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수가 이물질에게 집착하는데요 3권
목차
이물질은 이물질에서 벗어난다
이물질은 이물질에서 벗어난다
1.
수환은 일요일 내내 남은 약 기운을 빼려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화련이 보내 준 사람들이 잘 대처해 줬기 때문에 수환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몸 상태가 제법 괜찮아졌다.
그래서 바로 퇴원하려고 했지만 화련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온 승현까지 반대하자 그대로 병원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화요일에 퇴원했다.
“나 진짜 괜찮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승현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하자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병원을 나오자 화련이 보내 준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집에 갈 때 뭐 사 갈까?”
“…….”
“승현아?”
차에 타기 전 가벼운 말투로 물었으나 아무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수환이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핸드폰을 든 승현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그래?”
“…아.”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주고 있던 승현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승현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네.”
승현이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기색에 수환이 가까이 다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띠리링, 띠링…….
차분한 벨 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수환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승현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하…….”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꺼내서 통화를 거부했다. 화면에 언뜻 보인 글자가 수환의 눈에 박혔다.
[형]
‘형…… 이라고?’
승현이 핸드폰에 형이라는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이재현. 승현의 형이자 연신대 교수로, 장차 HS의 신약을 개발할 인물이었다.
수환은 그제야 원작에서의 지금 시기를 떠올렸다. 원래는 진수환에게 학대당한 승현이 메인공인 주건율에게 구출되고 몸을 추스른 다음,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하던 가족들과 다시 만날 시기였다.
자신으로 인해 원작이 그렇게나 비틀렸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원작대로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전화 받아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하자 승현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왜인지 승현은 제 형의 전화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라 수환이 눈을 깜박였다.
띠리링, 띠링…….
그때, 또 핸드폰이 울렸다. 승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 진짜.”
몸을 뒤로 돌린 승현이 전화를 받았다. 그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꾸 왜 그러는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던 승현이 멈칫했다.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어쩐지 다급하게 들렸다. 수환이 초조한 얼굴로 뒤돌아 있는 승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알았어. 지금 갈게.”
전화를 끊은 승현이 다시 뒤를 돌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수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입술을 달싹이던 승현이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승현이 수환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어디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어…….”
어디? 누구 만나는데? 네 형?
묻고 싶은 게 수도 없이 많았지만, 어쩐지 수환도 선뜻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은 승현의 얼굴 때문인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수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정말 미안해요.”
“난 괜찮아.”
애써 웃으며 승현과 헤어지고 수환 혼자 차에 올라탔다. 도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지만 승현은 한사코 거절했다. 행선지를 알리고 싶지 않은 건가. 수환은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린 수환은 집으로 들어갔다. 어쩌다가 호텔에서 하루, 게다가 병원에서 며칠 더 머물러서 그런지 주말 내내 돌아오지 않은 집은 조금 낯선 느낌이 들었다.
창문과 베란다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간단하게 청소도 했다. 원래는 아침에 바로 퇴원하려고 했었는데, 승현이 굳이 강의 끝나고 데리러 온다고 해서 퇴원하고 나니 오후가 다 지나 있었다. 게다가 청소까지 하니까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연락 안 오네.”
계속 승현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전화도,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승현이 언제 돌아오는지 묻지 않았다. 저녁 혼자 먹어야 하려나? 한번 연락해 볼까?
핸드폰을 들고 고민에 빠져 있다가 문득, 자신이 먼저 승현에게 연락한 적이 잘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먼저 연락하는 쪽은 승현이었다.
조금 쑥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수환이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래도 간단한 메시지는 몇 번 보낸 적이 있었다. 언제쯤 집에 올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타자를 쳐서 메시지를 보냈다.
“왜 안 읽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승현이 메시지를 확인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이 보낸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며 수환은 초조함을 느꼈다.
거실을 왔다 갔다 하던 수환이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루루, 하는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무감정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승현의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말을 듣고 수환의 머릿속에 광풍이 몰아쳤다.
무슨 일이지? 혹시 돌아오는 길에 사고라도 당한 거 아닐까?
아니야. 배터리가 다 된 것뿐이겠지. 아니면 갑자기 핸드폰이 고장 났다거나.
그래도…… 혹시라도 핸드폰이 망가질 정도로 험한 일을 당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반대의 상황이 되니 승현이 연락되지 않았던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을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고작 몇 시간 만나지 못하고,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다니.
거실을 연신 불안하게 돌아다니던 수환이 결국 참지 못하고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낮에 입었던 재킷을 들고 다시 나왔다. 무작정 나가서 승현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게 참 멍청하고 비효율적인 짓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수환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현관으로 다가가 도어락 위에 손을 댔을 때였다.
삑, 디리릭.
“……!”
도어락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절로 문이 열렸다. 수환이 놀란 얼굴로 앞을 쳐다봤다.
“형? 어디 가요?”
“어어.”
승현이 의아한 얼굴로 수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 앞에서 주춤한 채로 수환이 멀쩡한 얼굴의 승현을 훑어봤다.
다행이다. 아무 일 없었구나. 방금까지 그의 머릿속에서 별의별 사고를 다 당했던 승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저 찾으러 나가려고 했던 거예요?”
“그게…… 응.”
“연락도 안 되는데 어디 있는지 알고 나가요, 이 시간에.”
픽, 하고 웃은 승현의 얼굴이 어딘가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피곤해 보였다. 승현이 현관에서 두 팔을 뻗어 수환을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주말부터 정신이 없어서, 핸드폰 충전하는 것도 잊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빨리 돌아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냥 왔는데, 걱정 많이 했어요?”
“걱정은…… 많이 했어.”
“응, 내가 잘못했어요.”
승현이 수환을 더 꽉 끌어안았다. 확 풍겨오는 시트러스 향 페로몬을 맡으니 수환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너 괜찮아?”
몸을 조금 떨어트리고 거칠어진 승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상한 약 때문에 고생한 자신도 자신이지만, 그런 수환을 돌보느라 병원에서 쪽잠을 잤던 승현도 만만치 않게 고생했다. 그런 상태로 표정이 좋지 않은 채 헤어졌던 게 줄곧 마음에 걸렸었다.
“괜찮아요.”
애써 웃음 지은 승현이 손을 들어 수환의 등을 두드렸다. 신발을 벗고 현관을 벗어나며 승현이 나직하게 말했다.
“저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승현아, 저기.”
“네?”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승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의아해하는 승현을 보며 수환이 용기를 내 물었다.
“누구 만나고 왔는지 물어도 돼?”
그 물음에 난감한 듯 승현의 얼굴이 굳었다. 얼굴만 봐도 대답을 꺼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승현이 말하기 싫어하는 걸 보고 곧바로 포기했을 텐데, 지금은 왜인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수환은 승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얘기해 주면 안 돼? 아니, 얘기해 줘.”
“형.”
“알고 싶어.”
승현이 제 형과 통화한 후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까지 뭘 하다가 왔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싶었다. 그리고 연인이자 약혼자인 자신에게는 묻고 들을 권리가 있었다.
“하…….”
입을 연 승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골치 아프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래도 말해 줘.”
수환의 단호한 목소리에 승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
병원 앞에서 수환과 헤어졌던 승현이 향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병원이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대학 병원을 찾아간 승현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병원 앞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형!”
승현에게 형이라고 불린 남자, 이재현이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승현과 닮았지만 어딘가 퇴폐적으로 보이는 얼굴이 뛰어오는 승현을 흘끗 쳐다봤다.
“이게 무슨 말이야. 어머니가 쓰러지시다니.”
“…….”
“어머니는 어디 계셔? 병실 어디야?”
다짜고짜 묻는 말에 재현은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워댔다. 눈살을 찌푸리며 재현을 바라보던 승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형!”
“들리니까 소리 지르지 마라.”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재현이 그제야 승현을 쳐다봤다. 자신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승현을 삐딱하게 올려다보며 재현이 입을 열었다.
“어머닌 집에 계시지.”
“뭐?”
분명 자신에게 전화했을 땐 어머니가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더니, 그새 뻔뻔한 얼굴로 말을 바꿨다. 승현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거짓말한 거야?”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 너 때문에 거의 쓰러지실 뻔했으니까.”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시끄럽다니까.”
“하…….”
재현이 거짓말로 자신을 불러낸 걸 알게 된 승현이 차가운 어조로 쏘아붙이듯이 물었다.
“장난해? 거짓말도 하필 그런 걸로 쳐?”
하지만 승현의 싸늘한 기색에 재현은 코웃음만 쳤다. 그는 여전히 승현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안 그랬으면 네가 여기까지 왔을까?”
“…….”
그건 재현의 말이 맞았다. 그가 어머니를 걸고넘어지지만 않았으면 그대로 계속 연락을 무시했을 것이다. 부정하지 않는 승현을 보며 재현이 혀를 쯧쯧 찼다.
“얼마 전에 네 원룸 찾아갔었는데, 거기 다른 사람 살고 있더라.”
“…….”
“너 지금 그 새끼랑 살고 있니?”
재현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승현의 귓가를 때렸다.
수환과 동거하기 전, 승현은 그 사실을 가족에게 숨겼다. HS가 그렇게 망하고 승현의 부모님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부모님이 겨우 시작한 소소한 사업을 가지고 수환은 치졸하게 협박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자신을 걱정하는 부모님에게 그런 남자와 동거까지 한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약혼은 부모님이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동거까지 하는 줄은 모르고 있다. 하지만 재현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머니랑 아버지껜 말하지 마.”
“하, 당연하지. 그럼 진짜 쓰러지실 테니까.”
재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가뜩이나 연락이 잘 안 되는 승현이 걱정된다고 약을 거르다가 병원 신세를 질 뻔했는데, 심약한 어머니는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얘기였다.
“언제부터야?”
속으로 날짜를 세 보던 승현이 입을 열었다.
“한 달 정도 됐어.”
“하, 한 달. 씨발.”
“형.”
작은 목소리로 욕을 뇌까린 재현은 그대로 승현을 지나쳐 흡연실을 나갔다. 승현이 재현의 뒤를 쫓아갔다.
“어디 가?”
“잔말 말고 따라와.”
“나 이제 돌아가야 해.”
승현이 흘끗 시계를 보며 말했다.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말이 거짓말인 걸 알았으니, 더는 재현과 있을 필요 없었다. 그보다는 병원에서 막 퇴원한 수환이 더 걱정되었다.
초조해하는 승현을 재현이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 새끼가 꼭 정해진 시간에 들어오라던?”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그러나 재현은 승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못마땅한 눈으로 승현을 노려보던 재현이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약이나 받아 가. 곧 히트 오잖아.”
그러자 승현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곧 히트 사이클이 올 시기였다.
승현이 먹는 억제제는 재현이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받은 약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승현은 이대로 재현을 따라가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
“하여간.”
티가 날 정도로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따라오는 승현을 보며 재현이 혀를 쯧쯧 찼다.
재현의 차를 타고 간 곳은 연신 대학이었다. 재현은 그곳에서 약학대 교수를 하고 있었다. 재현의 랩실은 승현에게도 무척 익숙한 곳이었다.
“기다려 봐. 약 꺼내 줄 테니까.”
승현은 오랜만에 온 재현의 연구실을 쭉 둘러보았다. 입구 가까이에는 학생들이 실습하는 기구들이 널려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것들을 훑은 승현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연락을 끊기 전까지는 재현과 꽤 활발하게 교류하곤 했었다. 형제 사이가 좋았다기보다는, 지금 재현이 연구하고 있는 것 때문이었다.
책상 위 한쪽에 조그마한 나뭇잎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보통 나뭇잎보다는 크고 통통한 편인데, 특이하게도 잎이 여덟 개나 달려 있었다. 하나같이 크기나 모양이 다 달랐고, 어떤 건 잎이 일곱 개이기도 했다.
팔각. 스타 아니스라고도 불리는 중국의 향신료. 재현은 오래전부터 이것에 푹 빠져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연구는 잘되고 있어?”
“뭐…….”
약을 가지고 돌아온 재현이 탁, 하고 약통을 내려놨다. 팔각을 흘끗 본 재현이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반년 동안 원료를 추출하긴 했는데, 좀 더 실험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렇구나.”
“잘하면 그걸로 항바이러스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분석은 다 된 거야?”
“아니, 아직.”
“내가 좀 봐도 돼?”
“그러든지.”
둘 다 연구에 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하기 때문에 곧 자신들만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승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 이제 갈게.”
승현은 서둘러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재현에게 받은 약을 가방에 집어넣고 고개를 들었으나, 어두운 표정을 지은 재현이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승현아.”
“…….”
“이승현.”
재현의 진지한 말투에 승현은 얼굴을 굳혔다. 분위기만 봐도 재현이 어떤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승현의 굳은 얼굴을 보며 재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때문에 그 자식이랑 억지로 사귀지 않아도 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이승현.”
“진짜…… 그런 거 아니야.”
답답해지는 마음에 승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재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 그 사람 사랑해.”
“뭐?”
누가 누굴 사랑해?
재현은 처음엔 동생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새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 새끼가 그렇게 말하랬냐?”
“형.”
“사랑? 네가 그 진수환을 사랑한다고? 너 미쳤어?”
재현의 호통에 승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래서 처음부터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믿으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다시 한숨을 내쉰 승현이 재현을 지나쳐 나가려고 했다.
“나도 이제 더는 할 말 없어.”
“야, 이승현!”
재현이 손을 뻗어 승현을 붙잡았다. 흥분했는지 재현의 페로몬 향이 훅 풍겨왔다. 열성 오메가인 그의 페로몬은 민트 향이 났다. 열성이라 평소에는 승현에게도 잘 느껴지지 않던 향이 지금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너 진짜…… 우리 때문에 무리할 필요 없어. 진수환 그 개새끼가 무슨 지랄을 해도 우린 괜찮다고.”
“하…….”
“무슨 협박을 당했길래 그러는 건데. 말해 봐.”
“…협박.”
그래, 처음에는 분명 협박으로 시작한 관계였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협하며 했던 협박.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잊힌 기억이지만 말이다.
“협박 같은 거 안 당해. 진짜야.”
“너…… 그래도 나한테는 솔직해야 하는 거 아니냐?”
“솔직하게 말하고 있잖아.”
“하, 너야말로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화를 내며 말하는 재현을 승현이 피곤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관심사가 비슷하기 때문인지 친구처럼 지냈던 형이 지금은 한순간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거 놔.”
“…….”
“그 사람 아파서 일요일부터 병원에 있었어. 걱정되니까 가 봐야 해.”
“하, 씨발.”
재현의 손에서 힘이 스륵 풀렸다. 재현이 손을 놔주자마자 승현은 미련 없이 문을 열었다.
수환의 가족이 자신을 반대하는 것처럼, 자신의 가족들도 수환을 탐탁지 않아 할 거라고 줄곧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정말 더러웠다.
“하아.”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꺼냈다. 재현과 대화를 길게 하느라 깜박하고 수환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수환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얼른 화면을 눌렀다.
“어?”
그러나 아무리 화면을 눌러도 깜깜한 색이 바뀌지 않았다.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배터리가 없다는 표시와 함께 금방 꺼져버렸다.
“젠장.”
주말 내내 밖에 있다시피 하면서 충전을 잘 못 했더니 핸드폰 전원이 완전히 나가버렸다.
인상을 찡그린 승현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중간하게 어딘가에서 충전하고 연락하는 것보다는 서둘러 집에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수환이 얼마나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는지, 승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이게 다예요.”
승현의 말을 다 들은 수환이 눈을 깜박였다.
승현은 자신의 형이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는지까진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굳은 채 못마땅한 기색을 풍기는 얼굴을 보니 대충 알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들의 사이를 반대하는 건 진길영 회장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진 회장보다 승현의 가족들이 더 싫어하고 반대할 게 분명했다. 진수환의 업보는 그만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승현의 형이 자신을 얼마나 못마땅해할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에게서 좋지 못한 말을 잔뜩 들었을 승현에게도 미안해졌다.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별일 없었다니까요. 형한테 약만 받아 왔어요. 봐요.”
가방에서 약통을 꺼낸 승현이 수환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승현의 체질에 맞췄다던 억제제가 자르륵 소리를 내며 약통 안에서 흔들렸다. 그걸 보는 수환의 눈이 커졌다.
승현과 승현의 형이 곧 개발할 신약. 소설 내용대로라면 겨울쯤 신약을 개발할 것이다. 그리고 유럽에 유행병이 도는 것도 그때쯤이다.
발 빠르게 임상 실험을 진행해 특허를 받고 해외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승현의 가족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얻어야 했다. 화명이 HS의 투자처가 되려면 말이다. 그동안 진 회장의 허락만 구하고 있었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승현아.”
“네.”
“나…… 네 형이랑 만나고 싶어.”
“네?”
수환의 말에 승현의 눈이 커졌다. 당황한 그가 놀라며 되물었다.
“저희 형이랑요?”
“응.”
“왜요?”
“왜긴. 이제 슬슬 찾아뵙고 인사드려야지.”
“아니, 형은…….”
승현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수환이 먼저 재현을 만나겠다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저희 형은…… 성격이 좀 괴팍해요. 분명 욕…… 안 좋은 말도 하고 그럴 거예요.”
“괜찮아. 내가 한 짓이 있는데 받아들여야지.”
“굳이 만날 필요 없어요. 형 허락 따위 안 구해도 되잖아요.”
“승현아.”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승현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가 왜 반대하는지 알 것 같았다. 승현은 재현의 말에 상처 입을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이 느껴져서 기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현의 가족들을 계속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반대하는 건 형님만이 아닐 거야. 그치?”
“…….”
“우선은 형님만이라도 설득하고 싶어. 앞으로 계속 가족들 얼굴 안 보고 살 건 아니잖아.”
“저는 그래도 상관없어요.”
“승현아.”
타이르는 듯한 어조에 승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라고 해서 가족들과 척지며 살고 싶진 않았다. 다만 지금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우선은 진 회장을 먼저 설득하고, 그다음에 자신들의 가족을 회유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도저히 설득이 불가능하다면 정말로 연을 끊을지도 모른다. 승현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며 수환이 한숨을 쉬다가 손을 뻗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지? 그렇지?”
꽉 잡은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승현이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난 형이 제일 소중해요. 그러니까.”
소중한 사람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이기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퍼붓는 말에도 그렇게나 상처받았는데, 가뜩이나 신랄한 재현을 마주하고 수환이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 승현아. 나도 네가 제일 소중해.”
“형….”
“그러니까, 소중한 너의 소중한 가족들과 잘 지내고 싶어.”
“…….”
“힘들겠지만 그러고 싶어. 안 될까?”
수환 역시 이곳이 소설 속의 세계라는 걸 알지 않았다면, 굳이 섣부르게 승현의 가족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원작의 지식이 남아 있었고, 메인공인 건율이 언제라도 마수를 뻗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루빨리 화명이 HS의 투자처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처음 승현과 약속했던 한 달이란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간 것처럼, 신약을 개발하는 시간도 빨리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승현아, 기억나?”
“……뭐가요?”
“이번 주가 지나면 우리가 약속했던 한 달도 끝나. 그때 했던 약속, 기억나지?”
“아…….”
왜 모를까. 다른 누구도 아닌 승현 자신이 내걸었던 약속이었다. 우습게도 그때는 관계의 끝을 생각하며 다시 동거를 요구했었다. 끝은커녕 두 번 다시 없을 절절한 사랑을 하게 될 줄도 모르고.
그 약속을 떠올린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 한 달이 우리에게 끝이 아니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
“…….”
“그러니까…… 만나서 말이라도 해 보자. 혹시 모르잖아. 응?”
거듭되는 설득에 승현은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러나 대답한 동시에 아름다운 얼굴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단, 저희 형이 너무 심한 말 한다 싶으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어…….”
금방이라도 재현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흉흉한 눈빛이었다. 수환이 당황한 표정으로 승현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화내지 말라니까.”
“화 안 냈어요.”
“형님한테 화내지 말라고.”
“그건…….”
그건 그쪽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다르다.
벌써부터 전투태세인 승현을 보며 수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쩐지 한숨과 함께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픽 웃으며 승현에게 물었다.
“형님 어떤 분이셔? 궁금하다.”
“저희 형은…….”
거침없이 말을 쏟아낼 것 같았던 승현은 어쩐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수환은 그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승현은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했다. 이걸 어쩐다. 좋지 않은 말만 나올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면 수환이 겁을 먹을 테고, 그런 형을 둔 자신의 인성마저 의심할지도 모른다. 성격파탄자 형과 같은 취급을 받는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면 금방 들통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수환도 재현의 독설을 대비할 마음의 준비는 해야겠지.
한숨을 내쉰 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 형은…… 성격이 좀 안 좋아요.”
“그래?”
“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아요. 자기 기준에서 똑똑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해요.”
“그렇구나.”
그 말을 들으니 수환이 왜 재현과 만나는 걸 반대하는지 알 것 같았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라. 자신은 분명 거기에 해당할 텐데. 역시 메인공 정도의 스펙이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는 걸까. 수환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귀여운 걸 좋아해요.”
“귀여운 거?”
“네, 뭐. 햄스터나 토끼 같은 거. 실제 동물도 좋아하고, 그런 캐릭터들도 좋아하던데요.”
“아.”
승현의 말을 들으니 재현이 어떤 이미지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겉으로 냉정하고 독설을 하면서도 내면은 따뜻한……. 비 오는 날, 무심히 걷다가 비 맞는 새끼 고양이를 주워서 품에 안을 것 같은 그런 사람. 츤데레라고 하던가?
원작에서 재현은 계략이 들통나지 않은 건율에게 홀딱 넘어가서 까칠한 면모를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이물질인 자신에게는 공략이 쉽지 않은 상대일 거라는 예감이 들어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걱정돼요?”
“응, 좀.”
“자기가 먼저 만나고 싶다더니.”
“조금이야. 조금.”
“알았어요.”
그럼 그런 걸로 할게요.
뒷말을 삼킨 채 승현이 웃었다. 수환도 이제 제법 눈치가 생겨 승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입술을 샐쭉거리며 노려보자 승현이 웃으며 수환을 바라보았다.
“몸은 어때요? 이제 괜찮아요?”
“응, 괜찮아.”
어제부터 괜찮다는 말을 수도 없이 많이 했는데, 승현과 화련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게 또 억울해져서 입술을 비죽이자 승현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수환을 끌어안았다.
“다행이에요.”
“응.”
입을 내밀던 수환은 포옹 한 번에 그만 녹아내리듯 헤실거렸다. 손을 들어 승현의 등에 팔을 두르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응?”
저도 모르게 승현의 페로몬 향을 들이마시던 수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콤 쌉싸름한 시트러스 향 사이로 이질적인 향이 풍겼다.
이 자기주장이 강한 향은…… 민트인가? 승현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수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승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요?”
“너한테서 민트 향 나.”
“민트요?”
수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승현이 아, 하고 입을 조금 벌렸다. 아무래도 재현이 화를 낼 때 표출한 페로몬이 약간 묻은 것 같았다.
“아까 형 만났을 때 좀 묻었나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응… 그렇구나.”
자초지종을 알게 된 수환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되어도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형제인 데다 같은 오메가의 향일 뿐인데, 승현에게서 자신의 페로몬이 아닌 다른 향이 난다는 게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수환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향을 풀었다. 어쩌면 조바심이 나서 유혹의 의미를 담은 페로몬을 조금 섞었을지도 모르겠다. 수환의 페로몬 향을 맡은 승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형,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가 뭘?”
무의식적으로 향을 풀던 수환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명백한 의미를 품은 달짝지근한 향에 승현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지금 페로몬 나오고 있잖아요.”
“정말?”
지적을 받아도 어쩐 일인지 페로몬은 계속 줄줄 새어 나왔다. 자신의 오메가에게 묻은 향을 지우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 아니면 흥분제의 부작용으로 페로몬 기관이 이상해진 건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수환도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지 마세요. 오늘은 안 할 거니까.”
“…왜?”
의도한 건 아니지만 승현이 자신의 페로몬을 맡고 흥분했다는 걸 수환은 깨달았다. 하지만 승현은 애써 흥분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듯한 행동에 수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몸이 안 좋을 거 아니에요.”
“이제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설득하는 말에도 페로몬은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향이 강해졌다. 승현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형.”
승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제 수환은 승현이 어떨 때 음성이 낮아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으응.”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거칠게 입천장을 문질렀다. 농염하게 이어지는 입맞춤을 받아들이며 수환 역시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하…… 진짜.”
평소에는 그렇게 페로몬을 꽁꽁 닫아놔서 사람을 환장하게 하더니, 이제는 너무 풀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입술을 뗀 승현이 못마땅한 눈으로 수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유혹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요? 네?”
“으읏.”
도톰한 아랫입술을 콱 깨문 승현이 흥분하며 몸을 붙여왔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던 수환이 승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느새 두 사람의 몸은 복도를 지나 침실에 다다랐다.
침실 안에 들어가자마자 입술을 뗀 수환이 원망하는 투로 말했다.
“네가… 나쁜 거잖아. 다른 사람 향 묻혀오고.”
“…….”
“넌 내 건데…… 앗.”
그대로 떠밀려서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침대에 누운 수환의 머리 옆에 손을 짚은 승현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내가 나빴네요.”
“응…… 아.”
이윽고 승현에게서도 페로몬이 확 퍼져 나왔다. 더 이상 그에게서 민트 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침실 안에는 두 사람의 페로몬이 한동안 진득하게 뒤엉켰다.
***
“대표님.”
“……?”
서류를 내려다보던 화련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 비서가 서 있었다. 화련이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전에 지시하셨던 HS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어쩐지 묘한 기색을 보이는 비서를 보며 화련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비서가 차분하게 서류철을 넘겨주었다.
“과거 HS가 개발한 신약을 연구했던 연구원 중 한 명이 신문사와 인터뷰를 하려다 실종된 일이 있었습니다.”
“흠.”
“정황이 의심되어 더 조사해 봤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자료가 부족하더군요.”
“그렇겠죠.”
만약 그게 단순한 실종이 아닌, 누군가가 작정하고 제거한 거라면 증거 따윈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화련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는데, 예상보다 HS의 부도에는 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더 알아낸 것은 없습니까.”
“수상한 정황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서가 양복 안쪽 포켓에서 무언가를 꺼내 화련의 앞에 올려놨다. 그걸 본 화련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자료 조사를 지시했을 때, 저희 쪽 수행원들을 주시한 건 사기업이었습니다.”
“흥신소 말입니까?”
“예.”
비서가 책상 위에 올린 건 초점이 흐릿한 사진들이었다. 상대방에게 눈치챘다는 걸 알리지 않기 위해 교묘히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하나같이 초점이 엉망이었다.
흐릿한 사진이나마 대조한 결과, 이들은 경찰 관계자나 신문사 기자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전문적으로 훈련한 티가 났다. 이런 데에 도가 튼 사람들 말이다.
“어쩌면 같은 부류에서 수작질을 부린 걸 수도 있겠군요.”
“더 깊이 파고들어 볼까요?”
“그래요.”
비서의 물음에 화련이 입술 끝을 올려 희미하게 웃었다.
“어디 누가 움직이는지 한번 봅시다.”
그녀의 눈이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개처럼 변했다.
***
“네? 이번 주말이요?”
설거지하던 수환은 전화가 오자 고무장갑을 벗고 핸드폰을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화련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주말에 만나자는 말을 했다.
수환은 당황했다. 이번 주 주말은 승현의 형과 이미 약속을 잡아 놨기 때문이었다.
“저 토요일은 약속이 있는데.”
―그러니? 일요일은 내가 안 되는데. 이번 주 평일도 일이 바쁠 것 같아서 말이다.
“아…….”
평일과 주말 할 것 없이 바쁜 화련은 시간을 잘 내지 못한다. 수환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겨우 시간을 내서 얼굴만 비치고 갔었다. 그 후로 메시지와 전화만 나눴을 뿐, 직접 만나지 못했다.
―오랜만에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싶구나.
화련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빙의 전의 기억이 없는 수환은 전생의 가족을 떠올릴 수 없었다. 빙의한 진수환의 가족이 이제는 자신의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 화련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로 오해를 푼 다음엔 화련과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수환을 아끼는 가족이었다. 수환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저, 오후 약속이니까 저녁에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니?
“네, 집에 돌아갈 때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니야. 너도 돌아가서 쉬고 싶을 텐데 번거롭게 밖에서 만나지 말자. 내가 시간 맞춰서 너희 집 앞으로 갈 테니까.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미안함을 느낀 수환이 작게 중얼거리자, 화련은 거듭 괜찮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다음 통화를 종료했다.
“아차.”
물이 끓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수환이 몸을 일으켰다. 주방으로 가서 설명서를 다시 읽고 봉지에 든 재료를 냄비 속에 탈탈 털어 넣었다.
지난번의 참패 이후, 수환은 두 번 다시 요리에 도전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은 승현과 자신에게 조금 중요한 날이기에, 초심자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밀키트를 주문해 상을 차리고 있었다.
승현이 돌아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글자를 나노 단위로 쪼개서 설명서를 읽으니 겨우 불 조절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환은 물이 펄펄 끓자 인덕션 온도를 조금 더 낮췄다.
사실 불 조절만 잘했어도 지난번에 그렇게까지 요리가 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 후회가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요리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수환이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똥손인 자신이 보기에도 밀키트 요리는 그럭저럭 구색을 갖춰가고 있었다.
“다 됐다.”
마지막으로 비프스튜를 곁들이는 빵과 함께 식탁 위에 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비록 데우고 끓이기만 한 것들이지만 꽤 그럴듯했다. 수환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9월 30일.
오늘은 원래 승현과 약속했던 동거 기간이 끝나는 날이었다. 승현은 이날까지 자신을 털끝 하나 건들지 않으면 파혼해 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랬던 약속이 어느 순간부터 어긋나고 비틀렸다.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약속이 되었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오자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의 약속과 달리 자신과 승현이 파혼하지 않고 계속 함께 살아가기로 한 것도 새삼 상기되고 말이다.
쑥스러운 미소를 지은 수환이 괜히 식탁보를 손으로 한 번 쓸었을 때였다.
삐리릭.
“……!”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환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왔어?”
“다녀왔어요.”
현관에 다가온 수환을 승현이 껴안으며 말했다. 그리고 수환에게서 음식 냄새가 훅 풍기자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뭐 준비했어요?”
“응, 별건 아닌데.”
어색하게 대답한 수환이 승현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걸어갔다. 그가 오후부터 준비한 음식들이 식탁 위에 차려져 있었다.
“혼자서 힘들지 않았어요?”
“이거 다 밀키트야. 진짜 끓이고 데우기만 하면 되더라.”
요즘 세상이 참 편해졌지 뭐야. 멋쩍은 말투로 덧붙인 수환이 부끄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그런 수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현이 사랑스러운 약혼자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으응.”
짧은 볼 키스에도 여전히 널을 뛰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증이다. 정말. 답이 없는 자신에게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수환은 식탁에 앉았다.
“저도 사실 준비한 거 있어요.”
“정말?”
“네, 밥 먹고 보여 줄게요.”
“알았어.”
뭘까? 수환은 무척 궁금했지만 부러 캐묻지 않았다. 승현이 자신에게 주는 건 뭐라도 기쁠 것이다.
그런데 마치 오늘이 기념일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사실은 아무 날도 아닌데 말이다. 만약 자신만 9월 마지막 날에 의미를 두고 설레발을 친 거였다면 무척 민망했을 텐데, 다행히 승현도 장단을 맞춰 주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승현과 오래도록 웃으면서 밥을 먹을 수 있길. 수환은 진심으로 바랐다.
“형, 손 내밀어 봐요.”
“응? 왜?”
밥을 다 먹고 소파에 앉아 있는데, 별안간 승현이 손을 달라고 했다. 왜인지 묻자 승현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으면서 수환에게 손을 까닥였다.
그에 고개를 갸웃하던 수환은 자신의 왼쪽 손을 승현의 손 위에 올렸다.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승현이 무언가를 수환의 왼쪽 손목에 묶었다.
“어…….”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수환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수환의 손목에 심플한 모양의 팔찌를 끼워 준 승현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저한테 진짜 소중한 거예요.”
“아, 응.”
알고 있다. 수환은 이 팔찌가 승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팔찌는 원래 승현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HS가 부도나면서 가족들이 함께 살지 못하고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을 때, 승현의 어머니가 자신의 팔찌를 막내아들에게 주었다. 승현은 그 후로 단 한 번도 팔찌를 손목에서 빼지 않았다.
원작에서 승현에게 이 팔찌를 받는 건, 수환이 아닌 건율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건 메인공이 받아야 할 물건이었다. 메인수가 더없이 소중히 여기던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게 자신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수환은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고마워. 소중하게 간직할게.”
“저라고 생각하고 손목에서 빼면 안 돼요.”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수환은 팔찌의 매끄러운 표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세월감이 느껴지는 은색 팔찌는 자세히 보면 구석구석에 자잘한 기스가 많았다.
“농담이에요. 나중에 더 좋은 걸로 줄게요.”
아무래도 오래된 데다가 그다지 값이 나가는 게 아니라 수환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승현이 눈치를 보다가 말했지만, 수환은 그의 말을 듣고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아니야. 안 그래도 돼.”
“하지만 쓰던 거니까.”
“괜찮다니까.”
마치 승현이 줬다 뺏기라도 할 거라는 것처럼 수환이 오른손으로 팔찌를 꽉 잡았다. 어린아이처럼 도리질 치는 모습에 승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요. 안 뺏어 갈게요.”
“정말이지?”
“그렇게 좋아요?”
“응.”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재벌가에서 살아오며 온갖 비싸고 귀한 걸 몸에 걸쳤을 텐데, 고작 낡은 팔찌를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특히 그 낡은 팔찌가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인 만큼 더욱.
무언가가 벅차오르는 느낌에 승현은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고개를 숙인 그는 아이처럼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