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물질은 메인수와 행복해지고 싶다 5화 (25/29)

5.

수환은 눈을 떴다.

뭐지? 깜박 졸았나?

머리를 좌우로 흔들던 수환은 주위의 풍경이 눈에 보이자 흠칫 놀랐다.

미쳤어. 이런 곳에서 졸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흠칫 몸을 떨던 수환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폐건물 안은 낮인데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정말 한시도 이런 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곧 철거될 구교사였다. 학교에서 오래된 건물을 방치하는 바람에 구교사는 밤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학생들이 담력 시험하는 장소가 되거나 일진들의 아지트가 되기 일쑤였다.

수환은 겁이 많은 성격이라 잘 오지 않는 곳이었는데, 어젯밤에는 마가 꼈는지 친구들의 꼬임에 넘어가 이곳에 왔었다. 그것도 학원이 끝나자마자 숙제가 남은 수학 교과서를 손에 든 채로 말이다.

원래는 친구에게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려고 그것만 달랑 들고 나온 거였는데, 그대로 친구들에게 끌려와서 야밤에 구교사 탐험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수환은 멋모르고 친구들을 따라 구교사 안에 깊숙하게 들어갔다가 쥐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동물이 내는 소리에 놀라 손에 든 교과서를 내던지고 도망치고 만 것이었다.

웃기게도 호기롭게 안쪽으로 들어갔던 친구들까지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구교사를 빠져나왔다. 수환도 너무 놀란 나머지 내다 버리듯이 던져 버린 교과서를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혼비백산해서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밤새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문제는 숙제가 남아 있는 수학 교과서였다. 오늘 교과서를 찾지 못하면 정말 난감했다. 내일까지 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쁜 놈들.”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 친구들의 책임도 있건만, 그들은 무책임하게 나 몰라라 했다. 그들도 간밤의 담력 시험이 꽤나 무서웠던지, 교과서를 찾으러 가는 수환을 아무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환은 수업이 다 끝나고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혼자 와야 했다.

“으, 무서워.”

아직 여름이건만 쌀쌀한 듯한 온도에 수환은 괜히 팔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쓰다듬었다. 구교사 전체에 흐르는 차가운 기운에 닭살이 돋은 것 같았다.

하, 빨리 찾고 나가야지. 수환은 금방이라도 뒤를 돌아 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교과서를 찾기 시작했다.

거기가 어디였더라. 구교사도 은근히 교실이 많아서 찾기 힘들었다. 여기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던 수환은 유난히 햇빛이 잘 드는 교실을 발견했다. 이곳은 비교적 다른 교실보다는 멀쩡한 느낌이 들었다. 찢어지고 낡은 커튼 사이로 햇빛이 가느다랗게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수환은 조금 몽환적인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 책상 위를 응시했다.

“아, 저거!”

언뜻 책처럼 보인 그것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수환이 찾던 수학 교과서였다. 얼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적은 이름을 찾았다.

[ㅅㅎ]

“맞네.”

특이하게 수환은 자신의 물건에 이름을 온전히 다 쓰지 않았다. 이름의 초성만 적어 놓는 버릇이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닫고 난 이후부터 계속 그랬다. 처음엔 재미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리다가 간신히 되찾은 교과서를 가방 안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거 내 건데.”

“……?”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수환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문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귀, 귀신인가? 여기는 귀신이 낮에도 나오는 건가? 어쩌지? 도, 도망, 도망을…….

패닉에 휩싸여 덜덜 떠는 수환에게 희끄무레한 귀신이 가까이 다가왔다.

“헉……!”

“…….”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귀신이 아니었다. 얼굴이 너무 창백하긴 하지만 엄연히 살아서 숨을 쉬는 사람이었다. 수환은 가까이 다가온 소년을 보며 놀란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예쁘다.’

게다가 소년의 미모가 범상치 않았다. 같은 교복을 입은 걸 보면 남자임이 분명한데, 예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은 이마를 단정하게 덮고 있었고, 조금 보이는 이마는 하얗고 단아해 보였다. 그 밑에 위치한 코는 어찌나 높은지, 종이를 대면 자를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입술은…….

‘아니, 무슨 생각하는 거야.’

같은 남자를 보면서 외모에 혹하다니, 이런 자신이 너무 파렴치하게 느껴졌다. 수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책, 내 거라고.”

“어?”

수환은 소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자신이 들고 있던 것을 내려다봤다. 방금 이 교실에서 찾은 수학 교과서였다. 수환은 경계하는 눈으로 낯선 소년을 쳐다봤다.

“아닌데. 내 건데.”

방금 분명 이름이 적힌 것도 확인했었다. 수환은 당당하게 책을 달라고 요구하는 소년이 어이가 없었다.

“하…….”

마치 꽃잎을 머금은 듯한 입술에서 짜증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수환은 눈살을 찌푸리는 소년에게 당황하며 손에 쥔 교과서를 꽉 잡았다. 그러자 소년이 찡그린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확인해 봐.”

“뭐?”

“교과서 펼쳐서 안에 확인해 보라고.”

“……?”

여전히 짜증이 가득 배어 나오는 말투에 수환이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손안에 쥔 교과서를 흘끗 내려다봤다.

그래, 까짓거 확인 한번 해 보자. 자기 거라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면 저 이상한 소년도 순순히 물러나겠지. 묘한 오기가 생긴 수환이 욱하며 교과서를 펼쳤다.

“……!”

그러나 호기롭게 수학 교과서를 펼쳐서 내려다보던 수환의 두 눈이 떨렸다. 동글동글한 글씨는 꽤 비슷해 보였지만, 자신의 글씨체가 아니었다. 게다가 수환은 볼펜 색깔을 다채롭게 쓰는 편이라 교과서 한바닥이 온통 알록달록해져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책은 검은색 볼펜으로만 복잡한 수식이 무심하게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어…….”

수환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내 말 맞지?’라고 말하는 듯한 소년의 얼굴을 보며 수환이 떨떠름한 어조로 사과했다.

“미, 미안.”

“…….”

“난, 진짜 내 건 줄 알고… 미안해.”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수환이 연신 사과했다. 조심스럽게 교과서를 내밀자, 소년은 여전히 싸늘한 얼굴을 하며 거친 손길로 교과서를 가져갔다.

“나도 이름을 그렇게 적거든. 나랑 이름 초성이 똑같나 보네.”

“…….”

“하… 하하….”

어색하게 웃는 수환의 얼굴을 흘끗 본 소년은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멋쩍게 입꼬리를 내린 수환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설마하니 이름의 초성이 똑같은 데다가, 이름을 초성만 적는 특이한 버릇까지 똑같다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책을 가져가려고 한 수환의 행동에 소년은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문가로 다가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수환은 머리를 긁적거리던 손을 내렸다.

어쩌지. 이곳이 아니라면, 더 안쪽에 있는 교실에서 교과서를 떨어트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무서워서 혼자서는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아.”

수환의 시선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냥 오늘은 돌아갈까. 아, 수학 선생님 너무 무서운데. 내일까지 꼭 숙제해 가야 하는데…….

어쩌지도 못하고 미적거리는 수환의 귀에 무심한 미성이 꽂혔다.

“뭐 해?”

“어?”

놀란 수환이 고개를 들었다. 소년이 무표정한 얼굴로 못 박힌 듯 서 있는 수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 안 찾을 거야?”

“아.”

“이쪽에서 수학책 잃어버린 거 아니야?”

“아, 맞아.”

수환이 얼른 대답하며 소년에게 뛰듯이 다가갔다. 곁에 선 수환을 힐끗 바라본 소년이 먼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이쪽 맞아?”

“응, 아마도.”

의외였다. 그대로 나가 버릴 줄 알았는데, 같이 찾아 주다니. 무뚝뚝해 보이는 소년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수환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같이 찾아 줘서 고마워.”

“…….”

수환의 감사 인사에 소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어갈수록 황폐해지는 구교사 안을 거침없이 걸을 뿐이었다. 수환은 흠칫흠칫 놀라며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그냥, 책을 찾아야 네가 빨리 나갈 거 같으니까 도와주는 거야.”

“아.”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소년의 대답에 수환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년이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수환은 웃으면서 재차 말했다.

“그래도 고마워.”

“…….”

소년은 또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흘끗 수환을 쳐다봤을 뿐이었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소년의 태도에 민망해질 만도 하건만 수환은 그저 맑은 얼굴로 소년의 뒤를 따라다녔다.

“어? 여기.”

그러다가 묘하게 눈에 익은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먼지 구덩이에 파묻힌 수학책을 찾았다. 수환이 감격한 얼굴로 먼지투성이의 책을 집어 들었다.

“네 거 맞아?”

“응!”

소년이 확인하는 말에 수환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초성만 적은 이름도 그렇고, 안의 필기 내용까지 모두 똑같았다.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수환을 보며 소년이 차갑게 말했다.

“그럼 어서 나가.”

“…….”

소년은 자신을 쫓아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이 무섭기 짝이 없는 곳에서 대체 혼자 뭘 하려고 저러는 걸까.

이곳, 방치된 구교사는 한때 일진들의 아지트였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경비원들과 교사들이 빡세게 순찰을 돌곤 했다.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간간이 경비원이 교대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방과 후부터 야자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런 시간이었다.

소년은 그런 틈을 타 이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어쩐지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소년을 곁눈질하다가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

“근데, 넌 이름이 뭐야?”

똑같은 색깔의 넥타이를 맨 걸로 봐서는 같은 학년인 건 확실한데, 명찰을 항상 차고 다니는 수환과 달리 소년은 명찰을 떼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돌려 수환을 쳐다봤다. 자신과 똑같은 초성을 가진 소년의 이름에 호기심을 느낀 것뿐인데, 왜인지 소년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흐르고 있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뭐?”

뭐지. 학교에서 유명한 애였나.

수환은 조금…… 아니, 무지할 정도로 주변 상황에 둔했다. 그리고 애매한 시기에 전학 오는 바람에 더욱 학교의 일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학교에서 유명인이 될 정도로 예쁜 얼굴이긴 했다. 수환은 소년의 차가운 분위기에 괜히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어, 나 얼마 전에 전학 와서 잘 모르는데.”

“……!”

소년의 갈색 눈이 조금 커졌다. 놀란 듯 보이던 소년이 이내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뭐지. 방금 엄청난 실수를 한 건가? 학교의 유명인을 알아보지 못해서, 혹시 내일부터 엄청난 괴롭힘을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수환은 청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일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승현. 이승현.”

“…뭐?”

“내 이름.”

무뚝뚝한 어조로 말한 소년이 수환을 흘끗 쳐다봤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승현. 이승현.

소년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환이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

수환은 밤을 새워 가며 수학 숙제를 했다. 하룻밤에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지만, 필사적으로 문제를 푼 끝에 겨우 숙제를 마칠 수 있었다. 다음 날 수업이 끝난 뒤 쉬는 시간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책상 위에 쓰러졌다.

“수환, 죽었냐?”

“얘 죽었어?”

“그런가 봄.”

“으으.”

책상 위에 엎어진 수환의 주위로 남학생 몇 명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수환을 뻗게 만든 원흉들이었다. 고개를 든 수환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친구들을 노려봤다.

“야야, 미안하다니까. 이거 우리 수화니가 좋아하는 초콜릿.”

“젤리도 있단다.”

“사탕은 어떠니?”

싫어하는 자신을 꼬셔서 밤에 몰래 구교사에 데려간 주제에, 무서워서 누구보다 빨리 구교사를 빠져나갔던 친구 놈들이었다. 게다가 교과서를 찾으러 다시 가는 수환을 외면하기까지 했다.

정말로 원망스러웠으나, 어쨌든 과자는 죄가 없었다. 수환은 입을 한껏 내밀며 친구들이 바친 간식을 야금야금 받아먹었다.

“아, 근데 있잖아.”

“응?”

수환의 입에 열심히 과자와 젤리를 넣어 주던 친구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햄스터처럼 볼이 부풀어 오른 수환의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되물었다.

“왜?”

“음… 그게.”

입안에 있던 초코 과자를 목구멍 안으로 삼킨 수환이 겨우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너희들, 승현이라고 알아? 이승현.”

“이… 승현?”

승현의 이름을 듣자 친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분위기가 왜 이러지? 친구들의 반응에 수환은 조금 난감해졌다.

역시 그런 건가? 이름도 말해선 안 되는, 그런 유명 인물?

왜인지 말하길 꺼리는 친구들을 보며 수환이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 걔한테 찍힌 거 아니야?’

어쩌면 평온한 학교생활은 이제 다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수환은 자신이 일진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 받는 장면을 상상했다. 물론 아직까진 직접 겪어 보지 않아서 드라마나 웹툰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오른 것뿐이었다.

사실 구교사에서 봤던 소년이 그런 애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은 겉으로만 봐선 모르는 법이었다.

“너희들… 계속 나랑 친구 해 줄 거지?”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수환의 말에 친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한 남학생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승현이면… 걔 맞지? 3반의…….”

“야, 야.”

왜인지 친구들에게서 꺼림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수환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음, 그게.”

어리둥절한 수환을 앞에 두고 친구들은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안 좋은 소문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공공연하게 떠도는 이야기니 수환이 알아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학교에 떠도는 소문 같은 걸 잘 모르기도 하고. 눈치를 보던 한 남학생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걔 자문중 나왔었거든.”

“자문중?”

“응, 그 명문 중학교.”

“아.”

거기 애들 진짜 공부 잘한다던데.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공부도 잘하는구나. 걔는 못 가진 게 없네. 부럽다. 수환이 부러움을 느끼며 속으로 감탄을 줄줄 내뱉었다.

“근데 왜 여기 왔대? 그쪽 특목고 안 가고.”

“그게.”

수환의 물음에 친구들이 또 눈치를 봤다. 대체 뭔데 저러는 걸까. 의아해하는 수환을 향해 결국 처음 입을 열었던 친구가 다시 말을 이었다.

“3학년 때였나, 자문중 수학이 걔 성추행하려다가 걸렸잖아. 그거 땜에 잘렸다던데.”

“뭐?”

“그리고 걔도… 수학한테 뭐 해 주고 시험 문제 알았다는 소문도 있고……. 걔 수학 성적 자문중 톱이었으니까.”

“……!”

작게 속삭이는 말에 수환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야?”

“뭐, 소문이기는 한데. 그래도 선생 한 명 실제로 잘리고, 걔도 그때 학교 잘 안 나오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걔 남자치고는 너무… 예쁘게 생겼지.”

“수학 말고도 이승현한테 집적댄 인간들 많았을걸?”

“내가 들은 건, 선생들뿐만이 아니고…….”

“그래도 남자가 남자를… 너무 역겹다.”

갑자기 터진 수많은 얘기에 수환은 혼란을 느꼈다. 손을 들어 올려 친구들의 말을 막았다.

“잠깐, 잠깐 얘들아.”

“응?”

의아한 시선을 마주하며 수환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다 소문이라는 거잖아.”

“뭐… 그렇지.”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 애 잘못이 아닌 거 같은데.”

교사가 학생을 성추행하는 건 어른의 잘못이다. 학생에게는 전혀 잘못이 없는 일이다. 그 일로 피해자를 탓하는 건, 2차 가해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승현에게 혹한 교사가 시험 문제를 유출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믿기지 않는 얘기일뿐더러, 그의 수학 교과서를 직접 봤던 수환으로서는 더더욱 믿기 힘든 소문이었다. 필기한 것만 봐도 열심히 공부하는 티가 났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 아이는 누구보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그런데 외모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그런 뒷말을 들어야 한다니.

수환은 저도 모르게 욱하며 친구들을 노려보듯이 응시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어딘가 찔리는 얼굴로 이것저것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소문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진짜 믿는 건 아닌데,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이 학교에서 그 소문 모르는 건 수환이 너밖에 없을걸?”

자극적인 이야기일수록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법이었다. 처음엔 작은 소문에 불과하더라도, 나중엔 이것저것 살이 붙어서 더 자극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수환이 오늘 들은 건 소문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렇구나.”

수환은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던 아름다운 소년을 떠올렸다. 자신을 한껏 경계하던 승현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악질적인 소문 때문에 스스로를 그런 곳에 고립시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왜인지 수환은 그가 신경 쓰여 참을 수가 없었다.

“근데 수환이 넌 걔를 어떻게 알아?”

“어?”

“뭐, 어디서 들었나 보지. 주변 학원에도 소문 다 났을걸?”

사실은 소문을 들은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당사자를 직접 만나 이름을 알게 된 거지만, 수환은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 학원에서 잠깐 들었어.”

“역시.”

“수화니 학원 어디 다니더라?”

“나랑 같은 데 다니잖아.”

“아, 나도 학원 옮길까? 거기 국어쌤 좋음?”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빠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 울리고 다음 수업으로 넘어갔다. 한껏 떠들어대던 친구들이 자리로 돌아가고 조용해진 교실 안에서 수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어쩐지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잔뜩 들어 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수업의 내용보다 방금 친구들이 한 말들이 계속 떠다녔다.

승현이 자꾸 신경 쓰였다. 수환의 이성은 그를 멀리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수환은 방과 후에 또 구교사를 찾아갔다. 여전히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구교사 안으로 혼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꾹 참으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어디였지?”

문제는 구교사 안이 워낙 넓어서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라는 거였다. 한참 헤매던 수환은 겨우 눈에 익은 교실을 찾아갈 수 있었다. 유난히 햇빛이 잘 들어오는 그 교실이었다. 문가로 다가간 수환은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

수환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소년은 창가에 반쯤 앉은 채 손에 든 책을 읽고 있었다. 창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소년의 갈색 머리카락이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였다. 그의 뒤로 낡은 커튼이 몽환적으로 흔들렸다. 수환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쳐다봤다.

“…뭐야.”

“……!”

“왜 또 왔어?”

몰래 훔쳐보고 있던 수환을 바라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수환은 문가에서 주춤거리며 승현을 쳐다봤다.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승현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한심하게 우물쭈물했다.

“아, 그게.”

머뭇거리던 수환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승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자신의 걸로 착각한 승현의 수학 교과서가 올려져 있었던 책상 근처였다. 수환은 주머니에서 과자 종류의 간식을 꺼내 책상 위에 수북이 올려놓았다.

“이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데 한번 먹어 봐.”

승현이 시선이 온갖 종류의 과자와 초콜릿을 훑었다.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승현이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단 거 안 먹어.”

“어…….”

단 걸 안 먹다니. 수환은 살면서 그런 사람을 처음 봤다. 군것질거리를 좋아하는 그의 주변에는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하던 수환이 가방까지 열어 안을 뒤적거렸다.

“그럼 이건?”

“…….”

“이거 많이 안 달고 맛있는 건데.”

가방을 뒤진 끝에 수환이 발견한 건 과일 젤리였다. 각종 과일 맛의 젤리는 수환이 특히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다. 가끔 초콜릿은 너무 달다면서 안 먹는 사람들도 과일 젤리는 곧잘 먹기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책상 위에 둔 간식에 손도 안 대는 승현에게 충격을 받은 탓인지, 수환은 충동적으로 과일 젤리를 승현을 향해 곧장 내밀었다. 그런 수환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긴장해서 그런지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수환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

젤리를 바라보던 승현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들었던 그 짜증스러운 기색의 한숨이었다. 젤리를 들고 있는 수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왜? 너도 내가 수학 좆 빨았는지 궁금해?”

“…뭐?”

수환은 한동안 승현이 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눈을 크게 뜨던 수환은 그제야 인지하지도 않았던 승현의 더러운 소문들을 뒤늦게 떠올렸다. 수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꺼져. 거슬리니까.”

“……!”

승현의 얼굴에 떠오른 불신과 증오를 마주한 수환은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저 정말로 고마워서 다시 찾아온 것뿐인데, 승현은 자신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수환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승현이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꺼지란 말 안 들려?”

“어…….”

수환은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면전에 대고 꺼지란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성격이 순한 편이라 가끔 답답하다는 소리는 들어도, 적을 만드는 성정이 아니다 보니 대놓고 앞에서 심한 말을 하거나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순간, 수환은 엄청난 혼란을 느꼈다.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한껏 초조해졌다. 그렇게 머뭇거리다 결국은 단 한마디밖에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고개를 숙인 수환은 제 손에 올려진 과일 젤리를 쳐다봤다. 승현을 향해 내밀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민망하고 부끄러워졌다. 괜히 혼자 있고 싶은 사람에게 찾아와서 좋지 않은 말만 잔뜩 들었다. 아무리 수환이라고 해도 계속 모르는 척 치댈 수가 없었다.

“이것도, 여기 놔둘 테니까.”

“…….”

“…방해해서 미안해.”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과자 옆에 젤리를 올려놓은 수환은 도망치듯이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대로 구교사에서 완전히 나가고도 한참을 더 달렸다. 왜인지 눈가가 시큰해졌다.

***

수환은 다신 구교사에 가지 않기로 다짐했다. 평소에도 자신이 좀 오지랖이 넓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꺼지란 말을 듣고 다시 찾아갈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는 않았다.

“하아.”

하지만 왜일까. 수환은 하루 종일 고민하다가 결국 슬금슬금 구교사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계속 구교사 앞을 혼자 왔다 갔다 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얘기하면서도 그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자신이 내미는 젤리를 바라보던 어두운 갈색 눈이 말이다. 얼음장 같은 얼굴로 심한 말을 내뱉으면서, 왜 그가 더 상처 입은 듯한 눈을 하는 걸까.

“……미쳤어.”

상처받은 눈은 무슨. 그냥 짜증 나서 노려보는 것뿐인데 혼자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꾸 찾아오는 것도 민폐였다. 수환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끙끙거리기만 했다.

“…….”

그리고 승현은 그 모습을 창가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은 머리통이 안으로 들어올 듯 다가오다가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가 다시 슬쩍 고개를 돌린다. 승현은 아까부터 수환이 그러는 걸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제는 왜인지 화가 났다.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내미는 맑은 얼굴에 짜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

분명 누구에게도 미움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저 소년에게서는 사랑만 받고 자란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흘렀다. 승현은 보기만 해도 행복한 사람의 아우라가 풍기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어쭙잖은 동정심으로 승현에게 다가온 사람이 꽤 있었다. 하지만 끝은 다 좋지 않았다. 그들이 승현에게 바란 건 불행한 삶에 괴로워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불쌍한 사람을 실컷 동정하며 위로해 주는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끼는 위선자들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승현은 스스로를 한 번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저런 소문들로 고립된 지금의 삶이 썩 마음에 들었다. 문제가 크게 터졌던 중 3의 겨울, 그전까지는 이 외모 때문에 온갖 귀찮은 일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말이다.

‘승현아, 너는 참 특별한 사람인 것 같아.’

그저 남들보다 조금 외모가 뛰어난 것뿐인데, 자신은 항상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상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가차 없는 말을 들었다. 자신은 그들의 환상을 채워 주는 예쁘장한 인형인 것 같았다.

당시의 수학 교사가 그에게 성추행을 시도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도하기도 전에 미수에 그쳤다. 승현을 걱정한 부모님이 그를 어린 나이부터 각종 무술을 배우게 한 덕에, 승현은 지금 실력이 상당한 유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일은 수학 교사가 학생에게 성추행을 시도한 것보다, 승현이 그를 패서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든 일이 훨씬 더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퍼져나가면 곤란한 얘기였다. 가정도 있는 남자 교사가 같은 남자인 어린 학생에게 흑심을 품은 것도, 그를 흠씬 두드려 팬 학생에 대한 것도 말이다. 어쨌든 승현은 목표로 했던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지역까지 옮겨 다른 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하지만 소문은 끈질기게 승현을 따라다녔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임에도 사람들은 자극적인 얘기에 혹해서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다. 승현의 아름다운 외모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그가 차갑고 쌀쌀맞게 구는 것에 더욱 악질적인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몸을 팔아 시험 문제를 받고 좋은 성적을 냈다는 소문에는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승현은 딱히 소문을 정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소문이 심해진 덕분에 아무도 귀찮게 말을 걸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멀리하니 무척 편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찾아 줘서 고마워.’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지트에 다른 사람이 침입해서 거슬렸던 것뿐이다. 게다가 이름의 초성만 적는 버릇이 똑같아서 자신의 책을 멋대로 가져가려고 했다. 불쾌한 마음에 톡 쏘듯 말했지만, 어쩐지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니 혼자 두고 나가기가 꺼려졌다.

‘그래도 고마워.’

어두운 구석 하나 없이 웃는 얼굴에 승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저 남자애도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을 테고, 그 이상한 소문들도 다 알면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굴고 있는 것뿐일 터였다. 가증스러운 모습에 괜히 흔들리지 않으려 일부러 입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고 더욱 차가운 표정을 고수했다.

‘근데, 넌 이름이 뭐야?’

‘어, 나 얼마 전에 전학 와서 잘 모르는데.’

그런데 정말로 자신을 모르고 있었던 걸 줄이야. 승현은 순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소년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줬다.

‘이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데 한번 먹어 봐.’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찾아온 소년이 온갖 핑계를 대며 말을 거는 것을 보고 후회했다. 알려 주지 말걸. 타인의 분위기에 민감한 승현은 소년이 그새 자신의 소문을 누군가에게 듣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안 그러던 소년이 묘하게 초조한 몸짓으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너도 내가 수학 좆 빨았는지 궁금해?’

‘…뭐?’

소년의 순진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싶었다. 가증스럽게도 모르는 척하는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 충동에 평소보다 말이 더 심하게 나갔던 것도 같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꺼져. 거슬리니까.’

‘……!’

소년의 충격받은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의도한 대로 소년이 같잖게 평정을 유지하던 얼굴을 깨트릴 수 있었지만, 왜인지 마음은 좋지 않았다. 험악한 말 몇 마디에 제대로 항변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던 소년은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했다.

‘…방해해서 미안해.’

시무룩해하며 뒤를 돌아 나가는 소년을 향해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 자신에게 깜짝 놀라며 승현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승현은 구교사 안으로 들어올지 말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소년에게 다가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교실에서 나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가, 아직도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과자와 젤리를 보고 못 박힌 듯 제자리에 섰다.

만약, 만약 소년이 이번에도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그가 올려두었던 과일 젤리에 손을 뻗었다. 손안에서 투명한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승현은 망설이듯이 다가오는 작은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눈 떠.’

‘…….’

‘수환아.’

“……!”

자꾸만 감미롭게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에 수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버릇처럼 구교사를 향하던 발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발그레하게 물든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직도 입술에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소년의 부드러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던 감촉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수환은 한껏 붉어진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길고양이처럼 자신에게 까칠하게 굴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언제부턴가 본모습을 드러낸 승현은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다정하게 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환은 승현이 그러는 게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승현이는… 날 좋아하는 걸까.’

두근거리는 심장께를 손으로 꾹 누르며 수환이 속으로 생각했다. 어제 입까지 맞춘 마당에 이런 고민을 하는 게 기가 막혔지만, 놀랍게도 아직 그 말을 서로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어제는 하필 경비원 아저씨가 오랜만에 순찰을 도는 바람에 둘 다 혼비백산하며 구교사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온 뒤에는 왜인지 서로 민망해져서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헤어지고 말았다.

‘난… 좋은 거 같은데.’

하루 종일 손가락으로 문질러서 그런지 거칠어진 입술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수환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엔 남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승현에게 관심이 가고 신경 쓰였다. 승현을 향한 악의적인 소문들이 대부분 헛소문이라는 걸 알게 되고는 조금 동정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승현은 자신의 하찮은 동정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름답고 강한 사람이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수환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서 가서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예전부터 계속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러면 그는 환한 얼굴로 자신에게 웃어 줄 것이다.

쿠궁.

“……어?”

막 한 걸음을 떼었을 때, 마치 지진이 난 듯 땅이 크게 울렸다. 수환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수환은 눈앞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게, 대체…….”

쿠구궁.

세상이 팽글팽글 돌았다. 어지럼증을 느낀 수환이 땅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속이 좋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안에 든 것들을 모두 쏟아 낼 것 같았다.

“윽.”

왜 이러는 거지. 왜 이렇게…… 괴로운 거지.

누군가가 머릿속을 반죽처럼 주무르는 것 같았다. 수환이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앞으로 기어가려던 그 몸짓은, 이내 또다시 거세게 치고 들어오는 통증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수환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승… 현아…….’

그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던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대로 수환은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게 ‘이 세상’에서 수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좀 늦네.”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어 내며 승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항상 이 시간쯤 오던 손님이 오늘은 잠잠했다. 본격적으로 구교사 철거 작업이 시작되면 앞으로는 이곳에서 만날 수 없으니, 만나는 장소를 새로 정해야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당연히 이곳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역시 어제의 일이 그 아이에게 좀 충격이었던 걸까. 승현이 수려한 얼굴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 그에게 입을 맞췄던 건 다소 충동적인 일이었다. 자신의 생일을 알게 된 수환이 선물을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선, 비 맞은 강아지마냥 떨면서 눈치를 보며 가지고 싶은 게 없냐고 묻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놀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착하고 순진한 수환에게 자꾸만 음험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자신은 처음부터 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눈치도 없이 수환이 불쑥불쑥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그때부터.

“…또 입 맞추고 싶은데.”

속마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불쑥 말을 내뱉은 승현은 달콤한 맛이 느껴지던 입술을 떠올리며 제 입술을 혀로 핥았다. 단 것을 좋아해서 자주 먹는 그 아이는 입술도 달고 숨결마저 달았다. 아이들에게나 풍기던 은은한 분내가 승현의 코끝을 맴돌았다. 어제 두 번이나 입을 맞췄지만 승현의 욕구는 조금도 충족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원하게 되어 몸이 꽤 달아 있었다.

“근데 왜 안 오지.”

왠지 초조해진 승현이 기대고 있던 창가에서 몸을 떼며 교실 안을 어슬렁거렸다. 이미 수환이 와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런 적이 없었기에 승현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수환은 자신과 다른 마음이었던 건 아닐까. 자신을 보는 눈길에 확신을 가지곤 했지만, 어쩌면 그저 착각인 걸 수도 있었다. 친구 이상이 될 마음이 없었는데 괜히 건드렸던 거라면…….

“젠장.”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 승현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잔뜩 구겨진 얼굴에서 숨기지 못한 불안함이 드러났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게 수환을 포기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계속 그 아이의 옆에 있고 싶었다.

결국 그날 수환은 구교사에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승현은 이번엔 자신이 그를 찾아갈 차례라는 것을 깨달았다.

“…10반이라고 했었나.”

작게 중얼거린 승현은 수환의 반이 어딘지 떠올렸다. 참새처럼 쉬지 않고 재잘거리던 수환은 자신의 반과 사물함 번호, 친구들의 이름과 그들과의 일화까지 매일 쉬지 않고 말하곤 했다. 3반과 10반은 층이 달라서 수업이 끝나고 찾아가면 엇갈릴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쉬는 시간에 먼저 만나서 나중에 만날 약속을 정해야 했다. 전날에 문자도 해 봤지만 아직까지 수환에게 온 답장은 없었다.

설마 정말로 관계를 끊어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승현은 굳은 얼굴로 10반 앞에 섰다. 그리고 문에서 나오는 한 남학생을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수환이 좀 불러 줄래?”

“어? 수환?”

남학생은 마치 낯선 이름을 들은 사람처럼 의아해하더니, 승현을 보고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미약하게 얼굴을 찌푸린 승현이 재차 물었다.

“수환이 지금 없어?”

“아… 어… 그게.”

“수환이 말야. 진수환.”

“진… 수환?”

“같은 반인데 몰라?”

“……?”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남학생을 앞에 두고 승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다른 학생에게 물어봐야 하나 했는데, 마침 익숙한 얼굴이 승현의 앞을 지나갔다.

“저기, 너!”

“응?”

비록 층이 달라 학교 안에서는 수환과 잘 마주치지 못했지만, 가끔 멀리서 보면 수환의 무리 안에 있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승현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 수환이 친구 맞지?”

“뭐? 나?”

“그래.”

“어… 근데 누구 친구라고?”

“수환이, 진수환.”

“그게 누군데?”

“뭐?”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나. 승현의 고운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무슨 제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새들도 아니고, 자신에게서 수환을 지키려고 뻔뻔하게 모르는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승현이 화가 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쿵.

“윽……!”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두통이 일었다. 승현이 비틀거리며 머리를 손으로 감싸자, 앞에 있던 남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뜩이나 별안간 찾아와서 모르는 사람에 대해 묻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왜 또 이러나 싶었다.

“야, 너 괜찮…….”

“안 돼……. 가져가지 마, 안 돼…….”

끔찍한 기분이었다. 무언가가 지우개로 지우듯 누군가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고 있었다. 승현은 희미해지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 제발……. 나한텐 그 애밖에 없어, 제발…….”

크게 떠진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승현은 그 아이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아아, 아아아…….”

승현의 입에서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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