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수가 이물질에게 집착하는데요 4권
이물질은 메인수와 행복해지고 싶다
1.
화명의 새로운 회장이 취임했다. 화명 계열사 호텔에서 그녀를 환영하는 취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취임식이 끝난 후, 화련은 곧바로 본사에 입성했다. 취임 첫날부터 임원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기보다는, 직접 본사의 부서를 둘러보며 직원들과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경영기획팀 부서였다. 본사의 핵심 부서인 데다 임원진을 배출하는 곳이기 때문에 화련 자신도, 그리고 진길영 전 회장도 거쳐 갔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사촌 동생이자, 한때 경쟁자였던 이도 이 부서에 있었다.
몇몇 직원들은 해맑은 얼굴로 서 있는 수환을 흘끗거렸다. 화련의 가족이지만, 아직 일개 직원이기 때문에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못한 수환은 이렇게 먼발치에서나마 화련을 보는 게 기뻤다. 그런 수환을 보며 직원들이 작게 속삭였다.
“웃고 있는 것 봐. 밸도 없나 봐.”
“곧 지방 쪽으로 좌천당하는 거 아냐?”
“설마, 그렇게까지 하시려고.”
그건 좀 너무하지, 라고 하는 뒷말에서는 웃음기마저 느껴졌다.
진화련 회장이 유일한 경쟁자였던 어린 사촌 동생을 어떻게 할지, 벌써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예전부터 둘의 사이가 나쁜 건 유명한 얘기였다. 게다가 수환은 소문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를 감싸기 급급했던 진길영 회장과 달리, 화련은 단호하게 수환을 내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비록 승계권을 포기한다고 했지만, 이제 막 회장의 자리에 오른 화련에게 있어서 수환의 존재는 언제든 숨통을 조일 수 있는 불온한 싹에 불과할 것이다.
“잘 부탁합니다.”
“예, 회장님.”
경영기획팀 상무와 짧게 인사한 화련이 넓은 부서를 휙 둘러보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화련을 바라보던 직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화련이 그 모습을 보다가 누군가를 찾는 듯 눈을 움직였다.
“이제 다른 부서에도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비서가 다가와 속삭였다. 뒤에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기에 시간이 별로 없었다. 화련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새로운 화명을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보다는 제가 더 정신을 차려야 할 테지만요.”
화련의 농담 섞인 말에 직원들이 숨죽여 웃었다. 상사의 재미없는 농담에 맞춰 주는 건 당연한 일인데, 어쩐지 화련에게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나왔다. 무게감 있는 어조로 말하면서, 어울리지 않게 긴장을 버리라는 듯 배려하는 말투였기 때문이었을까. 회장을 대면한 것치고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운을 뗀 화련이 멀리 서 있는 사람을 흘끗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몇몇 직원은 긴장해서 절로 몸을 굳혔다. 화련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제 동생도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저를 도와 큰일을 할 아이니까요.”
“……!”
“그럼, 다음에 뵙죠.”
인사를 끝낸 화련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다수의 비서진이 우르르 따라 나갔다. 남겨진 직원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다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
화련과의 만남에 실실 웃기만 하던 수환은 직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당황했다. 화련이 자신을 직접 언급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가족이라고 챙기는 모습을 보자 그저 좋기만 했다.
하지만 화련의 말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정적이었던 수환을 품고, 임원으로서 키우겠다는 말을 대놓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화명에서, 적어도 본사의 중심이 되는 부서에서 수환을 함부로 생각하는 직원은 앞으로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단한데.’
웬만한 신뢰가 없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니면 엄청난 대인배거나. 윤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수환의 진짜 성격을 알고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소문과 다르게 수환은 화련과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었다. 오히려 회장 취임 전까지 사이가 나쁜 척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 줄 대박 잘 섰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기만 했던 건데, 뜻밖에 큰 이득을 본 윤현이 수환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그에게는 수환이 번쩍거리는 황금색 동아줄로 보였다.
그렇게 대대적인 화련의 회장 취임은 끝이 났다.
***
중요 부서에 인사를 돌고 온 화련은 드디어 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화련의 이름을 새긴 명패가 그녀를 반겼다. 그걸 보던 화련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할아버님의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요.”
“예, 철저하게 없앴습니다.”
“좋군요.”
고개를 끄덕인 화련이 책상에 다가갔다. 푹신한 가죽 의자에 몸을 묻으며 묵묵히 보고를 들었다.
“HS 투자 건을 진행할 사원은 알아보셨습니까?”
“네, 여기 목록입니다.”
“음.”
HS에 투자하는 일은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적임자를 찾기가 유독 까다로웠다. 게다가 화련은 아직 본사 직원 중에 믿을 수 있는 심복을 만들지 못했다.
비서의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던 화련이 누군가의 이름을 보고 눈가를 좁혔다.
[차윤현 대리]
“이 사람은 수환이와 같은 부서군요.”
“네, 그리고 도련님이 인턴일 때부터 담당을 맡았습니다.”
“흠.”
부모가 판사, 변호사 출신이긴 하지만 청렴한 성격 탓에 재벌가와 인연이 별로 없는 집안이었다. 검사인 윤현의 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부모의 밑에서 자랐기 때문인가.
“괜찮군요.”
화련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참고 사항에 수환과 친하게 지낸다는 코멘트가 적혀 있기도 하고, 다른 직원들의 평도 나쁘지 않은 사원이었다.
“되도록 오늘 중으로 얘기가 끝나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HS의 일은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 아직 막 취임한 터라 할 일이 많긴 하지만, 한성이 또 손을 쓰기 전에 담당을 서둘러 정해야 했다. 화련의 마음을 바로 알아챈 비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수환은 퇴근할 때까진 기분이 무척 좋았다. 화련이 회장이 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멀리서 보는 게 다였지만, 화련의 멋진 모습에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갈 시간이 되니 슬슬 지난밤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술에 취해서 엉망인 꼴을 보인 데다 자제하지 못하고 승현과 밤을 보내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몇몇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하필이면 그만하려는 승현을 자신이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었다.
“하아.”
미쳤지, 정말. 아무리 욕구불만이어도 그러진 말았어야지.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한숨을 푹 내쉬고 사무실을 나왔다. 윤현은 부장에게 불려가더니 퇴근 시간이 되도록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의아했지만 예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기에 개의치 않고 먼저 퇴근했다.
“어?”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가슴팍 부근에 진동이 울렸다. 놀란 수환이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인을 확인한 수환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승현아.”
―형, 퇴근했어요?
“응.”
―저 지금 로비예요.
“뭐? 너 오늘 독서실 안 갔어?”
―오늘 시험 끝났어요.
“아.”
그러고 보니 승현이 아침에 남겼던 메모가 생각났다. 일찍 돌아올 거라고 한 게, 시험이 끝나서였구나. 수환이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험 잘 봤어?”
―덕분에요.
“응… 그래.”
독특한 뉘앙스의 대답이었다. 덕분에 잘 봤다는 건지, 아니면 망쳤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수환에게 승현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기다릴게요.
“알았어.”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킨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계속 걸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로비로 다가가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승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눈에 띄는 미인을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한 번씩 흘끗거리고 있었다.
“승현아.”
왠지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돌린 승현이 알 수 없는 눈으로 수환을 응시했다.
“형.”
“응?”
승현의 시선이 누군가를 찾는 듯 수환의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수환을 확인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
의아해하는 수환을 보며 승현이 싱긋 웃었다. 어딘가 안심한 듯한 모습에 수환은 계속 의문을 느꼈다.
“고생했어요.”
“아… 그래. 너도 시험 보느라 고생 많았어.”
얼굴을 끄덕이자, 다가온 승현이 수환의 손을 잡았다. 긴 손가락이 깍지를 끼며 빈틈없이 맞물리더니, 아무리 수환이라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힘으로 꽉 잡았다.
조금 아팠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수환을 향해 승현이 작게 속삭였다.
“어서 집에 돌아가요.”
수환은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집에 오는 내내 승현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꽉 쥐고 있는 손은 수환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오자 불이 반짝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에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며 수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밥은 먹었어?”
“…….”
“응?”
수환이 재차 묻자 승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늘한 갈색 눈이 수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형은요?”
“난 아직 안 먹었는데.”
“그럼 같이 먹어요.”
“그래.”
승현의 태도는 평소와 똑같았다. 말투도 부드럽고 다정했다. 하지만 어딘가 싸늘한 기운을 숨기지 못했다. 수환은 그와 먹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승현아, 저기.”
밥을 다 먹고, 거실 소파에 앉은 수환이 계속 눈치를 보다가 말을 걸었다. 그러자 승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수환을 지그시 응시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그러니까, 어제는 내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으나, 수환은 벌써 말문이 막혔다. 어제 자신의 추태가 다시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술에 취해서 승현에게 너무 못 볼 꼴 보였으면 어쩌지. 혹시 토하지는 않았을까?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거 아냐? 싸늘해 보이는 승현의 얼굴을 보며 수환은 안절부절못했다.
“그…… 내가 어제 집에는 어떻게 왔어? 사실 기억이 잘 안 나거든. 대리님이 데려다줬나?”
윤현이 화장실에 간 사이 칵테일을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 그러고 나서 떠오르는 얼마 되지 않은 기억들은 모두 침대 위에서의 일이었다. 수환은 어제 자신이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가 데리러 갔었어요.”
“네가? 술집까지?”
“네.”
“내가 그렇게까지… 민폐를…….”
술집에서부터면 거리가 꽤 됐을 텐데, 거기서부터 정신을 잃은 자신을 데려오려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수환이 놀라며 되물었다.
“혼자서 나 데려온 거야? 대리님은?”
“…….”
수환의 물음에 승현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수환이라도 승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까진 알 수 없어서 눈을 굴렸다. 그러더니 더듬더듬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추측하기 시작했다.
“내가 혹시 막 토했어? 아니면 이상한 행동 하거나. ……혹시 너한테 욕한 건 아니지?”
평소의 자신은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면 무슨 일을 했을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 몸의 주인은 진수환이었다. 혹시라도 술에 취해서 몸에 남아 있는 진수환의 인격이 되살아났을 수도 있었다. 수환이 끙끙대며 무표정한 승현의 얼굴을 살폈다.
“형.”
“응?”
“앞으로는 절대 밖에서 술 마시지 마세요.”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수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제 그 사람이랑은 왜 술 마시러 갔던 건데요?”
“그 사람? 대리님?”
“네.”
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은 분명 전부터 말했었다. 같은 알파라도 방심하지 말라고. 그런데 단둘이 술집에 가서 필름이 끊기도록 마시다니. 승현은 무엇보다 그 점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지 않았으면 그 알파가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줬을까? 아니, 그대로 호텔에 데려갔겠지. 역겨운 상상을 한 승현이 이를 으득 갈았다.
“그게, 원래는 같이 밥만 먹기로 했었거든? 근데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나 진짜 술은 안 마시려고 했었어. 처음엔 논알코올로 시켰거든. 근데 중간에 내가 대리님 걸 잘못 마셔 가지고.”
“…….”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수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술에 취한 자신이 승현에게 거슬리는 일을 했겠구나 싶었다.
진짜 다음부턴 술 마시지 말아야지. 이상하게 자신이 술을 마시면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뱉는 수환에게 승현이 가까이 다가와 한쪽 어깨를 꾹 잡았다.
“형, 제가 전에 뭐라고 했어요?”
“뭐가?”
“그 알파랑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
맞다. 승현이 그런 말을 했었다. 수환이 뒤늦게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윤현은 회사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직원이었다. 자신을 걱정해서 권유하는 말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러는 것도 일종의 사회생활이지 않나. 수환이 당황하며 변명을 내뱉었다.
“하지만 대리님은 내 사수고, 술집까지 갈 줄은 몰랐지만 밥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을 수…….”
“형.”
“응?”
“형이 어제 취해서 무슨 짓 했는지 알아요?”
“……?”
대체 뭘 했길래?
이제 수환은 승현의 대답을 듣는 것도 무서워졌다. 가까이 다가온 승현의 입술을 떨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마 내가 너…… 때린 건 아니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일을 겨우 입에 올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승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정말 미친 짓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승현의 입에서 어떤 기상천외한 말이 나올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정말로 승현이 내뱉은 말은 수환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가 짐작한 쪽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수환의 귀에 입술을 붙인 승현이 작게 속삭였다.
“기억 안 나요? 제 앞에서 다리 벌리고 자위했잖아요.”
“뭐?”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가서 그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다가 마주친 승현의 갈색 눈을 보며 찬찬히 말을 곱씹었다.
내가 술에 취해서… 뭘 해? 자…….
“뭐, 뭘 했다고?”
“흠… 이쪽 손이었나?”
“……?”
승현은 팔을 뻗어 수환의 오른쪽 손을 잡고 끌어 올린 뒤 자신의 입가에 댔다. 당황하고 있는 수환을 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 손으로는 자기 좆을 잡고,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
승현이 줄줄 내뱉는 수치스러운 말에 수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술에 취한 자신이 승현을 앞에 두고 민망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다리를 넓게 벌리고, 기분 좋다는 듯 신음하며…….
“으아악!”
표백 처리한 약품처럼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수환이 비명을 질렀다. 승현에게 잡힌 손을 발작적으로 빼내려고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승현이 힘을 줘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환이 상기된 얼굴로 승현을 쳐다봤다.
“내가… 그러니까, 그건 술에 취해서…….”
“다른 사람이 앞에 있었어도 그랬겠죠?”
“그건…….”
“분명 그랬을 거야.”
승현은 확신하는 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상냥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눈은 싸늘한데, 입꼬리만 올린 미소가 기괴해 보였다. 수환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형을 정말 어쩌면 좋을까.”
“읏.”
“응?”
승현은 손가락을 들어 수환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손가락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그냥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그시 바라보는 눈동자가 싸늘했다. 수환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아무리 수환이라도 그 이유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수환 역시 자신의 술주정이 기가 막히긴 마찬가지였다.
술에 취했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짓을……. 만약 승현이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윤현의 앞에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는 거다. 수환은 뒤늦게 그걸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하, 진짜……. 또 술을 마신다면 자신은 개다. 진수환보다 못한 쓰레기. 수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정말…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고.”
“…….”
“미안해.”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또 사과했다. 수환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밖에는 없었다. 고개 숙인 자신을 여전히 집요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분명 제가 전에 말했죠?”
“응?”
나직한 물음에 수환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러자 자신을 보고 있는 갈색 눈과 마주쳤다. 어쩐지 그 눈을 보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전화, 또 안 받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어요?”
“어…….”
그 물음에 수환은 꽤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막 사귀었을 때쯤, 건율의 페로몬에 공격당한 그날. 수환은 동아리 술자리에 참석하느라 승현의 전화를 받지 못했었다. 다음 날 승현은 한 번만 더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방 안에 가둬 둔다고 했었지.’
당시 수환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감금이라니. 그건 원작의 진수환이 메인수인 승현에게 했던 짓이었다. 그런데 승현이 자신에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잘…… 기억 안 나는데.”
“거짓말.”
모른 척하려는 수환에게 승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단히 잡고 있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수환이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승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마음 졸이던 차였다.
띠리링, 띠링…….
“…….”
“…….”
별안간 울리는 벨 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수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자신은 회사에서 막 퇴근해서 아직도 핸드폰이 매너 모드였다. 그렇다면 이 벨 소리는 승현의 핸드폰일 가능성이 컸다. 그걸 승현 역시 깨달았는지, 고운 얼굴이 팍 일그러져 있었다.
“전화 온 것 같은데.”
“…….”
“승현아?”
인상을 쓴 승현이 수환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하자, 일그러진 얼굴이 더욱 사나워졌다.
누구길래 저러지? 수환이 의아해할 찰나, 몸을 뒤로 돌린 승현이 전화를 받았다.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했…….”
―야! 시험 끝나면 바로 튀어 오랬잖아!
“하아.”
“……?”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을 기세로 흘러나왔다. 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수환이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였다. 고개를 갸웃하던 수환이 계속해서 짱알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재현이다. 수환은 반가운 마음에 귀를 쫑긋하며 승현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아. 그러게 중요한 시기에 포닥을 왜 쫓아내서 나한테 지… 아니, 난린데.”
―그렇게 됐다. 아무튼 급하니까 빨리 와. 알았지?
“아니, 이렇게 다짜고짜.”
한숨을 내쉰 승현이 싫다는 기색을 팍팍 내뿜으며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갑자기 다가온 수환이 승현을 대신해서 멋대로 재현에게 답을 해 버리고 말았다.
“저희 지금 갈게요, 교수님.”
“형!”
―어… 진… 수환 씨도요?
“네! 방해하지 않을게요.”
수환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이 연구실의 일손이 부족해 승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원작에도 있는 일이었다. 원작에서는 승현이 메인공인 주건율과 연구실을 찾아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승현의 곁에는 주건율이 아닌, 바로 자신이 있었다. 여기서는 자신이 원작의 메인공 못지않은 역할을 해 주어야 했다. 바로 믿음과 지지였다.
승현이 재현을 도와 무사히 신약을 개발할 수 있도록 충분히 내조해야 한다. 그런데 승현이 왜 연구실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원작과 달리 승현은 트라우마 같은 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유는 모르겠지만 승현을 다독여서 연구실에 보내는 게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수환은 떨떠름한 재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힘차게 외쳤다.
―뭐,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네! 곧 봬요, 교수님.”
그리고 승현이 당황하는 틈을 타 야무지게 통화 종료 버튼을 대신 누르기까지 했다. 뿌듯해 보이기까지 하는 수환의 얼굴을 승현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가?”
“난 간다고 안 했잖아요!”
승현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모처럼 시험이 끝난 데다, 내일부터는 주말이었다. 연인과 보내는 시간에 우중충한 랩실에서 밤새 카페인에 찌들어야 한다니,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환은 고개를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난 연구실 어떤지 궁금한데.”
“…….”
“조금만 구경하면 안 돼? 방해 안 하고 착하게 있을게.”
“…….”
마치 조르는 듯이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눈에 승현은 마음이 약해졌다.
젠장. 이를 바득 간 승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재현의 연구실을 찾아가는 동안 승현은 계속 입술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시험 끝나고 나서 실컷 놀고 싶었을 텐데, 그걸 방해받게 돼서 불만인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동기들과 술 약속 같은 건 없어 보였는데. 수환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수환도 탐탁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그때 승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농담이었겠지만, 방에서 나가지 말라는 말이라도 들었다면 한껏 당황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자신이 농담에 잘 대처하는 성격이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난감할 때가 많았다. 수환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 온 약학대 건물 안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별거 없죠?”
“아니야. 뭔가 신기해. 되게 차분한 느낌이 들어.”
“그냥 저녁 시간이라 사람이 없는 것뿐이에요.”
피식 웃으며 승현이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수환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감탄했다. 사실 승현의 말대로 다른 건물과 그다지 다를 건 없지만, 왠지 풍기는 느낌이 남달랐다.
“어라?”
그러나 연구실 쪽에 다다르자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복도를 막고 있었다. 수환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반대로 승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재현의 연구실이 있는 쪽 복도를 베타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굳은 얼굴로 지키고 서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게다가 다가가니 딱딱한 목소리로 물어보기까지 했다. 수환은 순간 말문이 막혀 놀란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어? 수환 씨?”
“……?”
동시에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환은 낯선 남자에게서 눈을 떼 뒤를 돌아봤다. 의외의 인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차 대리님?”
“수환 씨가 왜 여기… 아, 그러고 보니.”
가까이 다가온 윤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수환을 보다가, 그 옆에 있는 승현을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수환은 그의 눈길에 반사적으로 옆을 쳐다봤다. 윤현을 본 승현의 안색이 어두워져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수환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윤현에게 말을 걸었다.
“대리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혹시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아직 양복 차림인 윤현을 보며 수환은 의아함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오늘 퇴근할 때 윤현이 보이지 않았다. 부장에게 불려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근처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았던 건가? 하지만 이제 이 복도는 재현의 교수실과 연구실만 있다고 들었다. 수환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윤현을 쳐다봤다.
“대리님, 혹시.”
“음, 다들 이재현 교수님 뵈러 온 것 같은데 같이 들어갈까요?”
윤현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먼저 가드들에게 다가가 신분 확인을 했다.
재현의 연구실에 가드가 붙고, 윤현이 이 늦은 시간에 연구실에 찾아왔다. 수환은 그 이유를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재현이 화명의 투자를 받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드디어…….’
안도감이 밀려든 수환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걱정거리를 하나 덜었다. 이대로 신약을 만들면, HS는 화명의 도움을 받아 약을 유통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련이라면 어떻게든 HS의 누명도 벗겨 줄 것이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나 수환이 밝은 얼굴로 미소 짓는 반면에, 승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환이 승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도 어서 가자.”
“…그래요.”
“……?”
어쩐지 미적거리는 승현을 재촉하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온 재현이 승현을 보자마자 인상을 한껏 찡그렸다.
“부른 지가 언젠데 이제 와?”
“하여간.”
한숨을 내쉰 승현이 어물쩍거리자, 재현이 또다시 재촉했다. 그러자 승현은 마지못해 가운을 입기 위해 연구실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재현의 못마땅한 시선이 승현의 등에 닿았다가, 수환과 윤현에게 향했다.
“그쪽은?”
“아.”
수환은 재현에게 얼른 윤현을 소개했다. 비록 오늘은 승현을 따라온 것에 불과하지만,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을 안면 있는 자신이 소개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교수님, 이분은 화명에서 오신 차윤현 대리님이세요.”
“화명에서? 아아.”
고개를 끄덕인 재현이 무언가를 짐작하는 듯 자신의 앞에 선 윤현을 바라보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윤현이 재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차윤현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윤현이 건넨 명함을 받으며 재현도 꾸벅 인사했다. 무심히 명함을 내려다보던 재현이 고개를 까닥였다.
“잠깐 교수실에서 얘기하시죠.”
“아, 네.”
“그리고…….”
재현은 멀뚱하게 서 있는 수환을 난감한 눈으로 쳐다봤다. 혼자 둬도 괜찮으려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을 했지? 스스로도 기가 막힌 생각을 한 재현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수환에게 말했다.
“곧 승현이 놈 나올 테니 편하게 있어요.”
“네, 교수님.”
눈살을 찌푸린 재현이 수환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첫 만남에 편하게 부르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건 자신이면서, 막상 수환이 꼬박꼬박 ‘교수님’이라고 부르자 마음이 묘하게 편치 않았다. 그는 인상을 쓴 채 윤현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수환은 재현과 윤현이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처음 온 연구실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재현이 있던 곳에는 커다란 기계가 위잉,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기계를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방에서 나온 승현이 수환에게 다가왔다.
“형은요?”
“어, 교수님은 대리님이랑…….”
“……?”
맙소사. 수환은 대답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고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승현을 멍청한 얼굴로 쳐다봤다. 왜 저렇게 잘 어울리지? 미쳤나 봐.
눈보다 하얀 피부를 가진 승현은 가운이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어울렸다. 미인인 승현은 뭘 입어도 잘 어울리겠지만, 가운은 특히 더 그랬다. 넋을 잃은 수환을 승현이 의아한 얼굴로 살폈다.
“형?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차마 애인의 미모에 홀려 할 말을 잃었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수환은 수줍게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운 잘 어울리네.”
“이거요?”
그냥 학생들이 실습할 때 입는 후줄근한 실습복이었다. 수환이 사 준 옷에 뭔가가 묻는 게 싫어 갈아입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수환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니 입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요? 형도 입어 볼래요?”
“아니, 난 됐어.”
“왜요?”
“왜긴, 난 그냥 외부인인데.”
자신이 입어 봤자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수환은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다가 그는 연구실 한쪽에 놓인 커다란 우리를 발견했다. 수환이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연구실에 동물 키워?”
“동물이요?”
승현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가 아, 하고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수환이 본 건 실험용 쥐를 모아놓은 케이지였다.
“실험에 쓰는 쥐들이네요. 이쪽 실험에서는 쓸 단계는 지나갔고, 학부생들 실습용인가 봐요.”
“그렇구나.”
수환이 씁쓸한 눈으로 쥐들을 쳐다봤다. 투명한 우리에 갇힌 쥐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모르고 먹이를 먹거나 우리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실험에 쓴다는 건, 이 쥐들을 모두 죽게 할 수도 있다는 거겠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환은 잔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혹시 실험이 끝나고 안 죽으면 여기서 계속…….”
“그럼 폐기해야죠.”
“폐, 폐기?”
“네.”
단호한 승현의 말에 수환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놀란 수환과 달리 승현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왜 수환이 놀라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쥐는 실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동물이었다. 작고, 쉽게 다룰 수 있고, 무엇보다 유전자 정보가 사람과 거의 동일해서 대부분의 동물 실험에서 쓰인다.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저 당연한 일이니까.
물론 아마추어만 모인 새내기 실험에서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간혹 있긴 하다. 실험용 쥐가 불쌍하다며 우는소리를 하는데, 승현이 볼 때는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쥐를 몇만 마리 죽여서 단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당연히 얼마든지 쥐를 희생시킬 수 있었다. 연구자로서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건 좀…… 불쌍하다.”
하지만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실험용 쥐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수환을 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조금은 껄끄러워졌다. 그래서인지 승현은 평소엔 하지 않을 말을 더듬더듬 내뱉었다.
“그래도 요즘은 동물 보호법이 확대돼서, 예전처럼 쥐들을 막 다루진 않아요. 딱 실험에 쓸 숫자만 들여오고, 아프면 마취도 하고…….”
“그렇구나.”
마치 희대의 악당이 된 듯한 느낌에 승현은 계속해서 수환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자신을 좋지 않은 눈으로 볼까 봐 두려웠다.
그깟 쥐가 뭐라고. 하지만 지금은 수환의 동정을 받고 있는 쥐들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다. 연구자로서 추구하는 가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이 오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이런 곳에 데려와서 충격을 받게 한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이제라도 돌려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수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 미안. 나 때문에 실험 못 하고 있는 거 아냐?”
혹시라도 방해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수환이 얼른 물었다. 그러자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던 승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저거 원심분리기 돌리는 게 끝나야…….”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기계에서 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현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조금만 기다려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으응.”
눈살을 찌푸린 채 기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승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낯선 연구실 안의 모습에 처음엔 신기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감히 제가 있어도 괜찮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나마 저녁이라 학생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연구원도 몇 명 없었다.
원작에서도 재현의 연구실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HS의 일로 대부분의 학생들과 연구원들이 재현의 랩실을 꺼리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전 국민이 알 만큼 떠들썩한 이슈였으니, 어쩔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승현이 신약 개발을 돕게 된 것이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소설의 주인공답게 능력이 뛰어난 승현은 재현을 도와 신약 개발을 빠르게 이루어낸다. 수환은 그 역사적인 때를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거지만, 어쩐지 상상한 것과는 좀 달랐다.
엘리트들만 모여 있는 곳이니까, 좀 더 세련되고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 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둘러보니 그냥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환은 휴식 공간의 테이블 위에 있는 먹다 남은 감자칩 봉지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
“회장님은 실행력이 참 빠른 편이신가 봅니다.”
“…….”
“…차윤현 대리님?”
“아.”
교수실에 들어온 재현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윤현이 어딘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당황했던 얼굴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네, 좀 그런 편이신 것 같더군요.”
윤현은 사실 회장인 화련을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성격이 다소 급하다고 느끼긴 했다. 회장으로 취임한 첫날부터 부장을 통해 자신을 불러내 HS 투자 건 담당자로 밀어 넣을 줄이야. 게다가, 그 HS라 거절하고 싶은 걸 거절하지도 못하게 살살 꼬셔서 말이다.
‘처음엔 승진이 걸려 있어서 거절하지 않은 건데.’
속으로 중얼거린 윤현은 자신의 눈앞에 선 재현을 찬찬히 훑어봤다. 막상 와 보니 예상치 못한 결과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연구실에서 재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많이 놀란 상태였다. 왜냐하면 재현은 마치 그의 취향을 한데 모아 놓은 듯이 첫눈에 끌리는 이상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생인 승현을 똑 닮아 미인이면서도, 조금 더 신경질적인 느낌이 났다. 그런 건 그의 말투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낮으면서도 끝 마디가 뚝뚝 끊어지는 불친절한 말투에 보통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끼겠지만, 윤현은 아니었다.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재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뭐, 아닙니다. 곧 담당자가 방문할 거라는 얘기는 들었으니까요.”
화련과 만나 화명의 투자를 받기로 했을 때, 빠른 시일 내에 투자 건 담당자를 정해서 이곳에 보낼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게 이렇게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실 방문 전에 전화를 한 번 드렸었는데, 개인 전화는 받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아…… 맞습니다.”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게 버릇이었다. 과거에는 집안일 때문에 어디서 온갖 전화가 와서 번호를 몇 번이나 바꿔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교수가 된 후에도 과거의 지긋지긋한 인연들이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해대던지. 이제 저장하지 않은 전화번호는 받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윤현은 재현을 만나기 위해 직접 연구실에 와야 했다. 물론 이렇게 퇴근길에 올 필요까지는 없었다. 개인 전화를 받지 않을 뿐, 학교에 연락해서 만나는 시간을 따로 정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련의 의사를 전한 부장의 말로는, 반드시 담당자가 재현과 직접 연락하거나 만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에 윤현은 이번 HS 투자 건에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마음을 감춘 윤현은 능숙하게 표정을 숨기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고 있는 윤현을 보면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아무리 벽을 세우는 사람이라도, 최소한 길고양이처럼 털을 세우며 마냥 경계하지는 않았다. 재현 역시 그저 무덤덤한 얼굴로 윤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커피와 차가 있는데, 뭐 마시겠습니까?”
“늦은 시간이라 차로 부탁드립니다.”
둥굴레차를 두 잔 탄 재현이 의자에 다가갔다. 앉아 있던 윤현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뭘요.”
재현의 시선이 차를 마시는 윤현을 잠시 훑었다. 담당자가 알파라니, 그건 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적으로 만나는 사이가 아니니까, 형질은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그리고 윤현은 겉모습만 보면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재현이라도 마음이 느슨해지는 신기한 첫인상이었다.
“아, 앞으로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방금 드린 명함으로 편하게 해 주세요.”
“네.”
재현이 무뚝뚝한 얼굴로 화명의 로고가 찍힌 심플한 명함을 내려다봤다. 차윤현 대리. 직급이 대리라. 생각보다 직급이 높지는 않았다.
흐음. 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짐작은 가능했다. 아마도 HS의 과거 일로 아무도 담당을 맡으려고 하지 않아서, 돌고 돌아 대리 직급까지 내려가서 담당자를 선정했을 것이다. 대가는 승진, 그리고 그 이상의 보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배알이 꼴렸다. 자신이 열심히 만든 신약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과거의 신약 부작용도 누명이었다는 걸 떠올리니 더더욱 마음이 쓰렸다. 얼굴을 찌푸리는 재현을 보며 윤현이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놨다.
“평소에는 제가 찾아올 테지만, 혹 일이 있으면 수환 씨가 올 수도 있습니다.”
“어…… 진수환 씨 말입니까?”
“네, 같은 부서거든요. 제가 수환 씨 사수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재현이 명함을 안주머니에 갈무리했다. 그래도 수환과 같은 부서라고 하니, 나름 본사의 핵심 부서에서 담당자를 정해 준 모양이었다. 게다가 수환의 사수라면 장차 화명의 간부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재현은 부글거리던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교수님의 동생분이 수환 씨의 약혼자분이셨죠.”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윤현이 운을 떼었다.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방금 승현과 함께 연구실을 방문했던 수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현은 그가 양복을 입은 모습만 봤었는데, 오늘은 퇴근 후였는지 사복을 입고 왔다. 하얀색 후드티에 청바지, 그리고 승현과 똑같은 흰색 스니커즈. 회사원이 아니고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았으니 아직 학생인 것도 맞는 거 아닌가. 재현은 속으로 생각하며 차를 마셨다.
“동생분이 종종 회사에 수환 씨를 데리러 오는데, 사이가 참 좋아 보이더라고요.”
“종종이요?”
“음. 꽤, 많이요.”
“하하.”
그럼 그렇지. 그놈은 결혼 전부터 의부증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재현은 한정식집에서의 일들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저러다 결혼하기 전에 차이기라도 하는 거 아닌가. 자신이라면 약혼 상대가 결혼하기도 전에 저렇게 집착하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질 것 같았다. 연구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데 데리러 온답시고 매일 1층에 서 있으면 소름 끼칠 거 같다.
하지만 승현의 손을 잡고 좋다고 웃으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던 수환의 모습을 떠올리니, 당장에 차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여간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결국엔 재현의 머릿속에서는 둘 다 만만치 않은 바퀴벌레 한 쌍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승현이가 좀 유별나게 굴곤 하죠.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중얼거리던 재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재현은 승현이 어렸을 때의 모습을 생각했다. 승현과 너무 어렸을 때 헤어지는 바람에, 동생이 예전에 어땠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말 잘 듣고 유순한 성격인 것 같다고만 생각했지. 지금 보니 영 아닌 것 같지만.
혀를 쯧쯧, 찬 다음 남아 있는 차를 모조리 마셨다. 재현과 달리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현이 밝은 어조로 말했다.
“왜요? 보기 좋던데요. 저는 부럽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네.”
그 꼴을 보고 부럽다는 생각이나 할 수 있다니. 참 속이 편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은 다른 법이니까. 재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보다는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혹시 오늘은 통성명만 하러 오신 겁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잘됐군요.”
피곤해 죽겠으니 빨리 할 말만 하고 꺼져라, 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었다. 설마 이런 속뜻까지 눈앞의 알파가 알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지만, 뉘앙스에 묘하게 짜증이 서렸던 것 같다. 하지만 윤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게다가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재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북함을 느끼며 윤현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