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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51화 (51/95)

51화

“눈 감지 말고 떠 봐요.”

권지하가 다율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다율은 더 이상 이 낯간지러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배, 배우님. 그만요.”

“응?”

“저 그만 올라탈래요. 죄송해요.”

“아… 내 위에서 내려오겠다고?”

“네. 정말 죄송하지만 저 나가고 싶어요.”

다율이 권지하에게 미약하게 반항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가야지. 그런데 오늘 낮에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무슨 생각이요?”

“큰일이 날 뻔했잖아. 바로 내 눈앞에서.”

“아… 네. 그랬죠.”

“만약 이 매니저가 없으면 난 어떻게 될까, 짧은 순간이지만 그런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

“….”

내가 없다면 당신은 어떤 심정이실까요? 저도 궁금해요. 다율은 낮에 있었던 사고에 대해 권지하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가슴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권지하가 다율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 가슴 위에 올렸다. 차가운 피부 너머로 쿵, 쿵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매니저님 없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겠구나.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을 했어요.”

“배우님….”

다율의 코끝이 찡해졌다. 권지하는 짐작보다도 훨씬 깊게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 비록 자신과 같은 마음은 아닐지 어떨지 몰라도, 다율을 애틋하게 아껴 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다율아.”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다율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런 식으로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면 다율은 바보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항상 그렇다. 다정은 권지하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안 돼.”

“…배우님.”

서늘한 손가락이 다율의 조그만 얼굴을 감싸 쥐더니, 열 오른 눈꼬리를 살살 쓸어 주었다. 다율은 이 순간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벅차올라 울고 싶었다. 권지하는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다율의 울먹이는 얼굴을 쳐다보다가 손을 내려 다율의 입술을 쓸었다. 말랑한 입술을 자극적으로 누르자 다율은 퍼뜩 놀라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의미로 같이 씻을까요, 이 매니저?”

“가, 같이라니요. 안 돼요. 안 돼요!”

그건 우정을 나눈 사나이들끼리 하는 거죠! 저처럼 흑심 가득한 수인 말고요!

고개를 저으며 몸 앞에 손으로 엑스 자를 그려 대는 다율을 보며 권지하가 피식 웃었다. 누가 보면 이 자리에서 잡아먹는 줄 알겠네.

“그래 그럼. 내가 샤워 부스에서 씻을 테니까 이 매니저는 욕조에서 씻고 나와.”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다율은 빠르게 거품칠을 하고 몸을 헹군 다음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대충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으려니 권지하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시커먼 가운 차림이었는데, 누구 보라고 그런지는 몰라도 태평양같이 넓은 가슴팍이 다 열려 있었다.

“머리 안 말렸네?”

권지하가 다율의 바로 등 뒤로 다가와 물었다. 그에게서 좋은 향기가 풀풀 풍겨 나는 바람에 다율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내가 머리 말려 줄게요.”

권지하가 다율의 허리춤을 부드럽게 안으며 한 손으로 협탁 위 드라이어를 켰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바람이 다율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귓가에는 권지하의 숨결이 닿고, 앞뒤 좌우로는 뜨거운 기운이 닿자 다율은 괜스레 민망해졌다.

아이고. 귀에 간질간질하게 숨결 불어 넣는 것 같잖아요.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는 다율을 보며 권지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머리만 말려 줘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봐도 봐도 순진해 놀릴 맛이 난다.

머리를 보송하게 잘 말리자 다율은 평소보다 조금 더 부스스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를 침대에 앉혀 놓고 권지하가 물었다.

“속은? 물에 빠졌다가 나오면 탈 나기도 하던데.”

“울렁거리거나 하진 않고요. 배가 조금 고프긴 해요.”

“그럼 내가 죽이라도 사 올게.”

“어, 괜찮은데.”

“얼른 다녀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권지하가 머리를 대충 말리고 옷을 입은 후 다율을 침대로 데려갔다. 마치 김밥을 말듯이 다율을 이불로 꽁꽁 싸맨 후, 그는 다율을 침대에 눕혔다.

“따뜻하게 하고 있어.”

“네, 배우님.”

침대에서 김밥말이를 당한 채로 멍하니 권지하를 바라보던 다율이 이불 밖으로 손을 빼꼼 내밀었다.

“잘 다녀오세요.”

손을 흔드는 다율의 모습에 권지하는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고 객실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자 다율은 참아 왔던 호흡을 팍 터뜨렸다.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방금 분위기 뭐야. 완전 애인 사이 같았는데?”

설마 배우님이 날 좋아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할 만했다. 자신이 물에 빠지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구해 낸 것도 그렇고, 방금 욕조 안에서의 야릇한 분위기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멎는 것 같다는 말. 그 말이 다율에게 의심을 훅훅 불어넣었다.

“나 좋아하는 거면 어떡해!”

다율은 망상에 취해 상상력을 발휘했다. 나와 사귀어 달라며 고백해오는 권지하, 나 잡아 봐라를 하며 해변을 달리는 두 사람, 시간이 흘러 결혼식을 올리며 키스하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태어난 아기다람쥐까지….

“제발!”

다율은 이불째로 침대 위를 굴렀다. 꼬물꼬물 발버둥도 쳤다.

혼자서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두 손 가득히 봉투를 든 권지하가 뒤에 서 있었다.

“배우님. 벌써 오셨어요?!”

아니.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설마 나 혼자 몸부림 치고 있던 모습을 본 건 아니겠지. 다율은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죽이랑 감기약 좀 사왔어.”

“약은 왜요?”

“지금은 멀쩡해도 내일 몸살감기 날 수 있잖아. 미리 먹고 자야지.”

“감사해요.”

다율은 권지하의 세심한 배려가 너무도 고마웠다. 권지하는 침대맡의 사이드 테이블에 앉아 봉투에서 죽을 꺼냈다.

“우선 죽부터 먹자.”

“네.”

“많이 뜨겁네. 식혀서 먹어야겠다.”

“아, 그래요?”

“내가 식혀 줄게.”

권지하는 죽을 한 숟가락 뜬 다음 호호 불어서 식혔다.

“제가 먹을 수 있는데요.”

“물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어. 진정될 때까지 내가 챙겨 줄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권지하가 멜로 느낌 가득한 눈빛으로 다율을 바라봤다. 다율의 심장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떨려왔다.

“자, 한입 먹자.”

“….”

갑자기 상기된 얼굴에 멍한 눈빛으로 다율이 자신을 바라보자, 권지하는 이게 뭔가 싶었다.

“아파? 열나?”

“…조금 쑥스러워서요.”

“쑥스럽긴. 얼른 받아먹기나 해.”

“네.”

다율이 앙, 하고 죽을 받아먹었다. 고소하고 따뜻한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맛있어요.”

“한입 더 먹어.”

권지하가 다율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며 숟가락을 가져다 댔다. 다율은 행복한 마음으로 죽 한 그릇을 싹 비웠다.

***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은 같이 잠이 들었다.

먼저 눈을 뜬 것은 다율이었다. 약을 먹고 자서인지 다행히 몸은 아프지 않았다.

“배우님.”

“응.”

“배우님, 일어나세요.”

다율이 권지하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긴 팔이 뻗어 나와 다율을 낚아챘다. 다율은 권지하의 품에 빨려들듯이 안겼다.

“조금만 더 잘게.”

“일어나셔야 하는데요….”

“5분만 이러고 있자.”

잠에 취한 권지하의 목소리는 낮고 그윽했다. 또한 그의 품은 넓고 아늑했다. 다율은 저도 모르게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품에 얼굴이 닿자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권지하의 인간 핫팩이자 물주머니로서 안겨 자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고백 비스무리한 말을 들은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권지하의 서늘한 체온도, 은은한 체향도 평소의 수십 배 다율을 설레게 했다. 맞닿은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제 것인지 권지하의 것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다율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부스럭거리자 권지하가 눈을 떴다. 은은한 침실 등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조각 같은 얼굴에서 다율은 눈을 떼지 못했다.

“안 자요?”

“…네. 금방 잘게요.”

권지하가 다율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준 다음, 갈색 머리 끄트머리에 쪽 입을 맞췄다. 오히려 그 행동 덕분에 다율은 잠이 안 왔다. 심장아, 제발 좀 가라앉아라. 속으로 빌었지만 심장은 도리어 콩닥콩닥 더 빠르게 뛸 뿐이었다.

에잇. 안 되겠어. 이렇게 누워 있어 봤자 휴식이 안 되잖아. 나가서 찬 공기라도 쐬고 와야겠다.

다율은 권지하의 품을 조심스럽게 벗어나 맨바닥에 발을 디뎠다. 잠옷을 벗고 언젠가 권지하가 사 줬던 여름옷들을 갖춰 입은 후, 객실 문을 열고 정문을 통해 프라이빗 비치로 향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어슴푸레한 빛이 파란 바다를 쪽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 싱숭생숭하다.”

너른 수평선을 바라보며 다율은 생각에 잠겼다. 자꾸만 권지하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가, 실망하게 될까 두려웠다가 시시각각 마음이 바뀌었다. 어제 있었던 일들, 그리고 어젯밤 욕실에서 권지하가 한 말들이 모조리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만 같아 더욱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바다가 햇빛을 받아 밝고 푸르러지듯, 배우님의 마음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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