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물질은 메인수를 지키고자 한다 2화 (11/29)

2.

“후우.”

당연한 아침 일과처럼 찰싹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승현을 겨우 학교에 보내고, 수환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긴장한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김실장]

수환이 먼저 도운에게 연락하는 건, 승현과 동거를 다시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은 도운에게서 연락이 오는 것도 두려웠을 정도로 통화하기 꺼렸었다.

하지만 이젠 승현과의 관계가 예전과는 달라졌다. 수환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차분한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얼마 가지 않아 도운이 전화를 받았다. 그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예,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실장님. 지금 바쁘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도련님.

“네, 그게.”

우선은 다른 오메가들과 선을 보는 것부터 그만둬야 한다. 그리고 승현과 파혼하지 않겠다고, 진 회장이 알 수 있도록 이 기회에 못을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할아버지 일정이 어떻게 돼요? 한번 찾아뵙고 싶은데요.”

―회장님 말입니까?

당황한 듯한 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진수환이 먼저 진 회장을 찾는 일은 없었다. 사춘기 시절부터 급격하게 사이가 틀어졌다고 했던가. 수환이 당황하는 도운에게 대답했다.

“네, 제가 직접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아……. 예. 알겠습니다. 일정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전화를 끊고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진 회장을 잘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승현과 계속 함께하려면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집안일을 대충 끝내고 보니 곧 수환도 학교에 갈 시간이었다. 비록 러트를 핑계로 1주일 내내 쉬었던 데다가 곧 가지 않을 학교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는 거두고 싶었다.

게다가 월요일의 교양 수업은 승현과 같이 듣는 강의였다. 수환은 조금 쑥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욕실로 들어갔다.

“…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흘끗 본 수환이 난감한 얼굴로 목 주변을 손가락으로 더듬거렸다. 밤새 승현이 깨물고 애무한 흔적이 아직도 울긋불긋하게 남아 있었다.

“이거 어쩌지.”

수환이 곤란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건율이 남긴 손자국을 승현이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수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밤마다 집요하게 목 언저리를 애무하는 걸 내버려 뒀더니 난리가 나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졌을 건율의 손자국 따윈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이 야릇해 보이기 짝이 없는 키스 마크가 더 문제였다. 반창고 붙이면 가려지려나. 안 될 것 같은데.

고민하던 수환은 우선 씻고, 그다음 드레스 룸으로 갔다. 아직 목티를 입거나 스카프 같은 걸 하기에는 다소 더운 날씨였다.

“음.”

옷장을 뒤지던 수환은 절반만 목을 가려주는 반목티를 겨우 찾아냈다. 옷 재질도 얇아서 요즘 날씨에 입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휴, 짧게 한숨을 내쉰 수환이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직 조금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대충 탈탈 털어내고 집을 나섰다.

“아, 좀 빨리 나왔네.”

학교 앞에 도착한 다음 시계를 흘끗 봤는데, 아무래도 시간을 좀 착각한 모양이었다. 강의 시작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이대로 그냥 학교에 갈까 하다가, 수환은 카페 앞에 멈춰 섰다. 어제 승현을 기다렸던, 그가 일하는 카페였다.

망설이던 수환이 조심스럽게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거의 하루 종일 있었기 때문일까, 더는 이곳을 피해 빙 돌아가 다른 카페를 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문을 열자 짤랑, 하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카페 안을 울렸다. 수환이 성큼성큼 걸어가 카운터 앞에 섰다.

“어서 오…….”

직원이 인사를 건네다가 수환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공교롭게도 예전에 수환이 곤란하게 했던 그 직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환을 쳐다봤다.

하지만 수환도 이제 어느 정도의 시선쯤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놀란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메뉴판을 보다가 다시 직원을 보며 말했다.

“깔라만시 에이드 주세요.”

“아… 네. 오천 원입니다.”

카드를 건네 계산을 마치고 뒤로 물러났다.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곧바로 음료를 주문했다.

얼마 후 진동벨이 울리고 수환이 음료를 찾으러 갔다. 직원이 긴장한 눈으로 수환을 보다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저기, 이거…….”

“네?”

음료와 함께 직원이 준 것은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마카롱이었다. 자세히 보니 어제 승현이 준 마카롱 중에선 보이지 않던 색이었다. 수환이 의아한 눈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오늘 새로 납품받았거든요. 어제 잘 드시길래…….”

“아.”

어제도 이 사람이 있었구나. 수환은 내내 승현만 신경 썼기 때문에 몰랐었다. 그 정도로 정신없이 승현만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민망해졌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준 마카롱을 받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겨우 미소 짓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불편해하는 모습이었지만,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승현의 주변 사람에게 조금은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 새파란 색의 마카롱을 손안에 꾹 쥐었다.

카페를 나온 수환은 전보다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오늘은 꽤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헤실거리는 얼굴로 깔라만시 에이드를 쪽, 하고 한 모금 빨았다.

학교 입구를 지난 수환은 곧바로 강의실에 가지 않았다. 시간이 아직 좀 남았기도 하고, 에이드를 급하게 흡입해서 그런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수환은 알파 전용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처음에는 공용 화장실이 남자, 여자를 떠나 알파와 오메가로도 나뉘어 있다는 걸 알고 당황해했으나, 지금은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급하게 요의를 해결하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누군가가 수환의 앞을 막아섰다.

“헉……!”

뿔테 안경에 가려진 까만 눈이 수환을 빤히 응시했다. 수환은 놀라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자신의 앞을 막아선 사람을 내려다봤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여기, 남자 화장실 앞인데.”

희영이었다. 어떻게 수환이 여기 있는 걸 안 건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도 알파 전용 남자 화장실 앞에서 말이다.

당황한 수환을 보며 희영이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제 연락처 가지고 계신가요?”

“…연락처?”

“연락 한 번 안 하시던데.”

“아…….”

수환은 문득 희영이 강의 시간에 주었던 연락처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건 핸드폰에 저장하기도 전에 승현에 의해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났었다.

차마 그걸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킨 수환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실 그거, 잃어버렸거든. 근데 일부러 버리거나 한 건 절대 아니고.”

“…….”

“너한테… 연락하기 싫어서 버렸던 건 아니고, 그러니까.”

그러나 갈수록 변명이 궁색해졌다. 수환은 점점 눈앞이 캄캄해져 갔다. 진수환의 업보가 또다시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대체 희영은 그에게 무슨 짓을 당했던 걸까. 수환이 의기소침한 어조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과거에 너에게 뭔가 한 게 있으면 알려 줄래? 사과하고 보상해 줄 테니까.”

“……?”

“미안해. 승현이한테만은 제발 말하지 말아 주라. 부탁할게.”

“……?”

수환의 말이 이어질수록 의아한 표정을 짓던 희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불쌍할 정도로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수환을 보며 아, 하고 입술을 벙긋했다.

“뭔가 오해하신 모양인데요. 선배님.”

“어?”

“선배님은 저한테 아무 짓도 안 하셨어요.”

“정말?”

“네.”

“근데 왜…….”

희영의 말에 수환은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과거에 진수환이 희영에게 쓰레기 같은 짓을 해서, 거기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연락처를 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그럼 왜 자신에게 뜬금없이 연락처를 준 거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어 식은땀만 흘리는 수환에게 희영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선배님은 진 회장님을 쉽게 설득할 수 없을 거예요.”

“뭐… 라고?”

새카만 희영이 눈이 수환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에게 속마음을 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수환의 머릿속 따위는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희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진화련 대표님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

“그분은 선배님을 도와주실 거예요.”

수환의 눈이 커졌다.

진화련. 진수환의 사촌 누나이자 현재 화명을 물려받을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알파 형질을 가진 데다 진수환보다 훨씬 똑똑하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진길영은 성별이 여자인 진화련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만약 진수환이 망나니 같은 짓들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끝까지 진화련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작에서 진길영이 진수환의 죽음을 단순 사고사로 생각하고 진실을 파헤치지 않은 건, 진화련이 후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언론에서는 사촌인 진수환과 진화련의 사이가 최악인 것처럼 떠들곤 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렸을 적 굉장히 친한 사이였다. 부모를 잃은 진수환은 대하기 힘든 할아버지 대신 사촌 누나인 진화련에게 많이 의지했었다. 진수환에게 있어서 그녀는 부모이자, 스승이고, 친구인, 그의 유일한 이해자였다.

진화련이 미국으로 유학하러 떠나기 전까진 말이다. 두 사람은 그 이후 사이가 틀어졌다. 그 이유까진 수환도 몰랐다. 진수환이 죽은 뒤에 그의 과거가 짧게 나오긴 했지만 그 정도로 많은 서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대체…….”

“그리고 이제 학교에는 나오지 마세요.”

“뭐?”

“주건율 조심하시고요.”

“어어.”

수첩을 꺼낸 희영이 펜을 들어 휘갈겼다. 대충 찍, 하고 찢은 종이를 수환에게 내밀었다. 수환은 그걸 얼떨결에 받았다.

010-XXX-XXXX. 언젠가 봤던 희영의 연락처였다. 희영은 당부를 하듯 거듭 말했다.

“조심하세요.”

“잠깐…….”

그러나 희영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수환은 차마 그녀를 쫓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희영의 말들이 수환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켰다.

“대체 뭐지.”

수환이 중얼거리며 희영이 준 연락처를 내려다봤다. 벌써 그녀에게 두 번째로 연락처를 받았다. 물론 그녀가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준 건 절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심하세요.’

희영의 진지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연락처를 내려다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래도 희영의 연락처를 저장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앗.”

그러나 한 손에 에이드를 들고 있는 바람에 연락처가 아닌 다른 앱을 눌러버렸다. 로딩 화면을 바라보는 수환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다. 재빨리 잘못 누른 앱을 끄려고 했는데, 자동으로 로그인 된 앱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문장이 수환의 눈에 박혔다.

잘못 누른 앱은 에타였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추천 수와 댓글을 압도적으로 받고 있는 게시글의 제목에는 수환과 승현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경영 미친개 ㅈㅅㅎ이랑 약학 ㅇㅅㅎ 사귀나 봄]

“……!”

초성만 적혀 있지만 단번에 누구를 얘기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핸드폰을 든 수환의 손이 떨렸다.

역시 주말에 승현과 운동화를 사러 갔을 때 들었던 소리가 착각이 아니었다. 학교의 누군가가 승현과 자신이 운동화를 사는 걸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냥 빨리 앱을 끄고 보지 말라고, 머릿속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소리쳤지만 수환은 쉽사리 그러지 못했다. 귓가에 모기가 있는 것처럼 연신 왱왱거렸다. 그러다 수환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게시글을 눌렀다.

경영 미친개 ㅈㅅㅎ이랑 약학 ㅇㅅㅎ 사귀나 봄

어제 역앞 def마트에서 둘이 데이트하는거봄 사이 ㅈㄴ 좋아보이던데 사귀는거아님?ㅋㅋㅋ

익명1: 헐 진짜? 둘이 사겨??

└익명3: 대박 충격적

└익명5: 에이, 설마….

익명2: ㅇㅇ나도 봤음 난 카페에 있는것도봄

└익명6: 카페ㅇㄷ?

└익명7: D어쩌구 ㅇㅅㅎ일하는데임

└익명10: ㅋㅋ진짜 사귀나보네

익명4: 이야 ㅈㅅㅎ 결국 해냈네 그짓진짜 잘하나보다ㅋㅋ

└익명8: 미친ㅋㅋㅋ

└익명11: 옵하 나죽어

익명9: ㅇㅅㅎ도 별거없네….

└익명13: 멀기대한거임

└익명15: 자본과 정력의 승리

└익명22: ㅈㄴㅋㅋㅋㅋㅋ

익명12: ㅇㅅㅎ 그러케 튕기더니… 나도 함대주지….

└익명14: ㅋㅋㅋㅋㅋㅋ니 얼굴이나봐

└익명16: 너 베타냐알파냐ㅋㅋㅋㅋㅋ ㅈㄴ궁금하네

익명17: 야 근데 ㅇㅅㅎ도 제정신 아닌 듯 거의 스토커랑 사귀는거 아님? 둘다 역겨움

└익명20: ㅇㄱㄹㅇ

└익명24: 스톡홀름증후군

└익명25: 개소름끼치네

그 뒤로도 자극적인 익명 댓글이 쭉 달려 있었다. 수환은 차마 다 읽지 못하고 에타를 껐다. 마치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너 오늘 에타 봤어?”

“아, 그거? 루머 아니야? 둘이 심하게 안 어울리는데.”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여학생들이 수환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그의 옆을 지나갔다. 수환은 그만 손가락에 힘이 빠져 들고 있던 음료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팍!

남아 있던 음료가 땅에 떨어지며 수환에게 튀었다. 승현과 맞춘 새하얀 스니커즈에 음료가 묻었다. 수환이 떨리는 눈으로 그걸 내려다봤다.

마치 자신의 모습 같았다. 순백한 주인공을 더럽히는 이물질.

지금의 수환과 꼭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

승현은 오늘도 아슬아슬한 시간이 되어서야 전공 강의실에 도착했다. 교수가 들어오기 직전에 가까스로 도착했기 때문인지 다른 날보다 더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 분위기가 어떤지 눈치채지 못했다.

“저기, 승현아.”

“응?”

전공 수업이 끝나고 계속 눈치 보던 가현이 조심스럽게 승현을 불렀다. 승현이 돌아보자 잔뜩 긴장한 그녀가 동기들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입을 열었다.

“있잖아,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그게.”

자꾸만 어물쩍거리는 가현의 태도에 답답하다는 듯이 찬우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승현에게 물었다.

“너 진짜 진수환이랑 사귀어?”

“뭐?”

“역시 아니지? 어떤 미친놈이 그런 헛소문을…….”

“어떻게 알았어?”

“…어?”

“어떻게 알았냐고. 내가 수환 선배랑 사귀는 거.”

동기들은 승현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승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동기들을 바라보았다. 뒤에 있던 은찬이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 에타에 그런 글이 올라왔던데, 너랑 진수환이 사귀는 것 같다고.”

“……!”

그 말에 표정을 굳힌 승현이 핸드폰을 꺼내 에타를 확인했다. 자극적인 제목만 보고 단번에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에타 글과 댓글을 확인한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찌질한 글과 댓글들이었다. 그는 이 정도 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만, 수환은 아마 다를 것이다.

하지만 수환은 이제 곧 학교에 오지 않을 테고, 핸드폰에 앱이 뭐가 깔려 있는지 모를 정도로 열어 보지를 않으니까 어쩌면 확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다.

승현이 눈살을 찌푸린 채로 수환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을 때였다.

“승현아, 대체 왜… 왜 그런 사람이랑 사귀는 거야?”

“…하.”

그렁그렁한 가현의 눈을 본 승현이 한숨을 삼켰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협박당해 수환과 사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동기들의 표정 또한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말한다고 과연 믿어 줄까. 그동안 승현이 느꼈던 것들을 말해 봤자 이들이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선입견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자신만 해도 수환의 곁에 계속 붙어 있어서 겨우 그가 달라진 걸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웬만한 일로는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을 내린 승현이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한데,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승현아.”

“식당엔 너희들끼리 가라.”

그렇게 말한 승현이 뒤를 돌아 강의실을 나갔다. 멍하니 승현의 뒷모습을 보던 가현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데 희영이는?”

“희영이?”

희영이 사라졌다는 걸 동기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강의실 안에 남겨졌다.

강의실을 나온 승현은 곧바로 수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음만 길게 이어질 뿐, 수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길.”

혹시 이미 에타를 본 건가. 그 심약한 사람은 고작 그런 말들에도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승현이 다급하게 위치 추적 앱을 실행하려고 했을 때였다.

“승현아.”

“……!”

누군가가 멈춰 서 있는 승현을 불렀다. 승현이 불쾌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건율이 그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태연한 낯짝을 보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우리 할 얘기 있지 않아?”

“할 말, 있지.”

승현은 천천히 핸드폰을 내렸다.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건율을 바라보았다.

수환은 건율과의 일이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승현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면 승현이 먼저 건율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수환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게 너무나 신경 쓰였다. 승현이 손에 쥔 핸드폰을 흘끗 쳐다보자 건율이 가까이 다가왔다.

“에타에 글 올라왔더라.”

“…….”

“나 알고 있어. 네가 마지못해 수환 형이랑 사귀고 있다는 거.”

“뭐?”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에 승현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그러다 건율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다는 걸 깨달았다. 약학대 건물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이쪽을 흘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이를 바득 간 승현이 건율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람 없는 데서 얘기해.”

“그래.”

어깨를 으쓱하며 웃은 건율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어렵지 않게 빈 강의실을 찾을 수 있었다.

탁, 건율이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먼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던 승현이 뒤를 돌아 건율을 응시했다.

그냥 아무 강의실이나 우연히 찾아 들어왔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인적이 드물고 구석에 있는 곳이었다. 승현이 삐딱한 시선으로 건율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이 오지 않는 건 승현 역시 바라는 바였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야, 주건율.”

“……?”

“그전에 한 대만 맞자.”

“……!”

퍽, 승현의 주먹이 자비 없이 건율의 얼굴에 꽂혔다.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건율은 제대로 막아 보지도 못하고, 승현의 주먹에 맞아 휘청이며 강의실 문에 부딪혔다.

“큭……!”

얼얼한 통증이 뺨에 느껴졌다. 철이 든 이후 누군가에게 맞은 적이 거의 없었던 건율이었다. 애초에 우성 알파인 그를 건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승현을 쳐다보자, 그는 건율이 했던 것처럼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원망하지 마라. 선배 목의 상처가 꽤 오래갔었거든.”

서늘한 얼굴로 말한 승현은 주말 내내 수환의 목에 남아 있었던 붉은 손자국을 떠올렸다. 그러자 다시금 맹렬한 분노가 안에서부터 들끓었다. 감히 자신의 것에 손을 댄 걸 이 정도로 용서해 주는 건 너무 값싼 느낌이 들 정도였다.

“너, 정말… 그런 형편없는 놈을 선택했다고? 우성인 네가?”

“뭔 개소리야.”

“하하……!”

별안간 웃음을 터트리는 건율을 보며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미친놈인가. 혐오감 섞인 얼굴로 바라보자 건율이 강의실 문에 기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날 내가 형이랑 뭐 때문에 싸웠는지 알아?”

“……?”

“형이 예전부터 나한테 당당하게 말했거든. 이승현 따먹고 나한테 주겠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서, 그날도 실랑이 벌이다가 그렇게 된 거야.”

“…….”

“넌 정말 그런 새끼가 좋아? 이승현.”

진실을 교묘하게 감춘 건율이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승현을 응시했다. 건율의 예상대로, 승현은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고개를 숙이는 승현을 보며 건율은 점점 더 의기양양해졌다. 대체 그 멍청한 진수환이 무슨 수법으로 승현을 꼬여낸 건지 몰라도, 이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수환에게 큰 실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든 승현의 얼굴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주건율.”

“……!”

“그게 거짓말이라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예전의 수환이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을 함부로 대하는 행동도 마음껏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수환은 아니었다. 따먹는다니, 실컷 따먹히기만 한 수환이 그딴 말을 건율에게 했을 리가 없었다.

건율이 간과한 건, 이미 둘의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끈끈해졌다는 것에 있었다. 이제 웬만한 일로 승현의 믿음이 흔들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건율은 끈질기게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 아니……!”

“경고하는데.”

“……!”

후욱, 하고 오메가의 페로몬이 위협적으로 건율에게 쏟아졌다.

또다. 또 이 압도적인 페로몬에 건율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맹수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건율이 긴장하며 승현을 쳐다봤다.

“선배랑 내 사이에 참견하지 마. 거슬리니까.”

“윽.”

“너랑 달리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건율에게 가까이 다가간 승현이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툭툭 쳤다. 마주친 승현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거렸다. 건율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승현의 눈을 마주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 선배가 다른 알파랑 만나지 말라고 했는데……. 너 때문에 약속 어겼잖아.”

한숨을 내뱉은 승현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건율을 밀치고 강의실 문을 열려고 하자, 옆에서 잔뜩 굳은 목소리가 들렸다.

“후회할 거야, 너.”

“…….”

“우수한 형질은 우수한 형질과 만나야 해. 그게 정답이야.”

처음 신입생 환영회에서 승현을 보았을 때, 건율은 운명을 느꼈다. 솔직히 그동안 다른 우성 오메가를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승현에게는 유독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저 오메가는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야 한다고 그때 생각했다.

그러나 승현은 싸늘한 눈으로 건율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더더욱 너랑은 안 되지.”

“뭐?”

“넌 나보다 훨씬 떨어지잖아. 찌질한 새끼야.”

“……!”

다시 한번 압도적인 페로몬이 몰려오자, 건율은 한쪽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승현은 마지막으로 무표정한 얼굴로 건율을 내려다본 다음 강의실을 나갔다.

강의실을 나오자마자 수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위치 추적 앱으로 수환의 위치를 알아낸 승현은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 상처받았을 연인을 달래 줄 시간이었다.

***

수환은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깨닫고 보니 거실 소파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 하…….”

떨리는 손으로 제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몸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에타에 그런 글이 올라오는 건 진수환의 인생에서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망나니인 그는 누가 자신을 욕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안하무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수환은 달랐다. 타인의 적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거나 배로 되돌려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나약한 스스로를 계속해서 곱씹으며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드는 타입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평소 느꼈던 불안함이 큰 원인이기도 했다. 애써 억누르고 있던 불안한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들게 만들었다.

‘나 따위가 감히 메인공 역할을 대신하려고 했다니.’

자신에겐 자격이 없었다. 승현과 함께 있는 모습만 보여도 온갖 욕을 먹는데 무슨……. 더 견딜 수 없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 승현까지 욕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승현이 자신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말을 들어야 했다.

“윽.”

수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무 놀라서 울지도 못한 그는 서서히 현실 파악이 되자 서러움이 잔뜩 몰려왔다.

심지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승현이 보고 싶어서 더욱 슬프고 서러웠다. 수환은 자괴감을 느끼며 혼자 흐느꼈다.

“흑… 승현아, 승현…….”

띠리리링, 띠링…….

그때, 거실 안에 작은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환이 고개를 들었다. 손에 움켜쥐고 있던 핸드폰의 화면을 멍하니 쳐다봤다.

[승현이]

“……!”

승현의 전화였다. 수환이 떨리는 눈으로 화면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승현의 전화를 받기 위해서였다.

수환은 지금 너무나 슬펐다. 그래서 승현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었다. 자신의 불안과 나약함을 모두 그에게 털어놓고, 자상한 승현에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아.”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멈칫했다. 만약 전화를 받았는데, 에타 글을 본 승현이 자신에게 원망의 말을 한다면? 사귀는 걸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한 번 든 부정적인 생각이 수환을 좀먹었다. 만약 승현에게서 조금이라도 딱딱한 말을 듣는다면 정말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흐윽, 흑.”

망설이는 사이 벨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이 잠잠해졌다. 승현이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는다. 어쩐지 그게 더 서러워서 수환은 더욱 크게 울었다. 모순적이기 짝이 없는 마음이었다.

이대로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수환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손에서 떨어진 핸드폰이 거실 바닥을 굴렀다. 핸드폰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수환은 고개를 숙여 눈물만 뚝뚝 흘렸다.

철컥.

“……!”

희미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수환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빠르게 거실로 들어왔다.

“승현아.”

“…하아.”

승현이었다. 학교에서부터 뛰어온 듯한 승현이 숨을 몰아쉬며 울고 있는 수환을 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너, 학교는 어쩌고.”

이제 막 교양 강의가 시작했을 시간이었다. 수환은 이렇게 빨리 승현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울고 있는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승현을 멍하니 쳐다봤다.

“왜 울고 있어요. 에타 글 봤어요?”

“……!”

역시 승현도 에타 글을 본 모양이었다. 수환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가까이 다가온 승현이 얼굴을 자세히 살피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수환이 더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형, 나 봐요.”

“…….”

“수환이 형.”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손이 어깨에 닿았다. 흠칫, 하고 수환이 어깨를 떨자 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사람들의 말 신경 쓰지 마요.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잖아요.”

승현은 마치 달래듯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에게서는 수환을 원망하는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안심이 되는 한편, 자신을 전혀 탓하지 않는 모습에 조금씩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건 승현이 자신에게 고백했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젖은 얼굴이 바로 앞에 있는 승현을 향했다.

“…승현아.”

“울지 마세요, 수환이 형.”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수환의 눈 주변을 닦아냈다. 그는 이제 수환의 우는 얼굴을 닦아내는 게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뒤늦게 민망함을 느낀 수환이 눈을 질끈 감자,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도르륵 흘러내렸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너까지 그런 말 듣고.”

“그게 왜 형 때문이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거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내가 너한테… 심한 짓 많이 했던 건 사실이잖아.”

비록 빙의한 수환이 했던 짓도 아니고, 소설에서 언급하지 않은 일들은 기억나지도 않았지만 승현에게는 그게 아닐 터였다. 빙의한 자신도 예전과 똑같은 진수환으로 보일 테니까.

그런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승현에게 고맙고 기뻤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계속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용서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혹시 이건 승현이 예전의 진수환에게 복수하기 위해 연기한 달콤한 덫이 아닐까. 애써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의문들이 수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내가 좋아질 수가 있어? 나는… 나에겐 그럴 자격이 없…….”

“형, 수환이 형.”

수환이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자, 승현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잡으며 이름을 불렀다. 수환이 흐릿한 눈으로 승현의 초조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나에겐 이미 과거의 일이에요. 절대로 형 원망 안 해요. 믿어 줘요.”

“하지만.”

“…윽!”

“……!”

감정이 격해진 수환이 승현의 왼쪽 팔목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승현의 입에서 작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수환이 놀라며 손을 놓자, 승현이 얼른 소매를 내려 팔목을 감췄다. 그러나 채 감추기 전에 수환의 눈에 흉터 자국이 보였다.

“그거, 설마…….”

그동안은 잘 숨겨 왔었다. 시계나 소매로 가리거나, 밤에는 잘 보이지 않으니 수환이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는 기가 막히게 눈에 잘 들어왔다. 수환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그 상처… 내가…….”

진수환의 업보가 또다시 수환의 앞에 들이밀어졌다. 이번엔 단순한 짐작이나 남의 얘기인 듯 떠올린 대사 따위가 아니었다. 승현의 손목에 남은 흉터가 자신의 눈앞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과거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형!”

“흐윽.”

다시 울음을 터트린 수환을 승현이 꽉 끌어안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려던 수환은 그러다 또 승현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제길, 입속으로 욕설을 삼킨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너무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어쩌다 다쳤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상처였다. 고작 이런 상처에 수환이 울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수환은 마음이 무척 약하다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곧 승현의 몸에서 수환을 진정시키는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형, 수환이 형. 이제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응? 믿어 줘요.”

“흐윽, 흑.”

“괜찮아요. 전혀 아프지 않아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등을 어루만지는 자상한 손길에 수환은 몸을 덜덜 떨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자신을 달래는 승현으로 인해 불안함이 오히려 더 커졌다.

만약 이러다…… 언젠가 빙의한 자신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진수환이 다시 돌아와서 승현을 괴롭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면 승현이 더욱 큰 상처를 받을 거라는 생각에 수환은 두려워졌다.

“내가…… 내가 또 널 상처 입히면 어떡해?”

“형이 나를요?”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너를…….”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승현의 옷을 꽉 붙잡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승현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옷자락을 세게 잡는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그런 수환의 등을 어루만지던 승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 아프게 할 거예요?”

“……!”

“행복하게 해 준다고 했잖아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얼마 전 승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저 가슴이 벅차올라 했던 치기 어린 말. 그러나 그 말에 승현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지금도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나에겐 그럴 자격이…….”

“괜찮아요. 나도 형한테 많이 부족하니까.”

“아니야! 아니야. 너는… 나한테 너무 과분해.”

“나한테도 그래요. 형이 너무 사랑스러운걸.”

“사랑스럽…….”

천천히 승현의 말을 따라 하던 수환의 얼굴이 빨개졌다. 붉어진 수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승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다 얘기해 줄게요. 입을 맞출 때마다 부끄러워하는 것도 사랑스럽고, 마카롱 먹는 것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밤에 싫은 척하면서 허리 움직이는 것도 정말 사랑스럽…….”

“그만, 그만해!”

승현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수환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외쳤다. 평소에도 자신에게 귀엽다느니 어쩌니,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더니 이번엔 도가 지나쳤다.

“거짓말, 또 나 놀리려고.”

“아니에요. 나 정말 밤새도록 말할 수 있어요.”

“윽.”

동시에 승현의 페로몬이 훅 끼쳐왔다. 지금 승현의 감정을 한껏 담은 농밀하고 뜨거운 페로몬이었다.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향이었다.

“우리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러트도 잘 보냈잖아요. 기억 안 나요?”

“…기억나.”

그때 꾸었던 꿈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아마 자신은 승현의 곁에 있는 한 불안함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승현을 좋아할수록, 그를 지키고 싶어 할수록 스스로를 더욱 믿을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좋아해요.”

“…….”

“형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좋아해. 진심이에요.”

그런데도 승현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도 승현을 너무 많이 좋아하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수환이 젖은 얼굴을 승현의 어깨에 묻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나도, 나도 좋아해. 정말 많이 좋아해.”

“수환이 형.”

“미안해. 널 포기하려고 해서……. 널 떠나려고 해서…….”

“…….”

수환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순간 승현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러나 순식간에 사라지며 금방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응, 다신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응… 응.”

“계속 내 곁에 있어요.”

“응.”

눈이 마주치자 수환이 눈을 감았다. 불안에 떨던 연인의 입술은 여전히 달콤했다. 수환의 입술을 핥으며 승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하, 수환이 형.”

“으응.”

도톰한 입술을 한껏 빨고, 살살 달래듯이 혀로 입안을 훑었다. 젖은 얼굴 곳곳에도 입술을 내렸다. 어느새 수환의 입에서는 울음소리가 아닌, 젖은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형이 불안하지 않게, 내가 더 노력할게요.”

“노력?”

“네.”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입술을 밑으로 내렸다. 뾰족한 턱 끝을 지나 목 주변을 지분거리고, 티셔츠를 들춰 매끄러운 살갗을 어루만졌다.

“아응.”

“나는 많이 표현한다고 생각했는데, 형이 불안해하는 걸 보니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짐짓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린 승현이 금세 흥분하며 바짝 선 유두를 혀로 길게 핥았다. 어느새 한껏 야릇해진 분위기에 수환이 당황했다.

“노력한다는 게, 이거… 앗.”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 줄게요.”

“충분한 것 같…… 흣.”

민감한 곳을 꽉 깨물자, 수환의 입에서 더 큰 신음이 튀어나왔다. 지난밤에도 실컷 깨물리고 핥아진 곳이 너무나도 민감하게 느껴진 탓이다. 수환이 신음을 참으려 하자, 승현이 놀리듯이 깨문 곳에 혀를 내밀어 사탕을 빠는 것처럼 핥았다.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형이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아서 상처받았어요.”

“그건… 아앗.”

“이제 다신 그런 말 못 하게 해 줄게요.”

싱긋 웃는 승현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무서워 보였다. 수환은 이번에도 그에게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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