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3)

제7장. 여지

지지부진한 상황의 돌파구는 뜻밖의 인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취선은 정말 별로야.”

효량이 과일 씨를 툭 뱉으며 말했다. 이 젊은 청년은 승한이 늘어져라 자는 오전 시간 동안 완양루를 슬쩍슬쩍 둘러보던 유운을 데려다가 말 상대로 삼곤 했다.

만약 이용 가치가 없다면 적당히 물러났을 테지만 완양루에 대해 잘 알면서 입도 가벼운 효량을 알아두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 유운은 그와의 교류를 끊어내지 않았다.

“엄청 오만하고 도도하다니까.”

“괜찮은 사람 같던데.”

유운은 일부러 취선을 두둔했다. 효량은 취선 이야기만 나오면 쉽게 발끈했고 그만큼 여러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

반 정도는 질투심과 본인의 성취에 관한 것이었으나 남은 반 정도는 제법 쓸모 있는 정보가 흘러들어 오기도 했다.

“배려도 많이 해 주고. 말도 잘 들어주고.”

“그럴 리가!”

아니나 다를까, 효량은 발끈했다.

“요전에 손님하고 속닥거리길래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나누는가 싶어서 물어봤거든. 근데 정색을 하고 얼마나 들었는지 매섭게 질책하는 거 있지.”

그는 승한과는 다른 의미에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편이다. 그 솔직함을 마음에 들어 해서 완양루에서 취선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 모양이었다. 정작 본인은 나이가 어려서 취선의 능숙한 처세를 따라잡지 못하는 걸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니까, 취선이 장기투숙객과 교류가 있다는 거로군.”

과일 그릇을 슬며시 밀어주며 건네는 질문에 효량은 반쯤 과일에 정신이 팔린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투숙객들 말인데, 영 이상해. 기루는 객잔이 아니라 밤이면 시끄럽고 침구야 화려하지만 비싸기도 비싼데 왜 여기에 머무는 걸까? 아무리 봐도 불려갔다는 기남이나 기녀도 없고. 주방으로 술상 봐오라는 주문이 들어온 적도 없다는데. 사실 그 손님들 얼굴 본 사람도 별로 없어.”

자기가 완양루의 터줏대감이라 흘깃 볼 수 있었던 거라며 효량이 어깨를 폈다.

“그럼 외출도 안 하고 지낸다는 건가?”

“아마도?”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운은 그가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듣자 하니 취선의 수완이 대단하군. 별채의 손님들이 그녀하고만 대화를 나눈다니.”

유운은 슬쩍 효량을 떠봤다. 효량이 취선에게 품은 시샘을 자극하면 그가 아는 정보를 끌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루주님이 별채를 믿고 맡기는 게 취선뿐이니 그렇지.”

어린 청년이 툴툴거렸다.

“내게도 별채 일을 맡겨 주시면 좋을 텐데. 루주님의 중요한 손님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취선이 총책임을 맡고 있거든.”

유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취선이 의심스럽긴 했다. 별채를 관리하며 드나들 수 있는 위치의 기녀라면 연락책으로 사용하기 편하다.

동시에 효량이 말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입이 싼 대신 경박한 그가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리가 없다.

“대화 내용은 기억할 수 있나?”

유운의 은근한 질문에 효량이 꿀에 절인 과일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달짝지근한 액체가 비단옷 위로 툭 떨어지기 직전에 그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뭔가 과한 요구를 한 눈치긴 했지. 취선이 계속 곤란하다고, 어렵다고 말했으니까.”

효량은 이내 옷소매를 적신 꿀을 발견하고는 으악!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대충 영견을 던져주니 허겁지겁 닦는 모습이 칠칠맞지 못한 어린아이 같았다.

“이만 일어날 테니 쉬도록.”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유운의 모습에 효량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벌써?”

“승랑이 일어날 때가 되었으니까.”

“흥.”

입술을 삐죽 내민 효량이 돌돌 만 야금을 끌어안은 채 침상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과일즙이 천에 묻는 걸 본 유운은 애써 질색하는 표정을 숨겼다.

승랑의 기둥서방을 데리고 노는 기분을 내려는 것만 봐도 효량은 영 철이 없었다. 취선과는 퍽 다르다.

‘취선이 그쪽과 선이 닿아 있다, 라.’

유운은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적당히 꽃잎을 띄운 물을 가져다가 승한의 침상 옆에 내려다 놓으니 대야가 부딪히는 소리에 승한이 부스스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산호 비녀, 어디에 두었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하품을 거나하게 한 승한이 몸을 일으켰다.

“가가도 참.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온몸을 바쳐 봉사까지 한 이 승랑에게 잘 잤느냐는 말 한마디 없이 다른 여자에게 줄 정표를 찾으시는 건가요?”

잠이 덜 깬 상황에서도 저런 헛소리를 줄줄이 읊는 것도 참 대단한 재능이었다.

“내가 가져온 세안 물에 손끝을 적시며 불평할 줄은 몰랐군.”

제법 자연스럽게 사제의 시중을 들게 된 것만 해도 예전의 유운이었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단호하셔라. 하지만 가가의 그런 모습에 반한 건 이 승랑이니 어쩔 수 없지요.”

다음부터는 세안 물보다 자리끼를 먼저 챙겨 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야 입을 다물 게 아닌가. 산호 비녀의 위치야 손끝으로도 가리킬 수 있을 테고.

“저기 넣어뒀어요.”

유운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승한이 배시시 웃으면서 장신구 보관함을 가리켰다.

나무로 된 목함을 열자 갖은 팔찌며 반지, 목걸이와 비녀 사이에 붉은색 산호가 눈에 띄었다.

보석을 잔뜩 두르는 건 좋아하면서 관리하는 덴 영 관심이 없어 이리저리 엉킨 금 사슬이며 팔찌 따위를 풀어낸 유운은 승한의 머리카락을 둘둘 말더니 그 비녀를 질러 주었다.

“당분간 이러고 다녀.”

“이 승랑에게 붉은색이 잘 어울리기는 하죠.”

으스대는 사제를 한심하게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유운은 입을 열었다.

“취선에게 보여주려는 거다.”

“취선 말입니까?”

승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차피 대사형의 취향도 아닐 어린 것과 놀아나는 거야 못 본 척해 드릴 수 있지만, 취선은 왜 거론하시는지요?”

유운은 한숨을 삼켰다.

일전에 경고까지 했으면서 효량과 어울리는 걸 눈감아주는 이유를 이렇게 알게 될 줄이야.

“오늘 효량이 그러더군요. 취선이 별채에 드나들며 장기투숙객과 교류를 나누고 있다고.”

취선에게 온전한 믿음을 품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단지 철옹성이라 생각했던 별채에 나름 찔러 볼 구석이 생겼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첫 조우 때, 취선은 완양루가 조용하고 평안하기만 하면 수상쩍은 승랑이야 얼마든지 눈감아줄 수 있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 취선과 잘만 협상하면 별채의 손님을 넘겨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효량이 말하길, 별채의 손님들이 취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지 않았던가. 승한과 자신이 그들을 치워주고 떠나면 그녀로서도 앓는 이가 빠지는 기분일 것이다.

“그 새가 시끄럽게 지저귀는 줄로만 알았더니, 드디어 도움이 되는 날이 오는군요.”

승한이 방긋 웃었다. 완양루에 온 후로부터 꾸미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더니 유운이 어설프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옷만 척척 갖춰 입었다.

복잡한 여밈이며 허리끈, 거기에 장신구까지 서로 엉키지 않게 잘도 두른다. 눈가를 붉게 칠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화사함이 더해지는 걸 보며 지난밤을 떠올렸다.

화장을 채 지우지 않은 얼굴로 자기 몸에 무게를 실어 오던 사내는 유운이 전혀 모르는 승한의 모습 중 하나였다.

낯선 만큼 거부감이 덜했고, 그만큼 더 짜릿한 열락을 느꼈다.

‘미친 게지.’

유운은 애써 반지를 끼는 손가락으로부터 시선을 뗐다. 저렇게 손가락마다 금이며 은으로 된 가락지를 끼우면 졸부처럼 보일 법도 한데 승한에게는 잘만 어울렸다.

아마도 화려한 차림새를 압도할 정도의 기백이 있어서가 아닐까.

어느새 박력 있는 미남이 된 승한이 면경 앞에서 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유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잘 어울리지요?”

유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천에서는 거친 옷 비싼 옷 가리지 않고 입어 댔으면서 이렇게 화려하게 꾸미니 그 간극이 어색하면서도 보기엔 좋았다.

그 무뚝뚝한 반응이 뭐 그리 좋은지 승한은 속없는 이처럼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가의 명을 잘 수행하고 오겠어요. 얼쩡거리는 건 자신 있으니 마음 놓고 맡겨 주세요.”

정확하게 그 부분이 안심되지 않는다. 승한을 간판으로 써서 취선을 끌어내야 한다는 부분이. 불필요한 깐죽거림과 의미심장한 도발로 상대의 정신을 너덜너덜하게 만들 것 같지 않은가.

사제의 성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유운은 조바심을 최대한 감춘 채로 승한을 배웅했다.

“그대만 믿지.”

믿을 리가.

신뢰보다는 의심이 쉽다. 유운은 본디 그런 성격이었다.

심지어 측근이라 여겼던 수하는 혈교의 간자로 드러나지 않았던가. 제 발로 원수의 손아귀에 걸어 들어간 사건 후로는 남을 믿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 편이겠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의 확신은 유운에게도 존재했다. 단지 그의 헌신을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모를 뿐이다.

텅 빈 손으로는 승한이 주는 것을 받기만 할 뿐, 갚을 도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빚을 덜 지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저녁이 되기 전, 승한은 희게 질린 취선과 돌아왔다.

“뭘 하면 됩니까?”

여인의 질문에 유운은 부적절한 협박과 가당찮은 억지 중 승한이 무엇을 휘둘렀을지 잠시 가늠하곤 입을 열었다.

“별채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도움을 주셨으면 하는데…… 어렵겠습니까?”

“오로지 호의만을 든 채 완양루에 오신 거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법도를 모르는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저쪽이 채찍을 휘둘렀다면 이쪽이 내밀 건 당근이었다.

“완양루주를 지키고자 하였지요. 저희는 저희가 원하는 정보만 얻는다면 더는 체류하지 않고 물러나 드릴 겁니다. 완양루의 집기도, 완양루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상할 일은 없을 거라 약속드리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삼 층에 머무르는 손님 중 그 누구의 신변도 장담하지 않았다. 취선도 이를 모르진 않을 테지만 완양루의 사람들만 손대지 않는다면 이 정도 타협에는 응할 것이다.

처음부터 루주와 완양루에 대한 애착이 커 보였으니 새삼 배신하거나 달아날 가능성도 낮다. 취선이 철새 같은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그녀는 나무에 가까웠다. 자신이 뿌리내린 땅을 지키며 벗어나지 않는다.

“어디에 당신의 개입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완양루주가 이해 가능한 선에서 조용히 퇴장하지요. 어떻습니까?”

입을 꾹 다문 취선의 낯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리 좋은 소식을 가져올 자들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사천의 기루에서 버티던 이 특유의 통찰력일까?

“하여 무엇이든 도울 테니 어서 용건을 마치고 물러나 줬으면, 하고 생각했지요.”

산호 비녀를 건넨 이유를 곱씹듯 중얼거린 취선이 결심한 눈으로 답했다.

“도와드리지요. 별채에만 들어가면 됩니까?”

“이제 말이 통하는군요.”

유운은 승한에게 눈짓했다. 취선을 놓아준 그가 침상에 털썩 주저앉더니 목침 밑에 숨겨놨던 별채의 구조도를 꺼냈다.

“어떻게 들어갈지부터 이야기해 볼까?”

“암호입니까?”

취선은 이 점과 선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한 얼굴로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별채를 그려 놓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내 경악했다.

“새 종이와 붓을 주셨으면 합니다.”

승한은 자신이 그렇게 그림을 못 그리냐며 울상을 지어 보였으나 취선은 가증스럽기만 한지 그를 외면한 채 직접 별채를 종이에 옮겼다.

훨씬 일목요연하고 보기에도 좋았다. 게다가 취선이 완양루에서 오래 지낸 사람이라 그런지 남들이 모르는 길도 알았다.

“여기에서 여기, 벽 뒤쪽으로 물을 옮기는 통로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물은 부피가 크고 넘치기도 하니까 손님들이 다니는 길로 옮길 수 없어서 만들었지요.”

“장정 두엇은 너끈히 들어가겠군.”

“벽이 얇아서 밖으로 소리가 들릴 수 있으니 아주 살금살금 다녀야 합니다.”

아니면 누가 침입했다는 게 들통날 거라며 취선이 딱딱한 투로 말했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눈치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유운은 효율을 위해 그녀를 짤막하게 안심시킨 뒤 승한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장 움직이는 게 좋겠지?”

“원하신다면.”

자원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니 취선을 잡아 온 김에 빠르게 움직일수록 그들에겐 이득이었다.

새로운 별채의 배치도를 꼼꼼히 확인한 유운은 진입로와 탈출로 모두를 머릿속에 꼼꼼히 새겼다.

“일단 사람이 최대한 빠졌을 때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 취선과 승랑이 별채에서 공연했으면 합니다. 연주해 준다는 핑계로 따라가서 승랑이 잠시 자리를 비울 때 그의 부재를 잘 설명해 주십시오.”

유운은 부탁처럼 말하긴 했으나 사실 그 본질은 명령에 가까웠다. 이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취선은 반쯤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단 삼 층으로 가는 통로에 숨어 저들의 동향을 살피지. 반가운 얼굴이 있을 수도 있고…….”

행여라도 무진을 마주치면 어쩌나 싶어 걱정되긴 했다.

마도제일인이라 불리며 뭇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인 예진랑을 사부로 둔 유운은 자신이 무림명조차 없는 일개 호위무사에게 긴장한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의 유운은 몸이 좀 날렵하고 검 쓰는 법을 알 뿐, 내공을 지닌 무인에게 습격당하면 쉽사리 이길 수 없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승한이 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나저나, 듣기로는 당신이 삼 층의 손님들을 상대했다던데. 혹시 알려줄 만한 이야긴 없나?”

유운은 그저 지나가는 질문인 것처럼 툭 내뱉었다. 그 말에 취선의 낯이 핼쑥해졌다.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군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사천제일루만큼은 아니라지만 완양루 역시 이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기루였다. 그런 곳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취선이라면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텐데 왜 겁을 먹은 기색인 걸까.

“기루 외부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여기까지 끌고 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누굴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취선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파문당해 산골 마을에서 조용히 살아가다가 머리채가 잡혀 끌려 나온 유운도 취선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평화로운 일상에 떨어진 날벼락은 정말 한순간인데 이를 수습하고 해결하는 시간은 만만치 않다.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승한과 동행한 채 금화 소저의 배후를 캐는 것처럼 말이다.

예상한 대로 취선은 이 기루가 평온이 지켜질 거라는 보장이 있다면 순순히 협력할 종류의 인간이었다.

유운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취선에게 덧붙였다.

“우리가 볼일이 있는 건 삼 층의 손님들뿐입니다. 완양루에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완양루가 그들과 손을 잡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손님을 팔아넘긴 기루가 휘청이지 않을 도리가 있습니까.”

취선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주님께 별채의 공연을 허락받고 오겠습니다. 그전까지 돌발 상황은 없었으면 합니다.”

“승랑.”

유운의 말에 승한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취선에게 따라붙었다.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에 취선은 조금 질린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완양루주는 승랑의 제안을 아주 흔쾌히 받아들이고 판까지 깔아 줬다. 오로지 완양루의 단골만 초대되는 공연이 별채에서 준비되었다. 당장 별채에 머무르는 귀인을 위주로 자리를 마련했으며 최소 오 년 이상 완양루에 드나든 이들에게만 초대장이 넘어가니 단숨에 대단한 잔치처럼 포장되어 입소문을 탔다.

“하여간 복덩이라니까.”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린 완양루주가 꺼내는 말에는 흥겨움이 가득했다. 취선은 피로함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 ‘복덩이’가 여차하면 완양루를 말아먹을 거라는 말을 어찌 꺼낼 수 있겠는가. 이런 건 자신만 알고 있으면 되는 일이다. 만약에 일이 잘못 돌아가더라도 저 혼자만의 문제로 포장하면 되니까.

“한때는 정말 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완양루에 볕 들 날이 오는구나.”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완양루주는 새털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선은 음울한 시선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별채의 공연 준비가 한창일 때, 유운은 적당히 특색 없는 차림을 한 채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일꾼이 한둘이 아니고 외부에서 초청된 손님도 여럿인지라 유운은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의 경우 승한이 제 신분을 보증해 줄 테니 잠입 전까지는 안전했다.

눈이 마주치자 승한이 입술을 벙긋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어때요? 오늘 입은 옷이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전음도 쓸 수 있으면서 왜 굳이 입술을 읽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조금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유운은 고개를 팩 돌렸다. 주변 사람들이 승랑이 이쪽을 보고 웃었다며 술렁거렸다. 유운은 동요한 이들 사이를 헤집고 벽 쪽으로 조심스럽게 물러나며 부끄럼 모르는 사제에 대한 생각을 애써 떨쳐냈다.

‘이즈음일까?’

모퉁이를 돌아 틈새를 발견한 유운은 숨겨진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벽의 한 귀퉁이가 열리더니 사람 한 명이 드나들 만한 문이 생겼다. 제법 감쪽같이 숨겨져 있어서 여기에 손잡이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 문의 존재도 알아낼 수 없을 터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얇은 벽 너머로 스며들어 오는 빛 외에는 어둑했다. 최대한 숨을 죽인 채 유운은 걸음을 옮겼다.

물을 들고 나르기 위해서인지 계단이 많기보다는 적당히 경사가 진 상태였다. 빙글빙글 건물 외벽을 따라 몇 바퀴쯤 돌았다고 판단될 무렵, 야트막한 창이 나 있었다. 행여 자신의 그림자가 밖에 보일까 몸을 낮춘 유운은 자신이 대충 삼 층 언저리에 도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여기에서부터는 정말 조심해야 했다. 재채기가 아니라 숨소리라도 크게 냈다가는 존재를 들킬지도 몰랐다. 한쪽에 쌓아 놓은 가재도구 뒤로 몸을 숨긴 유운은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염탐했다.

“연락…… 아직……?”

벽 너머라 그런지 약간 울리긴 해도 요녕 말씨가 분명하다.

“최대한 조용히……. 곧 지령……. 믿어야…….”

“젠장. 바로…… 기루인데……. ……무슨 꼴인지.”

“일이…… 끝…… 포상이……. …….”

말이 드문드문 끊긴 채로 들렸으나 대충 내용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말을 주고받는 이는 두 명 정도. 유운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걸 보면 대단한 무인은 아닌 듯했다. 일종의 중간 연락책이 아닐까 싶었다.

쥐새끼처럼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상황이 어색했으나 조바심과는 별개로 머리는 차가웠다. 이들의 배후에 있는 금화 소저의 정체를 알아내고 승한을 떠날 생각을 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해가 지면.’

승랑이 춤을 추기 시작할 거다. 취선은 연주에 참여하다가 승한이 물러날 수 있도록 돕고 그 빈자리를 메꾼다.

이후 유운과 승한이 합류해서 저들을 압박할 예정이었다.

승한의 반대에도 유운이 먼저 여기에 와 있기로 한 건 놈들이 행여라도 자리를 비울 경우를 대비해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내내 별채 밖으로 나가지 않은 자들이긴 해도 돌발 상황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했다.

처음엔 제 수하인 석이나 지화를 데려다가 세워놓고 싶어 한 승한은 유운의 설득 끝에 포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와 새 얼굴을 완양루에 들이는 건 지나치게 눈에 띄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기다리는 동안, 유운은 두 사람분의 그림자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촛불이 그려낸 그림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유운이 숨어 있는 벽면 위로 일렁였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을 집어삼킨다는 아귀 같아서 불길했다.

그런 유운의 조바심을 달래듯, 먼 데서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유운은 그림자 위로 자신이 몇 번이고 본 춤의 궤적을 그려 보았다.

가끔, 정말 가끔 승한과 승랑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날듯이 가벼운 몸놀림에서 살의를 덜어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낯설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항상 흉흉하던 사제의 검이 그렇게 황홀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유운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승랑의 뒤를 쫓곤 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시작……. 이번……. 노래가…….”

돌연 벽 너머의 이들의 대화가 재개되었다.

“약속대로…….”

조금 더 제대로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 순간, 코앞에서 무언가가 가벽을 찢고 들어왔다. 시퍼런 날붙이였다.

벽에 생겨난 틈 너머, 냉혹한 시선이 유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수가 아니다.’

유운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겨눈 검이다. 뒤로 주춤 물러나려는 순간, 그의 움직임을 봉쇄하듯 두 번째 검이 벽을 찢고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지?”

답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바람 소리가 꽤 시끄러웠는데 어느 순간 조용해지더라고.”

낭인의 건들거리는 말투에 유운은 그제야 짚이는 게 있었다.

“저 뒤쪽의 창은 당신들이 열어놓은 건가?”

작고 야트막한 창이 열려 있긴 했으나 별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좁고 갑갑한 통로이니 환기가 필요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길은 심부름을 하러 다니는 이들이 다니는 곳이고 벽이 얇으니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고도 들었다. 구조상 창에서 불어온 바람이 벽에 맞부딪히며 소음이 발생하게 되어 있었던 거다.

그 바람 소리가 갑자기 멎었을 때부터 놈들은 유운의 존재를 알았던 거다.

“쥐새끼도 아니고 그 좁아터진 통로에 뭐 하러 들어가지?”

조롱하듯 킬킬거리는 여인의 말에 유운은 이를 악물었다. 결국 저들에게 협력한 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별채에 고작 두어 달 머물렀을 자들이 이 통로를 어찌 알겠는가? 또, 그들에게 유운의 등장을 알려주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힐 이가 누가 더 있을까?

유운이 협력을 구한 자, 이 비밀스러운 통로를 알려준 자, 그리고 별채를 아무리 드나들어도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을 자는 한 명뿐이다.

‘취선이겠군.’

오만했다.

승한이 한쪽 날개가 되어 주었다고 해서 예전처럼 날아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끔찍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완양루는 적이 편의를 위해 구한 임시 거처 따위가 아니었다. 객잔을 두고 기루에 투숙하는 한심한 인생 따위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니 눈가림용으로 선택한 거라 여겼다.

실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파 놓은 여우굴이었던 거다.

“고운 얼굴에 칼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잡히는 게 좋을 거야.”

“내겐 일행이 있다.”

유운은 협박부터 입에 담았다.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순순히 잡힌단 말인가?

“아니. 곡이 세 번 바뀌기 전까지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이 공연의 연주자는 취선이다. 취선의 발목을 잡아두려 한 것마저 역으로 이용당하고 나니 머리가 얼얼했다.

놈들에게 협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목숨은 하나뿐이니 신중히 움직여야 했다.

유운은 눈을 내리깔았다.

“따라가지.”

“그래. 이젠 힘도 못 쓰는 도련님이 현명하군.”

‘내가 모용유운이라는 걸 알고 있다.’

요녕에서 온,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

불길함이 유운의 가슴속에 수런거렸다.

유운은 벽을 짚고 그 너머로 건너가는 척 발을 뗐다.

걸음을 옮기는 순간, 유운이 일부러 걸고 넘어진 청소 도구가 와르르 무너지며 온갖 굉음을 만들어냈다.

“무슨!”

‘여기가 일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임을 잘 모르는 건 놈들도 마찬가지지.’

유운은 상대가 멱을 잡고 끌어당긴 대로 나동그라지면서도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놈들이 통로에 불청객이 잠입했다는 걸 알아내려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저 소음이 새어 나갔을 거다.

그리고 승한은 청력이 좋은 무림인이다.

별다른 보호 없이 유운이 삼 층에 홀로 올라갔을 때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터다.

“안 되겠다. 여길 바로 빠져나가―”

쾅! 문이 거칠게 열렸다. 누구보다도 화려한 차림의 승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까지 오는 길에 옷소매를 찢어버린 사내는 팔찌에 이어진 사슬을 던져 유운을 구속하고 있던 낭인의 목줄기를 휘어 감았다. 휘리릭 끌려오자마자 걷어차인 여인은 그 반동 때문에 아무렇게나 날아가 책장의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정신을 잃었다.

건너편에서 유운을 압박하던 낭인은 누가 봐도 화려한 차림의 기남이 칼 대신 비녀를 휘둘러 자신에게 덤비자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맞섰다. 승한이 휘두르는 건 단검에 간신히 미칠 정도의 길이를 가진 비녀였고, 사내가 든 것은 긴 검이었으니 거리만 유지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승한은 옷이 찢어지건 말건, 검이 위협적인 궤도를 그리며 제 몸을 노리고 들어와도 오히려 몸을 내던졌다.

아슬아슬할 정도로만 공격을 피하며 팔꿈치에 비녀를 쑤셔 넣는 승한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윽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머리를 들쑤셨으나 유운은 눈앞의 광경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사제가 잔인하고 말고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이 이렇게 커진 건 결국 자신이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취선부터―”

서둘러 입을 여는 유운의 뒤에서 취선이 나타났다. 승한 쪽을 바라보고 있던 유운은 아차 하는 사이 선수를 빼앗겼다.

그녀는 평생 아꼈다던 산호 비녀를 망설임 없이 반으로 부러뜨리더니 그 절단면으로 유운의 목을 겨눴다.

“이렇게 엉망이 될 줄 알았어야 했는데.”

음울한 투로 중얼거리는 여인의 낯에서 자포자기가 묻어났다.

“내 허를 두 번이나 찌르는군.”

유운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말했다.

“여기엔 다락도 있답니다. 일꾼들이 쉬는 곳이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여인은 퍽 성실하게 고백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쯤 누더기로 변한 가벽 뒤의 복도에 얼핏 줄사다리가 흔들거렸다.

목줄기에 와 닿는 날카로운 비녀의 첨단에 유운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숙이고 들어온 취선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적에게 협력하는 중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기지를 발휘해서 승한을 불러내긴 했으나 이 기루를 속속들이 알고 있던 취선이 다시 우위를 점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단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취선도 본인이 대단한 무인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몸을 바투 붙이고 있어서 틈을 찾기 어려웠다.

유운과 승한 모두를 경계하던 취선은 본인이 상황의 주도권을 가져왔다고 확신하자마자 움직였다.

“그걸 마시세요.”

정신을 잃고 늘어진 여자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병을 승한 쪽으로 걷어찬 취선이 턱짓했다.

협력을 약속해 놓고 배신했다. 별채의 손님 측은 그녀에게 저 약만 먹이면 모든 일이 끝날 거라고 살살 구슬렸다.

그게 누구든 저 약을 먹는 순간부터 해독제를 쥔 자의 말을 아주 잘 듣게 될 거라고.

그러나 정작 약을 강제로 먹이기로 한 자들이 전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면 스스로의 안위를 도모할 수밖에 없지 않나.

이미 놓은 손을 다시 잡을 순 없으니 저 독인지 약인지 모를 물건을 먹여 무력화시키는 게 취선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리하면 인질을 놓아주겠습니다.”

들고 있던 사내를 집어 던지듯 놓은 승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것?”

그 눈빛이 흉흉하기 그지없었으나 승한은 순순히 팔을 뻗었다.

시키는 대로 자기병을 주우려고 몸을 움직였을 뿐인데 유운의 목에 비녀가 파고들었다. 핏방울이 송골송골 비녀 끝에 맺히며, 마치 산호가 녹아내리는 듯 기묘한 광경을 연출했다.

“…….”

유운은 신음 한 마디 내지르지 않았으나 승한에게서 짜증스러운 한숨이 배어 나왔다.

“이봐. 내가 무림인이라 그쪽이 긴장한 건 알겠어. 하지만 거래할 물건에 멋대로 흠을 내면 곤란하지 않나?”

취선에게서는 정말 조금이라도 헛짓거리를 하면 이 자리에서 유운을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 이걸 먹으면 대사형을 놓아주는 건가?”

승한이 자기병을 흔들며 물었다.

“먹지, 먹지 마!”

유운은 본인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조차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외쳤다.

“가만히, 가만히! 있어요!”

취선이 그의 어깨를 찍어누르며 말했다. 성인 남성이 버둥대는 걸 막는 것과 죽지 않을 정도로만 목에 비녀를 찔러넣는 건 동시에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먹지 말라고!”

유운은 반쯤 악을 썼다. 이제 피가 옷을 적시는 게 느껴질 지경이었으나 그는 반쯤 눈이 뒤집힌 채였다.

승한은 사부님의 단 하나 남은 제자다. 이젠 그뿐이었다. 자신 때문에 진랑을 혼자로 남겨둘 순 없었다.

“대사형. 제가 정말 많이. 많이 참고 있습니다.”

승한이 그답지 않게 조용한 투로 말했다.

“그러니 본인 몸은 본인이 챙기세요. 제 몸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개소리하지 마.”

유운은 이를 악물었다. 금제만 아니었어도, 아니, 사부님을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처하진 않았을 거다.

발악하듯 외쳐도 상황을 돌이킬 방도는 없었다. 승한은 극도로 긴장한 취선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차라리 숙련된 살수나 무인이라면 타협하거나 제압할 방안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대는 민간인이었고 자신이 휘두르는 날붙이가 얼마나 강력한지 잘 몰랐다. 조금 겁을 주기만 해도 저대로 목줄기에 비녀의 뾰족한 끝을 쑤셔 박겠지.

차가워진 유운의 몸을 가지고 흑천으로 돌아가는 것도 잠시 고려해 봤다. 유운은 더는 떠나지도 못할 거고 변하지도 않을 터다. 다른 이들과 교류를 나누지도 않을 테고 오롯이 흑천에 소속된 자로 남겠지.

하지만.

그러기엔 자신의 품에 안긴 채 낑낑거리던 유운의 심장 소리가 아쉬웠다.

승한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죽을 수 있는지 잘 알았다. 때로는 정말 터무니없고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죽기도 했다. 대사형을 죽음에게 빼앗기는 것보다야 뭔지도 모를 약을 먹고 그 경과를 지켜보는 쪽이 승산이 높다.

‘어느 쪽이든, 결국 도박이지만.’

변덕스러운 성품임에도 도박을 좋아해 본 적 없는 승한은 혀를 찼다. 별 흥미가 없어 진랑에게서 독을 배우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자기병의 뚜껑을 연 승한은 내용물을 망설임 없이 삼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가, 그 후에는 가슴에서부터 장작을 지핀 듯 손톱만 한 열기가 그의 안에 똬리를 틀었다.

쨍그랑!

승한은 들고 있던 자기병을 내던지더니 핏발 선 흉흉한 눈으로 취선을 노려봤다.

“이제 됐―”

채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승한이 비틀거렸다. 유운은 거의 어깨를 들이박다시피 취선을 밀쳐냈다. 산호 비녀에 얼굴이 긁혀서 뺨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생겼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승한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정신, 정신 차려라! 내공을 끌어 올려. 이 정도는 태울 수 있잖아?”

“하고…… 있습니다.”

승한의 음성은 소름 끼칠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유운은 그에게서 위협을 느끼기보다는 행여 사제가 잘못될까 싶어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경직시킨 유운은 승한이 콰직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목덜미를 물어오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윽!”

고통 섞인 신음을 터트렸음에도 승한은 곱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참 검무의 절정에 오른 승랑의 미소처럼 화사하여 저절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사형, 사형, 사형…….”

달콤하게 어르는 양 부드럽게 속삭이다가도 어느새 그 말미에 으르렁거림이 녹아났다. 자신이 물어버린 자리를 핥는 혀의 선명한 감촉에 유운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으려 애쓰며 침착하게 물었다.

“이게 무슨 약이지?”

벽으로 주춤 물러난 취선은 오히려 더 해쓱해졌다.

“독, 독이어야 하는데…….”

여인이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열이 올랐다. 유운은 짐승처럼 더운 숨을 뱉어내는 승한의 몸을 붙든 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는 승한이 겪는 게 무언지 알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문이 쾅 닫혔다. 취선은 눈이 뒤집힌 짐승에게 유운을 내던진 뒤 날듯이 벗어나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취선의 뒤를 쫓으려 했으나 승한은 한 손만으로 유운의 발목을 잡고 휙 끌어당겼다.

‘취선이 아둔한 인간은 아닐 테니 곧장 사천을 뜨겠지.’

그러나 이토록 위태로운 승한을 두고 그녀를 뒤쫓을 수는 없었다.

‘당장 쫓아가야 하는데……!’

이 긴박한 상황을 반쯤 정신이 나간 사제에게 말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임을 유운은 잘 알았다.

이 와중에도 승한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무도한 손길이 옷을 마구 벗겨내고 속살을 헤집었다. 처음 이 짓을 시작했을 때보다도 더 거칠었다.

“아, 아프―”

유운은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승한의 몸은 태산 같아 주먹질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사제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게 눈물 때문이 아니라 무대에 오르기 위해 칠한 분 때문이라는 걸 아는데도 흔들렸다.

이렇게까지 평정을 잃은 승한의 모습은 맹세컨대 처음이었다.

내공으로 태울 수 있는 종류의 독이었다면 승한이 이렇게까지 흐트러지진 않았으리라. 그가 진심으로 대사형인 자신을 범하고 싶은 것도 아닐 테고.

‘어차피 좆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승한의 가슴을 마구 두드리던 손이 점차 힘을 잃어갔다.

이런 짓을 하는 게 처음도 아니다. 그간 서로의 몸을 맞댄 채 쾌락을 탐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거의 매일같이 사제와 성기를 비비며 신음하고 그의 손아귀에 정을 토해냈었다. 그저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뿐이다.

유운은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했다.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저항감이 희석되었다. 결국 유운은 승한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치료일 뿐이다.”

그를 꽉 붙잡으니 승한은 유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 탁한 눈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치료일 뿐이야.”

사내는 겹친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아댔다. 유운은 성애에 익숙해진 몸에서 저릿저릿하게 반응이 오는 걸 느꼈다.

사형제가 나란히 같은 약에 중독되어 서로를 애무하고 있으니 사부님이 보신다면 뒤로 넘어가실 거라는 생각을 애써 털어내며 승한의 다리를 벌리고 그의 양물을 붙잡았다.

‘젠장.’

제법 큰 유운의 손으로도 다 쥐어지지 않을 만큼 흉흉하게 발기한 물건이었다. 미끈미끈한 액이 선단에서부터 흘러내려 기둥을 적시고 있었다. 불쾌감과 일말의 기대가 동시에 유운을 엄습했다.

팽팽하다 못해 벌겋게 성이 난 성기를 내려다보던 유운은 심각해졌다.

‘왜 나보다 상태가 더 나쁜 거 같지?’

다음 순간 유운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은 합환주를 어느 정도 엎은 것에 비해 승한은 그 자기병에 든 것을 전부 마시지 않았나.

“아!”

승한은 이지가 없는 중에도 유운의 몸을 희롱하던 습관이 남아 있었던 건지 그의 성기를 마주 쥐었다. 그러나 힘 조절을 전혀 하지 못하는 까닭에 쾌감보다도 고통에 가까운 감각이 유운을 엄습했다.

“천천히……. 살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유운이 대화를 시도하자 물기 어린 눈가에 입술이 거푸 닿았다. 억눌린 흐느낌을 음미하듯 혀를 움직이던 승한은 유운을 바닥에 깔아뭉개며 허리 위에 올라탔다.

팔찌가 서로 부딪히며 잘그랑대는 소리가, 맨살에 와 닿는 차가운 금속 목걸이의 감촉 따위가 유운의 감각을 교란했다.

부드러운 비단옷에 감싸인 승한의 몸은 지나치게 단단하고 뜨거워서 이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둔부를 가르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유운의 발가락이 꼿꼿하게 섰다. 덩달아 달아올라 있던 성기는 완전히 죽고 말았으나 승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탄탄하긴 해도 썩 많지 않은 살을 비집고 그 골에 양물을 끼운 뒤 천천히 움직이는 사내의 헐떡임이 유운을 억압했다. 거칠게 허리를 움직일수록 몸이 앞으로 밀려나는 통에 유운은 벽을 짚고 버텨야 했다.

“악, 으!”

허리만 움직일 줄 아는 짐승이 따로 없었다. 살이 비벼지는 감촉은 오싹하면서도 은밀했다. 유운은 누군가와 이토록 바투 닿아본 것이 승한이 처음이었으며 또한 마지막이기도 했다.

“어떻, 어떻게…….”

으르렁거림이 아니라 제대로 된 말이 승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보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을 들으며 유운은 고통을 삼켰다.

‘만약 둘째가 잘못된다면.’

처음처럼 자신이 하나 남은 제자가 된다면.

몇 번이고 그런 상상을 했었다. 그 마음이 자신을 괴물로 만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돌아가고 싶어서. 돌이키고 싶어서.

이기심이란 참으로 끈덕진 놈이라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운은 언제나 버려지는 것이,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다. 모용세가가 불타오르던 그 날, 모두가 죽어가는 중에 마루 밑에 웅크려 필사적으로 숨을 참던 소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달라져야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으면,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바뀌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그는 승한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괜찮을 거다.”

양기를 해소하지 않으면 자신보다 더한 꼴이 날 거다. 아닌 게 아니라 승한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의 손도 발도 천천히 붓기 시작했다.

그저 쥐고 흔드는 정도로는 사정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결국 유운은 선택해야 했다.

승한이 거칠게 회음을 비벼대는 움직임에 흔들리면서도 유운은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손으로 아래쪽을 더듬어 승한의 성기를 붙잡고 뒷구멍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남자 사이에도 성교가 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불필요한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불쾌함을 느꼈지만 잊지는 않았다.

“아…….”

고작 귀두 끝을 밀어 넣었을 뿐인데, 아래가 벌어지다 못해 미어지는 느낌에 목뒤에서부터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흐?”

침착하게 판단했다고 생각했으나 본인의 판단보다 초조했던 유운은 성기의 크기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원래 무언가를 받는 구멍도 아닌 곳이니 진입이 힘들뿐더러 지독하게 좁았다.

이제 와 깨달아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악……!”

더운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유운이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깨물고 있던 입술을 벌리자 승한의 성기가 안으로 성큼 전진했다.

그 빠듯함에 오히려 움직임은 느려졌건만 목구멍에서는 비명조차 나오질 않는다. 눈물은 고인 채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유운은 경직된 몸을 이완시키려 애썼으나 흐, 같은 의미 모를 신음만 흘러나올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승한이 유운의 살갗을 핥고 비볐다. 완전히 힘을 잃은 그의 성기와 뱃가죽을 더듬으며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불씨를 지피려 들었다.

‘조금이라도 이지가 돌아온 걸까?’

기대감에 고개를 반쯤 돌려 승한을 바라보는 순간, 그가 유운의 안으로 깊게 짓쳐 들어왔다.

투둑하고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아래에 질척한 액체가 서서히 번지는 기분에 유운의 낯이 희게 질렸다. 짐승이 그의 귓가에 대고 만족스러운 호흡을 토해냈다.

“나, 밀어, 나가, 아, 아…… 아!”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크게 외쳤지만 승한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로지 욕망뿐, 자신을 알아보는 기색이 없는 사제를 보며 유운은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어쩐지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무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파, 아프다고!”

가슴을 때리고 어깨를 밀치고 그의 목에 이를 박아넣고 물어뜯는데도, 승한은 끊임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오로지 황홀함만이 새겨진 얼굴은 조각상 같아 유운은 절망했다.

주먹질해도 막으려는 시늉조차 없다. 오로지 안으로만, 여태 그 누구도 범접지 못했던 깊은 곳으로 몸을 밀어 넣는 것에 집중하는 승한은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남의 고통은 둘째치고서라도 그 자신의 고통조차 도외시하는 모습 아닌가.

유운은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드는 가운데, 안으로 밀려 들어온 승한의 양물이 어딘가를 꾸욱 누르는 감각에 얼어붙었다.

‘이게, 뭐지?’

승한이 앗아간 불씨가 전부 거기에 있었다. 마치 살갗을 타고 오르는 개미처럼 간지러우면서도 어느 한순간 불꽃처럼 팡 하고 터지는 감각이 유운을 사로잡았다.

왜 고통 사이에서 쾌락이 느껴지는 건지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괜찮아.”

유운의 뺨을 타고 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아 올린 승한이 그에게 속삭였다.

“괜찮을 거야.”

조금 전 유운이 했던 말을 그대로 외워서 돌려준 짐승이 허리를 움직였다. 비벼댈수록 아래에 깔린 이가 희열에 젖어 들게 하고 구멍을 조이는 곳을 자극하는 건 본능이 알려주는 행위였다.

차디찼던 숨에 점차 열기가 더해지며, 신음에 섞인 고통은 점차 희석되어갔다.

마치 아편이라도 피우는 듯, 무뎌진 통각 대신 지극한 쾌락이 유운을 침범했다. 승한이 몰아온 파도에 휘청일수록 유운은 그의 품에 매달리는 것 외에는 갈 곳이 없어 허우적거렸다.

침상에 뺨이 밀려 뭉개지면서도 유운은 어지러이 흔들렸다. 뒷목에 와 닿는 염승한의 호흡이 거칠다. 유운은 자신이 어디쯤을 부유하는지, 이 열락이 어느 즈음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속눈썹만이 혼란스러움에 하염없이 떨릴 뿐이었다.

“유운…… 유운…….”

유운의 짐승은 가르친 것은 잊는 법이 없어서, 참으로 성실하게도 그의 이름만을 뇌까렸다. 대사형 같은 단어가 나왔다면 벗어날 생각이라도 했을 텐데. 이래서야 무리다.

도망치는 대신 힘주어 승한의 등을 할퀴며 유운은 새된 교성을 내뱉었다.

쾌락으로 고통을 덮어버릴 수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감각이 온 신경을 녹여버릴 듯 자극적이었다.

몇 번이고 부족한 호흡을 갈무리하던 유운은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을까, 식은땀과 함께 유운은 헐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을 통틀어 안 아픈 곳이 없었으나 그중에서도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작열감이 유운을 엄습했다.

그는 여전히 승한의 몸에 깔린 채였다. 사제의 성기가 여전히 몸 안에 들어 있었다. 등허리가 경직되어 바르작거리며 일어나는 것 자체가 지독하게 힘들었다. 무쇠 덩이 같은 사내의 몸이 유운을 짓누르고 있었다.

간신히 양물에 꿰뚫린 몸을 빼내자 영영 다물리지 않을 듯 벌어진 밀지에서 승한이 싸질러 놓은 정액이 흘러내렸다.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뭉근한 액체의 감각에 유운은 몸서리쳤다. 두 다리로 일어서려다가 침상 아래로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려온 유운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승한의 손에 죽은 낭인의 몸을 헤집었다.

차갑게 식은 이의 품속에서 익숙한 모란이 새겨진 패가 툭, 하고 떨어졌다.

대모용세가.

“하.”

유운은 실소했다.

막다른 골목인 양 처음 그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유운은 교월에게 연통을 넣어 취선을 수색했다.

완양루주와 취선은 함께 사라졌는데, 그중 잡아낸 건 취선뿐이다.

그나마도 왕교월이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운남으로 건너갔으리라 들었다. 화월루주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서 유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마.”

승한은 유운을 범한 후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의원은 그가 몸에 남아 있는 독기를 몰아내느라 그러는 거라 말했다. 지독한 미혼약과 음약이 동시에 쓰였지만 승한이 원체 건강한데다가 내공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후유증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도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만큼은 유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화월루의 복도를 걸어 내려가는 유운의 걸음은 어색했다. 그는 아직도 회복 중이었다. 야소에게 환부를 내보이지 않은 채 약만 받아다가 어설픈 손으로 발라서일지도 모르겠다.

뒤처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희게 말라붙은 정액을 닦아내느라 물이 차게 식을 때까지 탕옥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오늘도 말이 없군.”

처음 잡혀 왔을 때, 완양루주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고 생각한 취선은 입도 벙긋하지 않으려 했다.

까닭에 유운은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품을 뒤적거린 유운은 천으로 감싼 머리카락을 취선에게 던져줬다.

“루주님……!”

취선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를 붙잡았다.

유운은 그녀의 핏발 선 눈을 무시하며 건너편에 앉은 채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사실 진짜 완양루주의 머리카락은 아니었다.

가발용으로 팔리는 인모를 사서 침향을 입힌 천으로 묶은 거다.

‘효량의 수다를 놓치지 않고 들어준 보람이 있군.’

기루의 온갖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입에 담던 효량은 루주가 어떤 향을 즐겨 찾는지도 말해 준 바 있었다. 배합이 독특한 향이긴 해도 단골 가게를 알아냈으니 같은 물건을 달라고 하는 것만으로 빠르게 해결됐다.

“믿, 믿을 수 없어요. 그들이 배신할 리가…….”

“뭘 믿지 못하겠단 거지?”

유운은 외려 되물었다. 그는 잔을 손가락 끝으로 빙글빙글 굴리며 말했다.

“난 그냥 자그마한 선물을 가져왔을 뿐이야.”

애초에 흑천에서 하던 게 이런 짓이었다.

손가락이 희게 질릴 정도로 가짜 루주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취선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오른쪽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제가 모든 걸 말할 테니 제발 루주님의 안위만은…….”

표정이 무너졌음에도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저를 마주 보는 여인의 눈이 필사적이었다.

아무리 평정을 가장하려 해도 목이 메는지 문장을 채 완성하지 못하는 이를 보며 유운은 느릿느릿한 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승랑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지만, 이쪽이 나쁜 의도를 품고 있었던 건 맞으니 진실만을 말한다면 루주에게도, 너에게도 해는 없을 것이다.”

취선은 무도한 승한보다도 침착한 유운에게서 더한 공포를 느꼈다. 어설픈 의리를 지키고자 거짓을 말한다면 바로 들통나고 말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그녀는 차근히 설명을 시작했다.

“예전에, 대략 왕교월이 화월루를 떠나며 휘청일 무렵, 완양루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크게 도약하려 했습니다.”

완양루주는 사천제일루의 자리를 차지할 요량으로 돈을 퍼부었다. 한데 그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취선은 완양루주를 보호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고 그 결과 한 전장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었다. 한데 돈을 갚기로 한 날짜가 돌아오자 전장의 주인이 사라졌다.

완양루주와 취선 모두 그것이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채무가 어느 사파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완양루의 몰락은 예정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금고에 돈을 잔뜩 쌓아두고 있음에도 취선과 완양루주 모두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데 몇 년 전, 이 채무를 전장 주인에게서 넘겨받았다는 여인이 나타났다.

바로 금화 소저가.

“지나치게 젊어서, 그녀가 진짜 배후라고 생각하긴 어려웠습니다. 적어도 불혹 즈음의 인물이어야 그 시기에 그만한 돈을 덜컥 내줄 수 있었을 테니까요.”

유운이 아는 금화 소저는 채 이립이 되지 않은 여인이었다. 화월루가 그리 휘청일 즈음이라면 십수 년도 전이니 갓 열댓 살이 되지 않은 금화 소저가 완양루에게 빚을 지우겠다는 계획을 세우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낯익은 수법이다.

유운은 파문당하기 전, 혈교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읽었다. 자신이 얼마나 아둔한 짓을 저지른 건지 똑똑히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놈들이 기루를 빚더미에 앉혀 통째로 삼켜버리는 수법도 담겨 있었다. 어린 제물을 조달하는 통로로 쓰이기도 했다는, 참으로 구역질 나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완양루의 파산에 인위적인 손길이 닿아 있지는 않다.’

루주의 무분별한 투자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을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 아마도 금화 소저의 배후로 추정되는 자가 그 상황을 이용해 이들을 주저앉힌 거지.’

“내 생각엔 그 여자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것 같은데.”

유운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모릅니다.”

취선이 고개를 내젓자 유운은 품에서 모용세가의 패를 꺼냈다. 이를 그녀의 앞으로 밀어주자 취선의 눈이 커졌다.

“네가 승랑에게 마시라 한 약의 질이 아주 나쁘더군. 돼지한테도 쓰지 않을 발정제야. 심하면 이를 먹고 흥분해서 날뛸 때의 기억이 잘려 나간다는 이야기도 있고…….”

야소에게 약을 분석시킨 결과는 퍽 끔찍했다. 문제는 이게 왜 음약인지 짐작이 안 간다는 점이다.

모용세가의 직계를 치워버리면 그 재산에 대한 권한은 가장 가까운 방계에게 주어질 테니 암살이 목적일 수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걸 준비해놨던 걸까?

애초에 혼례가 진랑의 눈을 가리기 위한 연막이 아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효과가 즉효성이라 이를 사용하고 나면 여인이든 사내든 가리지 않고 범하게 된다더군. 공들여 약을 먹여놓고 아무나 들여보냈을 리는 없으니 그 여자가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금화 소저 본인을 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확보하면 그 사람들에게 넘기라고 하였어요.”

“둘 다 죽었지.”

유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취선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의 이름, 모용금화가 맞나?”

***

“요청하신 모용금화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오문과 완양루를 오가며 상황 수습에 힘쓰는 교월의 눈가는 부쩍 피로해 보였다. 유운도 잠시 알아보지 못한 듯 미간을 좁힌 그녀는 준비해 둔 정보를 건넸다.

가장 위에 있는 모용길상이라는 이름에 시선이 꽂혔다.

유운의 거취를 두고 사부님과 몇 번이나 부딪힌 적 있다는 모용세가의 태상장로다. 원래는 방계 혈족 중 한 명이었으나 모용세가에 일어난 참사 후 몇 남지 않은 혈족을 끌어모으게 되면서 급부상하게 되었다.

모용금화가 하필 그의 수양딸이라니.

“모용길상이 완양루의 부채를 쥐고 있는 게 확실해 보이는군요.”

“모용세가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 오신 덕에 하오문을 설득하는 일도 한층 수월해졌습니다.”

교월이 덤덤하게 말했다. 완양루에 남은 건 효량이라는 애송이뿐인지라 길길이 날뛰는 걸 드디어 제압할 수 있었다. 곧 완양루주까지 찾아서 채무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하오문의 중재를 받을 수 있을 거다.

“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제자의 일을 살폈을 뿐입니다.”

어색한 인사가 교월과 유운 사이를 오갔다. 유운은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달싹였다.

“도울 필요 없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 감사합니다.”

교월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유운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이 느껴지는 낯을 굳이 지적하지 않은 채 유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염 공자는 곧 일어날 겁니다.”

밖으로 나가려던 유운은 멈칫했다.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유운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저승에 끌려가더라도 시왕의 수염을 쥐고 흔들 사내를 누가 염려한답니까?”

승한은 잘 잤다는 듯,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그렇게 가볍게 일어날 거다. 유운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온 유운은 승한의 침상 곁에서 모용길상에 대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모용세가에서의 참사가 있고 난 뒤, 요녕에서 먼 지역에서 살던 모용길상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모용세가에 남은 것이 없던 때부터 재건을 위해 힘썼다. 까닭에 혈교와의 전쟁 후 예진랑이 모용세가의 재산을 되돌려 주었을 때, 길상은 가주 대리의 위치에서 그를 맞이할 수 있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세가의 기둥이 된 사내다. 겉보기만 봐서는 존경받을 만한 원로 같았다. 만약 유운이 흑천이 아니라 모용세가로 돌아가길 택했다면 그를 조언자로 삼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종이를 넘기던 유운은 움찔했다.

“으…….”

가끔 아래가 쓰려왔다. 예전 같은 회복력을 기대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금창약을 꾸준히 발라주고 있긴 해도 아래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 것 자체가 거부감이 컸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내내 유운을 괴롭혀 온 독이 지금은 잠잠하다는 사실이었다.

매일같이 승한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야소는 유운의 진맥도 봐 주었다. 우려한 것보단 양기가 안정적이라고 들었다. 유운은 승한과 몸을 섞은 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득인지 실인지…….’

사실 유운은 처음 승한의 손에 절정을 맞이했을 때보다 차분한 상태였다. 처음 맨살을 맞댔을 때에 비해 배덕감이 많이 희석된 영향이 컸다.

유운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머리를 그 위에 기댔다. 최악만은 면하고자 사제와 몸을 섞어놓고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자신은 어딘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사부님은 뭐라고 하실까.’

하염없이 상념에 잠기려던 찰나, 무언가가 불쑥 유운의 손목을 낚아챘다.

“……대사형?”

한없이 낮은 음성에 유운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깨, 깨어났느냐? 여기가 어딘진 알겠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의원이 승한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단단히 겁을 준 통에 도무지 안심할 수 없었다. 유운 안의 일부는 승한이 자신과 몸을 겹친 일은 잊었으면 한다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도 품고 있긴 했다.

“어렴풋이 기억은 납니다.”

오래 누워 있었던 탓일까, 승한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유운은 물잔을 건넸으나 승한은 이를 마다한 채 유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몸은 괜찮으신지 확인해 봐도 됩니까?”

질문이긴 했으나 거부권은 없는 듯했다.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래서 자는 내내 앓는 소리를 내셨나 봅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가 아니었나?”

유운이 다급하게 묻자 승한이 이실직고했다.

“회복 중이었지요. 운기요상도 적당히 해가면서……. 일어날 수 있는데 누워 있었던 건 아니니 그렇게 흘겨보지 마십시오.”

절로 힘이 들어가던 손을 내려다본 유운은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는…….”

유운이 중얼거렸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또 승한이 몸을 내던지는 꼴을 보느니 제 손으로 죽여놓는 게 나았다. 지금으로서는 승한의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제압당할 테지만 취선이 썼던 방법처럼 사제를 무력화시킬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도검불침도 아니고 만독불침도 아닌 승한이 간을 배 밖에 내놓고 다니는 양 구는 게 비로소 조마조마하게 느껴진다.

“은혜를 다 갚기도 전에 은공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저는 어찌합니까?”

완양루로 간 이래 그만두었던 존대를 입에 담으니 승한이 미간을 좁혔다.

“알겠습니다. 제 몸을 확실히 돌볼 테니 그런 눈 하지 마십시오.”

“어떤 눈 말이지?”

“제가 또 헛짓거리하면 껍질을 벗겨버릴 것 같은 눈 말입니다.”

무서워서 도로 드러눕고 싶다며 너스레를 떠는 사내의 얼굴이 반쯤은 한심해 보이고 반쯤은 잘나 보인다. 그날 승한이 머금고 있던 열기에 휩쓸려 자신의 머리도 어떻게 되어버린 게 틀림없다.

“과연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그 껍질이 남아 있을까…….”

뼈가 있는 발언이었으나 승한은 못 들은 척 입술을 축였다.

“이리로 와서 다리를 벌려 보시죠.”

“싫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싫다고 하셔도 강제로 할 겁니다. 스스로 벌리는 게 좋을 거예요.”

승한은 그답지 않게 다정한 투로 말했다. 유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옷을 벗는 동안 돌아서 있어.”

어차피 나신을 눈에 담을 텐데 무엇 하러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냐는 질문 대신, 승한은 잠자코 몸을 돌렸다.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서 귀신같이 조심하는 승한을 보며 유운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 이제 와 손이 덜덜 떨리는 건 역시 이상했다.

할 짓 다 해 놓고 손이 덜덜 떨리는 건 역시 이상했다.

“돌아봐도 좋아.”

의연함을 끌어모아 건넨 말에 승한이 돌아섰다. 그는 유운의 어깨며 가슴, 그리고 허리와 등에 남은 손자국과 잇자국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집요한 시선에 몸서리치는데 그가 목덜미의 울혈 위를 깃털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래도 보여 주셔야지요.”

“빨리 끝내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침상을 짚으며 엎드린 유운의 팔이 잠시 휘청였다. 승한이 이를 못 본 체해 주었으나 유운의 귀는 붉게 달아오른 뒤였다.

이것도 다 승한 탓이다. 저 거친 허릿짓을 감당한 몸은 지독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살갗이 다 일어난 허벅지와 흰 곳을 찾아볼 수 없는 회음에서 밀지까지를 천천히 눈에 담은 승한이 손을 뻗었다.

자신을 쥐고 흔들던 그 밤의 사내와 지금의 승한은 전혀 다른 상태라는 걸 스스로에게 뇌까리며, 유운은 재차 몸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무시했다. 엉덩이를 잡아 벌리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지 구멍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지는 않았으나 거의 시선으로 범하듯 내려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너덜너덜하군요.”

승한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좁고 발갛게 달아올랐는데 잔뜩 부어서 큰일입니다.”

“왜. 꼴 보기 싫나?”

유운이 비틀린 투로 말했다. 사실 이렇게 잡혀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서 그렇게 쏘아붙이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소립니까?”

승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넝마가 돼도 제가 쓸 겁니다. 저 혼자만.”

정말 못 하는 말이 없다. 게다가 다음이 있을 거라 암시하는 그 발언에 팔짝 뛸 수밖에 없었다.

“미쳤나?”

유운은 승한의 어깨를 발로 퍽퍽 걷어찼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승한은 복사뼈 안쪽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 사제를 너무 쓰레기로 만들지 마십시오. 대사형을 범했으니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몸 한 번 섞었다고 평생을 이야기하지?”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소년 시절부터 기루에 드나든 승한은 책임질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된단 말인가?

“그럼 이 순결한 사제를 한 번만 먹고 버리실 생각이셨습니까? 대사형이 그런 난봉꾼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무슨 순결 타령이 여기에서 나오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저는 동정입니다.”

뻔뻔하다 못해 염치도 없는 발언에 유운이 일갈했다.

“그런 것 치곤 화월루 사람들과 오래 알고 지낸 눈치던데. 어린 시절부터 기루에 드나든 것을 내가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나?”

기억을 잃은 척하고 있는 제 앞에서 문지기며 기녀들과 인사를 나누지 않았던가? 승한은 교월이 자신에게 금을 가르쳐준 이라 소개해 줬다.

술보다 운우지락을 먼저 배웠을 인간이 이 정도로 뻔뻔하게 나오니 열이 화르륵 올랐다.

“정말입니다. 화월루에는 금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싱글벙글 웃는 낯만 보면 도무지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운의 음성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런 걸 누가 믿나.”

“스승님에게 확인해 봐도 됩니다.”

유운은 못 믿겠다는 얼굴을 했다. 교월이 진실을 감출 것 같진 않았으나 전적으로 승한의 편이니 쉬이 믿기 어려웠다.

“정말입니다. 나이가 찰 무렵부터 다들 제가 언제 남의 침상에 기어들어 가나 내기를 많이 했는데 그때 스승님이 판돈을 다 쓸어가시곤 했거든요. 재산 목록만 보여달라고 해도 알 만할 겁니다.”

유운은 더는 눈을 흘길 수 없었다. 진실 반 거짓 반 섞어대는 사제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퍽 믿음직하게 들리는 까닭이었다.

“이제 몸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마음대로.”

반쯤 포기한 채 팔을 늘어뜨리자 시선을 마주친 채 눈매를 접어 웃은 승한이 유운의 발끝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가 물러났다.

가지고 놀 거라면 원래 자리에만 돌려놔 주었으면 좋겠다.

이 모든 일이 없었던 척할 수 있게.

***

아직 기루의 영업이 시작되지도 않은 오전인데 창밖이 부산스러웠다. 소요가 일어난 원인이 궁금해 창밖을 내다보니 승한이 보였다.

그는 몇 번 본 적 있는 어린 소녀와 화월루의 중정에서 노닐고 있었다. 경공을 전개하면 한달음에 지붕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 사내가 잡힐 듯 말 듯 속도를 조절하며 과일 바구니를 끌어안고 있었다.

유운은 새삼 승한의 성격이 참 나쁘다는 걸 실감했다. 그냥 포기하게 처음부터 경공을 써서 지붕이든 어디든 달아나면 될 것을 왜 저리 아슬아슬하게 뜸을 들인단 말인가?

열두어 살, 많아야 열넷 즈음으로 보이는 소녀는 결국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숨이 찼는지 헉헉대는 추적자 앞에 슬그머니 다가선 승한이 놀리듯 물었다.

“드디어 포기한 거냐?”

“아 진짜 돌려줘요! 저번에도 손님상에 올라갈 여지를 냅다 들고 도망치셔서 얼마나 난리였는데요!”

“내 귀한 손님 대접하는 데 필요하다지 않았니.”

“아, 그럼 과일 손질하는 거 도와줄 테니 얼굴이라도 보여 달라니까 그것도 안 된다고 해 놓고는!”

“그럼. 아주 귀한 손님이니 화월루주의 수제자인 나만 만날 수 있단다.”

“와 아직 수습인 저보다 금을 못 타면서? 뭐라고요?”

투닥투닥 다투는 모습에서는 일말의 설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보다는 마치 오누이 같았다.

그러나 승한과 앳된 소녀의 다툼은 더는 유운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가장 가까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행여 숨소리 한 자락이라도 새어 나올까 입을 틀어막은 그는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옷이 더럽혀질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유운은 저 큰 덩치로 여지의 껍질을 하나하나 까고 있었을 승한을 생각했다.

그리고 점점 그 생각을 멈출 수 없어졌다.

“미쳤군.”

스스로에게 혀를 차며 유운은 창을 거칠게 닫았다. 쾅! 하는 소리에 과일 바구니를 두고 저보다 열 몇 살은 더 어린아이와 씨름하던 승한이 위를 올려다봤다.

“흐음…….”

너무 세게 닫은 나머지 튕겨 나가며 반쯤 열린 창 한 짝에 승한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거의 다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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