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쉬운 길
깨어난 승한은 빠른 속도로 유운의 간병에 적응했다.
완양루에서 지내던 가락이 몸에 뱄는지 코끝으로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요구하며 머리 꼭대기 위에 앉으려 들었다.
“너무 뜨겁습니다. 후 불어서 식혀 주세요.”
건장한 사내가 속눈썹을 팔랑대며 하는 소리에 유운은 이미 식혀 온 죽을 내려다봤다. 적당히 식혀 왔는데 뭘 얼마나 식히길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얼음이라도 띄워달라는 건가.’
유운이 수저를 내던질 것 같은 기미를 보이자 승한은 언제 불손하게 굴었냐는 양 살살대며 웃는다.
“저는 아픈 사람 아닙니까. 상냥하게 대해 주세요.”
진즉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내가 입에 담는 능청에 머리가 아팠다. 야소도 승한의 회복 속도에 혀를 내둘렀는데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옷도 입혀달라, 밥도 먹여달라. 다음엔 씻겨 달라고도 하겠군.”
“대사형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벗겠습니다.”
살살 다뤄주세요, 하고 입술을 모으는 사제를 보며 유운은 치밀어 오르는 부끄러움을 꾹꾹 억눌렀다. 정작 지껄이는 건 승한인데 왜 수치심은 제 몫인지 모르겠다.
“잘만 일어나서 돌아다니더니, 혼자 씻어도 되지 않나?”
“그게…….”
승한이 거짓 홍조마저 띠며 우물쭈물 말했다.
“사부님이 저를―”
“곱게 키웠지! 아네! 알겠어!”
유운은 저도 모르게 버럭 외쳤다. 승한이 깜짝 놀란 양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미친 사제가 이번엔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나 싶어 유운은 움찔했다.
“드디어 기억이 돌아오신 겁니까?”
“아닐세!”
한평생 흑천의 대공자로서 품위를 지키려 노력한 세월이 있어 다행이었다. 만약 그런 기억이 없었다면 산골 마을에서 지내다가 듣게 된 상스러운 욕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한이 자신을 위해 독을 먹고 쓰러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유운은 죽이 든 그릇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십니까?”
완양루에서의 일 때문인지 승한은 유운이 자신의 시야 밖으로 나가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씻겨 달라지 않았느냐. 물을 받아 놓으라 해야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운은 승한이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고 있었다.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뭔지도 모를 약을 먹던 승한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운은 눈에 보이는 애정에 약했다. 승한이 보여준 건 말로는 다할 수 없는 헌신이었고 희생이었다.
모용세가의 참사가 있던 날, 유운은 마루 밑에 숨은 채 죽어가던 혈족을 지켜봤다. 죽은 이의 눈에는 더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으나 유운은 그 시선이 의미하는 게 원망이라 굳게 믿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 언젠가는 모용세가로 돌아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필사적으로 고향을 외면하게 했던 공포다.
한데 승한의 눈은 달랐다. 그는 죽을지 살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도 유운을 원망하거나 그의 아둔함을 질책하기는커녕 망설임 없이 약병을 입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악몽 위를 덧씌울 수 있는 기억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유운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편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는 유운이 신기해서 계속 깔짝거리던 승한은 조금 놀랐다. 분명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유운이 너무도 관대하게 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를 쫓던 낭인들이 모용세가 소속이라고 합니다.”
유운이 운을 떼자 승한이 고개를 까딱이며 답했다.
“대사형은 원래 요녕의 모용세가 출신이었지요.”
서생 유운이길 고집하는 대사형을 위해 설명을 덧붙여준 승한이 말했다.
“그들이 대사형을 찾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방식과 시기가 영 마음에 걸리네요.”
“방식과 시기요?”
“그냥 곱게 모셔가면 될 것을, 굳이 혼례며 약 같은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하필 사부님이 막내 혼사로 정신이 없을 때…….”
승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막내 사제, 예강오의 이야기에 유운은 자신이 질투를 느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전과 같은 통증은 느낄 수 없었다.
‘막내의 상대라면 역시 백라궁주인가.’
흑천에서 우연찮게 마주친 백라궁주 단우효를 본 날, 유운은 그가 자신을 빛으로 데려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모용세가에 남았더라면 그는 백라궁주의 오른팔, 내지는 정치적 동맹이 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나.
이제 와선 그게 다 오래전에 지나간 꿈만 같다. 단우효에게는 유운이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유운은 그저 자신이 괴롭지 않은, 이상적인 미래를 백라궁주라는 존재에게 투영했을 뿐이다.
‘만약 혼례가 단순한 연막이 아니었다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유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무림 세가는 피로 이어지는 구조다. 직계인 유운의 아이만 있다면 모용세가의 다음 대를 이끌어나갈 명분이 생기는 거다.
어쩐지 지독하게 피로해진 기분이었다.
“사형? 안색이 나쁩니다.”
“물 받으러 간다.”
승한의 질문에 딱딱거린 유운은 방 밖으로 나섰다.
다시는 들을 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모용세가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 유운은 자신이 두고 온 과거가 제 발목을 잡았음을 알아차렸다.
흑천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것도, 그리고 지금 원치 않는 혼례를 피해 달아나다가 옛 사제에게 희롱당하는 것도 결국 모용세가에서 태어나 그 가문과 함께 스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용세가의 혈겁 당시 죽어가던 가솔들을 외면한 채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새로 돋아난 가시처럼 유운을 들쑤셨다.
승한에겐 기억을 잃었다고 말했으니 이 엉킨 실타래를 어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는 무지한 서생처럼 굴어야 한다. 그러나 온전히 승한에게 맡기기엔 그가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완전히 도려내길 택할 것 같아 걱정이었다.
모용금화, 혹은 그 배후에 있을 모용길상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
유운은 여러 단서를 가지고 요녕에서 온 모용세가를 추적하는 교월로부터 저들이 있을 장원 목록을 전해 받았다.
지도를 펼쳐 놓은 유운은 붓에 먹을 적셔 그 장원을 하나씩 표시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승한이 승랑으로 움직일 때 쓰던 입술연지를 꺼낸 유운은 그 붉은색을 제 손가락 끝에 적셨다.
가장 먼저.
‘완양루.’
유운의 손끝이 사천 중심부의 한 지점을 눌렀다. 그 자리에 인주를 묻혀 찍은 도장만큼이나 붉은 점이 아로새겨졌다.
‘그다음은……. 악왕채.’
사천으로 들어오는 길목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산채의 위치를 가늠하며 유운은 두 번째 점을 찍었다.
마지막 점은 그 위치를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유운은 거의 바로 마지막 장소에 손가락을 찍어눌렀다.
‘됐다.’
자신이 지내던 마을까지 해서 이렇게 세 개의 붉은 점이 지도에 생겨났다.
모용길상이든 모용금화든, 미치지 않고서야 요녕에서 사천까지 오가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다. 그러니 다른 지방에 연락하기도 용이하면서 덫을 심어놓은 완양루와 악왕채에 가까우며 유운이 있던 마을에서 퇴로를 확보할 수 있는 위치의 장원을 쓰고 있겠지.
유운은 그 단서를 기반으로 후보지를 추려 나갔다.
‘사천이 감숙과 가까워서 다행이군.’
흑천의 일선에서 물러난 지 반년도 더 되었으나 유운은 이 주변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 사정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물류의 흐름이라든가 이용하는 관도에 따른 세금, 심지어는 정파와 사파의 세력 분포까지도.
‘두 군데가 남는군.’
유운은 망설임 없이 둘 중 더 규모가 크고 화려한 장원을 골라냈다.
“화언장원.”
모용금화는 흑천주를 꽁무니에 매달고 있는 와중에도 과시하듯 일을 키웠다. 번듯한 혼례를 치르는 게 무척 중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느 정도 그녀의 성정이 반영되었으리라.
유운도 허장성세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과시욕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숨겨지지 않는다.
씻으라며 탕옥에 밀어 넣은 승한이 돌아오기 전에 교월을 만나기로 마음먹은 유운은 그길로 화월루주에게 찾아갔다.
“가야 할 곳이 생겼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교월은 유운이 분석한 지도를 보더니 장원의 위치를 보고 살짝 아미를 좁혔다.
대뜸 반대하기보다는 우려 섞인 표정이 되는 걸 보면 유운이 왜 그리로 가려는지 알아챈 얼굴이었다.
“저들이 당신을 반기지 않을 텐데요.”
교월의 말에는 축객령 정도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되어볼까 합니다.”
유운의 낯은 전에 없이 오만했다. 스스로를 감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서생인 척하던 때와는 달리 확연히 본인의 색채를 드러내는 모습에 교월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염 공자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실 생각이군요.”
“위험한 줄은 압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 두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월은 자신이 그 안전장치라는 걸 알기에 묘한 낯을 했다.
“지금 사제와 함께 가면 저는 돌아와야 할 겁니다.”
유운은 제 선택의 이유를 입에 담았다. 승한을 사제라 칭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저를 위해 목숨도 건 둘째에게 짐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흑천은 본디 사마련에 근간을 두는 만큼, 일반적인 문파와 결이 달랐다. 진랑은 절대적인 지도자였으나 이는 그 후계자로 누굴 내세워도 흑천에 소속된 자들을 전부 만족시키기 힘들다는 뜻이 된다.
유운은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배신자였고, 사제가 그런 자신을 감싸다가 사부님의 뒤를 이어 흑천주가 될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제 손으로 사부님과 사제, 그리고 평생 몸담고 있던 흑천을 저버리지 않았나.
지금의 유운에게는 승한의 짐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
“지금이라면 흑천에 돌아가 보호를 요청해도 태상궁주님께서는 크게 반발하지 않으실 겁니다.”
“루주. 나는 감숙으로 돌아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가끔 사부님 술 상대나 하며, 일원당의 모란과 함께 늙어 가겠지요. 손발이 묶인 채 아주 무기력하고 못난 꼴로 평생 내가 저지른 과오를 곱씹고 되새겨야 할 겁니다.”
이 세상 어디로 흘러 들어갈지라도 유운은 계속해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못난 사람이라 금이 눈에 보이면 쥐고 싶고 높고 귀한 자리가 있으면 앉고 싶었다. 영영 잘라낼 도리 없는 욕심을 품고 흑천으로 돌아가 봤자 그저 예전의 추한 인간으로 돌아갈 뿐이다.
“어린 시절의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흑천으로 갔습니다. 좋은 꿈이었지요. 하지만 이제 내 잘못을 마주하기 위해 떠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로소 그 자리가 제 몫이 아님을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홀가분했다.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교월은 단서를 덧붙였다.
“저는 염 공자를 막지 않을 겁니다. 정보를 은폐하지도 않을 예정이고요. 유일하게 드릴 수 있는 도움은 먼저 출발하게 두는 것뿐입니다.”
“일단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요.”
유운이 떠나는 순간, 사제는 그의 기억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다.
애초에 이 상황은 반쯤 눈 가리고 아웅에 지나지 않았다.
승한은 단서를 전부 손에 쥐고 있었다. 그걸 언제 꿰어 맞출지는 오로지 승한의 선택이었다.
“본인의 안전을 장담할 수 있습니까?”
“모르지요.”
유운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들이 모용세가에서 온 이상 언젠가 마주해야 할 악몽 아니겠습니까.”
***
문가에서 비질하던 하인이 거나하게 하품을 했다. 어차피 오가는 손님도 없는데 왜 이런 곳까지 관리시키는지 모르겠다고 내심 투덜거리던 그는 길 저편에서부터 먼지가 일어나는 걸 목격했다.
준마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지나치는가 하였는데 기수가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균형을 잡는 감각이며 말을 다루는 솜씨는 여간내기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깊이 눌러쓴 겉옷을 뒤로 넘기니 드러난 얼굴은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하인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상대를 바라봤다. 어서 용건이나 말하고 꺼졌으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뉘슈?”
“내 금화 소저를 만나러 왔네.”
용건을 밝히자 하인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곧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가 싶더니 면전에서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코가 부딪힐 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 물러난 유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잡상인 취급이라기엔 문을 열러 나온 하인의 낯에 경악이 가득했다. 금화 소저라는 말이 여기에선 금기라도 되는 걸까?
유운은 오래지 않아 문이 거칠게 열리는 것을 마주했다. 그 너머에는 손수 문을 열어젖힌 성급한 여자가 서 있었다.
“혼례까지 올려놓고 문전박대라니, 참으로 우습군.”
“첫날밤에 신부를 소박 놓은 신랑이 참 많은 걸 바라십니다.”
바로 어제 만난 사이처럼 주고받는 언사에는 뼈가 있었다.
“납치당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두지.”
제대로 혼례가 끝나지도 않긴 했으나 합환주를 나누어 마시고 부부가 될 뻔한 사이라기엔 지나치게 살벌한 기류가 맴돌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주인이 대화를 나누는 중임에도 과감하게 끼어든 호위무사의 음성은 여전히 묵직했다. 유운의 시선이 금화 소저의 뒤로 향했다.
자신에게 약을 먹였던 그 사내다.
무진이 자신을 찍어누르던 밤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러나 유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앞장서게.”
모용금화는 이를 악물긴 했으나 이 일을 전혀 모르는 하인들 앞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내보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진은 유운을 위협하듯 가장 뒤에서 따라왔다.
안내된 방은 분명 처음 와본 곳임에도 묘한 향수가 느껴졌다.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는 가풍이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모란이 새겨진 가구며 문장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정말 모용세가의 장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부러 시선을 천천히 움직인 유운이 입을 열었다.
“모용세가의 출신이라면 미리 말해 주지 그랬나. 좀 더 극진히 대접했을 텐데.”
“그 구석진 마을에서 얼마나 구색을 갖출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공자님께서 자존심을 지키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못 본 건 아쉽긴 하군요.”
입에 칼을 물고도 모용금화는 그때처럼 유운을 억압할 수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없다. 아주 아둔한 이라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 눈앞의 사내는 흑천의 대공자로 한평생을 지냈다.
교활한 노강호 사이의 알력 다툼이며 정치적 셈법에도 밝은 모용유운이 아무런 방비도 없이 나타났을 리가 없지 않나.
손발이 자유로움에도 덫에 걸린 듯 목이 조여드는 기분이다.
“차나 한잔 내주지 그래?”
완양루에 굴러들어온 모용유운을 확보하려고 시도하지 말았어야 했다. 애초에 혼례에 실패했을 때 완전히 물러나야 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눈앞이 거멓게 물들었다가 다시 하얗게 변하기를 반복한다.
“자네들의 행보가 퍽 인상 깊더군.”
모용금화가 긴장했음을 알아챈 유운이 입을 열었다.
“혼례도 그렇고……. 모용세가의 안주인 자리를 그렇게 가지고 싶었나?”
느릿느릿한 어조에는 의도적인 모욕이 담겨 있었다. 추궁이라기보다는 상대를 뒤흔들기 위해 마구 던지는 말에 가까웠다.
“내가 더는 흑천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일을 벌인 것 같던데. 일이 이렇게 된 거 협박범들을 치워버리고 모용세가를 차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지.”
슬쩍 운을 떼자 모용금화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게 보였다.
“왜요. 빈털터리로 쫓겨난 신세라 새삼 옛날에 집이 그리우셨습니까?”
“아무리 쫓겨난 처지라도 말이야, 내가 험한 꼴을 당했다는 걸 알면 흑천에서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나?”
유운의 말에 모용금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진랑이 제 제자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는 그녀도 잘 알았다. 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지 않았던가.
“사부님은 길길이 날뛰실 테고 내 사제는 그분의 진노가 미치기도 전에 그쪽의 목을 베어 버리겠지. 모용세가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 정도는 물갈이될 테고 말이야.”
흑천에 이 일을 알릴 생각은 없었기에 반쯤은 허장성세였다.
사제가 언제 쫓아올지 모르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유운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왔다.”
두 사람이 그렇게 대단하고 무서워 보였다. 그때의 유운은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곳이 없다고 생각했고 한순간에 무예도 명성도 부귀도 전부 잃어 지독하게 무력한 사람이 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과 그때의 차이라곤 오로지 마음가짐뿐인데 모용금화나 그녀의 뒤를 따르는 무진이 두렵지 않았다.
‘사제의 뻔뻔함이 옮았나.’
유운은 승한의 생각에 풀어지려는 입매를 단단히 굳히며 모용금화와 시선을 마주했다.
“모용금화. 네가 정말 모용의 피를 잇는 자라면 내 질문에 답하라. 직계의 피를 탈취해 다음 대를 이끌어나갈 모용세가를 네 손에 쥐고 흔들려 했나?”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말없이 시선만 주고받았을까, 불현듯 금화 소저가 입을 열었다.
“그래. 차라리 당신이 가지는 게 낫겠어.”
그건 유운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혼잣말이었다.
“아가씨!”
무진이 다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하지만 모용금화는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봤다.
“어차피 일은 실패했어.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느니 서역으로라도 도망치는 게 낫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이럴 바에야 이실직고하고 그 인간이 망하는 꼴을 봐야겠다.”
고개를 홱 돌린 모용금화의 눈이 형형했다.
“모용세가의 직계를 상대로 모략을 꾸민 건 접니다. 저이는 제 명을 수행한 죄밖에 없으니 부디 소녀의 목숨으로 죄를 갈음해 주십시오.”
“나는 심판하러 온 게 아니다.”
모용세가로 돌아가 패권을 쥘 생각이 있다면 또 모를까, 유운은 그저 제 꽁무니에 붙은 승냥이를 치우고자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왔지. 혼례를 올리려고 한 게 납치를 위한 초석이 아니라는 걸 이해했다. 하지만 그 춘약은 뭐지?”
“아이를 가져야 했으니까요.”
모용금화가 일갈했다. 유운은 그 말에 크게 동요하진 않았으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적어도 그래 보였어야 했습니다.”
눈을 내리까는 여인의 낯에서 그 나이답지 않은 짙은 피로감이 묻어나왔다. 마치 엊그제 환갑을 치른 노인 같다.
“어린 나이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가끔 아버지가 그리웠지요. 나이가 다 차고 그런 환상을 탈탈 털어낼 무렵, 모용세가의 장로라는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유운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자신에게 딸이 필요하니 입적만 되어준다면 아주 귀하게 대하고 비단 혼례복도 입혀 주겠노라 그리 약속하지 뭡니까. 아무렴 어때 하고 그 손을 잡고 따라갔으면 편했을 텐데, 가족은 필요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고 하니 대로하더군요.”
가족은 필요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는 발언이 모용길상의 역린을 건드리기라도 한 걸까?
“그길로 끌려갔습니다. 귀한 아가씨 몰골이 될 때까지 식사도 굶겨가며 외울 책, 배울 악기를 들여보냈고 고상한 몸가짐을 위한 스승님도 모셔야 했습니다.”
지옥 같은 계절이었다며 그녀는 어깨를 살짝 떨었다.
“무슨 사람이 아니라 혈통 좋은 개 기르듯이 구는 이를 어찌 마음 깊이 존경하고 부친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장사치도 그보다는 존중받을 만한 인생을 살 겁니다.”
산골 마을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련하게 웃고 사뿐사뿐 걸어 다니던 금화 소저는 정말 매서운 혀를 가지고 있었다.
“반쯤 미칠 것 같은 환경에도 어떻게든 적응하게 되더군요. 제가 순종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모용길상은 몸이 아파 타지에서 요양하던 딸, 모용금화라는 신분을 만들어내고 제게 호위도 붙여 주었습니다. 그때 무진을 만났지요. 다행히 어린 시절에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덕분에 간신히 숨통이 트였습니다.”
모용금화의 목소리가 반쯤 기어들어 갔다. 본인이 무진을 특별하게 여기는 기색을 무심코 내비쳤다가 약점을 드러냈음을 깨닫고 수습하려는 기색이었다.
“제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건지, 모용길상은 저를 데려온 목적을 밝혔습니다. 모용세가의 직계가 흑천에서 자라다가 큰 실수를 저질러 백라궁주의 눈 밖에 났으니 그의 자식을 데려와서 미래를 도모할 예정이라고요.”
‘미래를 도모한다’라.
유운의 낯이 희게 질렸다.
“모용유운의 자식을, 특히 아들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건강하고 무재를 가진 아이를 하나만 낳는다면 놓아주겠다고 그리 약속까지 했습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진실이라는 걸 확인하는 건 결이 다른 불쾌감을 선사했다.
당금 모용세가의 지도자를 꼽으라면 다들 모용길상을 떠올릴 것이다. 한데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유운의 자식까지 손에 넣으려 들었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망집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아주 공들여 사람을 심고 날짜를 골랐지요. 적당한 거리에서 당신의 일과를 관찰하고……. 어떻게 접근해야 손쉽게 넋을 빼놓을 수 있을지 같은걸요. 하지만 이게 웬걸, 어찌나 의심이 많던지.”
금화의, 아니, 모용길상의 계획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당신을 강제로 잡아다가 눈 딱 감고 저지르면 저야 좋았겠지요. 나도 부귀영화를 누릴 테고, 내 자식은 오대세가의 차기 가주가 되어 어려움이 뭔지도 모르고 자랄 테니까.”
재잘재잘 떠드는 모용금화의 음성에는 한껏 과장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이 멋대로 그려낸 찬란한 미래가 얼마나 작위적이고 허망한지 잘 아는 눈치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라서…….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취할 수는 없었습니다. 발정기의 동물처럼 접붙인다고 끝나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런 건 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었어요.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모용금화가 중얼거렸다.
모용길상에게 분통을 터트리던 때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유운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내게 먹인 약은 대체 뭐였지?”
그 약 때문에 승한과 부대끼며 얼마나 고생했던가?
“약은 세 가지였습니다. 먹는 음식에 든 것과 합환주에 든 것, 그리고 무진이 당신에게 먹인 것.”
모용금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중화제입니다.”
왜 중화제가 이처럼 얼토당토않은 부작용을 일으켰단 말인가?
“모용길상이 건넨 약에 구체적으로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만들 수 있는 중화제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빼돌릴 수 있는 양에도 한계가 있었고……. 의원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했지만, 모용길상 모르게 찾아낸 자 중에서는 그가 최선이었습니다.”
유운의 의아함이 묻어났는지 모용금화는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부작용의 존재를 알았던 시점에서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약 때문에 기억이 일부 날아갈 수도 있다고 들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지요. 당신이 우리 둘이 초야를 치렀다고 착각하면 그길로 무진과 아이를 만들어서 모용길상을 속일 생각이었으니까요.”
이제 좀 말이 됐다. 부작용도 부작용인데 단전이 파괴된 게 아니라 봉인당했다는 걸 몰라서 이 사달이 난 거다.
애초에 사천 바닥에서 손꼽히는 의원인 야소도 이렇게 복잡하게 꼬인 몸은 처음 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저 무진이라는 사내는 좋아하는 모양이군.”
“이 미친 곳에서 제대로 정신머리 박힌 사람이라곤 무진밖에 없었으니까요.”
까칠한 투로 답하긴 하지만 모용금화에게서는 애정이 묻어나왔다.
“그 마을에 있던 일꾼의 반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남은 반은 모용길상의 감시자였답니다. 지긋지긋한 인간이죠.”
유운은 살짝 떨리는 손을 옷자락 아래로 숨겼다.
끔찍했던 혼례의 기억 뒤에 숨겨진 진실이 그의 평정을 뒤흔들었다.
“혼례 때도 그랬나? 그 감시자 말이야. 나뿐이 아니라 그쪽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확실한 내 편은 여기 있는 무진뿐입니다.”
흑천의 일에 스스로를 매몰하며 애써 돌아보지 않은 모용세가가 괴물을 키워냈구나 싶어 유운은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눈앞의 여인이 겪은 불행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제 이야기는 이걸로 끝입니다.”
유운의 침묵을 어찌 받아들인 건지 모용금화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유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다면 완양루의 일도 모용금화라기보다는 모용길상의 안배로 시작된 거라고 보는 게 옳다. 모용금화는 완양루가 휘청거릴 때 모용세가에 소속조차 안 되어 있는 상태였을 테니까.
“잘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비틀거리는 유운을 무진이 반사적으로 부축했다.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그 손을 내친 유운은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하군. 내가 지금 다소 과민하여.”
“이해합니다.”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무진이 뒤로 물러났다. 모용금화가 초조한 낯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잠시 쉬고 싶은데, 안내를 부탁하지.”
무진에게 건넨 말은 금화와 자신 모두에게 필요한 시간을 청하는 것이었다.
“너무 오래는 곤란해요. 이 장원에도 모용길상의 사람이 있으니까…….”
유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금화가 홀로 남겨진 방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무진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차마 만류할 틈조차 없이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모용 공자님께 저지른 무례는 제가 갚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정을 준 여인이라 그리 감싸는 건가?”
번갈아 가면서 죄를 청하니 자신이 악당이 된 기분이다.
“아니요. 그분이 절벽 끝에 내몰려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모용길상은 아가씨께서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을 내비치면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부디 선처를―”
“정파무림인이, 그것도 모용세가의 장로라는 자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에게 손찌검을 했다고?”
유운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어서 고스란히 반복했다. 무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흑도무림에서 지내며 못 볼 꼴 참 많이도 봤다고 생각했다. 한데 백도무림, 그것도 오대세가 중 하나를 이끄는 사내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에게 손찌검이라니.
하물며 모용금화는 허울로나마 모용길상의 딸이 아닌가.
저녁상조차 받지 않은 채, 유운은 방 안에서 끙끙 앓았다. 승한에게 그렇게 거칠게 박힌 뒤에도 어떻게든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지금은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가 들지 않는다.
삶의 풍파에 떠밀려 뭍으로 내던져진 기분이 이럴까. 흑천주의 자리를 탐낸 자신이 얼마나 아둔한 욕심쟁이였는지 기억하는 유운은 모용길상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자신을 겹쳐 볼 수밖에 없었다.
왜 이토록 부끄럼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았을까.
그때 무언가가 툭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 돌아누우며 이를 무시하니 또 소리가 났다.
툭, 데구르르…….
그 이후로도 거푸 반복되는 소리에 참지 못하고 일어난 유운은 창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작고 동그란 것이 날아들었다.
‘도토리?’
창틀에 내려앉아 데굴데굴 구르던 도토리는 유운의 손에 툭 하고 닿은 뒤에야 멈췄다.
“나오거라.”
정원의 어둠 속에서 승한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도망칠 거면 좀 더 멀리 가셨어야지요.”
교월에게서 말을 전해 들어 놓고 또 저 좋은 대로 왜곡한 모양이다.
유운은 지친 눈으로 승한을 바라봤다.
“왜 여기까지 쫓아온 거지?”
이제 기억을 찾았다는 걸 알았을 텐데. 연즉 자신이 거짓말로 속여왔다는 것도 명명백백해졌는데 무얼 위해서?
승한은 어느새 창가에 당도해 있었다. 거의 구름 위를 걷듯 가벼운 움직임은 추적이 아니라 산보를 나온 사람 같았다.
“사제가 대사형을 따라다니는 게 이렇게 추궁당할 일입니까?”
“너는!”
유운의 얼굴이 분기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날 동정해서 이리 쫓아오는 것 아니냐. 내 바닥을 봤으니까!”
승한은 저를 밀어내는 유운의 손에 순순히 밀려났다.
고작 한 뼘 떨어진 것으로 숨을 거칠게 들이켠 유운은 제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무리 가슴을 긁어내도 그 너머에 새겨진 감정까진 긁어낼 수 없었다. 그래도 유운은 미련한 사람답게 손가락 끝을 세워 제 가슴을 긁고 또 긁었다.
승한에게 내보이지 않기 위해 돌린 낯이 무너질 듯 처연했다.
얼굴을 보진 못해도 눈물의 냄새를 맡기라도 한 양 승한은 씩 웃었다.
“사형은 좀 둔한 구석이 있습니다.”
유운은 그 말에 기가 찼다. 둔하다니? 자신이?
“제가 동정 같은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이에요.
사내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전 짐승 새끼라 찢고 부숴버리는 건 알아도, 집어삼키고 손에 쥐고 안 놓는 법은 알아도 남의 감정 같은 건 모릅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부분이 결여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낯은 그의 말마따나 인간 같지 않았다.
“나보다는 순했지.”
유운은 지독하게 까탈스러웠던 본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승한이 쓰게 웃었다.
“글쎄요. 저는 대사형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착한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
보호자를 잃은 승한은 사마련주의 손에서 보호받다가 그녀의 사후, 예진랑의 손으로 넘어갔다. 어차피 달리 갈 곳도 없으니 그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굶어 죽기 전에 새 보호자를 만나 다행이라 여기며, 승한은 낯선 이의 손을 잡고 흑천에 도착했다.
한데 예진랑에게는 이미 제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명문세가 출신인 모용유운이었다.
유운의 삶은 얼핏 승한과 비슷했다. 가문과 가족이 전부 혈교의 손에 몰살당하고 진랑의 손에 거두어졌다는 점이 특히 그러했다. 그러나 유운과 승한이 상실에 대처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어린 유운은 아직 참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앓아누울 때가 있었고, 진랑은 승한과 함께 있다가도 자신의 첫 제자를 찾아갔다. 승한은 왜 예진랑이 다른 사람에게도 시간을 할애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교에서 나고 자란 승한이 보기에 모용유운은 재능은 있어도 이를 다 발휘하지 못한 채 고꾸라져 죽을 멍청이였다. 련주를 잃고 분열 직전까지 간 사마련에 기둥을 세우고 흑천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 건사하기에도 바쁜 진랑이 그런 아이에게 시간을 쏟아붓는 건 낭비였다.
진랑에게 우선순위가 존재한다면, 그 가장 위에 이름을 올리면 된다.
“악! 대공자님!”
발을 동동 구르던 시비가 비명을 내질렀다. 지붕에 올라간 고양이를 구하려다가 미끄러진 유운은 머리를 크게 다쳤다. 진랑이 허겁지겁 달려와 손을 쓰지 않았다면 죽었으리라.
나름 철저하게 자신의 개입을 숨겼으나 진랑은 오래지 않아 빙연당으로 찾아왔다. 이미 다 외워 흥미가 없던 서책을 넘기던 승한은 진랑을 보는 순간 그가 일의 전말을 꿰고 있음을 짐작했다.
조용히 무릎을 꿇자 진랑이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는구나.”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신이었다.
“실패가 아쉬울 뿐입니다.”
승한은 웃었다. 배움이 짧아 그가 할 줄 아는 표정이라곤 조모가 가르친 웃음뿐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빽빽 울어대는 유운보다는 방긋방긋 웃을 줄 아는 자신이 진랑에게 덜 번거로운 제자가 될 거라 생각했다.
맹세컨대 악의는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첫째는 많이 놀랐지만 머잖아 회복될 거다.”
진랑의 설명에 승한은 왜 그런 걸 가르쳐 주냐는 듯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네게 그의 안위가 철전 한 푼만큼의 값어치도 없다는 건 안다.”
사부님의 음성은 건조했다.
“하지만 너는 내 눈을 피해 손을 쓰려다가 실패했지. 이제 네가 원인이라는 걸 알았으니 다시 시도해도 실패할 거다. 어떻게 생각하니?”
“같은 시도를 하는 건 낭비가 되겠군요.”
승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뜻이 좌절당했지만, 화를 내진 않는구나. 분하지 않니?”
진랑은 소년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하며 집요하게 물었다.
“약해서 실패한 건 저예요. 사부님에게 화를 내는 건 이치에 맞지 않지요.”
검은 조약돌처럼 반질반질한 눈을 들여다본 진랑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럼 됐다.”
낯선 반응이다.
보통은 승한이 한 말에 진저리를 치고 화를 내거나 울었다.
다시 유운을 치우려고 시도하지 않겠다는 말에 안도한 거 같지도 않다.
“너는 위계와 효율을 중시하니 다시 첫째가 다칠 일은 없겠어.”
“왜죠?”
승한의 음성은 그답지 않게 날카로웠다.
“내가 너보다 강하지 않니.”
맹랑한 꼬마 정도는 한 손으로도 요리할 수 있을 거다.
“이상해요. 보통 해가 되는 걸 치우는 게 맞잖아요.”
진랑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나는 지금 첫째만 보호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너 또한 내 제자다.”
웃는 낯이 산산조각이 난 면경처럼 깨지고 난 자리에는 무표정한 얼굴이 남았다. 진랑은 아이의 열없는 눈에서 혼란스러움을 읽어냈다.
“저는 고쳐야 하는 게 아닌가요?”
소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중원 사람들이 극악무도하다며 손가락질하는 천마신교의 마인조차 승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거리를 뒀다. 감정을 잘 모르고 욕망에 충실하다는 건 결국 약점이라 그 강자존의 세계에서 빠르게 도태되기 마련이었다.
다들 염가에서 괴물이 태어났다고 말했다. 한데 자신이 벌인 일을 보고도 보호해 주겠노라 말하는 광인은 처음이었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명의 삶이 있듯, 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만 가지 삶의 방식이 있는 거다. 넌 황하의 잔모래보다도 많은 그 무수한 삶의 하나일 뿐이야.”
진랑은 소년의 눈을 바라본 채 나직이 덧붙였다.
“그저 맞는 옷을 찾으면 된다.”
그걸 찾는 것마저도 승한이 아니라 보호자인 자신의 몫이라 하는 예진랑을 보며, 승한은 일월신교에서도 느끼지 못한 소속감을 흑천에서 느꼈다.
물살 따라 떠내려가던 승한에게도 닻이 생긴 후, 그는 제 주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운은 그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승한은 인간의 방식을 모방하기 위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대사형에게 딱 달라붙어 다녔기 때문이다.
유운은 승한의 우는 시늉에 약했고 웃는 얼굴에는 넌더리를 냈다.
멀어지면 가까이 오게 유도해 놓고는 성큼 다가서면 자긴 그런 적 없다는 듯 서책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그가 외로움을 지독하게 타는 인간이며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 유운이라도 진랑만 나타나면 승한은 찬밥이 되고 말지만, 피차일반이다.
대사형은 여러모로 모방하기 좋은 대상이었다. 같은 사부님을 모시고 있는 데다가 생활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니 겪는 일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승한은 유운을 외우고 그가 사부님을 대할 때의 표정을 따라 하고 악몽에서 깨어나 벌벌 떨 때의 절망을 시늉했다. 그러나 도무지 그의 가슴에 맺힌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마교 출신이고 그가 정파무림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면경으로 비춘 듯 꼭 닮은 상황임에도 유운은 모든 면에서 승한과 달랐다. 그의 울음과 웃음 모두 승한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소년은 자신이 앞으로도 연거푸 겪게 될 벽을 더듬어 보았다.
그건 외로움이라기엔 너무도 건조한 감정이었다.
강자존의 마교에서 태어난 승한은 다른 건 몰라도 강한 자가 내거는 규칙은 철저히 지켰다. 까닭에 유운이 다시 위험해지는 일은 없었다.
두 제자를 면밀히 관찰하던 진랑은 이를 어렵지 않게 알아채고 손 많이 가는 둘째에게 인간을 차근히 가르쳤다.
“인간은 태어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어떤 선택을 내리고 살아가는지가 그 인간을 결정짓는 거다.”
인간을 배우는 건 검법을 익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해진 궤도를 따라 휘두르지 않으면 눈먼 검은 다른 이나 그 자신을 다치게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규칙을 지키면 소년은 제법 그럴듯한 검법을 펼쳐낼 수 있었다.
대체로 가슴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머리로 외워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변 사람이 아프거나 다치면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다른 이가 기쁘다고 말할 때 웃는 법 따위를 배웠다.
머릿속으로는 셈을 마쳐도 이를 내색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며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과 편의만으로 사람을 줄 세우지 않는 법을 배웠다.
“당장 내가 이 검을 들고 사람을 죽인다면 살인마가 될 것이다.”
진랑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검을 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죽인 것이 민초를 괴롭히는 산적이나 무고한 자들을 착취한 쓰레기라면 오히려 협객이라 불릴 거다.”
“같은 죽음이어도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에 따라 달라지는군요.”
“그래. 일단은 이 가치를 알아보는 눈을 키우도록 하자. 인간이 지니는 보편적인 감정과 그에 따른 반응을 외우는 거다.”
무거운 숙제가 주어졌으나 승한의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진랑은 승한에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라 강요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고작 그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어떤 종류의 괴물인지 이해하고 있는 보호자가 존재한다는 건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행운이었다.
탁월한 가르침 덕에 승한의 변모는 순조로웠다. 그는 언제 웃어야 하고 울어야 하는지 구별할 수 있게 되면서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이공자님’에서 ‘잘 웃고 아랫사람들에게 관대한 이공자님’으로 바뀌었다.
고작 평판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한다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그는 호의보다 공포가 상대를 조종하기 쉽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이 모든 게 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호의는 쉬이 티가 나지 않고 그걸 무엇에 쓸지 알 수 없지. 그에 비해 증오나 공포는 격렬하고 분명하지.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기도 쉬우니 너는 그쪽을 더 선호하게 되는 거다.”
진랑은 승한을 면밀히 관찰하더니 조심스레 평했다.
“하지만 정말로 네가 효율을 따진다면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멀리.
영 낯선 말이다.
“쉬운 길을 돌아가는 게 아니다. 뻔하고 위험한 길을 피하는 거야.”
승한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뿐이 아니라 온갖 서책도 읽었다. 개중에는 병법서까지 존재했다.
앎이 늘어날수록, 진랑이 무얼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인이 저울의 눈금을 속여 순간의 이득을 얻는 건 쉽고 편한 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눈금을 속였다는 것이 들켜 관아에 추포당하면 평생 쌓아온 것을 잃게 되는 멍청한 길이다.
호의와 증오를 갈라서 생각할 수 없었던 승한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이해해갔다.
진랑이 애먹은 부분은 바로 승한의 폭력성이었다. 그는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했고 무언갈 부수고 파괴하는 것도 좋아했다.
처음엔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그 욕구가 충족되었으나 승한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던 예전과 달리 최소 두세 번 더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게 된 탓도 있었다.
어느 하루, 대련 상대로 나선 흑천의 무인을 제압한 후에도 검을 휘둘렀다. 여태 잘 해내왔으나 결국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승한이 이 실수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련이니 어느 정도 부상을 입혀도 평판에 큰 문제가 없다. 어린아이의 실수에 사람들은 더 관대하기 마련이고, 상대는 어른이니 내게 패배한 데다가 크게 다치기까지 하면 부끄러움에 말을 삼갈 거야.’
그 순간, 승한의 검이 허공에 멎었다. 힘을 뺀 것도 아니고 누가 대신 막아선 것도 아닌데 멈춰버린 검에서 손을 놓자 이는 두둥실 떠서 홀연히 나타난 사내에게로 날아갔다.
순간 인내심을 잃은 제자를 막기 위해 허공섭물을 사용한 진랑이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구나.”
척 보기에 화라도 난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승한은 겁먹지 않았다. 그를 ‘외운’ 승한은 진랑이 고심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막막하고 긴 동굴 속에서 처음으로 빛줄기를 발견한 기분이 이럴까, 예전엔 가져보지 못했던 확신에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상대를 잘 알게 될수록 실수가 줄어들고 조바심이 사라진다. 익숙할수록 잘 길들인 신발처럼 편해진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진랑은 잡기에 능했으므로 폭력과 무관한 방법을 여러모로 탐색했다. 단지 승한은 의술을 배우면 환자의 몸을 속속들이 파헤치려 들었고 정원을 꾸미는 데에도 관심이 없고 약초를 키우면 대부분 방치로 이어졌다.
승한도 진랑도 거의 포기할 무렵이었다. 유운의 생일에 연주하러 온 악사들이 승한의 눈에 띄었다.
“음악을 좋아하십니까?”
아직 데면데면한 사제의 질문에 유운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좋아하는 편이지.”
부실한 답이었다. 승한이 금세 흥미를 잊으려는 무렵, 유운이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음악은 삶에 꼭 필요한 게 아니야. 연주를 듣지 않는다고 해서 굶어 죽진 않으니까. 하지만 들으면 귀가 즐겁고 글공부나 무공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지.”
음악이 필수불가결의 것이 아니라는 유운의 말은 오래도록 승한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유운의 말마따나, 음악 같은 게 없어도 사람은 얼마든지 삶을 살 수 있다. 승한 역시 시간을 악기 연주 따위에 할애하는 걸 자연스럽게 낭비로 분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한은 그 무의미함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사부님을 만난 이래 그가 걸어온 길이 내내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 일의 연속이었으므로.
“금을 배우고 싶습니다.”
제자의 눈에서 결심을 읽은 건지 진랑은 사천과 감숙 일대에서 입이 무겁고, 탄주 실력이 빼어나며 승한에게 휘둘리지 않을 악공을 찾았다.
그렇게 사천제일루의 왕교월이 물망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화월루에 찾아가기 전, 승한은 진랑이 엄선한 세 명의 악공을 이미 만나본 후였다. 어린아이라 우습게 보거나, 짐짓 엄하게 을러대는 이도 있었고 진랑의 위명에 기대고자 하는 욕심쟁이도 있었다. 금 스승이 아니라 시체 세 구가 나오면 역시 진랑이 곤란해질 것 같아 승한은 그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다.
붉은 등이 줄지어 걸리는 거리에 찾아온 앳된 소년의 모습에 다들 당황하면서 보호자를 찾아주려 애쓸 때, 왕교월은 승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길 잃은 아이가 아니다. 안으로 모셔라.”
들켰다는 듯 웃는 소년을 진지하게 상대해 준 건 왕교월이 처음이었다. 승한은 그녀가 자신을 얕보다가 죽을 일이 없을 것임을 확신하고 금을 배우고자 하는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천기에게 몇 소절 배운다고 하여 스승이라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승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은 여타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형식을 따져야 했다. 규율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야 남을 할퀴지 않는다.
“하지만 저는 배움을 청하러 왔고, 가르침을 준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스승으로 섬겨야 합니다.”
교월은 결국 납득했고 그렇게 승한은 두 번째 사제지연을 맺게 되었다.
인내심을 위해 금을 고른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일단 두 손이 바쁜 까닭에 다른 짓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검을 뽑을 수는 있어도 한 손으로 연주를 할 정도로 능하지 않았다.
물론 가끔 사고도 났다.
화월루에 금을 배우러 갔다가 교월을 강제로 데려가려는 고관대작의 아들을 금으로 두들겨 팼다. 분명 교월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저 새끼 때문에 자신의 순서가 밀려난다는 것에 번거로움을 느꼈을 뿐이다.
하나 진랑은 그 망나니의 부친이 탈세를 했다는 사실을 터트리는 걸로 완전히 몰락시켜 버린 뒤 승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새 악기를 선물했다.
“잘했다.”
“저는 금을 가르치는 스승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제 시간이 낭비될까 염려하여 그 무뢰한을 치워버린 겁니다.”
“네가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내겐 설명할 필요가 없어.”
진랑은 무심코 기대를 품는 법이 없었다.
행여라도 자신이 정상이 되었을까 기대하고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았음을 깨달은 승한은 조금 놀랐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거의 달팽이만큼이나 느릿한 속도였으나 자신은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나 외에도 네게 중요한 사람을 만들었다. 상대의 우선순위를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그런 뜻이지.”
“……그렇습니까.”
승한은 무표정한 낯으로 웅얼거렸다. 제자를 오래 보아온 사부는 그가 나름의 방식으로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럼 이 금은 상이 아니군요?”
소년이 검은 광택이 맴도는 금을 꼭 끌어안으며 하는 말에 진랑은 웃었다.
“네가 한 걸음 더 내디딘 것에 대한 축하 선물이다.”
치하가 아니라 축하.
승한은 증오와 호의만큼이나 구별하기 어려운 그 두 단어가 닳도록 혓바닥 위에 굴려봤다. 온통 같은 색으로 칠해진 세상에서도 다른 색이 존재한다는 걸 점차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무심코 오만했다.
어느 하루, 유운은 마른 우물가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어 하십니까?”
“가락지가…….”
입술을 질근질근 씹는 유운은 우물 안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승한은 유운이 자신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우물 안만 들여다보는 것이 의아했다.
“그게 뭔데 그러십니까?”
“어머니의 유품이다.”
“유품.”
어색한 단어를 발음하며 승한은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내려가서 가져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경공 공부가 부족해서……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거야.”
“그럼 제가 저 두레박 줄을 잡고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가락지를 찾으면 대사형이 끌어 올려 주세요.”
흔쾌히 나선 것은 저 가락지를 찾았을 때의 유운의 얼굴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말?”
고개를 들어 올린 유운이 반색했다. 이미 기쁨으로 가득한 낯에 승한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두 소년은 도르래에 엮여 있던 줄이 낡아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수색에 돌입했다. 승한은 그 줄을 잡고 양발을 우물 벽에 걸친 채로 천천히 내려갔다. 말라붙은 우물이긴 해도 빛이 잘 들지 않아서인지 습하고 어둑했다.
평범한 아이라면 울음을 터트리고 어서 끌어 올려 달라고 할 법도 하지만 승한은 차분하게 두 눈이 어둠에 적응되기를 기다렸다.
승한은 유운의 모친이 남긴 유품을 비교적 금세 발견했다. 툭 튀어나온 벽돌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찾았니?”
저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승한은 가락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답했다.
“모르겠어요. 사형. 보이지 않아요.”
우물 속에서 울리는 음성은 꾸미지 않아도 곤란함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하늘의 달 같은 유운이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게 보였다.
‘좀 더 초조해했으면 좋겠는데.’
그럼 유운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품을 잃어버린다면 무너져서 엉엉 울까? 아니면 제때 찾아내지 못한 자신에게 화를 낼까?
어느 쪽이든 승한은 유운의 반응이 궁금했다. 더 격렬할수록 좋다.
그를 속속들이 알아내면 남을 더 잘 흉내 낼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아니야. 그냥 올라와. 내가 괜한 부탁을 했어.”
낙담이 묻어나는 유운의 음성에 승한은 속으로 혀를 차고 외쳤다.
“아, 앗! 사형. 여기 있어요!”
가락지를 챙긴 승한은 두레박 줄을 툭툭 건드렸다.
“이제 끌어 올려 주세요.”
유운은 시키는 대로 줄을 끌어 올렸다. 얼굴이 반쯤 우물 밖으로 나왔을 때, 승한은 가락지를 유운에게 내밀었다.
소년의 눈이 드물고 진귀한 색채를 머금고 빛났다.
순간, 유운에게 건네던 그 가락지를 놓친 것이 고의였는지 아니면 실수였는지 승한은 지금으로서도 영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단지 무언가 빛나는 것이 떨어지는 순간 무심코 손을 뻗었고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두레박의 줄이 툭, 하고 끊어졌다.
“아……!”
“승한!”
악을 쓰며 유운이 몸을 반쯤 내던졌다. 우물에 상반신을 다 내민 대사형이 승한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강렬한 통증이 승한을 사로잡았다. 고통에 대한 역치가 높았음에도 유운의 손은 델 듯이 뜨거워서 쳐내고 싶었다.
유운은 있는 힘껏 승한을 끌어당겼으나 결국 두 소년은 우물 안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승한이 정신이 들었을 때, 저를 감싼 유운이 보였다.
떨어지는 동안 우물 벽에 부딪힌 건지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승한의 몸과 땅을 적시고 있었다. 자신은 손발이 너덜너덜해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차갑다.
자신을 덮치듯 누른 몸의 가슴은 여전히 오르내리고 있긴 했으나 유운의 호흡은 실낱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저 창백한 얼굴은 하염없이 들여다보게 된다.
그는 도무지 왜 유운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형이 자신을 귀찮은 덤, 내지는 사부님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경쟁자 취급하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진랑의 한정된 시간을 나누어 가져야 했다. 만약 승한이 유운이었다면, 이처럼 우연한 사고로 경쟁자를 치울 수 있다면 그 손을 놓아버렸을 거다.
제 몸을 던져서 막는 게 아니라.
‘왜?’
그가 외운 모용유운은 딱히 선하지도 않다. 헌신적인 성품도 아니며 승한에게 느끼는 것이라곤 애정이나 우의도 아니다. 기껏해야 알량한 책임감에 지나지 않을 터.
한데 왜 이런 선택을 한 걸까?
이 우물에 빠지기 전까지만 해도 진랑의 과제였을 뿐인 사형을 바라봤다. 호기심이 처음으로 싹트는 순간이었다.
승한은 유운의 가슴 위에 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심장의 박동이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우물 위를 바라봤으나 갑자기 황금 동아줄이 내려오진 않는다.
이대로 끝인가?
‘안 돼.’
그는 아직 모른다. 유운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어째서 눈엣가시나 다름없을 자신을 구했는지.
소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대공자님! 어디 계십니까!”
“이공자님!”
서늘하게 식어가는 유운을 보던 승한은 저 위에서 들리는 웅성거림에 최대한 기력을 짜내서 외쳤다.
“여기, 여기다!”
저 우물 위에서 흑천의 무인이 나타났다.
“대공자님!”
“이공자님도 여기에 계신다!”
제때 구해졌으나 유운은 쉬이 눈을 뜨지 못했다.
소년은 잠든 대사형의 머리맡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진랑이 몇 번이나 다녀갔으나 승한은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켰다.
사실 승한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특히 심한 곳은 손목이었다.
유운이 붙들었던 자리에 벌건 피멍이 올라왔다. 그 홧홧한 고통 위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승한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외운 몇 안 되는 것이 얼마나 쉽게 스러질 수 있는지.
처음 유운이 그 지붕에 올라가게끔 손을 썼을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은 걱정이라는 형태로 느낄 것을, 승한은 외려 상실에 가까운 감각으로 받아들였다.
아마 한평생 겪은 사건 중 가장 강렬한 것이 일가족의 죽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애써 외워 놓은 인간이 영영 사라진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낀 것일지도.
유운이 죽는다고 해서 승한은 슬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건 교류를 나눈 인간의 죽음이라기보다는 익힌 지식의 소실에 가까웠으니까.
한데 아까울지언정 아파서는 안 되는 상상에 손목이 욱신거렸다. 감정은 몰라도 고통은 아는 까닭에 이 기억이 유독 생생하게 뿌리를 내린 것일지도 모른다.
승한의 집착은 그렇게 싹을 틔웠다.
하여 소년은 오래되고 익숙한 것이 좋았다. 곁에 두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쉬이 바뀌질 않았다. 잡동사니라도 제 손에 들어온 이상 버리지 않아서 그의 방은 언제나 어수선하고 창고는 흘러넘쳤다.
외울 게 많아질수록 신경 쓸 게 늘었으나 승한은 어렵지 않게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삶을 소화해냈다.
쉬운 길. 그 뻔하고 위험한 길을 걷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은 매일같이 이어졌다. 보상이랄 건 존재하지 않는다. 진랑은 호의와 증오를 같은 무게로 셈해선 안 된다고 해도 승한의 눈에는 그게 언제나 같아 보여서 무심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인내해야 했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게 되면 승한은 금을 연주했다.
연주자가 대단한 기교를 부려도 민감한 악기는 그의 시끄러운 속내를 왱알왱알 세상 밖으로 토해냈다. 진랑은 그 끔찍한 소음을 싫은 기색조차 없이 들어주었고, 유운은 좀 제대로 된 스승에게서 배우라며 눈을 흘기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네 연주에 머리가 지끈거리는구나.”
‘소음은 대사형이 싫어하는 것. 싫어하는 걸 감수하는 건 상대에게 얻어낼 게 있어서 참는 것이거나, 혹은 두려워서 침묵하는 것.’
진랑도, 모용유운도 승한에게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 사제가 손이 부르트도록 연습했는데, 사형 정말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짐짓 우는 시늉을 하니 유운이 잔을 탁 내려놓았다.
‘심기가 상한 게 아니야. 목덜미가 붉은 걸 보니 당황한 거고. 이쪽을 쏘아보지 않고 잔을 내려보는 거니까 사과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거겠지.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보통 그러니까.’
“누가 살이 상할 때까지 탄금을 하랬더냐? 의각에서 받아 놓은 금창약이 있으니 이거나 가져가거라.”
이마로 날아오는 금창약을 낚아채니 서책을 읽고 있던 진랑이 입을 열었다.
“첫째야. 네 사제에게 물건을 던져서는 안 된다.”
“……네, 사부님.”
귀까지 붉어진 유운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승한에게 시선을 준 그가 망설이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
승한은 그가 낚아챈 전리품을 흔들며 조모님이 알려준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긴장한 유운의 낯에 서서히 안도가 번졌다.
결국 승한은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찾았다.
마도제일인 예진랑의 두 번째 제자. 모용유운의 귀염둥이 사제. 여기에 막내 사제 예강오가 끼어들며 주어진 유쾌한 사형 역할까지도 승한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떤 변화는 모든 걸 달라지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의 승한은 전혀 몰랐다.
***
“이래도 제가 멀쩡하고 온건한 애정으로 사형을 쫓아온 것 같습니까?”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틀을 넘어온 승한은 말간 낯으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표정이 전과는 달라 보인다.
일부러 그려낸 듯 저 꼴을 유지한다고 생각했었다.
유운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흑룡방주의 양자이긴 해도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곱게 자랐을 거라 생각했다. 일가족을 잃은 자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을 거라고, 무심코 그렇게 여겼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친이 잘 버티고 있음에도 일 년에 두어 번도 흑룡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사실에 이제야 위화감을 느낀다.
승한에게 그 하나 남은 양부조차 유운의 계책에 휘말려 죽었다. 사부님이 자리를 비운 동안 흑천에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휘하의 사파가 들고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쓴 건 바로 유운이었다. 흑룡방주는 그 소요를 틈타 암살당했다. 유운이 예상치 못한 부고 중 하나였다.
아무리 혈교의 간자인 임공진의 설득에 넘어간 거라 한들, 유운은 승한에게 씻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
‘남의 인생에 분탕질만 치고 살면서 난 염치도 없구나.’
기댈 곳이 승한뿐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의지했다. 해독과 금화 소저의 추적마저도.
주춤주춤 물러난 유운은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음울한 낯으로 올려다본 승한의 얼굴은 돌을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고 파도 한 번 일지 않는 바다였다.
“내가 네 아비를 죽였다고 해도?”
유운이 핏발 선 눈으로 고해한 진실을 음미하듯, 승한은 잠시 그를 내려다봤다.
“신기하네요. 분명히 마지막에 제 손에 심장이 꿰뚫렸을 때 돌아가셨는데, 그새 강시가 되어 다시 살아나시기라도 했습니까? 그다음에 대사형이 죽인 거라면 또 모를까…….”
사제의 과거사에 연이어 떨어진 벽력탄에 유운은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흑룡방주가 양아들과 함께 있는 동안 살수에게 당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심지어 당시 승한은 항전하다가 큰 부상을 입어 모두의 걱정을 샀다.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옳다구나 하고 사부님을 배신하려 들지 않았습니까?”
“네 양부와 내 무엇이 그렇게 다르다고. 배신한 그는 죽이고 나는 살려 놓는 거지?”
“다르지요.”
승한은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는 유운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며 그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몸이 휘청 뒤로 넘어가려는 것을 팔꿈치로 지탱하는데, 승한이 한쪽 무릎을 그의 허벅지 옆에 괴며 팔로 등을 끌어안는 양 붙잡았다.
“나는 대사형처럼 오래, 깊게 외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상 흥미가 생긴 적도 없고 호기심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저 오래 알아 편한 상대라면 네게 맞는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만나면 되지 않느냐? 너는 영특하니 그게 누구든 금방 외울 수 있겠지!”
유운은 덜컥 무서워졌다.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모른다는 양 말하면서 왜 저만은 특별하다는 양 입을 놀리는지 알 수 없었다.
승한의 품과 그의 언어에 무심코 기대게 될 것이 두렵다.
“어쩌면 제 그릇은 간장 종지만큼이나 얄팍해서 고작 한 사람 채우는 걸로 흘러넘친 것일지도 모르지요.”
남들은 애착을 가지면 조금 더 마음을 쓰고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고 하였다.
승한은 그런 애착을 잘 몰랐다. 다만 조금 더 많이 외운 대상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아 하는 것만큼은 그네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모르겠다. 이건 옳지 않아…….”
유운은 반쯤 헐떡이고 있었다.
“내가 사부님을 배신하고 너도 등졌단 말이다. 네 손으로 양부를 죽이는 상황을 만든 것도 나라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내가 밉거나 원망스럽지도 않아?”
“그러니 대사형은 횡재한 겁니다.”
횡액을 당한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참아냈는데 승한은 유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저는 미움이나 원망을 잘 모르니까요.”
이래도 되는 걸까.
유운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정말 머리가 덩달아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도덕의 경계가 희미한 승한에게 휘말려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결여된 감정이 주는 면책에 한없이 흔들린다.
자신은 정말 어찌할 도리 없이 뻔뻔하고, 또 한심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승한의 음성이 은근해졌다.
“제게서 도망치고 나면 이 야한 몸은 어쩌려고 하셨습니까?”
유운은 승한을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별일 없었다.”
사실 몇 번 수음을 시도하긴 했으나 별로 성과는 없었다. 지나친 자극을 겪은 나머지 유운의 음전하기 짝이 없는 손장난에는 그다지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은근히 그런 낌새가 있긴 했으나 승한과 몸을 섞은 이후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이 승랑 말고 다른 사내를 찾으셨을까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짐짓 속눈썹을 깜빡이며 가증스럽게 구는 사제를 내려다보며 유운은 심란해졌다. 승한은 몸을 숙여 유운의 바지춤을 풀어냈다. 그가 움직이기 수월하게끔 허리를 들어 주면서도 유운은 미미한 자괴감을 느꼈다.
승한은 양손으로 유운의 성기를 쥐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훌륭한 물건인데 한 번도 쓴 적이 없다니. 안타깝네요.”
안타깝다고 말하면서도 승한의 입꼬리는 샐샐 웃고 있었다. 그 사실에 지극히 만족하는 눈치였다. 유운은 노골적으로 제 하반신을 내려다보는 승한을 걷어차려 했으나 그의 손이 발목을 낚아챘다.
“네가 품어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 많구나.”
이를 악물고 쏘아붙이니 승한이 그 생각은 못 했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군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연히 제가 품어 드려야지요.”
아차, 싶었다.
대경한 유운이 승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으나 쉽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낚아챈 발목을 끌어당겼다. 뒤로 무너지지 않으려 허우적거리다가 속절없이 끌려간 유운은 승한의 휘어진 눈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승한은 유운과 눈을 마주친 채 여봐란듯이 그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펄쩍 뛸 뻔한 유운의 허벅지를 억누르는 손길이 사뭇 강압적이었다.
“윽!”
처음부터 느낀 건 아니었다. 승한이 빨아들이는 힘만 너무 거셌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찰흙을 손에 쥔 아이처럼 일단 힘껏 가지고 놀아보려는 양 굴었다.
“소, 손으로 했던 것처럼…… 조금 살살.”
이대로 두 손 놓은 채 승한에게 맡겨 놓고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유운이 애걸했다. 승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혀로 선단 끝을 살살 핥아 올리기 시작했다.
유운의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허리를 뒤채는 동안에도 승한은 입을 떼지 않은 채 유운의 성기를 입 안까지 깊게 머금었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빨아들였다가 다시 놓아줄 때마다 자극이 너무 강한 통에 몸까지 덩달아 떨렸다.
요령은 없지만, 힘은 좋다.
사제의 머리통을 노려보던 유운은 얼마나 힘을 줘야 저 머리카락을 뜯어버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승한이 머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그 안을 들락날락하는 성기가 어느새 한껏 붉어진 채였다. 최대한 좁게 오므린 승한의 입술을 보고 있으니 사제를 범하는 기분에 죄책감이 더해갔다.
입을 틀어막은 채 최대한 신음을 참는 동안, 승한은 목구멍까지 유운의 성기를 삼켜냈다. 선단이 목젖을 칠 때마다 오심을 느꼈으나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냈다.
유운은 어느새 그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허리를 움직였다. 깊게 삼킬수록 바들바들 떨리는 몸의 진동은 마치 흐느낌처럼 들렸다. 승한은 이를 탐욕스럽게 음미했다.
유운의 귀두 끝에서 탁하고 진한 액체가 터져 나왔다. 승한은 그 대부분을 삼켰으나 일부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목구멍까지 성기를 받아낸 탓인지 헛기침을 몇 번 한 승한은 손등으로 정액을 쓱 닦아내더니 이를 핥았다.
설령 다디단 봉밀이라도 저렇게 황홀한 표정으로 삼키진 않을 것 같았다.
“맛이 없군요.”
이제 정말 한계다.
“그걸 왜 삼켜!”
버럭 터져 나온 노성에 승한은 샐샐 눈웃음을 쳤다. 당황했기 때문일 테지만 반말을 쓰게 한 이후로 이렇게 한 번씩 성질을 부리는 유운이 달가웠다.
“왜요? 저치들이 그토록 탐내는 씨물인데 한 방울이라도 흘렸다가 도둑맞으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모용금화며 무진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 장원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승한의 대범함을 따라가려면 아무래도 천 년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그건 또 어찌 안 거지?”
“교월에게 온갖 단서를 다 던져 놓고 떠나셨으면서 저는 모르길 바라셨습니까?”
승한이 툴툴거렸다. 자신이 스승님에게 줄을 댔는데 어느새 유운이 그녀와 친해진 게 마음에 안 든다며 종알종알 떠드는 사제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느껴졌다.
유운은 이제 자신의 눈에 비치는 승한의 모습이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의적인 해석이 동반된 착각인 셈이다.
입 안의 혀처럼 살살거리거나, 자신을 매섭게 질책할 때나, 또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위에 올라탈 때 모두. 승한은 어떤 감정보다는 집착을 느끼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이제 치료는 끝났으니까 떨어지거라.”
“볼일이 다 끝나서 이 승랑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유운의 낯에 심란함이 번졌다.
“그런 게 아니라―”
“약보다 좋은 걸 가져왔습니다. 어서 입을 벌려 보세요.”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려 하니 승한이 애걸했다. 유운은 그 찰나의 접촉마저 마뜩잖아 사내를 밀어냈다. 그러나 손목을 붙드는 힘이 더 강력했다.
안 된다고 말하기도 전에 입술을 엄습한 그림자는 유운의 안으로 차디찬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그 얼얼한 감각에 콰직하고 깨물어 버렸으나 승한은 기어코 유운의 입 안에 서늘한 것을 밀어 넣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승한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접문을 청하기도 전에 좆부터 빤 입술이라 싫으셨습니까?”
경박한 말투에 유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뭐라 반박하는 대신 승한의 멱살을 잡고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입술만 포개고 바로 떨어질 작정이었다. 한데, 유운을 깔아뭉갤 것이 염려되었는지 승한의 양손이 바닥을 짚었다. 두 팔 사이에 갇힌 꼴이 된 유운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사제와의 접문을 이어갔다.
말캉한 혀가 입 안을 두드리고 빨아들일 때마다 불씨가 살아나며 더 크게 번졌다. 호흡을 그 사이사이에 가까스로 끼워 넣으며 입술을 붙였다가 떼고 이로 깨물었다가 핥으며 상대를 탐닉했다.
옷을 입고 점잔을 뺄 때면 이런 행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악을 저지르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한데 이렇게 맨살만 맞부딪히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입을 맞추는 동안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져도, 이 한 세상이 전부 멸망하고 다시 쓰인다고 하더라도 모를 것 같았다.
입맞춤이 진득하게 깊어질수록 유운의 몸은 점점 더 뒤로 무너졌다. 승한은 그 허리를 끌어안으며 천천히 침상에 유운의 몸을 눕혔다.
다정하고. 정중하게.
고작 두 번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유운은 그게 간지럽고 어색하여 승한의 시선을 피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몸을 숙인 승한이 젖은 입술로 유운의 가슴을 빨아들였다. 그 자리에 벌건 꽃을 한 다발이나 피우기 전에는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매달리는 통에 정말 유두에서 간질간질한 감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떤 자극을 받을 때 저도 모르게 허리를 살짝살짝 들어 올리면 승한은 이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유운의 몸에 기쁨을 반복해서 새겨 넣었다.
다시 건드렸을 때, 이것이 쾌락임을 보다 쉽게 알 수 있도록.
희롱도 겁탈도 아닌 온전한 애무에 유운의 눈가가 점차 젖어 들어갔다.
“엎드려 보시겠습니까?”
승한의 질문에 유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가 비부를 꼼꼼히 확인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다 나았군요.”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유운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표정을 숨길 수 있는 자세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승한은 품에서 꺼낸 호리병의 뚜껑을 입으로 물어 뽑아내더니 그 내용물을 제 손에 붓고 체온으로 데웠다.
방 안을 채우는 향기에 유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를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는지 승한이 속삭였다.
“아파서도 울어봤으니 이번에는 좋아서도 울어 보셔야지요.”
그리 말하곤 향유로 적신 손가락으로 뒷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고작 손가락 하나만 넣은 채 안을 넓히는 승한은 꾸준했다. 발기한 성기가 조금 시들시들해지고 있음에도 오로지 안을 벌리는 것에만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유운은 그가 일부러 저 깊은 곳에 있는 쾌락의 다발을 건드리지 않고 뒷구멍을 풀어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냥 하면 안 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만약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처음의 고통을 영영 잊지 못할 거다.
“왜 웃습니까?”
“나를 외웠다는 말…….”
유운이 중얼거렸다.
“그게 이렇게 성실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는데.”
어떤 의미에서 승한은 유운보다 그를 더 잘 아는 사람 같았다.
모든 답을 손에 쥐고 있어야 안심을 할 수 있었던 소년은 나이를 먹으며 보다 능숙하고 교활해졌음에도 그 점은 변하질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후우…….”
승한은 긴 숨을 토해냈다. 그 모든 걸 내내 참고 있었다는 듯 길고도 묵직했다. 한결 느슨해진 아랫구멍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가면서, 그 바로 앞에 둔중한 살덩이가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바닥을 짚은 유운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치고 깍지를 낀 승한이 속삭였다.
“아프면 멈출 테니까.”
구멍이 벌어지면서 귀두가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꼭 말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자긴 모를 거라는 선전포고였다.
승한은 꾸준히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딱 그의 손이 벌려서 헤집어놓은 곳까지.
“아, 아직 다 안 들어온 거야?”
유운이 헐떡이며 건네는 질문에 승한이 답했다.
“……아직.”
그때는 고통뿐이라 크기를 상대적으로 덜 의식했는데 맨정신으로 받아들이니 부피감이 강렬했다.
아직까지는 쾌감도 고통도 없었다. 불쾌감에 가까운 이물감뿐.
승한은 아직 비좁은 길을 우직하고 느릿하게 뚫으며 유운의 안을 온통 그로 채워나갔다.
“아!”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쾌락이 처음으로 지펴진 불씨처럼 반응했다. 유운은 탄성을 내뱉었다.
“윽, 읏!”
지금까지는 오로지 적응을 위해 참았다는 양 천천히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가장 안까지 밀려 들어왔다가 밖으로 몸을 빼고 다시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노리며 밀지 안으로 진입하는 성기가 유운의 아랫배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이렇게 큰 걸 안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승한이 움직일 때마다 뱃가죽이 밀려나는 게 아닐까 하는 기괴한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유운은 바닥을 짚은 채 승한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필사적이라 나쁜 상상을 계속할 여유가 부족했다.
“아흑, 아…… 으읏!”
당혹스러움이 녹아 있던 신음에 달콤함이 더해졌다. 유운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승한이 쥐고 흔들어서가 아니라 예전에는 겪어보거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종류의 쾌감 때문에 머리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안을 빠듯하게 채워오는 살덩이가 뜨겁다. 열기를 덜어내기 위해 이 짓을 하는 건데 오히려 더 뜨거워지는 것 같다.
‘밀어내야 하는데.’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유운은 옅게 흐느끼며 야금을 꽉 틀어쥐었다.
처음이 너무 격렬하고 거칠었기에, 이토록 다정하고 정중한 방식으로는 이지를 잃고 휩쓸리진 않을 거라 생각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온전히 제 쾌락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내의 땀방울이 등줄기에 뚝뚝 떨어질 때마다 몸서리치는 기쁨을 느낀다. 그건 열락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유운은 감히 그게 무언지 부르기를 주저했다.
만약 이름을 붙여서 그게 뭔지 알게 된다면, 그 후로는 정말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으리라 직감한 까닭이었다.
“조, 아…… 좋아! 앗! 으읏!”
엉덩이를 들어 올린 채 허리를 흔들면서도 유운은 도무지 자신이 천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를 어루만지는 승한의 손길 때문이었다. 드문드문 목덜미에 와 닿는 입술 때문이었고 동시에 유운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 때문이었다.
“유운, 아…… 유운……!”
이 모든 게 다만 육욕이라면 정말 우스울 것 같았다.
눈에 고인 물기 때문에 촛불의 빛이 번지는 것을 느끼며 유운은 호흡을 골랐다.
승한은 제 감정도 모르지만, 유운이 지금 느끼는 것이 행복이라는 건 너무도 일목요연했다.
결국 이 불손하고 발칙한 사제에게 마음을 줘 버리고 만 것이다.
밤의 어둠이 다 닳아 버리도록 그들의 교접은 끝나지 않았다.
새벽이 다가올 즈음에야 유운은 짐승처럼 덤비는 사제를 걷어찼다. 지분거리는 손길을 무시하며 한사코 눈을 감으니 잠든 척하는 유운의 귓가에 승한의 입술이 와 닿았다.
“모르는 척하고 싶으면 계속 모르는 척하세요.”
어린 짐승처럼 그 살갗에 입질한 승한이 붉게 남은 자국을 보며 속삭였다.
“나는 대사형을 가져야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