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13)

외전 2. 화월루의 오후

십만대산에 영원히 처박혀 있을 줄 알았던 유운은 승한의 손에 이끌려 사천 나들이를 나왔다.

그가 갈 곳이 있다며 짐을 꾸리고, 여정에 나설 때만 해도 유운은 목적지를 몰랐다.

그저 자고 일어났더니 사천의 화월루였다. 다시 돌아오게 된 사천제일루는 처음 방문했던 날만큼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대사형.”

유운의 무릎을 끌어다가 대뜸 머리를 괴고 누운 승한이 입술만 웅얼거렸다. 느릿한 음성이며 숨소리는 아직 덜 깼노라 시위하기 위함인 게 분명했다.

무거운 머리통을 득달같이 남의 다리에 얹어 놓고 내숭을 부리는 꼴이 딱 승한다웠다.

“깬 거 다 안다.”

퉁명스레 밀어내려 하니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은 사내가 눈만 감은 채 답했다.

“잠투정입니다.”

“남의 질문에 답하는 잠투정도 있다더냐?”

코 고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머리를 확 밀쳐냈을 텐데, 유운이 깔끔 떠는 성격임을 기가 막히게 잘 아는 승한은 쌕쌕 숨만 내뱉었다.

“무겁다. 떨어져라.”

어깨를 찰싹찰싹 때려도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언제는 제가 깃털처럼 가볍다고 하시더니. 이젠 무겁다고 밀어내시는 겁니까?”

깊은 사모의 정이 다 식은 거냐며 우는 시늉을 하는 승한을 보던 유운이 물었다.

“요새 익히는 곡이 이별가더냐?”

“들켰군요.”

“혓바닥이 매끈하다고 머릿속까지 매끈거리면 어쩐단 말이냐.”

유운은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승한은 배시시 웃으며 유운을 올려다봤다. 그 빤한 시선에 유운은 제 손으로 사제의 눈 위를 덮어버렸다.

“어둡습니다.”

“그러고 있거라.”

“안 치워주실 겁니까?”

눈이 가려진 사제는 평소보다 덜 위험해 보였다. 형형한 눈빛이 가려진 덕분이었다. 평소 눈웃음으로 잘도 가리고 다니긴 해도 한계가 있었다.

‘입술은 잘생겼는데…….’

윗입술보다 살짝 도톰한 아랫입술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쓸데없이 육감적이다. 유운은 승한에게 보이지도 않았을 시선을 들킬까 두려워 엄한 투로 으름장을 놨다.

“얌전히 있거라.”

말한다고 순순히 들을 승한이 아니었다. 그는 여봐란듯이 두 손을 곱게 모아 아랫배 위에 올려놓고는 눈을 깜빡거렸다. 처음엔 착각인가 했던 유운은 제 손바닥을 쓸어내리는 가냘픈 감각에 어깨를 움찔했다.

그 감촉이 흡사 손아귀에 나비 한 마리를 가두고 있는 것 같았다.

‘간지러워.’

가슴으로 번지듯 옮아가는 수런거림에 유운이 동요하는 찰나, 승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드릴까요?”

“뭐, 무어?”

유운의 음성에는 아연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 말입니다.”

“미쳤나?”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튀어 나간 말은 평소의 유운답지 않게 거칠었다.

“탐내시는 것 같기에.”

가당찮은 누명에 유운은 펄쩍 뛰었다.

“탐낸다고 다 남의 손에 쥐여 주겠다고?”

“상대가 원하는 건 뭐든 내어주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누군진 몰라도 형편없는 스승이군. 갈아치워.”

교월이 그랬나, 하고 생각하는데 승한이 냉큼 답했다.

“사부님이 그랬는데요?”

“……네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

유운의 말에 승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저를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놀아나고 말았다.

얄밉다.

잘생긴 입술을 한 대 때려주려다가 손을 거두고 물러나길 택했다. 승한은 몸을 뒤로 빼는 유운의 손목을 감아쥐며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사제의 몸을 덮치는 꼴이 된 유운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승한이 말했다.

“저에게만 너무 박하신 거 아닙니까?”

“오히려 관대한 편이지.”

기억을 잃지 않았음을 인정한 후로 유운은 스스럼없이 제 성격을 드러냈다. 승한은 그게 싫지 않아 웃었다.

그는 유운의 저 오만함을 지극히 아꼈다. 남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창살이고 스스로를 안에 가두는 우리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버티지도 못할 섬세한 인간이었다.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사형이 괴로워할 때마다 제가 아프면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편리해?”

유운의 낯이 보일 듯 말 듯 일그러졌다. 승한은 그답지 않게 솔직한 답을 내놨다.

“저는 감정에는 무지해도 고통이 무엇인지 아니까요.”

“……나는 너를 쉽게 가르칠 생각이 없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내뱉은 숨이 무겁게 들렸다. 승한은 혀를 찼다.

“사부님이나 대사형이나 굳이 어려운 길로 택하시는 걸 보면 고집이 대단하십니다.”

갸우뚱하고 살짝 기울어지는 고개는 그저 천진한 의문만을 담고 있었다.

“대사형이 괴로워한들 헤아리기 어려울 텐데, 정말 이대로 괜찮습니까?”

당신이 아무리 슬프고 괴롭고 힘들어도 자신은 눈물 한 방울 쏟아낼 일 없다고 말하는 고요한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럼에도 유운은 승한이 저 안에 별도 달도 담을 수 있음을 알았다.

“누가 너 따위에게 같이 울어달라고 하더냐?”

코웃음을 치자 승한은 우는 시늉을 했다.

“대사형은 역시 제 몸에만 관심이 있는 모양입니다.”

“뭐, 뭐?”

발칙한 사제가 이런 식으로 농을 걸어오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매번 당황하게 된다. 사내면서 지나치게 교태를 부리는 사제의 탓이라 생각하며 유운은 씨근덕거렸다.

슬며시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승한의 눈이 가만가만 휘어졌다. 이내 그는 입술을 모아 아직 제 얼굴을 반쯤 덮은 유운의 손가락에 가져다 댔다.

넋을 놓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유운은 손가락 마디에 느껴지는 질척한 혀 놀림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급히 움직이느라 의도치 않게 유운의 무릎은 저를 베고 있던 승한의 턱주가리를 가격했다.

“윽!”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으나 잽싸게 문 앞에 당도한 유운은 아주 잠시 뒤를 돌아봤다. 승한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게 생리적인 눈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유운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문을 쾅 닫았다.

‘고작 혀 놀림 따위에…….’

정말 위험하다.

***

“대사형!”

이리로 문이 쾅 열리고.

“대사형!”

또 저리로 문이 쾅 열린다.

“대사형?”

유운은 화월루의 주방 한구석에 틀어박힌 채 저를 찾아 헤매는 승한의 부름을 모르는 척했다. 오가는 이들이 웃음기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은 거짓 제보도 던져주곤 했다.

주방의 재료창고에 숨은 유운은 사제의 인망에 감탄했다.

다들 자신보다는 승한과 더 오래 알고 지냈는데 유운의 편인 양 교란에 나서고 있었다. 승한이 얼마나 대단한 악동인지 익히 겪어온 눈치다.

‘어쩌면.’

화월루의 사람들이 유운 본인보다 승한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갑함에 신발 속에 감춰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창고 문이 덜컥 열리더니 머리를 동글동글 말아 양 갈래로 틀어 올린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왜 여기에…….”

유운을 발견한 그녀는 입을 쩍 벌렸다. 일전에 여지 바구니를 가지고 승한과 씨름했던 아이다.

우습게도 저 소녀를 질투했던 일이 떠오른 유운은 조용히 검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염 공자님이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유운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오므리는데,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제가 가서 고자질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정말인가?”

“암요. 맨날 남 골탕 먹이고 다니는 인간이니 골탕먹을 때도 됐지요.”

그녀는 소쿠리에 팔각과 산초 따위의 향신료를 주섬주섬 챙겼다.

“여기 너무 좁고 답답하지 않습니까? 다른 데에 숨는 건 어때요?”

“나갔다가 잡힐지도 모르니…….”

유운은 우물우물 답했다.

승한이라는 공공의 적을 둔 까닭에 생긴 친분은 이상했다. 심지어 예전의 대공자 모용유운이라면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사람이라 더욱 그러했다.

어색해하는 유운의 기색을 눈치챘음에도 소녀는 싹싹한 투로 그를 이끌었다.

“여기 이거 들고 따라오셔요.”

“그러다가 마주치기라도 할 수 있으니 예 있겠다.”

“저는 걸음마를 화월루에서 배웠어요. 염 공자님 모르는 샛길을 꿰고 있으니 믿어주세요.”

적어도 승한에게 팔아넘기진 않겠다며 가슴을 팡팡 두드리는 소녀의 호언장담에 유운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이리 내거라.”

유운은 소녀가 든 소쿠리까지 자신의 짐 위에 올려버렸다. 아이가 깜짝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그는 턱짓했다.

“무어 하느냐. 어서 안내하지 않고.”

까칠한 투였으나 이런 허드렛일 따위와는 연이 없어 보이는 귀한 신분의 사내가 보이는 호의는 사람을 툭 건드렸다.

‘염 공자가 저 같은 사람 만난 줄 알았더니.’

코끝을 살짝 찡그린 아이는 걸음을 옮겼다. 흘깃흘깃 돌아가려는 고개를 다잡는 건 은근히 어려운 일이었다. 멀쩡한 사내보다 술에 취한 이를 볼 일이 많았던 소녀로서는 이런 자신이 낯설었다.

“이쪽입니다.”

유운은 소녀를 따라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화월루 내부를 잘 꿰고 있는지 아직 승한을 마주치지 않았다.

괜스레 조마조마한 마음을 꾹 누르며 막 모퉁이를 도는 소녀의 뒤를 바짝 쫓았다. 얼굴을 가리느라 시야도 거의 덮어버린 유운은 우뚝 멈춰선 아이에게 부딪힐 뻔하다가 가까스로 물러났다.

다람쥐처럼 잽싸게 걸음을 옮기던 아이가 우뚝 멈춰 선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까꿍.”

입매를 느슨하게 푼 승한이 벽에 기대선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분명 화란방 쪽으로 갔잖아요?”

그제야 경악에서 벗어난 소녀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더니 물었다.

“좋은 귀를 뒀다가 어디에 쓰겠니.”

비웃듯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린 채 귓가를 툭툭 두드리는 사내의 낯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반칙이에요!”

소녀가 왁왁거렸지만 승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 꾹 누르더니 다른 손을 유운에게 내밀었다.

“아니 오실 겁니까.”

유운은 한숨을 삼켰다.

“들고 있던 건 마저 날라줘야지.”

“벌써 소박맞을 줄은 몰랐습니다.”

속눈썹만 파르르 떠는 모습에 유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게 가증스럽게 느껴져야 하는데 반반한 낯짝 때문인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별꼴이야, 정말.”

뾰족한 목소리에 유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같은 걸 보고도 저 소녀와 제 반응이 다른 이유를 생각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예전과 달리 사제에게 한없이 물러진 스스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유운에게 다가와 그가 들고 있던 짐을 차곡차곡 뺏어갔다. 작은 몸으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모습이 기예와도 같았다.

“이제 됐으니 두 분이 일 보셔요.”

새치름하니 말하고는 총총 걸어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 유운은 제 어깨에 턱을 괴고 허리를 안아오는 승한을 밀쳐냈다.

“어떻게 찾았지?”

세모꼴이 된 눈은 독사처럼 형형했으나 승한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디 숨어 계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유운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창고에 숨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지나쳤다고?”

“재미있는 놀이를 떠올렸는데 함께 어울려주지 않으면 상심하실까 하여…….”

“하면 왜 막판에 마음을 바꾼 것이냐?”

승한의 눈매가 더 곱게 휘어졌다.

“대사형이 다른 사람 뒤를 쫓아가지 않았습니까?”

“……뭐?”

“이 험한 중원에서 얼굴 아는 사이라고 따라가면 큰일 납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조곤조곤한 말투에 유운의 낯이 수치심으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사리분별도 못 하는 세 살배기인 줄 아느냐?”

이를 악물고 꺼낸 말에 승한이 그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기습도 이런 기습이 없었다. 볼을 감싼 채 노려보니 승한이 느물느물한 투로 대꾸했다.

“설령 대사형이 백 살이어도 같은 마음일 겁니다. 언제나 조마조마하고, 또 강샘이 나겠지요.”

낮아진 목소리가 소곤소곤 유운의 귀를 간질였다.

설마 피신하겠다고 어린아이를 따라 움직인 것 때문에 미리 매복하고 기다렸단 말인가?

“뭘 모르는 제 눈에도 귀해 보이는데 남 눈에는 어떨지 생각하면 속이 뒤집힙니다.”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자신을 키우다시피 한 사부님을 배신한 인간을 승한처럼 눈이 거꾸로 달린 놈 말고 누가 귀하게 여긴단 말인가?

경멸과 멸시,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흑도에 쟁쟁한 부곡마도의 위명이 부끄러울 지경이구나.”

차갑게 쏘아붙이는데도 승한은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저렇게 온화한 표정을 지어도 경계심이 앞서는 걸 보면 난놈은 난놈이다.

“다 허명 아니겠습니까?”

반질반질한 혓바닥을 뽑아 놓고 다니라고 하고 싶었다.

사제의 눈은 그야말로 땅에 박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어딘가에서 자신보다 더 그럴듯한 악당을 찾아낼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도한 이에게 자신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속살거리겠지…….

‘정말 눈이라도 뽑아 버리면.’

무심코 손을 뻗어 승한의 눈가를 더듬는데, 그가 유순하게 눈을 감았다. 이대로 찔러도 저는 상관없다는 양 그 느슨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 가학심을 자극했다.

이걸 단지 유순함이라 표현하기엔 어렵다는 걸 유운도 알았다. 눈 하나 정도 내줘도 상관없다는 오만함에 가까웠다.

“내게 눈을 주고, 넌 무얼 가지려고?”

승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무언갈 원해서라기보단, 저도 가끔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가지고 싶어서요.”

유운은 잠시 말을 잃었다. 승한의 답에 자신의 표현이 영 부족한가 싶어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네게 박하게 구는 것이 혹 마음에 걸렸다면 좀 더 노력하마.”

승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대사형의 감정이 무겁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언제 얼마나 가벼워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전 그게 얼마나 깊어지고 얕아지는지 구별하기 힘들어서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새기고 싶은 겁니다.”

“네가 가질 생각을 해 놓고 왜 내게 주려 들어?”

“제가 사형에게 무언갈 한다면 분명 선을 넘어버릴 테니까 사형이 저에게서 무언갈 앗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저는 영영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불변은 아름답기보다는 차라리 두려웠다. 승한의 선고가 그러했다. 그는 처음 이 세상에 빚어진 대로 살았고 이날 이때가 되도록 달라지지 않았다.

사제는 유운을 꼭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그것이 온당치 않은 방식이라고 해도 대사형이 저를 영원히 가져주면 좋을 텐데.”

연정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그 윤곽을 더듬어 흉내 내는 사내를 보며 유운은 심란한 낯을 했다.

이 관계에서 누군가가 버려진다면 그건 자신일 거라고 확신하는 투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놈을…….”

십만대산에 모란을 잔뜩 피워 놓고는 자신이 떠날 걱정이나 하고 있는 사제가 한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흘러내린 승한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준 유운은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우는 소리는 내지 않았으나 배신당한 개처럼 커진 눈망울로 이쪽을 보는 승한의 모습에 유운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온당치 않은 방식……으로 가져달라는 게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힘내보마.”

충분히 알아들었음에도 모르는 척 구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주둥이를 꼬집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저건 분명 승한의 진심이다. 자신을 놀리려는 의도 따위도 없는 속내를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승한의 감정을 믿을 수 없다는 말에 냉큼 오십 년을 함께 살면 된다고 주장했던 그 뻔뻔한 제안에는 이런 생각도 녹아 있었던 걸까?

유운은 아리송한 기분에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매끄럽다기보다는 거칠고 굽슬굽슬한 감촉이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그럼 제가 하자는 대로 해 주실 겁니까?”

“신체 훼손 같은 건 안 된다. 흉터도 안 돼.”

“대사형이 혼자 하는 걸 보고 싶습니다.”

천진하게 눈을 깜박이는 낯에 유운은 입을 쩍 벌렸다.

지금 뭐라고?

“호, 혼자?”

지금까지 항상 승한과 함께 했던 일을 저 혼자 하자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입술이 절로 말라붙는다.

승한은 그런 유운의 낯을 샅샅이 살폈다.

“싫으십니까?”

저 간살스럽고 붉은 혓바닥이 뱀의 것처럼 날름날름 움직였다. 적어도 유운의 눈에는 그렇게 왜곡되어 보였다.

“저는 제 동정도 바쳤는데.”

속눈썹을 팔랑팔랑 깜빡이며 떠는 가증이 누가 봐도 승한이 아니라 승랑 같았다. 한 몸이면서 저렇게 휙휙 얼굴을 바꿔 끼는 승한을 보며 유운은 자신이 완전히 몰이 당했음을 직감했다.

“……책임을 안 지려는 게 아니라.”

완전히 승한의 의도대로 말렸음을 깨달았으나 헤어 나오기엔 이미 늦었다.

유운은 마침내 자포자기한 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고작 수음 한번 아닌가. 얼른 해치우면 저 시끄러운 녀석도 만족하리라.

“어떻게 말입니까?”

승한은 제 요구가 받아들여져서인지 고분고분 물었다.

“일단, 옷을 벗고.”

혼자만 벗을 생각을 하면 수치스러웠다.

일단 저놈도 벗겨 놓고 시작해야 했다.

“제가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침상에 올라 요염하게 옷을 천천히 벗는 승한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에게 시선을 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진심으로 유혹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다리 사이에 비치는 그의 성기는 무르익은 과일처럼 붉었다. 분명 징그럽고 흉물스러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홀린 듯 침상에 오른 유운은 처음 뒤가 범해질 때도 느끼지 못한 긴장감에 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았다.

유운은 떨리는 손으로 제 옷을 끌어 내렸다. 멍청하게 손이 서로 엉키기도 했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다리를 벌린 유운은 승한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승한이 손을 움찔했으나 유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혼자 해 보라지 않았나? 손 내려.”

“아아. 그랬지요. 저도 모르게 그만.”

승한은 두 손을 순순히 뒤로 물렸다. 유운의 나신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움직이게 된다. 이건 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

‘어서 끝내자.’

유운은 승한이 자신에게 했던 애무를 흉내 내듯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견갑골 위로 입술을 겹쳤다.

무언가 심장 박동 같은 게 두근두근하고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그게 승한의 심장 소리라 생각했으나 가만 집중해 보니 유운 본인의 심장 박동이었다.

“간지럽습니다.”

승한이 같잖은 야료를 부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유운은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 정도로?”

“간지럽다니까요.”

그보다 아래로 천천히 손을 내린 유운은 제 양물을 움켜쥐었다. 성욕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질색이었기에 이렇게 만져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제대로 세우지도 않았는데 한 손으로 쥐기엔 약간 빠듯했다.

“조금 적셔야겠는데.”

손을 몇 번 움직여 보니 이대로라면 살이 벌겋게 일어날 것 같았다.

“향유가 저기 있습니다.”

유운의 말에 승한은 침상 곁의 탁자를 가리켰다. 손을 뻗은 유운은 작은 자기병을 가져와 대충 이로 뚜껑을 뽑았다. 안에 든 액체를 아낌없이 자신의 손바닥과 성기 위에 쏟아부었다.

일부가 승한의 몸 위로 흘러내리고 침상까지 흥건하게 젖었으나 여긴 얼마든지 새 가구를 들일 수 있는 사천 한복판이니 괜찮으리라.

살기둥을 손으로 잡고 훑으려는데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유운은 초조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즐겨야 하는데 긴장 탓인지 잘 되지 않는다. 승한의 몸을 보면서 달아올랐던 열기가 이대로 픽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려는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승한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달래듯 입을 연 승한이 본인의 성기로 시범을 보였다. 그의 큰 손이 검붉은 성기를 휘어 감는 게 보였다. 유운은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며 제 손도 움직였다.

“이렇게 귀두 끝을 감싸듯이 쥐고 압박하면서……. 옳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제가 저를 살살 달래고 어르는 투에 유운은 얼굴을 붉혔다. 이런 일로 잘한다고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보법을 배울 때도 이런 식으로 배우진 않았는데.’

진랑은 엄격한 편이었다. 성품 탓에 칭찬도 아끼는 편이라 유운은 이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다.

아니지. 애초에 사제의 몸 위에 올라타 제 성기를 쥐고 헐떡대는 게 가장 이상하긴 했다. 차갑게 식어야 할 성감은 점점 고양되고 있었다.

“이제 움직이시면 됩니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손바닥에 미끈미끈하게 묻어나는 향유가 윤활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승한이 시킨 것처럼 성기를 감싸 쥐고, 살기둥을 비비며 마찰하고 선액이 질금질금 흘러나오는 귀두 끝을 압박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이를 집요하게 쫓는 승한의 시선이 퍽 적나라했다. 보지 말라고 대거리라도 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머리가 뜨겁다.

손을 움직일 때면 승한의 발기한 성기를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일부러 한 짓이었다. 자신에게만 부끄러운 짓을 시켜 놓고 저는 한 발짝 물러나서 점잖게 지켜보는 시늉을 하는 사제가 야속하고 괘씸했기 때문이다.

벌겋게 익은 물건이 제가 움직일 때마다 애타 타서 꺼떡이는 모습이 고통스러워 보여 못내 흡족했다.

승한이 좀 더 절절매며 다가왔으면 좋겠다. 평소 그렇듯 제 몸에 박아대는 것에 미쳐버린 짐승처럼 굴지 않는 게 아쉽다.

흘깃흘깃 시선을 던지자 이를 알아챈 승한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마음껏 가지고 노셔도 됩니다.”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유운은 영 떨떠름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여유로운 척하기는.’

그러나 결국 욕망이 이성을 앞질렀다.

유운은 손을 뻗어 승한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자신이 가진 것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 흉흉한 양물을 만지고 있는데 징그럽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대감이 들었다.

얼마나 엉망으로 들쑤셔 놔야 사제가 움직일지 궁금해졌다.

제 성기와 승한의 성기를 마주 비비자 사제의 허벅지가 바위처럼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핥은 유운은 성교를 나눌 때처럼 은근슬쩍 허리를 움직이며 승한의 양물을 움켜쥐었다.

“윽……!”

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은 승전보처럼 들린다. 나른한 미소가 점차 걷히고 있었다. 여유를 잃어가는 승한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유운도 나름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분명 앞만 만지고 있는데 뒤가 근질거리고 있었다. 일찍이 승한이 제 몸에 피워 놓은 성감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승한이 제 뒤를 열렬히 헤집어 놓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 유운을 잠식하는 열락만으로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애타는 마음에 사고는 서서히 밀려났다. 마치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지워지는 모래사장의 글씨처럼.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오로지 쾌감뿐이다.

“젠장…….”

유운은 성긴 호흡을 토해냈다.

손바닥과 허리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기분이 붕 떠올랐다. 마주 비비는 승한의 성기는 계속 커져만 가고 있었다.

쾌감이 유운의 머리를 붉게 적셨다. 승한에게서 흘러나오는 호흡이 델 듯이 뜨겁다.

유운은 충동적으로 사제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신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입을 뗐을 때 남은 발긋한 자극이 예상외로 만족스러웠다.

“으음……. 사형…….”

제가 몇 번이고 씹어 놓은 승한의 살갗은 한여름의 꽃처럼 활짝 피어 있다.

유운은 앞을 만지는 손을 뒤로 움직이려다가 몇 번이나 참아야 했다. 정사를 나눌 때마다 아래를 채우고 흔들리는 일에 길든 몸이 거듭 허전함을 토로했다. 그 아우성에 유운은 자신이 느끼는 아쉬움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음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서 승한이 제 안에 들어와서 거칠게 휘저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유운은 거칠게 손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절정에 도달하고 싶었다.

‘정말 몹쓸 취향이군.’

건장한 사내에게 거칠게 박히는 상상만으로 삽시간에 아랫배가 뻐근해진다. 유운은 슬슬 자신이 한계에 달했음을 깨달았다.

“아, 아……! 아!”

마침내 유운은 파정했다. 뿌연 백탁액이 그의 밑에 깔린 승한의 몸 위로 뿌려졌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데, 문득 승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랫배와 다리 사이에 가장 흥건하게 고였으나 가슴팍에도 몇 방울 튄 흰 액체가 느릿느릿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자극적이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끼며 유운은 그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귓불이 제법 따끈하고 말랑말랑했다.

천천히 몸을 뒤로 물리려 하는데 승한이 유운의 목을 끌어안았다.

“좋으셨습니까?”

유운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고작 수음 한번 했을 뿐인데 이렇게 쑥스러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쉬워 보이십니다.”

“그거야…….”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승한의 말에 유운은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이실직고했다.

“이거론 부족해.”

다른 쪽으로 몸이 길들여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제 입으로 시인하려니까 부끄러웠다. 승한은 다 안다는 듯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옭아맸다.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벌리자 승한의 손이 그사이를 파고들었다.

형형한 시선이 유운의 밀지에 꽂혔다.

“앞을 쓰게 해 줬는데도 왜 여기가 이렇게 시끄러울까…….”

뒤에 들어온 승한의 손가락이 사정없이 움직였다. 유운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을 포기한 채 그저 짐승 같은 울음소리만을 흘려보냈다.

“들려요? 이렇게 질척거리는데.”

게걸스럽게 입맛을 다시는 승한을 올려다보며 유운은 입술을 달싹였다.

“너, 넣어…….”

동정이고 나발이고, 자신은 승한이 원하는 걸 주었으니 이제 사제가 저를 만족시켜줄 차례다. 그리 합리화하며 뻔뻔함을 되찾은 유운은 승한에게 요구했다.

“넣어 줘.”

오로지 그 명령만 기다렸다는 듯, 승한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그의 양물이 파고들었다. 숨을 쉬기 힘들었으나 유운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간 채였다.

“아흐, 윽!”

처음부터 이걸 원했다.

안이 빠듯했다. 제대로 풀어주지도 않았는데 저 큰 성기를 꾸역꾸역 삼키는 걸 보면 이미 흥분해 있던 탓이 컸다. 승한은 유운의 어깨와 뺨에 잇자국을 남겼다.

갓 입질을 시작한 개 같다. 그러나 승한을 밀어내기엔 이 순간의 만족감이 컸다.

쾌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미미한 고통과 이물감이 섞여 있었음에도 좋았다. 유운은 거친 호흡을 고르며 승한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는 승한은 여태 순순히 허벅지를 붙인 채 유운을 받아냈던 사내와 다른 인물 같았다.

조금 전까지 발휘하던 인내심이 전부 휘발되기라도 한 걸까.

“읏, 흐읏…… 아!”

내벽을 밀어 올리는 둔중한 움직임에 유운은 마주 흔들렸다. 너무 안으로 들어올까 무서워 조이면 오히려 더 날뛴다. 이런 짐승의 고삐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여긴 스스로가 우스웠다.

“모, 몸이, 반으로…… 쪼개질 것, 같……!”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멍청한 생각이 기어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승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씩 웃었다.

“이렇게 쫀쫀하게. 읏, 달라붙는데 무슨 소립니까?”

악당 같은 웃음이다.

“유운은…… 욕심이 많아서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압니다.”

얄미운 말만 하는 입술을 마구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유운은 이를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흐윽! 읏! 아흣!”

저 머리 좋은 사제가 타박을 피해 가기 위해 그의 극점 위로 거푸 성기를 박아왔다. 밀지 깊은 곳에 있어서 저 혼자서는 도달할 수도 없는 부분에 너무도 손쉽게 닿은 승한의 양물은 유운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이젠 쾌감이 아니라 용암을 머릿속에 부어 넣는 느낌이다. 사고와 감정이 너무도 손쉽게 녹아내리고 그 자리를 지독한 열락이 차지했다.

하염없이 헐떡이다 보면 이것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싶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막막했다. 승한은 그답지 않게 제 욕망을 관철하고 있었다.

사제의 몸짓이 거칠어질수록, 그에 매달려 있는 게 고작인 유운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러다가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정신이 나갈 만큼 좋았고, 이보다 더한 자극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두렵기까지 했다.

인간이 색사에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듣긴 했으나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다.

만약 승한의 기교가 점점 나아지는 걸 몸으로 느끼지 않았다면 그가 동정이었다는 말을 절대 믿지 않았으리라.

“스, 승한……. 아! 하으, 으읏…….”

사제가 유운의 뺨을 핥아왔다. 그 말캉한 감촉에 왜 이러나 하고 그를 바라본 유운은 자신이 쾌감을 견디다 못해 눈물을 흘렸다는 걸 깨달았다.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그 움직임만은 세상 둘도 없이 다정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온 승한이 그의 혀를 쪽쪽 빨았다. 대단한 진미도 아닌데 왜 저렇게 황홀한 눈을 하는지, 유운은 도통 알 수 없었다.

침상이 아니라 승한의 품속에 갇힌 기분이다. 온통 그뿐인 공간에서 한 치도 벗어날 도리 없이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 아……. 하으, 흑!”

승한은 유운의 입술을 차지한 채로 그의 안에 정액을 토해냈다. 채 사라지지 않은 쾌감의 여운에 몸을 축 늘어뜨리는데, 그가 유운의 몸을 돌렸다.

엎어진 몸 위에 겹쳐지는 묵직한 체중에 유운이 퍼뜩 놀라 상반신을 일으킬 때였다.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날개뼈 위에 입술을 지그시 누른 승한이 속삭였다. 부드러운 음성은 사뭇 위협적으로 들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서, 유운이 도망치려고 했다간 더 불이 붙을지도 모릅니다.”

“허.”

유운은 코웃음을 쳤으나 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승한이 뒤에서부터 한 번에 성기를 밀어 넣은 탓이었다.

“미, 미친놈!”

밖으로 빼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세웠단 말인가?

유운은 흐느낌 아닌 흐느낌을 내뱉으며 야금을 거칠게 구겼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저도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무릎을 세웠다.

정사는 한밤중이 되도록 이어졌다. 유운은 거의 기진맥진한 채였다. 승한이 계속 안에다가 정액을 싸지르는 바람에 나중에는 박힐 때마다 속이 메슥거렸다.

견디다 못해 안에 든 것을 빼낸 다음에 하자고 했더니 제 성기로 긁어내 준다는 사제의 무작스러운 발언에 그를 걷어차기까지 했다.

중간에 힘이 빠질 줄 알았는데 분노 덕인지 제대로 턱주가리를 날릴 수 있었다. 내일 즈음이면 얼굴에 멍이 들지도 모르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하아…….”

침상에 얼굴을 박은 채로 호흡을 고르는데 유운의 손길이 머리카락을 헤집는 게 느껴졌다. 개수작의 기운이 느껴지는 손길이다.

“아직도 부족하다는 거냐…….”

유운이 웅얼웅얼 건넨 타박에 승한이 답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 말에 안도를 느끼는 자신이 싫다.

“뒷구멍이 부었으니까, 이번에는 여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잘 붙이고 계셔야 합니다.”

아이를 어르듯 조곤조곤한 음성에는 욕망이 함뿍 묻어났다. 호랑이가 사슴 생각해 주는 꼴이 따로 없었다.

끝낼 기미라도 보이는 게 어딘가 싶어 유운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아래를 헤집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유운은 최선을 다해 승한이 했던 것처럼 허벅지를 붙였다. 그러나 다시 안으로 들어올 듯 흉흉한 몸짓의 사제를 온전히 감당하긴 힘들었다.

흐느적거리는 팔이 자꾸만 흘러내리는데 승한은 오로지 제힘만으로 유운을 쥐고 흔들었다.

‘저쪽은 내공이라도 있지……!’

봉인된 단전이 아쉽다고 여긴 적은 종종 있었으나 오늘처럼 그 사실이 서러웠던 날도 드물었다.

“으…… 흐읏…….”

이제 유운의 입술 사이로 새는 소리는 신음이라기보단 흐느낌에 한없이 가까웠다.

“정말 이렇게까지 야하면 어찌합니까?”

승한이 샐그러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더는 안에 들어오지 않겠다더니, 엉덩잇살을 잡아 벌리는 손길이 거칠었다.

“왜, 왜?”

저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은 유운의 질문에 승한이 답했다.

“착각인 줄 알았는데 여기가…….”

혀를 찬 사내가 성기를 거칠게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회음에 귀두 끝이 비벼지는 걸 느끼며 유운은 신음했다. 승한은 다시 제 좆을 뒤로 빼냈다가 다시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반복되는 추삽질에 사고의 끈이 덩달아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승한이 들뜬 음성으로 속삭였다.

“안으로 집어넣을 때면 어서 들어오라며 벌름거리고, 몸을 뒤로 빼면 놓기 싫다는 양 앙다무는군요.”

그 음성에서 전해지는 흉포한 희열에 유운은 몸을 떨었다.

“나, 난…… 그런 건 몰라.”

승한의 말을 듣고 난 뒤라 그런지 제 뒤가 뻐끔거리고 있음을 새삼 의식하게 되었다.

“대사형이 이토록 배움이 빠르니 이 사제도 정진해야겠습니다.”

승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하는 말에 유운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마냥 약 탓이라 하기엔 이미 해독된 뒤였다.

미약에 중독된 채 애면글면하던 때를 그리워하게 될 줄 몰랐다고 생각하며 유운은 야금을 꽉 틀어쥐었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더라? 유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제를 믿어선 안 된다는 교훈만 호되게 얻었을 뿐이다.

“정말…… 유운의 몸이 너무 달아요.”

승한이 그의 귓가에 헐떡이는 소리에 유운은 코끝을 찡그렸다. 누가 할 소리를. 이렇게나 살을 비볐는데 거북함을 느낄 수가 없다. 사제가 자신에게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하지 않나.

“나는 그런 건 몰라.”

유운은 툭 내뱉었다. 승한은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괜찮습니다. 저만 알면 되니까요.”

승한의 살기둥이 비벼질 때마다 회음부의 예민한 살이 아우성을 지른다. 고통까지는 아니어도 미미한 따끔함이 느껴졌다. 자고 일어나도 하루는 꼬박 누워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싫고 힘들었다면 승한의 뺨을 발로 밀어서라도 그만두게 했을 테지만 도무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말마따나 제 동정을 승한에게 내준 탓에 마음이 더 약해진 걸지도 모른다. 그 순간 느낀 쾌감과 아쉬움이 유운의 머릿속을 잔뜩 헤집고 주물러 놓았다.

‘여기에서 더 누그러지면 어쩌려고.’

가슴을 비비는 손길에 유운은 몸을 살짝 뒤챘다. 승한은 그의 귓바퀴를 핥고 귓불을 깨물더니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절실히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마침내 찾아낸 사람 같았다.

다리 사이를 오가며 불길을 지피던 성기가 마침내 파정했다. 유운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고작 색사 때문에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릴 줄 예전의 자신이 알았을까?

“닦아 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퍼뜩 일어난 승한이 영견을 물에 적셔서 가져왔다. 닦아주는 척 가슴을 주무르거나 엉덩이를 희롱할 줄 알았는데 항상 뒤처리할 때는 성실하게 굴었다.

그러다가 문득, 승한이 남긴 잇자국 위로 그의 손길이 지나갔을 때였다.

“흐응…….”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음이 제가 듣기에도 야릇했다. 승한은 유운의 양 입꼬리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소리가 날 정도로 간질간질한 입맞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자꾸 눈을 찌르는 통에 입김을 후 불어 정리하려는데 땀 때문에 살갗에 달라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승한의 손이 그 위를 지나갔다.

“좋으셨습니까?”

그 말에 유운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운을 살살 발라먹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비단 성욕 때문만은 아니다. 평소에는 한껏 뒤흔들어도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유운은 잠자리에서만은 솔직해졌기 때문이다.

숨길 여유가 없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신체적 표현은 언제나 승한을 즐겁게 했다. 눈가의 떨림, 커졌다가 이내 좁아지는 동공, 긴장으로 굳는 어깨며 마주 끌어안으면서도 떨리는 손끝 따위를 관찰하다 보면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렀다.

‘지금’이 끝나는 것이 아쉽다.

감정의 진폭이 미미한 까닭에 어제가 오늘과 같고 내일도 이 하루와 다름이 없던 승한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기대할 것이 없으니 무미건조해진 삶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것 외에는 변화를 꾀할 수 없기에 그는 현재에 매달리는 법이 없었다.

“대사형은 정말―”

물 묻은 천으로 얼굴에 묻은 애액을 꼼꼼히 닦아낸 승한이 유운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가벼운 입맞춤이 접문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유운은 저도 모르게 승한의 어깨를 감싸려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툭, 밀어냈다.

“여기에서 더 하면 정말 의원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화월루에 드나드는 의원이 실력이 좋다는 건 잘 안다. 그러나 자신이 음약에 중독되었다가 해독된 걸 아는 야소에게 정사 후 후유증으로 몸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제 더는 지킬 체면도 없다만 남에게 보이는 모습만큼은 목숨처럼 지키고 싶었다. 그건 유운의 습관 같은 거였다.

“알겠습니다.”

승한이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만족한 짐승을 떨쳐낸 유운은 한숨을 삼켰다.

양심이 있다면 이걸로 며칠 정도는 저를 가만두겠지 싶었다.

물론 그의 사제는 양심 같은 게 없었다.

***

낮과 밤의 구분할 정도로 승한에게 시달린 유운은 마침내 폭발했다.

승한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손은 꽁꽁 묶인 채 침상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유운이 매서운 눈을 하고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이걸 풀고 나올 수 있다는 건 아는데, 만약 풀고 나오면 위가 아니라 아래를 묶어버릴 거다.”

엄포도 이런 엄포가 없었다.

제 딴에는 엄한 말을 입에 담았기 때문인지 유운은 목부터 귀까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아니……. 유운.”

승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부족하셨으면 말씀하셨어야지요. 제가 정력제를 먹어서라도 더 오래 버텨 보겠습니다……!”

가당찮은 죄책감에 휩싸이려는 찰나, 그의 사제가 이를 훌륭하게 막아주었다.

유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쾅쾅 소리를 내며 복도로 나온 그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의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외려 공포가 자리했다.

며칠 전, 승한의 수하 석이 서신과 함께 자신을 찾아왔다. 그 서신을 펼쳐본 유운은 오늘까지 승한을 따돌릴 기회만 찾고 있었다. 그동안 순순히 그가 하자는 대로 해 주었으니 몇 시진 정도는 승한이 따라다니지 않을 터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유운은 천천히 길을 옮겼다. 복도 끝에서 마주친 기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중까지 나왔을 줄이야.’

유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안내된 방에는 죽립을 쓴 이가 앉아 있었다.

저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백 리 천 리 밖에서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부님.”

유운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진랑은 말없이 죽립을 벗어 내려놓았다. 유운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진랑이 앉을 자리를 챙기고 그를 위해 찻잔을 채워 내려놓았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니 이곳이 사천 한복판의 화월루가 아니라 흑천인 것만 같았다.

마치 공기에 독이 섞이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왔다. 진랑은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어 올리더니 본인의 입술을 축였다.

“향이 좋구나.”

분명 권유일 텐데, 외려 유운은 얼어붙고 말았다.

“예. 이맘때의 차가 참 괜찮지요.”

한없이 수그러드는 그는 시드는 모란 같았다. 진랑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유운은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이 지펴지는 걸 느꼈다.

더 늦기 전에, 처음 이 자리에 나서기로 결심했을 때 생각한 말을 해야 한다.

“사제, 아니 승한이라면 제가 최대한 빠르게 돌려보내겠습니다.”

유운은 한사코 시선을 피한 채 빠르게 중얼거렸다.

승한이 하찮아서가 아니다. 자신 때문에 그가 포기한 것들을 돌려줄 수 있다면 지금이 그 기회라 여겼다.

“나는 네게 그런 걸 요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진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음에도 마치 우레처럼 들렸다.

사부님의 심기를 살피고 싶었으나 유운은 감히 눈을 마주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흑천이야 내가 반백 년은 더 책임질 수 있을 테니 네가 부담 가질 것 없다.”

차고 냉랭한 어투였으나 유운은 그게 자신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꺼낸 말임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토록 명징한 예진랑의 성품을, 왜 과거에는 몰랐던 걸까.

지금은 그것이 모용길상의 이간질 때문이었음을 안다. 그럼에도 사부님의 진의조차 모르는 제자가 되어 죄를 범하고 말았다.

“내가 만나고자 한 것은.”

진랑은 그답지 않게 망설이는 눈치였다.

“……네가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다.”

유운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표정에는 아연함이 가득했다.

진랑은 그렇게 무른 사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잔혹하고 단호한 축에 들었다. 승한은 일원당에 여전히 청자색 모란이 피어 있었기에 옮겨다 심을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으나……. 사부님이 자신을 증오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아끼고 있으리라는 건 그야말로 꿈 같은 소리 아니던가.

“저는 잘, 잘 지냅니다.”

떨떠름함과 의아함, 죄악감이 뒤범벅된 문장은 제대로 정돈되지 않아 거칠었다. 진랑은 그래, 하고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그거면 되었다.”

이내 시비가 들어오더니 상에 음식이 속속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동파육이며 오향장육, 불도장과 연와탕과 같은 온갖 요리가 가득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더구나. 남기지 말고 먹거라.”

“예…….”

전부 먹을 수 있을 리도 없고 사부님을 앞에 둔 채 한 수저라도 떴다간 체할 게 분명했으나 유운은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이런 기회가 다음에 또 언제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부룩한 속을 끌어안은 채 터덜터덜 돌아온 유운은 침상에 걸터앉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승한은 손의 끈을 풀어낸 채였다.

얌전히 기다린 게 어딘가 싶어서 유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사실 그에게 무어라 할 기력도 없었다. 승한은 그런 유운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못생긴 얼굴.”

사제가 제 코끝을 툭 건드리며 건넨 말에 유운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무슨!”

단전이 봉해지기 전과 달리 기척에 둔감해진 그는 불시의 접근에 깜짝깜짝 놀라게 되었다.

눈을 흘기자 승한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방긋방긋 웃었다. 의도적으로 유운의 생각을 끊어내 놓고는 능청을 떠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생각할 게 있으니 떨어져라.”

다른 날은 몰라도 승한이 오늘 하루는 얌전했으면 했다. 승한은 완전히 다른 데에 신경이 쏠린 유운을 보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사부님은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사제의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한 발짝 늦게 승한의 말뜻을 깨달은 유운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알고 있었어?”

“저를 먼저 보러 오셨으니까요.”

승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를 왜……? 역시 흑천으로 돌아오라 하시더냐?”

“아뇨. 그럴 리가요.”

승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주 눈물 쏙 빠지게 혼났습니다.”

투덜거리는 승한의 표정이며 그가 한 말 모두가 유운의 이해를 벗어나 있었다.

사부님이 사제를 혼낼 이유라고는 냅다 흑천을 나서 자신의 뒤를 따라온 일밖에 없지 않나?

“대사형 얼굴이 반쪽이 됐다면서 작작 괴롭히라고 하시더군요.”

유운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흑천에 앉아서 요녕 사정을 손바닥 들여보듯 하던 사부님이다. 천하의 예진랑이 사제와 자신의 관계를 모를 리가 없긴 했다. 그러나 이를 승한에게서 직접 확인받으니 새삼 충격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뭐라고 했느냐?”

손가락 마디까지 희게 변할 정도로 승한의 팔을 꽉 쥐는데 그가 답했다.

“이 한 몸 바쳐 성심성의껏 대사형을 만족시켜 드렸다고…….”

유운은 목침과 승한을 번갈아 봤다. 이걸로 사제의 머리를 후려쳐서 기억을 잃게 하고 싶었다.

그럴 확률이 채 일 푼도 안 된다지만 만약 극적으로 성공한다면 승한을 흑천으로 보내버린 뒤 자신은 산골로 들어가 버릴 테다.

유운의 시커먼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승한이 재잘거렸다.

“그래도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라 생각하셔서 다행입니다. 제 강요로 대사형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가만히 있지 않으셨을 겁니다.”

“만약 일방적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일말의 불길함에 유운이 질문을 던졌다.

“사부님이 제 좆을 잘라 버릴지도 모르지요.”

“미쳤나? 무슨 그런 소릴!”

유운이 아는 예진랑은 잔인하긴 해도 고상한 사람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 사형 몸은 누가 달래 주나……. 제가 잘 주워다가 봉합해서 드릴까요?”

승한은 천연덕스럽게 뻔뻔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제대로 세운 것보단 좀 물렁물렁하긴 할 테지만 크기가 있으니 없는 것보단 나을 텐데.”

“됐다! 줘도 안 가진다!”

“제 눈은 탐내시더니 왜 이건 싫다고 하십니까? 매일 사형을 즐겁게 해 드릴 때마다 쪽쪽 빨아 드시면서……. 섭섭합니다.”

망할 사제 때문에 눈앞이 아찔했다.

“너는…….”

문득 승한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깨달은 유운이 마른세수를 했다.

“네가 못난 사형을 두어 큰일이구나.”

“못나다니요? 누가 그럽니까?”

만약 제 앞에 그런 말을 한 이가 지나간다면 혀를 반으로 쪼개버리겠다며 승한이 눈을 부라렸다. 그 과장된 몸짓에 웃어주고 싶었으나 기운이 없었다.

냅다 승한의 무릎을 베고 누운 유운은 그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주무르는 걸 느꼈다.

체한 게 많이 티가 났나 보다.

“그거 아느냐?”

얼마간 침묵을 지키던 유운은 불쑥 말을 꺼냈다.

“사부님이 내 앞으로 접시를 밀어주며 많이 먹으라 하시더구나. 이번에 좋은 쌀이 들어왔다고……. 또 오리고기가 맛있다고 뼈를 발라 주셨어.”

“그래서 체할 때까지 드신 겁니까?”

차가워진 유운의 손을 주물러 주던 승한이 투덜거렸다.

“응. 맛있었다.”

“일원당에서 나무 훔쳐 심을 생각은 했는데 화월루에서 숙수 훔쳐 갈 생각을 못 했네요.”

교월에게 혼쭐이 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승한의 모습에 아찔해야 하는데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유운은 느릿느릿 그를 타박하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자신의 손을 잡은 승한의 손을 끌어다가 가만가만 얼굴을 기댔다.

그의 체온이 뜨거웠다.

“내가 아주 밉지는 않으신가 보다. 그렇지?”

다른 손으로 유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 승한이 답했다.

“대사형을 미워하신 적 없으십니다.”

“다음에 또 와주실까?”

유운의 질문에 승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꼭 오시길 기다리고 그럽니까. 찾아가면 되지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만약 아니 오신다면 제가 흑천주의 인장을 훔쳐 오겠습니다.”

길길이 날뛰면서 오실 거라며 승한이 유운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가 살짝 꿍 하고 박았다.

“대신 그때는 또 체할 때까지 드시면 안 됩니다.”

그 훈계 아닌 훈계에 유운은 피식 웃었다.

“오냐.”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손길이 평화로워 유운은 눈을 감았다.

전부 다 끝났다고 생각한 삶에도 다시 시작이 있다는 게 어색하다. 이런 행복을 느껴도 괜찮을까, 싶으면서도 그간 어울리며 승한의 뻔뻔함을 조금쯤 배웠는지 마음이 삽시간에 편해졌다. 유운은 어느새 속이 불편하다는 것도 잊고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잠에 빠졌다.

그렇게 평화로운 화월루의 오후가 지나갔다.

〈모란은 피지 않는다〉 完

모란은 피지 않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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