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여기에서 키우나 보다. 사람을 봐도 안 도망가네.”
고양이는 두 사람을 빤히 보더니 방향을 틀어 정원수 사이로 걸어갔다. 권지하는 굳이 고양이를 쫓아갈 마음은 없는 듯했다. 다율의 손을 한 번 고쳐 잡고는, 그대로 계속 걸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율은 달랐다. 간신히 용기를 내서 고백을 하려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동물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다율이 눈앞의 사랑에 눈이 멀어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이기도 했다.
…배우님은 내가 수인인 걸 모르시잖아. 그것도 밝혀야 할까?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에서 그랬어. 거짓말 위에 선 사랑은 오래 못 간다고. 그렇지만 배우님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배우님 어머니는 수인권 운동도 하시는 분이라고 했으니까 배우님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끄응….”
갑자기 시무룩해하며 한숨을 푹 내쉬는 다율을 권지하가 쳐다봤다.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아, 아니에요. 이 나무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 감탄한 거예요!”
“역시 나무를 좋아하는구나.”
“네. 배우님 본가에 갔을 때도 느꼈지만 자연의 풍경만큼 멋있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이 나무도 좀 보세요. 아주 오래돼 보이네요.”
“음… 그럼 나중에 정원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 아파트 알아봤잖아.”
권지하가 다율의 손을 꽉 쥐며 물었다.
“그래도 서울이 나은 것 같아요. 자연이 그리울 때면 공원에 가면 되지 않을까요.”
“아, 그렇네.”
권지하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범위가 좁혀지네. 공원이 가까이 있는 서울 아파트, 학군이 좋은 곳으로.
“학군도 중요하니까.”
“그렇죠. 교육은 중요해요.”
다율은 별생각 없이 말했다. 지금 다율의 머릿속은 진실을 밝힐 것인지, 말 것인지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권지하가 이끄는 대로 술술 대답했다.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나 봐.”
“아무래도요.”
다율은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자식에게는 누리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다율은 수인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수인학교는 전국적으로 열 군데 정도가 존재했지만, 다들 쉬쉬하며 그 존재를 감췄다. 물론 수인에게도 법적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는 있었지만 자녀를 일반 학교에 보내는 수인 가정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했다. 자칫 수인임을 들켰다가는 자녀가 차별과 놀림,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연줄을 통해 알음알음 수인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다율은 그마저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워낙 깊은 산속에 살아 학교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율은 할아버지에게 기초교육과 더불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배웠다.
덕분에 이렇게 생계를 꾸리고 또 글씨와 숫자도 써 가며 살고 있지만 학교생활을 동경하기는 했다. 그래서 권지하의 집에 갔을 때도 교복 입은 그의 사진에서 유난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교복….”
“응? 교복이 왜.”
“저는 교복을 한 번도 안 입어 봤거든요. 제 아이는 번듯한 교복 입고 학교를 다녔으면 좋겠어요.”
다율이 소탈하게 말했다. 권지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이뤄 줄 수 있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달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 다율은 달을 바라보며, 잠시만 고민을 접어두기로 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
다시 돌아온 영화 촬영 현장은 무더웠다. 유례없는 더위가 한반도 동쪽을 덮치면서 가뭄까지 더해져 날씨는 땡볕이었다. 불볕 지옥 아래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땀을 줄줄 흘리며 바닷가 신을 소화해야 했고, 다율은 한 신이 끝날 때마다 득달같이 권지하에게 달려가 얼굴에 선풍기를 쐬어 주고 찬물을 쥐여 주었다.
“더우시죠.”
“아니야. 나 더위 별로 안 타는 거 알잖아. 너야말로 안 더워? 워낙에 몸에 열이 많아서….”
권지하가 찬물이 든 텀블러를 다율의 뺨에 대 주었다. 시원한 손에 스테인리스의 차가움까지 더해지자 얼음이 따로 없었다. 다율은 기분이 좋아 사르르 웃었다.
“슛 들어갈게요! 준비해 주세요.”
다율은 조금 더 권지하의 손길을 즐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촬영이 재개되었다.
“신 19에 B막!”
슬레이트를 딱 치는 소리와 함께 스태프들이 레디, 액션 소리를 합창했다. 다율은 레일을 깔아 놓고 좌우로 움직이는 카메라 기사의 뒤에 있었다. 타이트하게 상반신만을 잡는 카메라여서 권지하의 환상적인 얼굴이 큼지막하게 보였다.
“아… 잘생겼어.”
넋을 놓고 권지하를 감상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다율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나예요.”
뒤를 돌아보니 김혜현이 한 손에 커피를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배우님.”
카리스마 있고 멋있는 여배우라 다율은 김혜현에게 조금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아주 각 잡힌 인사가 나왔다.
“고생하네. 어제 멀리까지 데이트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김혜현이 커피를 쭉 빨며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되는 듯 웃었다.
“데, 데이트라뇨. 누가요?”
“SNS에 쫙 떴던데요 뭐. 권지하와 매니저 한밤중의 강원도 습격. 오밤중의 낭만적인 데이트, 이렇게 떴더라고요.”
“아… 보셨구나.”
“내가 보기에도 데이트 같긴 하던데.”
김혜현이 다율을 빤히 봤다. 다율은 눈, 코, 입이 큰 사람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조금 부담스러웠다.
“흠… 근데 다율 씨. 내가 보기에는 말야. 지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다율 씨 의견은 어때요?”
“네?”
왜 그 말씀을 저를 보고 하시는지… 설마 눈치채신 건가요?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다율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 컷이 났다.
“컷! 오케이입니다.”
권지하가 바리스타 앞치마 끈을 풀며 김혜현과 다율 쪽으로 걸어왔다.
“여기서 뭐 해, 누나.”
“재미있는 이야기.”
“그럼 가. 나 여기 있을 거야.”
카메라 돌아갈 때는 눈으로 양봉을 하더니 지금은 차갑기가 그지없었다. 김혜현은 콧방귀를 뀌며 권지하를 째려봤다.
“나도 좀 있자. 응?”
“누나는 누나 매니저한테 가. 난 내 매니저랑 있을 거니까.”
윤혜미와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친근한 모습이었다. 다율은 소심하게 끼어들며 물었다.
“그런데요… 두 분 굉장히 친하신가 봐요.”
그 말을 들은 권지하가 아차, 하며 답했다.
“우리 누나 친구야.”
“네? 진짜요?”
“내가 지난번에 말을 한 줄 알았는데 안 했네. 시집간 우리 누나 친구야.”
다율은 머릿속으로 권지하의 집에서 봤던 누나 사진을 떠올렸다. 하얀 피부에 싸늘한 눈매가 매력적인 미녀로, 올해 서른 살이라고 했으니 김혜현과 동갑이 맞았다.
“아. 그럼 두 분이 원래 아시는 사이구나.”
“응. 나 얘가 요만할 때부터 봤어.”
김혜현이 자기 허리춤을 가리켰다. 다율은 그제야 두 사람의 친근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혜현이 다율의 어깨에 손을 짚고 그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그러니까 질투할 것 없어요, 매니저님.”
“네? 제, 제가 뭘요.”
“눈이 이글이글하길래. 난 견제 안 해도 돼.”
김혜현이 호탕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다율은 창피하고 또 곤란했다.
“제가 언제 견제를 했다고 그러세요.”
다율이 개미 목소리만 하게 중얼댔다.
“아, 우리 매니저님 정말 귀엽네. 권지하 놈만 아니었어도 내가 찜했을 텐데.”
김혜현이 검은 속내를 드러냈다. 다율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누나. 막말하지 마.”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 째려보지 말아 줄래?”
그때 슬레이트를 든 스태프가 달려왔다.
“김혜현 배우님. 타이트 샷 들어가실게요.”
“아, 내 차례예요? 미안. 얼른 갈게요.”
김혜현은 마시던 커피를 원샷한 다음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골인시키고 다율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아쉽지만 저는 이만.”
“안녕히 가세요. 배우님.”
“잘 안 되면 나한테 연락해요! 농담 아니야!”
김혜현이 하하하 웃으며 멀어져 갔다. 권지하가 다율의 옆으로 슥 다가와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혹시 질투했어?”
“그, 그게… 저는 혜현 배우님이랑 어떻게 친해지셨나, 너무 궁금하기도 했고… 유난히 가까워 보이시길래 신기하기도 해서… 그냥 좀 궁금했을 뿐이에요.”
다율의 얼굴이 홍조로 물들었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의 얼굴이 썩 마음에 들었다. 언제 또 깜찍하게 질투를 하고 있었나.
“다율아. 나는 너 말고는 아무도 관심 없어.”
“그, 그런…!”
촬영장에서 이런 애정 표현이라니. 다율은 얼굴이 익다 못해 폭발 직전이었다.
“여기서 그런 말 하시면 어떡해요!”
다율은 큰 소리를 내고 나서 아차 했다. 설마 지나가는 스태프가 듣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황급하게 사방을 살폈지만 다행히 스태프들은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이쪽에는 관심이 없었다. 권지하는 뻔뻔스럽게도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이 정도 애정 표현도 못 해? 더 심한 말도 할 수 있는데.”
“하, 하지 마세요. 배우님.”
“부끄러워?”
“네. 제발!”
다율은 발을 동동 구르고 권지하만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