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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물질은 메인수와 행복해지고 싶다 4화 (24/29)

4.

“너 요즘 좋아 보인다?”

재현이 읽고 있던 서류로 승현의 어깨를 탁, 하고 쳤다. 재현의 옆에서 연구 자료를 정리하던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또 시비야.”

“얼마 전까지 죽상이다가 요즘은 또 실실 웃고 있으니까 그런다, 이놈아.”

얼마 전에는 정말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바로 승현의 약혼자인 수환이 웬 미친놈에게 납치되고 폭행까지 당했기 때문이었다. 승현이 연구실에서 갑자기 뛰쳐나갔던 바로 그날이었다.

사실 그때의 일은 좀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승현은 수환과 연락이 되지 않자 곧바로 연구실을 나갔고, 자신에게는 연구실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까지 했다. 마치 수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있던 사람처럼.

‘에이, 설마.’

하지만 이내 재현은 순간 떠올린 생각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의 동생이 못 본 사이 좀 미친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범죄의 영역까지 손을 대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인상을 찡그린 재현이 다시 승현을 쳐다봤다.

“수환 씨는 괜찮아?”

“괜찮지, 그럼.”

“괜찮으면 연구실 와도 되는 거 아니야? 아, 회장님이 걱정이 좀 많으시던가.”

범인은 잡혔지만 한창 시끄러운 일 때문에 다친 수환이 집에 계속 머물도록 얘기한 모양이었다. 재현은 한동안 보이지 않는 수환이 걱정되기도 하고 조금 그립기도 했다. 적어도 멀쩡한 모습이라도 잠깐 보면 좋겠는데. 이래저래 다른 일들 때문에 병문안도 가지 못했으니 말이다.

고민하던 재현이 승현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한번 찾아갈까?”

가볍게 묻는 말에 왜인지 승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재현은 그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오지 마.”

“왜?”

“형은 할 일 많잖아.”

“뭐, 그렇긴 한데.”

신약 개발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중요한 실험은 다 끝나 임상 실험 단계만 남긴 했는데, 그것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관련 논문을 찾아 정리하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다크서클을 눈 밑에 단 채로 재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정 없게 어떻게 그러냐? 병문안 한 번은 가 봐야지.”

“형은 누구 아프다고 병문안 가 본 적 한 번도 없잖아.”

“야, 그건!”

승현의 신랄한 말에 재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낸 재현이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도 곧 사돈 될 사인데.”

남의 일에 신경 쓴 적 없는 재현치고는 과한 관심이었다. 그리고 그 관심의 대상이 수환이라는 것에 승현은 불쾌감을 느꼈다. 승현은 다소 쌀쌀맞은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잘 보살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더는 관심 가지지 말라는 듯이 경고하는 것 같은 페로몬이 재현을 찔렀다. 우성의 페로몬에 열성인 재현은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재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히 식은땀이 났다.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논문 자료를 다시 살피던 재현이 흘끗, 승현을 쳐다봤다. 순식간에 페로몬을 갈무리한 승현을 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 곧 히트 오지?”

“…아.”

재현의 물음에 승현은 그제야 자신의 히트 사이클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번 히트 사이클 때는 수환을 너무 고생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서로의 페로몬 문제로 깊은 관계를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때처럼 히트가 세게 터지면 난감해질 터였다. 승현이 표정을 굳히며 재현에게 물었다.

“억제제 준비됐어?”

“그래, 너한테 맞추느라 힘들었다. 인마.”

페로몬 수치가 그렇게 미칠 듯이 날뛰어서는. 재현은 승현이 얼마 전 병원에서 한 페로몬 수치 검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니 예전 몸에 맞춘 억제제가 안 들을 만하지. 속으로 혀를 끌끌 찬 재현이 머리를 까닥였다.

“저기 책상 위에 놔뒀으니까 가져가.”

“알았어.”

책상 쪽을 흘끗 바라본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억제제가 잘 듣길 바랐다. 자신의 페로몬 때문에 수환이 잘못되는 건 그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수환을 방 안에 가둔 건 다소 충동적인 일이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왜인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자신이 바라는 건 아무도 수환을 보지 않고,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수환의 얼굴을 보고, 말하고, 그를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달콤한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고 말 것이다. 수환을 끔찍하게 아끼는 화련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눈을 속일 수 있는 건 끽해야 한 달 남짓한 시간 정도뿐일 것이다.

그러니 눈치채기 전에 떠나야 한다. 국내에서는 어딜 가도 숨기 어려울 테니 외국으로 가는 게 좋겠지. 승현은 반듯한 얼굴로 누가 알면 기함할 계획을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세웠다.

***

의외로 평온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환은 막 목욕을 끝내고 뽀송뽀송한 상태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온몸이 따끈하고 나른한 기분이 들어 절로 눈이 감겼으나, 억지로 눈꺼풀을 위로 밀어냈다.

혼자 있을 때는 승현이 차려 놓고 간 밥을 알아서 먹고, 알아서 씻고 하지만 승현이 돌아오면 달랐다. 그가 먹여 주는 밥을 먹어야 했고, 심지어 목욕 시중도 받아야 했다. 어차피 승현이 돌아오면 또 씻어야 하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땐 샤워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수환은 오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몸을 씻었다. 승현이 아기에게 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겨 주었기 때문이다.

승현은 자신을 방 안에 가두긴 했지만, 하는 짓은 진수환과 전혀 달랐다. 그는 자신을 성적으로 괴롭힐 생각도 하지 않았고, 폭력적인 짓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라며 하인처럼 수환의 시중을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수환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밥을 먹이고 나면 간식도 먹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황제 감금인가 싶었다.

“하아.”

수환의 눈이 방 안을 훑었다. 자신이 심심해할까 봐 한가득 쌓인 책과 게임기가 보였다. 하지만 그중에는 연락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그리고 기타 전자기기는 보이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승현은 수환에게 핸드폰만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은 불안했다. 어서 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도무지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무력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텐데.

자신에게 해코지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을 이렇게 방 안에 가둬 두는 건 엄연한 범죄다. 화련이 알게 되면 절대로 승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경찰에 넘기지도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할지도 모른다.

“어쩌지.”

순간 수환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 생기면 저에게 연락하세요.’

꼭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저에게 했던 말.

‘꼭이요.’

“권희영.”

승현의 동기 중 한 명인 권희영. 빙의한 수환이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말을 했던 그녀였다. 대뜸 연락처를 주며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하지 않나, 진길영 회장은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테니 화련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질 않나. 속마음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진지하게 조언해 주곤 했었다.

수환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빙의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조언에 따라 화련에게 접근한 후, 대부분의 일이 좋게 풀렸다. 비록 지금은 또 다른 문제로 난감한 상황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번에도 희영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수환은 멍하니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는 데다가, 희영은 연약한 베타 여성이었다. 괜히 휘말려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할 수 있었다. 수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읏.”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요 며칠 스트레스 때문인지 두통이 자주 일었다. 그런데 오늘은 묘하게 열도 같이 나는 것 같았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러트가 올 시기가 지난 것 같았다. 날짜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으니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러트가 와야 할 때가 지난 건 확실한 것 같았다.

페로몬 수치가 바닥을 치니까 이제 러트도 오지 않는 건가. 수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초에 진수환의 몸이 열성이다 보니 러트가 심하진 않았다. 승현과 동거를 다시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그때, 갑작스럽게 터진 러트가 이상한 거였다. 아무래도 우성 오메가가 곁에 있으니 페로몬이 미쳐 날뛴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승현과의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에 페로몬 수치가 떨어져 약을 먹으면서 겨우 알파의 페로몬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수환은 지금이 더 편했다. 러트로 인해 이성을 잃는 감각은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달칵.

“……!”

문을 연 승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쟁반을 든 승현이 천천히 침대에 다가왔다. 협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승현이 의아한 눈으로 수환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머리가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니, 승현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물었다. 수환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냥 좀, 머리가 아파서.”

그러자 승현이 손을 뻗어 수환의 이마를 짚었다. 승현이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열도 좀 있는 거 같은데.”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자 시원함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던 수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러트 올 때가 지났잖아. 그래서 그런가 봐.”

“아.”

승현도 그제야 수환의 러트가 오지 않았었다는 걸 깨달았다. 뜨끈한 수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정한 어투로 물었다.

“억제제 가져다줄까요?”

“아니야. 괜찮아.”

억제제까지는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수환이 고개를 젓자, 승현은 잠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수환을 내려다봤다. 순간 그의 눈에 은근한 빛이 감돌았다.

차라리 수환에게 러트가 오면, 그 핑계로 또 그를 가질 수 있을 텐데.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승현이 수환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승현아.”

이 방 안에 갇히고 나서 승현은 한 번도 제 욕망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목욕을 시킨답시고 옷을 벗겼을 때도, 주건율이 남긴 게 분명한 흔적을 보고 기분 나쁜 듯 잠깐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폭행을 당한 수환을 배려하려는 건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래서 승현은 지금껏 자제하고 있었으나, 점점 참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흉흉해지는 페로몬을 느낀 수환이 두려운 눈으로 승현을 쳐다봤다.

“…우선 밥부터 먹어요.”

애써 페로몬을 갈무리한 승현이 수환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손길에 수환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수환도 승현이 여전히 자신에게 흥분하는 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절그럭.

“…….”

하지만 발을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족쇄와 쇠사슬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잘못되어 가고 있는 상황임이 분명한데. 자신을 여전히 상냥하게 대하는 승현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가끔은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부러 쇠사슬을 발가락으로 툭툭 치며 수환이 몸을 긴장시켰다.

“오늘은 형이 좋아하는 계란말이도 있어요.”

이제 이렇게 받아먹는 것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했는데, 승현이 젓가락으로 푹신한 계란말이를 집어 들자, 수환은 어미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자동으로 입을 벌렸다.

“맛있어요?”

“응.”

우물거리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승현이 환하게 웃었다.

밥을 다 먹자 승현이 식기를 정리해서 가지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승현은 또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게 뭔지 수환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녁 간식이었다.

“이거 먹고 약 먹어요.”

“응.”

오늘은 바닐라빈이 들어간 바스크 치즈케이크였다. 저번에 갔던 유명 빵집의 케이크가 분명했다. 이건 특히 인기가 많아서 금방 품절되는데, 대체 언제 산 걸까. 수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치즈케이크를 쳐다봤다. 이 케이크 역시 승현이 먹여 주지 않으면 먹을 수 없었다.

잔뜩 기대하며 눈을 빛내고 있으면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수환을 승현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응시했다. 이대로 계속, 이렇게 자신의 곁에서 예쁜 짓만 하면 좋을 텐데.

“맛있어요?”

“맛있어.”

입안에 퍼지는 단맛과 고소한 풍미를 느끼며 수환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물거리는 입술을 진득한 눈으로 보던 승현이 손을 뻗었다.

“여기 묻었어요.”

“아.”

부스러기가 묻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은 승현이 씩 웃었다. 그리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수환을 보며 제 손가락을 길게 핥았다.

“맛있네요.”

“…….”

분위기가 조금 묘해졌다. 어쩐지 승현과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항상 승현이 입을 맞추는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어떨 때는 자신이 먼저 하기도 했다.

하지만 승현은 이번에도 수환에게 섣불리 손대지 않았다. 배려하고 싶은 거겠지만,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묘하게 아쉬움이 들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아쉬운 마음이 들다니. 큰일 날 생각이었다. 표정을 굳힌 수환이 속으로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치즈케이크를 다 먹은 다음에는 오늘 치의 페로몬 약을 먹었다. 러트가 오지 않는 걸 보면 효과가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일단 계속 알파로 살려면 먹긴 먹어야 한다. 수환은 승현이 입안에 넣어 준 자그마한 알약을 하나 꿀꺽 삼켰다.

“하아.”

“형.”

“응?”

승현이 부르자 수환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보통 페로몬 약을 먹은 후에는 불을 끄고 자자고 하는데, 말을 거니 좀 의외였다. 수환의 시선에 승현이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형은 해외여행 가면 어디를 가 보고 싶어요?”

“해외여행?”

뜬금없이 해외여행이라니. 수환은 눈을 크게 떴다.

“유럽 쪽은 어때요? 프랑스? 거기 음식이 맛있다잖아요.”

“…….”

“아니면 섬은 어때요? 작은 섬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말에 수환은 그저 눈을 깜박였다. 왜 갑자기 여행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해외여행이라니.

당연히 수환은 어딘가로 여행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갔을 수도 있지만 기억이 없었다. 진수환은 돈이 많으니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을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수환이 했던 일이었다. 지금의 수환은 해외는커녕 국내 여행도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여행 얘기를 꺼내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수환은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여행은 왜? 게다가 해외라니.”

“아.”

수환의 물음에 승현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이 족쇄를 단 수환의 발목을 쓸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 없잖아요. 회장님이 찾지 못할 곳으로 떠나고 싶어서요.”

“뭐?”

수환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화련의 눈을 피해 해외로 가자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연하게 그런 걸 생각하는 승현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얼토당토않은 말에 당황하며 승현을 쳐다봤다. 하지만 승현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괜찮아요. 형은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요.”

“읏.”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페로몬이 다시 훅, 하고 끼쳐왔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수환은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런 수환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승현이 짧게 입을 맞췄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영원히 우리 둘이 같이 있어요.”

“승, 현…….”

“형은 내 거니까,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낮고 차가운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승현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정말로 원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수환은 두려워졌다. 그리고 정말로 승현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이만 잘까요.”

“……응.”

다시 상냥하게 입을 맞춘 승현이 방 안의 불을 껐다. 새카만 어둠이 주변에 가라앉자, 승현이 다가와 침대에 누운 수환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 익숙하게 자신을 가둔 수환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는 안 돼.’

어떻게든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의문이 가득한 머리로 수환은 밤이 새도록 생각했다.

***

다음 날 아침, 수환은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가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건 이 침실과 침실에 딸린 화장실과 욕실뿐이었다. 굵은 쇠사슬은 그 이상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수환이 침대에 다가갔다. 침대 끝에는 수환의 발목과 연결된 쇠사슬이 달려 있었고, 크고 무거운 침대를 들 힘은 수환에게 없었다. 하지만 몸으로 밀면 어떻게든 조금은 옮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결심한 수환이 끙끙거리며 침대를 밀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이 굴러다녀도 될 만큼 넓은 킹사이즈 침대는 재질이 좋은 거라 그런지 무겁고 튼튼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 하.”

게다가 방 안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인지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었다. 틈틈이 운동 좀 할걸. 뒤늦게 후회한 수환은 헥헥거리며 침대를 밀어서 겨우 조금 움직일 수 있었다. 옆으로 밀려난 침대 아래에 지저분한 바닥이 드러났다.

“어휴, 진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대 밑을 살폈다. 오랜만에 격하게 움직인 팔을 주무르며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먼지가 쌓인 침대 밑을 면밀하게 살폈다.

원작의 진수환은 술고래였다. 거의 매일 술에 절어서 살 정도로 엄청난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런 진수환은 잠을 자는 침실에서 특히 고약한 술주정을 부렸었다.

그 때문에 그가 가진 핸드폰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혼자서도 실컷 술주정을 부리다가 협탁 위에 올려놔야 할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려서 액정이 깨지거나 망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어떨 때는 침대 밑으로 잘못 들어간 핸드폰을 찾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바꾼 적도 많았다고 한다. 원작의 내용을 떠올린 수환이 침대 밑을 더듬다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

무언가 딱딱한 것이 손에 만져졌다. 수환이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알파의 몸이라 기다란 팔다리가 이럴 땐 도움이 되었다. 가까스로 딱딱한 물체를 손에 쥔 수환이 침대 밑을 더듬던 손을 밖으로 꺼냈다.

“됐다……!”

그의 손안에는 먼지가 잔뜩 낀 구형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지금은 다른 핸드폰을 쓰고 있어서 전화나 문자는 쓸 수 없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싶었다. 수환은 애타는 마음으로 전원을 켰다.

“제발, 제발 돼라.”

포악한 진수환이 함부로 다루다가 침대 밑까지 굴러떨어진 비운의 핸드폰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액정이 애처로울 정도로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한참 뒤에 화면에 회사와 기종 이름이 떴다.

“된다!”

일단 전원은 켜졌다. 로딩 시간이 좀 더디긴 했지만 무사히 홈 화면에 들어갔다. 핸드폰을 떨어트리면서 전원이 꺼졌었는지, 다시 켜니까 배터리는 좀 남아 있었다. 수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집 안에 와이파이가 되기 때문에 웬만한 앱을 다 켤 수 있었다. 수환은 잠시 핸드폰을 들고 고민했다.

누구를 부를까.

화련은 안 된다. 그녀가 알게 되는 것만은…….

고개를 내젓던 수환은 또다시 누군가를 떠올렸다. 조금 낮으면서도 진중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 생기면 저에게 연락하세요.’

‘꼭이요.’

“…….”

고민은 길지 않았다. 수환은 핸드폰에서 유명 SNS 앱을 찾았다. 그것을 누르니, 다행히 로그인 정보가 핸드폰에 남아 있었는지 자동으로 들어가졌다. 이웃 목록을 쭉 훑던 수환이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익숙한 이름의 계정에 들어가고, 또 다른 계정의 이웃 목록에 들어가는 걸 몇 번 반복하자 겨우 원하던 계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수환이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쪽지를 보내는 손이 조금 떨렸다. 몇 마디를 적다가 지우고, 또 적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수환은 겨우 한마디를 적어서 보낼 수가 있었다.

도와줘.

쪽지를 보낸 계정이 진수환의 것이니 자신이 보냈다는 걸 알겠지만, 달랑 이렇게만 보내면 상대방이 당황할 터였다. 하지만 왜인지 그녀라면 자신의 상황을 기민하게 알아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내려다봤지만 답이 없었다. 숫자가 사라진 걸 봐선 보내자마자 확인은 한 것 같은데…….

쿵쿵거리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 하필이면……. 스스로가 한심해서 계속 한숨만 나왔다.

그러나 도움을 청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회사 사람들에게 연락하면 분명 화련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다른 사람들은 도와달라고 해 봤자 흔쾌히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진수환의 좁은 인간관계가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연락 수단이 생겨 봤자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부르지를 못하다니. 침대 앞에 쭈그리고 앉은 수환이 하릴없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던 수환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너덜너덜한 핸드폰을 붙들고 있던 수환이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승현이 벌써 돌아왔나? 아직은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당황한 수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핸드폰을 숨겼다. 그리고 옆으로 밀려난 침대를 난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침대를 이렇게 해 놓은 건 어떻게 설명하지? 그걸 고민하는 사이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헉……!”

“…….”

침실 문을 연 사람이 문가에 가만히 서서 수환을 쳐다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만 사람이었다. 검은 옷에 검은 모자, 게다가 검은 마스크까지. 흉흉한 모습에 수환이 숨을 들이켰다.

‘도, 도둑? 강도?’

너무 놀란 수환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체구가 자신보다 훨씬 작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든 이가 성큼 걸으며 수환에게 다가왔다.

“누, 누구.”

“저예요. 선배.”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는 수환을 향해 낯선 이가 쓰고 있던 검은 마스크를 살짝 밑으로 내렸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희영이……?”

“네.”

“네가 왜 그런 모습으로…….”

마스크를 다시 쓴 희영의 시선이 수환의 발목에 향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에 씁쓸한 빛이 스쳤다. 고개를 든 희영은 얼어붙어 있는 수환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여기서 나가죠.”

“나가자고?”

“잠시만요.”

희영이 어깨에 메고 있던 새카만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대체 저기에 뭐가 들어 있길래 저런 소리가 나는 거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수환은 희영이 두 손으로 잡기에도 힘든 쇠 절단기를 꺼내자 기겁했다.

“희영아, 그거.”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

희영은 왜인지 능숙하게 절단기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움에 말문이 막힌 수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족쇄와 쇠사슬이 연결된 부분에 절단기를 맞춘 희영이 짧게 말했다.

“연습 많이 했거든요.”

“…….”

그러니까 그런 걸 왜 연습했는데?

눈으로 묻자, 희영은 이번에도 짧게 대답했다.

“집착광공을 대하는 소시민의 소양이죠.”

“뭐?”

“끊을게요.”

파각, 이음새가 끊어지며 쇠사슬이 족쇄에서 떨어져 나갔다. 수환이 놀란 눈으로 발목을 내려다봤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 응.”

“그럼 어서 나가요. 이승현 오기 전에.”

“승현이?”

절단기를 가방 안에 집어넣은 희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불안한 눈으로 침실 안을 훑었다.

“타이밍이 좋았어요. 걔 지금 연강 듣고 있거든요. 당분간 CCTV는 확인 안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CCTV?”

“…….”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수환을 보며 희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메고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수환의 모습을 쭉 훑어 내리던 희영이 물었다.

“선배도 모자 쓰세요. 밖에 경호원들 있던데.”

“아.”

“나가는 거 들키면 안 될 거 아니에요.”

밖에 있는 경호원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화련의 명령으로 지키고 있는 그들은 수환이 감금당하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감금당하기 전에도 밖에 잘 나가지 않았으니까. 물론 이대로 감금이 더 지속되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겠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수환이 드레스 룸에 가서 얼른 모자를 꺼냈다. 그리고 후드와 긴 코트를 겹쳐 입었다. 쇠사슬은 끊었지만, 미처 빼지 못한 족쇄는 여전히 수환이 한쪽 발목에 남아 있었다. 긴 바지로 그걸 숨기고 수환이 몸을 돌렸다.

“가요.”

“음… 너희 집에 가는 거야?”

“일단은요.”

조금 불안했지만 수환은 아무 말 없이 희영을 따라갔다. 희영은 마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할 만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수환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 맨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대체 얼마 만에 밖으로 나온 걸까. 수환은 잠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희영의 차를 타고 이동하자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게 낯선 느낌이 들었다.

“다 왔어요.”

“아.”

도착한 곳은 대학가에 있는 원룸촌이었다. 희영이 들어가는 건물은 그중에서도 제법 깔끔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수환은 얼른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희영은 원룸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따라왔는데, 막상 작은 원룸 안에 둘만 있자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뭐 마실래요?”

“난 괜찮…….”

“저한테 물어볼 거 많으시잖아요.”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희영이 알아서 녹차를 타 왔다. 그리고 수환에게 내밀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커피는 못 마시니까 녹차 타 왔어요.”

“……!”

당연히 그럴 거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말하는 희영을 소파에 앉은 채로 올려다봤다. 수환이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런 걸 어떻게 알고…….”

“…….”

“대체 넌… 누구야?”

희영은 아무 대답 없이 수환의 앞에 녹차를 내려놨다. 한동안 그렇게 컵을 응시하던 희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곧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다 말할게요. 저는…….”

입술을 달싹이던 희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소설을 쓴 작가예요.”

애써 담담하게 내뱉은 말이 작은 원룸에 퍼졌다.

“뭐… 라고?”

희영의 말이 처음엔 선뜻 와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글자가 머릿속에 박혔다.

‘작가.’ 이 소설의 ‘작가.’

그래. 소설이니까,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작가가 눈앞에 있는 희영이라니.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희영을 바라보던 수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작가… 님?”

확인 사살을 하듯 희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환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희영은 단순한 빙의자라고 하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소설을 읽은 것만으로는 진수환과 화련의 사이를 짐작할 수 없었을 거고, 주건율에 대한 것도 그랬다. 소설에서는 메인공인 주건율의 악행이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주건율을 조심하라는 조언은 단순한 독자가 할 만한 게 아니었다. 직접 소설을 쓴 작가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작가님.”

“그냥 편하게 말하세요.”

“그래도…….”

“저에겐 자격이 없으니까요.”

“자격?”

희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수환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꽤 한참을 망설이던 희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수환을 바라보았다.

“제가 만약 후회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선배가 이 소설에 빙의하지 않았을 거라구요.”

“내가 빙의자라는 걸 알고 있었구나.”

“당연하죠.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는데요.”

어떻게 모르겠냐는 듯한 눈길에 수환은 조금 뻘쭘해졌다. 그렇게 티가 날 정도로 진수환과 다르게 굴었던 걸까.

……좀 그랬던 것 같다. 수환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희영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소설을 쓴 걸 줄곧 후회했었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 눈을 뜨니, 제 이름과 똑같은 엑스트라의 몸에 빙의해 있었어요.”

놀랍게도 희영이 빙의한 시점은 수환이 빙의한 때와 거의 비슷했다. 2학기가 시작하기 한 달 전, 한창 방학이었던 시기였다.

그나저나 후회라니. 소설을 쓴 작가가 후회할 일이 뭐가 있었을까. 고민하던 수환이 애써 위로하듯 말했다.

“저기, 이 소설이…… 남자인 나에게는 좀 난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되게 잘 쓴 소설 같은데.”

19금 피폐 BL 소설은 건전한 수환에게 있어서 높은 장벽이 있지만, 그렇다고 후회할 만큼 못 쓴 소설은 아니었다. 꽤나 단순하게 생각하는 수환을 보며 희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럼?”

“제가 후회한 이유는…….”

희영의 시선이 잠시 동안 수환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녀의 눈 속에서 기이하게 일렁이는 빛이 무엇인지 수환은 알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연민하는 듯하기도 했고,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것도 같았다. 어쨌든 굉장히 복잡한 눈빛이었다. 왜인지 그 눈을 보자 가슴 속이 술렁거렸다.

“이 소설은…… 사실 제가 쓰고 싶어서 쓴 게 아니었어요.”

“뭐?”

“돈이 좀 급했거든요. 원래 쓰고 있던 소설이 있었는데, 그건 상업적으로 흥할 소설이 아니었어요.”

희영은 차분한 얼굴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처음 썼던 소설은, 사실 소설이라고 하기보다는 혼자 적어 나가던 이야기에 불과했다. 혼자 상상하기만 하던 소년과 소년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서 무료 연재 사이트에 한 편, 두 편씩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키워드나 공수 관계도 몰랐기에 소개 글도 대충 써서 올렸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무언가를 바라고 소설을 올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충동과 자기만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희영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그 소설을 읽고 어떤 출판사에서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출판사를 잘 모르는 희영도 알 만큼 플랫폼에서 유명 소설을 곧잘 내는 이름 있는 곳이었다.

출판사는 메일을 보내 희영에게 다른 소설을 쓰길 권유했다. 지금 올리고 있는 소설은 명백하게 출간이 불가능하지만, 희영이 글을 쓰는 데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본 출판사 담당자가 다음 소설을 함께 써 보자고 한 것이었다.

희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제안을 거절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소설은 그저 취미일 뿐이었다. 어차피 본업이 따로 있어 출판사와 계약해 소설을 쓸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때부터 희영에게 불운이 닥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여행 중에 사고를 당하고, 다니던 회사에서는 어이없는 이유로 잘리고 말았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하던가. 희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돈이 필요했다. 단지 그 이유였다. 희영이 출판사에서 보낸 메일을 다시 읽은 것은.

뒤늦게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하자, 출판사 담당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희영이 써야 할 소설의 기획서를 보냈다. 아마 다른 작가에게도 제안했던 게 돌고 돌아 희영에게 온 모양이었다.

19금, 오메가버스, 피폐물. 온갖 자극적인 키워드의 향연이었다. 비슷한 키워드의 다른 소설을 쭉 읽어 본 뒤 희영은 모든 시간을 집필에 매달렸다.

그러나 쓰다가 말았던 첫 번째 소설에 미련이 남았기 때문일까. 희영은 충동적으로 캐릭터의 이름을 첫 번째 소설의 주인공들과 똑같이 썼다. 하지만 그 소설과 관계는 다르게 했다. 이 소설은 그 소설과 완전히 다르다고, 스스로에게 시위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쓴 두 번째 소설은 출간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녀가 원한 만큼의 돈도 벌 수 있었다. 모든 게 희영이 원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헛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주인공들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썼기 때문에 가슴 속에만 묻어야 하는 첫 번째 소설 때문일까. 희영은 갈수록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후회하는 마음만 들었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오랜 괴로움 끝에 술을 마시고 잠든 다음 날, 희영은 전혀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이름을 짓는 게 귀찮아서 대충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엑스트라 캐릭터의 몸으로 눈을 뜬 것이었다.

빙의하기 전에는 BL 소설 작가였던 김희영. 그리고 지금은 권희영이 된 채로, 그녀는 수환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렇게 된 거예요.”

“아.”

수환은 그저 놀라움에 탄성을 내뱉었다. 소설을 쓴 작가인 희영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돈을 위해 쓰고 싶었던 소설을 포기하고 다른 소설을 썼다니. 그래서 후회하고 눈을 뜨니 빙의했다는 이야기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위로? 그녀가 창조한 캐릭터도 아닌 자신의 어쭙잖은 위로 따윈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고민하던 수환이 물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도… 여전히 후회하는 거야?”

“…….”

수환의 물음에 희영은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잘 모르겠어요.”

빙의하기 전까지는 분명 후회했었다. 하지만 빙의하고 난 후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던 희영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소설에 엔딩이 나야 알 것 같아요.”

“그렇구나.”

수환도 역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영과 자신이 소설에 빙의하는 바람에 많은 게 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엔딩이 나지 않았다. 특히 승현이…… 원작과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알아야 했다. 정말 승현이 진수환과 역할이 바뀐 것인지 말이다.

“근데 승현이가 날 감금했었잖아.”

“…….”

“그건 소설에서 진수환이 했던 짓인데, 혹시 승현이가…….”

메인수에서 이물질이 된 거냐고, 그렇게 희영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말을 채 다 끝내지 못했다. 작가인 희영이 그렇다고 확인 사살을 한다면, 더 마음이 심란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영은 채 다 하지 못한 수환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달라요.”

“다르다고?”

“네.”

희망적인 대답이었다. 수환이 고개를 번쩍 들어 희영을 쳐다봤다. 그렇다면 승현을 되돌릴 방법이 있다는 걸까. 기대하는 수환을 마주 보며 희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는…….”

“응?”

“빙의하기 전의 기억이 없는 거죠?”

“……!”

확신하는 듯한 말에 수환이 눈을 크게 떴다. 희영과 달리 수환은 자신이 누군지 몰랐다. 줄곧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희영이 자신의 어색한 행동을 보고 진수환이 아니라는 건 눈치챘어도, 기억이 없다는 건 쉽게 알지 못할 텐데 놀라웠다.

“응, 어떻게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묻자 희영의 얼굴이 조금 복잡해졌다. 왜인지 말하길 꺼리는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희영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저는 빙의 전의 선배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뭐? 정말?”

수환은 희영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자신도 기억나지 않는 걸 희영이 알고 있다니. 혹시 희영의 주변 사람이었을까? 설마 가족은 아니었겠지?

막장 아침 드라마 같은 진부한 전개를 떠올리며 수환은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추측했다. 그러나 희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선배, 아니…… 수환아.”

희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러나 단순히 낮아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희영은 목이 멘 사람처럼 꽉 잠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환이 처음으로 보는 희영의 동요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희영이 떨리는 음성으로 마저 말했다.

“넌…… 내가 쓴 첫 소설의 수환이잖아.”

“……!”

무슨…… 그게 무슨 말이지.

수환은 이번에도 희영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희영이 쓴 첫 번째 소설. 이 세계의 배경이 되는 소설과 주인공의 이름이 똑같다고 했다. 그래서 수환은 당연히 그 첫 번째 소설에서도 주인공 두 명의 이름이 승현과 건율인 줄 알았다.

“내가, 그 소설의 진수환……?”

그러면 그 소설에도 이물질이 있다는 건가? 다른 소설의 이물질이 같은 작가의 이물질에 빙의하다니. 그건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 소설에선, 너와 승현이가 주인공이었어.”

“뭐?”

“내가 빌려 쓴 이름은 너희 둘뿐이야. 주건율이 아니라.”

“……!”

아. 수환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달걀의 껍질이 깨지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파삭, 하고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리고 온갖 기억들이 수환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윽……!”

“수환아!”

희영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쓰러지는 자신을 희영이 감싸 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곧 눈앞이 새카맣게 변해서, 수환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새까만 어둠은 곧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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