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환이 다시 일어난 건 늦은 오후였다. 눈을 뜨니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승현은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눈을 뜬 뒤에도 침대 위에서 꾸물거리던 수환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일어나지 않으면 승현이 오기 전까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게을러졌는지 모르겠다. 학교에 안 가서 그런가. 점점 본능에만 충실해지고 있는 것 같다.
“에구.”
아침만 해도 힘이 안 들어가던 허리는 이제 제법 잘 움직였다. 그래도 쑤시는 허리를 토닥이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협탁 위에 놔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라?”
승현에게 연락이 왔을까 봐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대답이 와 있었다.
어떻게 하지.
어쩔 줄 모르고 방 안을 돌아다니던 수환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화련누님
괜찮으니 언제든 연락하렴
“…….”
진화련.
진수환의 사촌 누나이자 화명 계열사의 대표 이사였다.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희영에게 충고를 듣고 난 뒤였다. 고민하다가 연락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는데, 바쁜 그녀는 계속 답장이 없다가 이제 답을 보낸 것이었다.
에타 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던 때, 수환은 희영에 대해 고민했다. 아무래도 그녀도 자신과 같은 빙의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희영이 왜 자신을 도와주는 건지는 정말 모르겠다. 정말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걸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직 그녀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희영의 충고는 들을 가치가 있었다. 진 회장을 만나고 나니 그 마음이 더 확실해졌다. 나중에 또 물을 기회가 올 것이니, 수환은 우선 그녀의 조언대로 화련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잔뜩 긴장한 수환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화 연결음이 한참을 울려도 화련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열사의 대표 이사니까 당연히 바쁘겠지. 연결이 곧 끊어질 것 같아 수환이 통화를 종료하려고 했을 때였다.
“……!”
핸드폰 화면이 바뀌었다. 통화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걸 보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거였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환이 미심쩍은 눈으로 통화 시간만 표시되는 화면을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화련 누님?”
―…….
또 한참이나 침묵하던 수화기 너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환이니?
“……!”
분명 사촌 누나라고 들었는데, 여자치고는 굉장히 허스키한 음성이었다. 알파라서 그런가.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달라서 수환은 더 긴장됐다.
“네, 저예요. 누님.”
―그래.
“잘…… 지내셨어요?”
―…….
떨리는 걸 참고 간신히 말했는데, 간단한 대답을 마지막으로 화련은 다시 침묵했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이 상황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만했다. 유학 간 후 진수환과 사이가 틀어져 그동안 데면데면하게 지냈을 테니 말이다.
―무슨 일 있는 거니?
“그게…….”
―아, 잠시만.
곧 수화기 너머로 화련의 목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일하던 중에 전화를 받은 것 같았다. 메시지 한 번 더 보내고 연락할걸. 수환이 자책하는데 화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미안하구나, 수환아. 내가 지금 바쁜 일이 생겨서.
“괜찮아요. 제가 멋대로 전화한걸요.”
―…….
또다시 미묘한 침묵이 흐른 후, 화련이 말을 이었다.
―내일쯤 시간이 될 거 같은데, 저녁이라도 같이 하는 게 어떠니.
“네?”
깜짝 놀란 수환이 화련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내일 만나자는 건가?
당황한 수환에게 화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 안 되니?
“아, 아뇨. 괜찮아요.”
―장소는 메시지 보내마.
“네.”
얼떨결에 약속을 잡은 후 전화를 끊었다. 바로 내일, 진 회장이 아닌 진수환의 다른 가족과 만나야 한다. 수환은 대답하고 나서야 그 사실이 뒤늦게 받아들여졌다.
띠리리링, 띠링…….
“헉.”
멍하니 있던 수환은 핸드폰에서 울리는 벨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화면을 내려다보니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승현이]
“아, 승현아.”
―…….
수환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들 왜 이러지. 전화 받자마자 침묵하는 게 유행인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수환의 귀를 울렸다.
―누구랑 통화했어요?
“응?”
―누구랑 통화하고 있었냐구요.
“……?”
승현이가 화련과 통화했다는 걸 어떻게 알지? 혹시 주변에 있나 싶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휘휘 돌리다가, 이내 뉘앙스가 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화련과 통화한 걸 알았으면 누구와 통화했냐고 묻지 않았을 거다. 아마 화련과 통화하고 있을 때 승현이 전화를 걸어서 통화가 엇갈린 모양이었다.
“아, 그게, 누구냐면.”
대답하려던 수환이 멈칫했다. 승현은 화련이 누군지 알까? 설명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아직 강의가 남아 있을 승현의 시간을 그렇게 뺏을 수는 없었다. 수환은 가볍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이따 돌아오면 알려 줄게.”
―…뭐라구요?
“곧 수업 시작하지? 어서 들어가 봐.”
―형.
“아, 이따가 하켄다쓰 사와. 밥 먹고 먹자.”
하켄다쓰는 요즘 수환이 푹 빠진 아이스크림이었다. 수환의 말을 들은 승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우울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맛이요?
“음…….”
오늘은 무슨 맛으로 먹지? 짧은 시간 동안 수환이 맹렬히 고민했다. 새로 나온 맛인 다크 초콜릿과 쿠키 크림 중에서 고르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힘겨운 고민 끝에 수환이 입을 열었다.
“다크 초콜릿!”
―알았어요. 크기는…….
“큰 거!”
―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답한 승현은 곧 강의가 시작하는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아이스크림 생각에 금방 또 기분이 좋아진 수환이 콧노래를 부르며 침실을 나갔다.
***
“다녀왔어요.”
“……!”
늦은 점심을 간단히 먹고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수환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에 조르륵 달려가 승현을 맞이했다.
“승현아, 왔어?”
“네.”
“아이스크림은?”
“…여기요.”
자신이 와도 아이스크림만 찾는 수환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던 승현이 사 온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와아.”
그래도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불편한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게 중증이구나 싶었다. 승현이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지금 먹으면 안 돼요. 밥 먹고 먹어요.”
“으응, 알겠어.”
홀린 듯이 아이스크림을 보고 있던 수환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냉동실 안에 아이스크림을 넣었다. 부엌까지 따라온 승현이 뒤에서 수환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제 말해 봐요.”
“응?”
“오후에 누구랑 통화했어요?”
“아, 그거?”
오후의 일을 떠올린 수환이 고개를 돌렸다. 왠지 눈빛이 좋지 않은 승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사촌 누나.”
“사촌…… 누나요?”
“응, 너 진화련 대표님 알아?”
“알죠.”
“진짜?”
“네.”
일반인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기업인인데 어찌 모를까. 그러나 수환이 그녀와 연락을 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지는 몰랐다. 승현이 흥미를 보이자 수환이 신나 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 연락했는데 바쁘셔서 통화는 얼마 못했어. 근데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
“내일이요?”
“같이 밥 먹재.”
“저녁에요?”
“응.”
고개를 끄덕인 수환이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찬장에서 접시를 꺼냈다. 그 접시를 받아 식탁 위에 놓으면서 승현이 물었다.
“갑자기 왜요? 원래 자주 만나는 사이 아니었잖아요.”
“그렇긴 한데.”
승현의 물음에 수환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이유가 결과적으로는 승현과 관계가 있으니 말하기가 조금 민망했다.
“할아버지가 자꾸 우리 사이 반대하니까, 혹시 누님이 도와주지 않을까 하고…….”
“…….”
식탁 위에 접시를 놓던 승현이 멈칫하며 수환을 쳐다봤다. 쑥스러워하는 수환의 얼굴을 보다가,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잘 만나고 오세요.”
“응.”
“얘기가 잘 안 돼도…… 낙담하지 마세요. 다 잘될 테니까.”
“응.”
승현의 상냥한 말을 들으며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끌어안은 승현을 마주 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감귤 향 페로몬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비록 승현은 부담을 가지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수환은 이번에야말로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화련을 제 편으로 만들어서 승현과의 관계를 집안사람들에게 인정받아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다시금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저녁밥을 먹고 난 뒤 수환은 바로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숟가락을 하나 푹 꽂은 다음에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당연히 옆에는 승현이 앉았다. 한 손으로 수환의 허리를 안고, 그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 응시했다.
“맛있어요?”
“응!”
단 걸 먹어서 기분이 좋은지, 수환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묻은 걸 승현이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닦아 주었다.
“너도 먹어.”
“전 됐어요.”
“맛있는데.”
입이 짧은 승현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으나, 수환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그러자 수환이 헤헤, 웃으며 자신이 먹던 숟가락에 아이스크림을 퍼서 승현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어때? 맛있지?”
“…네.”
승현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수환은 신나서 그 후에도 승현의 입안에 아이스크림을 넣어 주었다. 물론 둘의 먹는 속도가 달라서 ‘나 한 입, 너 한 입’이 아니고 ‘나 두 입, 너 한 입’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수환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연신 헤실거렸다.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좋아요?”
“응? 응.”
비록 그것뿐만이 아니긴 하지만, 말주변이 부족한 수환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승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계속 참고 있었지만, 이젠 슬슬 이깟 아이스크림에도 질투를 할 판이었다. 승현이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제 저한테도 관심 좀 가져 주면 안 돼요?”
“뭐?”
입안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을 혀로 굴리던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어쩐지 승현이 불쌍해 보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형은 나보다 아이스크림이 더 좋아요?”
“으응?”
“난 학교에서 계속 형이 보고 싶었는데……. 형은 난 보지도 않고 아이스크림만 먹고…….”
수환이 당황하며 입속에 집어넣었던 숟가락을 빼냈다. 승현이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모르고 아이스크림만 미친 듯이 퍼먹은 게 좀 민망했다.
“그래도…… 같이 먹었잖아.”
비록 중간부터는 수환 혼자 몰두해서 퍼먹긴 했지만 말이다. 그걸 깨달은 수환이 멋쩍어하며 숟가락을 남은 아이스크림 위에 꽂았다.
“미안. 이제 안 먹을게.”
“아니에요. 계속 먹어요.”
“…정말?”
수환이 미심쩍은 얼굴로 묻자, 승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신 나도 먹고 싶은 거 먹을게요.”
“……?”
아, 승현이는 아이스크림 말고 다른 게 먹고 싶었던 건가? 그래서 서운해한 거였구나. 뒤늦게 승현의 마음을 알게 된 수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도 어서 먹어.”
“알았어요. 그럼 잘 먹을게요.”
“그……, 응?”
수환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승현이 그의 뒷머리를 끌어당겼을 때였다. 속절없이 끌려가 승현의 입술에 입술이 부딪쳤다.
먹고 싶다는 게…… 내 입술? 그럼 나였어?
“으응……!”
혼란스러운 와중에 승현의 혀가 입속을 파고들었다. 먹고 싶다는 게 빈말이 아닌지, 평소보다 혀 놀림이 더욱 노골적이고 끈질겼다. 혀와 혀가 뒤엉키며 질척한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거실을 크게 울렸다.
“흣, 아이스크림, 더 먹고 싶은데…….”
“응, 나도 좀 더 먹구요.”
“흐으읏.”
이미 승현의 눈은 탁해져 있었다. 수환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더는 승현을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수환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결국 수환은 그날 아이스크림을 더 먹지 못했다.
***
수환은 긴장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긴장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자꾸 긴장되었다.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자 좀 살 것 같았다.
화련과 만나기로 한 곳은 수환에게도 이제 제법 익숙한 곳이었다. 화명 계열사의 호텔. 수환이 처음 빙의하고 신세를 졌던 곳이고, 얼마 전 하민과 선을 본 곳이기도 했다. 화명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 호텔을 애용하는구나 싶었다.
잠시 후, 호텔 레스토랑 안에서도 독채로 떨어진 곳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각을 맞춘 듯한 발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자, 수환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룸 안으로 들어온 여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마주 선 수환을 훑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진수환의 혈육이라는 것을 말이다.
화련은 마치 진수환이 여자가 된다면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똑 닮아 있었다. 둘이 사촌이 아니고 남매라고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생김새였다.
그러나 풍기는 기운은 완전히 달랐다. 열성인 진수환과 달리 완전한 알파인 그녀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수환은 경직된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누님.”
“…….”
아무 말 없이 수환을 바라보던 화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운 얼굴선이 모두 드러날 정도로 짧은 머리, 그리고 몸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는 검은색 정장이 그녀에게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오랜만이구나.”
“여기 앉으세요.”
수환이 다가가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러자 화련이 놀란 눈으로 수환을 쳐다봤다.
아, 이건 너무 진수환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나. 어색하게 미소 지은 수환이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갔다.
“매너가 많이…… 좋아졌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도 조금은 자신을 좋은 눈으로 보게 만든 것 같았다.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던 화련의 눈이 조금은 풀어져 있었다.
“미안하다. 일이 좀 늦게 끝나서…… 많이 배고팠니?”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서 먹자.”
화련이 손짓하자 미리 음식을 준비해 놨던 호텔 직원들이 재빨리 세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화련과 수환의 취향을 호텔 측에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 평소 두 사람이 잘 먹는 음식들로 코스 요리가 나왔다. 수환의 앞에는 애피타이저로 앤초비 소스를 곁들인 아스파라거스 요리가 놓였다.
까탈스럽게 생겨서 편식을 많이 할 것 같은 진수환인데 좀 의외였다. 어쨌든 수환은 맛있는 거라면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기 때문에 음식이 나오는 족족 다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호텔 요리라 그런지 역시 맛있었다.
아스파라거스 다음에 나온 음식은 관자 요리였다. 입안에 넣자마자 관자가 살살 녹아서 수환은 눈을 부릅떴다. 왜 부자들이 맨날 셰프를 불러서 요리를 해 먹는지 알 것 같았다.
몰두해서 음식을 먹는 동안, 화련이 계속 묘한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수환은 몰랐다. 스테이크를 신나게 써는 수환을 보다가 화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먹는구나. 어렸을 땐 항상 한입씩만 먹더니.”
“아, 제가…… 그랬어요?”
그런 아까운 짓을 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그 용서할 수 없는 진수환이기 때문에, 수환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이가 드니까 입맛이 바뀌나 봐요. 왜 그랬었지. 하하.”
어차피 진짜 진수환도 지금의 화련과는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적당히 세월 탓이라고 포장했다. 그저 화련이 나이 먹어서 철이 들었다고 생각해 주면 다행이었다.
“그래, 정말…… 많이 바뀌었구나.”
“하하.”
뼈가 있는 말에 수환이 계속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스테이크를 자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가 나왔다. 수환이 좋아하는 라임 무스였다. 망고 맛 아이스크림도 같이 있었는데, 둘 다 느끼하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이 잘 살아 있었다.
“음, 저기.”
“……?”
디저트를 반쯤 먹고 수환이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를 좀 풀어 보기 위한 노력이었다. 수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래도 몸 잘 챙기시면서 일하셨으면 좋겠어요. 밥도 든든하게 드시고요.”
수환이 맛있게 먹는 동안 화련은 그녀의 앞에 나온 코스 요리를 죄다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아까 진수환이 과거에 한 짓을 말한 것도 그렇고, 깨작거리는 게 재벌가의 소양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왜냐하면 화련의 행동은 전형적인 위염 환자들의 것이었다. 부드러운 음식을 위주로 먹고 고기 종류는 잘 먹지 못했다. 대표 이사로서 할 일이 많고 바쁜 그녀는 평소에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할 테고, 스트레스를 받아 음식물을 잘 넘기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 짐작이 맞는 듯 화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걱정해 줘서 고맙다.”
“뭘요.”
싱긋 웃는 화련을 마주 보며 수환도 따라 웃었다. 분위기가 제법 좋아지고 있었다.
“수환아, 나는…….”
“네?”
디저트를 거의 다 먹어가던 중 화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환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그날 이후로…… 많이 멀어진 줄 알았단다.”
“……?”
“네가 그런 편지를 나에게 보내고, 화가 많이 난 줄 알았었어.”
“편지요?”
“나에게 많이 실망했겠지만, 이번 기회에 사과하고 싶구나. 그땐 내가 많이 미안했다. 널 혼자 두고 떠났으니 말이야.”
“아…….”
아무래도 정황상 미국에 유학 갔을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편지라니. 미국에 간 화련에게 진수환이 원망하는 편지라도 보냈었던 건가. 그래서 둘의 사이가 그렇게 멀어졌던 거고?
어린 나이에 홧김에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대체 어떤 편지였길래 화련이 귀국하고 나서도 말을 못 붙인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환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다가,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누님. 그땐 제가 너무 철이 없어서……. 사실 너무 오래돼서 제가 무슨 편지를 보냈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요. 죄송해요.”
“아…… 그렇구나.”
수환의 말에 화련이 그제야 겨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야말로 이제 근심거리가 완전히 사라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지. 나도 참, 쓸데없는 일로 고민했던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죠. 저도 마찬가지였는데요.”
“그래, 맞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수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시간이었다. 아마 화련과 진수환이 과거에 친밀한 사이였다는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디저트를 다 먹은 수환의 앞에 아이스티가 놓였다. 수환은 그걸 마시며 목을 축였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다소 좋아지긴 했지만, 화련은 여전히 수환에게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 수환을 보며 화련이 뭔가를 짐작한 듯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너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니? 안색이 좋지 않구나.”
“아.”
화련이 무척 섬세한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그녀의 말에 용기를 얻어 수환이 대답했다.
“사실은 그게.”
수환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말했다. 승현과 약혼했던 일은 알고 있을 테니, 그 후의 화련이 모르던 일들을 설명했다. 특히 자꾸 선을 보라는 진 회장의 곤란한 요구에 대해 말이다.
그 말을 들은 화련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다. 곧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환아, 사실 나도…… 네가 그 아이와 약혼한 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단다. 할아버님처럼 잠깐의 변덕인 줄 알았지.”
“아…….”
“하지만 진심이라는 거니? 정말 그 아이와…… 결혼까지 하고 싶은 것 맞니?”
화련이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가 허투루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수환은 테이블 밑으로 내린 손을 꽉 쥐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새삼 떨렸다. 하지만 곧 흔들림 없는 눈으로 화련을 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
“정말로 승현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처음에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었다. 원작처럼 죽지 않기 위해 승현과 파혼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승현이 너무 좋아져 버렸다.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건율의 악행을 알게 된 후에는 그에게서 승현을 지켜 주고 싶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그를 위해서라면 수환은 목숨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샌가 이렇게나 좋아하는 마음이 커진 건지, 수환도 의아할 정도였다. 그런 수환을 보다가 화련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HS의 아이를 마음에 두다니……. 너도 나와 똑같은 길을 가려고 하는구나.”
화련의 배우자 역시 집안이 그리 좋지 못했다. 승현의 집은 그래도 한때 재벌 축에 들었지만, 화련의 배우자는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평범한 집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래서 화련은 그녀와의 결혼을 인정받기 위해 무리하게 사업을 진행했다. 모두가 말렸던 프로젝트를 진행해 결국 성공시키고, 계열사를 하나 더 만들기까지 했다. 그게 지금 화련이 대표를 맡고 있는 화명의 계열사였다.
바꿔 말하면, 그 정도의 업적이 아니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화련은 그런 가시밭길로 수환이 가지 않길 바랐다. 보통의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곧 HS에서 약을 개발할 거예요.”
“뭐라고?”
“정말 획기적인 약이에요. 거기에 투자하면 어마어마한 이익이 생길 거예요. 확실해요.”
수환의 말에 화련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HS가 어떤 일로 퇴출당했는지 잊은 거니?”
“그건…….”
“만약 이번에도 그 약에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우리까지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거야.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 수는 없어.”
“하지만…….”
“수환아.”
“…네.”
“네가 그 아이를 믿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랑과 일은 별개란다. 그런 불확실한 일에 함부로 투자할 수는 없어.”
“…….”
화련의 냉정한 말에 수환이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HS의 과거 부작용 사건이 조작된 거라는 건, 원작의 내용이 머릿속에 있는 수환만 알고 있는 얘기였다. 아직 증거가 없는 이상, 지금 말한다고 해도 화련은 믿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증거는 수환 혼자의 힘으로는 찾기 어려웠다. 그때 당시 존재하다가 사라졌던 유령 회사의 뒤를 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도저히 수환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화련을 설득해야 한다.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녀가 이 일에 관심 가질 수 있게 최대한 유도해야 한다. 결심한 수환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는…… 승현이를 믿고 싶어요. 지금 당장 결정해 주지 않으셔도 되니까, 약을 개발했을 때 임상 실험을 허가받는 것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잖아요.”
화련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수환은 대답하지 않는 화련을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만약 이번 임상 실험에서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가 다 책임질게요.”
“책임진다고?”
“승계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경영권도 다 양도할게요. 원하신다면 제가 가진 주식도 처분해서 누님께 드릴 수 있어요.”
“……!”
“어차피 저는 회사 경영에 아무 욕심도 없지만…… 그래도 제가 누님의 유일한 경쟁자인 건 사실이잖아요.”
화련의 아버지, 그러니까 수환의 큰아버지이자 진 회장의 첫째 아들은 화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길 원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연예계에 데뷔해서 한평생을 배우로 살았다. 그런 남자에게서 화련 같은 기업인이 태어난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자, 진 회장의 둘째 아들인 수환의 아버지는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제 진 회장에게서 경영권을 물려받을 수 있는 건 그들의 자식인 화련과 수환뿐이었다.
수환은 애초에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알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허울만 남은 승계권이라도 주변에는 좋은 먹잇감일 것이다. 승계권이 없는 친척들과 주주들이 언제 어떻게 수환을 설득하고 내세워서 화련을 압박할지 모르는 일이다.
화련에게는 그런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고, 수환은 관심도 없는 승계권을 내걸어서 승현을 도울 수 있다. 이게 지금의 수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너 정말…… 진심이구나.”
“네.”
화련이 정말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하니 수환이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는 엄한 어조로 수환에게 말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말렴.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네, 죄송해요.”
“하…….”
작게 한숨을 내쉰 화련이 고개를 내저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주제로 수환과 얘기를 나눌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든 네가 무슨 마음인지 잘 알겠다. 이건 나중에…… 더 고민해 보자꾸나.”
“네, 얘기라도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고개를 끄덕인 수환이 애써 웃음 지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서든 화련을 설득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이 아직은 떠오르진 않지만, 약을 개발하기 전까진 아직 시간이 있다.
수환은 그 후에 화련과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누다가, 남아 있는 아이스티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승현아!”
“형.”
호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승현이 몸을 돌렸다. 그렇게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기어코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고 데려다준다는 화련의 말을 거절하고 나온 참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저도 이제 막 왔어요.”
“그래?”
승현이 다가와 수환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수환은 그늘지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화련이 워낙 철두철미하고 냉정한 기업가의 이미지라 그런지 수환이 만나고 나서 주눅 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였다.
“대표님이랑 얘기 잘했어요?”
“응, 좋은 분이셨어.”
“그래요?”
“응! 되게 상냥하셨어.”
“상냥…….”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승현이 미심쩍은 눈으로 수환을 쳐다봤다. 하지만 수환이 이렇게 맑은 얼굴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승현이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냉혹한 사람을 수환이 녹여 버린 게 아닌가.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하면서 수환의 손을 잡았다.
“기분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그리고 호텔 밥도 맛있었어.”
“좋았겠네요.”
학교에 있었던 일을 부모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수환이 호텔 음식에 대해 한참이나 재잘거렸다.
“다음에 너도 같이 먹자.”
“알았어요.”
“헤헤.”
그렇게 손을 마주 잡고 발걸음을 뗐을 때였다.
“수환 씨?”
“……?”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에 수환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예쁘장한 얼굴의 남자가 수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하민 씨?”
“아, 역시 맞구나!”
예전에 선을 봤던 하민이었다. 수환이 너무 놀라 굳어 버린 사이, 하민이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오늘 일이 있어서 여기 잠깐 들렀거든요. 수환 씨인 것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맞았네요.”
“아,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그게…….”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반가워하는 하민을 보며 수환이 한껏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자신에게 애프터 신청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혹시 정말,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수환이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자, 그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뭐예요, 당신?”
“그쪽이야말로 또 뭡니까.”
승현이 싸늘한 얼굴로 하민을 내려다봤다. 잠깐 또 그에게 기가 죽을 뻔한 하민이 욱하며 승현을 노려봤다.
“전 수환 씨에게 볼일 있는 거거든요?”
“형은 그쪽한테 볼일 없는데요.”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얼굴을 확 찌푸린 하민이 따지듯이 물었다. 이번에도 자꾸만 흉흉한 기운이 그를 찔러댔다.
아니, 지가 우성이면 다야? 짜증 나게 진짜.
뱀 앞에 선 몽구스가 털을 잔뜩 부풀리는 것처럼 하민이 승현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런 오메가 둘 사이에 낀 수환이 당황한 얼굴로 승현과 하민을 번갈아 쳐다봤다.
“적당히 하고 좀 비키지 그래요?”
“안 됩니다.”
“아오, 진짜.”
하민은 초조한 눈으로 제 앞을 가로막은 승현의 뒤를 흘끗거렸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 위로 비죽 솟은 얼굴이 언뜻 보였다.
다시 봐도 참 하민의 취향이었다. 오늘 보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알파야말로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말이다.
저번 맞선에서 수환이 승현에게 질질 끌려 나갔을 때, 오히려 그 모습을 보며 하민은 수환에게 더 큰 호감을 느꼈다. 스스로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깨닫고 보니 화명 쪽에 애프터 신청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 후에 응답이 없어 초조해하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일부러 미팅을 죄다 화명 호텔 쪽에 잡아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런 천금 같은 기회를 눈앞의 우성 오메가 때문에 또다시 날려 먹게 생겼다. 하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취향의 알파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민은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눈에 잔뜩 힘을 주며 앞에 있는 우성 오메가를 노려봤다. 아름답지만 한겨울의 서리를 담은 듯한 차가운 얼굴이 하민을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쫄지 말자. 하민은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막말로 형질만 아니면 자신이 저 우성 오메가에게 뒤처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민은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흥, 그래 봤자 곧 파혼이나 당할 오메가 주제에.”
“……!”
하민은 제법 자신이 있었다. 진 회장이 가진 것 없는 HS의 오메가보다 자신을 팍팍 밀어줄 거라는 확신 정도는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잘 아는 승현 역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민 씨, 말이 좀 심하신 거 같아요.”
보다 못한 수환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자신에게는 누가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지만, 승현에게 그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수환은 승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제 약혼자는 승현이뿐이에요. 저는 파혼할 생각 없어요.”
“아니, 그럼 왜 맞선을 본 건데요?”
“그건, 음, 사정이 좀…….”
처음 파혼하려고 했던 이유를 하민에게 구구절절하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수환은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죄송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결국은 가벼운 마음으로 선을 봤던 게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하민에게도 실례된 행동이었다는 걸 깨닫고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현과 헤어질 마음은 추호도 없기에, 고개를 들고 승현을 보며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맞선 자리에서는 사이가 위태로워 보이더니, 지금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하민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굴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지 않은가. 하민이 칫, 하고 입술을 비죽이다가 수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주에 선보는 것도 진 회장님이 억지로 시킨 건가요?”
“하민 씨가 그걸 어떻게…….”
“에이, 삼영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시면 안 되죠.”
잠시 주변을 둘러본 하민이 수환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옆에 있는 승현의 눈이 바로 부리부리해졌지만, 하민은 무시했다.
“근데,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어요?”
“아뇨. 그거까진.”
“하, 어쩐지.”
“……?”
얼굴을 좌우로 흔드는 하민을 내려다보며 수환이 의아함을 느꼈다. 그냥 지나치기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왜요? 누군데요?”
“아, 노유진이요. 노유진! 그 홍영의 쓰레기 오메가!”
“쓰레기… 오메가?”
“몰라요?”
소설에 나오지 않는 인물을 수환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재벌가 상황에 빠삭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아무래도 풍기는 뉘앙스가 진수환의 이미지와 비슷했다. 쓰레기 오메가라니.
“수환 씨는 소문만 그렇고 막상 만나니까 아니었지만, 노유진은 아니에요. 그놈은 진짜 찐이라구요.”
하민이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하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재벌가의 알파들끼리 사교 모임이 있는 것처럼 오메가들끼리도 사적 모임이 있었다. 하민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생산적인 모임은 아니었지만, 집안의 성화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노유진은 말 그대로 쓰레기였다. 자기 취향의 알파와 베타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오메가였다. 대부분은 상대방을 돈으로 산 다음 성에 찰 때까지 가지고 놀며 즐기지만, 자존심 높은 상대라 그게 안 될 때는 약을 쓰거나 협박해서 꼼짝도 못 하게 만들곤 했다.
“대체 회장님은 무슨 생각이래요? 그런 놈이랑 맞선을 보라니.”
“아.”
“여러모로 제가 더 낫지 않아요? 네?”
애교를 피우듯 제 손가락을 한쪽 뺨에 푹 찌르는 하민을 내려다보며 수환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하민의 말을 들으니 누군가가 생각났다. 그 노유진이라는 사람, 완전히 진수환의 오메가 버전이 아닌가. 만약 진짜 진수환이 그런 상대와 선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살짝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이제 떨어져요.”
“으앗.”
지나치게 가까이 붙은 하민을 멀찍이 떨어트리며 승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가증스럽게 남의 약혼자에게 꼬리를 치는 꼴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하민 역시 자신을 번번이 방해하는 승현이 너무 싫었다.
대체 뭘 믿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우성이라고 저렇게 뻗대는 건가? 아니면 얼굴? 역시 얼굴인가? 저 예쁜 얼굴 믿고 수환의 옆자리를 계속 차지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그래 봤자 평생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하민은 또다시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수환 씨는 정말 저런 가난뱅이 오메가가 좋아요? 네?”
“……!”
하민이 홧김에 한 말은 의외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승현에게 말이다. 안 그래도 그 점 때문에 진 회장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건데, 아픈 구석을 푹 찌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수환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돈은 저한테 많은데요……?”
“…….”
“…….”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닌데, 상당히 1차원적인 대답이었다.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던 승현과 하민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수환을 쳐다봤다. 그 눈길에 수환은 멀뚱멀뚱 눈만 깜박였다.
‘귀여워.’
‘귀엽다.’
“……!”
“……!”
승현과 하민은 서로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마주치자 또 서로 이를 드러냈다. 정말이지 거슬리는 사람이다.
“어, 저기, 흠흠, 어쨌든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민 씨.”
“그렇게 고마우시면 나중에 밥이라도 같이…….”
“안 됩니다.”
“아오, 진짜.”
노골적으로 짜증을 드러내며 승현을 노려본 하민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무시하는 게 심신에 이로울 것 같았다.
“아무튼 조심하세요. 그놈한테 수환 씨는 아마 한 입 거리도 안 될 테니까.”
“한 입 거리…….”
“진짜 조심하세요. 알았죠?”
거듭 당부한 후에 하민은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곧 미팅이 시작할 시간이라, 하민의 비서가 그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혀를 찬 하민이 다시 수환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엔 우리 꼭 둘이 만나요. 수환 씨!”
“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하민이 멀어졌다. 다시 호텔 안에 들어가는 하민의 뒷모습을 보다가 수환이 고개를 돌렸다.
“승현아, 저기.”
“…….”
“다신 안 만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응?”
“…….”
수환이 대답 없는 승현을 초조한 눈으로 쳐다봤다. 승현은 아무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민의 일로 기분 나쁜 게 틀림없었다.
“승현아, 화났어?”
“화 안 났어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승현이 잡고 있는 손을 끌어당겼다.
“어서 돌아가요.”
“으응.”
돌아가는 길 내내 수환은 승현의 눈치를 봤다. 하민을 만나고 승현의 말수가 확 줄어들었다. 눈을 마주치면 항상 부드럽게 웃어 주는데, 지금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수환이 혼자 초조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반면, 승현의 머릿속은 지금 걱정으로 꽉 차 있었다. 박하민, 그 오메가와의 만남은 결코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가 흘린 정보는 허투루 들을 말이 아니었다.
노유진. 쓰레기 오메가라. 재벌가에서 그 정도의 소문이 났다면 분명 상상을 초월한 사이코일 것이다. 수환이 그런 오메가와 선을 봐야 한다니 끔찍이도 싫었다.
“승현아, 화 많이 났어?”
“…화난 거 아니라니까요.”
머릿속이 걱정으로 꽉 찼기 때문인지 승현은 수환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환은 계속 혼자 오해했다.
어떡하지. 화가 많이 났나 봐.
수환은 집에 도착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려는 승현을 붙잡았다.
“승현아, 화 풀어. 응?”
“네? 그러니까, 화난 게…….”
아니라니까요, 라는 말을 다시 하려고 했던 승현이 몸을 뒤로 돌린 채 눈을 크게 떴다. 수환이 고개를 살짝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쪽.
“……!”
“미안해. 그 사람이랑 다신 안 만날게.”
“…화 안 났…….”
쪽.
“아니…….”
쪽.
“…….”
결국 계속되는 뽀뽀 세례에 승현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수환의 목을 확 끌어당겼다. 괘씸한 짓을 한 입술을 머금으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러는 거 어디서 배웠어요. 응?”
“으응.”
“하, 진짜.”
그 오메가가 짜증 나게 굴긴 했지만, 그걸 빌미로 수환에게 속 좁게 화를 내거나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수환이 자신을 부추기고 있었다.
화내지 말라면서 이러는 건 화내 달라는 거지. 멋대로 해석한 승현이 수환의 입술을 깨물며 거친 키스를 이어 갔다.
“흐응, 아파, 앗.”
“형, 아픈 거 좋아하죠?”
“아니얏, 아.”
“거짓말.”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고 혀로 핥았다. 그리고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여린 점막을 혀로 문지르며 구석구석을 핥았다.
“으으응.”
“하아.”
오랫동안 수환의 입술에 키스하던 승현이 입술을 떼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로 뺨과 턱에 쪽쪽, 입을 맞췄다. 수환이 몽롱한 눈으로 물었다.
“승현아……. 이제 정말 화 풀린 거지?”
“제가요?”
아직도 자신이 화가 난 줄 착각하는 수환을 보며 승현이 피식 웃었다.
“난 형한테 화 못 내요.”
“그치만.”
승현의 대답에 수환은 하민과의 맞선을 떠올렸다. 그때의 승현이 화를 내는 모습은 무시무시했다. 아직도 떠올리면 무서울 정도로 말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수환이 우물쭈물 말했다.
“저번엔 화냈었잖아.”
“아…….”
승현 역시 그때를 떠올렸다. 그땐 정말 화가 많이 나긴 했다. 수환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두고 다른 오메가와 맞선을 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화가 많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수환에게 제대로 화를 내진 못 했었다.
“그건 화낸 것도 아니에요.”
“……?”
“난 형한테 화 못 낸다니까요.”
화 좀 낼라치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울어 버리는데,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화를 낼까. 승현이 웃으며 수환의 코에 자신의 코를 맞대며 부볐다.
“엄청 무서웠는데.”
“후후.”
“정말 무서웠단 말야.”
“응, 무섭게 해서 미안해요.”
승현이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수환의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다른 뺨에 계속 뽀뽀를 했다. 그제야 수환은 승현이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이다. 안도하는 수환을 보며 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 이번 주에 맞선… 안 보면 안 돼요?”
“응? 맞선?”
“네. 그 사람이 했던 말이 좀 걸려요.”
“아.”
하민이 말해 주었던 이번 맞선 상대. 수환 역시 그 말을 듣고 찝찝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괜찮지 않을까? 설마 나한테까지 그러려고.”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몸 주인은 화명의 승계권을 가진 로열패밀리의 일원이었다. 뒷감당이 무서울 테니 맞선 자리에서까지 허튼짓하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승현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도 걱정돼요.”
“으음.”
진 회장이 하필 그렇게 소문 나쁜 오메가를 고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진 회장이 작정하고 수환을 억지로 다른 누군가와 결혼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계략일 수도 있는 거였다.
“이미 약속해서 선을 안 볼 수도 없는데.”
다만, 그걸 알아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수환이 고민하다가 승현을 보며 물었다.
“화련 누님께 말해 볼까?”
“대표님한테요?”
“응, 사정을 말하면 경호원이라도 붙여 주지 않으실까?”
“음…….”
그것도 그다지 석연치는 않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승현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데리러 갈게요.”
“알바할 텐데 너무 무리하진 말고.”
“빨리 갈게요.”
“응.”
그리고선 다시 서로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승현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지만 수환은 그렇지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길까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진 회장도 자기 손자에게 그렇게까지 막장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수환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