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다정한 기만
“잡으십시오.”
승한이 손을 내밀었다. 유운은 그로부터 단 한 점의 체온도 훔쳐 오지 않기 위해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돌아오는 길, 승한은 유독 말이 없었다.
유운은 새삼 그가 늘어놓던 거짓부렁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승한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걸 들으며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 생각할 때는 머리가 이렇게 복잡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금화 소저의 배후가 하필 요녕 출신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유운은 요녕의 모용세가 출신으로, 혈교에 의해 일가족이 참살당했다. 멸문한 세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운을 구해낸 것이 당시 전장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예진랑이다.
진랑은 유운을 제자로 들여 책임졌으나 정작 그의 후계 자리를 주지 않았다. 유운은 스승이 마지막으로 들인 막내 제자 강오를 편애한 까닭에 자신이 밀려난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작 진랑은 언젠가 유운이 가문으로 돌아가 모용세가를 부흥시키고자 마음먹을 경우를 대비해 소천주 임명을 미뤘다는 사실을 배신자가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를 폭로한 승한은 모를 테지만 유운에게 그보다 더 걸맞은 벌은 없었다.
사제가 알려준 사실 중에는 방계에서 태어나 참변을 피한 인물이 현재 모용세가를 재건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쪽에서 보낸 걸까?’
직계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모용세가의 재산은 그 방계의 인물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필 집어 든 수단이 혼례라는 게 기괴했으나 사부님의 눈을 피하려고 택한 방식이라면 이해가 갔다. 부인의 고향으로 떠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유운의 신병을 확보하면 진랑도 크게 경계하지 않으리라.
그 후에 실종되거나 살해당한다면 제아무리 흑도무림의 수좌인 흑천주라 하더라도 꼬리를 잡아내기 어려울 테니까.
두 번째 고민은 바로 승한이었다.
승한은 자신이 없을수록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이변이 없다면 차기 흑천주는 승한이 될 터였다. 진랑의 세 제자 중 둘이 떠나고 그만 남았으니 말이다.
비단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도, 승한은 자신을 경멸하거나 증오할 거다.
배신자에게 품을 감정은 결국 그 정도 아니겠는가.
‘왜 자꾸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식으로 말하는 거지.’
자신이 먹을 뿌려 혼탁해진 관계다. 아름답고 좋은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왜 돌이키고 싶은 양 말하고 그리 행동하며 또 강요하는 걸까?
기억을 잃은 자신을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거짓부렁이나 늘어놓으며 소꿉놀이라도 해 보려는 걸까.
유운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니야. 사제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애써 뇌까려도 가슴속에서는 거친 풍랑이 인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은 깨달았으나 본디 유운이 느끼던 감정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열등감과 분노, 그리고 슬픔 따위가 그의 속을 마구 헤집고 뒤틀었다. 그게 스스로를 얼마나 추하게 만드는지 깨달았음에도 쉬이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건 관성이고 습관이었다.
유운은 평생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후회했다. 믿음보다도 먼저 의심이 치미는 것은 결국 그가 나약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제 발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전전긍긍하다가 사부님을 배신하고 파문당하는 결말은 맞지 않았을 거다.
“몸이 뜨겁군요.”
말에 오른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연 승한이 혀를 찼다.
유운은 그의 음성이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몸에 닿아 울리는 듯했다.
“어서 화월루로 가야겠습니다.”
승한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다급했다. 이랴! 하는 외침과 함께 유운은 몸이 거칠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말에서 떨어질까 걱정할 겨를조차 없이 승한의 한쪽 팔이 그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윽!”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혀를 깨문 유운이 고통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이를 무어라 오인했는지 몰라도 승한은 말을 더 채근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통에 제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여의찮았다. 유운은 그저 자신의 허리를 옥죄는 팔을 힘주어 붙든 채 어서 화월루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아니, 공자님, 벌써 오셨어요?”
저번엔 웃으며 응대했던 문지기의 알은체를 지나친 승한은 거의 날듯이 계단을 올라 방에 도착했다.
침상에 내던져진 유운은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승한은 툭 툭, 투둑 하고 유운의 옷자락을 끊어냈다. 거의 잡아 뜯는 손길에 황망하여 밀어내지도 못한 채 두 눈을 끔벅인 유운은 제 몸에 울긋불긋 올라온 반점을 발견했다. 하얀 살을 집어삼킬 듯 커진 붉은색은 한두 개도 아니었다.
몸에 열이 있다고 뇌까리고 나서 미친 듯이 말을 몰던 승한이 왜 저러나 했는데 이젠 알 거 같았다. 아마 의원이 따로 말을 전해 놓은 모양이었다.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승한이 순식간에 달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의원을 어깨에 걸친 채로 나타났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짐 포대를 들고 나르는 것 같았다.
저 깐깐한 의원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하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야소는 유운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날카롭게 뜨더니 승한의 등을 퍽퍽 때려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이고 내 팔자야. 왜 맨날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저승 문턱에 오르내리는 인간들만 환자로 오는지.”
유운은 그녀의 비난이 무엇에서 기인하였는지 알 길이 없어 두 눈만 깜빡였다.
“내가 머리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너무 복잡한 생각은 되도록 줄이고.”
말로는 마구 쏘아붙이면서도 유운의 몸에 빠르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그런 말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분명 공자님에게 전달했는데? 이거 환자가 모르는 걸 보니 공자님 잘못이구만.”
그녀는 어린아이 팔뚝만큼이나 긴 장침 쪽으로 흘깃 시선을 주었다. 그 희번덕이는 눈빛이 기회만 있으면 이걸 승한에게 콱 찔러넣고 싶다고 말하는 듯했다.
유운은 몸이 빠르게 으슬으슬해지는 걸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거 빙정은 아직입니까?”
“저기 광동 사는 부자가 사들인 걸 중간에서 낚아챘으니 곧 올 겁니다.”
귀주를 거쳐 돌아오는 중이라고 그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사제의 수완은 유운이 어렴풋이 짐작한 것보다 좋은 편이었다. 저 빙정의 행방이야 왕교월이 알려 주었을지라도 이를 어떻게 확보할지는 전적으로 승한의 몫이었다.
“급한 불은 껐습니다만 얼음이라도 몸에 대고 보내셔야 할 겁니다.”
의원의 말에 유운은 놀랐다.
“추, 춥습니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냉기가 뼈마디를 엄습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이 사천제일루가 아니라 저 북해의 설원인 것만 같았다.
“열기를 몰아낸다고 침을 꽂아서 그렇습니다. 전적으로 착각이니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더운 데로 가시면 안 됩니다. 환자분의 몸속에는 저 태양만큼이나 이글이글한 불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이건 그저 표면으로 흘러나온 열을 덜어낸 것뿐입니다.”
의원의 음성은 차가웠으나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차가운 물 속에서 여섯 시진 정도 계셔야 합니다. 다만 발끝이나 손가락 끝 같은 말단까지는 갇혀 있는 열이 미치지 않을 테니 꾸준히 주물러줘야 할 겁니다.”
유운은 무거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도 괜찮은가?”
승한의 질문에 의원이 답했다.
“체온을 아주 차갑게 유지하면 됩니다. 저 안에 갇혀 있는 열이 몸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 비집고 나올 때까지. 그렇게 해야 무너진 균형이 조금이라도 맞을 겁니다.”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설 때 함께 나간 승한은 금방 돌아왔다. 낌새가 경공이라도 쓴 것 같았다.
그가 가져온 나무통에 귀하디귀한 얼음이 한가득하였다. 이를 침상에 아무렇게나 쏟아붓는 승한의 행태에 유운은 경악했다.
“침상이 상할 겁니다!”
“탕옥으로 모셔갔어야 했는데,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곤혹스럽다는 듯 일그러진 미간을 보자니 천하의 염승한이 정말 당황이라는 걸 한 모양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몸을 편히 두시지요. 침상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나무로 된 가구가 물에 젖으면 말리기도 힘들거니와 자칫 결대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씀씀이가 예전과는 퍽 달라진 유운은 괜한 걱정을 했음을 깨닫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도 목 위까지 열이 올라가지 않아 다행입니다. 머리에 열이 미치면 정말 큰일이 날 거라 하였는데…….”
화월루에 오는 길에서부터 이미 격하게 반응한 걸 보아하니 미리 알고 있던 눈치다.
“왜 제게는 그런 사실을 말해 주지 않은 겁니까?”
추궁 조로 튀어나온 질문에 승한은 덤덤히 답했다.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너무 많은 일이라……. 유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루아침에 신부를 잃었고, 중독당했는데 웬 놈팡이가 나타나 사제를 자처하는 상황이시지 않습니까. 의원도 심화가 없을수록 좋다고 하여 숨겼지요. 한데 대사형이 혼자 끙끙 앓으시다가 몸 상태가 이리 악화될 줄이야…….”
승한의 낯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평소 내비치지 않는 동요가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적어도 제 안위가 그에겐 중요한 모양이었다.
“공자님 얼음을 가져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승한이 가져온 것과 비슷한 나무 들통을 든 심부름꾼 여럿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여자아이가 침상을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아니, 향나무를 깎아 만든 침상인데! 공자님!”
“탕옥에 부어놔라. 곧 가겠다.”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의 등을 웃는 낯으로 밀어내며 승한이 명했다. 분명히 온화한 표정임에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단단해 보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심부름꾼들은 빠르게 나가 버렸다.
“열은 덜해지긴 했는데…… 얼음이 너무 빨리 녹는군요.”
승한의 말에 유운도 동의했다. 침상에 쏟아부은 얼음이 녹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덕분에 가구는 물론이고 옷도 젖어 질척거렸다.
“탕옥의 준비가 된 것 같으니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몸을 숙인 승한은 유운의 허락조차 청하지 않고 그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덩치가 거의 비슷해도 무림인인 승한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유운은 살면서 이렇게 누군가에게 들린 채 이동한 경험이 거의 없어서 이 상황이 어색했다.
게다가 사제와 재회한 후로 유독 이렇게 안겨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승한의 도움을 받아 이동한 탕옥에 얼음이 흘러넘칠 듯 가득했다. 유운은 입술을 깨물고 그 안에 발부터 들이밀었다.
델 듯이 차갑다.
그러나 지금은 추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유운은 이를 악물고 허벅지까지 다리를 밀어 넣었다.
차근차근 몸을 전부 집어넣을 순 있었지만, 몸이 불편했다. 각이 진 건 아니어도 단단한 얼음 때문에 자갈밭 위를 뒹구는 기분이다.
채 일 다경도 채우지 못했는데 벌써 나가고 싶었다.
치료 때문이라 참으려 했으나 유운은 몸을 덜덜 떨었다. 의원 야소는 그의 몸 안에 열이 가득하다고 말했는데 영 거짓말 같았다.
“추, 춥습니다…….”
정성껏 유운의 손끝을 주무르던 승한이 혀를 찼다.
“아직 나오시면 안 됩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인 모양이었다. 유운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몸이 느끼는 추위를 생각만으로 막는 건 어려웠다. 게다가 내공이 봉인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서불침의 경지를 밟았던 유운에겐 이렇게 살을 엘 듯한 추위가 낯설어서 더 버티기 힘들었다.
유운의 입술이 희다 못해 푸르게 질린 것을 알아챈 승한이 혀를 찼다.
유일하게 온기가 전달되던 승한이 손을 놓자 유운은 무심코 그를 바라봤다. 사제의 몸에서 옷이 스륵 흘러내렸다. 어깨와 그 아래로 움푹하게 들어간 빗장뼈가 드러나고 그 밑으로 가슴이 모습을 보였다.
유운은 멍하게 승한이 팔에 휘감긴 옷가지를 벗어내는 것을 지켜봤다. 그의 팔목에 두드러진 핏줄이며 근육이 다소 야성적이었다.
“춥다고 하시니.”
얼음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구릿빛 나신에 유운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사제가 한 몸 바쳐 뜨겁게 해 드리겠습니다.”
유운은 저도 모르게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러나 두 손으로 쥐어도 남는 허벅지는 어찌나 단단한지 꿈쩍도 하질 않았다.
밀쳐내건 말건 뒤에서부터 몸을 안아오는 승한이 마치 태산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허우적거리다가 얼음 속에 풍덩 빠질 뻔한 유운의 허리를 감싸며 지탱한 승한이 엄포를 놨다.
“가만히 계세요. 열기는 단전에 고여 있지만, 손끝이나 발끝에 전달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자칫 동상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치료를 위해서인지 승한의 말투는 엄격했다. 의원이 사지의 말단은 직접 주물러야 한다는 말을 함께 들었던 유운으로서는 수치심을 접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승한에겐 정말 사심 따윈 없었다. 어차피 치료라면 정말 치료로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유운은 스스로에게 그리 뇌까리며 입을 열었다.
“발이 시립니다.”
유운의 요구에 승한은 팔을 뻗어 그의 발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발등을 따라 복사뼈에 이르기까지 느릿하면서도 힘 있는 손길이 온기를 전했다.
“좀 괜찮으십니까?”
승한은 열심이었다. 유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온기 때문에 얼어붙은 유운과 달리, 사제는 본래의 여유를 되찾았다.
“여기가 뾰족하게 섰습니다.”
유두 끝을 굴리며 신기하다는 듯 내뱉은 말에 유운의 눈초리가 삽시간에 세모꼴이 되었다.
“저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밀어낼 듯 손을 가져다 댄 승한의 가슴팍에도 젖꼭지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탄탄한 가슴은 양손에 넘칠 듯 컸다. 그 정점이 손바닥에 닿아 문질러지는 감각이 야릇하여 유운은 멈칫했다.
“왜요? 더 만지셔도 됩니다.”
승한이 유운의 손목을 붙들고 말했다. 나신으로 몸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 관계에서 상대를 의식하는 건 결국 유운 그 혼자뿐이었다. 일방적으로 발정이 나서일지도 모르겠다. 승한은 상대가 아니면 해소되지 못할 열기를 몸에 두른 채 끙끙 앓는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전혀 모르지 않나.
심술이 솟은 유운은 그의 가슴을 쥐어짜듯이 비틀었다.
“아야, 아픕니다.”
“만져 보라시기에…….”
유운은 몰랐던 양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으나 슬그머니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어찌할 수 없었다. 승한도 그 기색을 알아채긴 했으나 굳이 타박하지 않고 피식 웃고만 말았다.
“머리가 많이 기셨습니다.”
“자를까요?”
그 질문에 승한이 잠시 침묵했다.
“항상 딱 이 정도로 관리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그냥 시간이 제법 흘렀구나…… 하여.”
유운은 저를 끌어안은 승한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산골 마을에서 지내던 건 어땠습니까?”
“평화로웠지요.”
단조롭고 무미건조하지만 유운에겐 그만한 곳이 없었다. 가끔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답답할 때가 있긴 했다.
아무에게도 터놓고 말할 수 없는 감정과 기억이 그를 내몰았다. 제 손으로 꼬아 놓은 매듭은 너무 엉망이라서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막막하기만 한 마음에 두 손을 놓고 외면하면 그래도 숨을 쉴 수는 있었다. 종종 사부님이 떠오르고 사제를 생각했으나 언젠가는 잊을 수 있으리라 스스로를 속이면 말이다.
“아이들이 맑아서 그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았습니다.”
솔직히 그중에 유운이 가르치는 걸 바로바로 따라오는 아이는 없었다. 그뿐일까, 오늘 새 글자를 배우면 어제 외운 글자를 까먹는 아이도 허다했다.
제 수하였으면 아둔하다고 경을 쳤을 테지만 고작 아이들이다. 닦달할 이유도 없고 그들이 글공부를 통해 무언가 대단한 걸 성취하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유운은 묵묵히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가르쳤다.
글을 가르쳐서 받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시끄러운 아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면 제 처지 정도는 금방 잊게 될 정도로 바빴다.
그럭저럭 마을의 일원으로 녹아들게 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정파무림의 오대세가에서 직계로 태어나, 자라기는 흑도무림의 수좌인 흑천주의 손에서 자랐다. 평생 여기가 제 자리 같지 않아 속을 끓였는데 그 마을에서 유운은 어디의 누구일 필요도 없었다.
그게 좋았다.
“읏!”
유운의 편해 보이는 낯에 심통이 난 승한이 그의 유두를 비틀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새된 목소리에 유운은 당황했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자꾸만 손대고 싶군요.”
“하지 마십시오.”
승한은 제 손등을 살짝 내리치는 유운의 음성에 히죽 웃었다. 진저리를 치는 음성이 제법 예전의 대공자 모용유운 같아서였다.
그 화려한 걸 누리며 살 때는 만족일랑 한 터럭조차 없는 양 불행해 보였다. 더 가지지 못해 안달인 양 보였다. 그런데 기억을 잃고 이토록 추락한 후에 오히려 편해 보인다니.
그저 흑천이 그에게 안 맞았던 양 느껴지지 않나. 사제인 자신이나 사부님의 곁보다는 별로 중요치도 않은 타인들에게 둘러싸인 삶이 더 몸에 맞는 옷처럼 말하는 유운이 야속했다.
“이제 혼자서도 버틸 만하니 나가셔도 됩니다. 예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으니 쉬셔야지요.”
상대를 밀어내려 몸을 들썩이자 얼음 녹은 물이 찰박거렸다.
“싫습니다.”
승한은 유운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의 앞머리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유운의 이마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어린아이가 인형을 끌어안고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것 같았다. 유운은 하나뿐인 누이와 장난감을 두고 싸우던 자신의 꼬마 제자를 떠올렸다. 그 소년과 승한의 다른 점이라면 후자 쪽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거였다.
“그렇게 아무한테나 정 주고 마음 주던 분도 아니시면서, 어찌 몇 달 지낸 게 전부인 그 마을에서 평생을 뿌리내리시려 합니까? 부인도 얻고 아이도 줄줄이 키우면서 예전 일일랑 전부 모른다고만 하고.”
승한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덫에 잡힌 사냥감처럼 몸을 비틀던 유운은 제 목덜미에 닿는 숨결에 얼굴을 확 붉혔다.
“이거 놓으―”
“제가 잘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저를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서 이렇게 홀라당 잊어버리고 새 삶을 사는 건 너무합니다.”
승한이 귀를 콰직 깨물어왔다. 유운은 고통 때문에 벌어진 입술로 나오려는 비명을 삭였다.
“기억해 내세요. 아니면 저 없이 두 다리로 서지도 못하게 대사형을 망쳐놓을 것 같단 말입니다.”
왜 갑자기?
유운은 억울했다. 마을에서 지내는 게 어땠냐기에 순순히 말했을 뿐인데 승한이 돌연 심술을 부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아픕니, 다.”
추위 때문인지 저를 얼마든지 한 손으로 휘두르고 뭉갤 수 있는 상대가 선사한 고통 때문인지 뚝뚝 끊어져 나오는 음성에 승한이 웃었다.
“그러니 어서 기억을 되찾아 이 개새끼에게 목줄을 채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피가 나지 않았음에도 제가 문 자리를 정성껏 핥은 승한이 속삭였다. 유운의 목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의 담백한 태도에서 성애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심술이 나 유운을 뼈째 씹어 먹으려는 짐승만 있을 뿐이다.
“고작 입질만으로도 이렇게 놀라시다니…….”
안타깝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으나 정말 미안함을 느끼는 거 같진 않았다.
“왜,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부님 명령도 어기고 대사형의 얼굴을 보러 갔는데.”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닿았다.
“웬 같잖은 독에 당해 있질 않나.”
승한의 손은 유운의 가슴팍을 더듬어 올라갔다.
“기억은 없다는데 그 귀한 감정은 낯모르는 이들에게 질질 흘리고 다니고…….”
가슴을 가르듯 미끄러지며 움직이던 손가락이 유운의 목덜미에 닿았다.
“남몰래 살금살금 밤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피 냄새를 묻혀 오더니 아무 일도 아닌 양 은폐하려 들고.”
그리고 또 그 목을 따라 움직이더니 승한의 검지가 유운의 턱 끝을 슬쩍 들었다.
“한데 왜 이러는지 모르시겠다니요.”
탐색하듯 자신의 낯을 살피는 사제의 시선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차마 눈을 피할 수 없어 마주 보던 유운은 승한이 이내 픽 웃으며 힘을 푸는 것을 느꼈다.
“더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귀하신 분이 또 아프면 제 마음만 애끓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유운이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제가 아파서 어쩔 수 없다는 양 물러나지 말고 원망스러운 게 있으면 제대로 따지란 말입니다.”
형형한 시선에 승한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억이 없으니 과거에 무슨 대단한 관계였던 것처럼 의미심장하게 말할 때마다 드릴 말씀이 없어 입을 다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제가 쌓아 올린 것들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양, 그렇게 가볍게 치부하지 마십시오.”
승한이 자신에게 쉽게 정을 주고 쉽게 관계를 쌓았다며 원망하는 건 틀린 말이다.
“난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 사람들과 대단한 정을 쌓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매일같이 당장 오늘을 어떻게 살지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감히 죽지 못해 살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던가.
“……아.”
승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눈은 유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의 압박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으나 유운은 꿋꿋이 버텼다.
반라의 상태로 사제의 품에 안긴 꼴이 얼마나 위엄이 있겠느냐마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제가 실수했나 보군요.”
생각보다 순순히 입을 연 승한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본인의 잘못을 지적당해서라기보다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제 입장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유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 승한이 눈치라도 보는 양 몸을 수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저 큰 덩치로 몸을 당겨 안아봤자 얼마나 줄어들겠나 싶다가도 그가 제 앞에서는 자존심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번에도 입에 발린 소리일지 모른다. 그래도 승한은 말로만 납작 엎드리는 사내는 아니었다.
유운의 굳은 입매가 누그러진 걸 가장 먼저 알아챈 승한이 속닥였다.
“많이 화가 나셨습니까? 원한다면 뺨을 때리셔도 됩니다.”
기가 막혔다.
“제가 원래…… 화가 나면 사제에게 손을 올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상당히 엉망진창으로 살긴 했으나 승한에게 손을 올린 적은 없었다. 심지어 강오에게도 손찌검을 하진 않았다. 제 화풀이를 위해 상대에게 폭력을 휘두르느니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
그게 유운의 결벽 아닌 결벽이었다.
“아니요.”
승한이 사르르 녹는 듯 웃었다.
“저는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치워 버리는데, 대사형에게 저를 치워버리라 하고 싶진 않아서요. 뺨으로 대사형의 노기를 풀 수 있다면 차라리 이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셈법은 입에 담지 마십시오.”
유운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도 어딘가 이상한 사제긴 했으나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갑갑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승한은 타인을 함부로 취급하는 것만큼이나 그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듯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목이 메 잠시 말을 끊었다.
“지금의 저는 당신에게 목숨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말로만 은공이라 칭하는 것이 아니니 부디 몸을 아끼세요.”
유운은 제 말이 승한에게 얼마나 닿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대사형이 아닌 평범한 서생 따위가 하는 말의 무게는 얼마나 가벼울까.
“은공이라 함은 그 마을 사람들보다 제가 더 중한 것이겠지요?”
승한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유운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승한이 활짝 웃었다.
그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 한 번도 상상치 못한, 순수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속이 역했다. 승한이 가증스러워서라기보다는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처음 보는 표정이어서였다.
얼마나 인생을 헛살았던 걸까.
얼음이 녹고 물이 미지근해지도록 승한은 자리를 지켰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고 그저 나직한 숨소리만이 존재했다.
유운은 끝끝내 자신을 놓아주지 않던 그 거추장스러운 온기를 차마 밀어내지도 못했다. 어느 순간인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유운이 정신을 차렸을 땐 아침이었다.
“깨셨습니까?”
얼음이 든 대야에서 영견을 적시던 승한이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를 침상으로 옮긴 건 역시 사제인 모양이다.
그의 뒤로 난 창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따스했다.
도통 모르겠다. 왜 이다지도 가슴이 술렁이는 건지…….
“밤을 지새우신 겁니까?”
“예.”
“화월루까지 그렇게 거칠게 말을 몰아 놓고 팔자에도 없는 얼음 목욕까지 한 사람이 왜 그리 몸을 혹사합니까?”
저도 모르게 따지듯 물으니 승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무림인이라 이 정도는 혹사가 아닙니다.”
혹사는 아니지만, 무림인이라고 해서 몰려드는 잠기운을 물리치는 게 마냥 쉽지는 않았다.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던 사제는 잠도 많은 편이라 그의 거처인 빙연당에서 잘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
가슴이 푹 꺼지는 기분이다. 배꼽 근처가 당기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할 수 있어서 한 일이니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잠든 사이 사형의 열이 오르면 고집 센 의원을 납치해 와야 한다며 승한이 경박한 투로 떠들었다.
잘 포장된 가식이다. 심혈을 기울여 무대에 올린 극에 출연하는 배우처럼, 승한의 말씨며 행동에는 어설픔이 없었다.
갑갑한 마음에 유운은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어느 순간엔가 치밀어 오르는 충동에 그는 불쑥 입을 열었다.
“……객잔 주인이 악왕채의 산적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있던 침모의 부탁을 받고 그를 설득해 관아로 보내러 갔던 겁니다.”
거짓부렁이다.
하지만 승한이 자신에게 떠들었던 너절한 거짓말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객잔 주인의 얼굴을 보니 금화 소저를 겁박하던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그에게 포쾌를 당장에라도 불러들이겠다며 협박해서 의뢰인이 요녕 말씨를 사용한다는 걸 들었습니다. 언제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데 그만―”
유운은 숨을 헐떡였다. 어울리지 않게 정의로운 척을 하자니 속이 메슥거렸다.
문득 승한 쪽을 바라보니 그의 낯이 제법 무표정했다.
“그게 답니다. 그게 다예요…….”
무표정이 맞나?
유운은 필사적으로 승한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승한은 대야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 얼음을 가져와야겠습니다. 쉬고 계세요.”
참으로 형편없는 핑계다. 그가 일어나는 바람에 얼음이 자긴 멀쩡하다고 대야에 부딪히며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운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실소를 머금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승한은 방 밖을 나섰다.
도로 드러누운 유운은 천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침상이 멀쩡하네.’
기둥의 조각이 바뀐 걸 보면 탕옥에서 밤을 지새우는 동안 새 침상을 들인 눈치다. 승한이 얼마나 끔찍하게 자신을 돌보고 있는가, 라는 생각에 유운은 야금을 꽉 틀어쥐며 몸을 웅크렸다.
한참이 지나도 승한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전이 지나가는 동안 야소가 찾아와 진맥을 보고 이 정도면 위기는 지났다고 말했다. 승한의 거취를 물었으나 그녀는 모른다고 답했다.
방 안을 서성이다가 식사를 가져다주는 시비에게 승한의 행방을 물었으나 그녀도 아는 것이 없었다.
모두가 분주하게 장사를 준비하는 오후에도, 해가 기울어 손님들로 떠들썩해진 저녁에도 승한은 없었다. 유운은 혼자 수저를 들고 내려놓은 채 등이 줄지어 내걸린 창밖의 번화가를 바라봤다.
결국 승한은 하루가 꼬박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
둥, 딩, 땅, 끼리릭, 끽!
금으로 낼 수 있는 온갖 이상한 소리가 이 방에 가득했다. 교월은 구겨진 미간을 숨기지 않은 채 건너편의 사내를 바라봤다.
옷깃도 제대로 여미지 않아 느슨한 차림에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어수선하게 흐트러져 있다. 그럼에도 지저분해 보이지 않고 격의 없이 자유분방하게 느껴진다는 게 이 사내의 매력이라 할 수 있었다.
“차림도 너절한데 금을 대하는 자세는 더 너절하십니다.”
“새 곡을 배우는 중이 아닙니까. 좀 봐주십시오.”
“화월루의 장부를 정리하는 저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공자님의 연주를 감상하고 새 가르침도 드려야 하는 겁니까?”
“이토록 사랑스러운 제자를 둔 죄 아니겠습니까?”
승한이 야살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교월은 저게 얼마나 잘 꾸며진 표정인지 안다.
소년 시절부터 승한은 자신의 매력을 잘 알았고 이를 이용해 상황을 무마하는 것에도 능했다. 어릴 적에 기루를 드나들게 둔 것이 잘못이었을까?
교월은 다소 혼란스러운 심경으로 과거를 되짚어 보다가 말았다. 아니다. 저건 세상 어디에서 태어났건 상대를 홀리는 법 하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빠르게 배웠으리라.
비록 금에는 별 재주가 없으나 남을 관찰하고 이를 흉내를 내는 건 승한이 가진 빼어난 재간 중 하나였다. 그러니 이 정도로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 수 있게 된 거다.
지금쯤 흑천에 돌아와 제자의 부재를 깨닫고 수상함을 느낄 예진랑을 떠올리며 교월은 한숨을 삼켰다.
적당히 승한의 행적을 가려주고 있긴 했으나 상대는 마도무림의 정점에 오른 사내이니 머잖아 꼬리가 밟힐 것이다. 그 전에 저 ‘대사형’과 관련된 음모를 파훼해야 할 텐데…….
상대는 아주 철저하게 모습을 숨겼다.
띵!
“이런.”
급기야 줄이 끊어지는 소리에 승한이 손을 내려놨다. 잠시 기보를 보고 고심하던 그는 남은 현 여섯 개로 소음을 이어갔다.
탄금 솜씨가 갈수록 일취월장하는 게 아니라 더 나빠지기만 하는 것도 나름의 재능이라 생각하며 교월이 입을 열었다.
“일단 혼례에 동원되었던 일꾼을 찾아내 추궁해 봤습니다. 금화 소저라는 이가 무척 시간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는군요. 전표가 아니라 은전으로 돈을 지불한 까닭에 추적은 어렵게 됐습니다.”
승한은 고개를 까딱였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다.
금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멈춘 승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요녕에서 드나든 사람을 찾아 주십시오.”
요녕이라는 말에 내포된 의미를 짐작한 교월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세가다. 모용세가가 흑천주에게 파문당한 후 사라진 직계를 찾고 있는 거다.
“좀 짜증이 나는군요.”
금을 노려보다시피 하면서도 그의 입꼬리는 웃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교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사형이 너무 인기가 좋지 않습니까?”
독을 먹인 걸 보면 딱히 좋은 의도로 모용유운을 찾아간 건 아닐 텐데 승한은 그마저도 불만인 기색이다.
“흑천을 나가기가 무섭게 신부가 생기질 않나, 사부님 앞에서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던 모용세가에서 대사형의 뒤를 쫓지 않나…….”
금을 내려다보는 승한의 시선이 탁하고 어두웠다. 지금 주절주절 떠든 말마저도 교월에게 들려주기 위함이라기보단 혼잣말에 가까웠는지 그는 마무리조차 하지 않은 채 손을 놀렸다.
교월은 한숨을 삼켰다.
“그래서 이번엔 뭘 그리 참고 있으신 겁니까?”
“지금은 대사형을 잡아다가 흑천 안에 가두고 싶군요. 그럼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아이처럼 말하고 있으나 승한의 음성은 차가웠다.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어째서입니까? 환경이 같고 예전과 같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식물조차 같은 양의 햇볕을 쬐어주고 같은 양의 물을 줘도 어떤 건 꽃을 피우지만 어떤 건 뿌리가 썩습니다.”
교월은 조곤조곤하게 설명했다.
“사람은 그보다 더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휘두를 수는 없는 겁니다.”
“번거롭군요.”
승한이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이미 아는 이야기다. 말로는 몇 번이나 들었음에도 그 사실이 끝내 승한에게 와닿진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다른 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면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미움을 받는 게 마냥 나쁘기만 할까요?”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얼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울부짖고 화를 내거나 반항해도 멀리 떼어놓는 것보다는 곁에 두는 게 나은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서 나올 결과에 무지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저 승한의 저울은 고장이 나 있을 뿐이다. 상대의 미움과 증오를 기쁨과 행복 건너편에 달아도 그 무게가 다르지 않다.
감정의 총량에서 증오가 더 크다면 그쪽을 망설이지 않고 선택할 정도로.
“…….”
교월의 침묵이 길어지자 승한은 언제 그리 오싹한 말을 했냐는 양 웃었다.
“물론 행동으로 옮기진 않을 겁니다. 사부님은 본인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면 명령으로 여기고 절대 어기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승한은 굳은살로 가득한 제 손바닥을 내려봤다. 손바닥에 자리 잡은 굳은살은 그가 무림인임을 뜻했으나 손가락 끝에 자리 잡은 굳은살은 악공의 것과 비슷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승한은 타인과 교류를 나누는 것이 어려웠다. 일월신교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더러 있는 현상이다. 마공을 익힌 부모를 둔 아이는 드문 확률로 가슴이 망가진 채 태어난다.
다른 이의 웃음이나 눈물에 공감하지 못하고, 본인의 욕망을 가장 우선하게 되는 거다.
승한의 조모는 그런 그에게 생글생글 웃는 법부터 가르쳤다. 하지만 그녀의 훈육은 반쯤 실패로 돌아갔다. 승한은 언제 웃어야 하는지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모두 승한을 가르칠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일월신교는 혈교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할머니는 승한을 빼돌려 옛 지인인 사마련주에게 맡겼으나 그녀마저 전장으로 떠나게 되며 소년은 홀로 남았다.
그를 돌봐주던 사람이 점차 뜸하게 드나들었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승한은 삐걱거리는 창틀 아래로 고인 빗물에 제 얼굴을 비춰보며 방긋방긋 웃는 연습을 했다.
어른은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새 보호자를 얻기 위해서는 선량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사마련주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은 소년이 아사하기 전에 새 보호자를 그의 앞으로 이끌었다. 소년은 세상 다시없이 화사하게 웃으며 진랑의 손을 잡았다.
‘착한 아이라고 착각하면 당장 내버리진 않겠지.’
그러나 예진랑은 생각처럼 쉽게 속아주지 않았다.
“요녕의 모용세가는 움직임이 어떻습니까?”
교월은 그 질문에 바로 답했다.
“현재 임시 가주직을 맡은 모용길상의 지휘하에 따라 가문을 재건 중입니다. 하지만 그 속도가 느려요. 문파는 새 제자를 들이면 되지만 세가는 혈족이 늘어야 비로소 번성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보통 세가의 결속이 문파보다 끈끈하다. 서로 피를 나눈 관계이기 때문이다.
단, 타인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파와 혈족으로 그 구성원 대부분을 유지해야 하는 성질을 가진 세가는 성장하는 속도가 다르다.
유운이 당장 모용세가의 부흥에 뛰어들었다고 해도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려면 몇 대에 걸친 시간이 필요할 거다.
“하지만 과거의 사업장을 고스란히 되찾은 상태기 때문에 금력은 충분할 겁니다. 무림은 참사를 겪은 모용세가에 호의적인 편입니다. 모용세가를 털어먹으려고 접근한 치들도 있지만……. 임시 가주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 전부 실패했습니다.”
모용세가는 유운의 것인데 사부님이 그저 그런 파수견을 허락했을 리 없었다.
그런 면에서 모용길상은 충분한 검증을 거쳤으리라.
“대사형을 죽일 사람이었다면 사부님 손에 처리당했을 테지만…….”
승한이 코끝을 찡그렸다.
“석연치 않네요.”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곳간을 지키는 개는 어떤 욕심을 가질지 궁금했다.
“원하신다면 추가로 알아보지요.”
“모용길상과 대립하는 세가 내의 인물도 조사해 주십시오.”
“범인이 모용세가 내의 인물이라고 확신하시는군요.”
“산적에게 접촉한 자가 요녕에서 왔다는데, 대사형에게 볼일이 있을 요녕 사람이라곤 역시 모용세가밖에 없지 않습니까?”
유운이 아무리 부지런해도 그 먼 곳에 원한을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의도적으로 요녕의 소식을 피하곤 했다. 모용세가에 대해서도 굳이 알려고 들진 않았다.
“모용세가 내의 알력 다툼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녕이 거론된 순간부터 교월 역시 승한과 비슷한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흑천주께서 연통을 넣으셨습니다. 언제쯤 감숙으로 돌아올 거냐고 물으시더군요.”
교월이 덧붙인 말에 승한은 혀를 찼다. 과연 진랑은 감이 좋았다.
고양이가 눈앞에 보이지 않고 조용하면 어딘가에서 사고를 치고 있듯이 승한이 잠잠하니 어떤 사건의 조짐이라 여기고 일단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가 끝내주는 서한을 써 보겠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쓰십시오.”
교월이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낯으로 조언했다. 그러나 승한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금을 등에 둘러맨 채 도망치듯 교월의 방을 나가 버렸다. 불러봤자 헛된 메아리가 될 것임을 알아챈 교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잠들지 못한 채 침상에 누워 있던 유운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승한은 깨금발로 살금살금 다가와 소리가 전혀 없었다. 그림자가 제 몸 위로 길어지기가 무섭게 손을 뻗어 그의 옷소매를 낚아챈 유운은 히죽 웃는 사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왔습니다.”
그 인사에 유운은 대답하지 않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승한의 몸에서 여인의 분내나 술 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강이를 걷어차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저 뺀질뺀질한 낯을 구겨 놓을 수 있을까?
“기다렸습니다.”
비스듬히 누운 채 속삭이는 유운의 음성에 승한이 주춤했다. 어슴푸레 들어온 달빛이 유운의 낯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치료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야금을 슬쩍 들추니 그 아래로 흰 다리가 드러났다. 상의는 그대로 입고 있었기에 유운이 바지를 벗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승한은 진심으로 놀랐다.
어디에서든 체면을 목숨처럼 지키던 유운답지 않았다.
한사코 치료가 아니면 너 따위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태도에 화가 난다기보다는 이상한 갈증이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준비하고 기다리실 줄 알았다면 좀 더 빨리 올 걸 그랬습니다.”
승한이 선뜻 손을 야금 아래로 밀어 넣었다. 유운은 승한의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흠칫 떨었다.
본디 승한만큼이나 고된 훈련을 하던 유운의 다리는 탄력적인 선을 가지고 있었다. 땅을 박차는 것만으로도 멀리멀리 달아날 수 있으리라.
‘괜히 도발했나?’
승한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듯 웃고 다니지만 승부욕이 강한 편이었다. 열이라도 받으라고 준비했는데, 너무 발끈한 나머지 이 짓에 진심이 되면 곤란한 건 유운이었다.
“제가 더 성심성의껏 봉사했어야 하는데……. 사형께서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늦게 돌아온 이 나쁜 사제를 벌해 주십시오.”
사근사근하게 말한 승한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은은한 촛불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옷자락을 끌어 내리는 승한 탓인지 모든 게 적나라하고 야릇하게 느껴졌다.
사락거리며 흘러내리는 옷의 소리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승한의 숨소리도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하나?’
문제는 유운이야말로 지독한 자존심 때문에 먼저 내건 승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승한은 그를 두고두고 얕보게 될 텐데, 기억이 있든 없든 사제에게 한 수 지는 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승한의 옷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걸 지켜보던 유운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튀었다.
“이게 뭡니까?”
오래된 수련으로 굳은살이 박인 사제의 손가락 끝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운의 낯이 굳었다. 승한만 한 무인의 손에 금 자국이 생길 정도면 얼마나 혹독하게 연주한 건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 스승이라는 화월루주가 당신에게 수련을 강요하고 있는 겁니까?”
“아.”
방어할 생각조차 없이 손목을 내주고 만 승한은 유운의 시선을 따라간 후에야 그가 무엇 때문에 노했는지 깨달았다.
“손에 자국이 남았군요.”
“화월루주 짓이냐고 물었습니다.”
유운의 거듭된 질문에 승한이 실실 웃으며 답했다.
“고작 두어 시진 정도 연습을 했을 뿐입니다.”
“한데 그 정도로 무인의 손이 이렇게 벌겋게 붓습니까?”
“사부님이 저를 많이 곱게 키우셔서.”
이제 슬슬 승한이 할 말이 없을 때면 저 말을 입에 담는다는 걸 알아챈 유운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퉁퉁 부은 손이 못나서 싫으십니까?”
“예. 아주 못났습니다.”
유운은 고개를 홱 돌렸다. 매양 깐죽대고 얄밉게 굴긴 해도 승한은 자신의 사제였다. 그가 흑천도 아닌 사천의 기루에서 손이 부르틀 때까지 금에 매달렸다는 걸 예전에 알았다면 빙연당에 가둬버렸을 거다.
“그러지 마십시오. 사형에게 돌아오려고 아주 열심히 연습했단 말입니다.”
고개 돌린 유운의 어깨에 턱을 괸 승한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유운은 더 기가 찼다.
“연습 따위 안 해도 되니 돌아오지 마십시오. 은공께서는 대체 왜 그런……. 저 때문에 화월루주에게 부탁을 해서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겁니까?”
“오히려 무슨 짓을 당한 건 스승님 쪽입니다만. 지금쯤 약도 안 듣는 두통 때문에 고생하고 계실 겁니다. 귀도 섬세하신 분이 책임감은 강하셔서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거든요.”
“…….”
순간 유운은 승한의 끔찍한 연주를 떠올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금을 배운 승한은 언제나 최악의 연주를 했다.
음은 그럭저럭 맞는데 왜 항상 결과가 그렇게 엉망인지 알 수 없다며 독설을 퍼부어도 그의 사제는 항상 웃었다.
“스승님은 저를 정말 간절히 쫓아내고 싶어 하셨지요.”
교월의 심정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유운으로서는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승한의 연주는 잠 깨는 용도로나 좋지 조용히 감상하려고 하면 그만큼 괴로운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리 오래 버티신 겁니까?”
“무릇 제자의 특권이란 제대로 배움을 얻을 때까지 스승을 괴롭히는 게 아닙니까?”
“…….”
그 뻔뻔한 말에 유운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여전히 흑천의 대공자라면 사제의 만행에 책임감을 느끼고 화월루주에게 특별한 포상이라도 했으리라.
“그래도, 이건 과해 보입니다.”
유운은 승한의 손을 붙잡고 그 끝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무림인이라 회복력이 빠르니 내일 아침이면 별로 티도 안 날 겁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웃는 사제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유운은 그가 금에 이토록 진지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와 연주하던 승한에게 격려의 말을 꺼내본 적도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던 날들이 회한이 되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제 손보다 더 급한 사정을 돌봐야 할 거 같으니 이제 놓아주시겠습니까?”
맨가슴이 된 승한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깨달은 유운은 거의 내던지듯 사제의 손을 놓았다.
“벌레도 그보단 소중히 다루겠습니다.”
“저, 저는.”
이제야 승한이 벗고 있다는 걸 의식하게 된 유운은 말을 더듬었다.
야금으로 가리고 있던 다리가 훤히 드러난 채라 승한은 손쉽게 그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앞으로도 몇 번이고 되뇌게 될 후회에 사로잡힌 유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승한의 손이 여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부끄러움에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승한이 아닌 다른 사내를 침상으로 끌어들인 기분이다.
“읏!”
샅을 비비듯 주물러 오는 승한의 손길에 신음을 내뱉은 유운은 자신이 무심코 한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람은 너무도 쉽게 저속해진다.
“여기를 발갛게 세우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엄밀히 말해서 발기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바지를 벗고 승한을 기다린 건 사실이기에 유운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시선을 피하는 유운의 얼굴에 승한이 느물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정말 변태 같았다.
“왜 점점 더 색이 진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봄이 깊어가는 무렵의 꽃잎 같아요. 활짝 피우면 어떻게 될지…….”
“입 닥, 다무십시오.”
당혹 사이를 비집고 나온 제 성격을 가까스로 갈무리한 유운이 이를 악물었다. 승한의 손은 제가 파악한 유운의 약점을 집요하게 건드렸다. 허벅지 안쪽의 살이 거칠게 비벼지는 감각에 유운은 흐느낌을 삼켰다.
이 기묘한 수음이 반복될수록 익숙해져서 무감각해질 줄 알았는데, 그의 살갗은 한 번 피어오른 열기를 좀체 잊으려 들지 않았다. 승한은 어찌나 집요한지 매번 같은 자리를 찾아 유운을 쾌감에 적셨다.
한자리에 계속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꿰뚫듯이, 승한은 유운에게 열락이 무언지 심어놓았다. 이는 의지와 무관한 영역의 일이었다.
“유운이 입술을 그렇게 벌리고 계시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승한이 웃는 투로 속삭였다.
“삼켜달라고 조르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무슨, 그런 소리를……. 흣!”
유운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흘겼다. 승한은 그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손끝으로 귀두 끝을 뭉근하게 비벼왔다. 입술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사라지는 유운의 혀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저 말캉하고 여린 살을 제멋대로 헤집어놓고 싶었다.
난잡하게 흐트러질수록 솔직해지는 유운의 반응을 더 보고 싶었다.
“왜, 어째서 그리 보, 십니까?”
경계심으로 뾰족해진 사형의 눈꼬리에 승한은 유순하게 웃어 보였다.
하나 촛불과 달빛 외에는 온통 어둠뿐인 공간에 녹아든 승한은 여느 때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
능청스럽게 물러날 줄 알았던 이는 유운에게로 몸을 숙였다. 바투 다가온 얼굴에 유운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사제의 두 팔에 갇힌 채, 달아날 곳이라곤 없다.
제 호흡 위에 승한의 것이 덮일 듯 가까웠다. 오로지 시선만으로 유운을 집요하게 탐색하던 승한이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자신이 느끼는 것이 아쉬움인지조차 모르는 채, 유운은 그 허한 감각이 안도일 거라며 스스로를 속였다.
“흣! 아……!”
움칠대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탄성에 승한의 손놀림은 점차 빨라졌다.
유운은 처음처럼 긴장하지도 않았고, 신음을 아득바득 참으려 하지도 않았다. 제 손길에 익숙해진 사내를 보고 있노라면 길들여서는 안 되는 짐승에게 목줄을 씌운 기분이 들었다.
승한은 갈증을 느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욕망의 증거였다.
“흐아, 으읏, 윽!”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 유운이 어찌 반응할지 궁금했다. 아직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몸을 구석구석까지 탐색하려 들면 밀어낼지, 아니면 끌어당길지…….
난폭한 호기심을 억누르던 승한은 들뜬 얼굴로 몸을 뒤척이는 유운의 손목을 끌어다가 그 자신의 양물을 쥐게 했다.
왜 이러느냐는 듯 질문하는 유운의 두 눈을 보며 승한은 사형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왜?”
“천천히 움직여 봐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은 벌집에서 뚝뚝 떨어지는 꿀 같았다.
어떤 벌레들은 그 달콤함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황금빛 액체 속에서 익사하기도 했다.
“그래요. 그렇게.”
유운이 살기둥을 천천히 앞뒤로 흔들면 승한의 손아귀가 그 위를 압박해 왔다.
“마음에 드십니까?”
반사적으로 도리질을 친 유운은 강한 조임에 시야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 좋아. 좋다고!”
너무도 다급했던 나머지 그의 말 사이사이로 할딱대는 호흡이 샜다. 승한은 잘했다는 듯 흘러내린 유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질척하기 그지없는 손아귀며 자신을 품 안에 가둔 사내로부터 느껴지는 열기, 그리고 이 비이성적인 쾌감.
이 자리에서 자신이 녹아 없어진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머잖아 상대가 자신의 사제라는 걸 망각한 채 어떻게든 해 달라며 허리를 들썩이며 조르게 될지도 모른다.
두렵다. 하지만 그 추락감만큼이나 선명한 기대가 유운의 가슴속에 싹트고 있었다.
“……당신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고 싶습니다.”
귓가에 와 닿는 축축한 숨에 유운이 어깨를 움츠렸다. 승한은 그의 귓불을 깨물었다.
“악!”
쾌감으로 혼몽한 와중에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통이었다. 콰직, 하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유운은 고개를 반쯤 돌려 어깨 너머로 승한을 노려봤다. 그러나 붉게 달아오른 눈가는 위협적이라기보다는 매혹적이었다.
“아프, 아픕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사이에는 흐느낌이 섞여 나왔다. 그것이 고통보다는 쾌감 탓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운의 두 뺨이 눈물로 젖어 있는 게 보고 싶었다.
승한은 쓴웃음을 삼켰다. 자꾸만 욕심이 난다.
저 하얀 종이의 빈자리를 전부 알고 싶었다. 검은 먹으로 빼곡하게 채워 자신이 모르는 부분일랑 단 한 점도 남지 않게끔.
“하지만 여기는 여전히 뻣뻣하게 세우고 계시지 않습니까? 굉장히 잘 느끼는 데다가 솔직한 몸입니다.”
유운의 가슴이 갓 태어난 병아리의 날개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날지도 못할 거면서 날개만 움찔대는 그 연약한 생명체와 이처럼 훤칠한 사내를 겹쳐 보면서도 승한은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할딱대는 호흡을 내뱉는 유운과 승한의 시선이 서로에게 퍽 오래 묶여 있었다.
매양 무미건조하게 할 일을 해치우는 듯했던 승한의 검은 눈에서 낯선 열기가 느껴졌다.
“왜, 왜 종일 나가 계셨던 겁니까?”
유운은 머리가 열에 들떠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환자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사제가 어쭙잖은 핑계를 대도 용서해 줄 수 있었다. 이를테면 금화 소저의 뒷조사를 하러 갔다든가…… 하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고 그렇게 자신을 떠난 시간을 변명해도 말이다.
유운의 손에 깍지를 끼며 끌어당긴 승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더는 저만의 대사형이 아닌 거 같아서, 근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니 심술이 납니다. 그래서 온종일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짐짓 어깨를 움츠린 채 약한 척 행세하는 승한은 누가 봐도 상심한 청년처럼 보였다. 진심으로 유운과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질투해서 상처받은 것처럼.
“……속아 드릴까요?”
유운이 퍽 잠긴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결국 승한은 또 자신을 농락하는 쪽을 선택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감정을 입에 담으며 저를 뒤흔들어 놓으려고.
“은공이 정말로 심술이 나서 돌아오지 않은 거라고 그렇게 믿으면 되겠습니까?”
차라리 성의 없는 거짓말을 하지 그랬나.
승한은 평범한 방식으로 상처받지 않는다. 그저 본인에게 미치는 이득과 손실을 계산하고 해가 되는 쪽이라면 완벽하게 배제할 뿐이다. 유운은 그가 얼마나 차갑고 무서운 사내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편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까닭에 이용해 먹기도 좋은 것이 염승한이었는데, 그 생각을 떠올리자니 이상하게 목이 멨다.
어쩌면 사제의 다정한 기만에서 자신만은 예외일 거라 생각해 왔던 모양이다. 그저 승한에게 농락당하지 않아도 될 위치에 있었던 것뿐인데.
“다른 이유도 없는걸요.”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유운이 생각보다 더 자신을 기다린 것 같아 그에게 미움을 사는 일은 피하려 했을 뿐이다.
있지도 않은 감정을 꾸며내서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그렇게 자신의 부재를 이해해 준다면 편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유운은 딱딱하게 대꾸한 뒤 수음을 재개했다. 속내야 어떻든, 쾌락에 잠식된 몸은 착실하게 정을 토해냈다. 흰 체액이 다리 사이에 터지는 걸 보면서 유운은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내의 몸은 참 편리하군.’
감정이야 어찌 됐든 흔들고 싸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한창 성욕에 눈뜰 소년 시절에도 수음은 거의 하지 않았다. 하물며 사제와 몸을 비비게 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심지어 이 상황의 가장 이상한 점은 염승한이 아니다. 그저 의무적으로 욕구를 해치우던 예전과 달리 더 닿고 싶었다. 상대를 더 느끼고 싶었고 살갗에 마찰하는 체온이 가파르게 상승할수록 느껴지던 갈증이 기꺼웠다.
고작 성기를 마주 쥐고 흔들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좋은 걸까? 저 단단한 손아귀가 하반신을 쥐고 흔들릴 때마다 그의 사고와 감정까지 함께 흔들렸다.
‘미친 게지.’
유운은 그리 생각하며 벽을 노려봤다. 저기에 머리를 박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러나 정작 매끈하고 탄탄한 승한의 상완이 눈에 들어왔다. 잔뜩 성이 난 듯 선명히 보이는 근육에 입 안이 바싹 말라왔다.
‘미친 거야.’
약 때문이 아니라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지 궁금해졌다.
“금방 물수건을 가져와 닦아 드리지요.”
여느 때처럼 친절한 사제로 돌아온 승한이 서글서글한 투로 말했다. 유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에 돌아누웠다.
흐트러진 옷만큼이나 머릿속이 엉망이다.
저 가증스러운 사제와 무엇을 도모하고 싶어 머리가 이토록 복잡한 걸까.
아무리 해도 알 수 없었다.
***
쨍그랑!
머리 바로 옆으로 귀한 도자기가 날아왔다. 금화는 무심코 생각했다.
‘인망 높은 도예가에게 선물 받은 거라 그렇게 애지중지하더니.’
“너!”
노인에 가까운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일을 대체 어떻게 처리한 게야? 왜 끈 떨어진 연 하나 제대로 잡아 오지 못해 이 사달을 만드느냔 말이다!”
“……송구합니다. 아버지.”
“흑천주도 그에게서 손을 뗐단 말이다! 백라궁주도 밀월에 빠져 있는 지금만큼 좋은 기회가 없는데 네가 아둔하여 내 계획을 다 망치는구나.”
이번에는 벼루가 날아왔다. 피하지는 않았다. 머리에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벼루는 아슬아슬하게 금화를 지나쳐 벽에 부딪히더니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졌다.
새로 산 옷이며 얼굴에 먹이 튀었으나 금화는 이를 닦아내기보다는 무릎을 꿇었다.
“부디 진노를 거둬 주셔요. 사천에 아버님의 안배가 되어 있으니 분명 기회는 다시 올 겁니다.”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킨다면 너나 네가 키우는 짐승 새끼를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텅 빈 충성을 읊조리며 금화 소저는 천천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 너머에 서 있던 무진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거기 너, 어서 영견을―”
“됐어. 괜찮아.”
금화는 가슴을 폈다.
“아버지는 내가 이런 몰골로 처소까지 돌아가며 부끄러움을 느끼길 바라실 거야.”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음성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이 옷 아깝네. 촉금으로 만들었는데.”
“사람이 상할 뻔했는데 옷이 무어가 중요합니까?”
“……아.”
금화는 돌아보지 않은 채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은 안 다쳤으니까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지 뭐야.”
“그 남자를 제가 더 잘 감시했어야 했는데…….”
무진이 이를 악물었다.
“됐어. 모용유운을 데려간 자가 누구든, 우리를 쫓아오는 것보단 낫지. 기회도 살아 있어야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그리 뇌까린 금화는 한들한들 걸음을 옮겼다.
-2권에서 계속
모란은 피지 않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