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십만대산에 피는 꽃
승한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흑천에서부터 그를 따라다닌 수하를 감숙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석아. 나는 이제 흑천 소속이 아니게 되었으니 너도 갈 길 가거라.”
“이, 이공자님! 이대로 돌아가면 흑천주님이 제 껍질을 벗기실 겁니다!”
“사부님께 내가 결심이 섰노라고 전하면 이해하실 거다.”
“저는 바짓가랑이 잡고 말리지 않았다고 매달릴 거라니까요?”
“여기 있으면 난 네 볼기가 네 짝으로 나뉠 때까지 엉덩이를 걷어찰 텐데?”
“해 보십시오!”
호기롭게 나섰다가 가차 없이 엉덩이가 걷어차인 사내는 결국 엉엉 울면서 흑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유운도 몇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자였다.
‘석이라고 하던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승한이 어린 시절부터 그를 섬긴 수하다.
새삼 승한이 주변에 별 미련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가슴이 소슬해졌다. 저렇듯 매정한 사제가 자신에게만은 뜻 모를 집착을 품고 있음에 기분이 이상했다.
“내부를 둘러보실 생각이라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떠났다는데, 기억은 있나?”
“뭐……. 실수로 기관이나 절진을 건드릴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나오는 법은 알고 있는 거겠지?”
승한은 히죽 웃었다.
“먼 후일 마교를 구경하러 온 중원의 영웅들이 죽은 뒤에도 엉켜 있는 시신 두 구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상상만으로도 신이 나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에 유운은 오싹해졌다.
“……미치겠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한 몸처럼 얽혀 있을 테니 죽어서도 함께 묻힐 겁니다.”
“떨어져라.”
유운은 매정하게 승한을 밀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처음 마교에 들어섰을 때보다 조심스러워진 보폭에 사제가 키득거렸다.
“이래서 대사형을 놀리는 게 즐겁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허리는 꼿꼿이 세우는데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서…….”
바투 다가와 어깨에 턱을 괸 사내가 귀에 바람을 후, 하고 불어 넣었다. 진절머리를 내며 그의 가슴을 밀치자 승한의 눈이 휘어졌다.
“붉게 적시는 맛이 있거든요.”
턱짓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붉어진 귓가며 목덜미가 보였다. 이젠 부끄러움이 아니라 분노로 머리끝까지 열기가 차올랐다.
‘또 휘말렸어!’
승한을 원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요 며칠 사이 내린 비를 저주하는 편이 낫다. 유운은 입을 꾹 다문 채 척척 앞서 걸어 나갔다. 기관이니 진법이니 같은 경고는 이제 생각나지도 않았다.
빨라진 걸음걸이에도 승한은 매섭게 추격하지 않고 느릿느릿 뒤따랐다. 그 모습이 배부른 맹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교의 건물은 중원의 양식과 비슷하면서도 은근히 다른 구석이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유운의 취향에는 다소 투박했으나 그에 비례하듯 웅장하다. 중원에서는 본 적 없는 형태의 조각상이나 문양도 더러 보였다. 자신이 흥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 표정을 관리하면서도 유운은 주변을 꼼꼼히 둘러봤다.
“대사형이 언제 함정에 갇히나 기대했는데 영 글렀군요.”
뒤따르던 승한이 투덜거렸다. 유운은 그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싶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바닥이 많이 닳은 곳만 골라서 걷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 큰 사내가 당과 뺏긴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파괴된 곳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 발길 닿은 티가 나는 길은 있으니까.”
유운은 여상히 대꾸했다. 그는 열을 받은 거지 멍청한 게 아니었다. 마교의 절진이나 기관에 갇혀서 승한의 도움을 기다리고 싶진 않았다.
물론 구해 주긴 할 거다. 다만 저 얄궂은 사제는 자신을 놀려먹을 기회도 놓치지 않을 테니 그게 문제다.
“넌 여기에서 나고 자랐겠지?”
십만대산은 유운이 어릴 적 들은 악명 높은 마교의 본거지라기엔 생각보다 멀쩡했다. 건물의 양식 따위는 중원과 다르긴 했으나 결국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느낌이다.
탕옥이며 주방 같은, 어딘지 악명 높은 마두의 소굴과 어울리지 않는 장소를 발견할 때마다 유운은 깜짝깜짝 놀랐다.
“일월신교 내부에 아이를 돌봐주는 장소도 있었다고 하면 기절하시겠군요.”
일월신교라니, 정말 사제가 마교에서 나고 자랐구나 싶어 유운의 입가가 움찔했다. 천마신교 소속이나 스스로를 일월신교라 일컫지, 중원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신강의 마교였다.
“거긴 또 어디지?”
“여긴 아니고, 안전 문제 때문에 십만대산 안쪽에 자리 잡은 거주 지역입니다. 아무래도 중원 측은 일월신교 소속이라면 학을 뗐으니까요.”
유운도 그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혈교의 등장 전까지만 해도 마교는 중원무림의 적이었다.
그의 사부인 예진랑은 사마련 소속으로 혈교와의 전쟁에 참전해 영광을 얻었으나 만약 마교 출신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터다. 심지어 혈교의 역사는 채 백 년이 되지 않을 텐데 마교는 중원무림과 그 역사를 같이했으니…….
“생각해 보니 우린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태생이었군.”
기분이 이상했다.
혈교의 참사가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사부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유운은 마교 출신인 승한을 사제가 아니라 적으로 규정했을 거다.
말 한번 섞어보지 않았더라도 천마신교 소속이라면 편견과 적의 모두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십만대산이 폐허가 되었음을 알면서도 여기가 마교의 터라는 사실에 내심 두려움과 꺼림칙함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의지가 되는 게 염승한이라니, 불과 몇 년 전의 자신이 들었다면 비웃을 노릇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형을 만났다면…….”
승한이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널 죽이기라도 했을 것 같으냐?”
유운은 그가 뜸을 들이는 찰나를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음성에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묻어났으나 정작 유운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뇨. 사형을 함락하는 재미가 있었겠구나 싶습니다.”
승한이 가벼이 씩 웃었다. 그 낯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조금 안심이 되기도 해서 유운은 혀를 찼다.
“모용세가의 직계가 퍽이나 천마신교 출신의 마두에게 넘어가겠구나.”
“세상에는 가짜 신분이라는 게 있지요.”
“죄책감이 들어서 힘들겠지.”
유운이 툭 내뱉은 말에 승한이 난처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길어지는 침묵에 유운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넌……! 정인을 속이면서 죄책감도 안 든다는 거냐?”
“제 아랫도리는 여전히 실할 테니, 그걸로 사형을 잘 만족시켜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승한은 헤프게 웃었다. 콧잔등을 살짝 찡긋거리는 저 뻔뻔한 낯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혀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유운은 자신의 황당함을 입 밖에 내뱉을 수 있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군. 아니, 내가 천치도 아니고 모를 리가 있나. 만약 들키면 어쩌려고?”
“그때는……. 저보단 사형이 힘들어지시겠지요.”
지금도 퍽 쓰레기인데 사부님을 만나지 못한 자신은 더 쓰레기였을 거라며 승한은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정말 어떻게 했을까?’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유운을 바라봤다. 일월신교에서 자라났다면 그는 중원무림인이 적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자라났을 거다.
삐뚤어진 성격을 타고났으니 모용세가에서 자라난 대사형을 만나 흥미를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청수한 낯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허세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를 아득바득 닦아세우는 모용유운이 얼마나 재미있어 보였을까?
적당히 가려운 데를 긁어주며 친분을 쌓고, 좋은 곳에 데려다준다며 도박장이며 기루 따위로 천천히 끌어들여서 언제쯤 그를 벼랑 끝에서 밀쳐볼까 고민했겠지…….
유운이 자신에게 깊이 의지하게 될 즈음, 그를 진창으로 끌어내렸을지도 모르겠다. 저 입술이 비난과 저주를 퍼부을 때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질 테니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운은 승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유운이 불길함을 느낀 건지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승한은 제 머릿속에 머물렀던 험한 가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걷어내며 답했다.
“사부님을 잘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예진랑이 아니었다면 주저 없이 유운을 망가트렸을 거다. 지금도 종종 그런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참을 이유조차 없다면 자신이 할 일이야 뻔하지 않나.
“의뭉스럽기는.”
유운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사부님을 통해 자신을 만난 게 다행이라고, 그답지 않게 돌려 말하는 섬세함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졌다.
완전히 오해였지만, 살짝 붉어진 유운의 목덜미를 확인한 승한은 능청스럽게 이를 제 공으로 삼켰다.
“그래서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슬쩍 끌어안으며 살갗을 입술로 지분거리니 손으로 뺨을 눌러서 쭉 밀어버린다. 질색하는 표정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승한은 유운의 손바닥을 깨물었다.
“더럽게 자꾸!”
말 안 듣는 개를 훈육하는 듯 단호한 말투였다. 승한은 뻔뻔한 낯으로 답했다.
“배가 고파 그렇습니다.”
유운이 움찔했다. 천마신교에도 주방이 있다는 걸 직접 확인했으나 거기에서 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배가 고프다고 네 사형의 살을 뜯어 먹어?”
기가 막힌다는 듯 일갈하자 승한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답했다.
“그야 제가 채우고자 하는 허기는 대사형만 채워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뭐……?”
“짐승을 부리려면 배는 채워 주셔야지요.”
당황한 유운에게 들러붙은 승한이 음험하게도 귀를 야금야금 깨물며 속삭였다. 뾰족한 이가 닿은 순간 유운은 몸서리를 쳤다.
말 그대로 저를 뼈째 발라먹고도 남을 인간이다.
“여긴 밖이니 떨어져라. 누가 보면 어쩌려고?”
“보는 눈이 어디 있습니까? 십만대산은 어차피 폐허 아닙니까?”
뿌리를 천마신교에 두고 있음에도 가차 없는 발언이다. 유운은 채찍이라도 얻어맞은 양 등을 움찔하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벌써 포기하시는 건가요?”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유운이 얌전해지자 아쉬워하는 눈치다.
“네 말마따나 여긴 폐허고.”
유운이 중얼거렸다. 승한의 어깨 너머로 주변을 휘둘러보아도 사람 사는 냄새는 어디에도 나지 않는다. 인기척이 없으니 이 빈 곳을 메우는 건 오로지 바람뿐이다.
“입술을 지붕 아래에서 비비든 밖에서 비비든 어차피 하늘은 다 알 테니 수치심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단둘이라는 말을 뭐 그리 돌려 하십니까?”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승한은 다정이 듬뿍 묻어나는 시선으로 유운을 바라봤다.
모용유운이라는 사내를 오롯이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난다. 억지로 코뚜레를 꿰어 끌고 다니지 않아도 유운은 자신과 십만대산으로 왔다.
고작 반 푼짜리 진심일지도 모르지만, 승한은 그걸로도 족했다.
“여기에서 일을 치렀다가는 감모에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지.”
유운은 두 팔로 승한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만족감에 젖어 있던 승한으로서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아. 맞아. 그걸 잊고 있었군요.”
내공이 사라진 유운은 더 이상 한서불침의 몸이 아니었다. 말인즉슨 얼음물에서 깜빡 졸아도 끄떡하지 않았을 예전과 달리 쉽게 아플 수 있다는 소리다.
승한이 혀를 차자 유운이 심술궂은 낯으로 웃었다. 몸을 밀착하며 웃는 모양새가 영 즐거운 눈치다.
“무어. 너는 상관없지. 안 그런가?”
떠보듯 말을 건네면서도 그 안에는 저를 함부로 다루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가득하다.
“실내에서는 괜찮겠지요?”
승한은 유운을 덥석 안아 올리며 물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유운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채 중얼거렸다.
“……그런 셈이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유운의 팔에 소리 나게 입 맞춘 승한이 웃었다.
“귀한 몸을 아무 데서나 품을 수는 없지요.”
‘당장에라도 일을 치를 것처럼 굴어 놓고는!’
유운의 눈은 세모꼴이 되었으나 승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찌나 즐거워하는지 당장 폭우가 내리거나 산사태가 일어나도 그의 기분을 망치긴 어려워 보였다.
“너는 참 잘도 웃는구나.”
성큼성큼 멀쩡한 전각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승한이 답했다.
“이편이 더 잘생겼으니까요.”
그 말에 유운은 가늘어진 시선으로 승한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봤다. 무표정한 얼굴을 거의 본 적 없지만 눈매가 매서운 탓에 살벌한 인상을 준다.
만사가 재미있다는 양 웃고 있는 표정이 아니라면 평범한 사람은 승한에게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리라.
“눈 달린 사람이라면 다 꼬실 작정이더냐?”
뾰족한 투로 쏘아붙이는데 승한이 어깨를 들썩이며 조용히 폭소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유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 웃음이 헤프다고 지적하자마자 웃는 건 무슨 심보지?”
“아니……. 제가 웃기만 하면 사람들이 홀라당 넘어옵니까?”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거야…….”
유운은 그제야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깨달았다. 승한이 웃고 다니면 못 넘길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 거나 다름없지 않나.
“네 속이야 어떻든 허우대는 멀끔하지 않느냐. 게다가 이젠 흑천주의 유일한 제자까지 되었으니 당연히 사람이 꼬이겠지. 심지어 이래도 웃고 저래도 웃으면 만만해 보이지 않겠느냐.”
허둥지둥 변명하는 건 하수나 벌이는 짓이다. 이렇게 차근히 해명하면 아무리 승한이라도 꼬투리를 잡기 어려울 것이다.
한데 의기양양함을 삼키는 유운의 앞에 벽력탄이 터졌다.
“그러니까……. 제가 무림 제일의 신랑감이라는 말이군요?”
뭐? 무림 제일의 신랑감?
“그 무슨……. 검성이 발을 헛디뎌 자기 검 위에 엎어져 죽는 소리를…….”
유운의 낯이 퍼렇게 질렸다가 다시 붉게 물들기를 반복했다. 사제를 과소평가한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무림 제일의 신랑감이 아무한테나 웃어주고 다니면 확실히 곤란하지요. 암요.”
승한은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들어댔다.
“손 치워라! 내려놔!”
내려가려고 버둥거렸지만 승한은 그를 꼭 끌어안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고는 살갗을 간지럽히는 웃음을 흘려보냈다.
“대사형께서 이렇게 불안해하실 줄 몰랐습니다. 이 사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어린아이라도 어르는 양 살살 녹는 목소리다.
“밖에 나가면 웃고 다니지 않겠습니다. 외부 인사와 만날 때 사부님이 그러시는 것처럼 눈에도 힘을 주고 입매도 단단히 굳히고…….”
우스운 건 또 그런 승한의 설득에 천천히 넘어가고 있다는 거다.
“헤프게 굴지 마라.”
유운은 손을 뻗어 승한의 뺨을 꾹 누르며 으름장을 놨다.
“아무 데서나 웃고 다니지도 말고 얕보이지도 마.”
“대사형의 분부 받잡습니다.”
승한은 성큼 문턱을 넘으며 속삭였다. 말로는 대사형이라 읊으며 하는 것만 보면 숫제 정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유운은 이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싶어 그의 볼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몇 해나 돌아오지 않았을 십만대산임에도 승한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래 방치된 건물들 사이에서 용케 멀쩡한 곳을 찾았구나 싶었는데 그것도 좀 이상했다. 일단 침상에서 먼지가 날리지 않았다. 침구도 전부 새로 들인 양 쿰쿰한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이렇게 멀쩡하지?”
마교의 절진 안에서는 시간도 흐르지 않는단 말인가?
“일월신교의 생존자가 저 혼자는 아니라서요. 미리 연락해서 좀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뒀습니다.”
제 목에 팔을 두른 채 주변을 휙휙 둘러보는 유운이 재미있는지 승한이 웃으며 그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일원당만큼 호사스럽진 않겠지만 꽤 괜찮지요?”
호사스럽지 않다는 말은 다소 겸손한 표현이었다.
“나쁘지 않구나.”
사천제일루라 불리는 화월루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비단 금침에 흘깃 눈을 준 유운이 답했다.
“사형을 흙바닥에서 모실 수 없으니 신경 썼습니다.”
공손함이라는 단어의 존재도 모를 것처럼 구는 망나니치고 승한은 유운을 참 극진하게 대했다.
그 간극은 삐뚤어진 성격의 유운조차 만족시켰다.
“갈아입으실 옷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속살거리는 양, 승한이 목소리를 작게 줄였다.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인 유운은 약간 솔깃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입고 있던 옷이 흙먼지에 더럽혀진 탓이다. 진탕 뒹굴고 따뜻한 물에 씻은 뒤 보드라운 천으로 몸을 감싸면 꿈조차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어 하느냐.”
유운은 넌지시 승한을 부추겼다. 사제는 그를 침상에 앉혀놓고는 바닥으로 내려가 천천히 신을 벗겼다. 바닥이 조금 닳은 가죽신을 다루는 손길이 어찌나 정중한지, 화씨지벽이라도 매만지는 듯했다.
승한은 저를 내려다보는 오만한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남들 보기엔 지독하게 도도해 보일 테지만 승한은 알았다. 유운의 저 눈길에 섞인 초조함과 기대를.
어릴 적엔 항상 궁금했었다. 당과를 떨어뜨린 아이가 엉엉 우는 이유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 될 연정을 꾸역꾸역 삼키며 발만 동동 구르는 이유를, 스승의 엄한 훈육에도 제자가 방긋방긋 웃는 이유를.
그리고 자식을 위험한 곳에서 쫓아내는 부모가 벌컥 화를 내는 이유를.
승한은 그들이 지닌 감정의 본질에는 닿지 못했다. 아마도 영원히 그런 채로 남을 것이다.
하나 모용유운이라는 사내 하나를 착실하게 외면서 그게 꼭 나쁜 것 같지 않았다. 남이 울든 웃든 화를 내든 저와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유운 하나를 외워 담는 것만으로도 얄팍하기 그지없는 승한의 우물은 넘칠 듯 찰랑거렸다. 그러니 승한은 유운을 제 손에 쥔 것으로 만족했다.
‘야망이 있었다면 일월신교를 재건하려 들었겠지.’
그러나 승한에게는 부모에 대한 애착도 없고 뿌리에 대한 의무감도 가지지 못했다. 하다못해 자신이 지닌 정통성으로 무얼 해내고자 하는 욕망도 없다.
“사형은 정말 큰일입니다.”
승한은 한숨처럼 속삭였다.
대사형이든 막내 사제든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자신과 달리 감정에 휘둘리고 무너질 수 있는 그들의 가능성이 연약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손쓸 도리 없는 놈팡이를 만나 더럽게 엮이면 어떻게 떼어놓지, 하는 고민도 했었다.
사부님은 터무니없는 걱정이라 일갈했으나 결국 제 우려대로 되지 않았나.
대사형은 너무 심하게 고장 난 나머지 유운 하나 움켜쥐는 게 고작인 인간을 만나버리고 말았다.
그 짐승은 손에 쥔 게 하나뿐이라, 다른 걸 잡겠다며 대사형을 놓아주지도 않을 테니 정말 큰 일이다.
유운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정신을 쏙 빼놓을 요량으로 승한은 붉은 혀를 내밀었다.
맨살에 와 닿는 말캉한 감촉에 유운이 움찔했다.
“더럽게 대체 왜 발을!”
성마른 분노를 터트리려던 유운은 승한의 시선에 서린 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인간과는 대화를 시도할 수 있어도 누가 배고픈 짐승을 건드린단 말인가?
평소보다 날것처럼 느껴지는 시선에 몸서리치니 이를 알아챈 승한이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미리 적셔 두어야 안 아플 테니까요.”
“발을 핥는다고 아래가 젖을 리가…….”
유운이 말꼬리를 흐리는데 승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긴장을 풀어 드리려는 요량이었습니다만, 혹 저 안쪽을 직접 적셔 드리는 편이 마음에 드십니까?”
또랑또랑한 투로 묻는 낯이 사뭇 천진했다. 유운은 그를 걷어차려다가 발목만 붙들리고 말았다.
“너무 보채지 않으셔도 차근차근 적셔 드릴 테니 참으십시오.”
대체 누굴 인내심도 없는 발정 난 수말 취급한단 말인가?
유운의 낯이 확 달아올랐다. 승한은 자신이 물들인 천을 관찰하는 염색장처럼 만족스러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
“옷시중을 들어야 하니 부디 다리를 벌려주세요.”
파렴치한 짓을 할 작정이면서 혓바닥은 둘도 없이 매끄럽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저 장지문 너머에서 승한의 말을 들었다면 제 사형을 귀하게 모시는 사제라고 감탄했으리라.
이 상황에서 가장 문제는 자신이다. 발목을 붙들고 살금살금 기어 올라오는 음흉한 손길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마당에 승한만 추잡하다고 나무라기 어려웠다.
‘예전 같았으면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일갈하고 걷어찼겠지.’
유운은 조금 배배 꼬인 생각을 떠올렸다가 이내 입매를 누그러뜨렸다. 어디 승한이 저 혼자만 좋자고 하는 짓이던가?
슬쩍 뻗은 손이 승한의 머리카락 언저리를 맴돌다가 그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의외라는 듯 저에게 향하는 시선에 유운은 여봐란듯이 다리를 벌렸다.
“아프게 하면 사흘 동안 침상에 못 올라올 줄 알아.”
유혹이라고 하기엔 같잖을 지경이었지만 아래가 무서울 정도로 동했다. 훅 치밀어오르는 저릿한 고양감에 승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가 언제 사형을 괴롭힌 적이 있습니까?”
그 뻔뻔함에 코웃음 치는 대신 유운이 다리를 벌렸다. 비로소 승한은 그 얄미운 입술을 다물었다. 세 치 혀를 더 유용하게 쓸 만한 곳을 찾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 내린 사내는 그 안의 살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단련을 거의 하지 못했다지만 여전히 무림인과 다르지 않은 다리는 탄탄하고 매끄러웠다.
몇 번이나 몸을 섞었음에도 이런 유의 자극이 영 어색한지 유운은 움찔거렸다. 그 와중에도 저를 밀어내지 않는 결연함에 승한은 속으로 웃었다.
다리를 벌려 놓고 먼저 물러날 유운이 아니다. 아무렴, 저 지독한 자존심에 어찌 약한 소리를 입에 담겠는가.
얼음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벽 같다고 생각하며 승한은 유운의 하초에 입을 묻었다. 망설임 없이 성기를 물고 빨아들이니 반응이 격렬했다.
“짓궂게 굴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하지만 이렇게 흥분시켜야 사형이 이성을 조금 내려놓지 않습니까?”
입에 성기를 물고 있는 뭉개진 발음이 유운을 자극했다. 자칫 이가 민감한 귀두를 긁지는 않을까 등줄기가 곤두섰다. 와중에 승한의 혓바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 따위의 생각을 저도 모르게 떠올리고 만다.
누가 제 머릿속을 진흙 발로 밟고 다니는 것만 같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음탕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 리가 없다.
유운은 괴로움과 기쁨 사이 그 어딘가를 오가며 허리를 뒤챘다. 처음 이 짓을 할 때만 해도 별 요령도 없던 사내가 왜 이토록 능수능란하게 기쁨을 선사하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집요한 이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며 유운은 울룩불룩 움직이는 제 옷을 내려다봤다. 저 아래 숨겨진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제 염승한이라는 사실이 유운의 배덕감을 자극했다.
제정신이라면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야 할 텐데, 지금의 그는 허리를 들썩이며 신음을 흘릴 뿐이다.
천마신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에서 마교의 후예와 붙어먹는 오대세가의 생존자라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삶이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안다면 또 얼마나 손가락질을 해댈까?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그 사실에 절절맸을 터다. 한데 지금은 모든 소음으로부터 멀어진 채였다. 언제나 곁에 두던 불안조차 유운에게 별다른 말을 속삭이지 못했다.
지금의 그가 신경 쓸 수 있는 것이라곤 저 아래에서 탐욕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승한의 혀 놀림뿐이다.
“읏……!”
좀처럼 절정에 달하지 못한 채 발가락을 움츠리는 유운을 보며 승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젖은 입술이 평소보다 붉어 보였다.
“대사형의 것이 너무 크고 길어서 자꾸 목을 찌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음어를 입에 담는 사제의 작태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 삼켜드릴 테니 어서 제 입을 적셔 주십시오. 예?”
저 파렴치한 입을 어떻게 틀어막아야 할지 모르겠다.
손을 뻗은 것은 충동이었다. 멱살이 잡혀 올라오면서도 거부 한 번 하지 않은 승한은 그치고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유운은 그를 끌어당겨 입술을 집어삼켰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성기를 물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저 승한의 입을 닥치게 하려는 목적에 충실했다.
맞닿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혀를 밀어 넣고 승한의 호흡을 탐했다. 한 치의 숨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양 탐욕스러운 접문에 승한은 몸을 맡겼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얌전한 입술은 깜짝 놀라 얼어붙은 토끼 같다. 토끼보다는 집을 짓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에 가까울 테지만 그런 사실 따위는 전부 모르는 척할 정도로 만족스럽다.
본디 휘둘리는 것보다는 휘두르는 게 성미에 맞는 까닭이다.
천천히 얼굴을 떼어낸 유운은 호흡을 고르며 툭 내뱉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적셔줬다.”
별일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하려 애썼지만, 승한이라면 제 속내를 꿰뚫어 보고도 남았다.
열 받은 나머지 냅다 저질렀지만 의연함을 두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럽다.
“이건 또 새로운데…….”
손을 뻗어 유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 사내가 중얼거렸다.
“왜? 내가 먼저 손대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따지듯 묻자 승한이 답했다.
“아뇨. 그냥.”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웃었다.
“……좋아서.”
순간 머리가 구석까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해사한 얼굴로 웃고 있는 사제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웃는 승한은 영 낯설었다. 수상함이나 벌건 흑심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낯을 볼수록 눈을 떼기 어려웠다.
“고작 이 정도로 요란 떨기는.”
살갑게 말하고 싶어도 말투는 뾰족하기만 했다. 제 입술을 뜯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유운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승한이 고작 이 정도에 상처받을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자신이 새삼 한심하게 느껴졌다.
본인이 타고나기를 삐뚤어져 있었다는 승한도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 유운에게 쥐여주려 하고 있었다. 흑천에 있을 때부터 엇나가는 사형의 뒤를 쫓아다니며 일이 커지지 않게끔 무마해 주었고 또 지금은…….
자신 때문에 사부님을 떠나길 자처하지 않았나.
“내 말은.”
유운은 바싹 마르는 입술을 달싹였다.
“앞으로도 해 줄 거라는 소리다.”
아직 승한의 멱살을 놓아주지 않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뒤늦게 이를 알아챈 유운은 서둘러 사제를 놓아주었다.
나름 고백이라 한 건데 선전포고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망했군.’
“대사형은 정말…….”
“뭐?”
한참이나 침묵하던 승한이 진심으로 걱정이라는 듯 이맛살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을 살살 발라먹으려고 바지만 홀라당 벗겨 놓은 사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찌합니까?”
왜 갑자기 혼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닥치고 하던 거나 마저 하거라.”
유운은 이 상황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승한의 얼굴을 밀어냈다.
“하던 거라……. 당연히 그래야지요.”
찰나였으나 승한의 눈이 붉어 보였다. 목소리가 차분했으니 자신이 잘못 본 거라 생각한 순간, 승한이 그의 허벅지를 붙들고 다리를 활짝 벌렸다. 당황했으나 승한의 숨결이 살기둥에 닿을 때까지만 해도 유운은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한데 무언가 축축한 것이 회음에 닿고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게 무슨!”
두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섞다 보니 가끔 승한이 저 아래로 내려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맨정신일 때 혓바닥이 뒷구멍에 닿은 건 처음이었다.
이성이 쾌락에 잡아먹힌 상태가 아니고서야 유운은 승한에게 이런 짓을 허락해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운의 경악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승한은 천천히 뒷구멍과 그 주름을 핥기 시작했다. 몸을 뒤로 빼려고 했으나 허벅지를 어찌나 단단히 붙잡고 있는지 몸이 끄떡하지도 않았다. 팔이 아니라 그 자리에 오래도록 존재한 바윗덩이 같았다.
무공을 잃긴 했으나 사제가 저를 상대로 힘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낯설다. 맨정신에 아래가 핥아지는 것도, 자신이 밀어낸다고 순순히 따르지 않는 승한도.
공포와 기대심이 한 몸처럼 뒤섞여 그의 머릿속을 차근차근 녹였다. 손가락도 아닌 혓바닥이 밀지를 비집고 들어왔다.
말캉한 혀가 선사하는 자극이 손가락보다 강렬할 리는 없다고 스스로를 달랠 때였다. 혀끝을 뾰족하게 세운 승한이 그의 내벽을 찔러왔다.
성기가 들어올 때의 둔중한 감각과는 다르다. 야금야금 번져 나가는 저릿함에 유운은 몸을 떨었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혀가 안을 천천히 적시는 감각이 너무도 적나라했다.
“흐으…….”
자꾸만 안달이 났다. 아랫배에 닿도록 꿰뚫린 채 거칠게 흔들렸던 기억이 몸에 새겨져 있는 탓이다.
집요한 건 몰라도 이렇게 느릿느릿한 건 전혀 승한답지 않았다. 왜 사제의 심술이 도졌는지 알 길이 없어 유운은 젖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승한이 계속 혀를 움직이며 아래로 흘려보낸 타액이 아래에서 흐르는 음액처럼 느껴진다.
“그냥 얼른 해, 들, 들어오라고……!”
목구멍으로 흘러나온 제 음성이 낯설었다. 수치심과 쾌감 모두를 참으려 안간힘을 쓴 결과였다.
순응하려는 양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승한이 탁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프게 하는 건 싫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귀두 끝을 가볍게 툭 건드리는 손가락에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유운이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몸을 옹송그리자 승한이 그의 허벅지 안쪽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저 얄궂은 손길이 사고를 뒤흔든다. 유운은 원망 섞인 시선으로 승한을 내려다봤다. 그의 입술이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승한의 입술을 적셔놓은 건 분명 그의 타액일 텐데, 자꾸 자신의 밀지에서 쏟아낸 애액이 묻어나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더러운 곳을 그렇게 핥으면 내가……!”
“제가 좀 천박하게 구는 편이긴 하지요. 그러니 대사형의 정갈한 몸에 정신을 놓고 흘레붙는 게 아니겠습니까.”
승한은 게걸스럽게 웃었다. 그 외에는 딱히 표현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운은 짐승이길 자처하는 승한을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따위 못난 소리를 지껄일 거라면 역시 넌 닥치는 편이 좋겠다.”
유운은 손을 뻗어서 그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어차피 못된 짓만 할 혀라면 자신이 요긴하게 쓰는 편이 나았다.
“빨아. 이번에는 제대로.”
유운의 손에 이끌려 그의 앞섬에 얼굴이 처박힌 승한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오로지 그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 정성껏 귀두 끝에서부터 입 안으로 삼키는 그의 낯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귀두 끝이 좁고 습한 곳에 닿아 주춤 허리를 뒤로 물리려는데 승한은 유운의 성기를 목구멍까지 삼켜버렸다.
요사스러우면서도 적극적인 혀 놀림에 자꾸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조금 전에 머금고 너무 크다고 징징거리던 게 다 약한 척이었음을 새삼 실감하며 유운은 괘씸한 마음에 승한의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나름 아귀힘이 강한 유운에게 붙들린 채로도 고통의 기색 없는 사내의 뺨이 홀쭉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윽…….”
너무 빨리 승한을 풀어주고 싶지 않았으나 이제 유운도 한계였다. 앞뒤로 번갈아 괴롭힘당한 탓이 컸다.
유운은 천천히 승한의 머리를 뒤로 물렸다. 단호한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도 실실 웃던 승한은 성기가 제 입 안에서 빠져나가던 찰나, 귀두 끝을 츱 하고 빨아들였다.
아주 조금 마음을 놓았던 순간 가해진 자국에 유운의 인내는 산산이 무너졌다. 그의 귀두 끝에서 터져 나온 백탁액이 승한의 얼굴을 적셨다. 머리카락부터 검미, 그리고 뺨이며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하얀 정액에 유운은 사색이 되었다.
승한의 혀가 느릿느릿 입술을 핥는 게 눈에 새겨지듯 선명하게 와 닿는다.
“마음에 드십니까?”
몇 번이고 목구멍에 귀두 끝을 마찰한 탓인지 평소보다 탁하게 들리는 저음에 유운의 가슴께가 저릿저릿했다. 제 정액을 뒤집어쓴 사제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걸 보면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의 어깨 즈음에 내려놓은 손을 몇 번이나 죔죔 움직이던 유운은 가까스로 두르고 있던 이성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난, 나는…….”
기진한 몸에 다시 활기가 깃들었다. 유운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승한의 턱을 붙들었다. 옷소매를 끌어 올려 얼굴을 닦아내니 답지 않게 수줍은 낯으로 눈을 내리까는 승한이 보인다.
손을 뻗어 끌어다 놓으니 숨소리마저 헤아릴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유운은 고개를 숙여 승한과 입술을 겹쳤다.
그건 정인의 입맞춤 같기도 했고 일종의 포상 같기도 했다. 그 의미가 무언지 가장 잘 알 사내는 상기된 뺨으로 유운의 접문을 받아들였다.
무서우리만치 즐겁다.
깊어지는 입맞춤에 피어오르는 열기에 녹아있는 건 육욕뿐이 아니었다.
승한은 유운이 제 손목을 붙들고 옷깃 안으로 끌어들이자 그답지 않게 조금 놀라고 말았다. 살짝 입술을 뗀 유운이 작디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인제 그만 애태우고. 응?”
짐승을 어르듯 건넨 말에는 초조함과 욕망 모두가 묻어났다.
“네가 잘하는 걸 해 보거라.”
유운이 손수 쥐여준 가슴을 천천히 주무르며 승한은 그 돌기 끝을 손톱 끝으로 툭 건드렸다. 고작 그 정도로 성을 내는 유두가 그 주인과 닮았다.
“아프게 하면 다시는 손도 못 대게 하신다더니.”
승한은 유운의 귓불을 입술로 꾹꾹 누르며 속삭였다. 귓가를 타고 들어오는 호흡에 살갗이 오소소 곤두섰다.
“대사형께서 울어도 멈추지 못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유운의 입매가 삐뚤어졌다.
“언제는 제때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타박처럼 들리되 이는 허락이었다. 승한은 아주 긴 숨을 내뱉었다.
인내심 같은 건 뭔지도 모르는 탓에 미리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며 사람 노릇을 하는데, 유운은 이를 너무 쉽게 무너뜨린다.
그나마 그가 지금 원하는 것이 점잖은 사제 염승한이 아니라 아랫도리를 달구어줄 짐승 새끼라 다행이었다.
“그러면 이 사제가 어리광을 좀 부려 보겠습니다.”
고개 숙여 유운의 가슴팍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댄 승한이 속삭였다. 유운이 채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허리끈이 부욱 찢겨 나갔다. 그게 상당히 귀한 옷감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아는 유운의 두 눈이 커졌다.
그러나 허리끈을 풀어내기가 무섭게 승한은 유운의 옷을 벗겨냈다. 처음부터 그게 거슬려서 어쩔 줄 몰랐던 이처럼 망설임 없는 손길이었다.
옥을 깎아 만든 조각처럼 미려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인 나신이 드러났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승한은 그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조금 짭짤한 살 내음이 그를 흠뻑 적셨다.
볼기를 벌리고 아래를 헤집으니 유운이 눈을 감는 게 보였다. 발그스름한 눈가가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으응?”
승한이 뺨에 입술을 비비는 감촉에 유운이 조금 안심하던 찰나였다. 흉기나 다름없는 승한의 성기가 한 번에 그의 밀지를 꿰뚫고 가장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왔다.
“……!”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채 유운은 입을 벌렸다. 승한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이 제 위치를 잊고 자꾸만 흘러내리려 했다. 무엇이든 단단하게 붙잡아야 이 지독한 추락을 견딜 수 있을 텐데, 아랫배에서 치미는 불길이 유운의 사고를 틀어쥐었다.
승한이 뺨을 핥아왔다. 먹잇감을 잡아놓고 핥아주는 맹수의 자비다. 그럼에도 유운은 그 위선 외에는 기댈 곳이 없어 승한의 품에 몸을 맡긴 채 꺽꺽 호흡을 골랐다.
‘아프, 아니 아픈가?’
혼란스러웠다.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는데 승한의 손이 그의 하반신을 붙들고 그 끝을 비벼왔다. 유운은 그제야 이 거친 삽입에 자신이 발기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대관절 언제부터 이렇게 밝히는 몸이 된 걸까. 입을 여는데 십 년은 가뭄이 든 땅처럼 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처언, 천히……. 흑!”
아래를 들쑤시는 승한의 양물에 유운은 헐떡였다. 분명 아랫구멍으로 받아먹고 있는데 윗구멍으로 물고 있는 양 목소리가 흐트러진다. 허리를 붙든 채 단단하게 위로 쳐 올리는 승한의 성기가 이미 한계까지 벌어진 음부를 더 벌려왔다.
어디까지 들어와야 저 짐승이 만족을 알까?
“하으, 앗, 하으!”
거친 파도에 떠밀리는 배가 된 것처럼 몸이 흔들렸다. 승한이 허리를 움직이는 박자에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아래를 치받는 속도가 달라졌다. 적응할 여지를 전부 앗아가는 통에 호흡도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앗! 아흑…….”
시야에 빛이 점점이 번졌다. 승한은 여느 때보다도 무표정했다. 인내심이 그의 웃음을 전부 앗아간 게 분명했다.
다행이다. 만약 놈이 여유로웠다면 머리채를 쥐고 흔들어서라도 정신을 쏙 빼놨을 텐데.
“아직, 생각 따위를…… 할 여유가 있으신. 모양, 입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유운은 승한이 더듬더듬 속삭여오는 말에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여유는 무슨 놈의 여유.
“사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한 손으로 유운의 팔을 끌어다가 머리 위에 고정시킨 승한은 다른 손으로 그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악! 아흣!”
아래를 내려다보니 무슨 낭아봉의 손잡이 같은 물건이 제 비부를 들락날락하는 것이 보였다. 승한과 몸을 섞을 때마다 그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왔으나 저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젠 저 흉물을 잘도 삼키며 쾌감씩이나 느끼는 제 몸이 더 대단할 지경이었다.
“거어, 거긴! 흐, 읏.”
입가를 타고 타액이 흐른다. 그러나 신음을 내뱉는 통에 입을 다물 겨를이 없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아니면 침인지 모를 것으로 얼굴이 범벅이 되는데 당장 승한을 밀쳐내고 이를 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정신없이 흔들릴 때마다 머리는 어서 끝내달라 아우성을 치고 몸은 더 큰 쾌락을 요구하며 녹아내렸다.
“……유운.”
입술이 깨물렸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선사하는 뾰족한 아픔에 유운은 물기 어린 시선으로 자신의 위에 몸을 겹친 사내를 바라봤다.
잠자리에서 대사형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던 것이 정말 까마득히 먼 옛일처럼 느껴진다. 승한은 그의 명을 저 좋을 대로만 지켰으나, 지금은 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퍽 마음에 들었다.
“승한.”
가가라든가, 승랑 따위의 애칭으로는 죽어도 불러줄 생각이 없었지만 이름 정도는 자신도 불러줄 수 있었다.
느슨해진 입매에서 묻어나오는 미소를 홀린 듯 바라보던 승한이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며 유운의 아래를 치받았다. 몸이 자꾸 위로 밀려 올라가고 야금이 등 아래로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온통 엉망이고 정돈된 것 하나 없는 데다가 불결하기만 한데. 왜 이리 좋은 걸까.
“승한, 승한…….”
하염없이 불러 젖히는 이름에 사내는 달콤한 웃음을 머금었다가 무섭게 미간을 좁혔다가 또 무표정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저 눈에 선연한 욕망만은 유운도 알아볼 수 있는 진실이었다.
평소 승한의 속을 읽기 어려워 그를 멀리했던 과거의 자신이 우습다. 그는 그저 남을 관찰해서 배운 감정을 둘러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무엇 하나 진실인 게 없고 전부 거짓이니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리가.
하나 실상은 이런 거였다.
감정이 무언지도 몰라 숨길 줄도 모르는 놈.
흉포하긴 해도 어리석은 짐승.
‘이런 놈을 경계했다니.’
유운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만 옛 선택이 우습고 가여웠다. 그는 승한을 꼭 끌어안은 채 담뿍 젖은 음성으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게 너를 줘.
승한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빈틈없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승한의 성기가 마침내 파정을 하고 있었다. 유운은 승한의 머리를 끌어당겨 제 가슴에 안으며 한동안 숨을 골랐다.
“손목이.”
승한이 그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손목이 발갛게 부었습니다.”
“손목?”
그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니 제 손목에 승한의 손자국이 남은 게 보였다. 정사의 여운 때문에 여태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까 손목에서 얼얼함이 느껴졌다.
승한이 짓누른 탓이다.
“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 정도는 금방 낫는다.”
덤덤하게 말하긴 했으나 붉다 못해 멍이 들 것처럼 변한 살갗은 유운이 보기에도 놀라웠다.
저놈은 자제를 모르고 자신은 이제 무림인도 아니니 입을 쩍 벌린 독사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사는 꼴이긴 했다.
“정 마음 쓰이거든 두어 시진 정도 묶여 있거라.”
유운은 툭 내뱉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으니 족가 정도는 있겠지.”
천마신교를 사람 사는 곳이라 표현한 건 유운 나름의 양보였다.
“그럼 이런 일은 못 해 드릴 텐데요?”
승한이 손으로 유운의 가슴을 지분거렸다. 그 손등을 아프지 않게 찰싹 내리쳤으나 사제는 음흉한 웃음을 흘릴 뿐 치우진 않았다.
저 무겁고 끈적끈적한 체온을 밀어내야 하는데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이 졸린 것도 같았다.
몸이 끈적거리는데 씻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팔다리가 축축 늘어지는 통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렵다.
거친 정사를 나눈 직후임에도 기묘하게 평화롭다.
“사부님께서…… 너를 찾지는 않으실까?”
수려한 이목구비에 근심이 깃드니 유운이 아닌 양 낯설었다. 승한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유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쫓겨났는데 찾으실 리가요.”
“뭐? 어째서지?”
유운이 당황해서 물었다.
“저번에 말했잖습니까. 사형의 가슴을 빨다가 들켜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운의 손이 승한의 입술을 응징했다. 승한이 웃는 듯 마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침묵했다.
질문의 답을 쉬이 내줄 것 같지 않았다.
“너는 오래 알고 지내며 상대를 외워야 한다고 했었지.”
유운이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과 살을 바투 맞댄 자리가 뜨거운데도 가슴 언저리가 서늘했다.
“사부님은 나보다 더 오래 너를 알고 지냈고, 나만큼은 아니어도 오래 아낀 막내 사제도 있으니까. 흑천에서의 날들이야말로 너에게 가장 소중했을 거야.”
승한은 언제든 미련 없이 자신의 대타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든 저보다 하루라도 더 아는 이를 만들면 되지 않나.
“그 평온한 일상을 어그러뜨린 내가 밉지도 않더냐?”
탐문하듯 승한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건―”
“단순히 오래 알고 지내는 것이 네 애정의 척도라면, 언제든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거 아닌가?”
유운은 승한의 말을 잘라내며 황급히 자신의 질문을 마무리했다. 그러지 않으면 영영 묻지 못할 것 같았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제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다.
승한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유운의 얼굴에 찬찬히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무언가를 잡아내려는 양 아주 집요한 시선이었다.
“사형. 혹시 질투하십니까?”
마침내 입을 연 승한의 눈이 야명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됐다.”
승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김이 피시식 빠지고 말았다.
‘내가 저 멍청한 놈하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 한 걸까.’
아둔한데다 머리를 하반신에 달고 다니는 사제에게서 진지한 대답을 기대한 게 제 잘못이었다.
팩 돌아누운 유운은 이를 금세 후회했다. 거칠게 몸을 움직이자 연즉 잊고 있던 정사의 여파가 그에게 통증을 선사했다. 허리 아래가 뻐근하고 다리가 저렸다.
몸을 일으킨 승한이 그의 발치로 내려가더니 발바닥을 천천히 지압하기 시작했다.
“놓아둬.”
“아프시지 않습니까.”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웃음을 걸친 얼굴이 잘생겨서 꼴도 보기 싫었다. 섭섭한 마음 탓인지 생각도 자꾸 삐뚤게 나간다.
입 밖으로만 옮기지 말아야지, 하는데 승한이 종아리를 주물러왔다. 성애는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손길이었다.
“어릴 적에 이런 걸 종종 했었지요.”
승한이 손을 움직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새치름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던 유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참 성장기이기도 했고, 어린 몸에 고된 수련을 하다 보니 근육이 잘 뭉쳤다. 유운은 승한을 코끝으로 부리며 제 수발을 들게 했다. 가끔 내키면 승한이 몸을 푸는 것을 도와주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땐 힘 조절을 배우기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유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손해 보는 법이 없는 성격인 줄은 알았으나 이 정도라곤 상상도 못 했다.
“지금은 이걸 배워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힘이 있으면서도 꼼꼼한 손길에 몸이 녹진녹진 풀렸다. 섭섭함인지 분노인지 분간하기 힘든 감정도 조금쯤 누그러졌다.
“아마 그런 순간들이 많을 겁니다. 저는 사형과 나눈 시간도 많고 온갖 경험을 쌓았으니까요.”
고개를 숙인 승한이 그의 발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뺨을 비비는 사내의 모습은 음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남에게 내주기 싫다면 더 단단히 붙잡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지천명까지는 저를 독점하셔야 남은 생 동안 안심하실 수 있을 텐데…….”
저는 백 년을 살 테니 그 절반인 오십 살만 넘기면 유운이 독점할 수 있을 거라는 사탕발림이었다.
이 상황의 가장 언짢은 점은 유운이 승한의 제안에 살짝 솔깃했다는 점이다.
“네놈이 내 피를 말리려고 작정했구나.”
유운은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반백 년이나 네 괴롭힘을 감당하고 살라고?”
목소리에는 기대감 아닌 기대감이 살짝 실려 있었다. 승한은 이를 알아도 모르는 척 대꾸했다.
“제가 대사형을 반백 년이나 모시고 사는 거지요.”
“철면피 같으니라고.”
유운은 투덜거렸으나 이내 저를 짓누르던 근심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오래 들러붙어 있는 거야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가슴은 수런거렸으나 마침내 머리는 고요해졌다. 유운은 승한이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오는 걸 보면서 굼실굼실 흘러들어 온 잠기운에 몸을 맡겼다.
***
단둘뿐일 거라 생각했던 십만대산에서의 일상은 유운의 예상외로 흘러갔다.
승한은 이 장소를 재정비하기 위해 천마신교의 생존자를 불러다 놓았다. 어딘가의 농사꾼이나 나무꾼처럼 차려입은 이들은 하나같이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도끼로 줄기줄기 내뿜으며 썩어가는 기둥을 완전히 잘라낸 노인과 인사를 나눈 유운은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한 대마두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릴 적 모용세가의 어른들이 아이를 겁주기 위해 호랑이 대신 들먹이던 마두의 별호를 네 번 정도 들은 후부터는 머리가 고장 난 물레처럼 덜그럭거렸다.
대체 뭘 믿고 저들이 평범한 노인이라 여겼던 걸까? 혈교와 마교의 접전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이들이라면 이름난 고수일 수밖에 없는데.
특히 유운에게 큰 충격을 선사한 건 승한의 수하로 종종 얼굴을 비치던 지화가 마교 장로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새삼 승한이 마두의 우두머리라는 게 느껴졌다.
‘정말 사부님은 내가 오대세가의 직계든, 승한이 천마신교의 유일한 생존자든 아무 상관이 없었던 거군.’
남들은 하나라도 떠안기 싫어할 짐을 왜 아등바등 지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유운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쌓아 놓은 벽을 차근히 부쉈다.
언젠가는 깨금발을 들거나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사부님의 진심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여러모로 마음이 편해진 유운에게 근심거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또?’
선잠을 자고 있던 유운은 옆자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실눈을 떴다. 달마저도 어둠에 파묻힌 채였으나 승한이 깨어난 게 느껴졌다.
그는 살금살금 기척을 죽여 침상 밖으로 나가더니 유운의 야금을 고쳐 덮어주고 있었다.
이 이후에는 방 밖으로 나가버리고 해가 뜰 즈음에 돌아온다는 걸 요 며칠 사이의 관찰로 알게 되었다.
워낙 기척에 예민한 데다가 잠귀에 밝은 편이 아니었다면 승한이 남몰래 빠져나간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몸을 닦고 오는지 좋은 향도 나고 체온이 따끈하게 데워져 있어서 좋았으나 이게 연일 계속되니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르는 척 눈을 감으려 하다가 불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유운은 입을 열었다.
“멈춰라.”
눈을 동그랗게 뜬 승한이 돌아봤다. 어둠에 녹아들기라도 한 양 기척 없는 사내의 얼굴에서 표정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제가 깨웠습니까?”
야금을 고쳐 덮어주던 사내의 질문에 유운은 불쑥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네가 고양이도 아니고 왜 내가 자는 새벽마다 살금살금 나가는 거냐?”
턱이 잡힌 채 흔들리면서도 승한은 방긋 웃었다.
“따라오시겠습니까?”
“몰래 밤마실을 다녀 놓고 이제야?”
“뭐. 대사형께 숨길 일은 아니니까요.”
유운은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승한에게 고갯짓했다.
“안내하거라.”
손을 풀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승한이 겉옷을 벗어 유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산의 새벽은 춥습니다.”
더는 무림인이 아니니 고뿔마저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굳이 하진 않는다. 그 간지러운 배려에 유운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바투 쫓아온 승한을 위해 문을 열어주자 그가 의외라는 듯 이쪽을 쳐다봤다.
저는 옷을 벗어 걸쳐줘 놓고 문을 대신 잡아준 걸로 놀라기는.
발뒤꿈치를 든 토끼처럼 살금살금 움직인 승한은 그들이 사용하는 전각 뒤편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자 그 한가운데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장소가 나타났다.
“여긴…….”
유운은 물고기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온통 꽃이 피어 있었다.
월광을 머금고 신비롭게 빛나는 청자색 모란의 위로 바람이 물결을 일으켰다. 파도 거품을 대신하듯 펄럭펄럭 날아오르는 하얀 나비가 보였다.
“이게 다……. 이게 다 무어란 말이냐?”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승한을 돌아보자 그가 웃었다.
“요 며칠 사이 제가 하던 일입니다.”
“새벽마다 모란을 심고 있었다고?”
저 우악스러운 손으로 사람 멱이나 딸 줄 알 듯한데 꽃나무 관리 같은 섬세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승한이 행한 일의 결과가 유운의 눈앞에 있었다. 그의 수하인 석이나 지화도 보이지 않았고 십만대산에서 산보를 즐길 때면 종종 마주치는 마두도 보이지 않는다.
이 모란이 피는 화원에는 오로지 승한과 저 둘뿐이었다.
“혼자서 이 많은 일을 어찌했단 말이냐?”
심지어 이 청자색 모란은 사부님이 종자를 엄격히 단속했다. 현재 모용세가와 일원당 밖에선 심어진 곳이 없다.
‘요녕에서 가져왔을 리는 없고.’
아니나 다를까, 승한이 냉큼 이실직고했다.
“일원당에서 훔쳐 왔습니다. 혼례를 올리는 신랑 납치에 비하면 일도 아니더군요.”
씩 웃는 잘생긴 얼굴이 참으로 밉살스러웠다.
유운은 그 말에 차마 답하지 못했다.
“내 곁에서 벗어난 적도 없으면서.”
“아이, 참.”
승한이 코끝을 찡그렸다.
“제가 대사형 곁을 벗어날 수 없으니 수족 같은 소중한 부하에게 신신당부해 두었지요. 너 흑천에 가면 꼭 일원당 사정을 살피고 내게 고하라고.”
유운은 울며불며 승한에게서 자길 버리지 말라 애걸하던 석을 떠올렸다. 영 어리숙해 보였는데 승한이 부릴 정도의 수완은 있었나 보다.
“일원당의 모란이 올해도 활짝 피어 있다고 하더군요.”
옮겨 심기 딱이었지요. 하고 여상히 덧붙이는 음성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다른 쪽 귀로 흘러나갔다.
본디 청자색 모란은 모용세가의 상징이었다. 요녕도 아닌 감숙으로 이를 옮겨 심고자 사부님이 얼마나 신경을 써주셨던가? 몰락한 무림세가의 상징을 누군가가 조롱할 수 없게끔 그 종자를 엄격히 관리하여 오로지 유운과 일원당이 독점할 수 있게 한 자 역시 그의 사부, 예진랑이었다.
누가 돌보지 않으면 머나먼 감숙 땅에서 시들고야 말 꽃이, 자신이 떠난 후에도 피어 있었다니.
‘사부님…….’
유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감숙에서 모란 한 그루 키우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느냐? 여긴 신강인데 관리는 또 어찌하려고?”
흔들려 나올까 두려웠던 음성은 제가 듣기에도 퍽 차분했다.
“저는 꽃을 그리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열심히 노력해도 반쯤 죽이겠지요.”
그때는 또 일원당에서 훔쳐 오겠다며 승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유운은 언제나 기묘한 확신을 가진 사제를 부러움과 의아함이 반반 뒤섞인 낯으로 바라봤다.
사부님이 영원히 일원당의 모란을 피우시진 않을 텐데, 언젠가는 이 제자를 가슴에서 덜어내고 훨훨 편히 살아가실지도 모르는데 승한은 그의 애정이 영원할 것처럼 말했다.
어쩌면 슬슬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렴풋이 짐작하고 의심한 사부님보다도 승한이 달달 외워 온 사부님이 더 정확하다는 걸.
“그럼 이게 다 무슨 헛짓이더냐?”
유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일원당에 모란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것처럼, 여기에도 모란이 피면 대사형이 마음 붙일 곳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자기 혼자 돌봤다가는 죽이고야 말 꽃나무로 몸을 기울이며 꽃봉오리를 툭 건드리는 손가락이 어색했다.
꽃보다 검이 어울리는 손으로 모란을 일일이 옮겨 심었다니, 모란을 찾아든 나비가 제 뱃속까지 침범한 듯 속이 들썩였다.
‘천마신교가 그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 농사일에만 매달린 대마들을 수십이나 거느리고 있으면서. 대체 왜…….’
왜 이 모든 걸 그 혼자만의 손으로 하고 있었단 말인가?
새벽이 승한의 뺨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시선은 유운에게 머물러 있었다.
활짝 피어난 청자색 모란에 포위당한 유운은 가슴께가 근질근질해지는 걸 느꼈다. 어떤 대단한 절진이라도 그 안에서 헤어 나오려 노력했을 텐데, 고작 꽃나무 따위에 제 발이 멈춘 게 우습다.
우습고 기쁘다.
“아둔하기는.”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여 꺼낸 타박에 승한이 웃었다. 왜 저렇게 웃음이 헤픈지 모르겠다.
“무어 하러 그 수고를 들였느냐?”
미운 말만 내뱉는 자신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사제는 정말 취향이 이상했다. 그러니 제 머리까지 이상해진 거겠지.
“굳이 옮겨 심지 않아도 이미 모란은 네 곁에서 피는 것을.”
간신히 문장을 완성한 유운의 손을 끌어다 제 뺨에 비비며 승한이 물었다.
“언제부터입니까?”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유운은 눈을 감았다. 꽃의 그림자와 뒤섞인 두 사내의 그림자는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는 양 겹쳐, 영영 떨어지지 않을 듯 견고하게 맞물렸다.
십만대산에 모란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