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핸드폰으로는 수환의 위치를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에 승현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HS의 전 오너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이태현이었다. 용건이 있는 쪽은 사실 어머니였지만, 그녀는 개인적으로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아 아버지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둘은 함께 있을 테니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승현의 어머니인 김수연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 그녀의 집안은 오메가가 많이 태어나기로 유명했는데, 가뜩이나 몸이 약한 오메가 자매들 중에서도 유독 잔병치레가 심하고 병원을 자주 갔다. 김수연의 가족들은 그녀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죽는 게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는 성인이 될 때까지 잘 자랐고, 가족들은 다른 방면으로 그녀를 걱정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가련함까지 갖춘 김수연은 존재만으로도 알파의 관심을 끌어냈다. 비단 알파뿐만이 아니라 베타들도 반해서 줄줄이 쫓아다닐 정도였다.
걱정이 된 김수연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액세서리를 하나 선물했는데, 그건 바로 위치 추적 칩을 심어 놓은 팔찌였다. 심플한 은색 팔찌는 단순한 디자인이라 훔쳐갈 만한 물건이 아닌 데다가, 칩이 들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얇아서 납치범들의 눈을 속이기 쉬웠다.
그리고 그 위치 추적 정보는 김수연의 친부가 가지고 있었고, 결혼한 후에는 남편인 이태현에게 맡겨졌다. 세월이 흘러 김수연은 자신을 쏙 빼닮은 막내아들에게 팔찌를 주었다. 지금 팔찌의 위치 추적 정보는 어머니인 김수연이 알고 있었다.
“저예요. 아버지. 어머니와 잠시 통화하고 싶어서요.”
―…….
오랜만에 연락한 막내아들이 대뜸 하는 말에 부모님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다급해 보이는 승현에게 팔찌의 위치 추적 정보를 문자로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통화를 끝낸 승현이 연구실로 돌아갔다. 재현은 냉기를 풍기는 승현의 얼굴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왜? 무슨 일 있냐?”
“형.”
“응?”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는 승현에게 재현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를 보며 승현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구실 밖으로 나가지 마.”
“뭐?”
“어디 가야 하면 꼭 가드들 동행하고.”
“야!”
그리고 몸을 휙 돌려 가운을 벗고 짐을 챙겼다. 재현이 부르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뒤에 남겨진 재현이 어이없는 얼굴로 승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승현은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방 안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던 검은 가방을 꺼냈다. 그 안에 든 물건들을 살피는 승현의 눈이 어두워졌다.
가방 안에서 꺼낸 건 꽤 흉흉한 물건들이었다. 호신용 전기 충격기, 후추 스프레이, 밧줄과 전기 테이프 등.
사람 하나 정도는 거뜬히 묻어 버릴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우습게도 이것들은 처음에 자신의 몸을 지킬 생각으로 가져온 호신용품이었다. 하지만 굳이 꺼내서 쓸 일이 일어나지 않아 구석에 처박은 채 잊고 있었다가, 급박한 상황이 되니 떠올린 것이었다.
부웅.
“…….”
작은 진동과 함께 메시지가 왔다. 승현이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주소를 확인한 승현이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주건율.”
“…….”
“내가 분명 경고했지.”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승현은 마치 지옥에서 막 올라온 저승사자 같았다. 건율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씨발,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또 오메가 따위에게 꼴사납게 겁을 먹다니. 건율이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승현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수환에게 향했다. 엉망이 된 방 안에서 수환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또 목이 졸렸는지 새빨갛게 남아 있는 손자국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물로 젖어 있는 얼굴과 빨갛게 부풀어 오른 한쪽 뺨, 발가벗은 상체에 방금 생긴 것 같은 자국들과 피가 맺힌 멍 자국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너…… 진짜 죽고 싶구나?”
“윽……!”
마지막으로 향한 시선에는 건율이 있었다. 분노를 담은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동시에 사나운 페로몬이 건율의 몸을 짓눌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곳의 위치를 어떻게 알았으며, 밖에 세워 놓은 가드는 어떻게 뚫고 들어온 건가. 건율이 믿기지 않는단 눈으로 승현을 보다가 발치에 굴러다니는 은색 팔찌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하, 너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네. 이승현.”
“…….”
“네 진짜 모습을 수환 형이 알기는 해?”
이죽거리는 말에 승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승현은 싸늘한 눈으로 건율을 바라보았다.
“닥쳐.”
“큭.”
페로몬이 죽일 듯이 온몸을 찔러댔다.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살기가 실린 기운이었다. 건율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위험함을 감지했다. 눈앞에 있는 오메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내가 널 봐줘야 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자, 잠깐!”
승현은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힘들었다. 감히 제 것에 손을 댄 건율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쓰러져 있는 수환의 상태가 걱정되지만, 오히려 정신을 잃고 있어 다행이었다. 깨어나서 자신을 보기라도 한다면 분명 겁에 질릴 테니까 말이다. 수환에게 페로몬이 닿지 않게 컨트롤하며, 승현이 천천히 건율에게 다가갔다.
“씨발, 오지 마!”
건율은 패닉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페로몬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지금의 그를 제압하는 건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제압하는 건 재미없지. 그에게는 수환이 당한 아픔을 몇 배로 되돌려 줘도 부족했다. 승현은 발치에 굴러떨어진 술병을 집어 들었다.
팍!
“크악……!”
건율의 머리에 내리쳐진 술병이 산산조각이 나며 깨졌다. 엎드린 건율의 머리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승현은 감흥 없는 얼굴로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잠깐, 기, 기다려! 기다리라고!”
“닥치라니까.”
머리가 깨져도 시끄러운 건율을 보며 승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는 반쯤 깨진 술병이 들려 있었다. 칼날처럼 삐죽하게 솟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승현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깨진 술병을 다시 들어 올렸다.
역시, 죽이자. 지금 여기서 죽여버리자. 다시는 이 자식이 수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다시는 추잡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없애버리자. 승현이 싸늘한 눈으로 다짐했을 때였다.
“……!”
왜앵,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며 소리가 더 커져 갔다. 승현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왔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경찰에 신고했던 건 승현이었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할 경우 수환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에 신고한 건데, 생각보다 일찍 와서 의외였다.
“…운 좋은 새끼.”
페로몬에 민감한 우성의 형질 때문인지, 죽음의 공포로 쇼크를 받아 건율은 기절해 있었다. 손에 든 술병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진 승현은 기절한 건율에게서 신경을 끄고 몸을 돌렸다.
“형.”
“……읏.”
“하아.”
조심스럽게 뺨을 쓰다듬자 수환에게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저 기절한 것뿐이었다. 승현이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흐…….”
“이따가 봐요.”
수환의 한쪽 뺨에 입을 맞춘 승현이 몸을 일으켰다. 경찰이 오기 전에 자신이 있었던 흔적을 없애야 했다. 승현은 수환의 팔을 구속한 족쇄를 살피다가 헐거워진 이음새를 비틀어 쇠사슬을 끊었다. 그리고 술병의 위치를 바꾸었다.
자신이 수환을 구해냈다는 걸 화련이 알게 되면 오히려 꺼림칙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곧 결혼할 약혼자의 위치를 추적하고 쫓아다니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승현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 물론 수환에게도.
‘네 진짜 모습을 수환 형이 알기는 해?’
“…….”
그 순간 건율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불쾌한 목소리는 왜인지 귓가에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리던 승현은 사이렌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자 겨우 몸을 돌렸다.
***
수환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병실 안에서 눈을 뜬 수환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엎드려 있는 승현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승…… 읏.”
다른 곳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뺨을 너무 세게 맞아서 그런지 얼굴이 퉁퉁 부어서 말하기가 힘들었다. 승현의 이름을 부르다가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에도 승현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눈을 떴다.
“형, 괜찮아요?”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별안간 승현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수환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걱정 많이 했단 말이에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괜…… 찮아.”
겨우 대답하고 수환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눈을 뜨자마자 승현을 봐서 다행이었다. 만약 눈을 떴는데 여전히 그곳이었다면 끔찍하고 암담했을 것이다. 지금도 사실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미안해요. 미안해. 주건율이 형한테 접근하지 않도록 신경 썼어야 했는데.”
“네…… 잘못 아니야. 나 괜찮아.”
“하아,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수환의 손등에 이마를 맞댄 승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수환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나…… 어떻게 된 거야? ……주건율은?”
“……기억 안 나요?”
“응.”
마지막 기억은 좀 흐릿했다. 건율에게서 도망치려다가 뺨을 맞고 쓰러졌던 것 같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눈을 뜨니 이 병실 안이었으니까.
승현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화련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간밤에 그녀가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초췌한 얼굴이었다. 수환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수환아!”
“누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화련이 섬세한 손길로 수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거즈를 붙인 한쪽 뺨 위를 덧그리던 손가락을 뒤로 물리고 화련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에게서 순식간에 분노한 페로몬이 퍼져 나갔다.
“감히 그 자식이.”
“저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수환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화련이 수환을 내려다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건만, 감히 누구에게. 화련의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걱정하지 말아. 너는 아무 걱정 없이 쉬기만 하면 돼.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해 줄 테니까.”
“네.”
화련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수환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건율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승현에게도 접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걔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 그렇게 해 주마. 걱정하지 말래도.”
“네.”
고개를 끄덕인 수환은 안심하니 다시 잠이 오는 것 같았다. 화련의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화련과 승현이 대화하는 목소리가 언뜻 귀에 들렸다.
이제 됐다. 자신과 승현이 무사하고, 앞으로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원작에서 진수환은 건율에게 살해당했지만, 자신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이제 시련을 모두 이겨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고, 수환은 잠이 들며 그렇게 생각했다.
***
“윽…….”
“……?”
병실 안에서 미약하게 들리는 소리에 수환은 자다가 눈을 살짝 떴다.
무슨 소리지?
깜깜한 허공을 보며 눈을 깜박이던 수환이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넓은 VIP 병실은 다른 병실과 다르게 시설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침대는 환자가 눕는 것 하나만 놓여 있었다. 간병인이 이곳에서 지내려면 소파나 간이침대에서 자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파는 고급에다가 간이침대도 다른 곳에 비하면 넓은 편이지만, 집보다 편할 리는 없었다. 수환은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던 승현을 내려다봤다.
“으윽.”
“…승현아?”
승현이 식은땀에 푹 젖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수환이 깜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승현아, 괜찮아?”
“읏.”
“승현아.”
침대에서 내려가 손을 뻗자 축축한 뺨이 만져졌다. 잠을 자면서 얼마나 땀을 흘린 건지, 수환의 두 손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승현아, 정신 좀 차려 봐. 응?”
“하아.”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수환은 조심스럽게 승현의 뺨과 몸을 어루만지며 애타는 눈으로 승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괴로워하던 승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수환아.”
“응, 나야. 승현아.”
“수환아, 가지 마…….”
“뭐?”
뜬금없는 말에 수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승현이 좋지 않은 꿈을 꾸고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승현이 흐릿한 눈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제발, 가지 마. 가지…….”
“승현아,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응?”
수환은 울먹거리며 승현의 뺨을 쓰다듬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잠시 후, 계속해서 헛소리를 중얼거리던 승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응, 승현아.”
“왜…… 그래요? 침대에서 안 자고.”
“아.”
승현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수환을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제 정말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수환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냥, 너랑 같이 자고 싶어서.”
“그랬어요?”
승현은 안도하는 기색으로 수환을 마주 끌어안았다. 악몽을 꾼 건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악몽을 꾸었을 때의 두려운 마음은 남았던 모양이었다. 수환은 힘을 줘 승현의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숨 못 쉬겠어요.”
“미안해.”
“사과 안 해도 돼요.”
작게 웃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수환은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의 일 때문에 승현까지 덩달아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질 것이다. 다 끝났으니까. 자신도 승현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게 분명했다.
수환은 그렇게 믿으며 승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수환은 겨우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수환은 대부분 병실 안에서 지내면서 소식을 들었다. 정신을 차린 후 병실에 찾아온 경찰 관계자에게 그때의 일을 얘기한 것 빼고는 아무도 수환을 찾아오지 않았다. 화련의 말로는 피해자가 수환이라는 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세간에 엄청난 스캔들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화명과 한성 자제들의 치정 싸움이라니. 그보다 자극적인 일이 어디 있을까.
권력의 힘은 무서웠다. 수환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건율이 처벌받는다는 소식을 화련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화련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성과 HS의 일을 세상에 폭로했다. 한성의 주성혁 회장이 과거 HS를 무너뜨린 장본인이라는 건 수환도 몰랐던 일이었다. 대체 원작을 썼던 작가는 무슨 생각인가 싶었다. 건율도 그렇고 한성 자체가 완전히 악의 축이 아닌가.
어쨌든 수환은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병원 밥이라기엔 꽤 화려한 식단으로 밥을 먹고, 승현이 깎아 주는 과일도 먹고, 틈틈이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승현이 병실에서 쪽잠을 자면서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아서 혼자 있는 시간도 적었다.
불편하게 왜 굳이 병실에서 자냐고 했지만 승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종종 밤에 악몽을 꾸는 걸 수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히 더 불안하게 만들까 봐 그런 건 말하지 않았다. 자신도 낮에는 비교적 괜찮았지만 밤이 되면 악몽처럼 그때의 일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승현도 그걸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수환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모르는 척하는 사이, 몸이 빠르게 회복되어 퇴원하는 날이 다가왔다.
“하……. 드디어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모든 일이 끝났다는 걸 실감했다. 수환은 그야말로 해방감을 느꼈다. 이젠 원작의 일로 전전긍긍할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수환의 얼굴은 잔뜩 환해져 있었다.
“형.”
“응?”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수환이 고개를 돌렸다. 승현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나 괜찮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심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한 모습을 확인시켜 줄 수 있으려나. 수환이 속으로 고민하는 사이, 승현이 말을 이었다.
“당분간은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요.”
“하지만, 나 진짜 괜찮은데.”
“회장님도 푹 쉬라고 휴가 줬잖아요. 내 말 들어요.”
“으음.”
승현에게서 조금은 강압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하지만 그 이유가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건 수환도 눈치챌 수 있었다. 결국 수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꼭이에요. 어디 나갈 땐 나한테 연락해요.”
“알았다니까.”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승현이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다. 유별난 행동이지만, 그만큼 승현도 자신이 납치당한 일로 충격을 많이 받았구나 싶었다. 그러니 며칠 정도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수환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
화련은 비서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오는 인터넷 기사들을 빠르게 훑었다.
수환이 건율에게 납치당해 끔찍한 폭행을 당하고, 신고받은 경찰이 아지트를 급습해 수환을 구해냈다. 그 시점에서 건율은 이미 머리를 술병으로 얻어맞고 기절한 상태였다. 수환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손을 구속해 놨던 쇠사슬이 풀려 있고 술병의 위치를 보면 수환이 반항하다가 무의식중에 건율을 술병으로 내리친 것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주건율이 수환을 납치한 정황이 너무나도 명백했기 때문에, 그는 꼼짝없이 경찰에 구속된 상태였다. 평소였다면 한성에서 어떻게든 건율을 빼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화련이 미리 준비했던 한성과 HS의 과거를 언론사에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주성혁 회장은?”
“예상한 대로, 모든 정황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화련도 쉽게 그를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 기사가 떴을 때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을 것이다. 십몇 년이나 지난 일이고, 증거를 모두 완벽하게 지웠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심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혹시…… 만약 그때 못 지운 증거가 남아 있었다면?
그리고 화련은 그 마음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주성혁 회장은 정말로 용의주도하게 증거를 모두 지웠다. 그건 의심할 일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화련은 그 증거를 만들기로 했다. 아니, 주성혁 회장이 혹시나 하는 의심이 들도록 그럴듯한 증거를 꾸며 그가 스스로 파멸하게 만들기로 한 것이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그쪽에 온 신경이 쏠려서 사고 친 아들에게는 소홀해졌다. 그 때문에 주건율의 처분은 손쉬울 정도로 가뿐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걸리는 것 빼고 말이다.
“신고자가 누군지는 알아냈습니까?”
“…죄송합니다.”
“음.”
수환을 빨리 구출할 수 있었던 건 익명의 신고자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수환이 납치당한 걸 알고 위치까지 알아내 그곳을 신고한 건지는 모두 베일에 싸여 있었다. 게다가 경찰이 갔을 땐 이미 건율은 쓰러져 있었고, 주변을 지키던 경호원 몇 명도 누군가에게 당한 듯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고 한다. 도무지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날, 이재현 교수님과 연구원들은 뭘 하고 있었죠?”
“밤새 연구 진행 중이셨다고 합니다. 도중에 귀가한 분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이승현 씨입니다.”
“…….”
“몸이 안 좋다고 하셔서 도중에 귀가하셨고, 경호원이 자택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자택 안에 들어가신 걸 확인하고 경호원은 복귀했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화련이 손가락을 움직여 테이블 위를 툭툭 두드렸다. 승현은 현재 수환과 동거 중인 약혼자로, 누구보다 수환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동시에 비운한 과거가 있는 가련한 오메가이기도 했다. 화련은 괜한 기우라는 생각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당분간 수환이 주변에 경비를 더 강화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조금 찝찝한 일이기는 하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었다. 우선 한성과 HS의 일을 해결하고, 그전까지 수환에게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게 철저하게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화련은 곧 다른 상념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
며칠이 지나자 수환은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화련도 당분간은 흉흉하니 밖에 되도록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집 안에만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밥을 먹고 난 다음 눈치를 보던 수환이 겨우 입을 열었다.
“승현아.”
“왜요?”
식사를 차린 후 설거지까지 하던 승현이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침을 꿀꺽 삼킨 수환이 용기를 내며 말했다.
“나, 편의점 가고 싶어.”
“…….”
“잠깐만 나가면 안 돼?”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니고 편의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걸까. 수환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사이, 점점 공기가 무거워졌다. 침묵하던 승현이 싱크대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뭐가 필요한데요?”
“아니, 그냥. 내가 보고 먹고 싶은 거 사 오려고.”
“목록 적어 주면 내가 사 올게요.”
“굳이 그래야 돼? 그냥 내가 가서…….”
“형.”
“…응.”
천천히 다가온 승현이 의자에 앉아 있는 수환의 앞에 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수환은 눈을 깜박였다.
“밖에 나가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형.”
승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듭 수환을 불렀다. 그리고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회장님도 당분간 어수선할 테니 되도록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잊었어요?”
“그래도 집 앞 편의점 정도는 가도 되지 않을까?”
수환의 눈은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물으면 승현이 한숨을 쉬며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승현은 수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
“왜…….”
“적어도 회장님이 안전하다고 할 때까진 안 돼요.”
승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건율과 한성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방심한 사이에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수환은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딱딱하던 승현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미안해요. 형이 먹고 싶은 거 내가 다 사 올게요.”
“으응.”
승현의 손이 수환의 시무룩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라고 말하며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자신이 너무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린 것 같았다. 수환이 미안해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너도 요즘 바쁜데, 내 생각만 해서.”
“난 괜찮아요.”
“잠은 잘 자고 있어? 맨날 피곤해 보이잖아.”
“괜찮다니까요.”
승현이 거듭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피곤해하는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승현은 자신이 잠들면 바로 연구실에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요즘 부쩍 밤에 혼자 자기 힘들어했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학교에도 가고 있는 승현은 요즘 무리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수환은 오히려 승현이 더 걱정되었다. 그의 거뭇한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며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리 화련이라고 할지라도 집 앞 편의점에 가는 것까지 막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은, 그 당시의 수환은 할 수가 없었다.
***
수환이 화련의 전화를 받은 건 다음 날 오후였다. 승현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이었다. 그날도 승현이 돌아오기를 멍하니 기다리던 수환은 화련이 으레 하던 안부 전화를 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련은 수환이 놀랄 말을 했다.
―집에서 되도록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아예 안 나오고 있다면서?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겠니.
“아, 그게.”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집 앞에 들렀다. 잠깐 나오겠니?
“어…….”
예상치 못하게 화련이 밖에 나오라는 말을 했다. 순간 수환이 당황해서 아무 말 못 하는 사이, 화련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오렴. 그렇게 집에만 있으면 몸에도 좋지 않단다.
“네.”
눈을 깜박이던 수환이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밖에 나가도 된다니. 승현이 했던 말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 생각하니 화련이 하는 말이 더 옳은 것 같은데, 왜 승현의 앞에서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었던 걸까. 오랫동안 꺼 놨다가 전원이 켜진 컴퓨터처럼, 수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몸은 좀 어떠니?”
“이제 괜찮아요.”
화련은 승현과 똑같이 자신이 불면 날아갈까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수환도 힘들긴 했는데, 그래도 알파의 튼튼한 몸은 금방 회복되었다. 수환은 그저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혹시 다른 쪽으로 힘들다면 상담을 받아도 괜찮단다.”
“상담이요?”
“그래, 그…… 꽤 충격적인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
수환은 사실 화련에게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건율이 자신에게 한 짓은 납치와 폭행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수환은 건율이 자신에게 한 일을 차마 다 말하지 못했다.
같잖은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저 미수에 그치기만 했던 일을 굳이 들춰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피해자의 정체를 세간에 감추느라 재판이 조용히 이뤄지고 있는데, 거기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화련이 그 일을 안다면 자신과 승현의 관계도 의심하게 될 것 같았다. 가뜩이나 페로몬 문제도 골치 아픈데, 더는 승현과의 관계에 문제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비록 그게 당장의 눈속임일 뿐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저 진짜 괜찮아요.”
“그래.”
웃으면서 대답해도 화련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어디서 수환이 그렇게 맞아 봤겠는가. 그동안 다른 사람이나 패 봤겠지. 화련은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렴.”
“네, 그럴게요.”
“이제 또 한동안 바빠서 들르지는 못할 것 같다.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있으렴.”
“알았어요.”
집 근처에서 잠깐 산책하고 화련은 곧바로 회사에 돌아갔다. 수환은 잠시 경호원들과 남아 뻘쭘하게 서 있었다.
이제 집에 갈까. 그런데 오랜만에 밖에 나온 김에 어디든 가고 싶었다. 그냥 들어가는 건 좀 아쉬웠다. 수환이 머뭇거리다가 경호원에게 물었다.
“저 어디 좀 들러도 될까요?”
“그러십시오.”
“감사합니다.”
수환은 무뚝뚝한 경호원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그토록 부르짖던 편의점에 갈까 하다가, 발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생각보다 꽤 멀리까지 와 버렸다. 수환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익숙한 간판을 발견했다.
“아.”
[D.Clare]
승현이 일했던 카페였다. 지금은 연구실 일을 돕느라 카페 아르바이트는 그만뒀다고 들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카페의 음료가 마시고 싶어졌다. 수환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어서 오…… 어?”
“안녕하세요.”
직원이 수환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수환이 카운터에 다가가 인사하자, 마주 선 직원이 어색한 얼굴로 미소 짓다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좀 바빴거든요.”
카페는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난방을 틀었는지 조금 따뜻해진 것 정도? 수환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메뉴판을 쳐다봤다.
“주문하시겠어요?”
“음.”
수환은 잠시 메뉴판 앞에서 고민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메뉴를 정하고 직원에게 말했다.
“유자차 따뜻한 걸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
“네?”
머뭇거리던 직원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걸 본 수환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쿠폰…… 한 번도 안 찍으셨잖아요. 좀 넉넉히 찍어 놨어요.”
“아.”
카페 로고가 찍힌 쿠폰을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전에 왔을 때는 말을 꺼내지 않아서 원래 쿠폰 같은 게 없는 줄 알았다. 아마 그동안 진수환이 그 성질머리에 쿠폰 따위에 도장을 찍는 행위는 서민이나 할 짓이라고 진저리를 쳤었나 보다. 수환은 환하게 웃으며 쿠폰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잘 찍을게요.”
“네.”
멋쩍은 듯 바라보던 직원이 음료를 만들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수환은 지갑 안에 쿠폰을 잘 갈무리했다. 앞으로는 자주 와야지. 수환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미소 짓고 있었을 때였다.
딸랑.
“어머, 승현아.”
“……?”
“이 시간에 웬일이니?”
승현이?
수환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카페 안으로 막 들어온 승현이 카운터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어? 너 학교…….”
“형.”
다가온 승현에게서 짙은 페로몬 향이 물씬 풍겼다. 매서운 눈길에 수환의 몸이 움찔 떨렸다.
“왜 여기 있어요. 누구 만나러 온 건데요.”
“난 누님이 불러서 잠깐 나왔어. 너는?”
“…….”
“승현아?”
승현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승현을 쳐다봤다. 이 시간에는 학교에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여기에…….
“유자차 나왔습니다.”
“아, 네.”
음료를 다 만들었다는 직원의 말에 퍼뜩 놀란 수환이 얼른 픽업대 쪽으로 다가갔다. 수환이 유자차를 가져가자, 직원이 수환의 뒤에 서 있는 승현에게 물었다.
“너도 뭐 마실래?”
“괜찮아요.”
굳은 얼굴로 대답한 승현이 수환의 손을 잡아챘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승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에게 손이 잡힌 수환은 그대로 집까지 질질 끌려갔다.
손에 든 유자차가 찰랑거렸다. 무작정 손을 잡아끄는 승현의 행동에 당황해서 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
수환은 잔뜩 굳어 있는 승현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보다 무거운 듯한 페로몬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왜인지 화가 난 것 같은 모습에 수환은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 보이는 걸까. 자신이 말도 없이 밖에 나왔기 때문인 건가. 하지만 밖에 나간 건 화련이 불러서…….
수환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승현이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수환을 돌아보았다.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었잖아요.”
“누님이 불러서 잠깐 나간 거라고 했잖아.”
“그래도……!”
승현이 거칠게 소리쳤다. 한껏 격앙된 얼굴을 보며 수환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
“형이 집에 없어서, 내가 얼마나…….”
승현이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초조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수환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하게 계속 목이 멨다. 따끔거리는 목구멍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집에 없는 거 어떻게 알았어?”
“…….”
“내가… 카페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쿵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동안 느꼈던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한데 뒤엉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가는 곳에 승현이 항상 부자연스럽게 따라왔던 건. 수환은 밀려드는 기억에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에… 내가 할아버지 만나러 본사 갔을 때랑 선… 봤을 때도, 그리고 동아리 모임 있었을 때도…….”
그동안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외면하려 했던 일들이 계속 떠올랐다. 사실은 지금도 외면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밤에 종종 악몽을 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갈수록 승현이 불안해 보이고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원작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메인공이었던 주건율이 이물질 같은 짓을 하다가 퇴장했다. 그저 그렇게 끝나는 건 줄 알았다. 메인공인 주건율이 했던 역할을 자신이 대신해서 곧 HS가 되살아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채 지우지 못한 의문이 자꾸만 수환을 괴롭혔다.
단순히 역할을 대신하는 것만으로 원작이 끝날까? 원작의 승현은 불행한 일을 겪고 난 후에 메인공의 보살핌을 받고 행복해진다. 하지만 지금의 승현은……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그는 어떤 역할인 걸까?
수환은 불안한 얼굴로 승현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미소 띤 그의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승현이 수환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형, 그런 게 왜 궁금한데요?”
“그건.”
“왜요? 내가 소름 끼쳐요? 싫어졌어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형은, 어차피 나한테서 못 벗어나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
왜 그 대사를 네가…….
승현은 원작의 진수환이 했던 대사를 비슷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상냥한 승현이 진수환이 했던 짓을 자신에게 할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속절없이 몸이 떨렸다.
“아.”
페로몬이 확 밀려와 수환을 덮쳤다. 덜덜 떨리던 무릎이 결국 꺾였다. 수환의 몸이 무너지자 승현이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사랑해요, 형.”
“승… 현아.”
“내가 평생 지켜 줄게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수환은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승현을 설득해야 하는데, 너무 머리가 아팠다.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뚝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들며 승현의 품 안으로 몸이 무너졌다.
***
꿈을 꾼 것 같았다. 어떤 꿈이냐면, 승현이 원작의 진수환처럼 무서운 집착광공이 된 재수 없는 꿈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주건율의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게 아닌가 싶었다. 비몽사몽 중에 결론을 내린 수환이 겨우 눈을 떴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침실의 천장을 바라보며 똑바로 누워 있던 수환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꿈이 분명하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누우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이상한 쇳소리가 귀에 들렸다.
절그럭.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싸한 느낌에 수환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한쪽 발을 감싸고 있는 족쇄가 보였다. 쇠 재질인데 아프지 않게 부드러운 털로 된 천이 덧대어져 있었다. 그리고 굵고 긴 쇠사슬이 침대와 이어져 있었다. 원작의 묘사와 똑같은 족쇄였다. 승현이 원작의 진수환에게 감금당할 때 발에 채워졌던, 바로 그 족쇄였다.
“이게, 이게 왜.”
수환이 손을 뻗어 족쇄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으로는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두 손으로 끊어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알파의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달칵.
“……!”
침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승현이었다. 쟁반을 손에 든 승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침대에 다가왔다.
“일어났어요?”
“……승현아.”
“배고프죠? 어서 먹어요.”
“이거… 먼저 풀어 줘.”
“…….”
“제발.”
참아 보려 했지만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침대 옆 협탁 위에 쟁반을 올려놓은 승현이 수환의 옆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손을 뻗어 울먹이는 수환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언제나처럼 무척이나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에 수환은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그냥 장난이었다고 말한 다음 웃으며 족쇄를 풀어 줄 거야. 그러나 그 기대는 승현이 입을 열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 돼요.”
“왜, 왜.”
“형 때문이잖아요. 자꾸 내 말을 안 들으니까.”
“내가 언제 그랬어.”
바들바들 떨며 말하는 수환을 승현이 지그시 내려다봤다.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을 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환이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두 번 다시는 그를 잃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의…….
순간 지끈거리는 머리에 인상을 쓰던 승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곧 아무렇지도 않게 수환을 바라보았다.
“밥부터 먹어요. 응?”
“승현아.”
여전히 승현은 상냥했다. 다정한 말투는 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자신이 원작을 망쳤기 때문에 승현이 이상해진 것이다. 차라리 처음 계획대로 자신이 사라졌으면, 승현과 얽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죄책감 때문에 수환은 더욱 힘들었다.
“제발, 이러지 마.”
“…….”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눈물이 한 방울 뺨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현이 고개를 숙였다. 혀를 내밀어 수환이 흘린 눈물을 핥아낸 승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안 된다니까요.”
“승… 흣.”
뺨과 눈가를 핥던 승현의 입술이 애원하는 입을 덮었다. 듣기 싫다는 듯이.
그대로 입술을 내린 승현이 수환의 쇄골과 가슴을 지나쳐, 아래까지 쭉 입을 맞췄다.
“형 발목은 족쇄를 차고 있어도 예쁘네요.”
마지막으로 승현의 입술이 향한 건 족쇄를 차고 있는 발목이었다. 발등 위에 입을 맞춘 승현이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수환은 암담한 심정으로 그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봤다.
띠리링, 띠링…….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승현이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못마땅한 듯 혀를 차더니 몸을 일으켰다.
“굶지 말고 밥 먹어요. 알았죠?”
“…….”
“금방 올게요.”
수환의 뺨에 입을 맞춘 승현이 당부하며 방에서 나갔다. 수환은 그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다시 눈을 뜨면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눈을 뜬 수환은 여전히 자신의 발목을 옥죄고 있는 족쇄를 마주해야 했다.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발을 움직이자 차르륵, 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목을 감싼 족쇄가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그 낯선 감촉에 수환은 잠시 발을 멈춘 채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발을 움직였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자, 긴 쇠사슬이 따라서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바닥으로 내려간 쇠사슬이 자르륵 소리를 내며 방바닥 위에 넓게 퍼졌다.
원작의 진수환이 승현을 구속하기 위해 준비했던 족쇄. 그동안 그의 BDSM 컬렉션을 쳐다보기도 싫어서 외면했던 결과가 이렇게 돌아오는 건가 싶었다. 아니, 아마 버려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지금의 승현이라면 어디선가 똑같은 걸 구해 와서 기어코 자신의 발목에 채웠을 것이다.
승현이 어째서 진수환처럼 변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수환은 그저 의문을 머리 한구석으로 치우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륵, 차르륵.
수환이 걸음을 옮기자 침대와 이어진 쇠사슬이 길게 늘어졌다. 쇠사슬은 정확히 수환이 화장실 안에 들어가는 것까지 가능한 길이였다. 볼일을 마치고 나와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정확하게 문턱쯤에서 쇠사슬이 빳빳하게 당겨졌다. 아무리 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는 쇠사슬을 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제 어떡하지.”
중얼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협탁 위에 승현이 올려놓고 간 쟁반이 보였다. 밥과 반찬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공복이라 배는 고팠지만 먹고 싶지 않았다. 수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쟁반 위의 음식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어떻게 하면 이걸 바로잡을 수 있을까. 수환은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했다. 만약 승현이 원작 속 진수환의 역할을 맡게 된 거라면, 그러면 자신은 그와 역할이 뒤바뀌어 있는 것일 터였다.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메인수 역할이 된 자신이 이물질이 된 승현에게 괴롭힘을 받다가 누군가에게 구출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 너무나 끔찍해졌다. 그렇게 되면 승현은 원작의 진수환처럼 죽고 말 것이다. 우습게도 수환은 아직도 그가 좋았다. 승현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조여들 정도로 아파졌다.
안 돼. 그건 안 된다. 승현을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될 바에는 자신이 애초에 이물질 역할을 하다가 죽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수환은 승현이 잘못되는 상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달칵.
“……!”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수환이 놀란 얼굴로 문가를 쳐다봤다. 방 안으로 들어온 승현이 침대로 가까이 다가왔다.
“형?”
그리고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승현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계속 울고 있었어요?”
“아니, 이건.”
수환을 내려다보는 승현의 얼굴은 딱딱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감금당한 현실에 비참함을 느껴 울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슷하지만 좀 달랐다. 자신의 처지에 비참함을 느끼고 절망해서가 아니라, 승현이 잘못될까 봐 걱정해서 운 거였으니까.
하지만 오해를 정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승현이 오해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죄책감을 느낀다면 다시 전처럼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수환은 대답하다 말고 그냥 고개를 돌렸다. 승현의 시선이 눈물이 떨어진 뺨에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형, 나 좀 봐요.”
“…싫어.”
“밖에 못 나가게 해서 화났어요?”
“…….”
수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난다기보단 슬펐지만, 그걸 말한다고 해서 승현이 이해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빙의와 관련한 얘기는 등장인물에게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된다. 그 정도는 수환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승현은 자신에게 있어서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건 하지 말아야 할 얘기였다.
“밥도 안 먹었네요.”
“…….”
“형, 지금 시위해요?”
시위는 무슨.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면서. 수환은 뒷말을 삼키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화가 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혼란스럽고 무섭기만 했는데, 승현의 역할이 바뀐 걸로 인식하고 나니 조금 적응이 되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작의 진수환과 달리 승현이 자신에게 더 이상의 심한 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만약 진수환이라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밥을 먹지 않은 승현에게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를 겁박하며 기어코 어떻게든 밥을 먹게 만들었을 텐데, 승현에게서는 그럴 낌새가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수환은 그에게 조금 반항할 수 있었다.
“밥 먹어요.”
“싫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수환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에 승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뾰족한 페로몬이 수환을 찔렀다. 그에 수환은 조금 불안해졌다.
이대로 계속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설마 승현도 진수환처럼 무서운 짓을 하는 걸까. 그렇게 되면 자신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믿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내심 불안했다. 수환이 긴장하며 이를 악물었다.
“형.”
승현이 손을 뻗어 수환의 뺨을 어루만졌다. 만약 진수환이라면 억지로 턱을 비틀어 자신을 쳐다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나지막하게 부르며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 주었을 뿐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발목에 족쇄를 채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선. 그런데도 하는 행동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 괴리감에 오히려 더 소름이 끼쳤다.
“그래요. 먹지 말아요.”
“……?”
의외였다. 수환이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외면했던 승현의 얼굴엔 평소처럼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수환의 시선을 받자 더욱 활짝 웃기 시작했다. 승현이 미소 띤 얼굴로 계속 말했다.
“형이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 거예요.”
“뭐?”
“형이 밥을 안 먹으면 나도 안 먹고, 물 한 모금 안 마시면 나도 안 마셔요.”
“지금 무슨 소리를…….”
“마음이 너무 아파서요. 그냥 같이 굶어요,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밥을 안 먹는다고 하니 자기도 같이 굶는다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겠다고?
수환이 할 말을 잃고 승현을 쳐다봤다. 농담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때, 머릿속에 또다시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원작의 승현이 막 진수환에 의해 감금당했던 장면이었다. 그때의 승현 역시 감금당하고 실의에 빠져서 밥 먹는 걸 거부했었다. 증오하는 진수환을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때 진수환은 어떻게 했더라…….
“……!”
협박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승현의 친구들과 가족에게 해코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에 승현은 억지로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은 그와 조금 비슷하지만 달랐다. 밥을 안 먹는 자신에게 하는 협박이 주위 사람을 해치겠다는 게 아니었다. 승현 자신을 학대하겠다는 이상한 협박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수환은 그 협박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무슨 헛소리야, 그게.”
“못 믿겠으면 나도 하루 종일 여기 같이 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먹지 말고 계속 같이 있어요. 어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수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농담이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수환도 알 수 있었다. 방 안은 항시 난방을 틀어 따뜻하기만 한데, 마치 밖에 있는 것처럼 춥고 소름이 돋았다.
핀트가 좀 나가 있기는 하지만 승현이 하는 행동이 원작의 진수환과 점점 더 비슷해지고 있었다. 진수환은 약 한 달 동안 학교도 가지 않고 승현을 괴롭히는 데 몰두했었으니까 말이다. 덜컥 겁이 난 수환이 얼른 입을 열었다.
“먹을게. 먹을 테니까, 너도 굶거나 하지 마.”
그러자 승현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응, 잘 생각했어요.”
그리고 겁에 질려 있는 수환의 뺨을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수환이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이건 식었으니까 다시 가져올게요.”
쟁반을 든 승현이 방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환이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침대 시트를 한 손으로 꽉 잡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의 승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예전의 승현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지만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원작에서의 감금은 파국으로 끝났다. 메인수인 승현의 입장에서는 구원이었고, 원작의 이물질이었던 진수환은 죽음으로써 죗값을 치렀다.
이렇게 계속 감금당하면 언젠가 누군가는 눈치챌 것이다. 가장 먼저 이상한 점을 알아내는 건 화련, 아니면 누구보다 승현과 가까이 있는 승현의 형인 재현일 것이다. 어찌 됐든 이 일은 화련의 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자신은 화련에게 구원받고, 승현은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되는 것일까. 시트를 쥔 수환의 손에 식은땀이 뱄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도 수환은 여전히 승현을 걱정하고, 또 좋아하고 있었다. 그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반된 마음이 수환의 안에서 충돌했다.
“많이 기다렸죠?”
쟁반을 든 승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새로 요리를 했는지 쟁반에 들어 있는 반찬이 조금 달랐다. 수환은 그 정성 어린 밥상을 착잡한 눈으로 보다가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나지막한 제지에 손을 멈춘 수환이 떨리는 눈으로 승현을 쳐다봤다. 승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먹여 줄게요.”
“뭐?”
“줄곧 하고 싶었거든요.”
밥을 먹여 주는 걸? 수환은 당황한 채 승현을 바라보았다. 발에 족쇄가 달려 있을 뿐 손은 멀쩡한데, 왜 멀쩡한 손을 놔두고 다른 사람이 떠먹여 주는 걸 받아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걸 하고 싶다는 승현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냥 내가 먹을게.”
“안 돼요.”
“대체 왜 그러는 건데?”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승현에게 수환은 또 불안해졌다.
“이제 안 참기로 했거든요. 형한테 하고 싶었던 건 다 하려구요.”
“하고 싶었던 거?”
“네.”
숟가락을 든 승현이 환하게 웃었다. 수환은 그 모습을 보고 또 말문이 막혔다.
그럼 자신을 방 안에 가둔 것도 그가 예전부터 하고 싶은 일이었을까. 자신이 빙의한 이후로 얼마나 많은 게 어긋난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수환은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내미는 승현의 모습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술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