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물질은 메인수를 지키고자 한다 3화 (12/29)

3.

에타 글은 도운에게 연락하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해결됐다. 그는 수환이 사정을 말하자마자 곧바로 에타 글의 작성자를 찾아냈다. 지금까지 그가 진수환의 뒤치다꺼리를 무수히 해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초성만 쓴 악성 글은 그렇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작성자가 게시글을 삭제했고, 도운은 처벌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처벌까지 하면 더 좋지 않은 말이 나돌 것 같아 수환은 이번만 선처하기로 했다. 그러나 후에 또 악질적인 글이 올라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쪽.

한쪽 뺨에 입을 맞춘 약혼자가 활짝 웃는 얼굴로 수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거실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빛나는 얼굴 때문인지. 왜인지 눈이 부셔서 수환은 조금 눈을 찡그렸다.

“오늘 할아버님 뵙기로 했죠?”

“응.”

승현의 물음에 수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타 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연락을 나누다가, 도운이 겸사겸사 진 회장의 일정도 알려 줬다. 그래서 오늘 오후쯤 회사에 찾아가 진 회장을 만날 생각이었다.

“잘 만나고 오세요.”

“알았어.”

“끝나고 데리러 갈까요?”

“아니야. 너도 학교 가야지.”

“그래도요.”

수환은 이제 학교에 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회사에 더 일찍 출근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다행히 이번 학기에 듣는 강의들이 교양 과목뿐이라 교수들이 간단한 리포트로 결석 일수를 채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이제 한 2주 정도는 집에서 빈둥거리게 되었다. 수환은 그 시간을 보낼 방법을 고심해야 했다.

“나도 학교 안 가고 싶어요.”

“넌 가야지.”

“칫.”

승현이 불만 어린 얼굴로 입을 비죽였다. 이럴 땐 승현이 어린 나이라는 게 조금 실감 났다. 수환이 웃으면서 승현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하고 작게 부딪치며 말했다.

“잘 배워서 나중에 나 먹여 살려줘.”

“제가요?”

“내가 너무 일 못 해서 회사 잘릴 수도 있잖아.”

“하하.”

크게 웃은 승현이 마주 기댄 이마에 힘을 살짝 주며 가볍게 좌우로 움직였다. 수환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요. 그땐 내가 형 먹여 살릴게요.”

“응, 그래야지.”

“근데 그렇게 되면…….”

“응?”

이마를 맞댄 채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빙긋 웃었다.

“이 집에서 나가지 말고 나만 기다리고, 나만 보고 살래요?”

“…어?”

순간 수환은 지난밤에 승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수환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집요하게 구는 승현 때문에 그가 했던 말들이 언뜻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잔뜩 흥분한 승현이 자신에게 또 연락을 안 받았다면서 타박했다. 수환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계속 사과를 했고, 승현은 혼잣말인 것처럼 수환을 가둬 두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전에도, 고백한 다음 날에도 승현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으면 수환을 방 안에 가둬 놓겠다고 했었다. 어쩐지 농담으로 생각해 가볍게 취급했던 말이 자꾸 반복되니까 괜히 긴장됐다.

“그거, 나 가둬 놓겠다는 그 말이야?”

“맞아요. 나는 형이 나만 보고, 나랑만 얘기하고, 계속 내 곁에만 있어 줬으면 좋겠어.”

“어…….”

수환이 곤란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순간 승현의 말대로 사는 걸 상상해 봤다.

감금… 한다는 거겠지? 그건 원작에서 진수환이 승현에게 했던 짓이었다. 하지만 수환의 상상은 그렇게 잔혹하지 않았다. 상냥한 승현은 분명 자신을 세심하게 보살필 것이다.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걸 챙겨 주고 보살필 것이다. 그리고 매일 밤…….

거기까지 생각한 수환이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 확 붉어진 수환의 얼굴을 코앞에서 보며 승현이 싱글거리며 웃었다.

“무슨 상상 했어요?”

“…몰라.”

“무슨 상상 했는데 또 부끄러워해요? 응?”

“너 빨리 학교나 가.”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묻는 승현을 떼어내며 수환이 부러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름대로는 부끄러운 상상을 했던 걸 숨기려고 하는 거였지만, 붉어진 얼굴은 전혀 감추지 못했다.

귀여워라. 아무래도 자신의 말한 대로 상상을 하다가 야한 생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수환의 생각을 그대로 꿰뚫어 본 승현이 웃으며 붉어진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늦겠어. 빨리 가.”

“알았어요.”

겨우 몸을 떼어낸 승현이 신발을 신고 몸을 일으켰다. 도어락에 손을 댄 채 뒤를 돌아 수환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다녀올게요, 자기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분명 새빨개졌을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수환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승현이 맑은 웃음을 터트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승현을 배웅하고 수환이 몸을 돌렸다. 시계를 흘끗 보니, 이미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저러다가 너무 지각하면 학점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도 원작보다는 낫겠구나. 원작에서는 승현이 감금당해서 아예 한 달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 후에도 트라우마에 시달려서 사람 많은 곳을 잘 못 가곤 했었지.

그나마 원작보다는 지금 승현의 상황이 더 낫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앞으로도 이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야 할 텐데.

한숨을 내쉰 수환도 회사에 가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

“안 돼.”

“…저 아직 아무 말 안 했는데요?”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팔짱을 낀 진 회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환이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안 돼.”

“아니, 뭐가 안 되는데요?”

“보나 마나 쓸데없는 말이나 하려고 왔겠지.”

역시 진 회장은 진수환에 대한 신뢰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자기 손자인데, 이렇게까지 단호할 필요가 있나.

아니, 원작의 진수환을 생각하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수환이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이제 맞선 안 볼 거예요.”

“뭐야?”

“승현이랑 파혼 안 할 거라고요.”

“이놈이!”

진 회장이 화를 내며 손을 들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동시에 그에게서 사나운 알파의 기운이 확 뻗쳐왔다.

수환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열성인 자신과 달리 온전한 알파의 기운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진 회장은 나이에 비해 무척 정정한 편이었다. 이를 악문 수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기어코 그 HS의 오메가랑 결혼하겠다고?”

“그럼 안 돼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화를 버럭 낸 진 회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쾅쾅 쳤다.

기업 간의 결혼은 또 다른 사업이었다. HS가 곧 살아날 거란 걸 수환은 알지만 진 회장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승현과 그의 형이 약을 개발해 뚜렷한 성과를 보이기 전까진 아무리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수환은 일단 맞선과 파혼이라도 막기 위해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전 승현이 아니면 안 돼요. 다른 오메가랑은 절대 결혼 안 할 거예요.”

“아니, 이놈이 정말.”

고집스럽게 계속 말하자 진 회장의 기세가 점점 꺾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결국 진 회장은 이런 식으로 진수환에게 휩쓸리거나 포기하곤 했었다. 그의 생떼에 승현과의 약혼을 허락해 줬던 때처럼 말이다.

한숨을 내쉰 진 회장이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우성 오메가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약혼을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이젠 그다지 우성의 형질에 집착하지 않아서 그런지 진 회장은 탐탁지 않기만 했다.

그도 한때는 다른 알파나 오메가들처럼 우성의 형질에 집착하곤 했었다. 한성의 후계자가 우성 알파로 발현한 데다 벌써부터 유능하다는 얘기가 파다하니 더욱 우성의 형질에 욕심을 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까지 하기엔 HS가 너무 가진 게 없었다. 최소한 삼영 정도는 돼야지. 진 회장은 애프터를 신청한 삼영의 오메가가 못내 아쉬웠다.

“진짜 그놈이 아니면 안 되겠냐?”

“네.”

“흠.”

고개를 끄덕이자 진 회장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수환은 잔뜩 긴장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진 회장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좋다.”

“……!”

“대신.”

기뻐하는 수환의 얼굴을 보며 진 회장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주말에 선 하나만 더 봐라.”

“네?”

“그것만 보면 더는 뭐라고 하지 않으마.”

생뚱맞은 진 회장의 말에 수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선을 한 번만 더 보라고? 왜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표정에서 속마음이 드러나는 수환을 보며 진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미 잡아 놓은 건 보고 끝내야지!”

“아, 진짜.”

그새 또 맞선을 잡아 놓았던 모양이었다. 수환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하…….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오냐.”

“진짜 이번에 선보면 승현이랑 저한테 상관 안 하시는 거예요.”

“아, 알았다니까.”

거듭되는 당부에 진 회장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수환이 그 모습을 불만 어린 얼굴로 보다가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그래도 뼛속까지 기업인인 진 회장은 한 입으로 두말할 위인은 아니었다. 제가 말한 건 칼같이 지킬 터였다.

그럼에도 왜인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제가 떼를 썼다곤 해도 너무 쉽게 허락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수환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록 귀찮은 조건을 달긴 했지만 말이다.

혹시 무슨 꿍꿍이가 더 있나 싶었지만, 지금의 수환은 그저 진 회장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말씀 잘 나누셨습니까?”

“네.”

밖으로 나오자 도운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실제로 진 회장과 대화한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온몸의 기운이 쭉 빠졌다. 도운이 알 만하다는 듯 수환을 보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드십시오.”

캔에 담긴 청량음료였다. 수환이 반가운 얼굴로 음료를 받아 들었다.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집까지 모셔다드릴까요?”

“음……. 잠시만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고민하던 수환이 핸드폰을 꺼냈다. 진 회장과 만난답시고 이번에도 또 무음으로 설정해 놨었는데, 지난번의 불상사를 떠올린 수환이 설정부터 바꿔 놓으려고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때마침 승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 승현아.”

―형, 할아버님이랑 얘기 끝났어요?

“응, 방금 다 얘기했어.”

―저도 지금 강의 다 끝났는데, 밖에서 만날래요?

“어, 그래?”

타이밍이 잘 맞았던 모양이었다. 금방 승현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수환의 얼굴에 꽃이 피듯 미소가 확 번졌다.

“그럴까, 그럼?”

―금방 가니까 로비에서 만나요.

“알았어.”

―이따 봐요.

“응.”

전화를 끊은 수환이 발그레한 얼굴로 도운을 쳐다봤다. 연인의 다정한 대화에 도운은 흐뭇한 얼굴로 수환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승현이가 데리러 온다고 해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로비까지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네.”

고개를 끄덕인 수환이 도운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수환은 뒤늦게 승현에게 알려야만 하는 일을 떠올렸다.

맞선을 한 번 더 봐야 한다고 말하면 승현이 엄청 싫어할 텐데. 가뜩이나 질투심 많은 승현인데 흔쾌히 허락할지 의문이었다. 하민과 선을 봤을 때 불같이 화를 냈던 승현의 모습이 떠올라 등허리가 떨려왔다.

“도련님, 안 타십니까?”

“아, 탈게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먼저 타고 있던 도운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멍하니 있던 수환이 정신 차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승현을 만난다는 사실에 뛰던 가슴이 지금은 다른 의미로 쿵쿵 뛰고 있었다.

어쩌지…….

난감한 얼굴로 고민하던 수환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형!”

조금 기다리자 회사 로비 안으로 승현이 들어왔다. 수환은 그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승현에게 다가갔다.

“학교 일찍 끝났네?”

“네, 오늘 마지막 강의가 휴강했거든요.”

“그래?”

“……?”

다가온 승현이 의아한 얼굴로 수환을 살폈다. 수환은 숨기고 싶어 했지만, 당연하게도 어색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단번에 알아챈 승현이 입을 열어 물었다.

“할아버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게.”

“안색이 안 좋네요.”

손을 든 승현이 수환의 한쪽 볼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 뺨을 감쌌다. 수환이 그를 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저기, 사실은…….”

그러나 장소가 좋지 않았다. 화명 본사의 직원들 및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서 말하기엔 좋지 않은 화제였다. 수환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말했다.

“할 말이 있긴 한데. 밥부터 먹을래? 배고프지 않아?”

“…그래요.”

안색이 어두운 수환을 보며 승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진길영 회장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모양이었다.

설마 또 선을 보라는 건 아니겠지. 기가 막히게 촉이 좋은 편인 승현이 순간적으로 정답을 떠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폭풍이 불기 전 주변이 고요한 것처럼,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 음식점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메뉴는 수환이 골랐다. 회사 근처에 있는 샤부샤부 집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메뉴를 시켰다. 긴장했던 수환은 막상 음식이 나오자 금세 식욕이 돌아 부지런히 먹었다. 샤부샤부를 먹는 동안엔 잠시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시간은 아주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말이다.

“다 먹었어요?”

“……응.”

잠깐의 행복을 만끽한 수환은 다시 승현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입가심으로 나온 수정과를 홀짝홀짝 마시며 어떻게 말을 꺼낼지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포장하고 포장해도 승현의 분노를 피할 길 없는 주제였다. 결국 수환이 길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하아. 그게, 할아버지가 선 한 번만 더 보래.”

“…….”

“이번 주 주말에……. 근데 그것만 하면 더 이상 우리한테 간섭 안 하겠대.”

“…….”

승현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너무 불안해서 수환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했다. 한참 후에 승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또 다른 오메가랑 선을 본다고요?”

“승현아.”

고개를 들자 차갑게 굳은 승현의 얼굴이 보였다. 수환은 금방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잡아 놨던 거라 어쩔 수가 없대. 그리고, 그리고 진짜 이번 한 번만 더 만나면 더 이상 맞선 안 봐도 된대. 진짜야.”

“…….”

“너랑 파혼 안 한다고도 얘기했어.”

필사적으로 말을 하자 승현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는 게 보였다. 그에 탄력받은 수환이 계속해서 설득하는 말을 내뱉었다.

“딱 한 시간만 만나고 올게. 아니, 삼십 분…….”

“…….”

“안 될까……?”

승현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들을수록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굳이 맞선을 강요하는 진 회장도 진 회장이지만…….

그의 시선이 눈앞에 있는 알파를 향했다. 겉모습은 누가 봐도 냉정함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차가운 인상을 가진 남자이지만, 그 속에 든 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맞선 따위 계속 거부했으면 진 회장도 어쩔 수 없었을 텐데.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하지만 수환이라면 말 한마디로 바뀔 수 있는 알량한 조건에 혹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생각해 보니, 승현 역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고 수환에게 동거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남 일처럼 무시해도 됐을 수환은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사람이 정말 왜 이렇게 착할까. 승현은 순진한 수환이 걱정될 정도였다.

어쨌든 이미 진 회장과 그런 거래를 했다면 도로 물릴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승현에게는 맞선을 말릴 만한 힘도 없고, 진 회장을 막을 수 있는 권력도 가지지 못했으니 말이다. 승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정말?”

“대신.”

손을 뻗은 승현이 테이블 위에 있는 수환의 손을 붙잡았다. 긴 손가락이 빈틈없이 얽혀 들며 깍지를 꼈다. 그것만으로도 수환은 뒷머리가 찌르르 울리는 듯했다.

“오늘 밤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세요.”

“밤에?”

“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수환은 곧 승현의 말이 뭔지 깨닫기 시작했다. 밤에 하는 일이 하나밖에 더 있던가. 요즘 매일 밤 집 곳곳에서 승현과 쾌락에 빠져 있었다. 수환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대체 또 뭘 하려고. 아니, 그보다 이미 충분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지 않나? 뭐가 또 남은 거지?

의문이 든 수환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뭘…… 할 건데?”

“…….”

승현은 대답 없이 미소 짓기만 했다. 아무래도 뭘 할지는 알려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도 승현이라면 자신에게 심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라는 걸 이때의 수환은 알지 못했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수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몸을 씻었다.

수환도 이제 하는 것 자체는 조금, 아니, 꽤 익숙해졌다. 하지만 애초에 성행위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전혀 없었던 수환은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았다. 도무지 승현이 뭘 요구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침실로 가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경악했다. 수환이 침대 위에 널린 물건들을 쳐다봤다.

“왔어요?”

“이, 이거.”

진수환의 컬렉션을 늘어놓고 보고 있던 승현이 고개를 돌려 수환을 응시했다. 수환은 할 말을 잃고 형형색색의 딜도를 훑어봤다.

색도 모양도 가지각색이고, 심지어 크기도 다 달랐다. 저게 들어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큰 딜도를 마지막으로 보고 수환이 저도 모르게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나, 싫어. 진짜 싫어.”

“형.”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는 수환에게 다가가, 승현이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수환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밤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준다고 약속했잖아요.”

“그치만.”

수환이 울상을 지으며 승현을 쳐다봤다. 여전히 승현은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수환의 기대와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형이 진짜 싫어하는 건 안 넣을게요. 그러니까 형이 골라 봐요.”

“싫은데.”

“딱 하나만 골라요. 응?”

재촉하며 몸을 이끌자, 수환이 마지못해 침대로 다가갔다. 그의 눈이 다시 민망한 물건 쪽으로 향했다.

승현은 침대 위에 크기별로 딜도를 죽 늘어놓았다. 처음에 있는 게 제일 작고, 끝으로 갈수록 흉악한 크기였다. 수환은 그쪽으로는 아예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럼, 이거.”

수환이 고른 건 제일 앞에 있는 분홍색 딜도였다. 일전에 승현이 안에 넣으려고 했던 바로 그거였다. 하필 크기가 제일 작아서 수환이 스스로 고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게 제일 만만해 보였다. 승현의 것보다 훨씬 작아서 아프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수환이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픔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승현의 것이 아닌 다른 걸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수환은 너무나도 싫었다.

“진짜… 넣을 거야?”

아랫도리가 홀랑 벗겨진 채 침대에 앉아 있던 수환이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승현은 수환이 고른 분홍색 딜도에 젤을 치덕치덕 바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싫어요?”

“응… 싫어.”

“괜찮아요. 분명 기분 좋아질 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승현이 할 수 있는 건 결국 작은 심술밖에는 없었다.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승현은 이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어서 다리 벌려요.”

“읏.”

말투는 여전히 상냥하지만, 어쩐지 차가운 듯한 목소리에 수환이 흠칫 떨며 모으고 있던 다리를 천천히 벌렸다. 그러자 주인을 따라 긴장한 듯한 붉은색 구멍이 입구를 꽉 닫으며 잔뜩 움츠렸다.

승현이 손을 뻗어 젤이 묻은 손가락을 입구에 문질렀다. 차가운 젤에 흠칫한 애널은 곧 안으로 침입하는 승현의 손가락을 꾸물꾸물 삼켰다. 그리고 아무 거부감 없이 손가락을 안쪽까지 받아들였다.

손가락을 세 개쯤 집어넣었던 승현이 금방 밖으로 빼냈다. 혹시라도 첫 삽입에 수환이 아파할까 봐 조금 길을 들인 것뿐이었다. 그는 곧바로 젤을 바른 딜도를 작은 구멍에 맞췄다.

“승현아… 흣.”

“…….”

젖은 목소리가 만류하듯 이름을 불렀으나, 승현은 무시했다. 남성의 성기와 거의 모습이 흡사한 딜도는 앞부분이 두꺼운 편이었다. 애널 입구에 대자 주름이 벌려지며 딜도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싫다고 한 것치고는 제법 수월하게 딜도가 안으로 들어갔다.

“흐읏.”

“조금 차가울 거예요.”

젤을 바른 딜도는 너무 차가웠다. 그리고 기구라는 것을 명백히 알리듯이 딱딱하고 인위적인 느낌이 났다. 계속되는 거부감을 애써 꾹 참으며 수환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하다 하다 자위 기구까지 삼키는 제 구멍을 차마 볼 수가 없는 탓이었다.

“봐요. 다 삼켰어요.”

“흐…… 싫어.”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손잡이 부분을 잡고 꾹 밀어 넣으며 승현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확실히 안을 꽉 채운 딜도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익숙해지면 더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느낌을 말하라면 아직도 싫은 쪽에 더 가까웠다. 수환이 여전히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빼 줘.”

“벌써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뭘…… 흐앗.”

승현이 딜도를 빼냈다가 다시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다 딜도가 수환이 느끼는 부분을 스치며 지나갔다. 수환의 몸이 움찔거렸다. 한껏 예민해진 곳이라 조금만 자극이 가도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이런 거로 느끼기 싫은데. 수환은 자괴감이 느껴졌다.

“거기, 흣, 거기만 자꾸 문지르지 마아.”

전립선만 계속해서 문지르는 승현의 손길은 노골적이었다. 손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으니 더 집요하고 정확하게 누르는 듯했다. 처음과 달리 점점 흥분하기 시작하는 수환을 내려다보며 승현이 입술 끝을 올렸다.

“말했잖아요.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그게 무슨 말…… 아아앗!”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딜도가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냥 딜도가 아닌 전동 딜도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몰랐던 수환은 몸 안에서 날뛰는 딜도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싫어, 흐, 거기만 계속, 싫어엇.”

작은 크기라 안심하고 고른 딜도는 애석하게도 수환이 느끼는 곳을 정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진동까지 더 해져 전립선을 문지르니 머릿속이 타오를 정도의 쾌감이 느껴졌다. 부르르 떠는 미약한 진동이 배 속에서는 마치 커다란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이 크게 느껴졌다.

“승현아, 이제 그만, 아아앗……!”

수환은 더는 참지 못하고 바둥거리며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승현이 뒤로 물러나려는 허리를 한 손으로 꽉 잡고 눌렀다. 그리고 손에 든 딜도를 안으로 더욱 밀어 넣었다. 수환이 온몸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아아아앙……!”

머릿속이 하얗게 타 버릴 것 같았다. 자신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는지 수환은 자각하지 못했다. 죽은 듯이 축 늘어져 있던 성기가 어느새 꼿꼿하게 서 있었다. 진동이 계속해서 울리며 수환의 안을 자극했다.

“그렇게 좋아요?”

“흐아앙……!”

“내 거보다 좋아? 응?”

딜도에 아래가 꿰뚫려 엉엉 울고 있는 수환을 내려다보며 승현이 집요하게 물었다. 그렇게 싫어하는 척하더니, 눈물에 젖은 얼굴은 이미 쾌락에 빠져 있었다.

승현이 구멍에 박혀 있던 딜도를 거칠게 뽑아냈다. 그 자극에 수환의 페니스에서 정액이 울컥 흘러나왔다.

“싫다고 하더니, 이건 뭐예요?”

“흐으읏.”

젤이 녹아 질척질척해진 딜도를 수환의 페니스에 가져다 댔다. 여전히 딜도에서는 진동이 우우웅, 울렸다. 그게 잔뜩 선 페니스를 자극했다. 수환이 허리를 뒤틀며 괴로워했다.

“아으응, 싫어어……!”

“싫지 않으면서.”

“흐윽, 나와, 나올 것 같……, 아앗……!”

결국 사정을 참지 못하고 수환의 성기가 하얀 정액을 길게 내뿜었다. 수환의 배와 핑크색 딜도에 질척한 체액이 묻었다. 그걸 본 승현의 눈에도 짙은 욕망이 깔렸다.

그리고 처음과 달리 수환의 안을 실컷 휘저은 기구가 꼴도 보기 싫어졌다. 승현이 신경질적으로 손에 든 딜도를 침대 밖으로 던졌다. 저건 버려버려야겠다.

수환은 지독한 쾌감에 아직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평소 승현과의 섹스는 무척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 느끼는 쾌감은 그것과 너무 달랐다.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쾌감에는 아직 취약한 탓이었다.

승현은 사정 후 축 늘어져 있는 수환의 다리를 벌렸다. 그가 뭘 하든 수환은 이제 막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곧 승현의 발기한 페니스가 수환의 안을 파고 들어갔다.

“흐앗, 잠깐… 아아……!”

“큭……!”

잔뜩 예민해져 있던 내벽이 승현의 것을 꽉 조여왔다. 기구가 지나치게 전립선을 문지른 탓이었다. 수환의 안은 평소보다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전보다 더욱 조이는 느낌에 승현이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후, 좋았어요?”

“흐아아앙……! 아앗……!”

“내 거보다 더 좋았어? 응?”

승현의 페니스가 안쪽까지 깊게 박혔다. 퍽, 하고 허리를 세게 쳐올린 채 수환의 골반을 으스러트릴 듯이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미친 듯이 좆을 박아대기 시작했다.

“대답, 해요. 씨발.”

“흐읏, 앗, 처, 천천히, 흐앗……!”

“내 거보다 저딴 게, 윽, 더 좋냐고.”

“아니, 야앗…! 흑, 아앙……!”

막상 기구에 느껴서 흐느끼는 수환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더러웠다. 곧 승현은 그와 맞선을 볼 이름 모를 상대를 떠올렸다. 상대방은 자신과 달리 수환에게 박고 싶어 하지는 않겠지만, 잠깐이나마 징그러운 눈으로 수환의 몸을 훑을 거라는 생각에 질투로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젠장.”

“흣, 승현, 승현아, 앗, 아앗……!”

“형은 내 거야. 하, 내 거라고.”

고개를 숙인 승현이 신음을 내뱉는 수환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키스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짐승 같은 행위였다. 승현의 목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질투와 소유욕이 한데 뒤엉켜 온몸에서 진득한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수환은 가뜩이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강렬한 페로몬에 잠식당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윽…….”

“흐으읏.”

곧 뜨거운 액체가 수환의 안으로 쏟아졌다. 내내 지독한 쾌감에 시달렸던 안쪽이 오메가의 정액으로 젖어갔다. 그리고 사정하는 승현의 페니스를 꽉 조였다.

“하아, 하…….”

한차례 사정하고 나서야 승현은 안개처럼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게 조금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이 울고 있는 수환의 얼굴로 향했다.

수환은 너무나도 자극적인 행위에 혼이 나가 있었다. 승현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경험이 없었던 수환에게는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쾌감이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심했죠?”

“흣…….”

물어뜯어서 불어 터진 입술에 입을 맞추며 승현이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수환이 또 선을 본다는 말에 질투해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걸 자각하고 난 다음에도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승현이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젖은 뺨을 쓰다듬었다. 수환의 흐릿한 눈이 승현을 향했다.

“승현아.”

어찌나 시달렸는지, 소리를 내지른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승현이 죄책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수환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항상 상냥했던 승현이 오늘은 자신에게 거칠게 굴었다는 걸 수환도 알고 있었다. 아직도 아래쪽이 쑤시듯이 아팠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거친 섹스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아주 싫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무섭게 구는 승현이 싫었지만, 다시 상냥해진 그를 보자 마음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그리고 그가 왜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아니까 마냥 원망할 수도 없었다. 수환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 내가… 거절하지 못해서.”

“…….”

“나도, 좋아.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좋아해.”

“……!”

승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돌려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승현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손을 뻗어 바스러트릴 듯이 수환의 몸을 껴안았다.

“미안해요. 다신 아프게 하지 않을게요.”

“으응.”

그렇다고 아주 아프기만 했던 건 아니었기에, 수환은 조금 민망해졌다. 잠시 후에 몸을 떨어트린 승현이 수환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프지 않게 내가 다 핥아 줄게요.”

“응?”

핥는다고……? 어디를……?

수환이 의문을 느끼자마자 승현이 몸을 뒤로 물렸다.

“흣……!”

안에 박혀 있던 승현의 페니스가 빠져나가고, 막고 있던 게 없어지자 안에 든 정액이 녹아내린 젤과 함께 주륵 흘러나왔다. 등줄기가 파르르 떨렸다. 수환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자, 잠깐, 흐읏……!”

안에 있는 정액을 손가락으로 긁어낸 승현이 고개를 숙여 애널 입구에 입술을 댔다. 수환이 바둥거리지 않게 두 다리를 꽉 잡고 있는 채였다.

“싫어, 거기, 핥지… 아아…….”

반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예민하게 느껴지는 곳에 축축한 혀가 닿았다. 그리고 애널 안을 파고들어 내벽 곳곳을 핥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예 부어오른 구멍에 입술을 붙이고 쭉쭉 빨아대기까지 했다.

“흐으으, 그만, 그만해애…….”

수환의 흐느끼는 소리는 그날 밤도 아주 길게 이어졌다.

***

수환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줄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허리 밑으로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서 어딘가 잘못된 줄 알고 혼자 또 눈물을 글썽거렸다.

“흐윽.”

“……왜요? 어디 아파요?”

흐느끼는 소리에 잠에서 깬 건지, 눈을 뜬 승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곧 허리에 힘이 풀려 수환이 일어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두 손으로 허리를 주무르며 마사지를 해줬다.

“아직도 아파요?”

“으……. 아픈 건 아니고, 그냥.”

간밤에 너무 느껴서 허리에 힘이 빠졌다니. 수환은 뒤늦게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너, 그거 이제 하지 마.”

“뭘요?”

“그러니까, 그거.”

“……?”

어젯밤에는 워낙 한 짓이 많아서 수환이 정확히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그는 순간 짜증스럽게 던져버린 어떤 물건을 떠올렸다.

“딜도 말하는 거예요?”

“그거 말고……!”

수환이 놀라며 소리쳤다. 확실히 낯선 느낌의 도구는 처음에 거부감이 심하게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승현이 워낙 험하게 다뤄서 그렇지, 제대로 다룬다면 어젯밤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얼굴 표정만으로도 수환의 그런 생각을 알아챈 승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제 그거, 기분 좋았어요?”

“…그런 거 아니야.”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얼버무렸다. 그러나 이미 승현에게는 다 들킨 것 같았다. 허리를 주무르던 승현의 손이 뒤쪽으로 이동했다.

“기분 좋다고 나 없을 때 가지고 놀면 안 돼요.”

“안…… 그래.”

“내가 보는 앞에서만 해야 해요. 알았죠?”

“흐읏.”

승현의 손이 엉덩이를 꽉 쥐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움푹 파인 엉덩이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밤새 시달렸던 그곳이 다시금 자극을 받아 머리끝까지 찌르르 울렸다.

“알았으니까…… 그렇게 만지지 마.”

“…….”

진득한 눈으로 수환을 보던 승현이 순순히 손을 놔주었다. 그리고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뭘 하지 말라는 건데요?”

“어…….”

대답하려던 수환은 곧 난감함을 느꼈다. 홧김에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그건 밤새 허리가 빠지도록 승현이 아래를 핥고 빨았던 걸 말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걸 직접적으로 말하려니 민망함이 몰려왔다.

“어서 말해 봐요. 응?”

“그게.”

“그래야 내가 또 안 하지.”

망설이던 수환이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밑에, 핥는 거……. 그거 하지 마.”

승현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수환이 말하게 하려고 모른 척하고 있었다. 입술 끝을 살짝 올린 승현이 짐짓 미안하다는 투로 물었다.

“그렇게 아팠어요?”

“아팠던 게 아니고.”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아픈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아래가 빨리고 핥아지는 건,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 자극적이었다. 정말이지 허리가 빠질 정도로 느낀다는 건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기분 좋았잖아요.”

“…아니야.”

“거짓말, 핥으니까 좋아서 구멍도 계속 벌름거리고, 형 안쪽도…….”

“그만 말해!”

수환이 식겁하며 승현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커다란 손에 가려져 눈만 보이는 승현이 히죽 웃었다.

미쳤어, 정말. 요즘 승현은 입만 열면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야한 말을 줄줄이 내뱉었다. 도무지 음전한 메인수가 될 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희미해진 원작의 설정을 떠올리며 수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대답은 잘만 한다. 하지만 어째 믿기 힘든 말이었다. 수환이 미심쩍은 눈으로 보자 승현이 씩 웃었다. 그리고 수환을 달래듯이 입술과 볼에 쪽쪽 입을 맞췄다. 한참 후에 수환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나 못 일어나겠어.”

“그렇구나. 못 일어날 정도로 힘들구나.”

“……?”

힘들어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사람을 보며 승현은 히죽히죽 웃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수환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승현은 그때야 뒤늦게 표정을 관리했다.

“그럼 오늘은 집에서 쉬어요.”

“응.”

“뭐 먹고 잘래요?”

“그냥 물 한 잔만 갖다줘.”

“알았어요.”

곧바로 몸을 일으킨 승현이 컵에 시원한 물을 가득 따라서 가져다주었다. 물을 받아 마신 수환은 곧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잠들 때까지 승현이 옆에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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