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6화 (7/13)

제6장. 승랑이라고 불러주세요

화월루에서 보내는 시간은 안락했으나 유운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다. 어쩔 도리 없는 조바심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승한에게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묻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유운에겐 하루해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악왕채에서 돌아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승한은 유운을 조용히 불러냈다. 화월루가 가장 조용한 오전이었다.

“요녕 사람이 머무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승한이 설명했다.

“문제는 그가 머무는 곳이 기루더군요.”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유운이 반문했다.

“기루? 왜 기루에 숨어 있단 말입니까?”

“여기에서부터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교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을 맞이했다.

“사천 성도는 번화한 곳이니만큼 외지인이 많이 드나듭니다. 항주나 소주만큼은 아니어도 사천의 기루는 유명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몰리곤 하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드나드는 이가 많을수록 그 면면을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뒷골목으로 들어갔다면 추적이 더 편했을 거라며 교월이 서늘한 투로 말했다.

“외지인을 중점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중 한 무리가 사천의 기루 중 한 곳에 장기 투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객잔을 빌렸다면 좀 더 일찍 알았을 텐데 매일 기루의 손님으로 들어가서 확인이 늦어졌습니다.”

유운은 교월이 ‘늦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게 믿기지 않았다. 승한에게 산적의 고백을 알려준 지 꼭 나흘째 되는 날이다. 실질적으로는 사흘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악왕채가 있는 곳에서 사천으로 이동한 유동 인구 중 외지인만 솎아내서 조사했다는 소리다.

“우연찮게도 그 손님들이 요녕 말씨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조사해볼 만한 가치는 있겠군요.”

유운이 중얼거렸다.

“다만, 이 바닥에도 법도라는 것이 있어서, 저희 측에서 다른 기루에 드나드는 손님의 뒷조사를 하는 건 어렵습니다. 남몰래 해치울 수는 있지만…… 일종의 상도덕 문제라서요. 하오문에서도 저희를 감춰 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한때 기루 사이에서 손님 빼가기가 극성이었을 때 생긴 암묵적인 규칙이라며 교월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뒷조사가 어렵다면 요녕 사람들이 그 기루에 드나든다는 건 어찌 알아내신 겁니까?”

유운의 질문에 교월이 우아한 미소를 그려냈다.

“그 무리가 화월루 앞을 지나갈 때 저희 호객꾼더러 끈덕지게 잡고 늘어지라 했습니다. 그중 말단으로 보이는 이가 거칠게 뿌리치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지요.”

확실히, 수완이 보통은 아닌 사람이었다.

“그럼 제가 조사하면 어떻습니까?”

승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야 소속이 화월루도 아니고 흑천이니 하오문에서 넘어가 줄 겁니다.”

하오문이 미치지 않고서야 흑천의 이공자를 겁박할 리가 없다. 그의 뒤에 버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마도제일인 예진랑일뿐더러 염승한의 지랄 맞은 성질머리는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흑천주의 세 제자 중 잔혹하기로는 가장 먼저 꼽히는 게 승한 아니던가.

이젠 단 하나 남은 제자가 되었으니……. 어쩌면 승한의 악명이 더 높아졌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기루의 손님으로 가겠다는 겁니까?”

유운이 저도 모르게 질색했다. 화월루에서 지내는 동안 승한의 취급이 힘 좋은 일꾼 겸 루주의 제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긴 했으나 다른 기루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후……. 사형께서 이렇게 질색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유운을 보며 벙긋 웃은 승한은 품에서 화장할 때 쓰는 도구를 꺼냈다.

승한은 눈 밑에 점을 콕 찍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교태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승랑이라고 불러주세요.”

미친놈!

***

결국 승한은 제 뜻을 관철하고 말았다. 교월이 무뚝뚝한 얼굴로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했기 때문이다.

“손님으로 가는 것보다 기남으로 가는 것이 내부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편할 겁니다. 게다가 기루는 특성상 폐쇄적이라 손님과 손님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으니 합석이 어렵거든요.”

여기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저 금 솜씨로 무슨 기남 노릇을 한단 말입니까? 악기에 손을 올리는 순간 들켜서 몽둥이찜질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유운은 답답했다. 효율이야 그렇다 치고, 이토록 빤한 일을 왜 승한과 교월이 모르는 척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유운을 놀리는 듯 승한이 경쾌하게 웃었다.

“설마 제가 금을 타겠습니까? 이 험난한 도산검림에서도 본 실력의 삼 할은 감춰야 하기 마련인데, 그런 비기는 고이 감춰 놓아야지요.”

비기가 다 얼어 죽은 모양이다.

“사제가 작년에 감숙 일대에서 춤으로 이름을 좀 날렸습니다.”

머리카락을 휙 뒤로 넘기는 자태가 제법 물 찬 제비처럼 느껴지긴 했다. 생긴 건 대놓고 야릇한데다가 몸까지 탄탄하니 무용수의 기본 조건은 갖춘 셈이다.

그럼에도 유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혼자 잠입하려는 겁니까?”

치료 문제와는 별개로 고삐 풀린 야생마를 혼자 보낼 순 없었다.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해 두었습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 같은데 승한이 입을 열수록 안심은커녕 걱정만 무성해졌다.

유운이 우려와 두려움이 반반 섞인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데 승한은 뻔뻔하게 웃었다.

“대사형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 기둥서방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고개를 홱 돌린 유운은 교월을 바라봤다. 그녀는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유운의 심경을 알아챘는지 차근히 설명했다.

“기루에 따라서 유명한 악공이나 무희를 단기 계약으로 초청하기도 합니다. 단, 강제로 눌러 앉힐 경우를 대비해 호위를 데려가기도 합니다. 일종의 관례라 할 수 있지요.”

“저는 무공을 모릅니다.”

이번만큼은 죄책감 없이 거짓말을 입에 담은 유운이 애걸하듯 교월에게 시선을 던졌다.

“……염 공자께서는 스스로를 알아서 보호하실 겁니다.”

말 그대로 기둥서방 노릇만 하게 생겼다. 정작 이야기를 꺼낸 승한은 수치도 모르는 얼굴로 싱글벙글 웃는데, 자신은 부끄러워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의 유운은 한결 침착한 표정이었다.

“은공께서는 무척 큰 단체에 소속된 분이라 알고 있는데, 혹 귀한 분을 알아볼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 사형도 참.”

승한이 수줍은 척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제 얼굴 알아볼 놈은 대부분 저 밑에 파묻혀 있지 않습니까.”

사근사근한 음성으로 꺼낸 말은 그렇게 살벌할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나머지는 저를 봐도 입을 다물 정도로 눈치 빠르고 몸보신을 잘하는 것들이지요.”

흑천의 업무를 도맡아 한 유운이나 마찰을 피해 감숙 밖으로 나돈 강오와 달리 승한은 저 하고픈 일만 하며 살았다. 그러니 승한의 얼굴이 가장 덜 팔렸을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화월루에 혼자 남느니 승한과 함께 가는 편이 더 안심되긴 했다.

“그럼 결정된 걸로 알겠습니다.”

결국 설전은 승한의 완승으로 끝났다.

“하면 ‘승랑’이 감숙의 선일루에서 사천에 흘러들어 오게 된 경위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스승님만 믿지요.”

제 뜻대로 돼서 기분이 좋은지 승한은 살랑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걸음걸이조차 무인이라기보다는 무용수처럼 가볍게 변모한 상태였다.

유운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심란함이 흘러넘치는 통에 표정 관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 유운의 기색을 눈치챈 건지 승한이 팔을 뻗어 유운의 몸을 휘감았다.

“은공…….”

“말부터 편히 하셔요. 사형이 너무 딱딱하니 누가 기둥서방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몸을 뒤로 빼려는 순간에 절묘하게 맞춰 승한이 안마하듯 어깨를 주물렀다.

“승랑이라고 불러 보세요.”

귓가에 승한의 음성이 너무 가까웠다. 아주 약간의 틈만 남긴 채, 승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서.”

몹쓸 사술에 조종이라도 당하는 심정으로 유운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승……랑.”

거의 독을 받아 삼키는 이처럼 괴로운 얼굴이었으나 승한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잘하셨습니다. 좀 더 애틋하거나 질척하면 좋겠지만 사형이 부끄럼을 많이 타시니 어쩔 수 없지요.”

유운은 기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곳에서는 더 살갑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곰살맞게 구는 승한을 보고 있자니 막막했다. 사제 같은 인간이 정의하는 ‘살갑다.’가 어느 정도 수준일까?

‘막막하군.’

구색 정도는 맞춰야 할 터다.

“표정이 왜 그리 무시무시하십니까?”

“……긴장해서.”

“분명 괜찮을 겁니다.”

승한이 호언장담했다. 유운은 그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일이 잘될 거라고 낙관해서라기보다는, 곤란한 상황에 봉착하더라도 승한이 어떻게든 해결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신뢰라기엔 좀 삐뚤어진 구석이 있었으나, 유운은 진심으로 승한의 능력을 믿었다. 그는 멀쩡한 상황도 몇 바퀴나 꼬아 놓는 재주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재앙을 선사하는 사제의 전적을 떠올리니 마음의 짐이 자취를 감췄다.

“저희는 완양루로 갑니다. 비취소향주가 유명하고 숙수들이 음식을 잘합니다. 닭을 사용한 요리가 장기라는군요. 화월루만큼은 아니어도 대사형 입맛에 맞을 겁니다.”

잠입 임무를 수행하는 게 아니라 무슨 식도락이라도 가는 듯 천연덕스러운 투였다.

“가장 유명한 기녀는 취선이라 하는데 어차피 사형은 그녀를 만날 일이 없을 것이고……. 효량이라는 젊은 기남도 제법 인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승한은 그리 말하며 샐샐 웃었다. 완양루에서 어차피 자기가 다 이겨 먹을 텐데 별로 중요치 않다는 태도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없는데, 지금의 유운은 승한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그의 태평함이 탐났고 다른 사람일랑 코끝으로도 의식하지 않는 오만함이 질투 났다.

유운도 흑천의 대공자답게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녔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남들을 신경을 쓰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겉으로 내보이는 것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그저, 남들이 자신을 가엾게 여기지 않는 것을 원했던 것 같다. 강오가 들어온 후로는 사부님의 정을 막내 사제에게 빼앗긴 질투심이 드러나지 않기를 원했다. 그 열패감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상상하며 밤잠을 설치다가 종래에는 자신을 구해 준 진랑을 원망하기도 했다. 온통 마음에 차지 않는 것투성이라 인상을 쓰는 날이 늘어갔다. 수하들은 멍청하고 어떻게든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해 보이려 떠안은 업무는 과중했는데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야만 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면경 속에 비춰본 스스로의 모습은 결점투성이였다.

장점이라곤 한 터럭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신경질적인 사내.

“또 제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없습니까?”

“그곳에서는 저를 예뻐해 주셔야 합니다.”

승한이 눈을 반짝였다. 놀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기대하는 것인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알겠습니다.”

“말도 지금보다 편히 하셔야 하지만, 그건 천천히 맞춰보지요.”

그는 처음 나들이를 가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분명 즐거울 겁니다.”

네 말이 옳다고 해야 하는데 유운의 입술은 하염없이 미적거렸다.

“……예.”

그 열없는 답에도 승한은 어찌나 환히 웃는지, 유운은 가슴에 성에가 맺히는 것만 같아 시선을 돌려버렸다.

***

완양루주는 정신없이 다리를 떨었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던 취선이 눈을 흘겼다.

“정신없습니다. 루주님.”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니? 무려 승랑이다. 감숙제일루로 자리 잡은 선일루에서 채 달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환상적인 춤을 선보여 놓고 홀연히 사라진 그 기남 말이다!”

“사기꾼이면 어쩌지?”

“선일루에서 일했다는 사람이 그 사람 맞는다고 확인까지 해 줬잖아요.”

취선은 심드렁했다. 감숙에서 이름 좀 날린 기남이든 무산선녀든 완양루 매출에 도움이 될 일손이라면 환영하면 그만이다.

“정신 사나워요. 왜 이렇게 진정을 못 하실까.”

“이번에야말로 화월루주 고 얄미운 계집애의 콧대를 눌러줄 수 있지 않겠니?”

완양루주가 중얼거렸다. 취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 혼자 왕교월에게 경쟁심과 동경 모두를 품고 있는 루주는 좀 집착이 강했다. 교월이 제자를 잃고 화월루를 뛰쳐나왔을 때 완양루로 오라며 손을 내밀기도 했었으나 거절당했다. 그 뒤 영영 사천을 떠나버릴 것처럼 굴었던 교월이 다시 돌아와 화월루의 주인이 되자 앙심을 품었다.

앙심이라 봐야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완양루가 제 품격에 맞지 않아 거절한 거라며 씨근덕거리면서 주변을 닦달할 뿐이다.

화월루에 드나들던 손님이 완양루로 오거나 하는 날이면 잔뜩 으스대며 침모와 숙수 같은 일꾼의 월봉을 올려 주기도 하니 마냥 단점이라고만 하긴 어려웠다.

‘귀여우시긴.’

하긴, 왕교월 그 여자는 이 바닥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형의 인간이었다. 돌로 만든 조각상처럼 시종일관 덤덤하지만, 금에 손을 얹으면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다. 취선조차도 교월이 타는 금에 춤을 한번 춰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타인으로부터 동경과 선망을 끌어들이고 이를 완벽하게 충족해 주어 더 목마르게 만든다. 비단 금뿐이 아니라 가무에도 능했으며 두루 인망이 높다.

취선은 완양루주의 질투심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건 기루를 더 키우고자 하는 항상심과도 맞닿아 있기에 헛짓거리를 하지 않는 이상 막아설 생각은 없었다.

“승랑입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기다리던 이가 당도했다.

심부름꾼 아이가 문을 열자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안으로 걸음을 디딘 것은 놀라우리만치 화려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번쩍번쩍한 비단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정교한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친 것도 아닌데 보는 이의 시선을 흡입하는 매력이 있었다.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는 분명 춤을 오래 익힌 이의 것이었으나 구름 위를 걷는 듯 조용하기만 하니 이게 선남인지 암살자인지 헷갈린다.

그 간극이 공연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르르 웃으니 설렘이라 착각하게 된다.

‘이거, 물건이다.’

취선은 혀를 내둘렀다. 온갖 사람을 다 만나본 그녀의 심장이 다 덜그럭거렸다. 절대 평범한 이는 아니다.

서둘러 루주 쪽을 보니 그녀는 완전히 홀린 얼굴이었다.

“어서 여기. 여기 앉으시지요.”

황급히 자리를 내주고 손수 차까지 따라주는 걸 보니 사천제일루라는 명성과 그를 뒤따라올 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모양이다.

승랑은 완양루주의 시중을 당연하다는 듯 받으며 자리에 걸터앉았다.

“계약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배시시 웃고 있긴 했으나 영 만만해 보이는 낯은 아니었다. 취선은 승랑이 완양루주를 후려쳐 지나치게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끌고 갈 때 살짝살짝 개입하며 균형을 잡아주었다.

‘한편…….’

어느 정도 계약이 마무리될 즈음이라서인가, 승랑의 뒤에 고요히 시립하고 선 두 번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태 의식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다.

찬찬히 살피니 존재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보다 앞에 나선 승랑을 방패처럼 두르고 있어 눈에 띄지 않았던 거다. 태산 뒤의 소나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호위하듯 승랑의 뒤에 서 있긴 하지만 그를 보호하려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다. 낭인 특유의 거친 분위기도 없고 제법 뻣뻣하게 서 있는 모습이 기둥서방이라기보다는 어딘가의 고관대작 나리 같다.

심드렁했던 취선의 시선이 유운의 하반신 쪽으로 향했다.

‘옷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저 정도면 꽤 실―’

“아이참.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곤란해요. 저도 귀해서 함부로 눈에 담지 못하는데.”

승랑이 슬쩍 끼어들었다. 방긋방긋 웃고 있긴 했지만 눈 간수하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취선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순순히 물러났다.

“흔치 않은 동행이기에 좀 쳐다봤습니다. 호위라……. 검보다 붓이 어울리는 손인데요.”

“역시 그렇지요? 운 가가는 다른 일자무식 낭인들과 달리 글을 안답니다. 이 승랑에게 시도 써 주시는데 어찌나…….”

“아무리 자랑해도 탐을 내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셔요.”

취선이 고혹적으로 웃었다.

“이 취선, 절조는 없지만 의리는 있답니다. 한 지붕 나눠 쓸 동무의 것을 뺏어 먹어야 쓰나요.”

일부러 기둥서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내뱉으니 사내의 귀가 조금 붉어지는 게 보였다. 기남과 함께 다니면 이 정도 모욕이야 숱하게 들었을 텐데, 생각보다 인내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 일개 낭인 따위가 아닌 건지.

‘이거 원. 복잡한 인간들과 엮인 건가.’

취선은 속이야 어떻든, 방긋방긋 웃으며 생각했다. 자기가 쳐내려 해도 루주가 기를 쓰고 반대할 테니 일이 커지지 않게 조금씩 들여다봐야겠지 싶었다.

“아, 저희 애 중에 효량이라는 기남이 있는데 걔는 적당히 피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미남이나 미녀라면 사족을 못 써서요.”

“절조도 없고 의리도 없나 보네요.”

승랑이 까르륵 웃으며 답했다. 눈은 전혀 안 웃고 있었지만…….

취선은 효량을 따로 불러서 경고를 건네 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리 아랫도리 헤픈 녀석이라지만 그런 놈이라도 동생 삼았으니 챙겨 줄 수밖에.

“무어. 승랑은 저와 우애를 나누면 되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양 깔깔 웃으며 취선은 안내역을 자처했다. 승랑에게 배정된 방에 도착할 즈음에는 아우 누님하고 호칭까지 정리해 버렸다.

“방이 좋긴 좋네. 루주님이 아우가 오는 걸 엄청나게 기대하더니, 지금 남은 곳 중 가장 큰 방이야. 아침이면 분주한 저잣거리 쪽을 본건물이 막아주니까 소음도 덜할 거야.”

“누님이 그렇게 말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유운은 사근사근하게 구는 승한을 기가 질렸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사제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다는 걸 모르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완양루에서 손꼽는 기녀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서로 얼굴에 금칠해 주더니 이젠 우애의 표식이라며 장신구도 교환했다.

승한은 교월에게서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옥팔찌가 어머님의 유품이라는 거짓말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해치웠다. 취선은 누가 봐도 새것이 분명한 팔찌를 소중히 여기겠다면서 본인은 머리에 꽂고 있던 산호 비녀를 선물했다.

“젊은 시절 번 돈으로 기적에서 이름 빼려고 한 날이었는데,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어. 어떻게든 병을 치료해 보려고 빚을 지게 되었는데 그거 다 갚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더라.”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치고는 참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때 루주님이 선물해 주신 비녀야. 아우님에게 줄게. 소중히 간직해 줘.”

초면에 내밀한 속사정을 털어놓는 것이 마냥 완양루주의 인성을 칭찬하기 위해서일 리는 없었다.

“좋은 분이야. 아우가 완양루에서 잘 지낼 수 있게 돌봐주실 거야. 루주님도, 나도.”

대화를 마무리하듯 미소 지은 취선이 방 밖으로 나갔다. 유운은 승한의 뒤에서 혀를 찼다.

“눈치가 빠른 여자군요. 우리가 여기에 어떤 목적 때문에 온 걸 눈치챈 거 같아요.”

“으음. 완벽하게 가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너무 재기가 넘치고 빼어난 인재라 수상했나 봅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승한의 자화자찬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완양루주는 건드리면 안 되겠군요. 손때가 탈 정도로 오래 보관해 온 비녀를 은공에게 넘긴 것만 봐도…….”

유운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소중한 물건이라면 이걸 반으로 뚝 부러트리면 슬픈 건 취선 아닙니까?”

승한은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호기심조차 없었다.

“완양루주가 비호하는 기남과 갈등을 빚을 명분은 되겠지요. 그렇게 소중한 물건을 선뜻 건네줄 정도로 잘해 보려고 했다는 증명이기도 하고요.”

남 비위 맞출 일이 없으니 붙임성도 별로고 대단한 사교술도 모르지만 치사한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인망 싸움으로 가면 저희가 쫓겨날 겁니다. 저쪽이 완양루에 오래 뿌리를 내리고 산 거목이라면 이쪽은 스쳐 지나가는 들꽃 아닙니까.”

잠깐 접했으나 취선이 마냥 영악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물건을 담보로 내걸어 완양루주를 지키기 위한 방책을 세웠을 뿐이다.

그런 절박함을 설명해 봐야 사제는 이해하지 못하리라. 하여 유운은 명분 싸움을 입에 담는 것으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볼일만 끝나면 저희는 조용히 꺼질 테니 괜찮을 겁니다.”

승한은 산호 비녀를 허공에 휙 던졌다가 가볍게 받아내며 말했다. 취선에게는 한없이 무거웠을 비녀가 승한의 손에서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유운은 그게 승한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감각임을 이제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예전처럼 그를 훈계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닌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승한의 보호를 받는 이상 그에게 불만이나 우려를 토해내긴 어렵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아닌 타인의 역성을 들면서까지 사제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속이 퍽 갑갑해지는 것을 느끼며 유운은 침상 쪽을 흘깃 쳐다봤다.

“하나뿐이군요.”

심지어 화월루에서 쓰던 침상보다 좁다. 루주의 손님이었을 때와 고용인일 때의 처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대사형에게 바짝 매달려 자야겠습니다.”

승한이 웃으며 숨 쉬듯 교태를 부리자 유운은 어깨를 바짝 긴장시켰다.

“매번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시니 계속 장난을 치고 싶습니다.”

“제가 의지할 곳이 은공밖에 없는데 자꾸 심술을 부리시면 곤란합니다.”

눈을 내리깔며 하는 말에 승한이 흡족한 얼굴로 지적했다.

“말 놓으셔야지요.”

“……자꾸 심술을 부리면 곤란하다.”

솔직히 이런 말투가 더 익숙하긴 했다. 순간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현실의 경계를 잊게 되는 게 문제일 뿐이다.

“이름도 불러 주시고요.”

“……승랑.”

그나마 가짜 이름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니 승한이 히죽히죽 웃는 게 보였다.

“왜 그러십니, 왜 그러지?”

무심코 존대를 쓰려다가 황급히 말을 바꾸자 승한이 답했다.

“하대를 듣는 게 오랜만이라서요.”

“은인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으냐.”

유운이 일부러 은인이라는 말을 강조하자 승한이 혀를 찼다.

“저는 대사형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데 왜 이렇게 조심스러우실까…… 하고 얼마나 고민하는지 모릅니다.”

“기억이 없어 미안하구나.”

찔리라고 한 소리였으나 승한은 유운의 예상보다 뻔뻔했다.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대뜸 머리를 들이대며 승한이 눈을 빛냈다.

“……예?”

“항상 해 주셨잖아요.”

승한이 다부지게 주장하고 나섰다. 예전에 승한의 어깨를 두드려 본 적은 있어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은 적은 없었던 유운은 잠시 망설였다.

사부님이 승한의 머리카락을 헤집어놓는 걸 보긴 했다. 하지만 이건…….

“어서요. 기다리다가 목이 빠질 것 같습니다.”

유운은 승한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에 사락사락 스치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부드러웠고……. 또 이상했다.

예전에 이렇게 친밀한 접촉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모르겠어.’

“이제 됐습니까?”

유운은 손을 천천히 거둔 뒤 물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승한은 여느 때보다도 잘나 보였다.

픽 웃은 사내가 답했다.

“좀 더 거칠게 취급해 주셨으면 했지만……. 이렇게 조심스러운 것도 나쁘지 않군요.”

머리를 쓰다듬어달라고 말해 놓고 머리카락 뽑힐 각오를 하는 인간은 승한뿐일 거다.

애써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는 말을 꾹꾹 눌러 담은 유운이 말했다.

“머리를 망쳐놓으면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자신이 없어서…….”

괜히 말꼬리를 흐리니 승한이 답했다.

“그런 걸 왜 대사형이 걱정하십니까? 저는 엉망이어도 잘생겼습니다.”

“뻔뻔한―”

유운이 뇌까리자 승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되는 겁니까?”

승한은 그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그만 웃어버렸다.

“하, 하하, 하하하!”

돌연 희소하는 승한의 모습에 유운은 몸을 슬금슬금 뒤로 뺐다. 그러나 승한이 그의 어깨에 턱을 괴는 것이 더 빨랐다.

“네. 그렇게 하면 됩니다.”

두 팔로 몸을 끌어안으며 그가 소곤거렸다.

“정말 잘하시는데요? 진심 같아.”

늘어뜨린 유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덧붙이는 말이 의미심장했다.

“나중에 춤을 추러 가면 대사형이 가장 크게 환호해 주셔야 합니다.”

“예. 아니, 그래. 그러마.”

은공 은공하고 따라다녔더니 그새 말을 높이는 게 입에 붙어버렸다. 승한은 실수를 연발하는 유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더니 휙 씻으러 들어가 버렸다.

저녁에는 바로 승랑을 선보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사천의 내로라하는 명사며 호사가들이 자리를 채웠다. 손님이 너무 많아 기루 밖으로 밀려날 지경이었다.

완양루주는 함지박처럼 벌어진 입을 숨기지 못한 채 자리를 지켰다.

“세상에. 저걸 봐. 홍 대인이 와 계셔. 윤 부인도! 면사로 얼굴 가린 저 소저는 설마 성주님의 금지옥엽인가?”

가슴이 떨린다면서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는 루주의 어깨를 꽉 눌러 자리에 앉히는 건 취선이었다.

“예예. 오늘 승랑이 저분들을 다 만족시키면 또 왕림하시겠지요. 정체는 그때 살살 알아봐도 늦지 않으니 진정하셔요. 사천제일루에 견줄 만한 유일한 기루인 완양루의 주인다운 품격을 보이셔야지요.”

유운은 무대 뒤쪽에서 승한의 준비를 돕다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웃을 뻔했다. 만담이 따로 없었다.

“행운을 빌어 주세요.”

승한이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는 기이한 형태의 곡도를 들고 있었다. 살짝살짝 움직일 때마다 손목의 팔찌와 연결된 사슬이 검날에 부딪히며 자르랑자르랑 하는 기이한 울림을 냈다.

망설이던 유운은 주변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닿을 듯 말 듯, 승한의 손목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어서 물러나려는데 승한이 돌연 손목을 들어 올려 유운의 입술을 쟁취했다.

정말로 닿아 버렸다는 생각에 얼어붙으니 승한이 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아이참. 가가께서 너무 열정적이라 이 승랑, 벌써 다리가 떨리는군요.”

여 들으라는 듯 간드러진 음성으로 수줍은 척 내뱉는 말에 어질어질해졌다. 입술의 순결을 논하기엔 그보다 더한 짓도 저지르긴 했으나 이건 정신 공격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사이 몸을 돌린 승한은 사뿐사뿐 무대 위로 올라갔다. 분명 그는 움직이고 있는데 사슬이 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서 머리가 아찔했다.

자신이 흑천을 떠난 사이에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라도 한 걸까?

호승심을 느껴봤자 유운은 승한과 일 합도 겨루지 못할 상태였다.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녕하세요.”

때마침 곱게 생긴 청년이 다가왔다. 몸에 걸친 옷이며 일꾼들이 슬슬 물러나는 태도를 보아하니 완양루 제일의 취선에게 버금간다는 바로 그 기남인 눈치다.

“효량입니다.”

싹싹한 투로 말하는 사내는 매사 심드렁해 보였던 취선보다 활달하고 애교스러웠다.

“승랑이라는 신입이 데려온 호위무사라지요?”

투쟁심을 전혀 숨기지 않는 이글이글한 눈빛만 봐도 제법 어린 태가 났다.

“참으로 잘생기셨습니다.”

슬쩍 팔에 손을 얹으며 몸을 붙여오는 모습에서 교태가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손이 닿기도 전에 피했을 텐데.’

유운은 슬쩍 몸을 뒤로 빼며 답했다.

“반갑습니다.”

“아니, 그게 단가요? 이름이라든가, 출신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 알려 주시나요?”

“낭인의 과거를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애당초 유운은 난생처음 보는 이가 조른다고 하여 불쑥 답할 정도로 녹록한 사내가 아니었다.

“제가 만난 이들은 다들 얼마나 험난한 인생을 살았는지 자랑하기 바쁘던데.”

“그치들은 위로가 필요했었나 보지요.”

굴곡 많고 곡절 많은 삶을 떠들어서 무얼 한단 말인가. 내심 원하는 이해보다도 값싼 동정이나 주워 담게 될 텐데.

“하지―”

“쉿. 춤이 시작됩니다.”

유운은 어디 해 보라는 듯, 기억을 잃은 서생답지 않은 시선으로 무대 위의 승한을 바라봤다.

한쪽 팔을 들어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들어 올린 날에 반사된 빛이 보는 이의 눈을 찌른다.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무대 위의 사내가 자아내는 첨예한 긴장감 때문이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상대를 집어삼킬 것 같기도 한 그 모호함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승한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순간, 악공이 선율을 자아냈다.

손끝에서 떨리는 섬세한 현의 울음에 승한이 응답하듯 발을 내디뎠다. 일순간 휙 펼쳐진 소매 끝으로 이어지는 선이 유려하게 허공을 그어내며 검무가 시작되었다.

그는 제 몸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아는 사람답게 시원시원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검은 승한의 팔의 연장선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곡도를 던졌다가 받아내는 모습이 광대라기보다는 마지막 결전을 앞에 둔 검객처럼 보였다. 그는 가상의 적을 베어 넘기면서도 우아함을 잊지 않았다.

좁은 무대를 얼마나 영리하게 써먹는지, 승한은 몸이 뒤로 넘어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까딱하지 않았다.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은 외려 시위에 걸린 활처럼 팽팽하고 탄력적이다. 동작이 커질 때면 벌어지는 옷깃 사이로 은근히 드러나는 살갗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마저도 노린 기색이 역력하여 유운은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승한이 가볍게 도약할 때면 그가 이대로 승천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이들이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마저 들렸다.

소음이 되기 쉬운 사슬의 잘랑거림마저 음악에 절묘하게 녹아들었다. 어떻게 저 둘 모두를 신경 쓰면서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저 춤사위에 너무 압도된 나머지 이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새 유운은 숨 쉬는 것마저도 잊은 채였다.

처음엔 지나치게 무림인처럼 추지 않을지 염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운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승한의 춤은 천하일절이었다.

‘……사부님이 취하면 가끔 추던 검무를 잘도 베껴냈군.’

온통 환호하는 이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유운만은 냉정하게 승한의 몸놀림을 분석하고 있었다.

진랑의 춤이 한결 가볍고 예술적이라면 승한의 검무는 보다 매섭고 날카롭다. 다만 살기를 싹 걷어내니 살초 하나하나가 눈부시게 화려한 몸짓으로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상대의 이목을 속이고 목숨을 취하는 환검의 정수가 저 춤사위에 녹아들어 있다고 하면 이 자리의 누가 믿을까.

“연주도 들려주게.”

투실투실한 뺨을 한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별을 지나치게 가까이에서 본 사람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처럼 황홀한 추는 이의 탄금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궁금하군.”

“저런……. 후회하실 텐데요.”

승한이 교교하게 웃었다. 유운은 저게 말 그대로의 사실임을 잘 알았다.

“그거야 내 몫이지.”

“좋습니다. 고귀하신 분께서 청하시는 걸 거절하는 것도 예인의 법도가 아니지요.”

그리 말한 승한은 연주를 하는 동안 이미 ‘승랑’의 포로가 된 듯한 악공에게 다가섰다. 악공은 거의 불에 덴 사람처럼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쾌히 빌려주어 고맙네.”

‘말려야 하지 않나.’

유운이 심각하게 고민을 할 때였다.

승한이 퉁, 하고 현을 건드렸다. 환호와 기대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투명하면서도 묵직하게 퍼지는 음은 삽시간에 관중을 집중하게 했다.

저런 건 타고나야 한다.

허공을 휘저어 공기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만들던 소매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승한의 표정마저 한없이 진지한 까닭에 유운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사기꾼 같으니라고.’

이윽고, 모두가 기다린 연주가 기루 안을 채웠다. 유운이 예상했듯이 그의 선율이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시작뿐이었다.

소음도 그런 소음이 없었다. 작심이라도 한 듯 음과 음을 겨루게 하는 승한의 짓궂음에 유운은 이것도 익숙해지는 날이 오는구나 싶어서 기분이 묘해졌다.

거의 대경실색한 낯으로 승한의 무대를 지켜보던 효량이 떨리는 음성으로 유운에게 물었다.

“귀가……. 안 아프십니까?”

“저것도 익숙해집니다.”

젊은 기남이 던진 질문에 유운은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자신의 과거를 모를 사람에게까지 벌벌 떨면서 서생 노릇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심지어 승한은 자신이 지금 기둥서방을 연기 중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아무리 춤이 빼어나다지만 연주가 이 정도로 참혹하다니. 손님들이 다 나가떨어지겠습니다. 다들 저의 연주에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효량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글쎄요…….”

유운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쓱 승한을 바라봤다. 모든 걱정을 살라 먹는 불꽃이 거기에 있었다.

“정말 귀하신 연주를 들은 겁니다. 춤을 출 때 칼을 드는 손이 퉁퉁 부을까 봐 금은 잘 잡지도 않거든요.”

듣는 이의 귀를 반쯤 고문해 놓고도 승한의 태도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각에 효량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긴장할 필요가 없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허허허! 승랑의 춤이 천하일절이라더니 탄금 솜씨마저 이 세상의 것이 아니군!”

“어디 가서 내가 이런 선율을 들었노라 말할 수도 없겠어.”

이미 승한의 춤사위에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손님들은 엉망진창인 연주에도 껄껄 웃었다. 술이 적잖이 들어간 덕도 있지만 저토록 황홀하면서도 박력이 넘치는 검무를 보여준 승랑이 금을 잘 못 탄다는 약점을 지닌 것이 매력으로 느껴졌으리라.

자주 연주하지 않는다는 말에 특별한 것을 보았다는 기쁨도 함께겠지.

“그가 얼마나 교활한 장사꾼인지 알면 당신은 놀랄 겁니다.”

유운의 말에 효량은 애써 넋 나간 표정을 수습했다.

“정인에 대한 평이 박하시군요…….”

“그런 게 아니―”

“가가!”

승한은 상기된 얼굴로 날듯이 다가와 유운을 끌어안았다.

“저 오늘 어땠나요? 마음에 드셨지요? 가가를 생각하면서 췄답니다.”

“무대가 하늘인 양 날아다니더구나.”

잘하는 걸 잘한다고 말하는 것일 뿐인데, 승한과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어 고개를 쓱 돌렸다.

금 타는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지만 지금의 무대를 보고 혹평을 쏟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면 더는 제가 부끄럽지 않으시지요?”

“뭐?”

“저번에…… 승랑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실망했다고 하셨잖아요. 사천에서야말로 만회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약조한 바를 지킬 수 있어서 기뻐요.”

승한은 지금 유운을 인간 말종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게 다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유운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승한을 바라봤다.

승한의 말에 내포된 이야기를 상상했을 효량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인사조차 하지 않고 꽁무니를 빼는 모습이 어이가 없긴 했지만 굳이 붙잡진 않았다.

잠시만 머물렀다 떠날 상황에 오해받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대사형은 참 냉정하셔요.]

전음에 유운이 몸을 움찔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곱게 휘어지는 눈이 당신은 기억이 있든 없든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승한이 자신을 비난하려 꺼낸 말이라기보다는 순수한 감상이었음에도 어쩐지 질책처럼 느껴졌다.

유운은 굳어가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이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걸 보니 네가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구나.”

여 들으라는 듯 쌀쌀맞게 말하자 승한이 그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건방지게 굴었으니 혼내주실 거지요?”

사제가 왜 이렇게 혼나는 일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유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렇게 대단한 기남이 왜 시원찮아 보이는 잡졸에게 매달리는가?”

돌연 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나와 함께 가는 게 어때? 이렇게 엄청난 무대를 보여준 이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 주지.”

거들먹거리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이는 딱히 정의감 때문에 나선 것 같지도 않았다. 승한의 몸을 찬찬히 훑는 시선이 어찌나 끈적거리는지, 꿀 한 통에 산 채로 빠뜨려 질식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건 곤란하겠네요.”

승랑이 새침하게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우리 상공의 허리 놀림이 아주 예술이라.”

유운은 그 ‘허리 놀림’에서 무언가를 연상하고 얼굴을 확 붉혔다.

“들으셨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 말한 유운은 승한을 거의 잡아끌다시피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들리는 웅성거림이 못 견디게 부끄러웠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승한을 벽에 밀어붙인 유운이 매섭게 물었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부끄러울 게 뭐 있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누가 당신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그러면 어쩐단 말입니까?”

유운이 더듬더듬 말해 보려다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가슴만 퍽퍽 치자 승한이 픽 웃었다.

“왜요. 사내에게 깔려서 앙앙댄다고 말하는 거 가지고 좆이 뚝 떨어지기라도 한답니까?”

경박하게 낄낄거리는 승한을 보며 유운은 할 말을 잃었다.

“뭐라 지껄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이게 치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디에서 누가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말 놓으셔야지요.”

다정다감하게 뺨을 쓸어오는 손길에 유운은 몸서리쳤다. 승한은 그저 이 모든 게 가벼운 모양이다.

내키는 대로 파문당한 전 대사형을 돕고, 내키는 대로 기남 행세를 하며 허리를 흔드네 마네…….

어쩌면 그의 행동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를 그리워했던 게 잘못인 걸까.

“……알겠다. 미안하네.”

“대사형이 저에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든 원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유운은 답하지 않은 채 그저 웃었다. 마음대로 당당할 수 있었던 시절은 제 손으로 놓아버렸다. 승한이 같은 눈높이에 있어도 좋다며 자신을 추어올려도, 유운은 계속해서 발 디딤판이 되기를 자처한 사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그러니 승한의 소원은 결국 강요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그가 알아야 할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

기억이 없다는 이를 붙들고 예전에 쓰던 말투를 강요하는 승한이 사실상 인형 놀이를 하고 있다는 걸 유운은 점차 알아채고 있었다. 그는 유운에게 대사형이라는 배역을 되돌려주는 일에 집착하고 있었다.

가장 앞장서서 자신의 배신을 질타하고 사부님의 애정을 일러 주었으면서. 어찌 부끄러움을 모르던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걸까.

유운은 승한을 알아갈수록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자신을 맹렬하게 비난했다면 조금 더 납득이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승한이 어렵다. 수십 년을 알아 왔음에도 이제야 마주한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마음 가는 대로 해야지.”

유운은 웃었다. 조금은 지친 듯 홀가분한 표정에 승한은 의아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주에게 간식거리나 좀 얻어오겠습니다. 그동안 살이 많이 내리셔서 걱정이에요.”

재잘재잘 떠드는 기색이 태평했다.

“그리고 장기투숙객이 어디에 있는지도 슬쩍 알아보고.”

“내가 도울 건 없나?”

“물론 있지요.”

승한이 눈을 빛냈다.

“저를 어여뻐해 주시면 됩니다.”

“사람을 놀리기는.”

“진심입니다.”

왜 이런 거에 집착하나, 하고 생각하다가도 유운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보마.”

고작 그 한마디에 승한은 세상을 다 가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웃었다.

“오늘도 실례하겠습니다.”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니 승한은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유운은 옷자락 사이로 파고드는 손길에 살짝 움찔하면서도 옷을 벗기는 게 편하게끔 팔을 벌려 주었다.

옷깃을 헤집고 들어온 손이 아랫배에서 가슴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어색한 곳을 자극당하는 통에 허리를 뒤트는데 유두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린 사내가 속삭였다.

“사실 여길 만지는 걸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내가?”

유운은 기함했다. 이 무슨 거짓부렁이란 말인가?

“안 된다는데도 빨아달라 하셔서 제가 어찌나 곤란했는지 모릅니다.”

가능하다면 저 혀를 반으로 쪼개고 싶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않나?”

질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낯에 승한이 웃었다.

“직접 만져 보셨습니까?”

“뭐라고?”

“만져 보지도 않고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 어떻게 아십니까?”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인지 유운의 몸 위에 올라탄 승한이 무거웠다.

“읏!”

쾌감이라기엔 놀라움과 고통 사이에 놓인 감각이 유운을 엄습했다.

동시에 탄탄하게 올라붙은 승한의 엉덩이가 유운의 하반신을 압박해 왔다. 은근히 허리를 튕기듯 움직이며 완급을 조절하는 사제 때문에 유운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이 감각이 두려웠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 것 같았다.

“가슴이 그렇게 좋으면 차라리 여인을 찾아가란 말이다.”

유운이 애써 어깨를 밀치자 승한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냈다.

“제 입맛이 사형에 비하면 싸구려긴 하지만―”

오롯이 자신만을 담은 검은 눈에서 타들어 가는 인내가 느껴졌다.

“같은 사내에게 여인 입성시키고 헐떡거리는 취향 같은 건 없습니다.”

낮게 속삭이는 음성이 오싹했다.

‘그럼 나는? 나는 화려하게 치장한 사내 밑에 깔려 헐떡거리는 취향이 있냔 말이다?’

유운은 차마 입 밖으로 뱉어낼 수 없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가슴만 쳤다.

“그러니까 엉덩이 좀 팍팍 주물러 보세요. 자꾸 새신랑처럼 수줍어하면 사형의 대단한 방중술을 궁금해하는 인간이 당신을 뼈째 발라먹으러 올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전에 저부터 상대해야겠지만, 하고 붉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싹 훑는 승한은 실로 발칙하기 그지없었다.

강오가 그 타고난 염태로 담백하기 그지없는 소림승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승한은 제가 가진 것을 백분 활용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이런 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휘말리고 만 유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차마 승한의 엉덩이를 만질 엄두는 내지 못했으나 끌어안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린 사내가 픽 웃었다.

“그렇게 조금씩 더 익숙해지세요.”

“무, 무엇 하러…….”

“그래야 제가 뼈째 삼켜도 가만히 계실 거 아닙니까.”

“미친, 소리를…….”

승한에게 반말을 하게 된 이후 너무 편해진 나머지 자꾸 거친 표현이 툭툭 흘러나오곤 했다. 그의 사제는 불쾌함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좋다는 듯 흐물흐물 웃었다.

“다리를 벌려 주세요. 금방 끝낼 테니까…….”

유운은 천천히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이제 이 짓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승한의 체온이 몸에 새겨질까 두려울 만큼.

***

일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있다더니, 승한은 완양루에 잘도 섞여 들어갔다.

밤의 그는 온갖 사람들이 환호하는 절벽의 꽃이었고 낮에는 천상 게으름뱅이가 되어 유운의 수발을 받았다.

“이런 게 왜 필요하지?”

유운은 낙타유에서 걷어낸 기름으로 만들었다는 연고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승랑의 추종자를 자처한 어느 상인이 서역에 다녀올 때 가져온 선물이라 하였다.

“춤은 손발을 쓰는 일이 많으니 피부가 쉽게 거칠어지지 않습니까. 그때 바르면 보들보들해진답니다.”

발라주세요. 하고 손을 내미는 승한은 뻔뻔했다. 유운은 한숨을 삼키며 그의 손을 붙잡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차라리 기름을 바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참기엔 냄새가 영 고약했다.

“대사형이 쓰던 향유 같은 것 말입니까?”

“여긴 완양루입니다.”

승한이 저를 흔들어 놓으려고 슬쩍 던지는 미끼를 가볍게 쳐냈다. 호칭을 지적하는 유운의 딱딱한 말투에 승한은 토라진 아이처럼 입술을 삐쭉거렸다.

“알겠습니다.”

유운은 연고를 대충 발라 주고는 뚜껑을 덮었다. 가져다 버리고 싶다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얼굴에 승한이 키득키득 웃었다.

“향이 정말 별로인 모양입니다.”

“좀……. 고약하구나.”

차마 아니라 하기엔 너무 노골적으로 티를 낸 까닭에 유운은 순순히 진심을 내뱉었다.

“큰일입니다. 손발을 곱게 관리해서 예쁨받으려고 한 건데, 오히려 불쾌감만 느끼신다니.”

낙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승한이 속삭였다.

“다음에는 향유를 가져다 놓겠습니다.”

“쓰다 만 연고는 어쩌려고?”

“누구 줘 버리지요. 효량이라는 기남이 사형을 졸졸 따라다니던데, 그 애한테 줄까요?”

찾는 손님이 많아 쉴 틈 없이 바쁘면서 유운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원래 취선 다음으로 인기가 많던 효량은 승랑의 등장 후 다소 한가해진 편이었다.

문제는 이 기남이 승한이 이토록 잘난 이유가 궁금하다며 유운을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에 있었다.

‘나름대로 장기투숙객에 대해 알아보려 했는데…….’

승한에게만 맡기고 두 손 놓고 있기엔 안심이 되지 않았는데 효량이라는 꼬리가 달리니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면서 왜 선물을 넘겨주지?”

유운의 질문에 승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없는 동안 가가를 즐겁게 해 드리니 그 정도는 해 줘도 괜찮지 않습니까?”

퍽이나.

승한이 그렇게 사려 깊은 선물을 할 리가 없다.

“내가 그 냄새를 싫어하니 효량에게 줘 버리려는 게 아니고?”

“아이참. 다 알면서 왜 승랑의 입만 아프게 또 물어보셨어요?”

효량이 악취나 폴폴 풍기고 다니다가 밀려났으면 하는 속내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완양루 와서 처음 본 사내다. 뾰족이 마음에 드는 구석도 없는데 왜 그리 견제하는 거지?”

“하지만…….”

승한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저보다 어리고 풋풋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 나오든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던 유운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잡초는 싹만 나도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하듯이, 가가에게 관심 보이는 것들은 전부 치워버려야 합니다.”

주먹까지 꽉 쥐는 승한의 얼굴은 더 없는 진심이었다.

유운은 자신이 금화 소저와 혼례를 올렸던 게 승한에게 큰 충격이었나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괜한 데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장기투숙객 정보나 알아 오세요.”

“그치들이 공연도 보러 나오질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접근하기 힘듭니다.”

승한이 투덜거렸다.

“코빼기라도 내비치면 제 매력으로 휘어잡을 자신이 있는데 말입니다…….”

유운은 승한이 습관처럼 검을 차고 다니는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혀를 찼다.

정말 매력으로 휘어잡을지 폭력으로 다져 놓을지는 천지신명이 아니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객잔보다 방값이 비싼 기루에서 이렇게 오래 버틸 거면 난봉꾼 흉내라도 내며 기어 나올 것이지.”

승한이 투덜거렸다. 유운은 그가 수색에 난항을 겪고 있음을 잘 알았다.

‘어디로 몰래 들어가려 해도 승한은 지나치게 눈에 띈다.’

일을 너무 잘해도 문제다. 어딜 가든 승한의 꽁무니에는 그를 선망하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내가 움직이는 건 안 되나?”

“음…….”

승한이 망설였다. 유운의 발목과 목을 번갈아 가면서 주시하는 시선이 칼날처럼 서늘하게 와 닿았다.

“발목을 부러트릴 생각이라면 그 전에 이유를 설명해.”

“들켰습니까?”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봐 놓고, 협박이 아니었다고 할 셈이냐?”

승한이 머쓱하다는 듯 웃었다.

“협박은 아니었습니다.”

실행에 옮길지 말지 고민했을 뿐이다.

“수단을 가리는 법이 없구나.”

둘 사이에 누그러져 있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형은 제가 목을 이렇게 잡아도.”

승한이 본인의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슬쩍 힘을 주는데 어두운 피부 위로 손 모양을 따라 흰 자국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반항하시지 못할 것 아닙니까. 제가 직접 귀하게 모시려고 함께 온 건데 밖으로 내돌려야 어디 체면이 서겠습니까.”

행여라도 위험에 처할 상황에 밀어 넣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자존심을 긁어놓는 발언에 열이 오를 줄 알았는데, 그보단 어색한 느낌이 강했다. 바람 불면 날아갈세라 연약하게 취급당하는 건 정말 삼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전도 없지.”

유운은 느릿하게 속삭였다.

“안 그런가?”

의미심장하게 들리지만, 얼핏 소심함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질문이었다. 승한은 유운을 빤히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침묵이 길어지자 유운이 물었다.

“조금 고민이 돼서요.”

“고민?”

“대사형의 발목도 상하지 않고 안전도 챙길 방법이 있는데 왜 이렇게 돌아가야 하나, 하고.”

그다지 안심이 되는 발언은 아니었다.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다면야 네 말을 따르겠지.”

유운은 순순히 대꾸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방법이라면 네가 이렇게 고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 아니냐.”

“역시 현명하십니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승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새 방도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어찌하려고?”

비로소 안도한 유운이 질문을 던지자 승한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저희 쪽에서 밀고 들어갈 수 없다면 저쪽에서 부르게 만들어야지요.”

그리 말한 승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승랑의 단골 중 한 명이 완양루에 주저앉았다. 고작 며칠 사이 승랑의 춤에 홀린 이들 중 열 명이 더 완양루에 머무르겠노라 말했다.

두서넛 정도는 장기투숙객만 쓸 수 있는 별채를 비집고 들어가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별채에서 공연을 하고 오다니.”

유운은 얼떨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수완 하나는 기막힌 놈이다.

“어때요? 이 승랑이 믿음직하지 않습니까?”

“든든하군.”

유운이 떨떠름한 음성으로나마 동의하자 승한은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양새가 퍽 유치하다만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슬쩍 풀어지는 것도 사실인지라 유운은 애써 감정을 다잡았다.

사제에겐 예전부터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까딱하면 휘말리기 십상인지라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는데, 단둘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경계심이 희석됐다.

“이렇게 그려 보면.”

승한은 종이를 펼치더니 별채의 구조를 그려냈다. 선이 거칠고 지저분하긴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 층과 일 층의 왼쪽 구획에 있는 방을 제 손님들이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흘깃 확인해 봤는데 삼 층도 구조가 비슷하다면 이쪽으로 계단이 나 있을 겁니다.”

유운은 승한이 동그라미를 그린 지점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계단이 하나뿐이다.

“일하는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는 없나?”

보통 기루에서는 손님과 일꾼의 동선이 겹치지 않게끔 구조를 만들어두기 마련이었다. 한데 완양루의 별채는 왜 계단이 하나뿐이란 말인가.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없습니다. 애초에 임시로 만든 건물이었는데 완양루가 예상보다 장사가 잘되면서 손님용으로 활용하게 된 눈치더군요. 그래서 층도 하나 더 올렸고…….”

어떻게 해야 침입할 수 있을지 그려 보듯 승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외벽을 타고 몰래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한가?”

“위치상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럴 거라 예상하긴 했다. 그때, 유운의 눈에 일 층에 찍혀 있는 점이 들어왔다.

“이건 뭐지?”

유운이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자 승한이 아, 하더니 답했다.

“먹이 튄 겁니다.”

“……뭔가 중요한 게 있어서 표시한 줄 알았는데.”

“뭔가 있어서 표시한 건 이런 거지요.”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유운은 흠, 하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가 답했다.

“차이를 모르겠군.”

“제 그림이 그렇게 엉망입니까?”

승한이 짐짓 풀죽은 목소리로 던지는 질문에 유운은 웃음을 삼키며 답했다.

“그래도 연주보다는 나아.”

“너무하십니다.”

팩 고개를 돌리는 승한의 뺨이 부어 있었다.

“제가 왜 그렇게 열심히 연주하는지도 모르시면서.”

유운은 꽁알거리는 사내를 무시한 채 별채의 구조를 꼼꼼히 머릿속에 새겼다.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쓸 날이 올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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