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24화 (24/95)

24화

“잘 잤어요?”

“아… 네.”

평소 같았으면 발랄하게 아침 인사를 했을 텐데 아까까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다율은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권지하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동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흠.”

권지하는 팔짱을 끼고 다율을 쳐다보더니 살짝 웃었다.

“이 매니저.”

“네?”

“까치집 엄청나다. 까치 가족이 둥지 틀어도 되겠어요.”

“아 죄… 죄송!”

다율이 붕붕 뜬 제 뒷머리를 정돈하려 허겁지겁 손을 들었다. 권지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율의 눈앞에 쪼그려 앉으며 그의 눈앞으로 쓱 얼굴을 내밀었다.

“이 매니저. 나 무서워요?”

“네? 아, 아뇨… 왜 그런 질문을….”

“자꾸 내 눈을 피하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럼 왜 지금도 내 눈을 안 봐요?”

권지하가 다율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그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다율을 바라봤다. 다율은 그 표정에 심장이 철렁하며 두근두근 맥박이 빨라졌다.

“아, 아니에요. 제가 왜 배우님을 무서워하겠어요. 배우님이 얼마나 자상한 분인데…!”

“내가 자상해?”

“그럼요! 자상하고 다정하고 친절해요.”

“그렇구나. 이 매니저는 날 그렇게 생각해?”

“네. 완전요.”

“그러면… 욕실 데려가서 씻겨 줄까요? 발목 아직 불편할 거 아니에요.”

권지하가 다율의 발목을 가리켰다. 다율은 내적 비명을 질렀다.

“씨, 씻겨 주다니요. 아닙니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다리가 불편하면 힘들잖아. 내가 해 줄게요.”

“절대로 아니에요. 저 완전 멀쩡해요!”

다율은 아픈 발을 이끌고 펄쩍펄쩍 뛰어 욕실로 들어갔다. 권지하는 툇마루 너머 우당탕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혀로 입 안을 쓸었다.

“너무 겁먹게 해도 안 되겠고 그렇다고 봐주자니 끝이 없고.”

그는 아주 작게 속삭이며 손깍지를 꼈다. 손이 싸늘했다. 평소보다 최소 1, 2도 낮은 수준이었다.

이 체온을 유지하려면 당분간 힘들겠네. 그래도 꼬박꼬박 찬물로 샤워해야겠어.

…그래야지 우리 매니저님이 도망 안 가고 날 안아 주잖아.

권지하는 자기 몸이 얼마나 차가운지 곳곳을 만져 본 다음 씩 웃었다.

***

서울로 상경하는 길에도 권지하가 운전을 했다. 발목 다친 사람이 페달을 밟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율은 거듭 죄송함을 표하며 권지하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차가 떠나기 전 농장 주인 부부가 배웅을 위해 찾아왔다.

“이건 내가 직접 삶은 거야. 올라가면서 심심할 때마다 먹어.”

“우와. 알밤…!”

다율은 봉지 한가득 들어 있는 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따끈따끈 삶긴 알밤이 달콤한 향을 뽐내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군침이 싹 도는 바람에 다율은 바로 밤을 까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혼자 먹지 말고 잘 까서 신랑도 한 알씩 주고 그래.”

“컥.”

신랑이란 말에 다율은 사레가 들려 버렸다. 할머니는 젊은 사람이 농담에 과민반응 한다며 깔깔댔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즐거웠습니다!”

“그래. 나중에 가을 되면 밤 주우러 또 와!”

“네. 꼭 올게요!”

다율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꾸벅 인사했다. 다율은 출발을 준비하기 위해 안전벨트를 잡았다. 그런데 그때 권지하가 몸을 기울여 다율과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배, 배우님.”

“안전벨트 내가 매 줄게요.”

권지하와 좌석 사이에 낀 다율은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는 권지하가 하는 대로 얌전히 벨트를 맸다. 어젯밤 일이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의식됐다.

“그럼 갑시다.”

“네….”

다율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견디지 못하고 손에 든 알밤을 터뜨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밌었네요. 시골 체험도 뜻깊었고요.”

“네. 저도 고향 생각이 났어요.”

다율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짙푸른 나무들을 보며 아쉬워했다. 멀어져 가는 산자락은 분명 속리산과 닿아 있을 것이었다.

“이 매니저 서울 출신이라고 안 했던가?”

권지하가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다율은 아차 싶었다.

“아, 아. 맞아요. 서울 사람이에요. 제가 말한 고향은 외갓집. 그러니까 저희 외갓집이 충청도거든요. 그래서 여기랑 너무 풍경이 비슷해서 한 말이에요.”

“…그렇구나.”

권지하가 백미러를 통해 힐긋 다율을 봤다. 그러면서 슬쩍 운을 뗐다.

“역시 전원주택이 좋겠죠?”

“네?”

“매니저님이 아파트보다는 시골집을 훨씬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밤을 까먹던 다율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권지하는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평온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나도 전원주택이 더 좋아요.”

그러더니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노래가 크게 나오는 바람에 다율은 그에게 무슨 뜻이냐고 꼬치꼬치 캐묻기 곤란했다. 또 운전자를 붙잡고 전원주택이 낫네 아파트가 낫네 말을 할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중얼댔다.

“…마음 같아서야 시골살이가 좋죠. 사랑하는 사람하고 밤마다 별도 보고 아기도 낳고….”

라디오 소리에 자신의 중얼거림이 묻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권지하의 청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뛰어났다.

그러니 별수 있나. 흥얼거림 반 중얼거림 반을 섞어 가며 밤을 까먹는 매니저가 권지하는 그저 하찮고 귀여울 뿐이었다.

“배우님도 하나 드세요.”

잘 까서 쏙 입 안에 넣어 주는 손가락까지도 귀엽다. 콱 깨물어 잘근잘근 씹어 주고 싶게 말이다.

[권지하X이다율 또 예능 찍음? 그것도 농장을 지켜라?!]

ㄴㅇㅇ 공식 땅땅. 너무 좋아서 내 머리 벽에 쿵쿵.

ㄴ티저 1분 30초짜리인데 지금 69번째 재생 중. 캡처는 969장 떴는데 이거 평균이냐?

ㄴ넌 아직 열정이 모자라다. 내가 티저 움짤 200개 쪄서 인기글에 올렸으니 많은 관심 부탁한다.

<농장을 지켜라> 예고편은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상에 나온 장면이라고 해 봤자 밭일 좀 하고 수박 얻어먹고 새참 좀 먹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권지하, 이다율의 팬들은 나노 단위로 영상을 분석하며 덕질할 거리를 발견해 냈다.

[흙 따위로는 권지하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하는구나.]

[밤나무 보면서 신나 하는 것 좀 봐! 이다율 너무 귀여워.]

예고편 영상 마지막에 권지하가 다율을 업어 주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자세한 건 본편에서 확인하라는 자막은 팬들을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팬들은 깨알같이 찍힌 두 사람을 최대한 확대해서 뭉개진 픽셀에서도 다율이 권지하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니다로 갑론을박을 벌이며 축제의 장을 즐겼다.

그렇게 또 하나의 전설적인 떡밥을 뿌리며 권지하와 이다율의 화제성은 고공 행진을 벌여 나갔고 그들은 이로써 6주 연속으로 비드라마 부분 출연자 화제성 1, 2위를 고수하게 되었다.

***

한편 사전 제작 드라마였던 <시티 오브 나이트> 촬영이 끝났다. 아직 전파를 타지 않은 상태로 편성만 잡혀 있었지만 작품으로서는 완결이 난 것이다.

이를 기념해 권지하의 소속사는 제작 종료회를 주도해 장소를 잡고 파티를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갈려나갈 사람은 당연히 다율이었다. 그는 벽에 걸 축하 현수막 제작, 호텔 연회장 섭외, 그 안에서의 자리 배치까지 신경 써 가며 제작 종료회를 준비했다.

특히나 다율이 혼신의 힘을 쏟은 부분은 주연 배우들을 인형 모양으로 만들어 데코레이팅한 슈가 케이크 제작이었다. 그는 팬 카페에서 디자인을 공모받아 고급스러운 업체에 도안을 맡겼고 파티 시작 시간에 맞추어 케이크를 전달받기로 했다.

“여보세요. 케이크 배달 오셨다고요? 지금 나가겠습니다.”

피곤하고 바쁜 와중이었지만 케이크 픽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순 없었다. 다율은 자리 세팅을 하다 말고 연회장을 나섰다.

“어. 비 오네?”

다율은 하루 종일 실내에 갇혀 일하느라 밖에 비가 오고 있는 줄도 몰랐다. 케이크 배송 기사가 일러 준 장소는 호텔 부지 바깥이었으므로 그는 꽤 굵직한 장대비를 뚫고 한참을 걸어가야만 했다. 옷이야 젖어도 되지만 혹시라도 케이크가 상할까 염려가 됐다.

“우산이 없는데 어떡하나….”

다율이 망설이고 있을 때 옆에서 팡! 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권지하가 검은색 큰 우산을 펴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배우님?”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길래 내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들어요.”

“오늘 제작 종료회에 쓸 케이크 픽업하러요. 이 앞에 도착했대요.”

“그럼 나랑 우산 같이 쓰고 갑시다.”

“저 혼자 다녀올 수 있는데.”

“케이크 큰 거 시켰을 것 같은데 한 손으로 우산 들고 케이크 예쁘게 들고 올 수 있어요? 그냥 나랑 가요. 우산도 크잖아. 둘이서 충분히 쓸 수 있어.”

권지하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지금 권지하가 들고 있는 우산은 배우들이 촬영장에서 대기할 때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도 쓰는 우산이라서 골프 우산처럼 컸다. 확실히 두 사람도 여유 있게 쓸 수 있는 크기였다.

하지만 다율은 지난번 시골에서 옷을 벗고 잔 후, 권지하의 곁에 가는 것이 왠지 서먹한 상태였다. 예전에는 멋지고 잘난 모습을 봤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는 정도였다면 그날 밤 이후로는 권지하의 모든 행동과 말과 존재 자체가 의식되었다. 인간 핫팩 타임에도 사실상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수준으로 잠이 안 올 정도였으니.

“그럼 실례할게요.”

다율은 그의 우산 아래 들어가되 최대한 멀찍이 섰다. 그러나 권지하는 그런 다율의 어깨를 감싸 자신 쪽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이렇게 해야 둘 다 비 안 맞아요.”

“괘, 괜찮은데…!”

“아냐. 더 가까이 붙어요.”

우산이 워낙 커서 공간이 남아도는데도 권지하는 자꾸만 다율을 끌어당겼다.

어색해진 다율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우산 손잡이를 쥐었다.

“우산은 제가 들게요, 배우님.”

그러고는 몇 미터 걸었다. 하지만 몇 걸음도 못 가 우산 끄트머리가 권지하의 시야를 가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두 사람의 키 차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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