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런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다시 한번 집중을 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인간화가 되지 않았다.
설마 너무 기력이 없어서인가? 인간으로 변할 힘조차 잃어버렸다니, 난 어떡하면 좋아.
다율은 초조해졌다. 이러면 아이들한테 어떻게 메시지를 전한담.
…형의 전화번호를 남길까? 일단 연결이 되면 아이들이 다람쥐가 있다고 말해 주지 않을까.
다율은 일단 그렇게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색연필이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작은 방 안을 왕복하는 정도에 불과했는데 몸이 힘들었다. 자꾸만 머리가 어지럽고 속도 울렁였다.
안 돼. 정신 차리자.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며, 다율은 다시 색연필을 껴안고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010-0000-000
권지하의 번호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썼다. 혹시라도 틀리면 안 되기에 중간에 점검도 했다. 그리고 이제 맨 마지막 번호만을 남겨 놓은 시점, 후들거리던 다율은 그만 픽 하고 쓰러졌다. 기력을 너무 많이 쓴 탓이었다.
“다람쥐야! 어떡해.”
“일단 눕히자.”
아이들은 다율을 수건으로 감싼 다음 따뜻한 아랫목으로 옮겼다. 축 늘어진 다율은 이따금 몸을 움찔거릴 뿐, 도통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빠, 우리 이제 어떡하지….”
“방금 전화번호를 쓰다 말았잖아. 엄청 중요한 번호 아닐까?”
“설마 우리한테 전화를 걸어 달라는 뜻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어.”
아이들은 한 자리가 비어 있는 전화번호를 보며 머리를 모았다. 어차피 숫자라고 해 봤자 0에서 9까지 딱 10종류밖에 안 되었다. 직접 걸어 보면 될 일이었다.
“그럼 전화는 이따가 하고, 일단 우리 다람쥐 맛있는 거 사 주자. 좀 있다가 일어나면 틀림없이 배고플 거야.”
“그럼 슈퍼 갈까?”
“그래. 슈퍼 가자.”
오빠가 여동생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남매의 집에서 슈퍼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아, 아이들은 금방 자그마한 슈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혹시 밤 있어요?”
“밤이라면 어떤 밤. 생밤?”
“음… 그거 말고 아주 달짝지근한 거 있는데. 이름이 뭐더라, <멋있는 밤>?”
“아. 멋밤 말하는구나. 있지. 하나 줄까?”
“네!”
아이들이 발을 구르며 신나 했다.
“다람쥐 가져다주면 좋아하겠지?”
“잘 먹을 것 같아.”
그 소리에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남자가 아이들을 싸늘하게 훑었다. 그는 담배를 사러 들어온 수인 헌터 김명구였다. 가게 주인이 아이들에게 멋밤 한 봉지를 계산해 주는 동안, 김명구는 아이들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이들은 김명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김명구의 귀에 수인이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느낌이 온다. 이거 그 쥐새끼 이야기야.
남매가 바깥으로 나가자 김명구도 담배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빠르게 슈퍼를 빠져나왔다.
“얘들아.”
“네?”
딱 봐도 인상이 더러워 보이는 남자가 껄렁하게 말을 걸자, 남매는 겁을 먹었다.
“그 밤 너희가 먹을 거니?”
“아, 그… 그, 왜요?”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지.”
아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멋밤은 얼른 등 뒤로 숨겼다. 하지만 김명구는 한 발짝 더 가까이 아이들에게 다가오며 간사하게 웃었다.
“그런데 너희 혹시 동네에서 다람쥐 한 마리 못 봤니?”
남매가 시선을 교환했다. 뭔지는 몰라도 나쁜 사람이 틀림없다.
“몰라요!”
“으아아!”
아이들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일단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뿐이라,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집 방향으로 달렸다. 그게 김명구에게 힌트를 주는 일인지도 모르고.
“가정집으로 들어가는군…? 야! 천재욱, 박중호. 쥐새끼 찾은 것 같다! 빨리 나와.”
김명구가 슈퍼 앞에 주차돼 있던 트럭으로 돌아가 버럭 고성을 질렀다.
“찾으셨다고요, 형님?”
“정말입니까.”
“그래. 저기 벽돌집 하나 보이지? 저 집 애들이 쥐새끼를 숨겨 준 모양이야. 아마 이제 곧 튀어나오지 싶다.”
덫을 놨으니 알아서 걸어 나오겠군. 김명구는 비열하게 웃으며 총을 챙겼다.
한편 집 안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혼비백산하며 작은방 문을 열어젖혔다. 다율은 아직 수건 위에 누워 자고 있었다.
“다람쥐야!”
“큰일 났어!”
아이들의 요란스러운 소리에 다율이 눈을 떴다.
“무서운 사람이 말 걸었어!”
“다람쥐 못 봤냐고 해서 모른다고 했어. 너 찾는 거 같아.”
다율의 등에 소름이 끼쳤다. 수인 헌터 놈들이 여기까지 추격해 오다니. 심장이 멈춰 버리는 것만 같았다.
“얼른, 얼른 도망쳐!”
여동생이 다율을 손바닥에 쥐고 부엌으로 나왔다. 그런 다음 오빠가 집의 뒷문을 열어 주었다.
“도망가! 얼른.”
다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집 밖으로 나오니 과연 아이들 말처럼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낯익은 트럭이 주차돼 있었으며 그 앞에서 헌터와 박중호, 천재욱이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있었다.
“어, 형님! 저기 쥐새끼 나왔는데요.”
“젠장. 당장 가서 잡아!”
다율의 꼬리가 삐쭉 섰다. 다율은 전속력으로 밭을 가로지른 후 산기슭까지 도착했다. 남은 건 이 산속으로 다시 몸을 숨기는 일뿐이었다.
뒤에서 다율을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율은 이제부터 죽음의 고비를 홀로 넘어야만 했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려 갈색 털을 적셨다.
형, 보고 싶어.
나한테 힘을 줘.
아이들은 패닉에 빠졌다. 조그마한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아까 봤던 인상 험악한 남자가 산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다람쥐가 날쌔게 뛰어 어딘가로 숨은 것 같기는 했지만, 남자가 너무 무시무시해 보여 아이들은 겁이 났다.
“오빠. 어떡해? 다람쥐 잡히는 거 아니야?”
“그럼 안 되는데….”
“오빠, 우리 다람쥐 도와주자.”
“어떻게?”
“아까 다람쥐가 스케치북에 전화번호 썼잖아. 거기 전화해 보자.”
“아. 맞다. 그래, 지금 걸어 보자.”
남매는 방으로 들어가 스케치북을 들고 나왔다.
“맨 마지막 번호가 없으니까 우선 0부터 1, 2, 3 순서로 걸어 보자.”
“좋아.”
“그럼 내가 걸게.”
오빠가 집 전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끝 번호 0은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
“0은 아니네.”
“그럼 1을 해 봐.”
아이들은 1번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한 아저씨에게 장난 전화 하지 말라는 꾸지람을 들어야만 했다.
2번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3번은 어떤 중년이 받아 보험 권유는 사절한다며 정색을 했다.
“어떡하지… 4번은 맞았으면 좋겠는데.”
아이들이 초조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권지하는 차에 올라 미친 듯이 액셀을 밟고 있었다. 수인 헌터의 차량 소재를 찾아냈다는 육촌 형의 전화 때문이었다.
‘놈들 동선을 추리해 봤거든. 수인 매매 시장이 활성화된 곳이 충원도 횡천시야. 그래서 혹시나 하고 그리로 가는 트럭들을 대조해 보니까, 진짜더라고. 그놈들 한 시간 전에 횡천 요금소 지나서 시내로 진입했어.’
그 말에 권지하는 총알처럼 반응하며 바로 차에 몸을 실었다. 육촌 형과 해결사들은 따로 오기로 하고, 마음 급한 권지하부터 먼저 횡천시로 출발했다.
다율아. 제발 무사해 줘.
형이 갈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텨 줘.
권지하는 가슴이 터져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분명 최대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도 차가 느려 터지게만 느껴졌다.
핸들을 쥔 그의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뭐라도 쾅쾅 내리치고 싶던 그때, 블루투스 스피커로 전화가 들어왔다.
무기한 활동 중단을 선언한 이후로 전화가 폭주하는 탓에 육촌 형과 해결사 외의 번호는 받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번호는 받아야 할 것 같았다. 횡천시의 지역번호를 단 번호였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아, 저… 저기요! 다람쥐. 그게 아니라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면요.
남자아이가 횡설수설하는 와중 다람쥐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이건 다율이를 가리키는 거다.
권지하는 바로 갓길로 차를 대고 블루투스 볼륨을 높였다.
“얘야. 넌 누구니?”
-어… 그니까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고요. 동생이랑 놀다가 다람쥐를 주웠어요.
“횡천 맞지? 다람쥐는 보통 다람쥐보다 털 색깔이 밝고.”
-어어! 맞아요.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아저씨는… 다람쥐 주인이야.”
권지하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분노와 회한, 자책이 한데 뭉쳐서 감정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아, 진짜요? 어떡해. 다람쥐 지금 도망갔는데….
“뭐라고?”
-이상한 사람들이 다람쥐 쫓아와서 저희가 도망가라고 했거든요.
놈들이 먼저 다율이를 발견했다니. 권지하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얘들아. 아저씨가 지금 다람쥐를 잃어버려서 굉장히 슬퍼. 너희 있는 곳이 어딘지 좀 알려 줄래?”
잠시 뒤 아이들이 마을 주소와 함께 이 앞에 산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권지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바로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1초라도 지체했다가는 모든 것이 끝장날 수 있다는 생각에, 권지하의 머릿속은 하얗게 되었다. 그저 다율에게 가야 한다는 일념만이 남아 그의 차를 움직이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