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그럼 이제 잘까?”
“아. 잠깐만 TV 좀 보면 안 될까요?”
“TV는 웬일로?”
“오늘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를 해 주는 날이라서요.”
“그래? 어느 채널에서 해 주는데?”
“KTBC요.”
권지하가 누운 채 리모컨으로 TV를 틀어 채널을 찾았다. 갓 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탐구할 동물은 바로 다람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동물입니다.>
“다람쥐 다큐네?”
“네. 이거 꼭 보고 싶어요.”
사실 지금 이 방송이 흘러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다율은 리조트로 돌아오는 길, 핸드폰으로 각 방송사의 편성표를 확인했다. 마침 오늘이 다람쥐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권지하가 다람쥐에 대해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려면 같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는 것도 좋아 보였다.
“다큐는 원래 잘 안 봤잖아. 갑자기 왜?”
“어… 다람쥐라는 동물, 굉장히 매력적이지 않아요?”
다율이 은근히 밑밥을 깔았다. 권지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다율을 한 번, 화면 속에서 나무를 타고 오르는 다람쥐를 한 번 번갈아 보더니 잠시 침묵했다.
“음… 글쎄.”
“그럼 배우님은 다람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람쥐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다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강아지나 고양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배우님도 좋아하시고… 그런 것처럼 다람쥐도 좋아하시는지 궁금해요.”
“어느 쪽인가 하면….”
권지하가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호감이지.”
“앗. 정말요?”
다율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우선 호감이라니 큰 산은 넘었다 싶었다.
“아는 다람쥐도 있고.”
“네? 잘 못 들었어요.”
“아, 별거 아니었어.”
“어쨌든 간에 다람쥐가 좋다 이 말씀이시죠?”
다율은 확실한 대답을 얻어내고 싶었다. 그가 몸을 뒤집어 권지하의 위로 올라탔다. 권지하는 자신의 복부와 허벅지 위에 몸을 얹은 채로 시선을 올려다보는 다율 때문에 살짝 곤란해졌다.
“음… 좋긴 한데. 난 다율이가 더 좋아.”
권지하가 다율의 머리카락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아주 끈적하고 질척한 움직임이었다. 사르르,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재차 쓸어 넘기고 또 소리 나게 입 맞추는 행동에 다율은 조금씩 민망해졌다.
“저… 저기. TV 안 봐요?”
“미안한데 저건 나중에 보면 안 될까.”
“왜… 왜요.”
“지금은 너랑 끌어안고 싶어.”
“네?!”
너무도 직설적인 말에 다율은 심박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권지하는 다율을 확 끌어안고 몸을 굴렸다. 순식간에 다율이 침대에 눕고 그 위에 권지하가 자리를 잡아 큰 그림자가 다율의 몸을 뒤덮었다. 권지하의 나른한 눈빛, 그리고 위압적인 기운에 다율은 가볍게 전율했다.
“다율아….”
권지하가 다율의 목덜미를 쓸다가 손길을 쇄골로 옮겼다. 다율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거, 짝짓기 신호?
다율의 머릿속에 한 줄기 생각이 스쳤다. 동물적인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이 포즈로 보건대 지금 배우님이 나랑 짝짓기를 하려는 것 같아. 으악!
나름 22년 정절을 지켜온 몸이라, 다율은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흥분이 됐지만 막막하고 두렵기도 했다.
“배… 배우님. 저는 아직 준비가….”
다율이 갈색 눈망울을 깜빡이며 권지하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딱 봐도 겁을 먹은 듯한 눈빛에 권지하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내 고백에 답 들려주기 전까지는 무서운 짓 안 해.”
“아… 정말요.”
“응. 그때까지는 털끝도 안 건드릴 테니까 걱정 마.”
권지하가 다율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미소 지었다.
“네… 배우님.”
알겠다고 말은 했지만 다율은 속으로 아쉬웠다.
쩝. 막상 아무것도 안 하려니까 많이 섭섭하네. 신사적이어서 좋기는 하다만… 문제는 내가 신사가 아니라는 거지. 나 한번 발동 걸리면 어떻게 될지 스스로 무서운데.
다율은 자신이 짐승처럼 권지하를 덮치고 그를 괴롭히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걱정이 됐다. 권지하가 알게 된다면 코웃음을 칠 만큼 헛된 생각이었지만 스스로를 늠름한 수인으로 여기고 있는 다율에게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오늘 밤은 평화롭게 잠들기로 했으니, 권지하의 서늘하고 포근한 품은 자신이 독차지할 수 있었다. 다율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수인이라고 생각하며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촬영은 정오에 개시되었다. 햇빛이 가장 좋은 시간에 풍경을 따야 하기도 했고, 또 보조 출연자 수백 명이 서울에서 동원되어 오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촬영분은 남녀 주인공의 무르익은 감정과 더불어 서브 남주의 질투가 맞물려 감정이 폭발하는 신으로, 감독이 며칠간 공들여서 준비한 신이었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해변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구경을 가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다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지나가던 서브 남주가 두 사람을 목격하고 불같이 화를 내며 끼어들어 삼각관계를 표현하기로 했다.
극의 흐름상 아주 중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제작진은 며칠간 공들여 이번 신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동원하는 보조 출연자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보조 출연자 버스 들어옵니다. 1, 2, 3, 4, 5, 6호 차례로 들어옵니다. 오늘 현장에 새로 투입된 보조 출연자는 240여 명이니 다들 참고 바랍니다.”
대절 버스들이 상상해수욕장 끄트머리 주차장에 속속 도착했다. 각 버스에서 수십 명이 우르르 내렸다. 의상팀은 피서 복장이 아닌 사람들을 따로 불러 모아 탈의실로 그들을 이끌었고, 조연출은 개중에 대사를 맡을 단역을 뽑았다.
“이리 오실게요!”
“의상팀장님 어디 계세요!”
평소보다 수십 배 시끄러워진 현장 분위기에 다율은 놀랐다.
“와. 정신없네요.”
“평소처럼 정적이고 조용한 분위기가 아니라 그렇지.”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페스티벌 체험도 하고요. DJ들이 음악도 틀어 준다면서요.”
“응. 디제잉도 하고 수영도 하고 노는 분위기로 만들 거라더라.”
“와, 재미있겠…?”
한참 이야기를 하던 다율이 우뚝 멈췄다.
“왜 그래?”
방금 뭐지. 메이크업 받는 사람 중에 익숙한 사람을 본 것 같은데. 잘못 본 건가?
다율의 시선은 보조 출연자 무리에 고정돼 있었다.
“보조 출연자들은 각자 맡은 위치로 이동하세요!”
스태프가 외치자 메이크업을 다 받은 보조 출연자는 지정된 위치로 이동했고, 아직 동선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은 뒤죽박죽 섞여서 촬영팀장들에게 질문을 했다. 하도 정신없이 사람들이 오가고 있어 방금의 낯익은 사람은 순식간에 시야 바깥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히 낯익은 느낌이었는데… 누구지?
“다율아, 다율아?”
“아, 네.”
다율의 주의가 다시 지하에게로 쏠렸다.
“무슨 일 있어?”
“아뇨. 별거 아니에요.”
내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냥 하도 사람이 많으니까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다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찝찝함을 떨쳐내려 했다. 곧 조연출이 다가왔다.
“다율 씨도 오늘 군중 역할 좀 해 줘요. 이제는 하도 많이 출연해서 익숙하죠?”
“그럼요. 이제 저 발연기 아니에요.”
“하하. 그러면 준비 좀 하고 저기 디제잉 부스로 와요. 저기서 첫 슛 들어갈 거예요.”
“네!”
다율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얇은 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샌들을 신고 있었기에 옷차림은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영화 출연이니 머리라도 빗어야겠다 싶어서 다율은 대기 부스 내의 전신거울에 자신을 비췄다. 그러자 권지하가 일어나 다율의 등 뒤로 다가왔다.
“음. 이러고 갈 거야?”
“네? 이상한가요?”
“아니… 기왕이면 내가 갈아입혀 주고 싶어서.”
권지하가 다율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고 문질렀다. 느릿한 손길은 마치 물에 젖은 듯 질척거렸다.
“옷… 저 옷 따로 안 가져왔는데.”
“알아.”
“그러면 어떻게?”
“내 거 입어.”
권지하가 아주 조용히 소곤거렸다. 다율의 목덜미에 닭살이 돋아났다.
“배, 배우님 옷을요?”
“내 옷 입었으면 좋겠어.”
내 냄새 묻히고 사람들 사이를 누벼 줬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끔 말이야.
권지하는 씩 웃으며 다율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다율은 홀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지금 이건 벗자.”
“아.”
“안에 티셔츠 입었잖아. 괜찮아.”
“그렇긴… 한데.”
권지하의 손이 다율의 단추를 하나씩 땄다. 조금씩 손이 내려갈수록 다율은 숨 쉬기가 곤란해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겉에 걸친 셔츠를 벗겨 주는 행위에 불과했지만, 이미 엉큼한 생각으로 머리가 물들어 있는 다율이었기에 그는 심장이 벌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손이 가슴을 깊게 스치진 않을까 걱정도 됐다.
“자, 이제 내 거 입어.”
“네.”
“입혀 줄게.”
분명 티셔츠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지하의 시선이 제 몸에 빠듯하게 쏠리자 다율은 부담스러웠다. 마치 구석구석을 훑어봤다가, 짙게 눈길을 뒀다가 핥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