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3)

제9장. 모란 도둑

“모용유운이 거래를 청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금화는 쭈뼛 긴장한 낯으로 눈앞의 모용길상을 바라봤다. 판을 깔긴 했으나 그가 정말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모용유운이 장원의 문 앞에 나타난 날, 모용금화는 차마 잠들지 못한 채 벌건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금이라도 그를 잡아다가 모용길상에게 넘기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며 벌서는 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방문의 그림자가 길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아침이 오고, 다시 모용유운을 마주할 수 있게 될 시간을.

퍽 이른 시간에 찾아왔음에도 반질반질한 낯으로 그녀를 맞이한 모용유운은 모용길상을 만나러 갈 거냐는 금화의 질문에 단순하게 답했다.

“우리가 왜 요녕까지 가지?”

유운은 툭 내뱉었다.

“급한 건 모용길상이니, 그가 오게 하면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쯤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모용길상은 방계라 요녕에서 태어났어도 그곳에서 자라진 못했다. 참사가 일어난 후에 요녕으로 돌아가게 된 그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모용세가의 본가를 떠나지 않았다.

여느 방계 무사들이 사용하는 숙소에서 지내며 세가의 일을 항상 제일 먼저 접하고 이를 돌봐야만 성에 차는 인간이다.

한데 지금, 모용금화의 양부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금화가 한 것이라곤 유운이 불러주는 대로 서신을 적고 부친 것뿐이다. 그런데 그는 여포의 말이었다는 적토마라도 빌려 타고 온 것처럼 보름 만에 나타났다.

“서신에 적긴 했으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손을 모은 그녀는 길상이 자신의 손에 쥐여준 가면을 뒤집어쓴 채 부드럽게 웃었다.

“모용유운, 그자가 자식을 주겠다고 약조했습니다. 과연 노회한 자라 그런지 저희의 목적을 전부 파악하고 있더군요. 아이에 대한 교육 같은 것도 전부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데 설마 네가 흘린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금화를 바라본 모용길상은 마뜩잖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 조건이 무엇이라던?”

“바로 물러날 테니 자신을 모용세가의 가주로 인정해 달라더군요. 아주 잠시라도 좋다고.”

“한심하기는. 그건 고려할 여지조차 없는 조건이다. 백라궁주의 눈 밖에 난 자를 어떻게 임시라지만 가주로 삼을 수 있단 말이냐? 이제 겨우 회복세에 접어들었는데 백도무림의 중심부에서 밀려날 수는 없어.”

거들먹거리는 기색조차 없어 마치 청빈한 학자 같았다. 그러나 내용은 일반인의 도덕을 아득히 초월한 채였다.

“씨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거래하자고 붙잡아 놓는 동안 어떻게든 약을 먹여서 일을 치를 시도라도 했어야지. 내 매우 실망스럽구나.”

“소녀가 미흡하여 아버님의 뜻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혹 직접 만나보심이 어떠한지요?”

모용길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대로 구해 왔더니 그 처세가 마뜩잖은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 모용세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밖에 없다. 모용길상은 진심으로 자신의 가문이 예전의 성세를 되찾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자도 모용세가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저러는 건가…….’

길상도 잘 아는 감정이다.

“일단, 만나보지.”

***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모용길상을 유운과 승한이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무공 성취가 대단치는 않은지 모용길상은 그리 젊어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노인으로 보이는 건 아니었다. 저 부리부리한 시선과 고집이 묻어나는 표정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제거하면 안 됩니까? 상황이 상황이니 사부님께서도 손을 빌려주실 겁니다.”

“말 같은 소리를 해라.”

유운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나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분이 나 때문에 또 저 사내를 상대하게 두라고?”

모르긴 몰라도 모용길상은 예진랑을 무척 닦달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나이가 되도록 후계를 결정짓지 않고 유운의 선택을 기다린 채 입을 다물 예진랑이 아니다.

유운은 진랑의 품에 있었으나 모용길상이 인질로 잡은 건 결국 제자를 아끼는 흑천주의 마음이다.

이미 떠나온 제자라지만 사부님에게 같은 짐을 지워 드리긴 죽어도 싫었다. 자신이 아등바등하는 것보다야 훨씬 수월하게 해결될 터임에도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보기엔 비효율적이겠지.”

“사실 저는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단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아서 달달 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사람 몰골은 하고 있지요?”

애교스럽게 웃는 승랑의 볼을 꼬집어보고 싶어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숨기며 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사람 몰골보다 잘났구나.”

“대사형에게만 잘 보인다면 됐습니다.”

이것도 남들이 하는 양을 보고 배운 걸까?

유운은 승한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혀가 너무 매끈매끈해서 파리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질 거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뭘 어찌해.”

유운은 생각이 많은 눈으로 모용길상을 보다가 툭 내뱉었다.

“물러나야 할 자들은 물러나야지.”

겪어본 바에 따르면, 자격 없는 인간들은 빨리 꺼져주는 게 낫다.

모용길상은 어둠 속을 노려봤다.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숙원을 이루기까지 정말 몇 걸음 남지 않았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오대세가 중 한 곳인 모용의 피를 이었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모용길상은 직계가 아니었고, 방계인지라 그리 좋은 지원이나 대우를 받지 못했다. 재능이라도 뛰어났으면 모를까, 무인으로서의 모용길상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딜 가도 길상을 무시하는 자는 없었다. 모용세가의 이름을 달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 소속감은 길상에게 큰 자부심을 불어넣었다.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 본가가 혈교에 공격당해 단 한 명의 직계만을 남기고 몰살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길상은 가장 먼저 달려가 그 폐허를 눈에 담았다.

언제나 강건히 대문을 받치고 있던 기둥 중 하나는 폭삭 무너진 채였다. 손님들이 머무르던 별당 쪽은 폐허만이 남았고 심층부에 가까운 직계들의 거처만이 간신히 화마를 피해 간 수준이다.

이대로 가문이 무너져서는 곤란했다. 길상은 온 힘을 다해 모용세가의 재건에 매달렸다.

처음 생각한 것처럼 어려운 시기를 보내진 않았다. 사마련과 무림맹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은 혈교를 패퇴시켰고, 모용세가의 생존자를 데려간 예진랑은 혈교가 앗아간 모용세가의 재산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손해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사업장이며 땅을 되찾았기에 재건에는 한결 속도가 붙었다. 길상이 가장 먼저 모용세가의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덕에 그는 주변으로부터 존경과 존중을 받고 있었다.

‘이건 나름의 기회 아닌가?’

평범한 자신이 모용세가에 헌신할 기회. 이 흐름을 놓친다면 그는 또다시 방계의 볼품없는 인물로 밀려날 거다.

길상은 모용세가가 제 몸인 양 돌봤다. 그리고 이미 모용유운을 자신의 제자로 들인 예진랑에게 직계의 혈통을 돌려 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모용유운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의 가장 충실한 조언자가 될 자신이 있었다. 모용세가는 그렇게 다시 도약하게 될 거라는 풍운의 꿈이 이미 어리지 않은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하지만 어느 꿈이 다정하기만 하겠는가.

마지막 남은 직계는 흑천에 남았다. 돌아오겠노라는 말 한마디 했다는 이야기가 없으니 진랑은 모용세가가 재건되는 동안 자신의 제자를 보호하겠다며 길상을 밀어냈다.

그러니 모용유운이 흑천주에게 보내는 신뢰와 존경은 마땅히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그 생각을 하면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모용길상은 일부러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진랑이 모용세가에 대해 유운에게 터놓고 말할 수 없도록 여러 가지 제약을 붙이고 그들의 사이를 벌려 놓으려 한 것이다.

요녕과 감숙의 거리가 멀었기에 자신이 획책한 일이 그저 화풀이로 끝날지, 아니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지는 길상도 몰랐다.

자신을 밀어내려는 자들로부터 빈자리를 우직하게 지키며, 세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반대편에 선 자들을 실각시켰다. 모용세가가 다시 승승장구하려면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은 걸림돌이 될 뿐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리던 중에 길상은 문득 면경 앞의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늙어가고 있었다.

모용세가가 예전의 성세를 되찾으려면 아직 멀었음에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내의 마음에 조바심이 깃든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길상의 등을 떠밀듯, 흑천에 심어둔 눈이 보고를 올려왔다. 모용유운이 파문당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드디어 그들의 가주를 원래 자리로 데려올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설렜던 길상의 들뜬 기분이 바닥에 처박힌 것은, 모용유운이 혈교와 손을 잡고 흑천주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의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은 아주 조용히 이루어졌으나 예진랑은 유운이 백라궁주의 눈 밖에 났으니 모용세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길상에게만 알려왔다. 만약 눈앞에 있었다면 마도제일인을 상대로 삿대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 느낀 것은 배신감이라기보다는 절망감이었다. 길상은 제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는 걸 느꼈다.

‘아니야.’

아니지. 모용세가의 역사는 세월과 함께 쌓아 올려진 것이었다.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없다면 이다음 대에서 부흥을 이뤄내면 된다.

죄인이라도 모용길상은 유운의 씨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꿈이었다.

모용길상의 피는 지나치게 옅었다. 아니, 그뿐이 아니라 지금 가문에 남은 자들 전부가 그랬다. 그는 모용세가의 모든 것을 되돌려 놓고 싶었다. 흑천주가 동정심에 던져준 몇 그루 모란나무가 아니라, 모용세가의 피를 이은 아이들이 이 뜰에 가득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짙은 피를 위해 모용세가의 피를 이은 사생아를 수양딸로 삼고 모용유운을 그녀와 맺어 놓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이제 그 성과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 대단치도 않은 삶으로 모용세가의 주춧돌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길상은 환희를 느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밤처럼, 깊고 짙은 어둠을 헤맨 후에야 맞이할 수 있는 아침처럼, 그는 자신의 고행 끝에 모용세가의 영광이 오리라 믿었다.

아직 뜨지 않을 태양을 거머쥘 것처럼 손을 뻗은 사내는 꿈꾸듯 잠들었다.

완전히 무방비해진 길상이 옮겨진 것은 새벽녘의 일이었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길상은 반쯤 꿈에 정신을 걸친 채로 상대를 마주했다.

“반갑네. 자네가 그토록 찾던 모용유운이 날세.”

유운은 인사를 건넸음에도 길상은 입을 꾹 다문 채 믿을 수 없는 것을 목도했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동석하고 있던 승한이 미미하게 움직였으나 유운은 사제의 발을 밟아 그가 움직이는 걸 막았다.

“모용……유운…….”

길상이 허,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당신 같은 애송이에게 속아 이 자리에 왔다니.”

“몸이 달아 예까지 달려온 건 그쪽이면서 말이 심하군.”

유운이 픽 웃었다. 제법 신선했다. 흑도무림에서는 지위나 힘으로 찍어누르지 못하면 나이를 운운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데에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다는 격언을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쪽이 나를 아주 오래전부터 만나고자 했다지.”

길상은 유운을 노려봤다.

“그건 예전의 일이지요. 당신이 참혹한 배신을 저지르기 전의 일.”

“나를 둘러싼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군.”

“흑천에서 쉬쉬하며 덮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저는 당신이 배신자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제는 사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줬다곤 하나 무림의 영웅인 백라궁주가 적대하는 혈교의 협력자를 어찌 대모용세가의 가주로 모시겠습니까?”

이 가문에는 티끌 하나 묻지 않아야 한다는 집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유운은 한숨을 삼켰다. 혈교와 손을 잡은 건 아무리 무지했다 하더라도 그가 평생 부인하지 않을 죄였다.

그러나 유운이 더럽다고 손가락질하는 길상이라고 하여 어디 결백하기만 하던가.

“그래서 완양루를 이용한 건가?”

지금쯤 루주와 재회했을 취선을 떠올리며 건넨 질문에 길상이 외려 반발했다.

“어떻게 수단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반쯤은 복수의 화신이었다. 혈교의 행적을 집착적으로 파고든 이유 중 하나였다. 놈들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기루를 뒤흔들고 그 핵심을 팔아 치우는 식으로 움직였다.

처음 느낀 것은 경멸이었으나, 길상은 시험 삼아 완양루를 건드렸다가 이를 손에 쥐게 된 후에는 혈교의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걸 인정했다.

모용세가가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이 필요했다.

“적을 배우려다가 도리어 적과 같은 인간이 되어 버리다니, 정말로 추하구나.”

유운이 내뱉은 말에 모용길상은 눈을 벌겋게 뜨고 외쳤다.

“공자가 무엇을 알아 그리 말합니까? 고작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던 주제에, 세가가 몰살당한 뒤 흑도무림의 수장에게 키워지던 속 편한 당신이 무엇을 알아 그리 말한단 말입니까?”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악귀처럼 보였다.

“백부, 숙모, 조카 할 것 없이 전부 죽었습니다. 조모님도 조부님도! 모용세가에 충성하던 그 숱한 가솔들이 죽었단 말입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모용세가는 흑천주의 자비를 구걸해야 했단 말입니다! 수치스럽게도. 정말 부끄럽게도 직계를 돌려달라는 말 한마디 하질 못하고!”

예진랑은 혈교에게서 되찾은 모든 모용세가의 재산을 돌려주었다고 했다. 쇠락한 모용세가를 집어삼키려 하는 자들에게서 지키기 위해 일정한 감시와 조건을 붙인 채로.

파문당하기 전이었으면 그 진위를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유운은 자신의 사부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길상은 이 순간에도 진랑과 유운의 관계를 할퀴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 망집이 어디에서 근간한 것인지, 유운은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았다.

멀게나마 피가 닿아 있더라도 정작 초면이나 다름없는 관계 아닌가.

“흑천에서 참 좋아 보이시더이다. 그때 알았어야 했습니다.”

씹어뱉듯 토해내는 증오로 모용길상의 눈이 번들거렸다.

“악당이 키워낸 새끼는 결국 아무리 씨가 좋아도 쓰레기일 뿐이라는 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섭기 그지없었다.

“가문의 원수와 손을 잡을 정도로 흑천주 자리에 탐심을 부리다가 백라궁주의 눈 밖에 나서 파문당한 인간을 차기 가주로 생각하며 애면글면했다니……. 이 모용길상이 너무도 오래 산 게지요.”

유운의 귀를 승한이 틀어막았다.

묵묵히 저를 향해 쏟아지던 비난을 감내하던 유운은 승한의 손을 쳐냈다.

“그래서, 내 자식을 가지려 했느냐?”

조소가 섞인 음성에 모용길상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네가 피가 그리 가깝지 않은 방계라서? 그 아이의 후견인이 되면 장성할 때까지 모용세가를 휘두르려고?”

“모용세가에서 태어나 모용세가의 귀신으로 죽는 것이 모든 가솔들의 소망이외다.”

다른 건 몰라도 세가에 대한 충성심을 욕심으로 곡해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투였다.

“아니지. 내가 알기론 너와 다른 소망을 품은 자가 있더군.”

유운이 손짓하자 모용금화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모용길상이 두 눈을 부릅떴다. 수양딸이 자신을 배신했음을 비로소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내게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어 참으로 고생하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유운은 고개를 까딱했다. 겸허하기보다는 건방진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네게도 자격은 없다.”

길상은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세가를 떠나 방종한 나날을 보낸 당신보다는 낫습니다.”

“모용세가에 바친 헌신을 논하자고 한 것이 아니다.”

유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스스로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나.”

피가 너무 옅다고. 모용세가를 이끄는 건 오로지 직계여야만 한다고.

그 뒤틀린 충성심으로 길상은 그릇된 선택을 했다. 적어도 유운은 자신이 휘말린 그의 죄에 대해서는 심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기꺼이 배신의 책임을 지고 파문당해 흑천을 떠나왔듯이 길상도 그의 것이라 믿는 것을 박탈당해야 했다.

“나 모용유운은 직계로서의 전권을 여기 있는 모용금화에게 맡긴다. 모용금화는 제대로 된 절차에 따라 차후 모용세가를 이끌어나갈 후계자를 장로원과 함께 선발하게 될 것이다. 증인으로는 태상장로 모용길상과 흑천주의 제자, 염승한을 세울 것이며 행여라도 모용금화의 신병에 문제가 생길 시 세가의 모든 재산은 현 백라궁주 남궁지약과 무림맹주 하공소의 감시에 놓여 적법한 후계자를 선발할 때까지 전부 동결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이럴, 이럴 수는…….”

유운은 그의 앞에 무림맹주와 백라궁주의 직인이 찍힌 종이를 툭 떨어뜨렸다.

“모용세가는 당신이 없어도 잘 돌아갈 거다.”

몸을 숙인 유운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모용길상과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자네가 물러난 모용세가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그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지켜보도록.”

***

모용길상은 길길이 날뛰다가 결국 실신하고 말았다. 유운은 무진이 모용길상을 질질 끌고 가는 걸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잠자코 자리를 지키던 승한이 질문을 던졌다.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그에겐 유운의 거취를 물어볼 자격이 있었다. 애초에 정해진 시일 내에 백라궁주와 무림맹주를 만나고 와준 게 바로 승한 아니던가.

“떠나야지. 모용길상 같은 자들이 날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유운의 음성은 차라리 후련했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괜히 미련이 남아 감숙 근처에서 깔짝거리다가 이 사달이 나지 않았나.

“……제가 괜찮은 장소를 아는데.”

승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은근한 제안에 유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 흑천에 돌아가지 않느냐?”

“아.”

떠보듯 건넨 질문에 승한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답했다.

“쫓겨났습니다.”

사뭇 경쾌한 투에 순간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니, 어째서?”

“사형의 가슴을 빨다가 들켜서요.”

“뭐?”

“예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여기 빨아주는 거 좋아하셨다고.”

‘완양루에서 한 헛소리의 연장선상인가…….’

그런 것 치고는 퍽 진심으로 보여 큰일이다. 기억이 되돌아왔음에도 승한이 어찌나 뻔뻔하게 말하는지, 저도 모르게 설득당할 뻔했다.

“이제 사부님도 불경한 제자가 대사형을 홀라당 잡아먹은 걸 알게 되셨을 테니 멀리멀리 도망가야지요.”

“들켰으려나.”

“그러니 저와 함께 가시죠.”

유운은 멱살을 잡으려던 손을 주춤 늘어뜨렸다.

“대체 어딜 가려고.”

자신과 승한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곳이 이 하늘 아래 있기는 한 걸까?

“우리가 어디에서 무얼 할 수 있다고.”

“마땅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니 대사형께서는 그냥 그 두 팔을 제 목에 두르고 눈을 감으시면 됩니다. 납치는 제가 할게요.”

망설이던 유운은 승한의 목을 휘어 감았다.

“눈은 감지 않을 거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딜 가는지, 물어봐도 답해 주지 않을 테지?”

잔잔한 웃음이 유운의 귓가에서 반짝거렸다.

“어디 납치범이 목적지를 알려주는 걸 봤습니까?”

이미 승한에게 납치당했던 전적이 있는 유운은 그 말에 불안을 느끼기보다는 외려 안심이 됐다. 승한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자신이 편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 것 같았다.

조금 많이 제멋대로인 사내가 아니라면, 자신이 누굴 믿고 몸을 맡길까.

“네 마음대로 해 봐라. 그럼.”

제 품에 파고드는 유운을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승한이 속삭였다.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그렇게 무림에 노래 하나가 퍼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모란을 꺾어 달아난 사내가 십만대산의 대마두였다는 내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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