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두컴컴한 고요가 무섭도록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타인의 무의식은 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무언가가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듯 몸 전체를 꾸욱 누르는 압력이 느껴졌다. 엘런은 저만치 떨어져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결계를 쳐놓은 테두리 안에 발을 옮기지 못하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몸을 숙여 잠든 반희용을 내려다봤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행복한 꿈을 꾸는 듯이. 반희용은 곱게 두 눈을 감고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옅은 머리카락 아래로 새하얀 얼굴이 아름다웠다. 중학생의 얼굴인데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어딘가 고혹적인 느낌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한 엘런이 어떤 식으로 얠 괴롭혔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부드럽게 이마를 감싸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이마에 손을 댔다. 감정이 넘치는 문장들이 머리 위로 솟길 바라며 마음을 읽으려고 애를 썼지만, 직감적으로 마음이 비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담기지 않은 빈 껍데기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의식의 형체로 이곳에 있을 뿐 반희용의 영혼은 아무래도 무의식에 집어 삼켜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이리 와. 엘런.”
나는 차분한 어조로 엘런을 불렀다.
“거기서 말해.”
“후회할지도 몰라.”
머뭇거리던 엘런이 발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다가왔다. 평소 엘런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침울한 표정이었다.
“온기가 없어.”
“…….”
“진짜, 마지막인 거 같아.”
“…….”
“너, 반희용한테 할 말 있잖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엘런과 반희용을 두고 아까 엘런이 서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급격하게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서 발을 들어 옮기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몸을 짓누르는 압력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런 공간에 태오가 반희용처럼 몇 달을, 지냈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어딘가가 참을 수 없이 슬퍼진다.
나는 가만히 서서 엘런과 반희용을 바라봤다. 멍하니 서 있던 엘런이 몸을 굽히고 앉아 반희용의 손을 끌어 잡는 게 보였다. 뭐라고 말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엘런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 깨닫는 마음이 얼마나 사무치게 아플까. 엘런은 그 마음을 비로소 정직하게 마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태오가 떠올랐다. 맨 처음 만났던 그 무례한 얼굴과 마음을 읽을 수 없어 당황했던 순간이 생각났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 녀석이 내 손을 잡았을 때 심장 어딘가가 덜걱거려서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었다. 마음을 읽을 수 없어 괴로웠던 것보다 처음 느껴본 그 떨림이 생경해서 일부러 더 못되고 난폭하게 녀석을 밀쳐냈었다.
냉정하게 마음을 닫고 무시하고 또 무시하려고 애쓸 때마다, 기태오는 내가 쌓아놓은 경계심을 가볍게 무너뜨렸다. 매일 밤 꿈에서 녀석이 저질렀던 짓들을 생각하면 결국 녀석도 나와 같은 의미로 나를 괴롭히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좋아하게 될 줄 모르고. 내가 널 무시했던 것처럼.
엘런이 몸을 일으켰다. 어째선지 대리석 바닥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나는 엘런을 올려다봤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가 눈에 들어왔다.
“가자.”
* * *
잠이 깼다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멍해서 좀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다. 목이 마른 것 같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했다. 작게 숨을 내쉬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스탠드 불빛 사이로 태오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왔는지 녀석은 겉옷을 입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왔어?”
“응.”
“아. 엘런이랑 반희용 만나러….”
태오가 상체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알아, 하고 속삭였다. 엘런이 말했구나. 괜히 꿈에서 봤던 엘런의 얼굴이 떠올랐다. 축축하던 눈동자가 떠올라 마음이 쓰였다. 그 순간 태오가 내 양손을 가져가 자신의 두 뺨에 맞댔다. 찬 공기를 맞고 집에 돌아왔는지 뺨이 서늘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보여?”
“…….”
“엘런한테 들었어. 너 사람 마음이 보인다는 거.”
나는 눈을 깜박였다. 언젠간 알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엘런의 입을 통해 밝혀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기분 나빠?”
“아니.”
“그럼, 화나?”
“궁금해.”
나는 얼른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비밀을 어떻게 이해를 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였어. 언제인지 정확히는 기억 안 나. 그냥 사람 체온이 손바닥에 닿으면 머리 위로 활자가 보였어. 난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줄 알았어.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만 그 마음이 보인다는 걸 알게 됐어. 아마 좀 철이 빨리 들었던 것 같기도 해. 머리 위로 토해지는 문장들을 읽으면 사람 속이 빤했거든. 사람을 대하는 게 편했어. 어떤 걸 원하는지 다 보이니까.”
내 말을 듣고 있던 태오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규호야.”
“…….”
“내가 너 패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처음으로 네 꿈에 들어간 적이 있었어.”
처음 듣는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 녀석 때문에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던 건 맞는데, 그때가 처음이었다니.
“네가 나보고 그러더라. 죽었으면 좋겠다고.”
“…….”
“그 말이 너무 아파서, 널 괴롭혔어. 꿈에 들어가서 몹쓸 짓도 하고. 그러면 괴롭고 아픈 마음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네 꿈에 들락거릴 때마다 꿈이 아닌 현실의 네가 자꾸 신경 쓰이고 궁금해졌어. 자꾸 만지고 싶었어. 그런 내 마음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때 나랑 헤어지자고 했던 거야?”
어째선지 태오의 눈동자는 절박했다.
“고백할게, 태오야.”
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곤 태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아.”
“뭐?”
“너만 내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태오가 내 손을 끌어 자신의 뺨을 만지게 했다.
“이래도? 하나도 안 느껴져?”
“응.”
“나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안 보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태오가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내 목에 얼굴을 묻고 깊은숨을 뱉어냈다.
“오해할 뻔했어. 네가 내 마음 다 알면서 가지고 논 줄 알았잖아.”
“병신아. 날 가지고 논 건, 너잖아.”
내 말에 녀석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그대로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순식간에 내 위로 올라온 녀석이 다급하게 겉옷을 벗어 던졌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맹수의 것과 닮아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녀석이 자신의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이제부터, 네가 날 가지고 놀아.”
“…….”
“얼마든지 어울려줄게.”
눈가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태오가 자신의 셔츠를 단박에 잡아 벌리자 단추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탄탄한 가슴팍과 잘 짜인 근육들이 눈앞에서 꿈틀거렸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훅 하고 내 쪽으로 몸을 숙인 녀석이 빤히 내 눈을 들여다봤다.
“까놓고 말해서 네가 내 마음을 읽었으면 좋겠어.”
“왜?”
“조금만 떨어져도 엄마 잃은 애새끼처럼 너만 생각하니까.”
“…….”
“책임감 좀 느끼라고.”
“뭐래.”
푸스스 웃자, 녀석이 내 턱을 당겨 아랫입술을 엄지로 느리게 쓸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널 참고 있는지 알면 좋을 텐데.”
“…….”
“너 아니면 안 서는 이 좆도 좀 알아주면 좋겠고.”
“야!”
그대로 입술이 맞닿아왔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혀가 내 입술을 핥았다. 그 촉감에 스르륵 눈이 감겨왔다. 녀석이 나를 불렀다.
“내 마음이 안 보인다니까 확실하게 말할게.”
“…….”
“규호야.”
“응?”
“사랑해.”
이상하게 울고 싶어졌다. 나는 그대로 기태오를 끌어안았다. 쿵쿵 울리는 네 심장이 저릿하게 내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