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싫어요. 오늘은 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래, 그럼 나오지 말 거라.’
노인은 겁에 질린 아이를 막사에 두고 홀로 나갔다. 그날 전투는 인간 진영의 대패로 끝났다. 많은 이가 죽었고, 더 많은 이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노인이 아이를 끌고 나왔다.
‘일어나. 이 새끼야! 일어나란 말이야. 살아서 나가기로 약속했잖아.’
‘안 돼, 잠들지 마. 곧 신관이 올 거야. 제발 눈을 떠!’
노인은 아이에게 동료의 주검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는 이들을 보게 했다. 큰 부상을 당해 곧 죽을 자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게 했고, 하나같이 사지가 온전히 붙어있지 않은 시신들을 아이의 작은 손으로 직접 파묻게 했다.
‘너 때문에 죽었으니 네가 직접 무덤을 만들어줘야지.’
‘저 때문에요?’
‘네가 참전했다면 죽지 않았을 테니까.’
노인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기억해라. 네가 이들을 죽인 것이다.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책임을 미루면 이렇게 되는 법이지.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해라. 네가 죽였다.’
며칠 후, 병사들의 사기가 극도로 떨어진 어느 날 밤. 마물이 기습을 해왔다.
‘무서우냐? 나가지 않겠느냐.’
노인이 가만히 물었다. 아이는 너무 두렵고 끔찍했다. 이곳에서 도망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맑은 갈색 눈에 눈물이 고이고 곧 흘러넘쳤다. 그러나 아이는 막사를 나가 주문을 외웠다.
교전은 인간의 승리였다. 정확히는 아이 홀로 이끌어낸 승리였다.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고, 부상자들의 부상도 경미한 수준이었다.
궁사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정말 강하구나. 저번에도 이렇게 나섰다면 많은 이가 살았을 텐데. 너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소년병들도 있었지. 정말 아쉽구나. 그날 네가 오늘처럼 했다면….’
그날 이후 아이가 막사를 나오지 않는 날은 없었다. 그럼에도 노인은 단 한 번도 달콤한 칭찬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아이에게 되뇔 뿐이었다. 네가 나갔더라면. 네가 더 강했다면. 네가 좀 더….
***
잠에서 깬 헤베는 잠시 멍했다.
여긴 어디지. 나는 죽었는데. 머리 아파.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한참 누른 후에야 과거로 회귀했었다는 걸 자각했다. 두통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됐다. 심장에서부터 시작되는 흑혈화 현상이었다.
‘추워….’
심지어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까지 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악몽을 꿨나 보다.’
흔히 있는 일이다. 기억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헤베는 바로 명상을 시작했다. 어제 몇 번이나 마법을 사용해서인지 몸 안에서 흑마법이 날뛰었다. 과거에는 고통이 심해서 얼른 죽으려는 생각도 했으니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흑마법을 진정시켰을 때 진이 아침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헤베는 명상 자세를 유지한 채 말했다.
“나 앞으로 일 안 할 거야. 황제한테 말해서 일정 모두 백지화시켜.”
“…예.”
“생각해 보니 전쟁도 끝났는데 굳이 외부 일정을 할 필요 없더라고. 어차피 다들 흑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내면 두려워하잖아. 이제 맘대로 살 거야. 싫으면 쫓아내라고 해.”
“예.”
당황스러울 내용에도 묵묵히 대답하자 헤베는 슬며시 진을 쳐다봤다.
“어차피 하고 계신 업무가 딱히 없었습니다.”
“…….”
“빵이 싫으시면 고기를 준비하겠습니다.”
헤베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진과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서 빵 접시만 놓고 물러가라고 했다.
진이 돌아간 뒤 헤베는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문도 활짝 열었다. 창틀에 앉은 작은 새들은 흑마법사가 지척에 있어도 무서워하지 않고 서로 떠들기 바빴다. 손가락을 내미니 조그만 부리로 콕콕 찌르기까지 했다. 먕먕이가 이 광경을 봤다면 온몸의 털을 세우며 질투했을 것이다.
“오늘만 주는 거야. 많이 먹어.”
헤베는 빵을 뜯어서 천 위에 담아 창틀에 올렸다. 멀리서 구경하던 새들까지 날아와 짹짹대며 빵 쪼가리를 쪼아댔다. 귀여운 것들을 보니 마음이 나아졌다.
좋아. 오늘부터 정 떨어뜨리기 계획 시작이야.
단단히 마음먹은 헤베는 외출 준비를 마친 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궁사님?”
감시하던 기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일찍 나오셨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술 마시러 갈 거야.”
“네?”
“지금부터 술 마시러 간다고.”
“…아… 예. 저희도 갈까요?”
“마약도 할 거야.”
“예?”
“도박도 하고, 시비 거는 인간이 있다면 흑염소로 만들어버려야지. 흑마법사다운 짓거리를 잔뜩 하겠어. 아주 무섭지?”
“…….”
헤베는 겁먹었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끔벅이는 감시병들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황제한테 일러. 쫓아내라고 해. 흑마법사가 돌아버렸다고 소문을 내도 좋아. 알아들었어?”
“예….”
대답이 시원찮지만 이놈들에게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헤베는 굉장히 방탕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는 멍한 감시병들을 뒤로하고 후다닥 복도를 달렸다. 이른 아침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몇 명이 조금 두려운 기색을 담아 인사했지만 오늘부터 정떨어지기 대작전에 들어간 만큼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시했다.
“궁사님,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가세요?”
막 햇빛 아래에 나왔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파와이와 밀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직속 부하였던 둘은 몇 년 전 연인이 되었는데, 헤베가 본격적으로 망나니짓을 시작했을 때 가장 빨리 뒤돌아선 인간들이기도 했다.
헤베는 잘 만났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갔다.
“너네, 사귄 지 얼마나 됐지?”
“올해로 오 년째예요.”
오 년이라는 소리에 헤베가 눈을 깜빡였다. 벌써 그렇게 됐나.
전쟁터에서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거는 모습을 자주 봤다. 정말 아름다웠고, 한 번도 연인 같은 걸 만든 적 없던 헤베로서는 신기하기도 했다.
“이제 슬슬 결혼해야지. 전쟁도 끝났잖아.”
“우리 궁사님도 아직인데 어떻게 저희가 먼저 하겠습니까.”
밀리안의 뺨이 달아올랐고, 파와이는 능글맞게 웃으며 답했다. 과거에 헤베가 물었을 때도 같은 대답을 했다. 헤베는 그때 ‘그 생각이면 너희는 평생 못할 거다.’라고 응수했는데 오늘 할 대답은 다르다.
“그럼 좋은 사람 좀 소개해줘 봐.”
“…예?”
“생각해 보면 이상해. 왜 아무도 나한테 소개팅해준다는 사람이 없지. 나는 무려 이십칠, 육 년이나 솔로로 살았어. 너네는 관심 없다는 진한테도 몇 번이나 자리를 만들어줬잖아. 왜 나한텐 안 해줬어.”
“그야….”
파와이가 멋쩍게 웃었다.
밀리안이 난감해하는 연인 대신 물었다.
“궁사님, 연인을 만들 생각 없지 않았어요?”
“그때는 전쟁 중이었잖아. 이제는 여자친구든 남자친구든 만들고 싶어.”
“소개받기보다는… 주위를 둘러보심이 어때요?”
“맞아요. 좋은 사람이 지척에 있을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유난히 강조하는 ‘주위’, ‘지척’이라는 단어에 수상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헤베의 생각은 다른 데로 튀었다.
“왜 소개해주는 걸 꺼려? 내가 악랄하고 잔인한 흑마법사라서 그래?”
헤베가 사나운 말투로 묻자 둘은 손사래를 치며 질색했다.
“그런, 그럴 리가요. 궁사님이 흑마법사인 건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럼 사람 좀 소개해줘. 아무 스타일이나 괜찮아.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는데 나이는 많이 안 어렸으면 좋겠어.”
“그….”
둘은 좀처럼 대답을 못 하고 어물쩍거리기만 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착한 녀석들이야. 내게 거짓말도 못 하겠고, 흑마법사에게 누구를 소개해주겠다는 말도 못 하고….’
헤베는 아련하고 애틋해졌다.
그러나 사실은 헤베의 생각과 달랐다. 둘은 속으로 오열하고 있었다.
‘괜히 말 걸었어. 분명 어딘가에서 테이든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을 텐데 이런 대화를 하게 되다니!’
‘사방이 뻥 뚫린 야외이고 여러 사람이 지나다니니 여기서 칼부림이 일어나진 않겠지…. 않겠지?’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렸다.
“죄송해요… 소개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궁사님, 정말로 주위를 둘러보면 좋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아주 가까운 곳에요.”
“그럴 줄 알았어. 둘이서 재미있게 놀아. 난 갈 거야.”
“어디 가세요?”
“술 마시러.”
헤베만 모르게 파와이와 밀리안이 눈을 마주쳤다.
“술 안 좋아하시잖아요. 약도 드시는 중이면서.”
“약 이젠 안 먹어.”
“오늘 일정은 어쩌시고요.”
“오늘 나한테 일정이 있었어?”
“예, 다 같이 폐하를 알현하기로….”
“앞으로 나한텐 일정 따윈 없어.”
“아… 그러시군요. 일정 따위 없군요….”
둘의 시큰둥한 반응에 헤베가 미간을 찌푸렸다.
“앞으로 난 망나니처럼 살 거야.”
“네… 망나니요.”
“그럼 술 마시러 갈게.”
헤베가 자꾸 ‘술’을 강조하는 건 그가 생각했을 때 가장 불량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술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아주 악독한 독약이었으며 망나니의 상징이었다.
“네, 좋은… 음주 되세요.”
파와이가 손을 흔들었고, 헤베는 심보가 뒤틀린 얼굴로 돌아섰다. 멀리서 지켜보던 보라색 눈의 청년도 헤베를 따라갔다.
두 연인은 시선을 마주쳤다. 둘 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라는 표정이었다.
궁사가 이상하게 군다더니 정말 심각하게 이상했다. 어제도 기공식을 마음대로 진행하더니 이제는 좋은 사람을 소개해달라질 않나. 술을 마신다고 하질 않나.
헤베 뮨은 술 따위 모르고 살았다. 끊임없는 살육에 지친 이들이 술과 약에 빠져 살 때도 그런 데는 일절 손대지 않았던 순진한 분이다. 친위대는 헤베가 술을 어떻게 여기는지 잘 알았다.
‘일정을 취소하고 쉬신다면 환영이야. 하지만 저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무구한 분이 갑자기 음주에 연애라니?’
그 순진무구한 사람이 몇 달 전만 해도 웃으면서 마물의 뼈를 부러뜨리고 내장을 터뜨렸다는 사실은 기억에서 잊은 둘이었다.
어쩌면 흑마법의 부작용일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일이다. 테이든은 이미 어딘가에서 대화를 들었을 게 분명하니, 둘은 어서 이 소식을 다른 친위대에게도 알리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수하들이 빠르게 정보 교환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헤베는 음주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만 황성 출입문에 다다를 때쯤 다리가 아파 와 잠시 멈춰야만 했다. 길바닥에서 갑자기 주저앉으니 출입문에 선 경비병들이 경계 어린 시선으로 주시했다. 헤베는 꾸물꾸물 나무 뒤로 숨었다.
‘체력이 많이 떨어졌어.’
다리가 저려와 열심히 주무르자 팔도 아파 왔다.
생명력이 8개월 치밖에 남지 않아서일까. 회귀 전 이때보다 더 체력이 없는 것 같았다.
‘순간이동 마법으로 바로 주점에 갈까.’
순간이동 마법은 정확한 위치를 안다면 굳이 직접 방문한 적이 없어도 활성화할 수 있다.
헤베는 회귀 전에도 평민들의 주점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황성의 술 창고를 거덜 내며 망나니짓을 했었다.
‘주점은 무서운데.’
사람이 많은 곳에 가야 하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마물들 한가운데로 뛰어들라면 바로 뛰어들겠지만, 사람 많은 곳은 힘들다.
고민하는 헤베의 시야에 멀리 솟은 탑 하나가 들어왔다.
마법사의 탑 제1 탑으로, 한창 보수 공사 중이라 아무도 머무르지 않았다. 저 탑의 꼭대기에 그의 연구실이 있었다.
‘아, 맞아. 연구일지.’
헤베는 회귀 전, 연구실에 버려뒀던 연구일지를 떠올렸다.
‘내가 죽은 뒤 테이든은 실드를 찢어버렸어. 실드의 존재는 연구일지로 알아냈을 가능성이 높아.’
비센티아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연구일지를 소멸시킬 필요가 있다.
헤베는 성안의 마구간에서 말 한 마리를 데리고 나온 뒤 탑으로 향했다. 십여 분 달린 후에야 도착했다.
지친 헤베는 탑 입구에 말을 묶어 놓고 잠시 바닥에 널브러져서 쉬었다.
계단을 오를 만큼 체력이 남지 않았다. 몸이 피곤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헤베는 잘못된 선택임을 알면서도 수명을 조금 쓰기로 했다. 그는 훌쩍 날아올라 꼭대기로 향했다.
연구실은 먼지가 쌓였고 거미줄이 가득했다. 청소할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이제 다시 이곳에 올 일 없으니 청소할 필요도 없었다.
주문을 외우자 보안 마법을 걸어 놓았던 책장 아래에서 종이 꾸러미가 떨어졌다. 그 종이에만은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연구일지.
아마… 회귀 전이라면 며칠 전에도 들여다봤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종이 꾸러미였지만 소유자의 눈에는 까맣게 적힌 글자들이 보였다.
‘테이든은 마법에 재능이 없어. 흑마법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내 봉인 마법을 풀진 못했을 거야. 루니스가 풀었을까.’
일단은 이 자리에서 소멸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마력을 일으키는데, 마침 열린 창에서 바람이 불어 페이지가 팔랑 넘어갔다.
깨알 같은 작은 글자들, 수식과 도형. 마물 분류표, 그림, 해부도.
또박또박 잘 쓴 것도 있고 바빴는지 날려 쓴 것도 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필체가 날아갔다.
아직 마지막 장에는 무엇도 쓰여있지 않았다. 헤베는 씁쓸한 눈으로 빈 페이지를 훑었다.
회귀 전, 모든 것을 체념한 자신이 써놓은 기록이 환영처럼 보였다.
[마기 흡수-흑혈화 가속화.
마기 방출-신체 부식.
마기 중화-용액 개발 불가]
흑마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그라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시도였다. 과거 기록에는 천 명 중 한 명만이 흑마법을 받아들이는 데에 성공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고 나와 있다. 성공적으로 받아들이더라도 남은 수명은 길어야 삼 년이라는 걸 알고 선택했다.
그 선택 후 헤베는 부질없는 시도를 했다.
전쟁이 끝난 세계가 생각보다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살고 싶은 나머지 여러 가지 실험과 연구를 했다.
결국엔 살 방법은 없었고… 모든 걸 포기한 헤베는 죽음을 재촉하는 짓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헤베는 한 번도 일기를 써본 적 없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것이 일기 같았다. ‘힘들다’, ‘괴롭다’ 등의 감정 묘사는 일절 없는 객관적인 수치의 나열이었으나 자신에게만은 그 안에 담겨있는 감정이 느껴졌다.
소멸시키려는 마음이 없어진 헤베는 연구일지를 품에 넣고 다시 탑 아래로 내려갔다.
***
너무 많이 움직였더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과거의 기억에 심기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헤베가 걸음을 멈췄다. 탑 앞에 묶어둔 말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탄탄한 체격에 화려한 금발, 근사한 예복을 입은 남자였다.
“이 탑도 오랜만이네요.”
테이든은 말 고삐를 잡은 채 헤베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정말 눈부신 미소였다.
헤베는 어제 그런 식으로 헤어졌는데도 그가 여전히 웃을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절대 마주칠 일 없다고 여긴 이곳에서 마주쳤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하지만 일부러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여긴 웬일이야. 당분간 얼굴 보기 싫다고 했잖아.”
“하룻밤이면 충분히 당분간이죠.”
애가 이렇게 뻔뻔했었나? 헤베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여기까지 마물이 쳐들어왔었죠. 세 달 전까지만 해도 풀조차 자라지 않았는데 이제는 꽃이 피네요. 자연의 정화 능력은 놀라워요.”
그 말에는 헤베도 동감이었다. 이르게 핀 들꽃을 감상하던 테이든이 헤베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좋은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했다면서요. 에덴타인들에게 들었어요.”
파와이와 밀리안은 에덴타라는 마을 출신이었다. 테이든이 또 사람을 이름 대신 출신지로 부른 것이다.
“에덴타인들이 뭐야. 이름을 좀 불러.”
“그 두 사람 이름이 뭐였죠?”
“파와이랑 밀리안.”
헤베도 그 둘의 입이 아주 가볍다는 사실을 알고 말한 거였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퍼질 줄은 몰랐다.
테이든은 두 사람의 이름 따위 상관없다는 듯 아, 그래요. 하더니 다소 급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사람을 소개받을 생각이세요?”
“응, 내가 연인 만들면 안 돼?”
“안 될 건 없죠…. 헤베에게 연인을 만들 마음이 생겨서 기쁩니다. 그동안은 연애 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갑자기 왜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하네요.”
오늘 테이든은 크리스탈 장식에 자작나무 가지로 만든 머리장식을 하고 있었다. 하얀 예복 또한 몹시 잘 어울렸고… 새하얗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헤베의 취향에 들어맞았다. 헤베는 그 어떤 화려한 공작새를 데려다 놔도 테이든 앞에서는 기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연인을 만들고 황성을 나갈 거야.”
“어디로 가려고요?”
“어디든 가장 먼 곳.”
“미리 집을 지어놓는 게 좋겠어요. 마법 연구실은 특히 오래 걸리니까요.”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헤베는 차갑게 대꾸했다.
“중요한 건 너는 황궁에서 살 거고 나는 멀리 떠날 거라는 점이야. 네가 지긋지긋하다고 말했지? 지금도 내 기척을 따라왔다는 게 소름 돋아. 너와 최대한 먼 곳으로 갈 거야.”
헤베가 말을 끝내자 테이든은 눈썹을 우울하게 기울였는데 그 모습조차 잘생겨 보였다.
테이든은 말 고삐를 붙잡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비센티아를 구한 영웅은 그저 조용히 걷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넘쳐흘렀다. 헤베는 기죽지 않고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근심에 젖은 미청년이 입을 열었다.
“연하는 싫다고 했다면서요.”
“그래! 난 연상이 좋아.”
“누가 당신에게 말했어요?”
“뭘?”
“제가 헤베를 사랑한다는 걸.”
“…….”
“당신을 사랑해서 수작질 중이라는 것까지. 헤베, 누가 당신에게 얘기한 거죠?”
헤베는 말문이 막혀 입술만 뻐끔댔다.
여기서 이렇게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밝혀버린다고?
그건 죽을 때까지 가져갈 비밀 아니었어?
넋 빠진 헤베를 앞에 두고 테이든은 가련한 표정으로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어제는 그래서 절 멀리했던 거지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니까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랬던 거였어요. 이해해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생각도 못 했겠죠.”
“아니야, 난.”
“당신의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밝힐 생각 없었어요…. 누가 말했을까요. 헤베가 나를 떠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도록.”
얼핏 보기에는 상처받은 사슴처럼 보였지만 자색 눈동자에 스며든 서늘함만은 숨겨지지 않았다. 누가 알렸는지 알면 주저하지 않고 숨통을 끊을 것처럼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테이든이 고삐를 잡은 말조차 살기를 느끼고 꼬리를 말았는데, 오직 헤베만이 테이든을 가련하다 여겼다.
테이든이 헤베에게 손을 뻗었다. 거부해야지, 라는 생각과는 반대로 헤베의 몸은 마법에라도 걸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테이든의 손은 아무런 걸림돌 없이 헤베의 뺨 위에 안착했다. 얼굴을 감싸는 손길은 따스했고, 까슬했다.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흔적이자 전쟁의 흔적.
헤베는 테이든에게 배겨있는 전쟁의 흔적을 발견할 때면 마음이 약해졌다.
테이든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헤베.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잊어버려요. 당신의 마음이 준비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도 되니까요.”
“이, 이미 들은 걸 어떻게 잊어? 역겨우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매몰차게 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는 바람에 효과가 없었다. 헤베는 거짓말에 매우 서툴렀다.
“나는 너한테 일말의 감정도 없어…. 옛날부터 너는 성가신 어린애였고 신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챙겼을 뿐이야. 네가 날 사랑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저도 당신에게 걸맞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저 같은 게 감히 헤베에게 마음을 품는다는 건 주제도 모르는 일이라는 걸 잘 알아요.”
테이든이 눈을 내리깔았다. 반대로 헤베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진심으로 들려서 심장이 철렁했다.
왜 녀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단 말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더러운 흑마법사 때문에….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테이든이 애달프게 애원했다.
“헤베에게 제 마음을 강요할 생각 없었어요. 그냥 조용히 혼자만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어떻게 해야 옆에 있을 수 있나요. 제발 알려주세요. 전 헤베가 없으면 숨도 쉬지 못하고 메말라 죽을 거예요.”
테이든이 고개를 숙였다. 결 좋은 금발을 보며 헤베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커다란 체격에 온몸이 탄탄한 근육으로 이뤄졌고 세상에서 검을 가장 잘 다루는 초월자라지만 결국 스무 살짜리 어린애일 뿐이었다. 첫사랑 상대가 하필 헤베 뮨인 것만 빼고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이 순수한 사람을 향해 또다시 가시 박힌 말을 내뱉어야만 했다. 헤베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녀석이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납득하고 물러날 말이 없을까? 테이든을 자극하지 않도록… 그런 고민을 하는데 문득 어젯밤 대리자가 준 마법이 생각났다. 그 주문은 입에 담기도 싫을 정도로 오글거렸지만….
‘먼저 테이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해.’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 헤베는 고개 숙인 테이든을 바라보며 생각을 읽는 주문을 외웠다.
-내가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헤베가 스스로 알았을 리는 없어.
흐느낌 사이로 생각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멀리에서 작은 마법을 사용해도 마력이 운용되자마자 모두 느끼는 테이든임에도 신이 준 마력의 움직임은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리도 눈치 없는 사람이.
뭐라고?
“절대로 티 내지 않을 테니까 제발,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말한 자를 찾아내야겠군.
말과 생각의 온도 차가 컸다.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욕심내지 않을게요.”
-이렇게 말하면 바로 끌어 안아줘야 하는데. 대체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길래. 헤베의 열흘간 동선을 모두 파악했지만 의심스러운 자는 없었어.
한번 능력이 발휘되니 흘러들어오는 테이든의 생각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지속 시간이 얼마쯤 되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를 포기할 수 없어. 포기하기에는 그를 너무 사랑한다.
-사랑해.
-너무 사랑해. 그가 나를 거절해도. 거절하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헤베.
-헤베….
쏟아지는 고백 폭격을 가만히 맞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부작용은 예상하지 않았다. 헤베는 부디 자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지 않았기를 바랐지만, 목덜미부터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황급히 뒤돌아섰다.
헤게르미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와는 말의 무게가 달랐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헤베…….”
테이든의 목소리는 너무나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조금 후에 생각이 끊겼다. 생각이 전해져오는 건 2, 3분 정도인 듯했다.
테이든은 얼마든지 힘으로 돌려세울 수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헤베의 뒤에 서서 반응을 기다렸다. 절대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헤베는 돌아선 채 입술을 깨물었다.
테이든이 이렇게 날 좋아한다는 걸 과거에도 알았다면.
나를 사랑한다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
‘알았다면, 뭐?’
헤베는 머릿속을 스친 가정에 소름이 돋았다.
난 어차피 죽는데.
그런 가정을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정신 차려야 해. 테이든과 이 세상을 위해서.
헤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학대받은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헤베.”
그 피 냄새를 맡지 못했을 리 없는 테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만 깨물어요. 피가 나잖아요. 연고를 바르러 가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헤베….”
“닥쳐. 역겨우니까.”
등 뒤에서 테이든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처받은 걸까. 헤베도 이렇게 ‘닥쳐’ 같은 심한 말을 하는 건 드물었다. 전쟁터에서도 웬만하면 욕설을 입에 담지 않은 그였다.
이 상태에서 눈이 마주치면 분명 마음이 약해질 터라 헤베는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타고 온 말 고삐를 테이든이 붙잡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써서 상황을 모면하려는데,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하기 전 망설임이 들었다.
헤베는 테이든이 울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조그만 뒤통수에서 망설임을 읽은 테이든이 얼른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헤베가 참지 못하고 테이든을 돌아봤을 때, 보라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한 상태였으며 입술은 울음을 참듯이 꾹 다물어져 있었다. 테이든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일을 겪은 사람처럼 가련하고 처연했다.
“헤베….”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 헤베의 고운 미간에도 주름이 만들어졌다.
울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차가운 말을 한 건 진심이 아니라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테이든의 울망거리는 눈은 헤베를 직시했지만 헤베는 그 시선을 자신 있게 마주치지 못했다. 대신 보수 공사 중인 마법사의 탑을 보면서, 앞에 있는 이는 마물이다. 사람이 아니다. 테이든이 아니다. 그렇게 세뇌했다.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 마음 빨리 접어. 난 절대로 널 사랑할 일 없으니까.”
헤베는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죽어서도 말이야.”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테이든은 헤베를 붙잡지 않았다. 순간이동 마법은 어차피 붙잡을 수도 없는 종류였다.
혼자 남은 테이든은 헤베가 사라진 허공에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사랑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연인을 만들겠다고 하고.
성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워하던 이가 갑자기 성을 나가겠다고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동정을 품었을 애달픈 미청년은 없어지고 이곳에 있는 건 주위의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 같은 서늘한 남자였다. 헤베가 남기고 간 말이 기조차 죽어서 고개를 숙였다.
테이든의 턱은 단단히 경직됐고 입술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었다. 자색 눈동자에 어둠이 감돌았다. 잘 벼린 검날처럼 아주 차갑고 서늘한 어둠이었다.
***
헤베가 이동한 곳은 알현실이었다. 삼십대 초반에 불과하지만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수염을 기른 황제는 귀족들을 마주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헤베 뮨을 보고 매우 당황했다. 흑마법사의 무례한 행동에 기사들이 일제히 경계했고, 근위대장은 당장에 검을 빼 들었다.
“그만둬라. 헤베 뮨은 흑마법사이기 전에 세계를 구한 영웅이다.”
옛날부터 헤베에게 약했던 황제는 아주 너그럽게 그의 행동을 용인해줬다.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물린 황제가 물었다.
“알현을 취소한 거 아니었나? 모든 일정을 쉰다더니.”
“폐하, 저는 궁에서 나갈 겁니다.”
“…나간다고?”
“제가 지내기에 이곳은 아주 좁아서요. 흑마법을 익히고 나니 알겠더군요. 인간들 사이의 규율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헤베가 눈을 내리깔고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언젠가 전쟁터를 방문한 연극단에서 연기했던 사악한 흑마법사처럼.
“무슨 말인가. 자네도 인간이질 않나.”
“글쎄요, 제가 인간일까요.”
물론 인간이다. 헤게르미가 인정한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지만 헤베가 흑마법사인 이상 황제와 근위병들에게는 달리 들렸다.
“궁사 자리에서 내려가겠습니다. 그동안 흑마법사를 궁에 들이셔서 마음고생 심하셨죠. 이제 제 발로 걸어 나갈 테니 여기 계신 분들 모두 편히 주무세요.”
“자, 잠깐.”
황제가 급히 붙잡았다. 당장이라도 황좌에서 내려올 것처럼 엉덩이가 들썩, 들썩했다.
“테이든 공작은? 테이든 엔더웨이는, 자네를 혼자 보내려 하지 않을 터인데.”
“그 녀석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죠?”
“자네를 매우 따르지 않나. 자네가 나가면 테이든 공작도 나갈 터…. 헤베 뮨, 공작과 이 일을 협의하지 않았군.”
말하면서 스스로 깨달은 황제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너무 놀란 바람에 어정쩡하게 일어났던 황제는 다시 털썩 의자에 앉았다. 긴장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지. 흑마법사인 자네가 제 발로 떠나준다면 그건 무척 고마운 일이야. 하지만 테이든 공작과 협의하지 않는 이상 궁사를 관두는 것도, 성을 나가는 것도 허락할 수 없네.”
“하, 전 흑마법사입니다.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그 말에 따를 이유가 있습니까?”
“없네. 하지만 자네는 내 말에 따라주겠지.”
“…….”
이제는 헤베가 어이없을 차례였다.
저게 뭔 논리람?
말문이 턱 막혔다.
황제는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지만 사실 헤베가 더 누르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의 수하들이 와서 상태를 얘기해줬네.”
“그 흑마법사가 드디어 미쳤다던가요?”
“전쟁 후유증을 겪고 있다더군.”
“이게 왜 그렇게 돼요?”
황제는 갈색 눈의 마법사를 빤히 응시했다.
“자네가 전쟁에 투입된 게 몇 살인지 아는가.”
“몰라요. 그런 걸 누가 기억합니까.”
“여덟 살이었네.”
“그래서요.”
헤베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곁에서 이야기를 듣는 근위병들은 간단히 넘길 수가 없었다. 황제를 대하는 건방진 태도에서 놀란 게 아니었다.
열여덟도 아니고, 하다못해 열 살도 아니고 여덟 살.
오랜 전쟁으로 소년병은 흔한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여덟 살은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닌가. 근위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성을 지키느라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근위대는, 헤베 뮨이 어렸을 때부터 참전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확한 나이는 처음 들었다.
황제 앞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저자는 겉보기에는 말랑말랑하고 순진해 보이지만 비센티아를 배신한 흑마법사이다. 그럼에도 근위대장은 검을 집어넣었다. 도저히 헤베 뮨에게 검을 뻗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으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도 이해하네. 자네의 향후 일정은 모두 취소할 테니 그토록 좋아하는 하얗고 작은 것들과 함께 지내며 마음을 치유하도록 하게나.”
“잠깐만요. 외상 후 스트레스 같은 거 아닙니다. 진짜로 성을 나갈 거라고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황성을 나가 살겠다는 소리 쉽게 하면 안 되네.”
“세상 물정을 왜 모릅니까? 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인데요. 제 휘하에만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어요.”
“사과 한 알이 얼마인지는 아는가?”
“그야….”
헤베가 입을 다물었다.
“잡화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방법은?”
“…….”
“말을 빌리고 반납하는 방법은? 마차를 부르거나 숙소를 구하는 방법은 아나?”
“그, 그렇게 어려운 걸 폐하는 알아요?”
“물론이지.”
“…….”
헤베가 아무 말 못 하자 황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만 돌아가게. 자네와 달리 나는 일정이 가득 차 있거든.”
“아니, 잠깐만요.”
“대마법사를 배웅해주도록.”
황제가 손을 저었다. 근위병들이 다가와 팔을 뻗었다. 헤베는 그대로 알현실에서 쫓겨났다.
헤베의 모습이 사라진 후 근위대장이 물었다.
“폐하, 궁사가 정말로 여덟 살에 첫 참전 했습니까?”
“그래,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전 궁사가 빵으로 유혹해서 달랑 납치해 왔지.”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당시 부궁사가 아동 착취라고 비난하며 은거해버리기도 했다네. 두 번의 마물왕과 직접 전투하기도 했던 경험 많은 이라서 큰 손실이었지만 그 손실보다 여덟 살짜리 아이의 참전이 주는 이득이 더 컸어.”
근위대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제 딸아이가 지금 여덟 살인데, 어린애도 아니고 그냥 아기입니다. 아빠를 보면 좋다고 조르르 달려오다가 넘어지면 우는 아기. 아직 혼자 밥도 제대로 못 먹습니다.”
“그래서 다들 업어 키웠지.”
“선악의 개념도 없을 시기 아닙니까.”
“맞네. 솔직히 헤베 뮨의 정신 상태는 의심스러워. 자아정체성이고 뭐고 무엇도 제대로 형성도 안 된 시기에 전쟁터에 들어와 평생을 보냈으니 우울증이 생기는 것도 문제는 아니지.”
“뮨의 친위대가 싸고도는 이유가 있었군요.”
대부분 헤베 뮨보다 나이가 어린 ‘친위대’가 어째서 헤베 뮨을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애 다루듯 하는지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흑마법사만 안 됐다면 그의 희생을 충분히 보상해줬을 텐데….”
황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친이었던 선황은 헤베 뮨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를 치하할 때 ‘희생’이나 ‘노고’ 같은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전 궁사도 마찬가지였다. 몇 없는 실책만 크게 부풀리며 죄책감을 자극했고, 희생을 당연한 의무처럼 포장했다. 헤베 뮨은 희생인 줄도 모르고 희생해왔다.
전쟁이 끝나면 헤베 뮨이 가장 반짝반짝 빛났을 시기를 빼앗은 점에 대해 사죄하고 충분한 보상을 내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종전 직전 돌연 흑마법사가 되었고, 황제가 할 수 있는 보상은 그를 추방하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정말이지 답답한 상황이었다.
***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나 같은 건 막 쫓아내는군! 그래, 알아.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이지. 하지만 너무하잖아.’
황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헤베는 씩씩거리며 방 앞에 도착했다.
“아, 돌아오셨습니까.”
“술은 잘 마셨습니까?”
감시병들이 반갑게 물었다. 헤베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가 간신히 입을 다물고는 싸가지없게 무시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대로 문에 기댄 채 주저앉아버렸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걸 외상 후 스트레스로 해석하네. 이런 황당한 일이. 사과 한 알은 대체 얼마지?
마차는 항상 진이 불러줬다. 말이야 그냥 마구간에 가서 고삐를 붙잡고 데리고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 숙소는 그냥 돈 주고 잡으면 되지… 돈은 없지만, 보석을 내면 돼. 저번 생에서도 보석으로 사고 싶은 걸 다 샀어.
그는 이마를 짚은 채 한숨만 내쉬었다. 팔다리도 저리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다행히 가슴 통증은 없었다.
몸보다는 정신적으로 힘든 게 컸다. 테이든한테 그런 말을 내뱉었는데 다시 또 얼굴을 봐야 한다는 점이 특히. 녀석에게 못 할 짓이었다.
‘자기 말을 어기지 못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 황제의 얼굴을 배신감으로 물들여주겠어.’
굳게 다짐한 흑마법사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현기증 때문에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헤베는 현기증이 가신 후 옷가지와 보석 등을 챙기며 나갈 채비를 했다.
테이든도 기척을 읽지 못할 먼 곳으로 갈 것이다. 내가 죽어도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먼 곳으로. 사과 한 알 값 모르면 뭐 어때. 어차피 곧 죽는데.
가방이 없어서 커튼을 뜯고 그 위에 짐을 올렸다. 보자기처럼 잘 감싸서 묶고는 막 순간이동 마법을 펼치려 할 때였다.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사님, 계십니까?”
진이었다.
헤베는 무시했다. 발아래로 순간이동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급합니다, 궁사님. 어제 테이든 공작이 데리고 온 어린 마물들 상태가 이상합니다.”
헤베가 멈칫했다.
먕먕이가 찾아낸 하얀 솜뭉치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작은 심장을 콩닥거리던 아주 여리고 약한 존재들이었다.
“잠깐, 지금 뭐 하십니까.”
이어서 테이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테이든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헤베는 움찔했다. 다시 마력이 감돌았다.
“테이든 공작님, 궁사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헤베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
“하지만 어린 마물들에게는 궁사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싶다고 했어요.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요. 어렵겠지만.”
테이든의 목소리가 아주 울적했다. 마법사의 탑 앞에서 울먹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 헤베는 다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하얗고 작고 귀여운 새끼 마물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길래 테이든이 우울해진 걸까.
“이렇게 방 밖에서 떠드는 것도 싫어하실 거예요. 돌아가요.”
“예.”
“잠깐!”
헤베는 마법을 취소하고 벌컥 문을 열었다. 테이든에게 험한 말을 내뱉은 직후라서 얼굴 보기 민망했지만 심각한 문제인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뒤돌아 걷던 진과 테이든이 동시에 열린 문을 돌아봤다. 진은 무뚝뚝한 표정이었고, 테이든은 아련하고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헤베는 짐을 야무지게 든 채 물었다.
“먕먕이가 데리고 온 애들이 왜? 어떤데?”
“…그 짐은.”
진의 시선이 커튼으로 만든 보자기를 향했다. 헤베는 무시했다.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잖아. 걔네 어디 있어? 빨리 안내해.”
“궁사님, 대체… 입술은 또 왜 엉망입니까? 고민 있을 때마다 입술 깨무는 버릇 좀 고치십시오.”
“따라오세요, 헤베.”
진의 잔소리를 테이든이 가로막았다. 헤베는 테이든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과거 이맘때 헤베는 갑작스럽게 수도 외곽의 신전으로 외출한 적 없었고, 따라서 새끼 마물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죽을 운명이었던 녀석들을 먕먕이가 주워온 거라면? 고작 작은 미물 두 마리다. 그것 때문에 미래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뺙뺙거리며 우는 게 전부인 새끼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헤베, 괜찮다면 제게 그 짐을 주시겠어요?”
빠르게 복도를 걷는데 테이든이 조심스레 물었다. 헤베는 짐을 꼬옥 끌어안았다.
“싫어.”
“무거워 보여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안 무거워.”
최소한으로 짐을 쌌기 때문에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정말 무거웠으면 진에게 맡겼을 것이다.
‘아니, 정말 진한테 줄까.’
어차피 진도 자신에게 정떨어져야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진을 힐끗 보는데 갑자기 테이든이 앞을 가로막았다.
“헤베.”
테이든은 낮은 목소리로 헤베를 부르더니 돌연 무릎을 굽혔다.
“테이든!”
헤베가 경악하자 테이든은 한껏 가련하고 처량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저를 싫어하시는 거 알아요. 닿고 싶지 않은 마음도요. 그렇다면 싫어하는 제게 마구마구 일을 시키면 되잖아요. 귀찮을 정도로 심부름을 시켜주세요. 아예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지 말아요. 제발 제가 헤베의 짐을 들어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너무 애처로운 부탁이었다.
이게 뭐라고. 고작 아래층 마물들이 있는 방까지 가는 동안 짐 들어주는 것 가지고 목숨 걸린 것처럼 부탁해 오는 테이든의 모습에 헤베는 마음이 아프기까지 했다.
울망거리는 테이든 옆에서 진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작게 한숨까지 내쉬었지만 헤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짧은 고민 끝에 테이든에게 짐을 건넸다. 테이든은 밝아진 얼굴로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정말 고맙다며 인사해 오는 녀석에게 헤베는 얼떨떨하게 끄덕이기만 했다.
***
“궁사님.”
걱정 가득한 얼굴의 마우가 얼른 문을 열어줬다.
새끼 마물들이 머무르는 방은 같은 성의 한층 아래 있는 곳이었다. 헤베는 어제오늘 너무 혼란스러워 신경을 못 썼는데, 사려 깊은 테이든이 빈방 하나를 주고 마우에게 보살피라고 지시해놓은 것이다.
-먁!
헤베를 발견한 먕먕이가 서둘러 날아왔다. 웬만하면 잘 날지 않는데 정말 심각한 상황이긴 한 모양이었다.
헤베는 하얗고 폭신한 솜바구니로 다가갔다. 그 안에 하나로 뭉친 새끼 마물들이 눈도 뜨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짐을 내려놓고 마우에게 물었다. 헤베의 짐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마우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히 삐약거리며 잘만 돌아다녔는데 오후에 갑자기 눈도 뜨지 못하더라고요.”
“뭐 잘못 먹었나.”
“먕먕이 어렸을 때 먹였던 걸 그대로 먹였는데…. 궁의를 불렀지만 다 안 온대요. 마물이 무섭다고.”
“어쩔 수 없지.”
마물은 신관의 마법이 통하지 않으므로 불러도 소용없다. 궁의도 마물에 대해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다고 해도, 세상 어느 누가 인간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마물을 치료하려고 들까.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켜봐, 좀 보게.”
헤베는 요람 앞에 무릎 꿇고 앉으려 했다.
“잠깐만요, 헤베.”
바닥에 무릎을 대기 전 테이든이 빠르게 팔을 뻗어 가로막고는 작은 요람을 품에 들었다. 헤베의 시선이 요람을 따라왔다. 테이든이 요람으로 헤베를 유인하는 동안 진이 근처 의자에 푹신한 방식이 깔았다. 테이든은 헤베를 의자에 앉히고 요람을 안은 채 눈높이에 맞춰서 다리를 굽혔다.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고, 헤베가 워낙 둔한 데다가 새끼 마물들 상태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다.
편하게 앉은 헤베가 숨만 새액새액 내쉬고 있는 자그마한 새끼들한테 손가락을 대보니 체온이 무척 뜨거웠다. 감기라도 앓는 것 같았다.
-무웅.
먕먕이도 걱정되는지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수하들에게 털을 묻혀댔다.
2년 전 테이든이 먕먕이를 데리고 왔을 때도 심하게 체력이 저하된 상태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어린 새끼도 아니었고 자라면서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헤베, 좀 어떤가요?”
테이든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보기에는 감기 같은데, 마물도 감기를 앓아요?”
“마력 감기 같은 거야. 몸속에 마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면 이렇게 돼. 진, 따뜻하게 데운 수건을 가지고 와.”
“예.”
진이 빠르게 수건을 가지고 왔다. 헤베는 새끼 마물들의 몸을 수건으로 감싸 다시 모포 위에 뉘었다.
“이상해. 왜 갑자기 몸 안의 마력이 많아진 거지? 성장기도 아닌데.”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애들이다. 마물을 혐오하는 누군가가 일부러 마력을 주입한 것인가, 하는 의심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마우, 어제부터 여기에 들어왔던 사람들 누구, 누구야?”
헤베가 날카롭게 묻자 마우는 테이든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몇 명 없어요. 저와 진, 테이든 공작. 그리고 시종 두어 명 정도요.”
“그 시종들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아?”
“그랬으면 시종 안 하겠죠.”
“마물을 증오하는 사람이 시종인 척 들어온 걸지도 몰라. 분명히 누군가 일부러 마력을 주입했어. 눈도 제대로 못 뜬 새끼들이라도 마물은 마물이니까 증오스럽겠지. 물론 난 일반인이 마물을 귀여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증오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 경우는 테이든이 보살피라고 지시했는데도 이런 짓을 저지른 거잖아. 이게 뭐겠어. 날 겨냥한 거야.”
전 사령관의 피해망상이 시작되었다. 진과 마우가 눈을 마주쳤다. 반면 테이든은 헤베만 응시했다.
“사실 죽이고 싶은 건 나겠지. 이렇게 기지도 못하는 새끼들이 아니라 배신자임에도 잘먹고 잘살고 있는 기생충 같은 흑마법사를 해코지하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강하니까 상대적으로 약한 마물들한테 화살이 날아온 거야. 범인을 찾아내서 나한테 보내. 칼이든 뭐든 다 맞아줄 테니까!”
“헤베.”
헤베가 흥분하자 테이든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정하세요. 범인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테이든은 파르르 떨고 있는 헤베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면서 달랬다. 진은 발치를 돌아다니던 먕먕이를 헤베의 무릎 위에 올렸다.
-미양.
먕먕이는 눈치껏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렸다. 마우는 따뜻한 차를 들고서 대기했다.
헤베는 수하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깨에서부터 온기가 퍼져나갔다.
새끼들에게 해코지 한 자에 대한 분노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에 정신이 팔렸다.
마음이 아파 왔다. 그렇게 차갑게 대했는데도… 며칠 전도 아니고, 어제도 아니고, 바로 좀 전의 일인데 이 녀석은 자존심도 없을까.
헤베의 호흡이 안정되어갔다. 테이든은 헤베의 무릎 위로 올라온 먕먕이를 가리켰다.
“먕먕이가 아닐까요? 새끼 마물들을 보살피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마력을 주입했을지도 몰라요.”
“얘가?”
-매웅.
“과다한 마력을 주입하면 어떤 탈이 나는지 몰랐던 거죠.”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먕먕이는 새끼를 양육한 적 없으므로 위해주려는 마음에서 마력을 내뿜은 것이다.
“먕먕아, 너 사고 쳤어.”
-먀아아앙.
헤베가 툭 머리를 건드리자 먕먕이는 억울한 듯이 길게 울었다. 헤베가 동그란 배를 마구 간지럽혔다. 가만히 보던 테이든이 먕먕이를 데리고 갔는데, 그 와중에 헤베의 손등을 은근슬쩍 만졌다. 헤베는 눈치채지 못하고 진과 마우만 테이든의 파렴치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제 어떻게 해요? 마력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옆에서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계속 지켜봐 줘야 해.”
“마물을 봐줄 마법사가 있을까요.”
테이든이 침울하게 말하자 헤베도 심각해졌다.
요 솜뭉치들은 아무리 귀여워도 마물이다. 인간의 적. 아무리 거금을 준다 해도 지켜봐 주지 않을 것이고, 그게 맞다. 부궁사들에게 명령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아이들이 정상을 찾을 때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일주일 정도.”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일주일은 꼼짝없이 옆에서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네요.”
“응.”
헤베는 손가락으로 새끼 마물들을 쓸었다. 마물들은 온기를 찾듯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꼼지락거렸다. 헤베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을 나가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난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테이든이 무언가 결심한 어조로 말했다. 고개 들어 테이든을 보자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볼게요. 마법은 서툴지만 그 정도의 마력은 다룰 줄 아니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우가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테이든 공작님은 바쁘잖아요. 해야 할 일도 많고.”
“괜찮아요. 이 아이들의 생명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제 일정은 조금 미루면 돼요.”
“세상에. 그걸 다 미루면 일주일 후에는 정말 바빠질 거예요. 아무리 초월자라고 해도 체력이 부족할 텐데.”
마우가 말렸다. 왠지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듯 기계적인 말투였지만 헤베는 기분 탓이라 여겼다.
“테이든 공작은 할 일이 아주 많잖습니까.”
사이 좋지 않은 진까지 거들었다.
“전 정말 괜찮아요. 헤베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하세요.”
테이든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가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베는 탄식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 끔찍한 전쟁을 겪고서도 이토록 다정하고 상냥할 수 있냔 말이야. 아까 전만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 코끝이 시큰해졌다.
“네가 나설 거 없어.”
헤베는 일부러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옆에서 보살필 테니까 너는 네 일이나 해.”
“예? 하지만… 성을 나가신다고….”
테이든이 짐 꾸러미를 힐끗거렸다. 이렇게 배려심 깊고 착한 녀석을 눈치 보게 하다니, 양심에 찔려왔다.
“애들 건강해진 후 나가면 돼.”
“…안 나가진 않네요.”
응? 목소리가 묘하게 날카로운 것 같아 테이든을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테이든은 울상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더 강했다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테이든 엔더웨이는 너무 강해서 세상도 멸망시키는 사람이었고, 헤베도 그 모습을 목격했지만 지금은 그저 애틋하고 가련하기만 할 뿐이었다.
“네가 왜 죄송해.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야. 데려와 놓고 애들한테 신경 못 쓴 내 탓도 있어.”
일주일은 꼼짝없이 붙잡혀 있게 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 눈앞의 생명이 제일 중요하니까.
“헤베는 정말 다정하네요.”
누가 할 소리를. 헤베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참, 헤베가 앞으로 여기에서 머물려면 이걸 발라야 해요.”
테이든이 헤베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처음엔 주먹을 바르라는 줄 알았는데 잘 보니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헤베가 부드럽게 미소 짓는 테이든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자 그가 쥐고 있던 것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연고였다.
상처에 바르는 평범한 연고. 헤베는 연고라는 걸 알자마자 매우 놀라며 테이든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이걸 왜 가지고 있어? 어디 다쳤어?”
“…제가 다친 게 아닙니다.”
“마우, 너 다쳤어?”
놀라서 마우를 쳐다보자 마우가 손사래를 쳤다.
“멀쩡해요, 궁사님.”
“진?”
“저도 아닙니다.”
“그럼 누가?”
마우와 진, 테이든이 동시에 헤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시선의 방향이 얼굴의 조금 아래쪽에 있었다. 헤베는 그제야 자신의 입술이 엉망이라는 걸 자각했다.
이 녀석들이 다쳤을까 봐 솟구쳤던 걱정이 순식간에 꺼지고 탈력감이 찾아왔다. 어차피 죽는 처지에 입술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연고를 바르는 건 조금 우스웠다.
“이런 건 침 바르면 나아.”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이 새끼 마물들에게 헤베의 피 냄새는 아주 자극적일 거예요. 치료해놓는 게 좋겠어요.”
가만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제가 발라드릴게요. 손 깨끗이 씻었어요.”
“싫어.”
헤베는 테이든을 사납게 노려봤다. 테이든의 콧잔등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아주 찰나였고, 곧 처량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제가-”
마우가 틈새를 노렸다가 테이든의 서늘한 기운에 깨갱했다. 테이든은 헤베 앞에서만 버림받은 강아지였다. 진의 경우에는 아쉽다는 눈빛으로 연고를 바라볼 뿐 욕심내지 않았다.
셋의 경쟁에 관심 없는 헤베는 이미 연고 뚜껑을 직접 열고 있었다.
치덕치덕, 연구를 입술에 아무렇게나 바르는 동안 내내 테이든은 처량한 시선을 보내왔다.
헤베는 연고를 바르며 테이든을 힐끔 쳐다봤다. 혹시나 해서 생각을 읽는 마법 주문을 외워봤는데 마력이 모이지 않았다. 칼같이 하루에 한 번이었다.
아예 일주일간 이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진이 급하게 침대를 준비했고, 헤베는 가출하기 위해 챙겼던 짐을 풀었다. 테이든이 짐 푸는 걸 도왔는데 잔소리가 심했다.
“날이 추운 곳에 가게 될 수도 있는데 왜 얇은 옷만 챙겼어요?”
“더, 더운 곳에 가려고 했어.”
“앞으로는 단검 하나 정도는 준비하세요.”
“나 흑마법사거든.”
“커다란 가방에 담지 왜 커튼을 뜯었어요?”
“가방이 없어서.”
“…….”
“…….”
“보석은 좀 더 가지고 나가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지갑에 넣었어야죠.”
“지갑도 없는데.”
“…….”
왜인지 대화를 나눌수록 테이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튼 도움이 되는 조언들이긴 해서 헤베는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했다.
지갑도 하나 마련하고, 옷도 더 챙겨서 일주일 후에는 나가야지. 반드시!
***
야심한 시각. 황성의 깊은 곳에 일곱 인영이 모였다. 어둑어둑한 공간에서 그들은 원형 탁자에 촛대 하나만을 올려놓고 심각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제와 오늘 궁사님 상태가 정말 이상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적응하지 못한 모습은 계속 보이셨지만, 이틀간은 정말 이상해요.”
누군가의 말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격렬히 끄덕였다.
“맞아요. 갑자기 사람을 소개해달라질 않나, 성을 나가겠다고 하질 않나. 우울증은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왜 그럴까요.”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성을 나가서 어떻게 살겠다고.”
그들이 얘기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은 대마법사이자, 최연소 궁사이며 전쟁의 사령관이고 모든 마물이 두려워하는 존재, 헤베 뮨이었다.
흑마법사라는 길을 택했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는 영원히 위대한 영웅.
모인 이들은 진, 마우, 파와이, 밀리안, 지첸, 파르테. ‘뮨의 친위대’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헤베가 성을 나가겠다고 하는 건 문제 없습니다.”
그리고 한 명 더.
마지막 마물왕을 무찌른 신탁의 영웅 테이든 엔더웨이까지.
비센티아의 역사를 새로 쓴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각자 바쁘게 사는 그들이 이 야밤에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이틀간 헤베가 보인 이상한 언행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성을 나가는 게 문제없다니.”
“헤베가 몇 살 때부터 참전했는지 잊었어?”
헤베 뮨은 그들이 어화둥둥 업어 키운 대마법사였다.
지첸과 파르테를 제외한 모두가 헤베보다 나이가 어리니 업어 키웠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표현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헤베의 강함과 선함에 매료되어 수하가 되기를 선택했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공동 육아 중이었다.
헤베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마물과의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몰랐고, 사회적인 상식이 아주 부족했다.
상인과 돈을 주고받으며 물건값을 치르는 방법도, 음식을 먹는 순서나 격식 있는 의복을 입는 방법도 몰랐다. 헤베가 아는 것이라고는 부러진 뼈를 맞추는 방법, 마물의 목을 가장 간편하게 자르는 주문, 죽은 동료의 무덤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 같은 것들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 성을 나가서 어떻게 살겠다는 것인가.
“저도 같이 나가서 옆에서 보살펴주면 되니까 문제없어요. 헤베와 함께 성을 나가 사는 건 꽤 기대되네요.”
전쟁 직후 가장 황성에 필요한 존재는 테이든이었지만, 그는 헤베를 위해서라면 막중한 지위나 책임 따위 언제든 져버릴 수 있었다.
“그럼 나도 그 옆집에….”
그리고 그건 여기 모인 이들 모두가 그러했다. 다들 속으로 재산을 정리해 큰 집을 지을 궁리를 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무엇이지?”
“제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답니다.”
“그럴 리가!”
지첸이 테이블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눈치라고는 뮨치 만큼도 없는 녀석이 스스로 눈치챘을 리가 없어!”
그렇다. 그들은 아주 작고 하찮은 양을 뮨치 즉 ‘헤베 뮨 눈치’로 비유해온 지 오래였다. 예를 들자면 개미를 보고 ‘이것 참 뮨치만 하군요’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누가 언급했는지 말해주지 않더군요. 최근 헤베와 대면한 자들을 조사했는데 수상스러운 자는 없었어요.”
“그럼 대체 어떻게….”
지첸이 침음했고 테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촛불 하나만 켠 어두운 공간이었지만 서늘한 낯빛은 모두에게 보였다.
테이든은 대개 부드럽고 너그러웠으나 헤베와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칼날보다 차갑고 냉정했다. 때문에 모두 테이든 앞에서는 헤베에 대해 말조심했다.
“흑마법은 미지의 학문입니다.”
그때 진이 말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향을 주는지도 모릅니다. 정신에도, 건강에도.”
“하긴, 확실히 최근 식사량도 줄었죠.”
“궁사님이 피곤해하시는 모습을 자주 봤어요.”
“감자 수프도 소화를 못 시키더군.”
그들의 목소리에 걱정이 서렸다.
헤베는 티를 내지 않으려 하지만 모두가 조금씩 느꼈다. 점점 줄어드는 살과 창백해지는 낯빛이 헤베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말해줬다.
“흑마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나도 동의해. 하지만 그 분야의 일인자가 정보를 내어주지 않잖아.”
그 분야의 일인자가 바로 헤베 뮨이었는데, 헤베는 이들이 흑마법에 대해 물어오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즉각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 같았다.
“헤베가 마법사의 탑에서 연구일지를 가지고 왔어요. 제 눈에는 비어 보였지만 정말 비어있진 않겠죠.”
테이든의 말에 마법사인 파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지를 가져다주면 해석해볼게. 그 녀석이 보안 마법을 어느 강도로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고 강도가 아니라면 풀 수 있어.”
“일지는 제가 기회를 봐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진은 헤베의 방을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으니 물건 빼내기도 쉬웠다.
“정말 전쟁 트라우마인 건 아닐까요?”
파와이가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궁사님은 아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참전했으니까요. 여러분은 여덟 살 이전의 일을 기억하세요? 저는 그렇게 어렸을 때 일은 기억 안 나거든요. 그러니까 그분에게는 전쟁이 평생이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평화도 익숙하지 않고, 당장 마물을 죽이러 나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이상할 수 있어요. 상황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오지 못한 늦은 사춘기가 온 걸지도 모르고요.”
“그 말도 일리 있네요. 마침 정신을 갉아먹는다는 흑마법을 받아들이기도 했으니….”
헤베가 듣는다면 광분할 말이었다.
친위대는 헤베를 안타깝게 여겼으나 그 감정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헤베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약하거나 여리게 보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쟁터에서 헤베는 누구보다 잔인한 손속을 지녔고, 부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잔혹한 말살을 펼쳤다. 그런 자를 ‘여리다’고 표현한다면 죽은 마물들이 지옥에서도 억울해할 터였다.
“일단은 그를 성에 잡아놓는 것부터 해야겠지요.”
테이든이 나직이 말했다.
새끼 마물들을 이용해 잡아놓은 기간은 고작 일주일에 불과했다.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헤베의 이상 행동의 원인을 알아낼 만큼 충분히 긴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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