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다율은 현관에 놓인 캐리어를 바라봤다. 큼지막한 캐리어는 강원도에 갈 때 참 유용하게 썼는데, 이건 너무 커서 들고 가기 어려울 것 같다. 대신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 가져왔던 자그마한 캐리어에 짐을 싸야 할 듯했다.
다율은 작은방 옷장 옆에 세워놨던 캐리어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때는 짐이 정말 적어 이 가방 하나로 충분했는데, 어느덧 옷도 늘고 물건도 늘어 이 안에 다 담길지 알 수 없었다. 알록달록한 여름옷들, 아직 신어 보지 않은 새 신발들.
이건 다 권지하가 사 준 것이었다.
…이제 이 집을 나가면 다시는 볼 수 없겠지. 아마 TV나 영화관에서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는 손을 잡지도 못하고 안길 수도 없다. 아까 현관에서의 배웅이 마지막 인사가 되는 셈이다. 그에게는 전혀 예고도 없이 사라져 버려, 영원히 연락이 끊긴다.
다율은 옷을 챙기다 말고 멈칫했다.
이대로 사라져 버리는 선택이 옳은 것일까? 이대로… 조금만 더 모른 척하고 지내면 안 될까.
다율의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평화롭게 권지하의 곁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냐. 정신 차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율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대로 배우님 곁에 있으면 배우님도 곧 내가 수인이란 사실을 알게 될 거고, 헌터 놈들 때문에 피해를 입으실 거야. 그냥 나 하나만 조용히 사라진다면, 배우님의 곁을 떠난다면… 배우님에게까지 여파가 가지는 않을 거야.
다율은 독한 마음을 먹고 서둘러 짐을 쌌다. 현금으로 보관 중이던 월급 일부를 작은 종이상자에 꾹꾹 눌러 담았다. 열심히 모아온 덕에 액수는 제법 됐다. 그리고 권지하의 흔적을 지니고 나가고 싶어, 그가 준 팔찌를 차고 언젠가 그가 사 주었던 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다.
그는 작은 캐리어를 끌고 현관에 섰다. 마지막으로 뒤돌아 집 안을 살피는 다율의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추억이 여기 깃들어 있었다.
거실에서 함께 TV를 보던 날, 주방에서 함께 밥을 해 먹고 소풍 갈 도시락을 싸던 날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침실 문에 시선이 닿았을 때 다율의 뺨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늘 춥게 자던 사람. 그의 체온을 높여 주기 위해 밤마다 차가운 몸을 끌어안고 잠을 자던 곳. 내가 없다면 그의 잠자리는 썰렁해질 것이다. 몸이 안 좋아질지도 모른다. 이 점이 다율에게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
당장 오늘 새벽부터 배우님은 얼마나 추우실까요. 미안해요.
다율은 코를 훌쩍이며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쿵. 묵직한 철제문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 시간 권지하는 주얼리숍에 있었다. 다율에게는 비밀로 하고 들른 곳이었다.
“이거 말고 아까 그거 다시 볼게요.”
“네, 고객님.”
직원은 권지하를 알아본 상태였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웃음을 띠었다. 30분 전 매장에 들어온 권지하는 가장 비싼 프리미엄 라인을 다 둘러보고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초특급 VIP를 놓칠까 겁이 난 직원은 원하면 다이아를 더 크게 가공해 얹어 줄 수 있고 사이즈도 딱 맞게 고쳐 줄 수 있다며 허리를 굽실댔다.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러워야 됩니다.”
“그러면 이 라인은 어떠세요? 커플링으로 잘 나가는 건데요.”
직원이 반지 한 쌍을 보여 주었다. 금색이지만 올드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산뜻한 이미지가 살았다. 마치 다율의 밝은 머리색을 연상시키는 색깔에 권지하는 그 반지가 마음에 들었다.
“자세히 좀 볼게요.”
“네. 꺼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쇼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냈다. 권지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다율이 자신의 마음에 응답하는 날, 이 반지를 끼워 줄 생각이다. 프러포즈와 함께. 그리고 다율이 지하를 사랑한다고 화답하는 날은 머지않았다. 권지하는 당연히 다율이 자신을 받아 줄 것이라고 확신에 차 있었다.
“이거 괜찮네요.”
“그렇죠? 워낙에 고가라서 여태껏 사 가신 분이 없었는데 아름답기로는 제일이죠. 안목이 탁월하세요.”
“별말씀을요. 제가 고른 물건이니 이 정도 품격은 돼야죠.”
권지하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그러면 사이즈 관련해서 측정 도와드리겠습니다. 도구를 가져와야 하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네.”
직원이 권지하 앞을 떠나 매장 안쪽으로 향했다. 권지하는 반지를 바라보며 계속해 웃음 지었다. 이걸 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갑작스러운 청혼에 놀라겠지만 다율이는 당황했을 때가 가장 예쁘니까 얼른 그 얼굴을 보고 싶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주머니 속 권지하의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평소와는 달리 이상할 정도로 다급하게 느껴지는 진동이었다.
다율이인가?
권지하는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빼 들었다. 발신자는 큰 프로젝트를 도맡아 처리하는 총괄 매니저 백장훈이었다. 다율에게는 선임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기도 했고. 그런 그가 다율을 통하지 않고 전화를 하다니 뭐가 뭔지는 몰라도 급한 일인가 싶었다.
“어. 형.”
-지하야.
백장훈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동시에 긴장감도 느껴졌다. 권지하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혹시 회사에 무슨 사건이라도 생긴 건지, 아니면 작품 진행에 차질이 생긴 것인지 찝찝했다.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너한테 알려야 할 일이 있어서.
“뭔데요?”
권지하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인단 말인가. 권지하는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윽고 날아온 백장훈의 대답은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다율이가 그만둔대. 아니, 그만뒀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권지하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소화하지도 못했다.
“형. 잠깐만. 지금 뭐라고 한….”
-다율이가 사표 내고 회사 나갔어. 숙소에서도 짐 뺐다더라.
길을 가다가 소행성과 충돌한다 해도 이보다 충격적이진 않을 것이다. 권지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권지하는 그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달려갔다. 차를 제대로 운전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 감각도 없었다. 숨이 막힐 만큼 달려 아파트로 들어선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인내심이 없어 뛰어 올라왔다. 그리고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없었다. 다율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제 오냐면서 쪼르르 달려 나와 자신을 반겨 줄 다율이 없다.
“다율아.”
권지하의 목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집 안은 적막했다. 권지하의 손이 더욱더 차갑게 식고, 머리는 어지럽게 핑글 돌았다.
“어디 있어. 다율아, 어디 있냐고.”
그는 침실 문을 열어 보았다. 사람 없는 방이 그렇듯 고요함만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설마 하며 작은방으로 갔다. 다율이 개인 물건을 보관하고 있던 곳이었다. 일단 옷장부터 열어 보았다.
“아….”
옷가지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사 줬던 셔츠도, 바지도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원래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옷장은 허무하게 비어 있었다.
“….”
그리고 또 하나의 위화감이 있었다. 맨 처음 다율이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가지고 왔던 작은 캐리어. 지방으로 1박 2일 출장을 갈 때마다 굳이 들고 다니던 낡은 캐리어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늘 옷장 옆에 세워져 있어서 방의 일부분과도 같았던 캐리어는 가고 없었다.
권지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불안한 호흡을 내쉬며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늘 곁에 있고, 손 안에 있던 다율이 한순간에 사라지다니. 겁을 먹고 달아날까 봐 완급을 조절하기는 했다. 너무 급하게 다가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다율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반드시 다율은 다시 자신에게 다가왔다.
이제는 확실하게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다율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진심을 담아 고백했다. 다율은 곧바로 답을 돌려주지는 않았지만 권지하는 알 수 있었다. 다율도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 마음은 권지하보다 조금 더 순수하고 순진한 마음이겠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같으리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착각이었던 건가.”
지금까지 다율과 마음이 통해 왔다는 믿음은 어쩌면 착각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는 세상 무엇도 다 자신의 발밑에 둘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충만한 자기애, 자기 확신이 권지하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갈증 났던 상대인 다율마저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렇게 한순간에 증발이라니.
다율이는 날 사랑한 게 맞았을까. 그것은 권지하가 태어나 처음으로 내뱉은 절박하고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날개도 없이, 그저 끝없이.
다율은 하염없이 걸었다. 새 신발에서 터벅터벅 소리가 났다. 신발코를 볼 때마다 권지하 생각이 나 눈가에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난 어디로 가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