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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2화 (2/95)

2화

도시는 삭막했다. 다율의 고향과 다르게 이곳에는 온통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가득했다. 도로를 빠르게 질주하는 차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다율은 삭막한 서울 생활에 조금씩 지쳐갔다. 작지만 아늑했던 다율의 둥지와 산속의 맑고 투명한 공기, 밤하늘의 별들이 그리웠다. 다율은 기약 없는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했었다.

하지만 권지하를 만나고부터는 이곳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다정함에 기대어 말이다.

“…멋있다.”

혼자서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는 와중에 드디어 제작 발표회가 끝났다.

다율은 서둘러 일어나 무대 계단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의 앞을 쑥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눈을 크게 뜨며 올려다보니 이 드라마의 조연이자 서브남인 천재욱이었다.

원래는 인기 없는 아이돌이었는데 대박 웹드라마를 하나 물어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기도 했다. 반드르르한 낯에 키에 비해 마른 몸매가 아이돌 출신임을 짐작게 했다.

“누구지? 단역인가. 이름은 뭐야?”

“단역 아닌데요. 저 권지하 배우님 매니저입니다.”

“진짜로? 곱상한 게 얼굴이 매니저나 할 관상이 아닌데 권지하 매니저구나. 권지하 매니저 원래 이렇게 안 생겼었는데 언제 바뀌었대?”

얼핏 봐도 20대 초반밖에 안 되었을 나이인데 말끝마다 권지하, 권지하다. 다율은 팍팍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깔았다. 순둥한 눈망울의 그가 위협적으로 나오자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저기요. 저희 배우님보다 한참 어린 데다 데뷔도 늦지 않으세요? 왜 함부로 이름 부르는 거예요?”

“어라, 이것 봐라. 자기 배우라고 감싸는 거예요? 나 섭섭하네. 안면이나 트고 지내려고 했더니만.”

천재욱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휙 젖혔다. 다율은 그의 거만한 태도가 너무나 재수 없었다.

“안면이야 틀 수 있겠죠. 그렇지만 저희 배우님에 대해서는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다율 씨.”

그때 두 사람의 뒤쪽에서 나긋한 저음이 들려왔다.

“배우님.”

“뭐 해요. 얼른 오지 않고.”

권지하가 다율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천재욱을 똑바로 응시했다.

“음… 그쪽이 후배님 아니신가? 나랑 서로 말 놓기로 한 기억은 없는데 이름을 막 부르시네.”

“헉. 죄, 죄송합니다.”

천재욱이 몸을 움츠리며 잔뜩 쫄아붙은 티를 냈다. 권지하는 훗 하고 입술 사이로 비웃음을 내뱉은 다음 그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서늘하고 냉정한 시선이었다. 미소 짓고 있지 않을 때 권지하는 섬찟할 정도로 차가운 인상이었다.

“다음부터 내 매니저한테 말 걸고 싶으면 나한테 허락받아요.”

“아… 예, 예. 죄송…합니다, 선배님. 허락받겠습니다.”

천재욱이 고개를 굽실거렸다. 연예인으로 구른 짬밥이 3년 차. 눈치 빠른 천재욱은 이 남자가 죽었다 깨나도 매니저와의 만남을 허락해 주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저 눈빛. 사람을 압도하는 권지하의 눈빛에 얼어붙은 천재욱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우물쭈물 물러났다.

“이 매니저. 우리는 이만 가죠.”

권지하가 다율을 자기 옆으로 끌어당기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조금 전 천재욱을 몰아붙일 때와는 달리 상냥하고 다정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러고는 방금 화를 냈던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아름답게 웃었다. 다율은 그의 우아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고 보니까 배고프네요.”

“우리 매니저님이 배고프다니 큰일이네. 얼른 뒤풀이 장소로 가요.”

행동뿐 아니라 덧붙이는 말조차 달콤하고 다정했다. 다율은 언제나 그랬듯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네.”

하지만 다율은 가슴 떨림을 감추며 조용히 대답만 했다. 이 마음을 드러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권지하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상대였다. 같은 남자인 건 둘째 치더라도 수준 차이가 너무 극심했다.

상대는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하는 톱스타에 불세출의 미남이 아닌가. 거기다가 돈은 측정 불가능하게 많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줄 리 없다는 게 다율의 결론이었다.

어릴 때 독립한 이후로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아온 탓에 다율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내가 집이 있나 돈이 있나.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권지하 뺨치게 잘생긴 것도 아니다.

다율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많이 모자란 사람, 아니 수인이었다. 그러니 이 마음을 숨기고 그저 권지하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잘난 인간과 맺어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자. 내 꿈은 서울에서 인간인 척 무사히 살아남아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거다.

현재 다율의 꿈은 ‘서울에 내 집 마련’이었다. 그는 안전하고 따뜻하고,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을 그런 보금자리를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월급의 반을 떼어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돈을 모으는 중이었다.

홈, 스위트 홈. 그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거야. 사랑 따윈 사치다. 그것도 이뤄지지 못할 사랑이라면 더…! 다율은 평상시에도 늘 모진 마음을 먹으려 애썼다.

그렇지만 가끔은 무지하게 속이 쓰렸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권지하가 다른 사람과 붙어 있는 꼴을 볼 때 그랬다.

“지하 씨! 우리 연말 시상식 때 근처에 앉았는데 기억나요? 제 번호 드리려고 했는데 타이밍 놓쳐서 아쉬웠어요. 오늘은 이따가 번호 교환해요.”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배우가 권지하에게 끝도 없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다율은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여배우는 연기력 논란이 있긴 하지만 그만큼 뛰어난 미모로 요즘 인기 반열에 오른 윤혜미라는 인물이었다.

권지하가 우겨서 스태프 전용 테이블 대신 그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기는 했다마는 윤혜미와 조화를 이루는 풍경을 보자니 괜히 여기 앉았다 싶었다.

신경 끄고 밥이나 먹어야지 싶었지만 다율이 좋아하는 호두멸치볶음이 멀리 떨어져 있어 밥반찬 삼기도 어려웠다. 반찬 그릇에 애절한 눈빛만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권지하가 긴 팔을 그릇 쪽으로 뻗었다.

“이건 우리 매니저님이 좋아하는 거네.”

“아 고맙습니다.”

이렇게 자상하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권지하의 특징이었다. 다율의 마음속에서 억울함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괜히 좋아하나. 쓸데없이 다정하고 자상해서 좋다고!

다율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반찬을 집어 먹었다. 물론 호두멸치볶음에서 호두만 골라서 쏙쏙 빼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지하 씨…?”

“고기반찬도 먹어야죠. 소불고기 덜어 줄게요.”

권지하는 윤혜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다율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너무 호두만 먹지 말라는 둥 고기도 먹어야 키가 큰다는 둥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지하 씨.”

“잠시만요. 우리 매니저님 밥 좀 챙겨드리고요. 이 상에서 전복구이가 제일 비싼 거니까 우리 매니저님이 내 것까지 두 개 먹어요.”

윤혜미의 말허리가 잘렸다. 그녀는 다소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주연배우끼리만 밥을 먹는 게 이 세계의 룰인데 매니저를 옆에 앉힌 것도 모자라 맛있는 반찬을 죄다 몰아주고 있다니. 어이없는데?

“감사합니다. 배우님, 저 신경 쓰지 말고 윤 배우님하고 이야기 나누세요.”

“이 매니저 먹는 것부터 보고.”

“괜찮아요. 얼른 담소 나누세요.”

다율이 손을 내저었다. 권지하는 그제서야 마지못해 여배우와 영혼 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방금 시상식 어쩌고 했는데 잘 못 들었어요. 미안해요. 내가 오늘따라 집중력이 약하네.”

“흠흠. 연락처 교환 못 해서 아쉽다고요.”

“아아, 그러셨구나. 혜미 씨 속상했겠어요.”

권지하가 공감한다는 듯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니 제 연락처는 우리 매니저 통해서 여쭤보세요. 기꺼이 제공해드릴 겁니다.”

“예…?”

윤혜미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니 밥 먹이는 꼬락서니가 심상치 않은데 얼어 죽을. 미쳤다고 내가 저 매니저한테 네 번호 묻겠다!

윤혜미와 다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다율은 ‘이 분위기 뭐지’, ‘나는 영문을 모릅니다’라는 표정이었다. 그 낯을 보고 있자니 윤혜미는 부아가 치밀었다.

“알았죠? 그럼 우리 이제 식사합시다.”

“아… 네. 맛있게 드세요.”

윤혜미는 열심히 밥그릇을 긁었다. 권지하는 그새 식당 직원을 불러 호두멸치볶음을 리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꼴값이었다.

***

회식이 끝났다.

오늘의 할 일이 반쯤 마무리되었구나. 퇴근은 모든 직장인에게 행복감을 안겨다 주기 마련이다. 다율은 간만의 이른 퇴근에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권지하의 짐을 챙겼다.

“배우님. 이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갑시다.”

뒤풀이 식당 정보가 노출되었는지 바깥에 나와 보니 대포 카메라와 기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다율은 능숙하게 앞장서 권지하의 몸을 감싸듯 걸었다.

제 덩치의 1.5배는 되는 남자를 보호해 보겠다며 용을 쓴 다음 다율은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시동을 켜며 땅콩 캐러멜을 입에 쏙 넣었다.

“밀리지 않는 시간이라 금방 도착할 거예요. 주무세요.”

밤 9시가 넘은지라 마포대교에는 차량이 많지 않았다. 다율은 권지하가 편안하게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다율은 조수석의 권지하를 힐긋 봤다가 다시금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한강을 건너는 동안 빌딩들은 저마다의 네온사인을 켜고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펼쳤다.

조금 쓸쓸하고 딱 그만큼 행복하네.

늘 달기만 했던 땅콩 캐러멜에서 묘한 쓴맛이 나는 듯했지만 그건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다율은 차량들의 행렬에 섞여 밤 깊은 도로를 달렸다.

한참을 달리자 한강 변에 위치한 주상복합 아파트촌에 진입할 수 있었다. 다율은 꼼꼼하고 안전하게 주차를 마치고 권지하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세요. 배우님. 다 왔어요.”

“으음… 벌써 도착이네.”

“네. 집에 들어가셔야죠.”

“알았어.”

졸림을 덕지덕지 묻힌 채로 권지하가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우뚝 솟은 주상복합 아파트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덩치 큰 권지하를 먼저 밀어 넣고 다율이 뒤를 따랐다.

성능 좋은 고급 엘리베이터는 그들을 금방 39층까지 실어다 날랐다. 39층은 한 층에 한 집만 있는 구조였다.

다율은 세상에 딱 세 사람. 자신과 권지하 그리고 소속사 실장만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권지하가 먼저 거실로 들어서며 기지개를 켰다.

“아, 잘 잤다. 고마워요.”

“고맙다니요. 제가 할 일인 걸요.”

다율이 권지하에게 다가가 셔츠 단추 몇 개를 풀러 주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다율은 자신의 업무라고 여겼다.

“음… 그럼 이 매니저님.”

“네.”

“전 안방 욕실에서 씻을게요. 매니저님은 적당히 다른 욕실에서 씻어요.”

“알겠습니다.”

다율이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커다란 손을 들어 가볍게 그의 장밋빛 뺨을 쓸어내렸다.

“그럼 10분 안에 내 침대로 와요.”

권지하가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을 유혹할 때나 쓰일 법한 톤으로 나른하게 읊조렸다. 눈빛은 쓸데없이 그윽했다. 다율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목덜미를 긁었다. 이럴 때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한 듯 할 말 없는 신세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답.”

“…네. 금방 갈게요.”

세상사란 그렇게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마냥 무난해 보였던 매니저 일에는 유독 힘겨운 복병 요소가 존재했다.

다율은 권지하의 잠자리 상대였다.

‘그’ 잠자리 상대는 아니고 권지하가 껴안고 자는 뜨끈뜨끈 보온 물주머니 같은 존재였다. 일반인들이 죽부인을 안고 잔다면 권지하는 다율을 안고 잤다. 정확히는 그래야만 잠들 수 있었다.

권지하의 소속사 YU엔터테인먼트가 24시간 상주하며 함께 숙식할 매니저를 구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권지하는 인간 핫팩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저체온증을 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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