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93화 (93/95)

93화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가족들이 앞장서고 다율과 할아버지가 그 뒤를 따랐다. 널따란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드셔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식탁에는 권지하의 아버지가 새벽부터 만든 온갖 도토리 요리들이 놓여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드십시오.”

이무기 수인과 다람쥐 수인이 한 상에 이만큼 모여 앉는 것도 특별한 일이다. 다율은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우리 다 같이 사진 찍어요.”

“좋은 생각이다.”

“나 다율이 옆에 설래.”

“다율이 옆은 내 자리지.”

가족들은 서로 다율의 옆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그래서 정작 사진에는 다율이 가장 조그맣게, 사람들 틈바구니에 낀 모습만 나왔다.

다율은 그게 뭐라고, 아주 많이 행복했다.

“날 좋아지면 요 녀석들 데리고 속리산 한번 와 주십시오. 제가 알밤 한번 구워드리죠.”

“물론입니다. 꼭 가겠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권지하가 수리업자를 보내 준 덕에 속리산 집은 말끔하게 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다율의 오두막 또한 단열 공사를 마쳐, 사시사철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끔 고쳐놨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할아버지, 이거 스마트폰이요.”

다율은 집을 떠나는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아니, 이게 뭐냐.”

“이제 아기들 재롱 보려면 이게 필요하실 거예요.”

사실 다율의 할아버지는 지독한 아날로그파였다. 이번에 서울에 올라왔을 때에도 터미널에서 공중전화로 연락을 해 올 정도였으니. 하지만 귀여운 손주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 그는 다율의 핸드폰으로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역시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는데 손자가 어느새 선물로 준비해 놓은 것이다.

“이거 누르면 언제든지 아기들 모습 볼 수 있어요.”

“세상 참 좋아졌다.”

“그러게요. 전… 지금 세상이 참 좋아요.”

다율은 어느덧 인간 세상을 사랑하게 됐다. 춥고 삭막하고, 모두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것만 같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다율은 어느새 세상을 사랑하고 또 세상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

겨울이 지났다.

다행히 올해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아기들은 걸음마를 뗐고 이제는 귀와 꼬리 정도는 간단히 숨길 수 있게 되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네요. 이제 봄인데 우리 바깥에 나가면 어때요?”

“아기들 데리고?”

“네. 산책하고 싶어요.”

4월도 중순이라 꽃이 핀 어느 날, 다율이 먼저 외출을 제안했다.

“음… 글쎄. 난 아직 집 안에서만 지냈으면 좋겠는데.”

권지하라고 해서 다율과 아기들을 데리고 나가기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까지 그는 안전에 각별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이제 아기들 귀도 꼬리도 잘 감추잖아요. 이제 위험할 일은 없다고 봐요.”

얼마 전, 수인 헌터 김명구는 30년 형을 선고받았다. 양심도 없는 그는 즉각 항소했으나 재판부는 그의 억울함에 공감해 주지 않았다. 현명한 판사는 수인도 인류의 구성원인 만큼, 김명구는 그간 살인과 인신매매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고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그날 법정에 다율 대신 출석한 권지하의 어머니는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수인권 보호 운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겠지만, 특히나 다율의 장모로서 더 벅찬 순간이었다.

천재욱 역시 30년 형을 선고받았다. 김명구와 차이점이 있다면 와우 기획에서 그를 명예훼손 및 의무 불이행 명목으로 고소해 민사소송의 홍역까지 치러야 했다는 점이다. 그간 도박 중독과 사치에 절어 있던 그한테 위약금을 물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와우 기획은 그의 외제 차와 펜트하우스를 압류했고, 그 결과 천재욱이 갈 곳이라고는 감옥밖에 없었다. 숙식이라도 제공되니 차라리 이게 낫겠다며 그는 자조했고, 팬덤은 와해되다 못해 그를 비난하고 상스러운 욕을 퍼부었다.

헌터와 여러 차례 같이 일했던 박중호는 가중 처벌을 받았다. 수사 과정에서 여러 번 거짓 진술을 하며 경찰과 검찰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사건을 교묘히 은폐하려고 용을 쓰다가 된통 걸린 탓이었다.

“저 진짜 억울해요! 이걸로 권지하가 저 찌르려고 했다니까요? 하마터면 저 골로 갈 뻔했습니다.”

그가 증거물로 제시한 것은 산에서 싸울 때 사용했던 접이식 칼이었는데, 당연히도 거기에서는 권지하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 박중호 본인의 지문과 더불어 의문의 DNA만 검출되었기에, 그는 또 다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멍청해도 그렇게 멍청할 수가 없었다.

“나쁜 놈들도 다 잡혀갔잖아요. 이제 우리… 아이들한테 세상 보여 줘요.”

다율은 이 아름다운 봄을 아이들에게 선사해 주고 싶었다. 권지하도 그 마음을 이해했기에, 조심스럽게 외출 준비에 나섰다.

아기들을 쌍둥이용 유아차에 태우고 본인들의 얼굴은 모자와 선글라스로 가렸다. 권지하는 100미터 밖에서 봐도 빛이 난다는 이야기가 도는 배우였고 실제로 지금도 가릴 만큼 가렸는데도 피지컬이 좋고 비율이 우월해 너무 튀었다.

“형. 그렇게 가렸는데도 형인지 다 알아보겠어요. 이 동네에 이렇게 키 크고 모델 같은 사람 형밖에 없는데.”

“그래? 그럼 더 꽁꽁 싸매야겠어.”

머리를 굴린 결과 나온 아이디어가 후드 재킷이었다. 권지하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나마 얼굴이 많이 가려지니 알아보기가 조금은 어려워졌다.

“우리 어디 갈까?”

“전 한강공원 가고 싶어요. 강도 보고 바람도 쐬고.”

“좋아. 다율이가 가고 싶은 데라면 나도 좋아.”

다율은 아기들 먹일 것과 자기와 권지하가 먹을 간식을 골고루 쌌다. 권지하는 화사한 컬러의 돗자리를 챙겼다.

“날씨 너무 좋다!”

밖으로 나오자 화창한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벚꽃잎을 흩날리고 있었다. 햇살도 따뜻하고 공기도 맑아 산책하기 적당했다.

아파트 뒤쪽에 걸어서 갈 만한 거리의 한강공원이 있었다. 다행히도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유아차를 밀고 가기에 힘들지 않았다. 둘은 콧노래를 부르며 공원까지 느긋하게 걸었다.

“사람이 꽤 많네요.”

“그러게.”

날씨가 좋아서인지 한강공원에는 어린아이부터 커플, 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전거나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잔디밭은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과 텐트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다율네도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요. 형이랑 피크닉 갔던 날이요.”

“그때 기억나?”

“당연하죠. 그날 얼마나 재미있었는데요.”

“그럼 혹시 이 사진은?”

권지하가 핸드폰에서 다람쥐 다율의 사진을 찾아 보여 주었다.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이, 이 사진을 왜 갖고 있어요.”

“이거 너 맞지.”

“맞… 맞는데, 아니. 이때 날 찍었다고요?”

“다율이 닮아서 찍었지. 그때 닮아도 너무 닮았다, 좀 이상할 정도다고 생각하면서 찍었어.”

이어서 나오는 비하인드 스토리에 다율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형, 그러면 내 정체는 그때부터 의심한 거예요?”

“응. 그때랑 또 헤어밴드에 황금색 털 묻었을 때가 결정적이었지.”

“그 사건… 아. 악몽이 떠오른다. 갑자기 귀 나와서 헤어밴드로 누르고 잤어요. 귀 안 들어갈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지금 돌이켜 봐도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어떻게 그 위기들을 헤쳤는지 신기할 정도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젠 안 그래도 되니까 좋지?”

“말이라고 해요.”

청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율은 이제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발정기 때마다 귀와 꼬리를 마음껏 드러냈다. 답답함 없이 지내니 성격이 더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권지하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지낼 수 있어서, 그게 참 좋았다.

“아기들 잘 잔다.”

“그러게. 나무 그늘 아래 있어서 그런지 편안한가 봐요.”

쌍둥이들은 보채지도 않고 얌전히 누워 가끔 손발만 꼬물댔다. 다율이 흐뭇하게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몇 미터 떨어진 돗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그 사람 아니야? 배우 권지하 매니저.”

“어? 맞는 것 같아. 나 그 매니저 예능 프로 엄청 열심히 챙겨 봤었거든. 머리카락 색이 똑같은데?”

다율과 권지하는 아기들을 보느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한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인기척을 냈을 때에야 비로소 눈치를 챘다.

“저기요, 혹시….”

“무슨 일이시죠.”

권지하가 정색하며 다율과 아기들을 가렸다. 보호 본능으로 똘똘 뭉친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아, 죄송해요. 혹시 옛날에 권지하 배우랑 예능 나왔던 매니저님 아닌가 하고 와 봤는데요….”

여자의 눈길이 이번에는 권지하를 향했다. 워낙에 수상해하는 눈빛이라 잡아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했다.

“와! 권지하 배우님 맞죠. 어떡해.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흔히 겪는 반응이라 그렇게 놀랍거나 많이 불쾌하진 않았다. 다만 아기들이 신경 쓰였다.

“네. 맞습니다.”

“그럼 이쪽 분은 매니저님 맞겠네요. 우와, 너무 신기해요.”

연예인으로 살다 보면 이렇게 낯선 사람들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일이 많았다. 적당한 팬 서비스를 하며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의 눈에는 유아차의 존재가 의아한 모양이었다.

“어? 그런데 아기들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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