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재현은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벼르고 있던 사람처럼 독한 마음을 먹기까지 했다.
그 진수환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승현에게 전해 들었을 때, 재현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
당연히 피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바라던 일이었다. 자신이 그 악독한 남자에게서 승현을 구해내야 하니까 말이다. 재현은 이를 바득 갈았다.
약속 장소로 정한 한정식 식당에 먼저 도착한 재현은 삐딱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사실 재현은 진수환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승현과 약혼을 요구한 그 남자는 재현과 부모님을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다. 약혼은 오로지 서면으로만 진행됐다.
게다가 집안이 망하고 대학 진학도 겨우 했던 재현은 학업과 연구에만 매달린 삶을 살아왔다. 한참 전부터 재벌가와 무관한 삶을 살아왔던 그는 승현의 약혼자를 표면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문에 완전히 무지한 건 아니었다. 화명의 진수환이 어떤 인물인지, 오메가를 얼마나 갈아치우는 불한당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승현은 아무리 괴로운 일을 겪어도 그걸 제 입으로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가족인 재현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 전 승현이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미련하게 착하기만 한 놈은 가족들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혼자서만 모든 걸 감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빤히 보이는 생각에 재현은 코웃음을 쳤다.
오늘이야말로 자신이 그 망나니에게서 승현을 구해낼 것이다. 재현은 다시금 다짐하며 눈을 부릅떴다.
“저…… 안녕하세요, 형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재현의 눈이 자신의 앞에 선 남자에게로 향했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잘생긴 남자가 공손한 태도로 재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따로 마련된 룸 안에서 재현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수환을 비뚜름한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안에 가시가 박힌 사람처럼 물었다.
“형님? 내가 왜 당신 형님입니까?”
“네?”
까칠한 말에 수환이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지만, 호칭으로 지적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수환은 간신히 재현이 대학교수이며,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 것치고는 제법 고리타분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많을 테니, 친근한 호칭보다는 적당히 거리감 있는 호칭이 더 나을 것이다. 수환은 납득하며 곧바로 재현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에 재현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뭐지. 여기서는 기 싸움이 벌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보다 쉽게 꼬리를 내리는 수환을 보며 재현도 당황했다.
어쩐지 생각했던 상황과 다르다. 재현은 그제야 새삼스러운 눈으로 앞에 있는 수환을 훑었다.
알파라서 그런지 체격이 좋은 몸은 자신이 생각했던 눈높이보다 훨씬 위에 있었지만, 어쩐지 위협적인 느낌이 들진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보니, 자신의 눈치를 보듯이 순하게 뜬 눈망울 때문인 것 같았다.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이야. 치사하게 호칭 가지고 뭐라 그래.”
“너…….”
수환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승현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재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승현을 째려봤다.
이상한 건 진수환만이 아니었다. 저놈의 옆에 달라붙어 있는 승현도 마찬가지였다. 재현이 쳐다보자 승현은 대놓고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형은 누구한테나 다 저래요.”
“뭐, 이 자식아?”
“빨리 앉아요. 수환이 형.”
“어? 어.”
승현의 재촉에 수환은 얼떨결에 의자에 앉았다. 재현은 그 모습을 기막힌 눈으로 쳐다봤다.
아무래도 제 동생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승현의 철없는 모습에 재현은 이를 바득 갈았다.
저게 지금 도와주려는 건지도 모르고.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인상을 쓴 재현은 의자에 앉은 채 불만을 드러내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저…… 뭐 드시겠어요?”
“저희 형은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시큰둥한 어조로 말한 승현이 메뉴판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짚었다.
“이거 어때요? 형은 생선보다 고기 더 좋아하니까 떡갈비 있는 B 세트로 해요.”
“아, 그럴까?”
승현의 말에 솔깃하던 수환은 차게 식은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재현과 눈이 마주치고 흠칫 놀랐다.
생각해 보니 한정식은 메뉴를 통일해야 해서 함부로 정해서는 안 된다. 수환이 고개를 저으며 재현에게 물었다.
“아니, 그… 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솔직히 메뉴는 뭘 시켜도 상관없었다. 승현의 말처럼 재현은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소식하는 편이라 뭐든 많이 먹지 않을 뿐이지.
관심도 없는 음식 메뉴 따위로 꼬투리 잡으며 드잡이질할 마음까지는 들지 않아서 재현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짧게 대답했다.
“아무거나 시켜요.”
“네.”
재현의 선선한 허락에 수환은 눈에 띄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들뜬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직원을 불러 승현이 말한 B 세트를 시켰다.
혹시 떡갈비가 그렇게 먹고 싶었나. 재현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그건 좀 귀엽…….
아니, 이게 무슨 뭣 같은 생각이야. 정신 차려, 이재현.
재현은 꼴사납게 풀리려던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자신만은 절대 이런 속임수에 속지 말아야 한다. 단순한 난봉꾼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머리를 잘 쓰는 타입인지도 몰랐다. 방심하게 해 놓고 뒤통수칠 생각이겠지. 독사 같은 남자 같으니.
“맛있게 드세요. 교수님.”
“……그쪽도요.”
음식이 나오자 수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마주 보면서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밑으로 눈을 내리니 상다리가 휘어질 것처럼 가득 채운 음식들이 보였다. 확실히 승현이 추천한 B 세트에는 고기반찬이 많이 보였다.
승현은 앞에 놓인 국에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국이 무척 뜨거웠다. 그는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 이거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읏.”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입속에 숟가락을 넣은 수환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승현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수환에게 다가갔다.
“혀 데었어요?”
“응….”
“많이 아파요?”
“아… 아 나파.”
고개를 저었으나 뜨거운 국에 덴 혀 때문에 발음이 불명확했다. 수환의 굵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괜히 어눌하게 말하지 않으려고 힘을 주니까 더 아픈 모양이었다. 승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수환을 살폈다.
그런 두 사람을 재현이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이것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특히 기가 막힌 건 승현 쪽이었다. 그는 무슨 어미 새가 새끼를 보살피듯 유난스럽게 굴었다. 저런 망나니를 상대로 말이다.
“어디 봐 봐요.”
“갠찬… 다니까.”
“그러게 왜 불지도 않고 먹어요. 뜨거운 거 잘 먹지도 못하면서.”
타박하면서 승현은 차가운 물을 수환의 입가에 대 주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직원을 호출해 얼음물도 부탁했다.
“마시지 말고 입안에 머금고 있어요. 얼음은 먹지 말고.”
“응.”
고개를 끄덕인 수환이 차가운 얼음물을 입안에 머금고 따끔따끔한 혀를 살살 굴렸다. 그러다가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는 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윽.”
“아, 삼키지 말라니까.”
“내가, 내가 알아서 할게.”
저도 모르게 물을 삼킨 수환이 민망해하며 승현을 밀어냈다. 승현이 다정하게 구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보니, 그의 보살핌을 받는 건 자신에게는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재현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앞에 있는 재현을 생각하지 못하고 너무 응석을 부리고 말았다.
뒤늦게 자각한 수환이 겨우 승현을 제자리에 앉혔다. 너무 유난을 떤다고 질리지 않았을까. 어떻게든 재현이 자신을 신뢰할 수 있도록 듬직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벌써부터 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식사 중이신데 유별나게 굴어서.”
“……아뇨.”
“정말 죄송합니다.”
수환이 거듭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보던 재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됐고, 식사나 계속하죠.”
“아, 네.”
그렇게 서로 뻘쭘한 상태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수환은 아픈 혀를 꾹 참으며 열심히 음식물을 씹었고, 그런 수환이 걱정되는지 승현은 자꾸만 옆을 흘끗거렸다.
재현은 뭘 먹어도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걸 눈으로는 보고 있어도 머리로 인식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승현이 특정한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연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였다. 갈비를 먹던 재현이 한껏 인상을 썼다.
“혹시 입맛에 안 맞으세요?”
수환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재현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혹시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싶었다. 아까 메뉴 정할 때 더 의견을 물었어야 했나. 너무 제멋대로 정하는 바람에 재현이 좋아하지 않는 메뉴를 시킨 게 아닐까 불안했다.
“아닙니다.”
“원하는 메뉴가 더 있으시면…….”
“아니라고 했잖아요.”
“네.”
재현이 짜증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수환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승현은 또 옆에서 퉁명한 어조로 말했다.
“잘 먹고 있는데요, 뭐. 냅둬요.”
“승현아, 왜 자꾸 말을 그렇게 해.”
“형이 너무 신경 쓰는 거예요.”
저 자식이, 진짜.
재현은 얄미운 말만 골라 하는 승현을 째려봤다. 앓느니 죽지. 혼란한 상황에서 재현은 그저 한숨만 푹 내쉬었다.
어떻게든 어영부영 식사가 끝나고 후식이 나왔다. 새빨간 오미자차와 떡을 응시하던 재현이 고개를 들어 수환을 쳐다봤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목격해서 평정심을 잃을 뻔했다. 재현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를 갈고 이 자리에 왔던 이유를 다시금 상기하며 다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이렇게 갑자기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먼저 말문을 연 건 재현이었다. 그는 원체 돌려 말하는 걸 잘 못 하는 성격이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수환은 온몸을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그게…… 저희 약혼할 때도 뵙지 못했는데, 계속 마음에 걸려서요. 제가 승현이한테 자리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제 와서요?”
“네… 정말 죄송했습니다.”
수환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원작에서는 이미 죽었어야 할 자신은 이렇게 살아서 승현의 옆에 앉아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진수환이 싸질렀던 똥을 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다는 생각보다는 간절한 마음만 들었다. 부디 재현이 자신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물론 재현은 그런 마음 따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희귀한 동물을 쳐다보듯 고개를 숙이는 수환을 응시했다.
이 재벌은 뭐가 이렇게 가볍지? 머리를 깃털로 만들었나, 살랑살랑 잘도 숙이네.
자신에게 강압적으로 굴 알파의 모습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아까부터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제 슬슬 본성을 드러내리라 생각했다. 밥을 먹이고 회유까지 했는데 안 되면 윽박지르겠지. 그런데 도저히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걸 사과하려고 절 부른 거라고요?”
“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재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왜인지 이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HS가 부도났을 때, 승현은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재현은 아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자신과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재현의 세상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열성인 자신의 형질을 단점이라 여겨 본 적이 없었지만, 밑바닥으로 떨어진 인생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집안이 망한 데다 열성인 오메가. 주변의 시선과 태도는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재현의 집이 부유했을 때는 모든 게 괜찮았던 것들이 한순간에 그의 목을 옥죄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생 때부터 타인과 감정적인 교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재현은 안 그래도 예민했던 성격이 더욱 괴팍해지고 시니컬해지기만 했다.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자신이 열성이라도 괜찮다며 다정하게 굴었던 전 약혼자가 차갑게 뒤돌았을 때도, 러트가 왔을 때 상대해 주면 돈을 주겠다고 비아냥대던 친구라 착각한 알파들도, 시간이 지나니 조금 더러운 과거의 기억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조그맣게 앙금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라, 재현은 이렇게 쉽게 사과하고 고개를 숙이는 수환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재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당신, 내 동생 가지고 놀려고 데리고 있는 거 아니었어?”
“네?”
수환은 당황한 눈으로 재현을 바라보았다. 당혹감을 느낀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뇨. 그런 일은 절대…….”
“당신, 러트 왔었지?”
“네?”
직접적인 물음에 수환이 또다시 당황했다. 동그랗게 뜬 눈을 응시하며 재현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승현은 우성치고는 히트 사이클이 꽤 늦게 오는 편이었다. 그의 억제제를 만드는 재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시기상 아직 승현은 히트가 오지 않았을 테지만, 눈앞의 알파는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승현의 페로몬에 이끌려 러트가 전보다 더 일찍 찾아왔을 터였다.
그리고 그건 정확한 생각이었다. 수환은 말을 얼버무릴 생각도 하지 못하며 그저 당황하기만 했다.
“그게, 그…… 네.”
어쩌지도 못하고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거봐. 했네, 했어. 알파라는 놈들이 다 그렇지.
러트 때의 알파들이 얼마나 잔혹해지는지 재현도 잘 알고 있었다. 경험이 없는 승현은 분명 힘들고 괴로웠을 것이다. 갈수록 싸늘해지는 재현의 분위기에 수환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게 왜?”
“뭐?”
반항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온 건 의외의 곳에서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승현이 재현에게 삐딱한 눈길을 보냈다. 재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승현이 뾰족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서로 동의하에 했어. 그게 왜? 어차피 결혼할 사인데.”
“뭐? 결혼?”
이 어린놈이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재현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너 미쳤어?”
“아니, 안 미쳤는데.”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한 승현이 고개를 돌려 수환을 응시했다. 손을 들어 꾹 말아 쥐고 있는 수환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애정이 가득한 시선과 행동을 보며 재현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감지덕지하지. 형도 잘 생각해 봐. 화명이랑 사돈 맺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너, 너…….”
신랄한 말에 재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갈수록 제가 알던 동생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승현이 하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집에 돌아가서 시체처럼 잠만 자고, 다음 날 아침 겨우 눈을 떠 대충 틀었던 TV에서 이런 비슷한 장면이 나왔던 것 같은데.
막장 드라마라고 했었나. 승현의 말은 마치 그런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이 뱉을 법한 대사였다.
돈이면 다야? 돈이면 다냐고. 너 원래 그런 애였어?
이런 말을 하면 막장 드라마의 유치한 주인공이 될 것 같아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승현아. 말을 왜 그렇게 해.”
“하지만 형이 자꾸.”
“교수님이 불쾌해하시잖아.”
“…네.”
승현은 수환에게는 제법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재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현을 바라보는 얼굴은 어딘가 불손해 보였다.
“미안, 내가 말이 좀 심했네.”
아무리 봐도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사과하는 말에도 일말의 성의가 없었다. 오히려 받아 봤자 기분만 더 나빠지는 사과였다. 인상을 팍 찡그린 재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됐어. 이 자식아.”
“어디 가?”
“화장실!”
버럭 소리를 내지른 재현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화장실 안에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 선 재현이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했다.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생각한 대로 되는 게 없어서 그런가. 모든 게 엉망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재현이 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세수도 할까 하다가 머리카락이 젖으면 티가 날 것 같아서 그만뒀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접었던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화장실을 나오다가 멈칫했다. 화를 내듯이 소리를 지르고 나왔는데 손만 씻고 금방 들어가기가 왜인지 민망했다. 재현은 룸 쪽으로 돌아가다가 저도 모르게 문 앞에 멈춰 섰다.
어쩌지. 살짝 열린 문을 마저 열지도 못한 채 재현이 고민했다. 왜 이런 바보 같은 고민을 하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정말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때, 조금 열려 있는 문틈으로 조그마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봐 봐요.”
“승현아.”
“빨리요.”
“이제 괜찮다니까.”
“……?”
옥신각신하는 목소리에 재현은 조금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고 허리를 숙여 문틈으로 룸 안을 훔쳐봤다.
수환은 제 앞으로 다가온 승현을 난감해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승현은 재현이 나가자마자 다가와선 계속 혀를 내밀어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까 밥 먹으면서 혀를 데인 걸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교수님 곧 돌아오실 텐데.”
“형은 스트레스 많이 받는 성격이라 화장실 가면 오래 걸리니까 괜찮아요.”
재현은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은 치부를 지껄이는 동생의 입을 확 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으며 계속 룸 안을 응시했다.
“그래도, 이런 데서.”
“걱정된단 말이에요.”
“…….”
얼굴을 빨갛게 물든 수환이 눈을 내리깔았다. 승현은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손을 움직였다. 도톰한 아랫입술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벌리자, 수환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붉은 혀를 살짝 내밀었다.
“…많이 아팠겠네요.”
“응.”
승현이 심각한 얼굴로 상처가 난 혀를 살폈다. 수환이 내민 혀끝에 이질적인 상처가 나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심한 상처에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돌아가면서 약 사 가요.”
“아니야. 그럴 필요까진 없어.”
“이걸 어떻게 그냥 둬요.”
속상해하는 승현의 얼굴을 보니 차마 더는 괜찮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약까지 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데일 당시엔 아프긴 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는 놔두면 저절로 나을 텐데.
그런 수환의 생각을 눈치챈 듯 승현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물었다.
“그럼 내가 소독해 줄까요?”
“소독?”
“네.”
“어떻게?”
그러나 묻고 나니 어디선가 들었던 민간요법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다친 상처에는 침을 묻히면 낫는다는 말. 설마 하는 심정으로 승현을 보다가,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니 식겁하며 밀어냈다.
“안 돼. 여기서는.”
“괜찮아요. 아무도 안 봐요.”
“그래도… 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수환이 밀어내는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승현은 저항하는 손을 손쉽게 한 손에 모아 쥐고 입을 맞췄다. ‘소독’이라는 행위에 충실하기 위해 승현은 제 혀를 움직여 수환의 혀끝을 쓸었다.
“으응, 아파, 앗.”
따끔한 느낌이 머리끝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승현의 혀가 피하는 곳마다 쫓아와 상처 주변을 문질렀다. 어차피 입안에 있는 상처 따위, 민간요법대로면 저절로 소독될 텐데 핑계도 참 가지가지였다.
“……!”
문밖의 재현은 그 광경을 경악하며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승현이 적극적으로 덮치고 있는 모양새였다. 싫어하던 수환도 어느새 입을 맞추며 호응하고는 있지만, 어느 쪽이 더 키스에 집착하고 있는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승혀…… 응?”
어느새 다른 건 다 잊고 머리 한구석이 녹진녹진해졌던 수환은 승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다가 어딘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살짝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이쪽을 보고 있는 눈과 딱 마주쳤다.
“헉……!”
“윽.”
놀란 수환이 키스하고 있던 승현을 확 밀쳤다. 왜 그러는 거냐고 눈으로 묻자, 수환이 당황한 얼굴로 뒤를 가리켰다.
“아, 형.”
“……!”
아무렇지 않게 뒤를 돌아본 승현이 재현에게 짜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마치 눈빛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치 좀 챙겨.’
“…….”
뭐야. 내가 잘못한 건가? 눈치껏 안 들키고 빠져 줬어야 했던 건가? 대체 왜 이런 분위기가 된 거지?
순식간에 방해꾼 취급을 받은 데다 동생의 은밀한 장면을 본의 아니게 훔쳐본 재현의 머릿속이 한껏 혼란스러워졌다.
“교수님이… 교수님이 보셨…….”
그리고 수환 역시 재현 못지않게 혼란한 얼굴이었다. 아니, 혼란스럽다기보다는 수치심에 몸 둘 바 몰라 하는 듯했다.
“뭐, 어때요. 사랑하는 사이인데. 집에선 이것보다 더…….”
“넌 입 좀 다물어!”
수환이 울먹이면서 승현의 입을 막았다. 정말이지 잘되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누구 하나 만족스럽지 않은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계산을 마친 수환은 차마 재현 쪽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쩌지. 너무 민망했다. 재현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수환에게 다가온 승현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요.”
“……!”
놀란 수환이 고개를 들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승현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평소보다 뜨거운 것 같은 온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너 혹시 열나지 않아?”
“제가요?”
“응, 손이 좀 뜨거운데.”
중얼거리면서 수환이 다른 쪽 손을 들어 승현의 이마를 덮었다. 역시 좀 뜨거운 느낌이 난다. 수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흠흠.”
“……!”
부자연스러운 기침 소리에 수환이 놀라며 손을 뗐다. 거북한 기색을 보이며 재현이 입을 열어 물었다.
“억제제 먹었지?”
“…먹었어.”
“그럼 뭐, 별일 아닐 겁니다.”
“……?”
형제의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수환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억제제라는 단어에 승현이 얼마 전 재현에게 받아 왔다는 약통을 떠올렸다.
히트 사이클. 승현에게 히트 사이클이 오려는 것이다. 수환이 놀라며 승현의 손을 꽉 잡았다.
“빠, 빨리 돌아가자.”
“약 먹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수환이 발을 동동 굴렀다.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가 밖에 있으면 얼마나 위험한지, 소설 내용이 머릿속에 있는 수환도 알고 있었다.
“나도 이만 간다.”
“아, 교수님.”
뒤를 돌아 걸어가려던 재현은 수환이 부르자 멈칫했다. 그리고 흘끗 수환에게 시선을 주었다.
“뭡니까?”
“저…… 오늘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엉망인 식사였지만, 이 자리에 재현이 와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수환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비록 재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
조심스럽게 묻는 수환을 재현이 지그시 쳐다봤다.
정말 이 남자가 승현을 제집에 억지로 가둬 두고 있는 게 맞는 걸까. 그런 의심이 머리 한구석에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꼭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으로 시선이 갔다.
수환의 왼쪽 손목에 매달려 있는 은색 팔찌가 언뜻 보였다. 식사하는 중에도 몇 번 봤지만 다른 일 때문에 신경 쓰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묘하게 눈에 익숙한 디자인의 팔찌였다.
“……!”
재현은 곧 그게 어머니가 아끼던 오래된 팔찌라는 것을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가 그걸 승현에게 주었다는 것도. 충격으로 재현의 두 눈이 흔들렸다.
정말, 진심인가? 진심으로 승현은 이 남자를…….
재현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재현이 알지 못하는 사이, 눈앞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대로 하시죠.”
“정말요?”
“네.”
의외로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재현을 보며 수환은 놀랐다. 어쩌면 대꾸도 안 하고 무시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승낙하다니. 수환은 기뻐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 다음에는 교수님이 드시고 싶으신 거 같이 먹어요!”
“뭐, 그러든지요.”
“헤헤.”
활짝 웃는 수환의 얼굴을 재현은 조금 거북하게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만.”
“네, 안녕히 가세요!”
손을 붕붕 흔들며 배웅하는 수환을 애써 외면하며, 이번에야말로 재현이 뒤를 돌아 걸어갔다.
“우리도 이만 갈까?”
“그래요.”
기분이 좋아진 수환이 싱글거리며 잡고 있는 승현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다 아까보다 더 뜨거워진 것 같은 체온에 미간을 좁혔다.
“너 진짜 괜찮아?”
“괜찮아요. 집에 가서…… 좀 쉬면 나아질 거예요.”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던 터라 승현도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은 살짝 미열만 나는 정도지만, 집에 가면 열이 펄펄 끓어오를 것 같았다.
분명 나오기 전에도 재현이 준 억제제를 먹었는데, 어째서 히트를 억누르지 못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썹을 찌푸린 승현이 다시금 괜찮다며 걱정하는 수환을 다독였다.
“아.”
걸음을 떼던 수환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멈춰 섰다. 이대로 히트가 오는 승현과 같이 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요?”
“저기, 나는.”
차라리 승현이 무사히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자신은 호텔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만약 히트가 온 승현을 자신이 이성을 잃고 덮치기라도 하면…….
손끝이 떨렸다. 다 떨쳐낸 줄 알았던 감각이 수환의 몸을 움츠리게 했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도 머릿속에서는 고통받는 승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형.”
“……?”
툭, 하고 어깨에 무언가가 닿았다. 수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승현이 나른한 얼굴로 수환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 혼자 두지 마세요.”
“…….”
“내가 다른 알파랑 히트 보내면 좋겠어요?”
“뭐?”
승현의 말에 수환이 놀라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냥 하는 말인 걸 알면서도 승현이 다른 사람과 히트를 보낸다고 상상하니 질투가 났다. 그리고 너무나도 슬펐다.
“제발, 그러지 마.”
눈썹 양 끝을 축 늘어트리며 수환이 애원하듯 말했다. 승현을 상처 입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서 히트가 온 오메가 연인을 혼자 두겠다는 최악의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수환의 애원하는 듯한 말에 승현이 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수환에게 속삭였다.
“어서 집에 가요.”
“응, 그래.”
퍼뜩 정신을 차린 수환이 자신에게 기댄 승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택시를 타니 금방 집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 승현의 몸은 불길이 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승현아, 괜찮아?”
“읏…….”
이제 수환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마음이 급해진 수환은 승현을 부축하며 걸음을 빨리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택시에서 내린 뒤 얼마 걷지 못하고 무릎이 확 꺾였다.
“윽.”
“하아.”
히트가 온 오메가의 페로몬은 수환이 지금까지 맡았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뇌까지 마비되는 짙은 페로몬에 수환은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끼익.
그때, 검은색 세단이 두 사람의 앞에 멈춰 섰다. 그 안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도련님.”
“어…….”
수환이 겨우 눈을 들어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봤다. 흐릿한 눈이 익숙한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물었다.
“……김 실장님?”
“네, 접니다.”
“왜, 여기…….”
자꾸만 불쑥불쑥 치고 올라오는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수환이 신음을 억눌렀다. 그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도운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이승현 씨를 저희가 모셔 가겠습니다.”
“승현이를…….”
“네, 히트 사이클이 온 동안만 보살펴드리겠습니다.”
도운은 진 회장의 명령에 두 사람을 줄곧 감시하고 있었다. 승현에게 히트 사이클이 오면 수환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미성숙한 두 사람이 페로몬에 휘둘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것에는 도운 역시 동감했다. 하지만 막상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머릿속이 잔뜩 뒤엉킨 실뭉치처럼 얽히고설킨 수환은 도운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주위에 선 남자들이 승현을 데려갈 거라는 걸 깨달았다.
“싫어요.”
“도련님, 이승현 씨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잠시만.”
“싫어, 싫어요.”
마치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수환이 고개를 저었다. 도운이 그런 수환을 난감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자신의 오메가를 지키기 위해 알파는 얼마든지 사나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수환은 필사적이긴 했지만 위협적으로 굴고 있진 않았다.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이 일어날 정도로 애달픈 몸짓이었다.
그의 품 안에 있는 승현은 두 눈을 감은 채 밭은 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미 스스로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숨을 내쉰 도운이 함께 온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 아무래도 다소 거친 방법으로 승현을 데려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싫어, 오지 마……. 싫어.”
패닉에 휩싸인 수환이 고개를 저으며 승현을 더 꽉 끌어안았다. 어떻게든 저 사람들에게서 승현을 지켜야 하는데, 도저히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싫어, 안 돼. 계속해서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슬피 우는 수환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올렸을 때였다.
“그만.”
“……!”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주변으로 확 퍼져 나갔다. 베타인 경호원들조차 순간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도운과 경호원들의 시선이 한 여인에게 향했다.
“대표님.”
도운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련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도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수환의 어깨에 손을 댄 경호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 동생한테서 손 치워.”
“그…….”
“치워.”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에 경호원이 희게 질린 얼굴로 손을 뗐다. 소리도 없이 걸어온 화련이 도운의 앞에 섰다.
“김 실장님.”
“…네, 대표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게…….”
도운이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진 회장의 비서로 일하면서 화련과도 적지 않게 만났지만, 오늘처럼 그녀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치 맹수의 새끼를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도운이 겨우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이승현 씨에게 히트 사이클이 오면 도련님에게서 떨어트려 병원에 입원시키라고요.”
“…….”
“지금 바로, 이승현 씨를 병원으로 모셔야 합니다. 대표님.”
도운의 말에 화련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울고 있는 수환을 보자 화련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환아.”
“흑.”
수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화련이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승현을 껴안은 채 떨고 있던 수환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님.”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낸 화련이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눈물로 젖은 뺨을 조심스럽게 닦으며 화련이 입을 열었다.
“수환아, 진정하고 내 말을 들으렴.”
“읏.”
“너희는 아직 어려. 그러니 오늘 일을 언제든 후회할 수가 있단다.”
화련의 차분한 말을 들으며 수환이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뚝, 하고 밑으로 떨어졌다. 울음을 삼키던 수환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싫어요…….”
“수환아.”
“싫어요, 누님…. 제발 승현이를 뺏어 가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제발…….
간절하게 애원하는 목소리에 화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곧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혹시 이미 각인을 한 것이 아닐까. 단순한 애착 관계로 거부하는 것치고는 과한 반응이었다.
표정을 굳힌 화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도운의 앞에 섰다.
“김 실장님.”
“네, 대표님.”
아무래도 수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화련은 한숨을 삼키며 도운에게 말했다.
“애들 그냥 보내죠.”
“하, 하지만…….”
화련의 말에 도운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여자인 화련은 알파이지만 베타인 도운보다 키가 작았다. 그런데 왜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드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기운에 짓눌리며 도운이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
“윽…….”
진 회장을 언급하자 화련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도운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금방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 같은 것을 도운은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참았다.
“김 실장님이 회장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거, 나는 정말 좋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 합니다.”
느긋하게 손을 뻗은 화련이 도운의 넥타이를 잡았다. 그리고 섬세한 손길로 조금 느슨해진 넥타이를 바로 매 주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봐요.”
“…….”
“회장님은 아직 정정하시지만…… 혹시 또 모르지 않습니까. 사람 일이란 게.”
“……대표님.”
“다음 대의 화명을 누가 이끌지,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
툭, 하고 어깨를 스치는 손길은 가벼웠다. 하지만 도운은 마치 돌덩이가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화련은 아직 화명 계열사의 대표일 뿐이지만, 곧 그녀가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또한 그녀와 같은 승계권을 가진 다른 알파 역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미래의 화명은 바로 이 두 알파에 의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도운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긴장한 얼굴로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 도운의 눈짓에 그들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수환과 승현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 봐도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비록 진 회장에게 호통을 들을지언정, 지금은 일단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어깨를 짓누르는 알파의 기운에 힘겨워하면서 도운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곧 화련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수환과 승현에게 향했다. 오메가의 페로몬에 다리 힘이 풀린 데다, 자신의 오메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패닉을 일으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수환이 히트가 온 승현을 데리고 제대로 걸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메가와 각인한 화련은 승현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지만, 이미 이 주변까지 페로몬이 짙게 깔렸을 것이 분명했다. 눈살을 찌푸린 화련이 뒤에 그림자같이 서 있던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안 비서님, 아이들을 집에 들여보내 주세요. 무서워하지 않게 신경 써서요.”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표님.”
고개를 끄덕인 비서가 직원들과 함께 수환에게 다가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화련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게 정말로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불안정해 보이는 수환의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항상 남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알파. 하지만 그 알파라는 족속들은 약해진다면 한없이 약해질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다. 다름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오메가로 인해 말이다.
“후…….”
고개를 내저은 화련이 몸을 돌렸다. 자신의 역할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저, 저 아이들이 아프지 않게 최대한 보호할 뿐.
뒤를 돈 화련은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수환은 자신을 잡아 주던 손길이 없어지자마자 제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윽.”
현관 앞에 주저앉은 수환은 품에 안고 있는 이가 다치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꼭 끌어안았다.
머릿속까지 잠식하는 지독한 페로몬 향에 수환이 몸을 떨었다. 자꾸만 달콤한 냄새가 나는 몸을 발개진 눈으로 내려다봤다.
“……승현아.”
“…….”
승현은 여전히 대답 없이 두 눈을 꽉 감고 있었다. 그의 새하얀 얼굴을 바라보던 수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대로 본능에 휩쓸려 승현을 상처 입힐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을 짓이기자 찢어져 피가 났다. 수환은 피가 나는 입술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 억제제.”
승현이 재현에게 받았다는 약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걸 먹이면 승현의 상태가 조금은 괜찮아질 수도 있을 터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환은 승현의 방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한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고 멈추어 서야만 했다.
“으앗.”
발목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수환이 두 팔로 허공을 허우적대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승현아?”
“하…….”
승현의 손이 수환의 발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승현을 보다가 수환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정신이 들어?”
가만히 있던 승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주친 갈색 눈은 초점이 잡히지 않는 듯 멍하기만 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수환을 응시했다.
“형…….”
“읏, 승현아.”
진득한 감각이 수환의 몸을 휘감았다. 자석이 서로에게 이끌리는 것처럼, 수환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가지 마요…….”
“아.”
“제발…….”
애원하는 목소리가 귀속을 파고들었다. 수환은 자신이 절대로 그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탄식을 내뱉은 수환이 얼굴을 밑으로 내렸다.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수환이 손을 뻗어 발그레한 뺨을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농축된 향이 주변으로 확 퍼졌다. 억제하지 않은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순식간에 알파에게서 이성을 빼앗아갔다.
고개를 숙인 수환이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새빨간 입술을 머금고 한껏 빨아올렸다. 향이 한층 더 강해진 오메가의 타액은 마치 꿀로 만든 것 같았다.
“하아, 으응.”
“흐읏.”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인지도 알지 못할 정도로 격정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막 들어온 현관 앞에서 뒤엉킨 두 사람의 몸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서로를 당겨 꽉 끌어안았다.
붉은 혀가 서로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혀가 입안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수환의 머릿속도 무언가가 빠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아. 정말 너무 기분 좋아.
자신의 오메가를 더욱 탐하고 싶다는 욕심이 수환을 머리끝까지 흥분하게 만들었다. 더는 욕망을 참지 못한 수환이 알파의 페로몬을 확 풀었다.
“하아, 승현아…….”
“아…….”
히트가 온 오메가에게 알파의 페로몬은 참기 힘든 유혹이다. 명백한 의미를 가진 달콤한 페로몬이 승현의 몸을 감쌌다. 열성의 형질로는 페로몬 샤워를 할 만한 양이 나오긴 힘들었지만, 수환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오메가에게 페로몬을 퍼부었다.
“읏, 형…….”
“승현아, 하아… 승현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서로의 페로몬으로 흠뻑 젖어 드는 감각은 단순한 육체적 자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아, 이게 바로 우성 오메가의 히트구나. 처음으로 겪는 일에 수환은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서로의 혀를 강하게 옭아매는 것을 마지막으로 수환은 그만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