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 매니저. 시작된 거 같은데?”
“헉. 8시다!”
마사지에 취해 있던 다율이 퍼뜩 깨어났다. 그는 너무 급한 나머지 마우스를 움켜쥐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에 클릭을 하느라 난리를 쳤다.
“예매하기 누르는 건가요?”
“그, 그런 거 같은데…! 왜 안 눌리지?”
가까스로 예매하기 버튼을 찾은 다율이 미친 듯 클릭을 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버가 마비된 것이다. 망했구나. 다율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망한 건가? 나는 갑자기 로그아웃 당했어요.”
“헉…! 안 돼!”
옆자리의 권지하 역시 실패할 기미가 보이자, 다율의 가슴은 초조해졌다. 기왕이면 멋지게 티켓팅도 성공하고 그 티켓을 팬 카페 추첨 경품으로 내걸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허공만 클릭하다가 매진이 될 것 같았다.
“저, 접속됐다! 예매창 열렸어요!”
수백 번의 새로고침 끝에 다율이 예매 버튼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곧 화면에는 듬성듬성 보라색 포도알이 펼쳐졌다. 남은 자리 수는 불과 수십 석 남짓이었지만, 다율은 그마저도 반가워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합니다! 해요!”
다율은 골대로 달려가는 축구선수처럼 기합을 넣었다. 그러고는 모니터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잽싸게 한 자리를 클릭했다.
“눌렀어! 잡았어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 ‘결제하기’ 버튼을 누른 순간 오류 메시지가 떴다.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
“아…?! 이거 선택하면 안 되는 건가?”
“다른 거 눌러 봐요.”
권지하가 다율 옆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의 몸이 바짝 붙었다. 다율에게 나는 아이스크림 비슷한 냄새가 좋아서 권지하는 일부러 다율의 목덜미에 고개를 더 가까이 댔다. 다율은 그런 줄도 모르고 씩씩대며 다음 포도알을 노렸다.
“이건 되겠죠!”
서둘러 클릭을 한 다율이 ‘결제하기’를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제할 수 없다는 팝업 메시지가 떴다.
“으악! 안 된대!”
“음. 여기 말고 2층 좌석으로 가 보면 어때요?”
권지하가 침착하게 말했다.
“아, 그… 그럴까요?”
다율은 허둥지둥 좌석배치도를 2층으로 전환했다. 그곳에도 소수의 좌석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악! 여기도 다 나갔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다율을 보고 있자니 권지하는 자꾸만 웃음이 샜다. 열성팬이 따로 없는 다율의 모습이 과하게 귀여웠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나. 자기는 이미 팬미팅 MC로 확정된 상태인데 마치 티켓팅 망하면 팬미팅 못 올 사람처럼 구네.
“2층 안 되겠으면 3층 올라가요.”
“3층! 그래. 3층이 있었지!”
3층이라고 해서 사정이 별반 다른 것은 아니었으나, 몇 번의 새로고침 끝에 구석진 곳에 포도 하나가 나타났다. 소위 시야제한석이었다. 원래는 개방하지 않는 자리였으나 권지하의 팬들이 강력하게 주장한 탓에 개방한 구역이기도 했다.
다율은 거의 울고 있는 상태였다.
“제발 이건 됐음 좋겠다. 어어엉. 살려 주세요.”
권지하는 웃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심각한 척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슥 올라간 입꼬리는 그럴싸하게 손으로 가렸다. 아, 도저히 못 참겠네.
30분간의 열띤 티켓팅 끝에 다율은 반 폐인이 되었고 티켓은 못 구했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티켓팅하랴 녹화하랴 고생한 다율을 위해 권지하가 호두맛 아이스크림을 가져다주었다. 머리를 쥐어뜯느라 잔뜩 흐트러진 다율은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퍽퍽 퍼 먹으며 한숨을 돌렸다.
“멋지게 잡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배우님 인기 너무 많아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하하. 그런가?”
“네. 진짜 팬 많으시네요. 저는 일반 팬이었으면 배우님 보러 가지도 못했겠어요.”
“에이. 무슨 그런 걱정을 해요. 내가 알아서 VIP 티켓 주죠.”
권지하가 다율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다율은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얼굴을 스치는 느낌에 잠시 오싹했으나, 이내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난 돌부처야. 손가락 스킨십 하나에 설레지 말자.
“흠흠. 그렇게 말해 주시니 너무 기쁘고 든든하네요. 오늘 찍은 건 제가 지금 팬 카페에 업로드할게요.”
다율은 캠코더에서 영상을 추출한 다음 간단한 작업을 거쳐 팬 카페에 업로드했다. 선예매를 망했네, 성공했네, 시끌시끌한 게시판 사이에 ‘[공식영상] 권 배우와 이 매니저도 티켓팅 도전해 봤습니다.’라는 게시물을 올리자 순식간에 조회수가 폭발했다.
ㄴ배우님도 실패했구나 와 어쩐지 위로가 되는데
ㄴ매니저님 허둥지둥거리는 것 좀 봐.
ㄴ지하 님 진짜 잘생겼어! 서버에서 쫓겨나도 의연한 모습이 너무 쿨해요.
“팬분들이 좋아해 주시네요.”
“그러게.”
권지하가 근사하게 웃었다. 다율은 격렬한 클릭으로 뻐근한 손가락이 싹 낫는 기분이었다.
***
티켓팅이 끝나고 며칠간은 분주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오늘은 리허설이 있는 날. 무대에 오른 권지하는 타이 없는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머리는 별다른 세팅을 하지 않았다. 본 공연이 아니니 헤어와 메이크업을 따로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내추럴한 모습마저 멋져 보여서, 무대 한편에서 MC 대본을 읽던 다율은 절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새삼스레 잘생겼다. 배우님은 어떤 모습이든 정말 멋있어.
다율은 한참 얼굴 감상에 빠져 있느라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뭐 해요?”
“…얼굴이 무지막지하지.”
“이 매니저?”
“앗, 네네!”
두 번을 부르자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부터 노래 리허설 들어간대요.”
“그러면 제가 옆에서 폰으로 찍을게요!”
다율은 핸드폰을 꺼내어 무대 아래, 권지하를 잘 올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영상을 찍으면 즉각적으로 모니터링을 할 수도 있었고 나중에 자투리 영상을 편집해 팬 카페에 자체 콘텐츠로 업로드할 수도 있었다.
“스탠바이. 큐!”
연출 감독이 시작을 알렸다. 곧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인 반주가 흘러나왔다. 권지하와 다율이 함께 피크닉을 갔던 날, 그가 연습하던 노래였다. 권지하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보여 주었던 감성적인 눈빛을 하고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선보였다.
“와. 노래도 잘하네.”
“목소리 완전 좋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 불러 주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까 윤혜미랑 스캔들 났을 때 자기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었지?”
“맞아. 누군지 몰라도 부럽다.”
무대 주변에 서 있던 스태프들이 소곤거렸다. 다율도 동감하는 바였다. 권지하의 음색도 독보적이었고, 감정 표현도 나무랄 데가 없이 섬세했다. 그 점이 다율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는 점이 문제여서 그렇지.
누군지 모르지만 배우님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하셨지. 피크닉 날 다른 사람과 통화할 때 엿들은 바에 의하면 예식장까지 알아볼 정도로 진도가 나간 사이 같았다. 스캔들이 났을 때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밝힌 점도 그렇고.
동시에 다율은 부끄러워졌다. 불과 며칠 전, 분위기에 휩쓸려 권지하와 스킨십을 했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감히 배우님을 유혹하려 했었다. 나는 얼마나 나쁜 수인인가. 그때 전화벨이 산통을 깨지만 않았으면 분명 못된 짓을 했을 거다. 배우님이 싫다고 해도 내가 적극적으로 나섰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니 다율은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배우님이 너무 좋은걸. 나 진짜 못됐다.
혼자 감동에 젖었다가 슬퍼했다가, 화를 냈다가. 변화무쌍한 그의 얼굴을 보며 옆에 서 있던 스태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권지하의 매니저는 참 표정이 풍부하구나.
다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어쨌거나 일은 해야지. 집중해서 찍자.
다율은 핸드폰이 흔들리지 않도록 잘 붙잡고 권지하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권지하의 시선이 이쪽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음?”
권지하가 다율을 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일순간 다율은 노래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가사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주인공은 결단코 자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노래가 절정에 달하고 권지하의 감정선이 터져 나오자 다율은 아찔했다. 마치 노래의 한가운데에 휘말려드는 기분이었다. 권지하의 시선은 여전히 다율을 향한 채였다.
노래가 끝났다. 권지하는 아무렇지 않게 무대에서 내려와 다율의 옆에 섰다.
“나 어땠어요?”
정신이 번쩍 든 다율은 촬영 모드를 종료하고 근처에 있던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권지하에게 생수병을 건네며 활짝 웃었다.
“너무 멋있었어요. 가수가 온 줄 알았네요.”
“그래요? 잘 불렀나 보네. 다행이다.”
너무 잘 불러서 문제였죠. 제 가슴만 쓸데없이 설레고요.
다율은 뒷말을 꾹 삼켰다.
“이제 MC 리허설 가 볼게요.”
때마침 연출 감독이 다율의 차례를 알렸다.
“이다율 매니저님. 권지하 배우님. 무대 위로 같이 올라오실게요.”
“네! 지금 가겠습니다.”
다율은 권지하의 뒤를 따라 무대에 올랐다.
“여기 왼쪽이 권지하 배우님, 오른쪽이 MC입니다. 의자에 앉은 다음 서로 살짝 쳐다보는 각도로 자세 취해 주세요.”
“네.”
“무대 오르니까 기분이 어때요?”
“어… 되게 신기해요. 여기가 사람들로 꽉 채워질 거라는 것도 신기하고요.”
다율은 객석으로 눈을 돌려 1층부터 2층, 3층 끝자리까지를 훑어보았다. 티켓팅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인지하지 못했는데 이곳 홀은 굉장히 컸다.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인데도 표가 모자라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많다니. 새삼 권지하의 인기가 실감났다.
“앗, 갑자기 가슴이 뛰어요.”
“어. 긴장했나 보다.”
“두근두근 난리가 났는데 어떡하죠?”
다율이 당황한 눈빛을 띠며 자기 가슴을 짚었다. 권지하 입장에서는 옷 위로 만져 본 게 다지만 대략의 감촉을 알고 있는 가슴이었다. 그가 살짝 입 안을 혀로 쓰는 것은 보지 못했기에, 다율은 그저 가슴께만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