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3)

제4장. 나들이

화월루에서의 나날은 마치 구름 위를 부유하듯 평온하기만 했다. 특히 밤이 깊어질수록 흐드러지는 웃음소리와 아름다운 선율이 멀찍이 들려와 가슴을 적셨다.

괜히 사천제일루는 아닌지 유운은 종종 예전에 알던 이들이 드나드는 걸 발견하기도 했다. 먼발치에서 일방적으로 알아보고 몇 번 몸을 숨겼던 그는 갈수록 방 밖으로 나가는 횟수를 줄이게 됐다.

승한은 유운이 나가지 않는 이유를 묻는 대신, 밖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즐거움을 가져왔다. 술이며 차, 귀한 향이며 비단이 잔뜩 들어왔다.

낮이라 잠들어 있던 악공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데려오기도 했다. 침상에서 나갈 필요조차 없이 들은 그들의 합주는 훌륭했다. 중간에 끼어든 승한의 탄금 실력만 아니라면 제법 즐길 수도 있었을 테지만 결국 두통을 얻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도 오가지 않는 시간이면…….

“목덜미가 붉습니다.”

탕옥에 몸을 담근 유운은 수면을 노려보며 등 뒤에서 속삭이는 사제의 음성을 감내했다. 물이 뜨거워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의 체온을 무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오판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승한은 유운의 수음을 도왔다. 몸속에 갇혀 있는 양기 덩어리를 해소하는 건 몇 번을 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저 치료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인다 한들 오래가지 않았다.

“윽…….”

유운이 승한을 볼 때마다 자꾸 그를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이면 낮아지는 목소리, 젓가락질로 음식을 덜어주는 손가락, 그리고 몸을 숙였을 때 살짝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 따위에 무심코 밤의 일을 떠올렸다.

고기만 봐도 침을 질질 흘리는 개가 된 기분이다.

예전엔 사제를 이런 방식으로 의식하지 않았다. 한 사부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피를 나눈 형제나 진배없는 승한의 색기에 자꾸만 시선이 갈 때마다, 유운은 차마 말 못 할 배덕감에 사로잡혔다.

“이보다 더 부드럽게 할까요?”

탕옥 안이라서일까, 승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많이 울렸다. 처음엔 억세게 움켜쥐고 흔드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던 그의 애무는 갈수록 능숙해지고 있었다.

“아, 아니……. 그냥! 빨리, 아, 앗!”

유운은 애써 상념을 털어내며 승한을 채근했다.

차라리 빨리 끝내고 싶었다.

“역시 조금 거친 걸 좋아하시는군요.”

승한의 말에 유운의 귀가 벌게졌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 드린다고 하면 매번 이렇게 조르시니……. 유운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이 사제가 더 정진하겠습니다.”

“그, 으런 게 아니…… 읏!”

도리질하며 부정하는 유운의 몸을 뒤에서 덮치듯 감싼 승한은 고의가 다분한 손길로 쥐고 있던 살기둥을 강하게 자극했다.

이름을 부르면서 굳이 스스로를 사제라 칭하는 건 분명 승한의 심술이다. 유운은 이를 알면서도 지적할 수 없는, 모호한 교착 상태에 놓여 있었다.

어느 순간 물이 부옇게 흐려졌다. 유운은 고개를 숙인 채 심호흡하며 승한을 밀어냈다. 첨벙대는 물소리마저 질척하게 들리는 통에 진저리가 났다.

이게 다 그 약 때문이다. 금화 소저가 제게 먹인 약 때문에 수치도 모르고 사제의 손에 욕망을 토해내는 인간이 되고 만 거다.

“물을 갈아 드리겠습니다.”

승한이 부축해 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유운은 못 본 척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운물 탓인지 약간 휘청이긴 했어도 고집스럽게 본인의 두 다리로 선 유운은 발갛게 익은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며칠 사이 그의 나신을 몇 번이고 보았으나 유운은 매번 처음 들킨 사람처럼 굴었다.

승한은 대사형의 몸 위로 느릿느릿하게 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태양 밑에 내놓으면 내놓는 대로 검게 타는 승한의 피부와 달리, 유운은 항상 하얀 편이다. 한여름에 자주 돌아다녀도 그저 발갛게 익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젠 유운이 더위를 느낄 때도 그 살갗이 붉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팔꿈치며 무릎, 어깨나 목울대가 곱게 색이라도 칠한 양 붉었다. 저 얼굴이 부끄러움에 젖으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유운에겐 붉은색이 잘 어울렸다. 마치 다시 재회한 날 입고 있던 그 혼례복과 같은 색이.

“왜 쳐다만 보고 계십니까?”

승한이 잠시 손을 멈추자 의아함을 느낀 유운이 물었다. 순간 사내는 노련하게 표정을 갈아 끼우며 답했다.

“이번에 들어온 정보에 대해 어찌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더운물을 다시 탕옥에 채우며 그는 유려하게 말을 이어갔다.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은 녹림채가 확인되어 직접 가보려 합니다.”

“녹림채라면, 금화 소저를 습격했던 산적들을 찾을 수 있겠군요.”

“예. 정말 그 사건이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조작된 것인지 알아보려 합니다.”

승한은 젖은 유운에게 영견을 건네주며 물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제가 도움이 될까요?”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산적의 얼굴을 확인해 주셔야지요.”

자기가 얼굴을 피해서 잘 제압해 보겠다며 승한이 눈을 곱게 휘었다. 유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일부러 겸양의 말을 꺼냈으나 승한은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분명 알아보실 겁니다.”

유운은 그저 떨떠름하게 웃었다. 철두철미한 성품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이 다 부질없어질 정도로 승한은 그를 지나치게 잘 알았다.

“은공은 참 이상합니다. 저라면 기억이 없다는 이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진 않을 것 같은데 이런 일까지 자처하면서 신경을 써주시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여린 성품이라 그런가 봅니다.”

이제 저 정도의 너스레로는 입술에 침조차 바르질 않는다. 유운은 어설프게 입꼬리만 쓱 끌어 올리고 말았다.

정말 쉽지 않은 상대다.

“대사형이야말로 이상할 때가 있긴 합니다.”

탕옥을 나서기 전, 우뚝 멈춰 선 승한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제가 기억을 잃었다면 예전의 저는 어디에서 무얼 하는 사람이었는지 무척 궁금했을 것 같은데……. 재회한 후로 사형에게서 그런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돌아보지 않는 사내의 옆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어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승한은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양, 성큼성큼 걸어 탕옥을 나가 버렸다.

***

유운은 출발 전까지 승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상대는 탕옥에서 거론한 의혹 따위는 전부 잊은 양 사근사근했다.

남에게 변명할 일이 거의 없는 삶을 살았던 유운은 자신의 허술한 거짓말이 언젠가는 들통날 거라 예상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나치게 빠르다.

‘차라리…….’

차라리 터놓고 물어봐야 할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파문당한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지? 왜 기억이 온전하다는 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덮어주고 있는 건지?

심란한 유운을 비웃기라도 하듯, 승한이 불쑥 말을 걸었다.

“그 말을 타실 요량입니까?”

그가 쥐고 있는 고삐를 탐탁지 않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같이 타고 가시지 않고.”

화월루에 올 때는 다른 말에 타고 왔는데 왜 새삼 따로 가냐는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함께 타면 말의 속도도 느려질뿐더러 만약의 경우 은공께서 운신하기 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제는 깃털처럼 가벼우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신술을 배우면 몸을 가볍게 하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승한은 그저 무공을 모르는 샌님인 척하는 유운을 놀리려 이런 말을 꺼낸 거다.

유운은 여봐란듯이 아둔한 시늉을 했다.

“어찌 사람이 깃털의 무게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은공께서는 저를 너무 놀리시는군요.”

“어디 한번 무게를 달아 보시겠습니까?”

승한이 두 팔을 벌리며 물었다. 유운은 한숨을 쉬고는 성큼 다가서서 그의 허리를 안았다. 날렵해 보이는 것과 달리 단단한 몸이 만져졌다.

당연하게도 승한은 가볍게 들렸다. 유운은 부러 멍청한 투로 중얼거렸다.

“정말…… 가볍군요.”

경신술을 사용한 사제를 안는다고 허리가 나갈 우려는 없었다. 하나 승한과 이런 식으로 닿아 있는 건 낯설었다.

승한이 아주 어릴 적에도 그를 이렇게 안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폐가 되지 않을까 하여…….”

유운은 말꼬리를 흐렸다.

“말이 고생할 건 걱정하면서, 타들어 갈 제 애간장은 걱정이 아니, 되나 봅니다.”

“말을 따로 탔을 뿐인데 왜 은공의 애간장이 타들어 갑니까?”

이번엔 또 어떤 억지를 부리려나 싶었다.

“저희는 적진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눈먼 화살에 사형이 스치기라도 한다면 저는 평생 괴로워할 겁니다.”

흐르는 피 한 방울당 산적의 수급 하나를 베어올 인간이 하는 말치고는 퍽 절절하게 들렸다.

유운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승한의 말에 올랐다. 부축해 주려 내민 손이 무시당했음에도 승한은 싱글벙글하였다.

승한에게 기대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웠으나 말에 가볍게 올라탄 사제는 그를 두 팔 사이에 가뒀다. 고삐를 쥐어야 한다는 핑계가 있으니 이 어색한 창살 사이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할 신세다.

“출발하겠습니다.”

목적을 달성한 승한은 더는 질척거리지 않았다. 행여 말 안장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조심하는 눈치다.

유운은 그 담백한 태도에 정말 위험한 곳에 가는구나 싶어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일행은 두 사람뿐으로, 아주 단출했다.

화월루로 왔던 길을 어느 정도 되짚어 돌아간 승한은 갈림길에서 말머리를 틀었다. 주변에 산이야 많다지만 이쪽은 길이 좀 더 다듬어져 있었고 사람들이 오간 흔적도 가끔 눈에 띄었다.

“사천에서 중경으로 가는 상단이 이 길을 지납니다. 산세가 적당히 험하고 관아로부터 떨어져 있으니 녹림도가 영업하기 딱 좋지요.”

승한은 주변의 지리를 차근히 설명하며 말에서 내렸다. 유운은 자신이 지내던 산골 마을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구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거리에 자리 잡은 객잔은 하나가 아니었다. 점소이가 나와 목이 터져라 호객을 하고 있었다.

승한은 가장 가까운 쪽에 있던 점소이에게 턱짓했다.

“안내하거라.”

유운은 아무래도 좋으니 쉴 수 있는 곳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희 객잔이 연 지 얼마 안 돼서 침구가 아주 깨끗합니다. 소면도 저렴하고 또 우리 숙수가 빚는 만두는 끝내주지요!”

점소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건너편 가게의 점소이가 견제하듯 눈을 흘기는 게 보였다.

유운은 멈칫했다. 문을 대신 열어줄 때 내려간 점소이의 옷소매 아래로 시퍼런 멍이 보였다.

‘잘못 본 건가?’

찝찝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자 순식간에 주문이 들어갔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사람이 객잔을 드나들었다. 승한의 말마따나 표행이 자주 오가는 길인지 주 고객은 표사나 쟁자수였다.

피곤해서인지 웅성대는 목소리가 먼 데서 들리는 듯 울렸다. 유운은 소면과 함께 나온 싸구려 차만 몇 모금 홀짝이다가 내려놨다.

“산적이 아주 기승인 모양입니다.”

승한이 건넨 말에 식탁만 쳐다보던 유운이 고개를 돌렸다.

“여기 모인 표사들이 악왕채라는 곳에 대해 떠드는군요. 곧 녹림에 이름을 올릴 생각인지 무서운 기세로 덩치를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녹림은 중원에 자리 잡은 큰 산채의 연합이다. 어깨에 힘 좀 주는 산채라면 녹림에 이름을 올리고자 하기 마련이었다.

“……별로 오래가진 않겠군요.”

유운이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승한이 눈을 빛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저희가 가는 곳이 악왕채 아닙니까?”

본인의 질문이 오히려 질문으로 돌아오자 승한은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유운은 어차피 말해버린 것, 차분히 자신의 짐작을 설명했다.

“화월루주에게 조사를 전부 맡겨 놓고 뒷짐 지고 물러나 계시던 은공이 직접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은공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겠지요. 때마침 도착한 마을에서 악명 높은 산채 이야기가 들리니 저희가 가는 목적지가 저기겠구나 싶었습니다.”

“아니, 제 말은.”

승한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왜 악왕채의 성장도 끝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유운은 아차, 싶었다. 평소 승한의 손속을 감안하면 악왕채의 몰락은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다. 하나 흑천의 대공자 모용유운이라면 또 모를까, 일개 서생 유운은 승한의 잔혹성을 알 턱이 없다.

“제가 화월루에서 지낸 시간은 길지 않으나 루주가 중원의 내로라하는 해결사를 전부 꿰고 계신 분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런 분이 닭 잡는 칼을 소 잡는 일에 꺼내지 않았겠지요.”

승한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악왕채가 있던 자리에 풀 한 포기 안 나게 해 주겠다며 떠벌리는 승한을 보며 유운은 한숨을 삼켰다.

남이 했다면 그저 허풍처럼 들렸을 텐데 승한의 입에서 나오니 도저히 웃을 일이 아니었다. 산적의 목숨이야 알 바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금화 소저와 손을 잡은 이가 죽으면 곤란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몸의 긴장을 일깨우니 아까만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주변의 소리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표행으로 위장한 토벌대를 귀신같이 피해 다니는지…….”

“그뿐인가? 토끼 가죽 사이에 숨겨 놓은 값비싼 호구(狐裘)3)를 찾아냈다지 않나.”

“상단에 첩자가 있는 건 아닌가?”

악왕채의 수완에 대해 다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신생 산채치고는 일을 귀신처럼 잘하는 모양이다.

유운은 그들의 수런거림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내다가 승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혀가 아릴 정도의 독주를 물처럼 마시는 승한의 낯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엿보이지 않았다. 둘째가 사부님의 대작 상대가 되기 힘든 이유 중 하나였다. 하나도 취하질 않으니 같이 마시는 재미가 없다는 예진랑의 투덜거림에 유운은 기꺼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당신께서는 이제 누구와 술잔을 기울이실까.’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속이 쓰렸다.

“안색이 나쁘신데,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닙니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승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넓지도 않은 객잔에서 유운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이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느릿느릿 계단을 오르던 유운은 방이 늘어선 복도 저편에서 서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 앞에 선 점소이가 굽신거리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손이 멈칫했다.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

저렇게 걸걸하고 탁한 음성이야 흔하니 착각일 것이다. 유운은 무심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둑한 방에 준비된 침상에 얼굴을 파묻으며 유운은 한숨을 꾸역꾸역 삼켰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돌아가고 싶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승한은 느지막한 아침에야 유운을 깨웠다.

“왜 이렇게 늦게 움직이는 겁니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유운이 건넨 질문에 승한이 답했다.

“대사형이 피곤해 보여서요. 좀 천천히 출발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유운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승한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 전부 장난이었다는 양 픽 웃은 승한이 제대로 된 사정을 입에 담았다.

“저는 한 명이라 악왕채의 주의를 끌 미끼가 필요해서요.”

미끼가 필요하다니, 악왕채에 이름을 날리는 고수가 있나 싶어 유운의 낯이 심각해졌다.

“다 죽여버리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살아 있어야 고문도 하고 증언도 들을 텐데…….”

‘그럼 그렇지.’

유운은 약간 안도했다. 아무리 성장세가 무섭다곤 해도 녹림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한 일개 산채가 승한의 맞수가 될 리는 없었다.

“미끼라 함은…… 역시 표사입니까?”

“어제 대사형께서 먼저 올라가신 후 나중에 도착한 사람과 합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늘 바로 출발한다더군요. 먼저 악왕채가 지키고 있는 길을 지나가게 두면 꽤 편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싱글벙글 웃는 승한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악당이었다.

“저희도 슬슬 출발하면 시간이 맞을 겁니다.”

“표사나 쟁자수가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

유운이 조바심에 입술을 살짝 적시며 물었다.

“목숨은 붙어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됐다는 듯 승한은 가벼운 투였다.

보통 사제의 잔혹성은 적에게 발휘됐으나 그의 무관심은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편이었다.

이런 승한의 매정함을 겪어왔기에, 유운은 그가 파문당한 자신을 돕는다고 온갖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게 의아했다.

‘차라리 날 타인으로 대하는 편이 훨씬 쉬울 텐데…….’

정통성만 따지자면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던 유운은 스스로 사부님을 배신하고 파문당했다. 사부님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막내 사제, 예강오는 파문을 자처했다.

결국 예진랑의 휘하에 남은 건 염승한 한 명뿐이니 차기 흑천주의 자리도 따 놓은 당상이다. 그런데 왜 자신을 돕고 있느냔 말이다. 자신이 추락한 틈을 타 있는 힘껏 절벽 끝으로 밀어야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텐데, 왜 이다지도 난약하게 군단 말인가?

유운은 평생 그 자리를 꿈꿨기에 승한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꺼낸 말에 승한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대사형은 제가 그들을 구했으면 좋겠습니까?”

“아뇨.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요구하는 건 욕심이지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겐 자그마한 부상이라도 큰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유운은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끔은 남을 도와야겠다는 의무를 상기할 때가 있었다. 진정 남의 안위를 염려한 것은 아니다. 그저, 제 뿌리가 정파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않기 위한 위선적인 몸부림이다.

흑도무림의 방식에 익숙해질수록, 유운은 강박적으로 빛을 갈구했다. 언젠가 사부님에게 밀려나고 돌아갈 곳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시절의 습관이다.

승한은 유운을 번쩍 들어 말에 앉혔다.

“빠르게 달릴 테니 저를 잘 붙잡으셔야 합니다.”

이번엔 승한을 뒤에서 끌어안게 되었다. 유운은 머뭇거리는 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자칫 낙마라도 했다간 크게 다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몸보신은 확실히 챙기는 유운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승한은 그를 놀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말을 출발시켰다.

악왕채가 있는 산의 초입은 고요했다. 오로지 승한과 유운이 탄 말의 발굽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하나 승한은 무언가에 집중하더니 말했다.

“병장기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있군요. 이미 충돌한 모양입니다. 지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유운은 승한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잃은 뒤 이런 상황에 내던져지는 것은 처음인지라 절로 긴장이 됐다.

승한은 깊은 산 속으로 말을 몰았다. 관도도 아닌데 잘 관리되어 돌부리도 찾아보기 힘든 길은 척 보기에도 수상했다. 상행을 나선 이들에게 여기가 길이라고 일러주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나무가 빽빽해지기 시작할 즈음부터 피비린내 같은 것이 풍겼다. 그리 지독한 편은 아니라지만 저 안에서 전투가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정도는 됐다.

승한의 어깨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심장 소리가 쿵, 쿵 하고 유운에게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자신은 곧 다가올 전투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노라고.

유운의 시야에도 슬슬 사람들이 보였다.

표사와 쟁자수는 전부 커다란 나무 밑동에 묶여 있었다. 말 서너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다리의 상처를 보아하니 산적들이 깔아 놓은 철질려(鐵蒺藜)4)에 다친 모양이었다.

화살 비의 흔적이며 부상을 입은 표사와 쟁자수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상당한 난전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저들을 먼저 보내 악왕채의 전력을 소진하게끔 유도한 승한의 판단이 옳았다.

유운이 상황을 분석하는 찰나, 쐐애액 하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저편의 어둑한 숲속에서 이쪽을 향해 활을 겨눈 산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습이다!

승한은 정면에서 날아오던 화살을 낚아채 이를 맨손으로 돌려보냈다.

활을 쓰지 않았음에도 강력한 속도로 되돌아간 화살은 승한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던 다른 화살을 꿰뚫었다.

말 등에 탄 채로 승한이 내보인 신기에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산적들의 간담이 졸아붙는 게 보였다. 기울어진 기세를 뒤집기 위해서인지 산적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이거 원, 귀한 집 도련님 같은데 몸값을 거하게 받을 수 있겠군.”

도끼를 든 산적이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씩 웃었다. 그의 말에 다른 산적들이 와아아 하고 병장기를 흔들었다.

“우리 사부님이 날 좀 아끼긴 하지.”

승한은 그 도발에 건들건들하게 답했다. 옷만 갈아입혀 놓으면 누가 녹림도인지 모를 것 같았다.

“얘들아!”

화살을 막았다지만 승한과 유운은 고작 둘이었고 산적의 수는 십수 명에 달했다. 게다가 이 산을 손바닥만큼이나 잘 아는 악왕채의 채주는 이 싸움에서 질 거라 생각지 않았다.

“조심히 모시거라!”

승한은 히죽 웃으며 유운의 손에 고삐를 쥐여주더니 말에서 뛰어내렸다. 산적들이 쓰던 화살보다도 빠른 속도로 내달린 그는 가장 가까이 돌진한 산적의 목을 벴다.

아무도 승한이 검을 뽑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끄…… 아아악!”

동료의 죽음에 두엇은 겁을 덜컥 집어먹었으나 나머지는 분노해서 승한에게 뛰어들었다. 말고삐를 틀어쥔 유운은 초조한 낯으로 외쳤다.

“죽이면 안 됩니다!”

기분 탓일까, 승한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산적들의 공격은 정제되지 않아 거칠었다. 더러는 검이나 도가 아니라 도끼를 들고 휘둘렀으며 단도가 승한의 등을 향해 날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염승한은 이 모두를 예상했다는 양 피해버렸다.

승한의 몸은 마치 파도를 넘나드는 배 같았다.

악왕채의 궁수들은 처음엔 승한을 노리다가 유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말을 제 몸처럼 다루며 화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유운은 미꾸라지보다도 잽싼 통에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궁수 노릇을 하던 산적들은 오래지 않아 활을 내팽개치고 박도를 쥔 채 전장에 뛰어들었다. 표사의 발목을 묶어놓으려 화살을 거의 소진해버린 탓이었다.

유운을 인질로 잡기 위해 내달린 이들은 승한에게 가로막혔다.

“힘 조절을 해야 하니 한 번에 하나씩만 덤볐으면 좋겠는데.”

승한이 투덜거리며 검 등으로 산적의 머리를 후려쳤다. 얼굴에 피가 튀었으나 승한은 움찔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너희들도 살고 싶을 게 아닌가?”

그의 검이 휙 지나간 자리에 있던 산적들은 처음에는 뭐가 달라졌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로 우악스레 달려들었다. 그러나 다치기는커녕 멀쩡하게 서 있던 몇 명이 대경하여 외쳤다.

“아니, 어떻게?”

정확히 왼쪽 옷소매가 반으로 잘려 나갔다. 도끼를 쥔 악왕채주의 경우엔 사정이 달랐다.

“으아악!”

그는 본인이 휘두르던 도끼가 허공으로 날아오른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손목은 여전히 도끼의 손잡이에 매달려 있었다. 손목이 있던 자리가 텅 빈 것을 확인한 채주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승한은 검 끝을 툭 털었다. 그 끝에 매달려 있던 피 몇 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악왕채주의 피다.

“으…… 으……. 으아…….”

힘깨나 쓴다는 이들이 모여 만든 산채였음에도 그들 중 가장 강한 채주가 당하자 다들 오합지졸이라도 된 양 비틀거렸다.

“도망치면 발목을 끊겠다.”

승한이 꺼낸 말에 산적 몇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린아이라도 된 양 울음소리를 내는 이를 쓱 쳐다본 승한이 유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대사형, 이제 오셔도 됩니다.”

이 순간 승한의 등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악귀처럼 낯을 일그러뜨린 채주가 입에 비도를 문 채 승한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두 눈으로 그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음에도 목구멍 안이 시꺼멓게 졸아붙는 듯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사제가 죽으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흑천으로, 사부님의 곁으로.

무심코 떠올린 생각이 덩치를 불렸다. 사제가 눈먼 검을 피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모습을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권력욕과 아집, 그리고 그리움이 빚어낸 환상 속의 승한은 싸늘하고 초라했다. 가식적이기는 해도 태양처럼 환히 웃는 입매는 차게 굳어 있었고 언제나 짓궂은 기색을 머금고 빛나던 눈은 굳게 닫혀 있다.

손이 벌벌 떨렸다.

흑천을 떠나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한데 그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애정 때문이든 권력욕 때문이든, 사부님과 사제를 배신코자 한 결정은 영원히 그의 안에서 살아 숨 쉴 것임을.

“돌아봐! 돌아보라고!”

거칠어진 호흡 사이로 유운이 비명처럼 외쳤다. 승한은 아, 하고 웃더니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권을 내질렀다.

빠각! 하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유운에게 쇄도하던 채주의 두개골이 터져나갔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옷이 더러워졌군요. 함께 탔다가는 사형에게도 묻겠습니다. 대사형 말씀대로 출발할 때 말을 두 마리 데려올 걸 그랬나 봅니다.”

유운은 거의 뛰어내리듯 말에서 내려 승한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멀쩡히 살아 있음을 확인했는데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나…… 아……. 나는…….”

“저는 멀쩡합니다.”

승한이 두 팔을 벌려 보이며 말했다. 유운은 낯을 무참히 일그러뜨렸다가 두 손에 파묻고 목이 졸린 사람처럼 헐떡였다.

유운은 그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

막내 사제에 이어 둘째의 죽음마저 바라고 있었다.

외피야 어떻든 그 밑에 도사리고 있는 제 본질은 어째서 이다지도 추악한 걸까?

“안색이 정말 나쁘십니다. 치료도 해야 하는데, 어서 확인하고 돌아가지요.”

유운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한이 말없이 손을 내밀어 부축을 자처했으나 그는 못 본 척 사제를 지나쳤다.

서생치고는 거침없는 손길로 피에 젖은 산적들의 면면을 하나씩 확인했다. 마지막 한 명까지 봤음에도 유운이 본 자는 없었다.

“……여기에 있는 산적 중에는 없습니다.”

승한은 산적들을 쓱 훑어보고 물었다.

“이 중에 누구 발이 가장 빠르지?”

이게 구명줄이라는 걸 알아챈 건지 눈치 빠른 이들이 잽싸게 움직였다.

“제가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승한은 유운에게 선택하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 노성을 내질러 놓고는 처음 재회한 순간보다 더 딱딱해진 어투에 승한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기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산적을 관아로 압송하는 일을 맡기는 게 좋겠습니다.”

[누가 이 근방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건 없습니다.]

승한이 웃는 낯으로 보낸 전음에 유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표사를 쓰자는 겁니다.”

‘남들에겐 저 표국이 악왕채를 토벌한 것처럼 보이게 말입니다.’

유운은 승한이 입술을 읽을 수 있게끔 천천히 벙긋거렸다. 소리 없이 덧붙인 말에 승한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되물었다.

“저들이 입을 함부로 놀릴지도 모릅니다.”

“본보기로 몇 명의 혀를 뽑아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에 승한이 주인의 허락을 받은 개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포로들을 훑어봤다. 손이 묶인 산적은 한 명도 없었으나 그저 승한의 존재감만으로도 옴짝달싹도 못 하는 이들은 목덜미에 내려앉는 서늘한 시선에 벌벌 떨었다.

삽시간에 채주의 손목이 잘리고 그다음엔 머리가 깨졌다.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광경이었다.

“그럼 저는 표사를 풀어주고 이 산적의 신병을 넘길 테니 은공께서는 길잡이만 하나 뽑아 주십시오.”

승한은 유운이 지정해 준 제 할 일에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삐를 너무 세게 잡아 희게 변한 손은 뻣뻣해져 있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 상태로 손이 굳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산 깊은 곳에 숨겨진 악왕채에 가는 동안 승한에게 고삐를 넘겨 준 유운은 손을 계속 죔죔 움직이며 경직된 근육을 풀어냈다.

악왕채에 도착하자마자 승한은 방어를 위해 덤비는 산적들을 사로잡고 도망쳐 숨은 놈들까지 잡아다가 유운의 앞에 늘어놓았다. 마치 생선 말리듯 줄에 꿰여 늘어선 산적들은 얼굴만 멀쩡했다.

다리나 팔이 부러져서 끙끙대는 산적 사이를 걸어 다니며 유운은 금화 소저를 습격했던 산적을 찾아 헤맸다.

서로 호형호제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엇비슷하게 험악한 인상들이긴 했으나 아는 얼굴은 없다.

“음.”

악왕채에 붙들려 있던 민간인들을 풀어주며 유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탕입니까?”

“아는 얼굴은 없습니다.”

승한이 혀를 찼다.

“아쉽군요.”

“산채에 억류되어 있던 민간인들만 풀어주고 돌아가지요.”

유운의 말에 승한은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유운을 안내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창고 같은 장소에 허름한 차림의 사람이 여럿 갇혀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악왕채는 무너졌습니다. 모두 여길 나가서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사람들은 이 행운을 선뜻 믿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렸다. 하나 유운의 부드러운 말씨에 설득당한 노인이 허겁지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상에. 정말 산적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도 노인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기쁠 데가.”

반쯤은 얼떨떨하고 반쯤은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얼굴들이 유운의 앞을 지나갔다.

“감사합니다.”

유운은 고개를 숙이는 이들에게 고마워할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고 일일이 정정해 주기도 어려워 그저 창고의 문을 연 채로 서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한 유운은 의아함을 느꼈다.

오랜 세월 흑천에 몸을 담은 유운은 사파의 생리도 꿰고 있었다. 보통 산적이 사람을 살려서 잡아 놓는 건 몸값을 받기 위해서다. 한데 여기 있는 자들은 대체로 가난해 보였다.

“잡혀 있는 사람은 여러분이 전부입니까?”

그 질문에 여인이 울음을 터트렸다. 굵은 눈물방울이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에 유운은 의아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죄송, 죄송합니다. 그저, 함께 잡혀 온 젊은 청년이 생각나서 그만……. 아주 싹싹해서 점소이 일이 천직이었는데 여기 오고 며칠 되지 않아 끌려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흔한 불행이다. 그러나 유운은 제 머릿속에 묘한 연결고리가 생겨나는 걸 느꼈다.

아직은 그저 가설일 뿐이지만 확인해 볼 게 생겼다.

“혹 산채에 그 점소이가 살아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형이 그걸 원하신다면 한 바퀴 돌아보고 오지요.”

[하지만 생존자는 없을 겁니다.]

전음으로 덧붙여진 말에 유운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승한을 다른 곳으로 내모는 건 침모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었기 때문이다.

“질문 좀 해도 되겠습니까?”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유운의 음성에는 듣는 이를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다들 어디에서 무얼 하다가 여기에 억류당하신 겁니까?”

“저는 산 아랫마을의 객잔에서 침모 일을 하다가 잡혀 왔습니다. 산채의 살림살이를 돌봤지요.”

눈물을 닦아낸 여인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다른 남자도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물지게꾼 일을 했었습니다. 여기에 와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습니다.”

가장 처음 밖으로 나갔던 노인도 입을 열었다.

“본디 저는 숙수였습니다. 산적들의 감시를 받으며 악왕채주의 식사를 준비했지요.”

유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나로 엮어볼 만한 재료가 손바닥 위에서 퍼덕거리는 듯했다.

“다들 힘드실 테지만 질문 몇 개만 더 하겠습니다.”

예고한 대로 승한의 수색은 실패했다. 그는 산채 그 어디에서도 점소이 청년을 찾지 못했다. 유운은 그가 돌아올 즈음 제 용무를 끝내고 침모와 다른 세 사람에게 산에서 내려가서 할 일을 당부하고 있었다.

“표사분들이 사로잡은 산적을 끌고 가장 가까운 관아로 갔습니다. 여러분도 그쪽으로 가서 악왕채의 산적들이 한 짓에 대해 증언하고 그들의 현상금을 나눠 가지십시오. 지난 상처를 덮을 정도는 아니어도 앞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니, 협객께서 받으셔야 할 포상금을 어찌 저희에게 나누어주신단 말입니까?”

늙은 숙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저보다 그 돈을 더 요긴하게 쓰실 분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협객이십니다. 감사합니다.”

협객은 무슨.

유운은 쓴웃음을 삼켰다. 정말 그 돈이 필요 없어서라기보다는 저들을 관아 쪽으로 보내버리기 위함이다.

승한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신이 알아낸 것을 놓칠 리가 없다.

“여러분을 구한 건 제가 아니라 이분입니다.”

유운은 승한에게로 공을 미루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 있던 승한은 자신에게도 감사를 전하는 이들을 쓱 훑어봤으나 그게 다였다.

“지금 바로 돌아갈까요?”

저건 부끄러움이나 오만함이 아니다. 그저 본인이 저들에게 미친 영향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거다.

“예. 좀 피곤하군요.”

유운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했다. 차마 비틀거릴 수는 없었지만, 적당히 창백해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돌아가기엔 거리가 머니 오던 길에 묵었던 객잔에서 쉬었다가 내일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확히 유운이 바란 결과였다.

승한은 종종 유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움직이곤 했다. 흑천에서 지낼 때는 이를 크게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한데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내본 결과, 승한이 유별나다는 걸 깨달았다.

비위를 맞춰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유운의 생각을 쉽게 따라잡지 못했다. 비밀이 많아 소외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건 그와 결이 다른 고독이었다.

유운은 자진해서 말에 올라탔다. 함께 탄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을 절로 긴장시켰던 예전 일이 무색할 지경이다.

산채에 잡혀 있던 이들이 산마루 저편으로 넘어가는 걸 확인하지도 않은 채 승한은 말을 재촉했다. 화월루에서부터 예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말은 지친 기색도 없이 주인의 명령을 따랐다.

악왕채가 있는 산 바로 아랫마을에 도착한 유운은 승한이 일전에 묵은 객잔에 들어서자 쾌재를 불렀다.

유운이 씻고 나오자 승한은 술병을 열고 있었다.

“한잔하시지요.”

저도 모르게 곤혹스러운 낯을 했는지 승한이 넌지시 설득했다.

“그리 독하진 않습니다.”

유운은 결국 잔을 들었다. 승한은 술병을 기울여 그 안을 채웠다.

흑천에서 즐기던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그윽한 향이 났다. 얼마나 독한 술인지 확인하기 위해 입술만 살짝 적셔봤더니, 그 맛이 달았다.

“독을 타진 않았습니다.”

승한이 웃으며 말했다. 유운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런 의심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처럼 권력에 눈이 먼 쓰레기라면 모를까, 승한은 굳이 파문당한 사형제를 찾아와 독배를 건넬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게나 잔혹하고 주변에 무감한 성품이면서 승한은 제 선 안에 들어온 자를 아꼈다.

생각이 또 길어지려 하는 까닭에 유운은 잔을 비웠다. 승한은 기다렸다는 듯 잔을 다시 채워주며 물었다.

“악왕채에서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해 아쉽진 않으십니까?”

“당장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쉬웠습니다.”

승한의 말에 유운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그가 웃었다.

“대사형의 마음을 사로잡은 신부님을 만나볼 기회가 한층 멀어지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꼭꼭 숨으시는 걸 보면 수줍음이 많으신가 봅니다.”

유운은 조용히 잔을 비웠다. 그냥 자신이 금화 소저를 숨겨 준 거냐고 따지면 될 걸 빙빙 돌려 질문하는 승한의 말투가 불편했다.

“……저는 금화 소저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만약 악왕채에 단서가 있었다면 감추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레 찔려서 변명을 입에 담은 꼴이 되었음에도 유운은 덤덤한 투로 말을 이었다.

“기억을 잃은 타인보다는 혼례까지 올리려 한 여인을 지키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하셨겠지요.”

잔을 내려다보니 술에 제 얼굴이 어른어른 비친다. 하나 눈만은, 다만 눈만은 술 표면에 번지는 파문에 잡아먹혀 있었다.

그 자신조차 모르는 속마음을 비추는 듯하여 입술이 말랐다.

“예.”

승한은 시원스럽게 답했다.

“이 사제가 용렬하여 대사형의 신부를 질투하고 있습니다.”

유운은 흠칫 몸을 굳혔다. 승한은 혼자 본인의 잔을 넘칠 듯 채우더니 이를 단숨에 비워냈다.

살짝 젖은 입술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머무는 것은 어째서일까.

꿀꺽.

유운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저는 대사형을 십수 해도 넘는 시간 동안 알았는데 완전히 잊히지 않았습니까? 한데 그 여인은 만난 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사형한테 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게…….”

승한이 천천히 손목을 흔들었다. 유운은 술잔에서 넘칠 듯 말 듯 찰랑이는 액체가 승한의 손이나 옷을 적실까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이를 지켜봤다.

“마뜩잖군요.”

이런 거였나, 하고 뇌까린 승한이 잔을 비웠다.

사제는 여전히 술을 마시기 전과 후의 얼굴이 같았다. 정작 승한은 제 입으로 뱉어낸 말에 한 점 무게라도 없는 양 태연자약한 낯을 하고 앉아 있는데, 유운은 그가 한 말을 듣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이 무거운 분위기를 털어내려면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 할 텐데 입술과 입술이 서로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는다.

승한을 기억하고 있노라 인정할 수 없어 그 여인이 제 곁붙이인 양 말한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유운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불쑥 물었다.

“저는 은공께서 그리워할 만한 사람이었습니까?”

승한이 그리움을 입에 담는다고 하여 믿지도 않을 거면서 물어보고 말았다.

“저는 그리움이 무언지 잘 모릅니다.”

유운보다는 마치 그 자신 쪽에 문제가 있다는 투였다. 이건 또 의외의 반응이라 유운이 눈을 가늘게 뜨는데 승한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단지, 빈자리를 셈할 수 있을 뿐이지요.”

어쩐지 승한다운 표현이다.

유운은 그에게서 그리워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알량한 자기만족으로 달아나기엔 모든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지 않았나.

그는 잔을 또 비웠다. 이 정도로는 취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거듭 술을 마시는 건 사실상 자학이었다.

승한은 유운이 잔을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술병을 기울여 주었다. 어찌나 날렵하게 시중을 드는지, 까탈스러운 유운이 거느리고 있던 일원당의 시비보다 나았다.

“술을 잘 못 하시나 봅니다.”

본인 잔에는 거의 입도 대지 않으면서 자신의 잔만 채워주는 승한에 대한 타박이었다.

“사부님이 저를 꽤 곱게 키우셔서.”

말꼬리를 흐린 승한이 웃었다. 어지간해서는 취하지도 않는 사제가 하는 말이 우스워 유운은 또 잔을 비웠다.

술에 잘 취하지도 않는 사제는 밤이 깊어지자 고른 숨을 내뱉었다. 잠은 꼬박꼬박 챙겨 자던 녀석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운은 승한을 침상으로 밀어 넣었다. 야금을 덮어줄까 잠시 고민했으나 승한이 이를 깔고 누운 걸 보고 포기했다. 괜히 들쑤셔서 깨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이제 제 의문을 해결하러 갈 시간이다.

유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곯아떨어졌다고 생각한 승한이 그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흠칫 놀라 내려보니 술기운에 눈가가 붉어진 승한이 물었다.

“어딜…… 어딜 가시렵니까?”

“잠시 바람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승한은 유운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손의 힘을 풀었다.

“오래 걸리면 찾으러 갈 겁니다.”

지난번엔 너무 길지 않았냐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잦아든 후에야 유운은 숨을 몰아쉬었다. 사제가 술에 잘 취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잠기운은 이기지 못한 기색이다.

긴장에 부풀어 오른 가슴을 찬찬히 쓸어내리며 유운은 방 밖으로 나섰다.

승한에게 말했다면 이 모든 게 훨씬 수월해질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의 유운으로서는 꿰뚫어 보기 힘든 어둠도 승한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테고, 무력을 사용할 일이 있다면 이 촌구석에 흑천주의 애제자를 당해낼 자가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유운은 혼자 걷고 있었다.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죄인의 자책감, 빚쟁이의 조바심, 그리고 바닥난 자존심까지 한데 뒤엉켜 있었다.

흑천을 영영 떠날 수밖에 없던 배신을 저질렀는데 승한이라는 동아줄에만 매달리는 스스로가 부끄럽다. 지금의 빈손으로는 갚을 길 없는 도움을 받는 것은 초조했고 사제에게 참과 거짓이 뒤섞인 말로 희롱당하는 건 끔찍했다.

무엇보다도 유운은 자신 때문에 이 사건에 뛰어든 승한이 또 위험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다치거나 죽는 게 걱정되는 건 아니다. 악왕채와의 첫 조우에서처럼 불현듯 저를 찾아들 상상이 싫었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긍지를 잃은 인간이 얼마나 천박해질 수 있는지 새삼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유운은 이 객잔에 고작 두 번째 방문한 손님치고는 거침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악왕채에 잡혀 있던 침모에게서 위치를 캐물은 보람이 있었다.

늙은 여인이 묘사한 대로 객잔의 이 층 복도 끝에는 계단이 있었고, 그 뒤에 살짝 가려진 작은 쪽문이 하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내부는 제법 넓고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계단이 한차례 시야를 가리는 데다가 문까지 비좁으니 외부인은 여기에 이만한 방이 있다는 걸 짐작하기 어려운 구조다.

방을 쓱 훑어본 유운은 장식으로 놓아둔 것 같은 휘황찬란한 도자기를 들고 벽에 몸을 붙였다.

이젠 방 주인을 기다릴 차례였다.

오래지 않아 한 사내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긴장으로 난 땀 때문에 들고 있던 도자기가 미끄러질 뻔했으나 유운은 당황하지 않고 상대의 머리를 내리쳤다.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바닥에 닿아 쿵 소리가 나기 전에 유운은 발등으로 그의 몸을 떠받쳤다.

머리를 칠 때는 적당히 힘 조절을 했지만 만약 바닥에 잘못 부딪혀서 숨이 넘어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내공이 없으니 이 짓도 참 번거로워.”

덩치 좋은 남자의 비단옷을 찢어 그를 침상 기둥에 묶는 데 사용한 유운은 자신의 작품을 내려다봤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객잔 주인이라기보다는 산적 같은 험악한 얼굴을 비췄다.

‘역시.’

사실 유운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그가 누군지 확신하고 있었다.

발단은 아주 사소한 의문에서부터였다.

산적이 손끝이 야무진 사람을 잡아다가 산채 살림을 시키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다. 그녀가 하필 한 객잔의 침모라는 것도 크게 마음에 걸릴 건 없었다.

한데 그녀 외에 사로잡힌 이들이 전부 산채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몸값을 요구할 정도로 부유한 사람은 없었다. 본인이 왜 잡혀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이들의 면면을 보며, 유운은 자신이 느낀 의혹을 하나씩 되짚어 나갔다.

악왕채의 성장세는 머잖아 녹림에 적을 둘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가팔랐다.

객잔에서 표사들이 떠드는 말에 따르면 표행으로 위장한 토벌대를 보냈으나 악왕채는 이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피했다고 했다. 심지어 교묘하게 은닉한 귀한 표물이 어디 있는지 바로 찾아내 탈취했다.

어딘가에 정보원이 있다는 뜻이다.

유운은 산채에 억류당해 있던 이들의 직업을 천천히 꿰맞췄다.

악왕채까지 오는 길 내내 숙수를 따로 둘 정도로 큰 부잣집을 보지 못했다. 따로 확인할 것도 없이 객잔에서 일하던 이가 분명했다.

평범한 민가에서는 물지게꾼을 굳이 고용하지 않는다. 돈이 지나치게 많이 들기 때문이다. 보통 물이 많이 필요한 객잔 같은 곳에서 그들의 손을 빌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 싹싹한 점소이…….

새로 생겼다는 객잔의 점소이가 왜 그리 열심히 호객을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산적을 뒷배로 둔 객잔의 주인에게 협박당하고 있었겠지.’

어쩌면 협력자일 수도 있겠지만, 옷소매 아래로 비치던 푸른 멍을 떠올리면 점소이도 피해자일 가능성이 컸다.

사실 유운은 그 마을에 들어선 순간부터 객잔이 두 곳이나 된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표행이 잦긴 해도 여긴 다소 외진 편이다. 교역로의 중심지도 아닌데 객잔이 두 개나 자리 잡는 건 나란히 망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러니 실은 한쪽이 다른 이득을 취하고 있는 거다.

유운은 방에 자리끼로 놓여 있던 물을 기절한 이의 머리에 끼얹었다.

줄줄이 흘러내리는 물이 콧구멍으로 역류해 들어갔는지 사내는 성대한 기침을 토해내며 일어났다.

“누, 누구!”

고함을 지르려 했으나 상대는 능숙하게 객주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닿았다. 비명은커녕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살이 베일 거라는 확신이 들어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반갑네. 우리가 만난 게 이번이 두 번째지?”

유운은 도편을 그의 목에 슬쩍 누르며 웃었다.

“그때도 내게 두들겨 맞아 놓고 그새 기억을 잃기라도 했나?”

객잔의 주인은 어깨를 덜덜 떨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멀끔한 낯을 해 놓고 이렇게 미친놈처럼 느껴질 수가 없었다.

“어, 어, 어, 어떻게……!”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질문을 하는 건 그쪽이 아니라 나야.”

어떻게 상대를 찾아냈는지 설명해 줄 정도로 상냥한 성격이 아닐뿐더러 여유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니었다.

“내가 술을 몇 잔 마셔서 그런지 손이 좀 떨리는데, 이러다 실수로 그어버릴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몸은 그만 떨지? 그저 가벼운 질문 몇 가지만 성실하게 답해 주면 되는데 말이야.”

유운은 흠,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무, 무, 무,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연했다면 또 모를까, 그야말로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변명하는 꼴이 우스웠다.

“모른다니, 말을 참 재미있게 하는군.”

유운의 손가락이 사내의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모르는 사람에게 객잔을 차릴 정도의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값의 위험이 뒤를 쫓을 거라는 사실도 알았어야지.”

방의 주인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저는 그냥 평범한 객잔 주인입니다.”

“아니지. 원래는 산적이었잖아.”

유운은 빠르게 반박했다.

“가엾은 소저를 겁박하다가 일개 서생에게 두들겨 맞고 도망친 모자란 놈.”

남자의 어깨가 수치심인지 분노인지 모를 이유로 벌벌 떨렸다. 유운은 그의 목에 사금파리를 바짝 가져다 댔다.

“하루 한탕 뛰기도 힘들어서 폭삭 망하기 직전이던 악왕채의 산적이 하루아침에 손을 씻고 객잔을 차릴 돈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게다가 산적질 같은 걸 같이 한 이상 그 바닥을 나가려면 손이든 발목이든…… 심하면 목숨이라도 바쳐야 했을 텐데 자네는 지나치게 멀쩡해.”

유운은 혼자 해낸 추리를 주워섬기듯 말을 반복했다.

“자네는 지나치게 멀쩡하고 악왕채는 승승장구하고 있지. 그 산채는 공교롭게도 이 객잔을 지나간 표행을 노략질하며 덩치를 키우고 있어. 이래도 자네가 결백하다고 할 생각인가?”

남자는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꺽꺽대며 숨을 몰아쉬는 소리에 유운은 짜증스러워졌다. 대장부답게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해 준다면 취조가 빨리 끝날 텐데, 괜히 버텨서 부족한 시간만 소모하고 있다.

“이제 본인의 처지를 좀 알겠나?”

유운이 느슨한 미소를 걸친 채 건네는 질문에는 형언하기 힘든 무게가 서려 있었다.

“포쾌 앞에 나서기 전에 가벼운 예행연습을 해 보자고.”

사제보다 앞서서 금화 소저의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제대로 된 무력도 세력도 없는 유운에게 있어서 정보만큼 유용한 패가 드물었다.

유운은 아직 승한이 자신을 돕는 이유를 몰랐다. 어쩌면 온전한 호의일지도 모른다. 단지, 승한에게 기대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된다.

“어차피 포쾌에게 넘길 거라면 제가 왜, 왜 협조해야 합니까?”

사내가 용기를 끌어모아 내뱉은 질문에 유운은 느릿한 어조로 답했다.

“그거야……. 자네를 죽여서 넘기든 살려서 넘기든 포상금에는 큰 차이가 없거든.”

체념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는 산적을 천천히 지켜보며 유운은 처음의 질문을 던졌다.

“이제 서로의 입장이 정리된 거 같으니 시작해 볼까?”

권유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결국 협박이다. 애초에 그 수상한 의뢰를 받아선 안 됐다. 고작 여인 한 명 겁박하다가 물러나면 되는 게 전부라고 하여 혹한 게 잘못이었다.

“저는…… 짐작하신 것처럼 악왕채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산적이었습니다.”

시작할 때만 해도 떨리던 음성은 점차 차분해졌다.

“이쪽엔 큰 산채가 없고 잡졸들도 얼마 전에 전부 사라진지라 버려진 산채를 찾아 자리 잡는 건 쉬웠습니다. 단지……. 장사가 좀 안됐지요.”

유운이 골라잡을 정도로 외진 지역에서 산채를 시작했으니 그들에게 돈을 뜯길 손님이 적은 거야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입에 풀칠도 못 할 지경이라 근처 마을 객잔에 내려가서 자주 푸념하곤 했습니다. 동료인 황가(哥)와 함께였지요. 한데 어느 날 죽립을 눌러쓴 사내가 저희에게 의뢰했습니다.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한 여인을 겁박하다가 도망치면 큰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신세를 고칠 정도로 큰돈을요.”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떠올리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큰 금액이었던 눈치다.

“네게 의뢰한 치에 대해 기억나는 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잘…….”

유운은 한숨을 내쉬며 파편의 날카로운 쪽으로 그의 목덜미를 꾹 눌렀다. 아주 느릿하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산적 일이 자랑거리는 아닌지라 소곤소곤 말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 앉아 있다가 찾아왔지요. 그 귀신같은 청력을 생각하면 무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잔을 쥔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손등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허리엔 검도 차고 있었습니다. 술이 아니라 차만 마셨지요. 안주엔 입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또…….”

남자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 유운에게 자신이 만난 의뢰인을 설명했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 모양이다.

“요, 요녕. 요녕 쪽 말씨였습니다.”

예전에 돌아가신 장모님이 그쪽 지방 출신이라 안다며 남자가 주절주절 덧붙였다.

‘요녕이라.’

유운은 그 말에 동요했다. 본디 유운은 요녕의 모용세가 출신이었다. 하필 그쪽에서 온 사람이 자신을 노리고 함정을 팠다는 게 석연치 않았다.

다행히도 유운의 얼굴이 어둠에 반쯤 감춰진 덕에 산적은 그가 놀랐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의뢰를 완수하니 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입이 근질거리긴 했지만, 만약 주변에 떠들고 다니다간 큰일이 날 거 같아 숨겼습니다. 그만한 돈을 턱 내놓았으니 목숨 뺏기는 더 쉽겠구나 싶어서…….”

남자가 고개를 툭 떨궜다.

“악왕채를 나설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 돈만 있으면 어디 먼 곳으로 가 객잔을 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씀씀이가 커진 바람에 남몰래 의뢰받은 게 들통난 동료가 채주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저도 죽을 뻔했지만, 산채를 위해 좋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며 채주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고……. 산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객잔을 차렸습니다.”

그 후로 마을을 지나치는 표사들을 팔아 치웠다고 알 만한 이야기가 지나갔다.

“황제 폐하가 새로 등극하시고 관도를 정비하게 되면서 표행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었고, 저희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표행을 쓸어 담았습니다. 객잔에 묵은 이들 중 지나친 강자가 보이면 적당히 피하라고 귀띔하거나 표물을 조심조심 다룰 때면 그것도 보고했지요.”

결국 악왕채 채주의 욕심이 멀리 달아날 뻔했던 놈을 이토록 가까운 곳에 주저앉힌 셈이다.

‘운이 좋았다.’

희박하기 그지없는 단서의 끝자락을 붙잡고 나니 힘이 빠진다. 유운은 들고 있던 사금파리를 바닥에 던졌다.

그 소리에 객잔 주인으로 탈바꿈한 산적이 움찔 몸을 떨었다.

“숙수는 건너편 객잔에서 일하던 이였으니 이해가 가. 경쟁하는 객잔을 밟아 놓고 싶었겠지. 하지만 침모와 물지게꾼은 왜 잡아넣은 거지?”

유운의 질문에 남자가 벌벌 떨며 답했다.

“그, 그들은 제가 채주님과 대화하는 걸 봤습니다.”

의문이 해소된 유운은 혀를 찼다. 정작 당사자들은 기억도 못 하는 눈치던데, 이들이 지레 찔려서 가둬놓은 것일 줄이야.

“피가 꽤 많이 났군.”

유운은 혀를 찼다.

“생각해 보니 내 원래 이런 일엔 직접 나선 적이 없어서 강약 조절이 서툴러. 자네는 운이 참 나빠. 내 수하를 상대했다면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생각해 주는 척 상냥하게 말을 꺼낸 이유는 제 덩치를 부풀리기 위함이었다. 이 객잔 주인 노릇을 하는 산적은 유운이 내공 한 줄기조차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까닭에 일전에 만나 흠씬 두들겨 맞은 기억과 저 요녕에서 온 의뢰인에 대한 공포가 자신에게도 덧입혀지기를 노리고 수하 운운한 거였다.

그만큼 무서운 자들이 공들여 함정을 팔 정도로 쉽게 볼 수 없는 존재로 비치길 원했다. 특히 인간은 상대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면 공포가 상상력을 집어먹고 덩치를 키운다.

“곧 관아에서 찾아올 것이다. 네 살길을 도모하는 것까지야 막진 않겠지만, 내게 했던 말을 다른 그 누구에게도 옮겨선 안 된다.”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것만 좀 풀어 주십시오. 그럼 바로 관아로 가겠습니다.”

“무엇 하러?”

자리에서 일어난 유운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악왕채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어서 관아의 보호를 받아야…….”

“채주라.”

방을 빠져나가기 전, 문가에 선 유운은 픽 웃었다.

“그는 죽었어.”

***

돌아온 방에는 묵직한 어둠이 쌓여 있었다. 침상에는 승한을 눕혀 놓았으니 창가의 의자에 기대앉은 채 밤을 새울 요량이었다.

“나들이는 즐거우셨습니까?”

어느새 침상에 일어나 앉은 사내가 물었다. 밤의 한복판에 파묻힌 승한은 기척도 숨소리도 너무도 옅기만 했다.

“그다지 인상 깊은 일은 없었습니다.”

낮에는 그토록 강렬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사내가 밤에는 어둠의 일부가 되어 녹아들기라도 한 양 고요하기만 하다. 승한의 기척이 희미해지면 편히 쉴 수 있을 법도 한데 오히려 긴장하게 된다.

동류를 경계하는 맹수가 으레 그러하듯이.

“저런. 이 사제를 따돌리고 가시기에 각별한 경치를 보고 오실 줄 알았는데.”

“……오악(五岳)도 아니고 이 좁아터진 마을에 무슨 볼 것이 있겠습니까.”

어둠이 승한의 얼굴을 한 꺼풀 가리고 있긴 했으나, 어렴풋이 그가 웃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바람 쐬러 다녀온다는 사형의 옷자락에 왜 피 냄새가 묻어 있을까…….”

승한이 유운의 옷소매를 끌어당긴 채 중얼거렸다. 그 냄새를 맡는 듯 고개를 기울이기에 뿌리치려 했으나 훅 끌어당겨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사제의 품 안이었다. 유운은 차마 버둥거리지도 못한 채 숨을 멈췄다.

“다친 건 아니군요.”

오로지 그걸 확인하려 붙잡기라도 한 양 선량한 투였다.

“별일 없었습니다.”

유운은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다고 하여 승한이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거 같진 않았으나 이 어색한 포옹에서 벗어나야 했다.

숨소리가 바투 다가왔다. 손목을 낚아챌 때만 해도 날렵하던 사내는 무거운 파도가 되어 유운을 짓눌렀다.

“믿어 드릴까요?”

낮은 음성이 귀를 간지럽히는 오싹한 감각에 유운은 몸서리쳤다.

“예전처럼 저를 마음껏 부려 보세요.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말라, 명령하고 휘둘러 봐요. 원래 대사형은 그런 거 잘하잖아.”

유운은 모멸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승한이 알고 그가 알듯, 예전과 지금은 다르다. 본디 승한이 유운의 허락을 구했다면, 지금의 유운은 승한이 허락해 달라 청하는 말에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타인으로 갈라선 순간부터 승한은 유운의 고삐를 쥐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중이었다.

사제는 왜 과거의 관계를 되찾으려 하는 걸까?

“벽 너머에서 어떤 남자가 짐승 멱 따는 소리로 꺽꺽대는데, 이것도 대사형과는 관계없는 일이겠지요?”

그리고 그는 아주 천천히, 유운에게서 물러났다. 열린 창으로 휘영청 밝은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으나 정작 이를 등진 승한의 모습은 온통 어둡기만 했다.

“그 여자를 제게서 숨기고 싶으신 거라면 정말 최선을 다하셔야 할 겁니다.”

승한에게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거든요.”

* * *

3) 여우 겨드랑이 밑의 하얀 털만 모아 만든 모피

4) 말이나 사람의 이동을 방해하기 위해 바닥에 깔아 놓는 덫의 일종. 뾰족한 형태의 금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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