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너,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화련은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분노하는 진 회장을 조용히 응시했다.
아니, 이제 곧 회장 자리에서 물러날 테니 회장이라는 호칭은 사치였다. 화련이 빙긋 웃음 지었다.
“좋은 곳에 별장을 알아놨습니다. 공기 맑은 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쉬시죠. 할아버님.”
“너……!”
진길영의 분노한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그가 화명의 회장으로 취임하고 30년이 넘게 흘렀다. 그 역시 회장 자리를 그렇게 오래 이어 갈 생각은 없었다. 정년이 훨씬 넘어도 꿋꿋하게 회장직을 유지한 건, 그를 이을 마땅한 알파 후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화련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손자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그를 계속 망설이게 만든 것이었다. 물론 그 조금의 기대마저 사라지긴 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손도 쓰지 못하고 무력하게 말이다. 이를 악문 진길영이 화련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체 주주들은 어떻게 설득한 거야. 그놈들을 어떻게 꼬드긴 거냔 말이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진길영을 화련이 싸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실 주주들을 설득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결정적인 건, 수환이 직접 승계권을 포기한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였다. 주주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화련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진길영 회장의 보수적인 면 때문에 주주들이 그를 꺼리던 것도 있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던 주주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 진길영은 자신이 주주들에게 내쳐진 이유를 평생 모를 것이다.
“내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것 같으냐? 어? 네 만행을 언론에 알려서라도 내가……!”
“한번 해 보시죠.”
화련이 들고 있던 서류철에서 종이를 꺼내 진길영의 앞에 흔들었다. 그걸 본 진길영의 두 눈이 커졌다.
“이, 이건……!”
“그동안 많이도 해 먹으셨더군요. 이걸 언론이 대대적으로 알게 되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너, 너……!”
진길영이 비리를 저지른 문서가 화련의 손안에서 팔랑거리고 있었다. 회장직을 오래 유지하고 있었던 만큼, 그가 저지른 비리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진길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화명 역시 타격을 받겠지만, 원상 복귀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한번 시험해 볼까요?”
“큭.”
저게 공개되면 진길영은 정말 끝이었다. 회장 자리를 유지하기는커녕 언론의 뭇매를 맞고 쫓겨날 것이다. 명예 회장에 이름도 올리지 못하고 말이다.
이를 악문 진길영이 화련을 노려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독한 것.”
“제가 할아버님을 많이 닮아서요.”
서류를 내려놓은 화련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진길영이 그런 화련을 노려보다가, 피곤한 눈가를 주물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HS의 과거를 캐고 있지?”
“…….”
진길영의 물음에 화련은 아무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지못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길영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거 그만둬라.”
“……?”
“그만둬. 그거만 확답하면 나도 순순히 물러나마.”
“어째서입니까?”
화련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으나, 진길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할아버님!”
서로를 노려보는 눈이 제법 매서웠다. 물러서지 않고 대치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알파의 페로몬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진길영 쪽에서 먼저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그간 스트레스 때문인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페로몬을 내뿜는 걸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화련 역시 진길영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흐르자 얼른 기운을 갈무리했다.
“……주 회장은 무서운 사람이다.”
“주 회장이요?”
주 회장? 주성혁 회장? 한성을 말하는 건가?
설마…….
화련의 얼굴에 경악한 빛이 스쳤다.
“쿨럭쿨럭.”
“할아버님!”
놀란 화련은 기침을 내뱉기 시작한 진길영의 곁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안색이 나쁜 진길영을 내려다보던 화련이 도운을 불렀다.
곧 화련은 도운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가는 진길영의 뒷모습을 어두운 눈으로 응시했다.
주 회장, 한성의 주성혁 회장.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화련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
“그러고 보니 승현아, 병원은 잘 다녀왔어?”
“…….”
“응?”
스테이크를 먹고 집으로 돌아온 수환은 문득 생각나 물었다. 원래는 만나자마자 물었어야 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너무 반가운 나머지 까먹고 말았다. 승현도 자신에게 말하는 걸 잊었었나 싶어서 물었는데,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왜 그래? 병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히트 사이클 때의 승현은 아무래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몸에 큰 이상이 생겼나 싶어 걱정되었다. 수환의 초조한 눈길을 받은 승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 그게.”
“응, 어서 말해 봐.”
왜인지 머뭇거리던 승현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승현의 이야기를 들은 수환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야?”
“네, 죄송해요.”
“그게 왜 네가 죄송할 일이야.”
고개를 내저은 수환이 손을 들어 굳어 있는 승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했는데. 남들과 다른 짓을 한 결과가 이렇게 되돌아오다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처음엔 승현을 상처 입히기 싫어 받아들이는 쪽이 된 거지만, 시간이 갈수록 걷잡을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심지어 나중에는 자신 쪽에서 먼저 조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자신이 했던 부끄러운 짓들을 떠올린 수환은 조용히 얼굴을 붉혔다.
그러니 서로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승현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신도 분명 동의했었고, 같이 실컷 즐기기까지 했다. 이런 걸로 승현을 원망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자신은 검사도 하지 않았으니, 결과가 어떨지 모르지 않는가. 섣불리 판단해서 다툴 일이 아니었다. 수환이 애써 밝은 얼굴로 말했다.
“괜찮을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
“같이 가서 검사받아 보자. 응?”
“네.”
그러나 아무리 수환이 밝은 목소리로 말해도 승현의 굳은 얼굴은 도무지 풀어지지 않았다. 수환이 승현의 볼을 쓰다듬던 손짓을 멈추고,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나는 너에게 안긴 거 후회 안 해. 무슨 일 있어도.”
“…….”
“너는 안 그래?”
“저는…….”
마주친 금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빙의한 자신과 만난 이후, 승현이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는 걸 본 적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던 자신과 달리 놀라울 정도로 의연했던 승현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힘겨워하는 이유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때문이라는 게 마음 아프기도 하고,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술렁거리기도 했다.
“미안해요. 무서워서 그랬어요. 나 때문에 형이 잘못될까 봐.”
“승현아.”
“상상만 해도 미칠 것 같아요. 형이 정말로 잘못되면 나는…….”
알파와 오메가는 페로몬에 민감한 존재였다. 자칫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승현의 얼굴이 더더욱 하얗게 질려갔다. 끔찍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승현아, 나 봐 봐.”
“…….”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응? 왜 벌써부터 안 좋은 생각만 하고 그래.”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에 승현의 굳은 얼굴이 점점 풀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표정이 딱딱해 보였지만, 승현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수환을 마주 보았다.
“하아. 미안해요. 그냥 걱정돼서…….”
“아직 검사도 안 받았는데 나쁜 생각부터 하지 말자.”
“네.”
수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승현의 얼굴에 콩, 하고 이마를 살짝 박았다. 승현은 아직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잔뜩 풍기고 있는데, 왜인지 자꾸 웃음이 나왔다. 승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실실 웃고 있는 수환을 쳐다봤다.
“그렇게 예쁘게 웃지 마요.”
“내가 언제 예쁘… 게 웃었다고.”
가끔 승현의 미적 감각이 의심되었다. 귀엽다니, 예쁘다느니. 자신에게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을 매일 쉴 새 없이 내뱉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 분명 너뿐이야.”
“아닐걸요.”
“내 말이 맞…… 으음.”
수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승현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단번에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조급한 입맞춤에 수환의 몸이 점점 뒤로 밀려났다. 승현의 뺨을 감싸던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 승현, 음.”
“하아.”
뒷걸음질 치던 수환의 발이 무언가에 탁 걸렸다. 그리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 침대 위에 쓰러진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승현과 키스하며 몸이 떠밀려 침실까지 온 것이었다.
조금 놀랐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승현의 혀를 휘감았다. 이미 너무 흥분해서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황홀한 기분을 느끼며 승현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꾹 눌렀을 때였다.
“형.”
“응?”
입술을 뗀 승현이 나지막이 수환을 불렀다. 수환은 열기를 띤 눈으로 승현을 응시했다. 조금 머뭇거리던 승현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이만 자요. 내일 병원 가야 하니까.”
“어…….”
“검사받기 전에 무리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한데.”
뭐라 말하기도 전에 승현이 수환의 몸을 이불로 둘둘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환은 꼼짝도 못 하는 상태가 되어 얼굴만 내놓고 눈을 깜박였다. 승현이 얼른 옆에 누워 수환의 몸을 껴안으며 말했다.
“어서 자요.”
“으응.”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승현과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된 이후로 정말 잠만 잔 날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괜히 여기서 티를 내면 너무 난감해질 것 같아서였다. 수환은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애썼다.
“…….”
그런 수환을 내려다보는 승현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직 불안을 떨치지 못한 그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는 수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수환은 병원에 가는 걸 화련에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괜히 걱정시킬 수도 있으니, 우선은 잠시 숨기기로 했다. 만약 검사했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되레 민망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수환은 자신보다 더 긴장하고 있는 승현의 손을 꽉 잡았다.
“우선은 간단한 검사만 몇 가지 진행하겠습니다. 여기 문진표 작성 부탁드립니다.”
“네.”
“문진표 작성 후에 채혈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 네.”
수환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문진표를 작성하고 채혈실에 가서 피를 뽑았다. 그리고 페로몬 수치를 재기 위해 다른 검사실에도 들어갔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 끝나고 초조하게 앉아 있는 승현에게 돌아갔다.
“승현아, 다 끝났어.”
“형.”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승현이 수환에게 다가왔다. 걱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승현이 손을 뻗어 수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아무 일 없었어요?”
“그냥 검사만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겠어.”
“그래도.”
“흠흠.”
헛기침을 한 의사가 자리에 다시 앉으라는 듯 두 사람을 응시했다. 수환이 얼굴을 붉히며 승현의 손을 잡아 끌어 내렸다. 다시 자리에 앉은 후 의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사 결과는 내일 나옵니다만, 휴일인 관계로 월요일에 다시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 혹시 한 명만 와서 들어도 될까요?”
“네, 그러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수환이 생긋 웃었다. 승현은 다음 주부터 시험이 시작되어 바쁠 터였다. 물론 수석 입학한 인재인 승현이니 병원에 오는 몇 시간 동안에 공부하지 않는다고 타격을 많이 받진 않겠지만, 수환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형, 나도 같이 올래요.”
“안 돼. 공부해야지.”
“하지만.”
“너는 진짜 오늘부터라도 독서실에서 돌아올 생각 하지 마. 알았지?”
아무리 유능한 인재라고 해도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것 같았다. 수환은 이번 주 내내 자신의 회사 앞으로 마중 나온 승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음 주부터 시험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 있는 태도였다. 수환은 이제야 조금 위기감이 들었다.
“빨리 대답해.”
“……알았어요.”
마치 야단을 맞은 아이처럼 승현이 얼굴을 푹 숙였다. 수환은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하지만 꾹 참고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를 보던 승현이 수환의 손을 꽉 잡았다.
“걱정되니까 검사 결과 들으면 바로 연락해야 해요.”
“응, 그럴게.”
“꼭이에요.”
“알았다니까.”
거듭 대답했는데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승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환은 그런 승현을 달래며 의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
***
주말 동안 진길영 회장이 공식적으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발표를 했고, 발 빠르게 화련의 회장 취임식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국내외 안팎으로 그 일 때문에 한껏 시끄러워졌지만, 정작 당사자인 화련은 그다지 실감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비서가 건네준 자료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걸로는 한성과 HS를 연관 짓기 힘들다는 겁니까.”
“네, 만약 사실이라면 주 회장이 완벽하게 은폐한 것 같습니다.”
“후우.”
화련이 한숨을 쉬며 피곤한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진길영은 주 회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경고했다. 분명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건데, 진길영은 끝까지 말하길 거부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도 대충은 어떻게 된 건지 유추할 수 있었다. HS가 부도나고 얼마 후, 한성은 갑작스럽게 바이오산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개발한 약이 국내에서 꽤 히트를 쳤는데, 지금 보니 약 성분이 조금 다를 뿐 논란이 되었던 HS의 신약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대체 이걸 왜 이제야 알아챈 거지. 게다가 HS에 투자했다가 투자금을 회수했던 회사 중 하나가 서류에만 존재하는 페이퍼 컴퍼니였다. 그 실체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것 역시 한성의 짓이었단 말인가. 화련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만약 아직도 주 회장이 HS를 주시하고 있다면, 지금 만들고 있다는 신약에도 마수를 뻗칠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화련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비서님. 주말이라 죄송하지만, 이재현 교수님에게 연락을 취해 주십시오.”
“연신 대학 교수님 말입니까? 그분은…… 수환 도련님의 약혼자 형님분 아니십니까?”
“네. 실험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마시고, 아이들 약혼 건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전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재현은 지금까지 여러 기업에서 투자 제의를 받았지만, 하나같이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아마 과거 HS가 부도났던 일로 재벌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이겠지. 화련은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우선은 약혼 건을 핑계로 만나서, 그를 설득해야 했다. 이대로 계속 신약을 개발하게 하는 건 위험했다. 주 회장이 이번에는 어떤 짓을 벌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성 쪽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계속 뒤를 캐 주세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비서가 대표실을 나갔다. 이제 곧 본사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정리된 대표실 안은 좀 휑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서 화련은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주말이 지나고 승현은 수환이 닦달한 대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본인 역시 그동안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걸 자각한 건지, 알바도 쉬고 공부에 매달렸다.
수환은 티는 내지 못했지만 조금 외로웠다. 주말을 승현 없이 혼자 보내는 건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걸 승현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꾹 참고 월요일이 되자 회사에 출근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병원에 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십니까.”
차분한 인상을 가진 의사가 수환이 적었던 문진표를 꺼냈다. 그리고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을 열었다. 곧 컴퓨터 화면 위에 무언가가 떴다. 아마도 수환이 검사했던 결과가 나온 자료인 것 같았다. 수환이 조금 긴장하며 문진표와 화면, 그리고 의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우선.”
“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아, 네.”
저번에는 거침없이 이것저것 물었던 의사가, 오늘은 왠지 조금 머뭇거리며 뒷말을 보탰다.
“성적으로 조금 예민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
수환은 조금 의아해하다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엉뚱한 걸 묻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환은 그 결정을 조금 후회했다.
“혹시…… 같은 알파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으십니까?”
“네?”
“그러니까…… 받아들이는 쪽으로 말입니다.”
“…….”
의사의 말을 이해하는 데 수환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버퍼링이 걸린 머릿속으로 의사의 질문이 천천히 입력되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같은 알파와 섹스한 적이 있냐고 물은 거지? 게다가 포지션이…….
곧 의사의 말을 이해한 수환이 펄쩍 뛰었다.
“아뇨!”
“그러시군요.”
“저, 저는 오메가와… 밖에…….”
당황하며 말을 잇다가 수환이 멈칫했다.
자신은 당연히 빙의하고 나서 승현이랑만 관계했다. 다른 사람과는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진짜 진수환은? 진수환도 그랬을까?
순간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알파가 같은 알파에게 성적으로 흥미를 가졌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깔리는 쪽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수환은 더더욱 확신하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그런 적 없어요.”
“알겠습니다.”
의사가 애써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환은 긴장하며 그를 쳐다봤다. 이번엔 또 어떤 말을 할지 불안할 정도였다.
이윽고 다시 의사의 입술이 열렸다.
“다름이 아니고, 진수환 씨의 페로몬 수치가 이상할 정도로 낮기 때문에 질문드렸습니다.”
“제 페로몬 수치가요?”
“네.”
고개를 끄덕인 의사가 화면 위에 자료를 띄우며 계속 말했다.
“참고로 파트너인 이승현 씨께서는 반대로 페로몬 수치가 지나치게 높게 측정되었습니다.”
수환의 눈이 화면을 향했다. 수환과 승현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밑에 그래프 모양이 떠 있었다. 그래프는 왼쪽이 파란색, 오른쪽으로 갈수록 붉은색을 띠었다. 수환의 그래프는 파란색에 치우쳐진 반면에 승현의 그래프는 붉은색 끝에 가 있었다.
“보통 페로몬 수치가 40에서 60 사이에 들어야 안정적이라고 여겨집니다. 40 이하로 떨어지면 열성, 60 이상이 되면 우성이라고 말을 하죠. 그런데…….”
의사가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프 밑에 적힌 숫자를 보니, 자신의 것은 10에 가까웠고 승현은 90에 가까웠다.
“이렇게까지 극과 극의 페로몬 수치를 보는 건 저도 처음입니다. 각각의 수치로만 봤을 때도 심상치가 않죠. 외국에서는 이런 수치를 극우성, 극열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국내에서는 확인된 바가 없었습니다.”
“아.”
“그래서 두 분께 우성 알파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여쭤본 겁니다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군요.”
의사의 조용한 말이 수환의 귀를 파고들었다. 외국의 사례를 말하는 의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는 극우성 오메가와 극열성 알파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한 극우성 오메가는 우성 알파와 관계하면서 페로몬 수치가 이상할 정도로 치솟아 올랐고, 반대로 극열성 알파가 된 사람은 이상 성욕자로, 같은 알파와 관계를 맺었다가 페로몬 수치가 급격하게 하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가 자신과 승현에게 그런 질문을 한 거였다. 둘 다 그게 아니라고 하니 의아해했던 거고 말이다. 수환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남은 이유는 한 가지뿐입니다만. 솔직하게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수환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의사의 시선을 담담하게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그의 입에서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혹 두 분이 관계하실 때, 포지션을 바꿔서 하셨습니까?”
“…….”
말로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수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별다른 제스처 없이 무감정하게 질문을 이었다.
“그렇게 잠자리를 가진 비율이 어떻게 됩니까?”
“그…….”
하지만 이번엔 말하지 않으면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수환이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대답했다.
“계속 그렇게만 관계했어요. 쭉.”
“그 기간이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한 달…… 좀 넘었어요. 러트와 히트도 그런 식으로…….”
“아하.”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과연, 수치가 이렇게 나올 만하군요.”
수환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의사의 어조는 무덤덤해서 자신들을 비난하거나 꾸짖는 걸로 들리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뒤숭숭했다. 꼭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승현에게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막상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니 도무지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수환이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물었다.
“저희가 지금…… 심각한 상태인 건가요? 딱히 어디 아프거나 하진 않았는데.”
“페로몬의 변화가 즉각적으로 몸에 반영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분도 계시지만, 아닌 분들도 계시죠.”
안경을 추켜세운 의사가 이번에는 책상 위에 있는 차트를 넘겼다. 그리고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검사상으로 두 분에게 별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관계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아.”
“우선은 두 분께 페로몬 조절 약을 처방해드리죠. 그리고, 앞으로는 되도록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는 걸 권고합니다.”
“네.”
수환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정상적인 관계.
그 말 하나로 승현과의 관계가 전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들이 옳지 못한 짓을 해서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처방받은 약을 받고 병원을 나왔는지 수환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점심시간이 끝나는 아슬아슬한 시간에 회사에 도착해서 사무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 수환 씨, 병원 잘 다녀왔어요?”
“…….”
“점심은 먹었어요? 그냥 반차 쓰지 왜 굳이 점심시간에…….”
밝은 어조로 말을 잇던 윤현이 아무 말 없는 수환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의 안색이 나쁜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 있었어요? 병원에서 뭐라고 했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멍하니 윤현의 말을 듣던 수환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할 정도로 격한 반응이었다. 윤현이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수환은 마실 걸 가져오겠다고 말하며 도망치듯 탕비실로 향했다.
“하아.”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탕비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수환이 다급하게 개수대에 다가갔다.
“우욱, 윽.”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런지 쓴 위액만 쏟아져 나왔다. 수환이 괴로워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때, 가슴 안쪽 포켓에서 진동이 울렸다.
“하아, 하.”
숨을 몰아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승현이♡]
원래는 ‘이승현’이라고 저장되어 있던 이름을 수환이 몰래 ‘승현이’라고 바꾸었고, 사귀고 난 후 그걸 본 승현이 조금 서운해했다. 승현은 자신의 연락처를 ‘자기야♡’라고 설정해 놨었다.
그래서 눈치를 보다가 뒤에 몰래 하트를 붙였다. 진작에 그걸 승현에게 들킨 줄도 모르고 혼자 보면서 실실 웃었던 기억들이 수환을 아프게 찔렀다.
승현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분명 검사 결과가 어떨지 물을 텐데. 그때 의사가 했던 조언을 그대로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신호가 다 되어 연락이 한 번 끊겼다. 그리고 끊기자마자 다시 전화가 왔다. 수환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어, 승현아.”
―여보세요? 형?
“응, 나야.”
―병원 다녀왔어요?
“응.”
수환의 기운 없는 목소리를 승현이 기민하게 알아챘다. 승현이 다소 뾰족해진 말투로 물었다.
―왜요? 결과가 안 좋았어요? 어디 안 좋은 거예요?
“아니야. 멀쩡하대.”
―근데 왜…….
목소리가 그러냐고, 듣지 않아도 승현의 뒷말을 알 수 있었다. 수환은 차마 지금은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정상적인 관계. 그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거기에 더해 우성의 형질을 가진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화련의 말도 뒤섞였다.
―형?
“아.”
승현의 부름에 수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회사예요? 퇴근 시간에 내가 갈 테니까.
“아니야. 그러지 마. 공부해야지.”
―하지만…….
“이따가 집에 가서… 다 말해 줄게. 시험 잘 봐.”
―……알았어요.
머뭇거리던 승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은 뭐라고 말해도 수환이 사실을 얘기하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든 것 같았다.
전화를 끊자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개수대에 또 위액을 쏟아 냈다. 얼굴을 찌푸린 수환이 개수대의 물을 틀고 한숨을 내쉬었다.
승현에게 숨길 수는 없었다. 숨기고 싶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계속 이렇게 관계를 이어 나가면 더 큰 일이 날지도 모르니까.
“하아.”
고개를 들자 핼쑥한 얼굴의 남자가 보였다. 수환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환이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승현도 집에 왔다. 얘기만 나누고 바로 독서실에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게.”
머뭇거리던 수환이 결국은 의사에게 들은 걸 모두 털어놓았다. 문제의 ‘정상적인 관계’를 언급하면서 조금 울먹거리기도 했다. 수환은 말을 모두 마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승현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기분이 좋다는 이유로 이대로 계속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면 서로의 페로몬 수치가 더 이상해져 몸에 이상이 올 수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포지션을 바꿔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 하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자 수환은 두려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수환은 자신의 몸에만 부작용이 오는 거라면 모두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승현이 아픈 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더더욱,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승현아, 나는…….”
“형.”
“응?”
수환이 뭐라 말하기 전에, 가만히 있던 승현이 입을 열었다. 수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병원에서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응.”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승현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수환은 조마조마한 기분을 느끼며 승현을 응시했다.
승현도 몸에 이상이 생기면서까지 자신과 관계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지션을 바꾸자고 하면…….
그러면 순순히 그러자고 할까? 차라리 헤어지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까? 수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간단한 문제잖아요.”
“간단한…… 문제?”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라 수환의 눈이 더 커졌다. 손을 뻗은 승현이 수환의 손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형이 날 안으면 되는 거잖아요.”
“……!”
승현이 혀를 내밀어 수환의 손가락을 핥았다. 찌르르, 머리끝까지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수환이 놀란 눈으로 승현을 쳐다봤다.
“전에 말했잖아요. 난 형한테 뒤 대줘도 상관없다고.”
“말… 하긴 했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난 이런 걸로 형이랑 헤어질 생각 전혀 없으니까요.”
진득한 시선이 수환의 몸을 옭아매었다. 왜인지 몸속 한구석이 저리듯이 아팠다.
“응? 시험해 볼래요?”
“…….”
검지와 중지 사이를 혀로 핥으며 승현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수환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
수환은 며칠 동안 내내 계속 멍했다. 눈은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데, 살피고 있는 페이지가 아까부터 그대로였다. 아침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던 윤현이 참다못해 수환에게 다가갔다.
“수환 씨, 괜찮아?”
“아.”
책상을 똑똑, 두드리는 손길에 수환이 놀라며 눈을 깜박였다. 그의 시선이 옆에 선 윤현을 향했다. 잠시 윤현을 쳐다보던 수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대리님. 죄송해요.”
“음.”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얼굴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며칠 사이 살이 더 빠져서 윤곽이 뚜렷해지고, 눈 밑에는 진한 다크서클까지 보였다.
고민하던 윤현이 흘끗 휴게실 쪽을 쳐다봤다. 아직 오전 시간대라 그런지 휴게실을 찾는 직원은 얼마 없었다. 윤현이 휴게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쉬러 갈래요?”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순간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결국 수환은 휴게실에 가겠다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휴게실 문이 닫히자마자 윤현이 다가와 물었다. 수환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고민이 있긴 하지만, 그걸 윤현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민망했다. 수환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자요. 캔 커피는 마실 수 있죠?”
“아, 네.”
수환은 반사적으로 윤현이 주는 캔 커피를 받았다. 쓴 걸 먹지 못하는 수환은 일반적인 커피는 마시지 못하지만, 달달한 캔 커피 정도는 마실 수 있었다. 윤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뭘요. 그거 마시고 정신 챙겨요.”
“네.”
캔 커피를 따고 한 모금 마셨다. 달짝지근하고 차가운 커피가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단맛은 강하지만 카페인이 진해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환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한번 말해 봐요. 혼자 끙끙거려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까.”
“그게.”
수환의 입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차마 말을 하지는 못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얼마 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전에 말했잖아요. 난 형한테 뒤 대줘도 상관없다고.’
‘응? 시험해 볼래요?’
그렇게 말한 승현이 페로몬을 확 풀었다. 수환은 그의 페로몬을 맡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짐승처럼 흥분해서 승현을 덮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페로몬 수치가 너무 낮아서 알파의 본능이 전처럼 강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수환은 그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 수환을 여전히 집착 어린 눈으로 보던 승현은 동기들에게 전화가 오고 나서야 다시 독서실로 돌아갔다.
혼자가 된 수환은 맹렬하게 고민했다. 솔직히 자신도 남자인데, 그쪽으로 전혀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승현과 있으면 동하지 않았다. 분명 본능을 거스르는 일인데도 말이다. 오히려 승현을 안는 게 꺼려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수환은 요새 들어 싸하게 아픈 아랫배를 저도 모르게 문질렀다.
“왜 그래? 또 배 아파요?”
“네, 좀.”
스트레스 때문인지 배가 자주 아팠다. 요즘 승현이 시험 때문에 바빠서 밥도 같이 잘 먹지 못하니까 속이 안 좋아서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그러면 몸에 더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승현이 자신을 챙겨 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좀 많아졌다고 해서 굶고 다니다가 주변에 걱정이나 끼치다니. 제 몸도 챙길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민망해졌다.
“요즘 자주 그러네.”
“그냥 몸이 안 좋아서, 그래서 멍한 것뿐이에요.”
“흠.”
보통 배가 아픈 건 스트레스 때문이라던데. 윤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혹시 오늘 시간 있어요?”
“네? 왜요?”
“아니, 저번에 회식 제대로 못 했잖아요. 오늘 끝나고 어때요?”
“근데 저 오늘 몸이 좀…….”
“술은 안 마셔도 돼요. 그리고 수환 씨는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아. 걱정되네.”
“아.”
수환이 캔 커피를 쥔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윤현의 상냥한 말투는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해요.”
“내가 소화하기 편한 음식으로 알아볼게요.”
“감사합니다.”
희미하게 미소 짓던 수환은 문득 생각나 핸드폰을 꺼냈다.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승현은 시험 기간이니 당연히 바쁜 거겠지만, 그래도 틈틈이 메시지는 남겼었다. 어쩐지 그날 이후로 사이가 서먹해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시험 치는 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밖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가겠다는 메시지만 간단하게 남겼다.
퇴근할 때까지 승현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
“안녕하십니까, 이재현 교수님.”
“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
재현의 나직한 인사에 멈칫한 화련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회장은 아닙니다.”
“그래도 취임식이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까요.”
애써 무덤덤하게 대답한 재현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화련을 바라보았다.
화련의 비서에게서 처음 연락이 왔을 때, 재현은 조금 당황했다. 무려 화명의 차기 회장이 만나자고 한 거였다. 아무리 재현이라고 할지라도 당황스럽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만나야 할 사이기도 했다. 화련은 동생이 약혼한 수환의 사촌 누나였다. 실제로는 어렸을 때 한집에 살아서 친누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했다.
‘그런데…… 둘이 꽤 닮았군.’
사촌이라고 하더니 같은 핏줄에, 심지어 같은 알파라 그런지 성별이 다른 화련과 수환은 친남매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았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수환이 스쳐 지나갈 듯이 느껴지는 정도의 서리 같은 차가움이라면, 눈앞의 화련은 그냥 빙하였다. 마치 꽝꽝 얼어 있는 얼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산한 느낌이 드는 인물이라 절로 위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회장이 되시는 걸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겉치레뿐인 인사에 화련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웃으니 더욱 닮은 것 같다. 재현은 이상할 정도로 화련에게서 수환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설마 수환의 혈육에게서 친근함이라도 느끼고 싶은 건가? 순간 든 생각에 재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교수님? 어딘가 불편하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신 겁니까? 아이들 약혼 건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는데.”
재현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말끝을 흐렸다. 막상 약혼을 요구할 때는 얼굴도 보려고 하지 않았으면서, 왜 이제야 다들 자기를 못 봐서 안달인지.
그러다 언뜻 어두운 생각도 스쳤다. 수환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만남을 요청했는데, 화련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만약 약혼을 없던 일로 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거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재현은 멈칫했다. 자신 역시 승현이 그런 소문 좋지 않은 알파와 맺어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둘을 헤어지게 할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럴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지자 이상하게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줬다가 뺏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재현은 이 불편한 감정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고 인상을 찌푸렸다.
“꼭 한 번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일전의 약혼 건이 교수님에게는 불쾌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환…… 씨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 아이와 만나셨군요.”
“네.”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재현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 아이’라는 호칭은 어쩐지 좀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수환이가 승현 씨를 많이 좋아하더군요.”
“뭐, 승현이 놈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정식집의 일이 떠오른 재현이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화련이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약혼 기간이 좀 길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적어도 승현 씨가 졸업해야 식을 올릴 텐데, 약학대는 졸업이 좀 늦는 편이라지요.”
“네, 그런 편입니다.”
다른 학부는 4년이면 졸업이 가능하지만, 약학대는 그렇지 않았다. 6년 동안의 과정을 수료해야 했다. 앞으로 적어도 5년은 지나야 식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녀석들이 사고를 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음.”
화련 역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수환의 말로는 이번 히트 사이클은 무사히 넘어갔다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한집에 사는데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알고 계시는군요.”
“알 수밖에 없었죠.”
심드렁하게 대답한 재현이 티스푼으로 찻잔 안을 휘휘 저었다. 애초에 자신들은 동의한 적조차 없었던 약혼이었다. 동거한다는 것도 들은 적이 없다. 승현은 걱정을 끼치기 싫어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화명에서 입을 다문 건 꽤나 괘씸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뭐, 됐습니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같이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만, 이젠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신이 결사반대해 봤자 승현은 이미 그 아방한 열성 알파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팔찌까지 넘긴 거 보면 말 다 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앞으로가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차기 회장님.”
“…….”
뼈가 있는 묵직한 말에 화련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작은 찻잎이 떠 있는 걸 응시하던 화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은 그 일로 교수님을 뵙자고 한 게 아닙니다.”
“네?”
“신약을 개발 중이시죠.”
“……!”
재현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화명의 정보력이라면 얼마든지 신약 개발에 대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숨기고 동생의 약혼 건을 빌미로 만나려고 한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현의 못마땅한 기색을 알아챈 화련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교수님께서 신약 건으로 기업과 얘기 나누는 걸 싫어하신다고 들어서요.”
“하…….”
한숨을 내쉰 재현이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의 얼굴을 더욱 신경질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얇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순간 화가 나긴 했지만, 일단 화련의 말을 들어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재현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원래라면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화련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수환의 혈육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머릿속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용건을 말씀해 보시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생각을 정리한 화련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뭡니까?”
“신약을 HS의 이름으로 발표하실 예정이십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재현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재현은 차마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는 지금 개발하는 신약의 성공에만 매달리느라 그 이후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는 말이 더 맞았다.
과거 HS가 그렇게 된 건, 아버지와 연구원들이 만든 신약 때문이었다. 환자들에게 투여하고 부작용이 일어나는 바람에 HS에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되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그런데 어떻게 당당하게 HS의 이름을 내걸고 신약을 발표할 수 있을까. 재현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제가 괜한 걸 여쭤 봤군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안색이 창백해진 재현을 보며 화련이 한숨을 삼켰다. 이제부터 할 얘기를 재현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 긴 세월 동안 부당한 처우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았을 텐데. 기만당한 과거 역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히려 사실을 숨기는 게 더 큰 기만이 될 테니까 말이다. 화련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과거 신약의 부작용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확실합니다.”
“뭐… 라고요?”
“먼저 이걸 보시죠.”
화련이 준비한 자료를 내밀었다. 멍하니 서류철을 바라보던 재현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섬세하고 긴 손가락이 서류를 받아 한 장 한 장 뒤로 넘겼다. 서류의 내용을 확인할수록 그의 눈은 동그랗게 떠졌다.
“이, 이게 무슨.”
서류를 보는 재현의 손이 덜덜 떨렸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이 안에 담겨 있었다.
과거 HS의 신약을 개발했던 연구원들이 죽거나 실종되고, 임상 실험 후 공정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정황들, 그리고 투자금을 회수한 페이퍼 컴퍼니의 일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평생을 연구에만 매달려 사업에 대해 잘 모르는 재현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HS가 부도났던 게 모두…… 조작된 거였다고요?”
“그렇습니다.”
“왜… 아니, 누가 그런. 대체 왜…….”
충격받은 얼굴로 재현이 몸을 떨었다. HS가 그토록 미움을 받았었나? 회장인 아버지에게 누군가 억하심정을 품은 건가? 하지만 그게 한 기업을 망하게 할 정도로 커다란 분노였나?
어째서?
그 물음만이 재현의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화련은 그런 재현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력한 용의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재현이 애써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화련 역시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며 대답했다.
“한성의 주성혁 회장입니다.”
“……!”
아, 재현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채 나오지 못한 신음이 그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심상치 않은 그의 기색에 화련이 눈살을 찌푸렸다.
“교수님?”
“하아.”
고개를 숙인 재현이 제 손으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 같이 연구하던 연구원 중 한 명이 한성에서 투자 제의가 들어왔다고 말하더군요.”
“한성에서…….”
“평소 신뢰하던 포닥이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진지하게 검토하던 중이었습니다.”
재현의 연구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특히 이번 신약은 학부생들에게는 맡길 수 없는 중요한 연구였다. 그 때문에 박사 과정을 밟은 연구원은 재현에게 귀중한 인재였다. 그런데 그런 연구원에게 한성이 먼저 접근한 것이었다.
역시 벌써 마수를 뻗치고 있었구나. 화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마 그 연구원은 한성에 매수된 사람일 것이다. 한성은 HS를 망하게 한 후에도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재현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화련은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성혁 회장의 짓이라는 건 아직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찾아서, 화명이 HS의 누명을 씻겨드리겠습니다.”
“…….”
“그러니 저희를 믿고 신약을 맡겨 주십시오.”
재현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화련을 마주 보았다. 지금 보니 화련과 수환은 닮은 점이 더 있었다. 바로 눈이었다. 눈매가 날카로운 것도 닮았지만, 더 비슷한 건 눈동자였다. 재현은 그녀가 맑은 눈을 가진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화명과는 곧 사돈을 맺게 될 사이다. 애초에 자신이 어디에 의지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알겠습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주신다니, 제가 더 감사드려야죠.”
재현의 손안에서 서류가 구겨졌다. 대체 한성이 자신들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들이 한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작게 이를 가는 재현을 보며 화련이 말을 이었다.
“신약을 개발하기 전까지 교수님을 보호할 예정입니다.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따라 주신다면 좋겠군요. 함께 연구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한성을 추천한 그분은…….”
“정리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업이 아닌 대학교의 랩실에는 연구원이 얼마 없다. 막바지 단계라고 해도 인력이 부족할 텐데, 한성과 연이 있다고 해서 쫓아낸다면 실험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었다.
“원하신다면 저희 쪽에서 연구원 인력을 충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승현이 놈 시험이 끝나면 부려 먹을 거라서요.”
“아…… 그렇군요.”
형제가 나란히 천재라더니. 화련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재현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두 사람은 서로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의 이유로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묘하게 밝은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화명과 HS가 협력하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