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59화 (59/95)

59화

[박중호: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내가 아는 전문 헌터 형님이 이 근처에 사냥 나와 계시거든? 그 형님더러 한번 봐달라고 할게. 그 형님은 짐승 새끼들 가려내는 스킬이 장난 아니야.]

[천재욱: 야. 당장 해! 얼른 전화해.]

[박중호: 알았어. 내가 연락할게. 기다려.]

박중호는 메시지함에서 빠져나와 전화번호를 찾았다. 삑. 연결 버튼을 누르자 곧 대기 신호가 갔다. 뚜. 뚜- 잠시 기다리자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나다.

“형님, 저 중호입니다. 사냥 잘 되어 가세요?”

-여우 한 마리 잡아서 넘기고 오는 길이야. 무슨 일이냐?

“와. 대단하십니다. 다름이 아니고 제가 지금 꼬리 밟고 있는 놈이 하나 있는데요….”

박중호가 목소리를 낮추며 촬영장의 외딴 구석으로 향했다.

-수인 놈이 근처에 있어?

“아직은 의심 중이에요. 하도 사람 같아가지고 제 눈으로는 가늠이 잘 안 되거든요. 한번 봐 주실 수 있으세요? 형님이 감별 잘하시잖아요. 형님 눈에 잘못 띄었다 하면 건강원행 아닙니까.”

박중호가 큭큭, 비열하게 웃었다.

***

같은 시각 다율은 대기 부스에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목이 바싹바싹 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남들에게 쫓길 만한 이유가 없다. 단 한 가지, 수인 헌터를 제외하고는.

온몸에 오한이 끼치고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율은 애써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어. 단순히 아르바이트가 겹쳤고, 단순히 날 쳐다본 거고….

하지만 동물의 본능이 알려 주었다. 이건 심상치 않은 일이고, 그 남자는 무척이나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다율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서 제작진들과 회의 중인 권지하를 쳐다보았다. 그는 김혜현, 정재우와 함께 대사 리허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연 배우끼리 리허설을 하면 시간을 꽤 잡아먹게 되므로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았다.

보조 출연자들이 모여 있는 곳 말고 다른 데에 가서 바람을 쐬자.

다율은 기분 전환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조용히 일어나 부스를 빠져나와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촬영장 부지를 벗어나 바닷가로 걷기 시작했다.

바다로 나오니 오후의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다율의 얼굴을 스쳤다. 평화롭게 모래성을 쌓는 어린아이,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사람, 가끔가다 포말을 튀기며 파도 위에 올라탄 서퍼들을 보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휴우… 그래.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자.”

일단 차분해지자. 너무 극단적인 상상만 하니까 더 불안해지는 거야.

다율은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쓰며 자꾸만 괜찮다, 괜찮다 혼잣말을 했다. 고개를 숙이고 중얼대는 통에 그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어깨를 살짝 부딪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다율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아, 뭐. 괜찮아요.”

상대는 중년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덩치가 좋은 남자였다. 다율은 고개를 들어 올리다 말고 돌처럼 굳었다. 믿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이자를 마주치다니.

속리산에서 자신을 쫓아다니던 수인 헌터였다. 이 얼굴과 목소리를 어떻게 잊겠는가. 자신의 지척까지 쫓아와 총을 겨누던 잔인한 자의 모습인데.

다율은 꿈속에서 ‘저 쥐새끼 잡아라’라는 목소리를 들었고, 가끔가다가 환청을 들을 정도였다. 꿈속의 다율은 있는 힘껏 네 발을 움직였지만, 발에 쥐 끈끈이가 붙은 것마냥 달려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 지옥 같은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곧 뒷덜미가 차가운 손에 붙들렸다. 다율은 그 대목에서 번쩍 눈을 떴다. 가까스로 권지하의 품에서 잠을 청해야만 다시 잠을 잤다.

그런데 지금 그 수인 헌터가, 바로 자신 앞에 있다.

“어…?”

헌터가 고개를 숙여 다율의 얼굴을 살피려 했다. 다율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주춤했다.

“잠깐만. 우리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헌터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율은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인간화한 상태라 헌터가 자신을 알아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고 식은땀이 났다. 남자의 눈빛이 희번덕거렸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이야기요?”

“아. 별건 아니고.”

털이 북슬북슬한 손이 스윽 앞으로 나왔다. 그의 손이 다율의 팔목을 잡아채려 하는 순간, 다율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달렸다.

“이봐!”

수인 헌터는 부리나케 도망치는 다율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는 바닥에 침을 퉤, 뱉은 다음 핸드폰을 꺼냈다.

“야. 중호야.”

-네. 형님.

“네가 사진 보낸 머리 노란 놈 방금 마주쳤어.”

-아. 정말요?! 형님 보기에 어떠세요. 황금다람쥐 종 같으세요?

“가까이서 자세히 관찰해 보려고 하는데 이놈이 줄행랑을 치네? 마치 날 아는 놈처럼….”

-네? 형님을 알다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박중호의 말에 수인 헌터 김명구는 혓바닥을 내밀어 입가를 싹 훑었다.

“내가 지금까지 놓친 수인이 딱 한 마리인데, 그게 그 귀하다는 황금다람쥐란 말야? 머리색이 그 다람쥐 새끼랑 똑같은 데다 나를 보고 벌벌 떠는 게 수상해. 짐작이긴 하지만 이 새끼가 수인이라면 왠지 그놈일 것 같다.”

-정말이십니까? 하긴. 형님을 보자마자 아무 이유 없이 벌벌 떤다면 일리가 있네요.

“어. 이거 아주 일이 재밌게 흘러가고 있는데. 일단 조금 더 쑤셔 보자.”

김명구가 킬킬거리면서 통화를 하는 동안, 다율은 멀리 가 있지 않았다. 그는 근처 편의점 앞에 주차 중인 차 뒤에 쭈그려 앉아 몸을 숨기고 있었다. 덕분에 김명구가 하는 대화를 조그맣게나마 엿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맞아. 속리산 수인 헌터…! 영문은 모르겠지만 날 찾아냈어. 게다가 촬영장의 그 이상한 젊은 남자, 만약에 그 남자가 수인 헌터와 한 패거리라면? 그렇다면 날 관찰하고 쫓아다니던 게 말이 돼.

이제 퍼즐이 완성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덫 한가운데 놓여 버렸다. 다율은 입을 틀어막고 숨을 헉헉거렸다. 조그마한 소리라도 새어 나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차분하게 숨을 쉬려 했지만, 지금의 공포 앞에 다율은 도저히 침착할 수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속이 역겨웠다.

다율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 헌터의 움직임을 살폈다. 김명구는 담배를 한 대 피우더니 트럭에 올라 촬영장 반대 방향으로 출발했다.

“하아….”

다율은 식은땀 가득한 얼굴을 닦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쭈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도 후들거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사이렌 비슷한 소리에, 익숙한 벨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다율은 깜짝 놀랐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발신자는 권지하였다.

“아… 맞다. 나 촬영장에서 무단으로 뛰쳐나왔지.”

다율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다율아. 어디야?

권지하의 목소리는 낮고 다정했다. 평소의 그다운 목소리였지만 다율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안심이 되는 한편으로 또 그가 그리웠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권지하가 너무 보고 싶었다.

“저… 저 속이 조금 안 좋아서, 산책하고 있었어요.”

다율은 목 메인 티를 내지 않으며 어색한 변명을 내놓아 보았다.

-아 그래? 나 지금 촬영 끝났어. 지금 어디야?

“저 주차장에 있어요.”

-그래. 그럼 내가 그리로 갈게.

전화가 끊겼다. 다율은 핸드폰을 꼭 쥐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야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고 지냈던 현실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권지하와 사랑에 빠지고, 단꿈에 젖어 잠시 비참하고 두려운 현실을 잊고 있었다. 보통 수인도 아니고 그중에서도 희귀종이라 불법 약재로 사용되는 최하층 수인. 인간 대접은커녕 생명체로서 보호도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재 다율의 신분이었다.

인간으로 변해서 일하고 살다 보면 안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결국은 이렇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다율이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데 저 멀리서 권지하가 나타났다.

“다율아!”

“아, 네!”

다율은 어두운 안색을 씻어내고 일부러 미소를 띠었다. 권지하 앞에서 우울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그를 걱정시키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빨리 가요, 우리.”

다율이 허둥지둥 운전석에 올랐다. 곧 조수석에 올라탄 권지하가 다율을 빤히 봤다.

“왜요?”

“너 얼굴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

권지하가 다율의 뺨을 감쌌다. 다율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 하나 속여 넘기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권지하 앞에서 굳이 어두운 얼굴을 보여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오늘 워낙에 날이 더워서 지쳤나 봐요.”

“하긴. 너는 기초 체온이 높으니까 남들보다 더 힘들 수 있겠네.”

권지하가 차 내 에어컨을 최대치로 틀었다. 찬 바람이 쌩쌩 나오자, 다율은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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