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대기실 안은 분주했다. 음향과 조명팀은 최종 계획을 점검했고 코디네이터들은 거울 앞에서 권지하의 준비 상태를 체크했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누구보다도 멋있어야 하기에 그를 꾸미는 데 평소보다도 두 배 이상의 공력이 들었다.
다율 역시 MC로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칙칙한 회색 후드티를 벗어나 귤색 니트를 입고 청바지를 걸친 다율은 더욱 어려 보였다. 거기에 찰랑이는 머릿결을 잘 살려 드라이를 넣고 가벼운 메이크업까지 곁들이자, 그야말로 아이돌이 따로 없었다.
“이 매니저님. 마무리할 거니까 눈 꼭 감으세요.”
메이크업 담당자가 다율의 얼굴만 한 퍼프로 파우더를 발라 팡팡 두드렸다. 다율은 자칫하면 재채기가 날 것 같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다행히도 금방 파우더 칠이 끝나 코가 간지럽지는 않았다.
“우리 매니저님, 뽀얗고 예쁘네요.”
헤어와 메이크업 준비를 마친 권지하가 다율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는 훤칠한 키를 돋보이게 하는 슬림 핏의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다율의 눈에는 마치 왕자님처럼 보였다.
“…와….”
“나보고 할 말이 그것뿐이에요?”
“네. 너무 멋있어서 딱히 말이 안 나와요.”
이마를 반쯤 드러내게 세팅한 머리가 어른 남자의 느낌을 줬고, 날렵한 이목구비가 오늘따라 더 도드라져 세련미가 넘쳐흘렀다. 다율은 그의 미모라는 강에서 헤엄을 치고 싶은 심경이었다.
“이 매니저.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백스테이지로 가.”
“아, 네.”
멍하니 있는 그를 백장훈이 떠밀었다. 권지하는 그에게 눈을 찡긋해 주었다.
순서상 다율이 먼저 나가야 했기에 권지하는 백스테이지에서 계속 대기였다. 총괄 감독이 다율에게 10초 후에 나가라는 신호를 줬다. 다율은 입 안이 깔깔할 정도로 긴장했다. 가슴도 쿵쾅거렸다.
‘긴장하지 마요.’
권지하가 멀찍이 서 있는 다율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다율 역시 입 모양으로 화답했다.
“자. 스탠바이. 이다율 매니저 지금 무대 위로 올라갑니다.”
다율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어두컴컴하게 불이 꺼진 장내에 핀 조명이 들어와 갓 무대 위로 나타난 다율을 비췄다. 엄청난 함성이 뒤따랐다.
“꺄아!”
“매니저다!”
“귀여워.”
수천 명이 뿜어내는 함성과 더불어 시선이 다율을 향했다. 다율은 심장이 콩닥거려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긴장하지 말자, 편안하게 임하자 생각이야 많이 했으나 막상 관객석 3층까지 꽉 들어찬 관중을 보니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와. 떨린다.
“이다율 파이팅!”
“매니저님, 힘내요!”
앞 열 팬들이 다율에게 응원을 보냈다. 다율은 자그마한 용기를 얻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크게 들이쉰 다음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꺄아!”
“와아!”
다율이 움직이자 관객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수천 개의 응원봉이 미친 듯이 흔들리며 노란 불빛을 밝혔다. 오늘 아침 굿즈 판매가 개시되자마자 매진된 응원봉. 일명 지압봉이 눈부시게 빛났다.
다율도 응원봉 디자인에 참여했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디자인과 겹치지 않으면서도, 권지하 팬들만의 아이덴티티를 잘 나타낼 수 있는 디자인을 찾기 위해 많은 회의와 연구를 거듭한 결과가 바로 이 응원봉이었다.
공식 이름은 권지하 응원봉이었지만 팬들은 이미 장난스럽게 지압봉이라는 애칭을 붙여 준 상태였다. 모양이 안마봉과 약간 비슷한 탓도 있었다.
수천 개의 응원봉이 화려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율은 가슴이 찡해졌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권지하를 응원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기획 단계부터 매니저로서 정신없이 뛰어다닌 성과가 이 팬미팅을 통해 나타나는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했다.
짧은 시간 아련한 상념에 빠진 다율은 자신이 멘트를 시작해야 팬미팅이 정식으로 개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이어로 어서 시작하라는 감독의 사인이 떨어졌다. 다율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배우 권지하 팬미팅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와아!”
“오늘 와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드립니다. 저는 권지하 배우님의 매니저이자 오늘 사회를 맡게 된 이다율입니다.”
100번도 넘게 외운 대사인데도 떨리다니. 다율은 마음속으로 침착하자를 외치며 꿋꿋하게 멘트를 읊었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화면을 봐 주세요.”
장내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함성 소리가 공연장을 뒤흔들었다. 곧 무대 양쪽으로 펼쳐진 대형 스크린에 편집 영상이 재생되었다.
<하이라이트 오브 권지하>
권지하의 데뷔부터 최근작까지 하이라이트를 모은 영상이 흘러나왔다.
“어떡해! 데뷔작이다.”
지금보다 한참 어린 이십 대 초반의 권지하가 화면에 잡히자 팬들은 입을 틀어막았다. 이어서 권지하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 준 두 번째 영화의 한 장면이 흘러나오자, 일부 팬은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그사이 권지하는 스탠바이를 마치고 무대 왼쪽으로 이동을 마쳤다. 다율은 프롬프터에 뜨는 대로 동선을 맞춰 살짝 오른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곧 영상이 끝나고 왼쪽에서 권지하가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관객석에서 스크린을 찍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시 한번 들려온 찰칵 소리는 다율의 뒤쪽, 즉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오른쪽 백스테이지에서 들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뭐지?
다율이 살짝 그쪽을 봤다. 워낙에 시커멓게 조명이 죽어 있어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카메라로 보이는 무언가가 자신을 찍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스태프용 후드티를 뒤집어썼으며 남자로 보였다. 그는 다율의 시선을 감지하자 곧바로 카메라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뒤돌아 걸어갔다.
뭐야. 저 사람? 설마 나를 몰래 찍은 거야?
다율은 찝찝했다. 배우도 아닌 사회자를 어둠 속에서 몰래 찍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었으나 순간 기분이 불쾌하며 어딘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팬미팅 진행 중. 다율은 쉽사리 움직이거나 그쪽으로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10, 9, 8, 7….”
하이라이트 영상의 끝자락에 배우의 등장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큼지막한 숫자 하나가 줄어들수록 함성은 더욱 커졌다. 다율은 찝찝함을 잠시 떨쳐 버리기로 하고 마이크를 쥐었다.
“3, 2, 1. 나와 주세요!”
화려한 효과음과 함께 권지하가 무대 왼쪽에서 걸어 나왔다.
“그럼 소개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남 배우, 권지하 배우입니다!”
“아악!”
“꺄아아!”
수천 명의 팬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소리에 장내는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권지하는 무대 중앙에 위치한 소파에 다율과 나란히 앉았다. 그런 다음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관객석을 훑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1열에 있던 팬 몇 명이 까무러치듯 호들갑을 떨었다.
권지하는 거의 실신할 지경인 팬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이렇게 만나는 거 처음이죠.”
“네!”
“와 줘서 고마워요.”
“아악!”
“밥은 먹었어요?”
“네!”
“아니요!”
팬들은 권지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다율이 나서서 조금만 진정해 달라고 말려야 할 정도였다. 데뷔 이래 첫 팬미팅이니만큼 반응이 좋을 것은 예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너무 격렬한 팬들의 반응 때문이었을까. 다율은 다음 순서가 무엇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가 사회자를 위한 진행카드를 허둥지둥 꺼내 드는 것을 보고, 권지하가 슬쩍 눈빛을 줬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프롬프터가 있었다.
앗. 맞아. 이거 보고 읽으면 되지.
다율은 권지하의 배려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권지하를 보고 살짝 웃은 다음 다시 마이크를 쥐었다.
“오늘 팬미팅은 토크로 시작해 볼까 해요. 여러분, 아까 입장 전에 포스트잇 다 작성하셨죠?”
“네!”
“평소 권지하 배우님께 궁금했던 질문을 자유롭게 적어달라고 부탁드렸는데요. 여러분이 요청한 질문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곧 스태프가 포스트잇으로 도배가 된 화이트보드를 들고 등장했다. 빼곡하게 자리한 포스트잇은 못해도 오백 개가 넘어 보였다.
“이 중에 제가 고르면 되는 거죠?”
“네. 맞습니다. 권지하 배우님이 직접 질문을 고르시고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여러 번 호흡을 맞춰 봤기에, 다율은 물 흐르듯 진행을 이어갔다. 권지하가 보드 앞으로 걸어가 포스트잇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용 안 보고 랜덤으로 세 개 뽑을게요.”
권지하는 망설이지 않고 포스트잇 세 개를 뜯었다.
“오. 과감하시네요. 그럼 첫 번째 질문은요?”
“음… 탕수육 소스를 찍어 먹느냐, 부어 먹느냐라는 질문인데요.”
“아, 중요한 문제죠…!”
다율이 무릎을 쳤다. 곧 죽어도 바삭함과 고소함에 목숨을 거는 다율은 소스를 찍어 먹는 파였다. 그는 소스를 걸쭉하게 부어 먹어서 튀김을 적시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배달을 시키거나 권지하와 야식을 먹을 때도 무조건 찍어 먹기를 고수했다.
배우님도 무조건 찍어 드시지. 단 한 번도 소스를 붓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으셨어. 그런 점에서는 나랑 완벽하게 의견이 일치한달까.
다율은 당연히 그가 찍어 먹기를 선택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전 부어 먹는 걸 선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