆에 다가갔다.
“이제 집에 가요.”
“응, 그러자.”
오늘은 거의 하루 종일 승현과 같이 있었다. 오늘 한 게 데이트… 데이트 맞는 거겠지? 너무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선배?”
“응?”
집이 가까워졌을 무렵,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던 수환은 승현의 말을 잘 듣지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수환을 보며 승현이 작게 웃었다.
“무슨 생각 해요?”
“아니, 그냥.”
데이트가 빨리 끝난 것 같아서 아쉽다고, 그런 말을 수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고개를 돌렸다.
“저는 선배가 사양하지 않고 말하고 싶은 거 다 말했으면 좋겠어요.”
“어?”
“항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있는 거 아니에요?”
“아…….”
수환을 꿰뚫어 본 승현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에 수환은 자신의 하찮은 생각이 전부 승현에게 곧이곧대로 보였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알았지. 말하기 힘들어한다는 걸.
승현은 눈치가 빨라서 금방 아는 건가 싶었다. 자신과는 달리 생각하는 걸 금방 말하는 성격이니까. 그와 사귀려면 이 답답한 성격을 조금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수환이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그냥, 오늘 시간이 좀 빨리 간 거 같아서.”
“집에 가는 게 아쉬워요?”
“그 정도는 아니고.”
“다음에 또 데이트해요. 시간 많으니까.”
“응.”
“선배,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
“선배?”
승현의 물음에 수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은 전부터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했던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호칭이었다.
전처럼 깍듯하게 선배님, 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선배, 선배라고 말하는 승현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근데, 그… 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잖아.”
“……?”
“그런데… 흠, 네가 계속 선배라고 하니까 좀… 먼 사이인 것 같고.”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수환이 겨우 말을 이었다. 뭐 이런 거로 서운해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사귀는 사이에 호칭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수환이 그런 생각을 하며 승현을 응시했다.
“그렇구나. 그럼, 제가 뭐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어…….”
“형? 수환이 형?”
형이라. 무난하고 좋은 호칭인 것 같았다. 어차피 나이도 자신이 더 많고, 선배라는 호칭보다는 훨씬 낫겠지.
수환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을 때였다. 승현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
“자기야?”
“……!”
자기야, 자기야, 자기야…….
승현의 말이 계속해서 수환의 머릿속에 떠다녔다. 곧 수환의 얼굴이 확, 하고 터질 듯이 빨개졌다.
“너 무슨…….”
“자기야 별로예요? 난 좋은 거 같은데.”
“으….”
“자기야.”
“……!”
귓가에서 속삭이는 말에 허리가 다 떨렸다. 깍지를 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응? 싫어요?”
“…그만해.”
“싫은데.”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린 승현이 눈을 휘며 수환의 손등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걸 보는 수환의 두 눈이 커졌다.
“자기야.”
“읏.”
정신이 혼미해졌다. 승현에게서 흘러나온 아찔한 향이 수환을 감쌌다.
밖이라는 것도 잊고 수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손이 수환의 한쪽 뺨을 감쌌다.
쪽, 하고 입술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눈을 살짝 뜨자 승현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농담이에요. 형이라고 부를게요.”
“으응.”
“자기가 더 좋으면…….”
“아니, 아니야.”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무리였다. 수환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자 승현이 후후, 하고 웃음을 흘렸다.
“어서 집에 가요.”
“그래.”
집에 가자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묘하게 야한 말처럼 들렸다. 수환은 그 생각을 부정하려 애썼다. 그러나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계속해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편의점 좀 들러도 될까요?”
“응? 편의점?”
“네.”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 들르자는 승현의 말에 수환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주전부리를 좋아해서 집 앞 편의점에 종종 가곤 했다. 게다가 마침 먹던 과자가 다 떨어져서 사야 한다는 것도 떠올렸다.
“난 과자 좀 살게.”
“저는 딴 거 보고 있을게요.”
“응.”
수환은 곧바로 과자 코너로 다가갔다. 그의 눈이 한 줄로 진열된 과자를 쭉 훑었다.
어? 이거 새로운 맛 나왔네. 곱창 맛? 맛있으려나? 아직 빙의하고 곱창은 안 먹어 봤는데, 먹을 수 있으려나…….
수환은 미간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신중하게 고민하며 과자를 쓸어 담았다. 충분할 정도로 바구니를 빵빵하게 채운 다음에야 만족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편의점 안에서 헤어졌던 승현을 찾았다. 아직도 고르는 중이려나? 근데 승현은 뭘 사려는 거지? 호기심이 생긴 수환이 다른 코너에 있는 승현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승현아, 다 골랐어?”
“아.”
“……?”
승현은 작은 박스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지? 다가간 수환은 작은 박스의 정체를 깨닫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너, 그거.”
승현이 들고 있는 건 콘돔이었다. 콘돔 박스를 지그시 보고 있던 승현이 고개를 돌려 당황하고 있는 수환을 응시했다.
“미처 씻어내지 못하면 배 아파하잖아요. 그래서 이거 쓰면 어떨까 하고…….”
“읏.”
적나라한 말에 수환의 얼굴이 또다시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몇 번이나 승현과 잠자리를 하면서, 수환은 항상 끝나고 나면 지쳐서 쓰러져 자기 바빴다. 그런 수환의 뒤처리는 항상 승현이 해줬다.
하지만 완벽하게 씻기는 건 어려운지,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배가 아파서 고생하고는 했었다. 워낙 튼튼한 몸이라 수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승현은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형?”
“아.”
화들짝 놀란 수환이 붉어진 얼굴로 승현을 응시했다. 그의 눈 안에 있는 기묘한 열기를 마주하며 수환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거, 살 거야?”
“글쎄요. 살까요?”
“…….”
“…사지 말까요?”
대답하기가 너무 곤란했다. 그냥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며 모른 척 몸을 돌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쩐지 수환의 몸은 붙박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승현이 저걸… 사면 다시는 안에 해 주지 않는 걸까. 그럼 두 번 다시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없는 건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수환은 너무 민망해졌다. 미쳤다. 미쳤어. 왜 이렇게 파렴치한 생각을 하는 거지.
“형?”
“아, 그.”
재촉하는 듯한 부름에 수환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승현의 얼굴과 콘돔 박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윽고 수환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사지… 말자.”
승현의 손에 있는 콘돔을 잡아 다시 진열장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온몸을 달굴 정도로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제가 한 행동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알았어요.”
“읏.”
숨 막힐 정도로 짙은 페로몬이 수환을 압박했다. 흉흉한 눈으로 수환을 보던 승현이 과자가 든 바구니를 흘끗거리며 말했다.
“과자, 어서 계산하고 와요.”
“…응.”
몽롱한 상태의 수환이 바구니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계산하면서 카드를 건네는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봉지를 받아 든 수환이 승현에게 돌아왔다. 뜨거운 손이 봉지를 들지 않은 반대 손을 꽉 잡았다.
“빨리 가요.”
잔뜩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승현이 손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수환은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잠깐 생각했다.
그러나 무섭거나 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바라고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숙인 수환이 마주 잡은 승현의 손을 꽉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
“흣.”
“어서… 비번 눌러요.”
“아, 잠깐.”
티셔츠 안으로 집어넣은 뜨거운 손가락이 수환의 맨살을 더듬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도무지 제대로 비밀번호를 누를 수가 없었다. 수환이 잔뜩 달아오른 몸을 비틀었다.
“잘… 안 눌러져.”
“하… 수환이 형.”
뒤에서 수환을 끌어안은 승현이 뜨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나 미치기 전에 빨리 열어요.”
“읏……!”
승현의 손가락이 수환의 가슴 끝을 거칠게 비틀었다. 아픔과 함께 강렬한 쾌감이 수환의 몸을 뒤흔들었다. 이제는 숫제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수환이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 띠, 띠띠, 띠.
삐리릭.
“아……!”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승현은 짐승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그 바람에 수환이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놓쳤다. 수환의 손에서 떨어진 과자 봉지가 현관을 뒹굴었고, 빈손이 된 수환은 두 손으로 승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음, 으응.”
“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승현… 아.”
승현의 혀가 질식할 정도로 입안을 꽉 채웠다. 수환이 신음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자 질척한 혀가 기어코 끝까지 따라와 좁은 입안을 휩쓸었다.
“흐으, 흐.”
건장한 알파의 몸을 가진 수환은 의외로 입안이 작고 좁은 편이었다. 그게 항상 승현을 안달 나게 만들었다. 이 작은 입안을 자신의 것으로 가득 채워 넣고 싶었다. 버거워하는 그를 찍어 누르고, 마음껏 달콤한 타액을 갈취하고 싶다.
조금 잔혹한 상상을 하는 승현의 눈이 독점욕으로 물들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수환의 몸을 껴안고 질질 끌듯이 걸어갔다. 복도 끝에 있는 침실까지 겨우 당도했다.
침실까지 오는 길에 키스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지고, 다급한 손길이 티셔츠를 벗겼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수환이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눕혀졌다.
“하아,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요?”
“응…, 흐응.”
가슴을 애무하자 수환의 입에서 달콤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승현은 낮에 수환이 마카롱을 먹던 장면을 떠올렸다. 작은 마카롱을 손에 꼭 쥐고 먹던 수환을 봤을 때부터, 승현은 줄곧 이렇게 하고 싶었다.
승현의 시선이 수환의 가슴에 달린 붉은 과실로 향했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유두가 그 무엇보다 달콤한 사탕처럼 보였다. 승현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작은 유두를 손으로 쓸었다. 차가운 공기에 긴장하고 있던 유두가 승현의 손길에 금세 딱딱해졌다.
마치 승현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지만, 승현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수환의 유두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가슴 곳곳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아읏! 하앗……!”
가슴을 깨물리는데 이상하게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평소보다 거친 승현의 태도에 수환은 겁먹은 듯 다리를 움츠렸다. 그러자 승현이 두 손으로 수환의 다리를 잡고 우악스럽게 벌렸다.
“어서 다리 벌려요.”
“흣.”
“이 안에 싸질러 달라고 콘돔 못 사게 한 거잖아.”
“아……!”
“응? 아니야?”
젤을 바른 손가락이 꽉 다물린 애널을 거칠게 쑤셨다. 그 거친 손놀림에 거부감을 느끼긴커녕 수환은 점점 더 흥분해갔다. 온몸을 짓누르는 페로몬 향을 맡으며 헐떡거렸다.
“아, 승현아, 승현…! 흣……!”
“신음 참지 마요. 어제는 잘만 앙앙댔으면서.”
“그건… 읏!”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짓눌렸던 수환은 어젯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하지도 못했을 민망한 말들과 행동을 해댔는데, 공교롭게도 수환은 그때의 기억이 좀 희미했다. 그래서인지 매도하는 승현의 말이 조금 억울했다.
“그건, 뭐요? 응?”
“그건… 아, 아응.”
애널 안을 더듬던 승현의 손가락이 수환이 느끼는 부분을 정확하게 짓눌렀다. 금세 달아오른 몸이 쾌감을 느끼며 흥분했다. 수환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신음을 내뱉기 바빴다.
“거기…, 흣, 너무, 앗, 아아아……!”
“너무? 너무 좋다고요?”
“아앗, 앗!”
질척거리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침실 안을 울렸다. 뜨거운 기운에 젤이 금방 녹아내려 구멍 밖으로 흘러나와 시트를 적셨다. 그게 마치 오메가의 젖은 구멍처럼 보였다. 승현이 이를 악물며 구멍을 쑤시는 손가락 수를 늘렸다.
그렇게 손가락 개수가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 꽉 다물려 있던 구멍이 금방 흐물흐물하게 풀어지며 거부감 없이 승현의 손가락을 받아냈다. 잔뜩 풀어진 내벽이 승현의 손가락에 쫀득하게 달라붙어 왔다.
“아아, 아아앙…….”
“젠장.”
극점을 다시 꾹 누르자 수환이 참지 못하고 긴 신음을 흘렸다. 부끄러워하며 다리를 움츠렸던 수환은 주어지는 쾌감에 푹 빠져서 스스로 다리를 더 벌리며 허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발정 난 페로몬이 확 풍겼다. 승현이 인상을 쓰며 저도 모르게 욕설을 뇌까렸다.
승현이 손가락을 거칠게 빼냈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승현 역시 잔뜩 흥분해서 페니스의 귀두 부분을 수환의 젖은 구멍에 문질렀다. 방금까지 손가락을 머금었던 애널 입구가 벌름거리며 뭉툭한 귀두 부분을 꽉 조였다.
“하아… 형은 안 보이죠? 형 구멍이 내 거 존나 물고 있는데.”
“흐응, 아응, 제발…….”
“제발, 뭐요? 내 좆 받아먹고 싶다고요? 응?”
“흐읏, 빨리… 넣어 줘, 아……!”
“씨발.”
또다시 작게 욕설을 내뱉은 승현이 짓누르듯이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내벽을 짓이기며 파고든 성난 성기가 수환이 느끼는 곳들을 거침없이 찔러댔다. 발정 난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이 주변에 확 퍼졌다.
“아응, 앗…! 승현, 아……!”
“후우.”
골반을 꽉 틀어쥔 승현이 미친 듯이 허리를 밀어붙였다. 폭풍같이 파고드는 성기에 수환은 정신을 하나도 차릴 수가 없었다. 불구덩이에 던져져 온몸이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형, 수환이 형, 읏, 수환아……!”
“흐, 아, 승현, 승현아……!”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절정에 도달했다. 먼저 참지 못하고 사정한 건 수환이었다. 하얀 정액이 그와 승현의 배에 튀었다. 꽉 조여드는 내벽에 눈앞이 하얗게 변한 승현도 곧 수환의 안에 정액을 퍼부었다.
“큭……!”
“흐, 아아……!”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한동안 침실을 가득 메웠다. 이번에는 거의 동시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수환을 감쌌다. 그러나 승현의 생각은 다른지, 아직도 불긋한 흔적이 남은 수환의 목을 혀로 길게 핥으며 열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너무 흥분해서……. 다음엔 더 길게 할게요.”
“아… 아니야.”
그 말에 승현에게 안기듯이 누워 있던 수환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말하니 자신이 너무 밝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더 길게, 더 깊게, 굵은 성기가 안쪽을 수도 없이 들쑤신다고 생각하니 또 흥분되는 건 사실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수환이 손을 뻗어 승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부끄럽다는 듯이 볼을 붉힌 수환이 조금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나도… 더 움직이고 싶어.”
“…정말요?”
“응.”
수환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동안 수도 없이 행위를 하면서 수환은 누운 자세로만 승현의 것을 받아냈다. 물론 그 모두가 기분 좋고 만족스러웠지만, 수환도 나이가 나이고 문란했던 진수환의 지식이 조금 머릿속에 남아 있다 보니 싫어도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체위가 있고, 연인을 만족시킬 방법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게 처음인 승현은 한 번도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수환은 못내 걱정스러웠다. 승현이 자신과의 관계가 매번 똑같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민망함을 참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승현이 기쁜 듯한 얼굴로 붉게 물든 수환의 얼굴 곳곳에 입을 쪽쪽 맞췄다.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연인은 너무나 귀엽고, 또 너무나 야했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승현은 묘하게 적극적이 된 수환의 생각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씩 웃은 승현이 마지막으로 도톰한 입술을 마음껏 빨아올린 다음,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럼 체위를 좀 바꿔 볼까요.”
“어떻게?”
의아한 어조로 묻자마자 승현이 수환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은 침대에 눕고 허리께에 수환을 앉혔다. 그 바람에 승현의 성기가 안에서 빠져나가 수환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앗.”
“제 거 세워서 넣어 줘요.”
“…내가?”
“네.”
“나, 무거운데.”
수환은 울상을 지으며 어쩌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수환의 몸은 알파라서 승현보다 체격이 큰 편이었다. 가뜩이나 그게 평소에도 신경 쓰이는데, 이 자세는 유독 체격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앉아요.”
“싫어, 나 내려갈… 앗……!”
승현이 두 손으로 수환의 골반을 잡고 확 끌어 내렸다. 승현의 허리를 깔고 앉자마자, 흉흉해진 성기가 수환의 아래를 쿡쿡 찔렀다. 수환의 몸이 움찔거렸다.
“내 좆 잡아요. 어서.”
“흐.”
승현의 말에 수환은 벌벌 떨면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젖어서 미끈거리고 뜨거운 성기가 손에 만져졌다. 그사이에 수환의 행동에 자극을 받았는지 승현의 것은 이미 반쯤 서 있었다. 수환이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가만히 있다가, 입술을 꾹 깨물고 손을 다시 움직였다. 수환이 조심스럽게 손안의 페니스를 쥐고 살살 흔들었다.
“하… 수환이 형.”
“승현아… 앗.”
금방 부피를 키운 페니스가 손안에서 점점 더 커졌다. 그동안 자신의 안에 수도 없이 들어갔던 성기를 직접 만지니 느낌이 이상했다. 뜨거운 페니스는 단단하고 길었다. 수환의 큰 손바닥으로도 다 감싸지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도 수환의 손길에 흥분하며 더 커지고 있었다. 민망해진 수환은 온몸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게다가 누워 있다가 자세를 바꿔 앉아 있다 보니, 속에 든 정액이 밖으로 주륵 흘러내렸다. 그 생경한 느낌에 등줄기가 파드득 떨려왔다. 수환이 더는 참지 못하고 승현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안에서… 계속 나와.”
“후… 끝나고 긁어 줄게요. 응?”
“지금 넣으면, 너무…….”
“무슨 말이에요. 안에 싸는 게 좋다고 할 땐 언제고.”
“그건… 앗……!”
승현이 손을 뻗어 재촉하듯이 수환의 페니스를 꽉 잡았다. 안 그래도 수환의 것도 흥분해서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던 참이었다. 승현이 그걸 자신이 한 것처럼 똑같이 쥐고 흔들자, 극심한 쾌감이 중심으로부터 확 퍼져서 머리끝까지 울렸다. 머리를 뒤로 젖힌 수환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수환도 참을 수가 없어졌다. 승현의 손에 페니스가 잡힌 채로, 수환은 굵은 좆을 구멍에 맞췄다. 그러자 안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을 두꺼운 귀두가 마개라도 되는 듯이 꾹 막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허리 내려요.”
“흣, 잠깐…, 아읏.”
누워서 받아낼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수환을 휩쓸었다. 뭉툭한 귀두가 점점 아래를 꽉 채우며 올라오는 느낌이 너무 선명했다. 수환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 아앗……!”
이미 안쪽은 빈틈없이 꽉 채워진 것 같은데, 아무리 허리를 내려도 끝이 나지 않았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엔 덜컥 겁까지 났다. 수환이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승현을 내려다봤다. 그의 입에서 절로 칭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흣, 왜… 안 끝나아… 나, 더는 못해.”
“하, 진짜…….”
승현은 이제 현기증이 나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그가 두 손으로 수환의 골반을 부러트릴 듯이 꽉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밑으로 확 끌어 내렸다.
“아……!”
“흣,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나 미치라고? 응?”
“아니…, 야, 앗……!”
뿌리까지 삼킨 승현의 성기가 밑에서 매섭게 찔러왔다. 허벅지를 덜덜 떠는 수환의 골반을 꽉 틀어쥐며 승현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어서 움직여요.”
“흐…….”
거칠게 종용하는 승현의 말에 수환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승현의 위에 앉은 몸이 작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흐응, 앗, 앗……!”
허리를 움직이니 철벅철벅, 하고 민망한 소리가 났다. 안에 승현의 정액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젖은 소리에 수환의 얼굴이 더더욱 빨개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은 더 흥분됐다. 수환이 승현의 배 위에 두 손을 짚은 채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흣, 아, 좋아, 앗, 아앗……!”
“읏……!”
승현 역시 평소와 다른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기승위는 두 다리로 버텨야 하는 만큼 허벅지에 힘을 주게 되니, 평소보다 수환의 아랫구멍이 페니스를 빨아들이는 힘이 더 강했다. 너무 강한 자극에 승현 역시 흥분하며 허리를 쳐올렸다.
“아앙, 아, 승현, 승현, 아, 아……!”
“하아.”
침대에 누운 채 허리를 쳐올리던 승현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수환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두 팔을 등 뒤에 짚자, 승현이 그 상태로 계속 허리를 퍽퍽 쳐댔다.
“흐으, 읏, 앗, 이거, 이상, 이상해앳, 아……!”
각도가 바뀌어 비틀어진 애널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정액이 쿨쩍 흘러나왔다. 그 상태로 계속 쑤셔대는 페니스 때문에 부글거리며 하얀 거품이 일었을 정도였다. 그걸 보는 승현의 눈이 번들거렸다.
“이거, 흣, 봐요.”
“싫, 읏, 싫어, 아앙……!”
“형이 그렇게, 후, 싸 주길 바랐잖아. 직접 봐야지, 응?”
바뀐 자세로는 고개만 숙이면 교접하는 부분을 수환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수환은 도리질을 치며 거부했다. 가뜩이나 미칠 것 같은데, 그런 걸 보면 아예 정신이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파의 뒤는 젖지 않지만, 속에 든 정액이 흘러나오는 광경이 마치 오메가의 구멍을 보는 것 같았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승현이 이를 악물며 거세게 추삽질을 했다. 얼마 가지 않아 묽은 프리컴을 흘리던 수환의 페니스가 먼저 파정했다.
“흐으으, 아읏, 아아……!”
“하, 제길…….”
“앗, 나, 방금 갔…, 잠깐, 잠까안……!”
완전히 뒤로 넘어간 수환을 눕히고, 허리만 높이 들게 한 승현이 그대로 위에서 짓이기듯이 허리를 퍽퍽 박았다. 꽉 조이는 내벽은 사정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파고드는 성기에 형편없이 짓눌렸다. 이대로 가다간 안이 완전히 망가질 것 같았다. 수환이 두려움에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흐윽, 그만, 그마안……! 아앗……!”
“크윽.”
수환의 안에 깊숙이 허리를 파묻은 승현이 잘게 몸을 떨었다. 두 번째 사정이었다. 그는 수환의 안을 제 체액으로 채울 것처럼 집요하게 정액을 퍼부었다.
“흐으, 흐윽.”
“하아, 수환이… 형.”
사정하며 몸을 떨던 승현은 느릿하게 몸을 숙였다. 그리고 뒤늦게 훌쩍훌쩍 울고 있는 수환을 발견했다. 그가 고개를 떨어트려 울고 있는 수환의 눈을 핥았다.
“왜 울고 그래요. 응?”
“흐으, 너무.”
“너무 기분 좋아요?”
“으…….”
무서울 정도로 과도한 쾌감 때문에 운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기분 좋았냐는 물음이 틀린 건 아니었다. 수환은 눈물이 흐르는 얼굴 곳곳을 핥는 승현 때문에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후후.”
수환이 눈물을 그치자, 승현이 웃으며 하도 물고 빨아서 도톰해진 입술을 다시 쭉쭉 빨았다.
“으음, 응.”
승현의 키스를 받으며 수환은 온몸을 가득 채웠던 열기가 조금은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손을 뻗어 승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크게 다가왔던 쾌감이 부드럽게 감싸는 승현의 페로몬처럼 더는 버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게 후희라는 거구나. 승현과 키스하며 수환은 멍하니 생각했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끝나고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몇 번이나 승현과 밤을 보냈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하아… 승현아.”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는 수환의 얼굴에 승현이 계속해서 쪽쪽, 입술을 내렸다. 그 깃털 같은 입술을 느끼며 수환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은 이렇게 좋은데…… 승현은 어떨까? 그도 자신처럼 만족하고 있을까?
한 번 든 의문은 머릿속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처럼 흥분한 페로몬을 잔뜩 느꼈는데도, 어쩐지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될 것 같지 않았다. 수환이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물었다.
“너는…? 너도 좋았어?”
“저요?”
수환의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달콤한 눈물을 마저 핥아낸 승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딘지 불안한 듯한 수환의 눈을 마주 보았다.
“우리 관계가… 그러니까, 일반적이지는 않으니까.”
시무룩한 어조에 승현은 순간 올라갈 뻔한 입꼬리를 꾹 눌렀다. 수환은 단순히 기분이 좋았냐, 아니냐를 걱정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말 그대로 수환은 승현과 마음이 통한 한편, 계속 가슴 속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이대로도 정말 좋은데, 만약 오메가인 승현이 만족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다.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 알파는 널려 있으니 말이다.
그걸 꿰뚫어 본 승현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미소를 막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저도 좋았어요. 왜 그런 걱정을 하고 그래요.”
“하지만.”
“나도 진짜 좋은데, 얼마큼 해야 믿어 줄래요?”
“앗.”
은근하게 말한 승현이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자,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아래가 찌걱, 하며 음란한 소리를 냈다. 수환이 기겁하며 승현의 어깨를 잡았다.
“믿어, 믿으니까, 이제 그만…….”
“이미 늦었어요.”
“읏.”
달콤하게 웃은 승현이 수환의 목을 콱 깨물었다. 이미 건율이 만든 흔적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승현이 만든 흔적들이 목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흔적들을 혀로 길게 핥으며 승현이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